20. 거대 성기를 가졌었다는 역사 속 남성 6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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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를 왜 '고뿔'이라고 할까?>

* 정의

 성기를 두 개 가진 사람이 배우자를 찾지 못하고 죽어 귀신이 되어 콧구멍에 대고 욕망을 푸는 데서 감기의 증상이 생겼다고 하는 감기 유래에 관한 설화.

 

* 줄거리

 어떤 왕자가 있었는데 성기가 두 개였다. 왕자가 장가갈 나이가 되자 왕은 신하들에게 성기가 둘인 처녀를 찾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그런 처녀는 없었고, 결국 왕자는 죽었다. 죽어서 감기(고뿔) 귀신이 된 왕자는 생전에 채우지 못했던 욕망을 사람의 콧구멍에다 대신 풀곤 하였다. 감기에 걸리면 처음에 코가 막히고 코 막힘이 풀린 후에는 콧물이 흐르면서 숨을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감기 귀신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한다.

 

* 변이

 이 설화의 변이형은 짝을 찾는 주인공이 두 개의 성기를 가진 처녀로 바뀌는 형태이다. 어떤 대감이 성기가 둘인 딸을 시집보내고자 성기 둘 가진 총각을 찾는 방을 붙이는데, 냇물에 떠내려오는 성기를 주워 자신의 것과 크기를 비교하려다 몸에 달라붙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성기가 둘이 된 가난한 총각이 그 처녀와 혼인하여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이 설화는 다시 처녀가 과부로 바뀌기도 하고, 부자가 된 총각을 보고 이웃 총각이 따라 하려다가 성기가 코에 가서 붙는다는 내용이 덧붙은 유형도 있다. 그 밖에 감기에 걸렸을 때 "에이, 이놈의 개좆뿌리야."라고 외치면 감기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 분석

 이 설화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유형은 주인공의 욕망이 좌절되고 비극적 결말을 맞으며, 감기의 원인을 설명하는 특정 현상에 대한 유래담이라는 점에서 전설적 성격을 띤다. 이와 달리 둘째 유형은 조건에 맞는 배우자를 만난 주인공이 욕망을 실현하고 부자가 되어 행복한 결말을 맺는 전형적인 민담의 성격을 지닌다. 두 개의 성기를 가진 주인공이 왕이나 대감 같이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이거나 부유한 과부로 나타나는 것은 두 유형 모두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 의의

 예로부터 민속에서는 큰 성기를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여겼다. 설화를 보면 신라의 지증왕과 왕비,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과 그 왕비 역시 엄청나게 큰 성기를 지닌 인물들로 전해진다. <선문대할망> 같은 거인설화에서도 커다란 성기가 강조된다. 성기를 두 개로 과장한 이 설화 역시 모티프에서 이전 설화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 특히 주인공이 원하는 짝을 찾고 가족과 부를 함께 얻는 이야기는, 대형 성기를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인식했던 기존 신화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 성기 관련 신화의 원형적 상징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또, 코의 크기가 남근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믿는 속설, '개좆뿔'을 외쳐 감기를 쫓았던 민간 풍습에 대한 이해와 감기의 고유어인 '고뿔'의 어원을 밝히는 자료로도 참고할 만하다.

 

 

 성기 크기가 성관계에 끼치는 긍정적 영향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기술'이, 어떤 이는 '사이즈'가 최고라고 치켜세운다. 하지만 기술은 연마가 가능해도, 크기는 선천적이라 어찌할 수 없다.

 사람들이 큰 물건을 동경하는 경향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과거 남성중심사회에서 지도자의 성기 크기는 권력과 같았다. 따라서 일부로 왜곡하거나, 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컸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미신에 불과하다.

 

<거대 성기를 지녔었다는 역사 속 인물 6명을 소개한다.>

 

➀ 대물왕 지증왕(智證王, 437~514)과 대물왕비 연제부인(延帝夫人)

 신라 제 22대 왕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은 한 척(尺) 다섯 촌(寸)(약 40cm)나 되는 남근의 소유자였다. 신붓감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한 신하가 적합한 베필을 소개했는데, 이 여성은 키가 일곱 척 다섯 촌(약 220cm)에 달했다. 모든게 다 큰(?) 여성이었던 것이다.  

 사학자들은 당대 학자들이 지증왕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성기 크기를 과장했다고 보고 있다.

 

22대 왕 지증왕(智證王) 설화

 지증왕 설화는 신라의 제22대 왕인 지증왕(智證王, 437~514, 재위 500~514)에 대한 설화이다.

 

* 줄거리

 신라 제 22대 지증왕은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옥경(玉莖)을 가진 임금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옥경이란 남성의 성기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지증왕의 옥경은 무려 1척(尺) 5촌(寸, )로 요즘 수치로 환산하면 약 45cm라고 한다. 그의 독특한 신체 덕분에 웬만한 여성과의 관계는 거의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전국 방방곳곳을 수소문한 끝에 키가 7척 5촌(약 2m 25cm)나 되는 배필을 찾아 궁중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법흥왕(法興王, 487~540)의 어머니 연제부인(延帝夫人)이라고 전해진다. 이리하여 자손을 낳고 대를 이을 수 있었다고 한다.

 

* 의미

 삼국유사에 담긴 기록이지만 약 40cm가 넘는 성기로 정상적인 성관계는 물론이고 거동마저 가능했을지 의문을 갖는다. 이에 역사학자들은 다른 시각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지증왕의 성기의 크기는 바로 당시 강력했던 왕권과 결부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지증왕 때 이르러 신라가 이사금, 마립간 등 기존 임금의 칭호를 버리고 중국과 동등한 '왕'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즉, 지증왕이 남긴 위대한 업적과 강화된 권력을 표현하기 위한 설화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 전해오는 이야기

 마립간 시대의 마지막 통치자였던 그는 법흥왕 시대 신라 도약의 기반을 마련해 준 군주이기도 했는데 사찬의 <삼국유사>에서는 그가 무엇보다 그 '음경'으로 상징화된다.

 그의 성기가 한 척 다섯 촌, 즉 약 45cm의 '비범한 사이즈'라서 마땅한 배필을 얻지 못하다가, 커다란 똥덩어리를 누운 것으로 봐서 키가 일곱 척 다섯 촌, 즉 약 2m 25cm나 되어 음부도 그만큼 클 모량리(경북 경주시 건천읍) 여성을 어렵게 찾아내 왕비로 삼았다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의 지증왕은 순장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 행정망을 정리하고 우경을 권장하는 등 권농에 힘쓰고 '신라'라는 국호를 제정한 모범적인 유교적 통치자일 뿐이다.

 물론 그가 '몸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다'는 신체 특징도 기록됐지만 더 이상 이야기가 나아가지 않는다.

 김씨 왕실의 방계에 속해 정통성이 약했던 지증왕으로선 신라인들이 가장 숭상했던 '성의 능력'을 과시해서라도 위상을 높여야 하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던 걸로 이해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신라적인'이면서 독특한 내용으로 고대사회의 성적 개방성을 배울 수 있는 얘기로 전해진다.

 

 

 

노애(嫪毐, ?~기원전 238년)

 춘추전국시대 말기 진나라 사람이다. 환관이었지만, 꾀를 내 거세를 피한 뒤 시황제(진시황) 영정의 생모 조희(趙姬, 자초부인(子楚夫人))와 밀통했다. 조희 사이에 2명의 아이를 두었다.

 사서에 따르면 노애는 크고 단단한 성기를 갖고 있었다. 발기한 성기로 오동나무를 꽂은 수레바퀴를 빙글빙글 돌렸다고 한다.

 노애는 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영정에게 처형당했다. 조희 사이에 2명의 아이 또한 죽임을 당하였다.

 

 노예(嫪毐)는 진나라 시대의 인물로 '노대'라고도 불렸다.

 전국시대 진나라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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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위 화류계 스타였는데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남성의 심볼이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주변 여자들이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늘 소망하였고, 직업없이 지냈던 그는 그런 자들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면서 늘 풍족하게 먹고 살았다. 주특기는 무거운 오동나무제 수레바퀴를 자신의 것으로 꼿꼿이 세워서 돌아다니는 것으로 마음먹으면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반나절이고 간에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진왕 정의 어머니인 왕태후 조희여불위와 사통하고 있었는데, 여불위는 언제 들킬 지 모르는 불안한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자신의 대타로 노애를 태후에게 소개시켰다. 물론 장성한 남자는 왕이 아니면 궁에 상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염을 몽땅 뽑아 환관으로 위장한 후 입궁하였고, 점괘를 조작해 진왕의 눈에 띄지 않는 옛 수도이자 수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옹 땅으로 거처를 옮긴 후 둘은 마음껏 관계를 맺었다. 불륜 상대라는 게 알려지지 않은 데다 태후의 최측근으로 늘 붙어 있었기 때문에 열후에 봉해져 권세를 누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잘 이어졌으면 모를까 태후는 아이를 둘이나 낳게 되었고, 허파에 바람이 솔솔 들어간 노애는 자기가 낳은 이 아이를 진왕 정 대신 왕으로 세우려 꾀했다. 그러나 중간에 들키자 한 번 해보자는 식으로 옥새를 위조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불행히도 상대가 진왕 정, 즉 진시황이라 영 좋지 않았다. 반란은 대번에 진압당하고 노애는 당장 거열형에 처해져 조각난 시체는 진나라 곳곳에 조리돌림을 당했다. 태후가 낳은 아이들 또한 자루에 넣어져 몽둥이에 맞아죽고 태후는 유폐되었다가 중신들의 만류로 가까스로 사면받을 수 있었다.

 

 반란을 진압했을 때 진압했다는 의미로 그의 성기를 대문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거의 수준이었다고.

 

 원전에서 노애의 특기는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단순히 들고 돌아다니는 것이었으나, 고우영 십팔사략에서는 더욱 업그레이드하여 빙글빙글 몇 바퀴고 계속해서 돌리는 기술로 거듭난다. 같은 작가의 열국지에서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소변을 보니 바닥재가 산산조각나기까지 한다. 그리고 세간에 퍼져 있는 어떤 속설의 영향인지 공통적으로 가 매우 크게 디자인되어 있다. 또한 환관으로 위장하여 입궁하는 장면에서는 그의 거시기를 잘랐다는 증거로 의 거시기를 잘라 걸어놓는다.

 서양에서는 은근히 중국의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Grigori Yefimovich Rasputin, 1869~1916)

 라스푸틴은 제정 러시아의 괴승으로 빈농 출신이다. 35살에 '편신교'라는 종교에 가입, 전국을 순례하며 농민들에게 '성자'라고 불렸다.

 라스푸틴의 명성이 높아지자, 러시아 왕궁도 그를 주목했다.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이 앓던 혈우병(피가 안 굳는 병)을 고쳐 왕가의 신임을 얻었다.

 라스푸틴은 거대한 성기로 유명했다. 발기하지 않고도 30cm가 넘었다고 한다.

 라스푸틴은 1916년, 그를 견제한 귀족들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성기는 사후 보존 처리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자연사 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 요약

 라스푸틴은 혈우병을 앓고 있던 러시아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의 병세를 호전시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궁정에서 총애를 받으며 세력을 휘둘렀다.

 

 

 농부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노비흐는 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글을 몰랐으며 방탕한 생활로 인해 러시아 말로 '방탕한 사람'이란 뜻의 '라스푸틴'이란 성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수도원에서 지낸 후에 결혼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방랑벽은 계속되어 그리스의 아토스 산, 예루살렘 등지를 떠돌며 환자를 고치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으로 영적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1903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간 그의 비범한 치료 능력은 당시 궁정 사교계에 유행하는 신비주의 분위기에 부합되면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황실에도 소개되어 10여 년에 걸쳐 황제의 집안과 국정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러시아 시베리아 튜멘 근처 포크로프스코예에서 출생.

 18세 때에 개종한 것으로 보이며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내는 베르호투레에 있는 수도원으로 가 그곳에서 흘리스트(고행자) 종파를 알게 되었다. 그는 흘리스트 신앙을 왜곡해 인간은 '신성한 냉정함'을 느낄 때 신에게 가장 가까이 갈 수 있으며 이 상태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랫동안의 방탕 뒤에 느끼는 성적 소진(性的消盡)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세웠다.

 

 그는 수도사가 되지 않고 포크로프스코예로 돌아왔으며, 19세 때 프로스코비아 표도로브나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결혼생활도 그를 붙잡아두지는 못했다. 그는 집을 떠나 그리스의 아토스 산, 예루살렘 등지를 떠돌며 농민들의 헌금으로 생활했고, 환자를 고치고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으로 영적 지도자(starets)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렇게 떠돌다가 마침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갔고(1903)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교의 장학관인 테오판과 사라토프 주교 헤르모겐의 영접을 받았다.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정 사교계에는 신비주의와 비술(秘術)이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눈이 빛나고 비범한 치료 능력을 가졌다고 하는 이 지저분하고 단정치 못한 방랑자는 사교계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1905년 황실에 소개되었으며, 1908년 황태자의 출혈소동이 또 한차례 벌어지고 있을 때 황궁으로 불려갔다. 그는 소년의 아픔을 달래는 데 성공했는데 최면술을 쓴 것으로 추측된다.

 

 황궁을 떠나면서 황제와 황후에게 그 소년과 왕조의 운명은 자신과 피할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로부터 10여 년에 걸쳐 황제의 집안과 국정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가족들 앞에서는 계속 겸손하고 신성한 농부의 모습을 보였으나 궁정 밖에서는 다시 예전의 방탕한 행각에 탐닉했다. 그는 자신과 육체적으로 접촉하면 정화(淨化)와 치료의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설교하며 정부(情婦)들을 얻었고 또 많은 여자들을 유혹했다. 그의 행실에 관한 얘기가 니콜라이의 귀에 들어갔을 때, 황제는 그가 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비난한 사람들을 러시아의 오지(奧地)로 좌천시키거나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1911년에 이르자 라스푸틴의 추잡한 행실은 모두에게 알려졌다.

 총리 P.A. 스톨리핀은 황제에게 그의 비행(非行)에 관한 보고서를 올렸다. 결국 황제는 그를 추방했으나, 알렉산드라는 몇 달도 안되어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아내를 화나게 만들고 싶지도, 아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던 황제는 앞으로 라스푸틴을 비난하는 말들을 무시하기로 했다. 라스푸틴의 권력은 1915년 이후 절정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중 니콜라이 2세가 직접 군대 지휘를 맡아(1915. 9) 전방 부대로 떠나며 황후에게 러시아의 내정을 맡기자 라스푸틴은 그녀의 개인 고문역을 맡았다.

 

 그는 교회 성직자 임명부터 각료 선출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력을 행사했으며(그는 종종 무능한 기회주의자들을 뽑았음), 때로는 군사문제에도 개입해 국가에 해를 입히기도 했다. 어떤 특정 정치집단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전제정치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맞섰다.

 

 그를 죽임으로써 러시아의 재난을 막아보려는 시도가 몇 차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침내 1916년 펠릭스 유수포프 공(황제의 조카사위), 블라디미르 미트로파노비치 푸리슈케비치(두마 의원),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황제의 사촌)을 포함한 극보수파 무리가 그를 제거하고 추문에 싸인 군주제를 구하기 위해 암살을 모의했다. 12월 29~30일(구력 12. 16~17) 밤 라스푸틴은 유수포프의 집으로 초대되어 독약이 든 포도주와 차, 케이크를 먹었다.

 

 그가 죽지 않고 멀쩡하자 놀란 유수포프는 총을 쏘았다. 라스푸틴은 쓰러졌다가 일어나 앞마당으로 도망쳤고 이번에는 푸리슈케비치가 다시 그를 쏘았다. 이렇게 해서도 죽지 않자 그들은 라스푸틴을 묶어 네바 강의 얼음 구멍에다 처넣었고 결국 그는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살인사건은 전제정치 원칙을 고수하겠다는 알렉산드라의 결심을 더욱 굳히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지만 몇 주일 뒤 제국의 모든 체제는 혁명에 휩쓸려 쓰러졌다.

 

 

경덕왕(景德王, ?~765)

  신라 제 35대 왕이다. 돈 대신 땅을 월급으로 주는 '녹읍제'를 부활하고, 중앙행정체계를 정비했다.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제 35대 경덕왕(景德王)은 옥경(玉逕)이 커서 8촌(寸)(약 24cm)이나 되었다. 지증왕과 같은 이유로 적절한 짝이 없어 애태웠다고 한다. 아들이 없어 왕비를 폐하고, 다시 후비(경수태후)를 맞이 하였다. 그렇지만 아들이 없어 걱정이 되어 당시 신라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인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부탁하기를, 상제(上帝, 하늘의 황제)에게 간청하여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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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훈스님이 하늘로 가서 상제에게 아뢰니, 상제가 딸을 원한다면 될 수 있지만 아들은 안된다고 하였다.

 표훈스님이 경덕왕에게 그렇다고 말하니, 경덕왕은 다시 간청을 하여 꼭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표훈스님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 상제께 부탁을 하니, 상제가 꼭 원한다면 그렇게 해 줄 수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나라가 위태롭게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상제가 표훈스님을 불러 하늘과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엄연한 구분이 있는데, 대사께서 마치 이웃 드나들 듯이 하니, 다시는 다니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덕왕은 표훈스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라가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만 낳으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경덕왕은 아들을 낳게 되었고, 나라에는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위태롭게 되었다고 한다.

 

 이 아이가 바로 주색잡기에 능했다는 신라 제 36대 왕 '혜공왕(惠恭王, 758~780, 재위 765~780)'이다.

 

 

지아코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 1725~1798)

 이탈리아 출신 문학자이자 '바람둥이'의 대명사다. 대단한 여성편력가였다.

 일찍 성직자가 되었으나 추문에 의하여 투옥, 후에 법률을 배우고 유럽 각 나라 궁정에 출입, 기괴한 생애를 보냈다. 취미가 풍부한 재사로서, 파리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기도 하였으며, 만년에는 보헤미아에서 옛 벗 발트슈타인의 사서(司書)를 했다. 프랑스 말로 쓴 《회상록 Mémoires, 12권, 1826∼1838》은 초인간적 엽색 생활기로 유명하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을 아는 데 귀중한 기록이 되었다. 또한 5부로 된 공상소설 《20일 이야기 Icosameron》(1888)는 쥘 베른의 《지저(地底) 여행》의 선구적 작품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성편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유부녀, 귀족, 수녀와 심지어 친딸에게까지 추파를 던졌다고 전해진다.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던 카사노바는 40대 중반 발기부전 등을 앓아 성기능을 상실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거대한 성기의 보유자였다.

 다만, 그가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릴 수 있었던 이유는 성기가 아닌 여성을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였다고 한다.

 

 

그레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emkin)

 18세기 제정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1729~1796)의 궁정 대신이었다.

 가장 유명한 정부였던 포템킨은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었다. 여제보다 열살 연하였다.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와 연인 사이였던 그레고리 포템킨도 알아주는 대물이었다. 러시아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포템킨'이 바로 이 사람이다.

 

예카테리나 2세와 그레고리 포템킨

 그레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emkin), 18세기 제정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1729~1796)의 궁정 대신이었다.

 가장 유명한 정부였던 포템킨은 러시아군 총사령관으로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었다. 여제보다 열살 연하였다.

 

*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II, 1729.5.2~1796.11.17)

 프러시아(프로이센)의 작은 공국의 공주였던 그녀는 14세 때 러시아 황실에 들어왔다.

 남편인 표트르 3세(Peter III)는 장난감 병정 놀이에만 열을 올리는 정치적 저능아였다.

정치에 죽을 쑬 뿐만 아니라 자신을 몰아내고 정부를 황후 자리에 앉히려 하자, 왕실 경호대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키고 황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황제의 정치적으로 명석하고 영리함을 러시아 사회도 반겼다.

 그녀는 계몽사상가 볼테르에 경도되어 계몽군주임을 자처하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으며 사회 각 층의 대표를 소집해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반면, 농노제를 유지하고 여러 정부(情夫)를 거느리며 이들에게 국정의 요직이나 봉토를 하사하기도 하고 사치와 향락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했다.

 사실 포템킨 빌리지의 어원인 포템킨 공도 그녀의 정부 중 한 사람으로서 여러 고위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포템킨이 거친 직책 중 최고위직은 예카테리나 황제가 새로 합병한 지역인 '뉴러시아(우크라이나)'의 지사직이었다. 뉴러시아는 당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크림반도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포템킨은 이 지역을 풍요롭게 탈바꿈시켜 황제의 사코자 했다.

 

 포템킨 촌락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군주인 예카테리나 2세(캐서린 2세)는 새로이 러시아에 편입된 우크라이나에서 자신의 통치가 성공했음을 확인해 보려고 했다. 높아진 러시아의 국격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어 했다. 1787년 여제는 화려하게 치장한 신복들과 외국대사들을 대동하고 화려한 갤리선을 타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 내려갔다.

 우크라이나 평원을 바라보며 여행을 즐기던 외국대사들은 깜짝 놀랐다.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 강 주변에는 꽃장식과 개선아치를 갖춘 아름다운 촌락들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촌락에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활발한 상거래, 번성하는 모습이 있었다. 여제와 외국대사들에게 새로 편입된 우크라이나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유토피아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사실은 여제의 애인이었던 포템킨 공이 급조해서 만든 무대장치였다.

 이른바 ‘포템킨 촌락’이라는 연출된 세계를 통과하는 여행이었다. 환호하는 백성들은 사실 러시아 농노들이었으며, 촌락은 무대장치에 불과했다. 이들의 역할은 여제의 여행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환호하는 배우였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는 없다.

 포템킨과 황제의 은밀하고도 가까운 관계나 서신 또는 메모와 같은 사료를 종합할 때, 당시 포템킨의 적대 세력이었던 러시아 주재 작센(Saxony) 공사 헬비크가 포템킨을 폄하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조엘 레비, 서지원 역,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 (휴먼앤북스, 2010), p.188 참고)

 

 정치용어로 "포템킨 촌락(빌리지" 혹은 "포템킨주의"란 말이 있다.

 그말은 국민들과 외국을 기만하기 위한 정치적인 겉치레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남성적 매력으로 예카테리나2세의 총애를 받은 포템킨은 드물게 12년간이나 여제와 동거하였으며 둘의 관계가 시들해지자 스스로 뚜쟁이를 자처하여 여제의 애인들을 직접 고르는 역할을 맡는다. 4차에 걸친 애인 선발 시스템도 그가 만든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이후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 등 남부 러시아 전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자리까지 승진한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전까지 약 20명의 정부를 두었으며, 애인을 갈아치운 뒤에도 옛 정부들의 처우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애인인 상태에서 정부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하면, 관대하게 재물을 내려 떠나가게 했다.

 

 헨리 8세나 루이 15세 같은 유럽 왕들이 정부에게 싫증이 나면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목을 자르거나 수도원에 보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사생아들도 모두 똑같이 신분을 보장해주고 재물을 내린 덕분에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

 

 사후에 예카테리나 2세의 업적은 인정하지 않고, 남성 편력만 부풀려 '색을 밝힌 악녀'라고 악의적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성 군주들의 행태와 비교하면 여제의 사생활은 몹시 당당하고 떳떳하게 느껴진다.

 여러모로 보아, 그녀가 보기 드문 '여걸'이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러시아 혁명의 동기의 하나가 되었던 전함(戰艦)을 포템킨, 그 이름으로 명명한 것을 보아도 비록 예카떼리나와의 염문속에 살았던 포템킨이지마는 러시아제국의 영웅이었던 것 같다.

 

  전함 포템킨(The Battleship Potemkin, 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 Bronenosets Potyomkin)

전쟁/드라마

상영시간 : 75분

개봉 1925:

감독 : 세르게이 M. 에이젠슈테인(Sergei M. Eisenstein)

주연(3) :

① 알렉산드르 안토노프(Aleksandr Antonov) 그리고리 역

② 블라디미르 바르스키(Vladimir Barsky) 골리코브 사령관 역

③ 그리고리 알렉산드로프(Grigori Aleksandrov) 길리아로브스키 역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은 장교들의 학대와 열약한 근무 조건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썩은 고기를 식량으로 사용한 사실은 그들의 반란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수병을 없애버리라는 장교의 명령에 포병들은 거역하고 수병과 포병은 힘을 합쳐 동지가 된다.

 전함을 완전히 장악한 이들은 승리감에 젖어 흑해 오뎃사 항구로 향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수병들을 환영하러 부두로 나온다. 한편 짜르의 명령을 받은 정예 코자크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에 반항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전함 포템킨에 탄 수병들을 환영하려 했던 시민들은 갑작스런 군대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다.

 수 많은 희생자가 나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수병들과 합세하여 봉기, 짜르의 군대와 싸우며 혁명의 대열에 서는데...

 

 

실제 있었던 포템킨 사건을 소재로 1925년에 소련의 영화 감독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 감독이 만든 러시아 영화. 몽타주 기법과 시퀀스 기법 등 현대 영화의 기초를 쌓은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영화에서 오데사 계단을 유모차가 위태롭게 굴러가는 장면은 두고두고 영화사에 길이 남아 《언터쳐블》 등의 여기저기서 차용된 명장면이며 영화제작에 대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라면 최소 한번은 필수적으로 보게 되는 자료이기도 하다.

Big Penis-The Battleship Potemkin-02.jpg

 

 다만 국내에선 소련 영화라는 이유로 금기시되어서 일본에서 공수한 비디오로 몰래 보던 시절도 있었다. 1992년 EBS(당시 이름은 KBS-3)에서 일요 명화 특선으로 방영하려다가 이런 사정으로 취소된 적도 있다. 그러다가 90년대 후반에는 정식으로 VHS 비디오가 발매되었다.

 

 프로파간다 영화들이 다 그렇듯이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굉장히 많은 부분이 다르니(포템킨 호에 반란이 벌어지는데 배안에서 신부가 나온다. 실제로 전혀 없던 사실이며 막판 엔딩도 확 다르다) 유의하도록 하자. 20년 전 반란을 일으킨 주모자인 펠트만은 이 영화에서 수병 하나로 나와 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성경원 박사의 '성경(性敬) 시대'] 피노키오 코처럼 쑥~쑥~

 

 짜리몽땅한 여자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도 수건으로 가리고 그것도 모자라 몸을 잔뜩 웅크리고 목욕탕 안으로 들어간다. 들어가자마자 수도꼭지 하나 맡으면 그날은 재수가 좋은 날이다. 앉아서 몸뚱이가 시뻘게질 때까지 때를 박박 민다. 그러다 눈에 들어오는 한 늘씬하신 분. 모델 같은 워킹으로 들어온 그녀는 몸에 비누칠만 살살 하고 하늘에서 내려온 샤워기에 우아하게 머리를 감는다. 같은 여자가 봐도 참 예쁘다.

 

 남탕은 늘씬한 거 다 필요 없다. 그저 팔뚝만 한 게 달려 있으면 그게 왕이다. 일명 라커룸 콤플렉스.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치작전부터 번데기를 수건으로 가리는 연막작전에 의기양양하게 돌아다니는 과시전술까지 신경전이 치열하다. 마치 수사자 갈기가 서열을 정하는 것처럼 성기 크기가 자신의 성적 능력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양 스스로 줄을 세운다. 그런데 슬프게도, 내 것은 내려다보니까 짧아 보이지만 남의 것은 전체를 다 보니까 더 크고 더 탐스럽게 보인다.

 

 굵고 긴 음경은 모든 수컷들의 로망이다. 영화 '친구'에는 극장 화장실에서 볼일 보며 "우아! 말이네 말"이라고 극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렸을 때 남자 아이들은 포르노를 보고 부러워(penis envy)하며, 또래들끼리 누구 것이 더 큰지 대보고 우쭐대기도 하고 비웃기도 한다. 크고 강해야 진짜 남자라는 강박관념과 종족 번식의 원초적 본능 때문에 무의식 속에서 대물을 꿈꾸며 슈퍼맨 콤플렉스를 느낀다.

 

 대한비뇨기과학회에 발표된 한국인 평균 사이즈는 평상시 길이 7.4㎝인 데 비해 발기했을 때는 길이가 12.7㎝로 확장되는 것이 정상이다. 크기로만 따지자면 백인은 15㎝, 흑인은 16㎝ 정도라서 우리나라 것이 살짝 작은 편이다. 하지만 그네 것은 크기만 크고 흐물거리는 데 비해 우리나라 남자들 건 딴딴한 강점이 있다. 여러 가지 골고루 맛본 여자들 말에 의하면 국산이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 게다가 국산도 큰 것은 크다.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지증왕은 자그마치 1자 5치(약 45㎝)였고, 경덕왕도 8치(약 24㎝)나 됐다고 한다.

 

 중요한 건 양보다 질이다. 물건이 우람하면 그 성능도 좋아서 여성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오해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섹스 앤 더 시티(sex and the city)'에 보면 침대에서 남자 친구와 뒹굴다가 극치감을 맛보고 실신하는 여자가 나온다. 그런데 그 실신시킨 주인공은 평균 미달된 볼품없고 초라한 물건을 달고 사는 남정네였다. 음경을 품을 질 길이는 대개 7∼14㎝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신경이 드문드문 있어 쑥 들어가 봤자 별 볼 일이 없다. 게다가 신은 공평해서 작은 건 일할 때는 더 많이 늘어나고, 큰 거는 놀 때나 일할 때나 별 차이가 안 나 최일선에서는 평준화된다.

 

 작은 고추를 가진 남자는 보통 자신감을 상실하고 주눅이 들어 성생활에 문제가 생기기 쉽다. 우울증이나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회생활에도 소극적이 되기 쉽다. 기능에 문제가 없는데도 열등감을 느끼다 못해 발기부전이 되거나 고민하다 수술로 해결하는 이도 많다. 부부싸움 끝에 쥐방울만 한 물건으로 남자 행세하려 든다는 아내 핀잔에 실의에 빠졌다가 수술하고 새 인생을 찾은 이도 있고, 자기 것이 작다고 느껴 평생 목욕탕 한 번 안 간 남자, 평생 여자 앞에서 알몸을 보인 적이 없거나 결혼을 못 한 남자, 군대 가면 노출된다고 떨거나, 죽은 뒤 사람들이 볼까 봐 수술하는 웃긴 남자도 있다.

 

 이래저래 음경의 크기는 큰 의미가 없다지만 '애걔!'보다는 '와우!'가 낫긴 하다. '와우'가 아닐지라도 실망하고 핀잔하는 대신 두 손으로 남편 보물을 정성스레 쓰다듬어주다 보면 어느새 피노키오의 코처럼 자라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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