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만든 7대 불가사의

1. 중국 만리장성(萬里長城

 "不到長城非好漢(만리장성에 가보지 않으면 호한이 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은 진의 강력한 통일제국체제가 낳은 상징적 산물이다.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5km쯤 떨어진 곳에 교통이 편리하다는 뜻인 "사통팔달"에서 이름이 유래한 "팔달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 만리장성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장성은 20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는 약 6,400㎞(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에 걸쳐 동서로 뻗어 있는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토목공사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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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해 지어졌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시베리아의 혹한으로 더 이상 북쪽으로는 진출할 수 없게 되자 남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자가 풍부한 농경지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만리장성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따라서 만리장성은 단순히 군사적 침략을 막기 위한 방어막인 동시에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문화를 구분하는 경계선의 역할도 했다.

 오늘날 말하는 장성은 명나라에 지어진 것으로, 서쪽 감숙성의 가욕관(嘉浴館)에서 시작하여 요녕성 압록강변에 이르는 635km 길이의 성벽이다. 그리고 만리장성에 설치되어 있는 가드레일과 케이블카는 좀 더 편하고 색다른 여행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이제는 흘러간 역사의 자취가 된 장성은 세계 7대 건축물에 꼽힐 정도로 세계적인 유적지이다.

 또 만리장성은 이른바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 거대한 명성을 만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던 사람들이 일을 하다 죽으면 그 자리에 묻혔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현재 개방되는 바다링[八達嶺(팔달령)] 근처의 장성은 높이 8.5m, 두께는 밑부분 6.5m, 윗부분 5.7m이며, 위에는 높이 1.7m의 연속된 철자형(凸字形) 담인 성가퀴[城堞(성첩)]를 만들고 총안(銃眼)을 냈고, 120m 간격으로 돈대(墩臺)를 만들어 군사의 주둔과 감시에 이용하였다. 오른쪽이 왼쪽보다 완만하여 오르기가 다소 편하다. 청나라 때에는 군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몽골과의 정치적 경계에 불과하게 되었다.

 

☞ "하루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진나라 시절, 각 가정마다 힘 쓰는 남자들은 차출되어 만리장성의 부역으로 끌려가야했는데, 어느 마을에 갓 결혼한 신랑이 만리장성 공사장으로 끌려 가게 되었다. 신부는 남편이 돌아 오기만을 학수 고대했지만 시간이 가도 소식이 없었다. 어느 날, 이 마을을 지나던 나그네가 이 집에 묶에 되었다. 너무나 아리따운 신부의 자태에 넋이 나간 나그네는 떠나지를 못하고 며칠을 묶다가 그만 어느 날 밤에 사고를 칠려고 했다. 하지만 의외로 신부가 덤덤했다. 신부는 기꺼이 나그네와의 하루밤을 허락했다. 그 대신 조건으로 편지 한장을 만리장성의 관리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루밤을 보낸 나그네는 길을 떠났고, 약속이 지키기 위해 신부의 편지를 전했다. 그런데, 편지를 읽은 난 관리는 난데없이 나그네를 붙잡아서 만리장성 노역장으로 끌고 가고 다른 남자 한명을 그냥 보내주었다.

 신부는 편지에 결혼한지 얼마 안되서 남편이 끌려갔고, 그래서 아이도 없이 여자 혼자 살고 있다며 나그네와 벌어진 일이며 남편을 위해 정절을 버렸다는 것..등등 구구절절 애절하게 사연을 적었다.

 그 편지를 읽은 관리가 감복을 해서는 나그네를 신랑대신 잡아두고 신랑을 집으로 보냈다. 그 관리는 나그네에게 말하기를 "너는 그 지고지순하게 정절을 지킨 처와의 순결을 하루밤이라도 가졌으니 충분히 그 처의 남편대신 일할 이유가 있노라"

 

 

 

2. 페루 잉카 유적지 마추피추(Machu Picchu)

 마추피추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대학 교수인 하이램 빙엄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서양 학자에 의해 발견 되기 전까지 수풀에 묻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마추피추를 "잃어버린 도시" 또는 "공중도시"라고 불리는데 공중도시라 불리는 이유는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밑에선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 이다. 마추피추는총면적이 5㎢으로 도시 절반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또한 마추피추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아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접근조차 어렵다. 마추피추에는 약 1만여명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정과 가파르고 좁은 경사면에 들어서 있어 스페인 정복자들의 파괴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유일한 잉카 유적이다. 정확한 건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측된다.이 곳에 태양의 신전, 산비탈의 계단식의 밭, 지붕없는 집, 농사를 짓는데 이용된 태양시계, 콘돌 모양의 바위, 피라미드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 마추피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다. 각 변의 길이나 몇 m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종이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히 붙어 있다. 젖은 모래에 비벼서 돌의 표면을 매끄럽게 갈았다고 한다. 가파른 산비탈에 계단식 밭을 만들고 여기에 배수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 곳이 세계 7대 불가사의중에 하나가 된 이유이다.

 

태양신전(Templo del Sol)

능묘위에는 태양의 신전이 있는데 이 곳은 완벽하게 연마해 놓은 자연석의 큰 바위 위에 세워진 반원형의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안쪽과 바깥쪽으로 가볍게 굽어진 탑이다. 이 탑의 아래에는 왕의 무덤이 있으며, 신전의 벽은 잘 다듬어져 있다. 그 안에는 2개의 창문이 있는데 각 구석에 하나씩 총4개의 구멍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또 하나는 남동쪽을 향해 있다.

 

 

능묘(La Tumba Real)

 

오두막 전망대(Viviendas de los Guardianes)

 

왕녀의 궁전(Aposento de la Nusta)

 태양의 신전 옆에 있는 2층으로 된 것이 왕녀의 궁전이라고 추측된다.

 

계단식 밭(Andenes)

계단처럼 끝없이 펼쳐졌다고 해서 붙여진 계단식 밭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엄청난 규모의 계단이 층층이 있는데 이 곳은 마추피추나 잉카의 길을 연결하는 곳에 약 5천명에서 만명정도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층층이 농작물을 경작하고 200종 이상의 작물을 생산했다.

인티와타나(Intihuatana)

 인티와타나는 해시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큰 돌을 깍아서 만들었다. 인티와나타 신전으로 더 가까이 가면 이 능선의 돌출된 부분이 나오는데 이 것이 해시계이다. 해시계라는 근거는 네모진 돌기둥의 모를 잇는 대각선을 태양이 동지에 통과한다는 것으로 정확한 근거는 없다.

콘도르의 신전과 감옥(Grupo del Condor)

 콘도르의 모양을 본따 만든 콘도르의 신전이 있고, 그 밑에 지하에는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어둡고 눅눅한 이 지하에서 죄수들은 죄에 따라 독거미에 의해 죽기도 하고 돌 의자를 이용해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3. 브라질 거대 예수상(Statue of Christ the Redeemer)

 코르코바도 언덕(Mountain of Corcovado)은 1931년 브라질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예수그리스도상이 완성되기 전부터 리오 사람들은 이곳을 리오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곳이다. Dom Pedro l세는 푸르게 우거진 경관을 통과하여 코르코바도의 정상까지 오르는 열차가 다닐수 있도록 만들라고 명령하였고 현재까지도 이 길은 당시보다는 현대화된 트램이 운행되고 있고, 주변의 숲도 아직까지 그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상은 높이가 30m이고, 좌우로 벌린 두팔의 너비도 28m, 무게 1145t에 이른다.

 

 그리스도상을 건립하겠다는 아이디어는 1850년대부터 있었다. 1889년 브라질이 공화국이 되면서 정교(政敎) 분리가 이루어져 성사되지 못하다가 1921년 시의 랜드마크 차원에서 건립 필요성이 다시 한 번 제기되어 추진됐다. 1926년 공사가 시작되어 5년 후인 1931년 10월 12일 오후 7시, 불꽃이 펑펑 터지는 가운데 그리스도상이 온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석상은 리우의 상징을 넘어서 브라질에도 큰 선물이 됐다. 독립 100주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다.

 

 공사는 브라질 엔지니어인 실바 코스타에게 맡겨졌다. 그는 우선 프랑스로 가 폴란드 출신의 프랑스 건축가 폴 란도프스키에게 상의 제작을 의뢰했다. 란도프스키는 스위스 제네바의 칼뱅 종교개혁기념비를 조각한 바 있는 종교 전문 조각가다. 아르 데코(미감과 기능, 장식 측면을 두루 접목시킨 20세기 전반을 풍미한 예술양식) 양식의 조각 몸체는 시멘트로 만들었고 외장에는 녹색 활석을 부착시켜 해가 진 후에는 어둠 속에서도 신비한 빛을 발하게 했다.

 

 예수 그리스도 상을 사진에 담으려면 거의 누운 자세에서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어야 할 정도로 크다. 동상의 내부에는 리오의 시내경관이 한눈에 들어올 뿐 아니라 코파카바나 해안과 이빠네마 해안의 유려한 곡선까지도 감상할 수 있는 15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이곳을 방문하려면 맑은날 오후 3~4시 정도가 가장 좋은데, 이때에는 도시에 황혼이 내려앉는 모습이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렇다고 구름이 가득한 날을 피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구름을 가르고 예수그리스도동상 뒤에서 솟아나는 태양은 코르코바도가 제공하는 절경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코르코바도 언덕 위까지는 스위스제 케이블식 등산열차가 운행되고 있으며, 코즈메베료 역에서 출발하고 있다. 등산전차 운행시간은 매일 08:00~18:40이고 약 20분 가량이 소요된다. 그리고 전차에서 내려서 동상까지 가려면 꽤 많은 수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너무 급하게 오를려고 하지말고 간간이 쉬면서 오르는 것이 좋고 높은 지역이어서 바람이 강하게 불어 모자가 날라갈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4. 멕시코 치첸이차(Chichen Itza)-치첸이사란 마야어로 '우물가의 집'이란 의미이다.

 칸쿤에서 205km 거리로, 3:30분정도 걸리는 유카탄 반도의 중앙에 있으며 마야 최대의 유적지이다. 칸쿤에서의 1일 관광이 가능하며 마야인의 천문학 기술을 보여주는 피라밋 엘까스띠요와 비취유물등이 볼거리이다. 피라밋의 내부를 매일 2회 일반인에게 공개하므로 시간을 맞춰서 가는 것이 좋다. 일일 관광 코스를 이용하면 점심을 포함하여 약 US$56 정도이다.

 Chichen Itza내에 있는 Ballcourt는 165m의 길이이며, Mesoamerica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Ballcourt에서는 Ballgame이라는 경기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종교 의식의 의미를 지녔다.

 두 팀은 경기장 벽에 높이 달아놓은 링에 고무공을 통과 시키기 위해 상대방과 경쟁을 해야 했는데, 지는 팀은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Ballcourt는 거의 모든 전-콜롬비아 (Pre-Columbian)유적지에서 발견되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Chichen Itza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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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l Castillo(The Castle)는 24m 높이의 피라미드이며, Kukulcan(마야의 Quetzalcoatl 신)을 위해 지어졌다. 완벽한 천문학적인 디자인을 갖추고 있는 이 피라미드는, 4면에 4개의 계단이 있으며, 계단들은 각각 91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맨 꼭대기 중앙에 있는 한 층이 더해져서 총 계단의 수가 365개가 된다. 4개의 계단은 45도로 상승하기 때문에 각 계단에는 사람들이 잡고 올라가도록 긴 쇠사슬이 놓여져 있다. 북쪽을 향하고 있는 계단 아래 부분에는 2개의 뱀 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Kukulcan을 상징하고 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작은 신전에는 Chacmool이 있는데, 이것은 반쯤 누워있는 조각상으로 배에는 돌그릇이 놓여져 있다. (돌 그릇에는 제물이 놓여졌을 거라고 추측된다.) 이 조각상은 거의 모든 마야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The Tzompantli 는 낮은 단으로 4면에는 이를 드러내는 해골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 단에는 제물로 바쳐졌던 희생자들의 머리가 놓여졌을 거라 추측된다.

 

세노테(Cenote)

 마야문명의 성스러운 샘이라는 세노테. 치첸이차란 말은 마야어로 '우물기의 집'라는 뜻으로 유카탄 최대의 성스러운 샘을 중심으로 도시가 번영을 한 것에서 어원이 유래되었다고 추정된다.

 유적에서 북쪽으로 약 200m들어간 숲속에 있는 큰 웅덩이로 마야인들은 이 곳에다 살아있는 제물들을 던져 넣었던 풍습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911년 미국영사 톰슨이 이 세노테의 바닥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21구의 어린이, 13구의 성인남자, 8구의 성인여자의 해골과 각종 금세공품등 유물이 발

견되었는데 그 중에는 남미의 콜롬비아와 파나마등지의 유물도 있어서 당시의 교역상황까지 증명한다. 이 출토품들은 현재 메리다의 역사인류학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축구장(Juego de Pelota)

 Chichen Itza내에 있는 Ballcourt는 165m의 길이이며, Mesoamerica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Ballcourt에서는 Ballgame이라는 경기가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종교 의식의 의미를 지녔다. 두 팀은 경기장 벽에 높이 달아놓은 링에 고무공을 통과 시키기 위해 상대방과 경쟁을 해야 했는데, 지는 팀은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게임은 두 팀은 생고무로 만든 공을 엉덩이, 팔꿈치, 무릅만을 이용하여 벽면 상부에 붙어있는 링에 통과 시켜 점수를 내는 식으로 승부를 겨루었다. 승리팀의 주장은 참수되어 제물이 되었는데, 이를 대단한 영광으로 여겼다. 그리고 전사의 신전에 조각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는 이 경기를 관람한 후 유럽에 돌아와 유럽인들 앞에서 시범경기를 펼쳐보였는데, 그 동안 유럽에서 사용되어 오던 딱딱한 나무공을 고무공으로 교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코트의 내부는 선수와 관중의 함성이 내부에서 울리도록 음향학적인 요소를 고려하여 세워졌는 데, 지금도 코트의 한 쪽끝에서 박수를 쳐보면 반대쪽 끝에까지 소리가 그대로 전달된다.

 

 

 

 

5. 로마 콜로세움(Colosseum) - 원형 경기장

 고대 로마 유적중 가장 큰 것으로 "거대하다"라는  뜻의  COLOSSALE에서 유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 극장.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혼잡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에 있는 인공호수가 있던 자리에 건설하기 시작해 80년 티투스 황제가 완공한 원형 경기장이다. 완공을 축하하기 위해 100일동안 경기가 열렸는데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며 이 곳의 명칭은 두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근처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인 클로소(Colossus)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다른 하나는 거대한 건물(콜로사레)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대 로마 시대 유적으로는 가장 규모가 크고 로마를 상징하는 원형극장으로 직경의 긴 쪽은 188m, 짧은 쪽은 156m, 둘레는 527m의 타원형이고, 외벽은 높이 48m로 4층이고 1층은 도리아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지름 86m를 중심으로 관객석이 방사식으로 배치 되어 있으며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는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하였다. 그리고 지하의 방에는 검투사와 사형수들이 갇혀있었는데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이 설치되어져 있었다.

 이 곳에는 5∼8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계단식 관람석이 방사상으로 설치되어 있다. 콜로세오는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에는 교회나 큰 건물을 짓기 위한 채석장으로 변해 외벽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는 등 몹시 훼손되었는데, 18세기에 교황의 명으로 그리스도 교도의 수난의 현장으로 수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되었다.

 이 경기장은 로마시대 가장 위대하고 웅장한 사적으로 손꼽을 수 있는 곳으로 검투사들의 격투시험장으로 또한 맹수들의 사냥 시합장으로 사용되었다. 로마 제정기 때에는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장내에 물을 채워 넣고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생명을 내건 검투사들의 싸움인 검투사의 격투, 맹수와 인간과의 사투와 맹수들끼리의 싸움 등이 시행되어 지는 처참하고 잔혹한 게임이 벌어지곤 했다고 한다.

 그 후 300년 이상이나 처참한 사투가 되풀이되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막을 내렸다. 현재는 통로와 방의 칸막이가 노출되어 있다.

 

 

 

6. 인도 타지마할(Taj Mahal : 세계문화유산, 1983)

 1983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인도의 대표적 이슬람 건축이다.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엄청난 건축비용이 들었지만, 이 하얀 대리석의 웅장한 사원은 한 연인을 향한 한 남자의 간곡한 기념비가 되었다. 1648년에 만들어져 현재는 우타르프라데시주(州) 아그라 교외 아그라성(城)에서 동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타지마할이란 '마할의 왕관'이라는 뜻을 가지며,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이 그의 사랑하는 왕비 뭄타즈 마할을 위하여 세웠다.

 사당은 좌우 대칭의 총대리석으로 높이 5.5m, 종횡 94m의 기단상의 중앙에는 높이 58m의 사당, 사우(四遇)에는 높이 42m의 첨탑이 세워져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길 중앙에 있는 일직선의 풀이 양 옆의 나무의 녹색을 비추고, 우유 빛깔의 대리석으로 된 돔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태양 광선은 대리석을 그물모양으로 투조(透彫)한 2중 장치를 통하여 돔 내부에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곳에 황제부처의 묘관을 안치하였다.

 1632년부터 22년 동안 국고를 탕진해 가며 완성하였고, 온갖 재보(財寶)와 미술 공예품을 한데 모아놓았다. 

 

 타지 마할은 이란의 쉬라즈(Shiraz) 출신인 우스타드 이샤(Ustad Isa)에 의해 설계된 것인데, 설계된대로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등지에서 동원된 장인들을 포함하여 총 인원이 2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건축 자재 운반을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었으며 라자스탄의 마크라나(Makrana)에서 채취된 대리석을 비롯하여 건물 안의 세세한 장식을 위하여 러시아와 중국 등지에서 수입 했던 여러 가지의 돌이 사용되었는데,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준비 과정과 장인들을 동원하여 만든 타지 마할의 건축비는 상당하였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1632년에 짓기 시작하여 22년만인 1653년에야 완공된 이 건물의 정면 마당에는 수로가 있는 전형적인 무굴(Moghul) 양식의 정원을 두고, 좌우로는 회교사원과 회당을 둔 구조로 되어 있다. 타지 마할의 뒤편으로는 야무나(Yamuna)강이 흐르고 있는데, 높은 축대로 쌓여진 야무나 강 쪽의 뒷면을 제외한 타지 마할의 삼면은 모두 높은 담이 둘러져 있다.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에 타지 마할로 들어서기 위한 1차 관문이 있고 이 1차 관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이 나오는데 타지 마할은 이 마당을 건너 또 다른 문을 통과해야 볼 수 있다. 타지 마할로 통하는 최종 관문으로 세워진 붉은 사암으로 된 문에는 아랍어로 코란(Kolan)의 경구들이 새겨져 있다.

 

 

사랑을 위한 불멸의 금자탑 타지 마할

 타지 마할은1629년 세상을 떠난 부인 뭄타즈 마할(Mumtax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무덤이다.

 타지 마할은 샤 자한(Shah Janhan)이 17년의 결혼기간 동안 14명의 아이를 낳고, 1629년 샤 자한 대제가 데칸고원에 원정 중이었을 때, 뭄타지 마할(Mumtax Mahal) 왕비는 브르한 프르촌에 가서 15번째의 왕자를 출산하던 중 38세의 젊은 나이로 숨지고 말았다. 절세 미인이었던 마할 황비가 샤 자한 대제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오다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 비보를 전해 들은 샤 자한 대제는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가 사랑하던 황비를 위해 무엇인가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귀국,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묘(墓廟)를 만들어 그녀의 넋을 위로하기로 한다.

 샤 자한은 부인을 기념하여 타지 마할과 같은 호화 분묘를 조성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수도를 델리로 옮기기로 계획하고 레드 포트(Red fort) 등과 같은 엄청난 공사들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여 국가가 흔들릴 정도로 제정을 휘청거리게 만든다. 이러한 실정을 구실삼아 막내 아들 아우랑제브는(Aurangzeb) 반란을 일으킨다.

 아우랑제브는 샤 자한의 총애를 받고 왕위를 이를 아들 다라 시코(Kara Shikho)를 포함한 모든 왕자들을 죽이고 1658년 아버지인 샤 자한에게서 왕위를 박탈한다.

 아우랑제브(Aurangzeb)는 샤 자한을 타지 마할이 마주 보이는 아그라 포트의 8각형 탑과 같은 형식의 구조물인 무삼만 버즈(Musamman Burj)에 가두게 되는데, 감금된 후 그 곳에서 타지 마할을 바라보며 죽을 때까지 지내야 했던 샤 자한은 1666년 78세에 죽어서야 부인 곁에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샤 자한은 부인 뭄타즈 마할을 위해 만든 무덤, 타지 마할과 비슷한 크기로 자신의 무덤을 타지 마할과 반대가 되는 검은 대리석만으로 야무나 강에 건너편에 짓고, 구름다리를 만들어 이 두 무덤을 연결하려는 계획이 었었다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지만 증명된 이야기는 아니다.

 타지 마할을 이루고 있는 하얀 대리석은 각도에 따라 다른 색감을 보여 아침과 한낮 그리고 석양 무렵의 느낌이 다르고, 달빛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르다. 달빛 아래의 타지 마할을 보고 싶다면, 부근에 있는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오르면 된다. 타지 마할 건물의 정면 마당에 있는 무굴양식의 정원 수로는 무더운 한낮에 아지랭이 현상을 볼 수 있게 만든다. 본관에 있는 두묘는 아무 것도 내장되어 있지 않고 본관 아래층에 뭄타즈 마할과 샤 자한이 나란히 묻혀 있다.

 

 

 

7. 요르단 고대도시 페트라(Petra)

 성경지명 "셀라" 에돔족의 도시. 이사악의 아들 에사오가 호리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도시, 모세 출애굽 당시 이 곳에 도착. 이 도시를 통과하고자하나 거절당해 사막대로로 우회함. 모세가 바위를 쳐서 솟아나게한 므리바 우물이 있음. 페트라 하룬산 정상의 모세의 형사제  "아론"의 무덤이 있음. BC 4C부터는 아라비아에서 온 나바태족이 이 도시를 장악하여 사막대상들의 무역을 관할. 모래로 만들어진 붉은색의 바이도시로 현재 수많은 건축물들이 남아 있음.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 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 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 (모세의 계곡) 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죤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페트라(Petra) : 셀라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36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라 불리우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셀라와 이곳을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

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기원전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기원전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테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기원전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 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 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시크 :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 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도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

 

》보고 : 페트라의 유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고' 라고 부르는 건물을 손꼽을 수 있다. 전면에 6개의 고린도식 석주가 서있는 높이 약 25m의 그리스식 건축 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건물 정면 제일 윗부분에는 항아

리 형태가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안들이 보물을 숨겨 놓았다는 속설이 전해져 [보고]라는 이름이 생겼다.

 

》수도원 :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서기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 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트라 건물들의 내부는 의외로 단조롭다. 돌을 파내 규모가 큰 직사각형 방들을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내부 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벽화가 없다. 그러나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기하학적 또는 물결 무늬들이 방 전체를 휘감고 있어 어떤 궁중 벽화나 장식보다도 현란하고 황홀하다.

 

》바로의 궁전 :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로마 원형 극장 :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가 40m에 이르는 로마 원형 극장은 2세기 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들었다. 이 극장은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여겨지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여겨진다.

 

》희생 제물의 언덕 : 원형 극장 뒷편 언덕으로 나바테안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산당이다.

 

》왕족 무덤 지역  

 

》열주로 :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두 사자 신전 : 험한 산허리에 위치한 이 신전은 출입구가 병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벽면에 사자 형상이 새겨져 있어 두 사자의 신전으로 불리운다.

 

 

 

8. 이스터 섬(Easter Island) 거석상(모아이(Moai)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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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태평양상의 작은 섬 이스터(Easter Island, 현지어 라파 누이)의 해변에 우뚝 세워져 있는 석조 거상군도 역시 누가 어떤 목적으로 건설했는지 신비에 쌓여있다.

 이스터 섬의 이름은 네덜란드 로헤벤이 1722년 부활절(Easter)에 섬을 발견한 데서 유래한다.

 현지 사람들은 이 섬을 육지를 의미하는 라파 누이(Rape Nui)라고 부르고 있다.

 이 섬에서 가장 가까운 대륙은 남미로 3,200km나 떨어져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가장 가까운 이웃섬은 2,250km나 떨어져 있는 외딴 섬이다. 이 섬은 화산이 폭발하여 생긴 폴리네시아 제도(諸島)에 속하며, 1888년부터 칠레에 소속되었지만 그곳과도 3,700km나 떨어져 있다.

 이 섬의 해안가나 산비탈에 수많은 석상에 세워져 있거나 넘어져 있는데, 그 수는 약 1,000개 정도라 한다. 이 석상은 '모아이(Moai)'라 부르고, 다리가 없고 머리와 몸통만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머리가 크고, 턱은 앞으로 내밀고, 귀는 길게 늘어져 있다. 아후 모아이는 납작한 코에 눈알이 있는 머리 위에 붉은 화산암 모자를 쓰고 있다. 이러한 석상은 대개 키가 3.5~4.5m에 무게가 20t 쯤되는 것이 많다. 가장 큰 것은 10m에 90t이나 되지만 산비탈에 제작하다만 것 중에는 20m가 넘는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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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터섬에 인류가 존재하게 된 것은 7세기경으로 추측하며 이러한 이스터 섬으로 건너온 사람들은 제단을 만들고 돌이나 나무를 조각한 신상을 모시는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나무보다 돌이 많은 이스터 섬에서는 모아이와 같은 석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1722년 네델란드 탐험가인 야곱 로헤빈이 처음 이스터섬을 발견했을 때 원주민은 온몸에 문신을 하고 귓볼에 구멍을 뚫어 잡아당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때 이곳은 불모지였다. 나무는 한그루도 없고 이 섬에 자라고 있는 47종의 식물중 쓸 만한 것은 2종뿐이었다고 한다. 동물군은 곤충류 외에 그 흔한 박쥐나 도마뱀 물새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닭만이 원주민들의 유일한 가축이었다. 이스터섬의 주민들은 항해에 능하기로 유명한 폴리네시아인이지만 항해 수단에 쓰인 배는 보잘 것 없는 카누뿐이었다. 이 카누로는 장거리 항해를 하기가 불가능 한 것이었다.

 더욱이 해안가에서 있던 2백여 개에 달하는 석상들은 높이가 최고 10m 이상에 무게가 82t이나 나가는데 그 선조들은 이 선상들을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으면 채석장에서 해안까지 이 석상들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거대한 석상을 일으켜 세우고 운반할 도구를 만들 목재도 밧줄로 쓸 만한 재료도 없는데 어떻게 거대한 석상을 세웠는가 불가사이한 일이다.

 기록과 분석으로 살펴 볼 때 모아이의 대부분은 라노라라크의 황색 응회암으로 제작되었다라는 것을 알수있는데 이러한 모아이 상의 운반 방법은 여러설이 있는데 주요 설로는 말로이의 '흔들이(진자)법' 파벨의 '냉장고 법' 그리고 반틸버그의 '썰매 법'이 가장 설득적 있는 설로 알려져있다.

 처음 발견할 당시 서 있던 거대한 석상들이 1백60년이 지난 1864년 유럽인들이 다시 방문했을 때는 모두 쓰러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남아 있던 2천여 명의 원주민들이 쓰러뜨린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석상들은 돌조각칼로 형태의 윤곽을 그리고 나서 돌도끼같은 얼굴 등 윗면을 조각한 후에 밑의 등쪽을 파낸 흔적이 남아있다. 이 석상의 형태는 각 부족마다 추장이나 성직자의 모습을 새긴 신상을 세워놓은 일종의 만신전(萬神殿)이라고도 한다. 그들은 죽은 영웅이나 조상의 혼백을 부르면 이 석상속에 들어와 살면서 부족이나 가족에게 축복을 내려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석상을 만들던 산꼭대기에는 밧줄을 걸었던 턱, 구멍, 홈 흔적이 남아있어, 이곳에 밧줄을 묶어 산비탈에서 끌어내렸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수 km되는 곳까지는 Y자형 썰매를 이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설에서는 ‘마나'라는 초자연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정해진 장소로 걸어갔다고도 하며, 화산폭발 때 하늘로 솟았다가 땅에 떨어진 것이라고도 하고, 산비탈에서 미끌어져 내려왔다고도 한다.

 

 초기 모아이는 2m 정도로 다양한 석재를 이용하여 둥근 얼굴에 둥근 눈을 한 실제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10세기경이 되자 모아이는 정형화되기 시작하고 오로지 라노라라크의 응회암만이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높이는 평균 4m로서 가슴을 벌리고 턱을 쑥 내밀어 큰 눈으로 마을을 쏘아 보는 모습은 수장의 위엄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후 땅딸막한 모습은 시대와 더불어 세로로 길게 변하고 양식화 대형화의 길로 접어 들었으며 이 무렵부터 붉은색 스코리어로 만든 푸카오를 머리 위에 얹은 것도 나타나게 된다.

 14~15세기는 모아이 제조의 전성기를 맞아 대형 모아이가 유행하였다고 한다.

 이후 테피토크라의 모아이는 제단에 세워진 최대 규모로 높이 11m 추정 무게는 80t에 달한다고 한다.

 16세기경에는 미완성이지만 21m나 되는 거석상까지도 만들어졋다고 한다.

 또 이 무렵에는 무릎을 꿇은 상이나 여성상과 같은 특수한 것도 나타났다고 한다.

 

 연구를 통하여 모아이의 제작은 대략 16세기 말까지였다고 판명되었다.

 수백년 동안 이스터섬 사람들은 약 900개의 모아이를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350개의 모아이가 라노라크의 채석장에 미완성품으로 방치되어 있다.

 16세기 말 모아이 석상이 갑자기 중단되었는데 왜냐하면 이스터 섬에서의 16세기는 수장에 의하여 섬이 통합되어 있던 시대로 다음의 내란, 수장제 시대로 들어가기 바로 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지배 계급인 유력자 사이에 긴장감이 증가하여 많은 사람들의 협력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모아이의 제작이나 견인이 허용되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세계 신(新) 7대 불가사의 후보로 꼽혔던 "모아이"의 미스터리 중 일부가 풀렸다.

 英연구팀 "700년전에 4t모자 어떻게 올렸는지 의문"

 남태평양에 위치한 칠레 이스터 섬(Easter Island, 현지어 라파 누이)의 거대 석상(石像) 모아이가 쓰고 있는 붉은 돌 모자의 비밀이 풀렸다고 인디펜던트 등 영국 언론이 7일 보도했다.(2009 09 07)

 영국 맨체스터대와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연구팀은 잿빛의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석상의 몸통과 달리 붉은 화산암재로 만들어진 모자가 어디에서 만들어져 어떻게 운반됐는지 확인됐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화산 분화구의 채석장에서 만들어져 산 아래 해안지대까지 통나무를 깔거나 손으로 직접 굴려 옮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분화구의 3분의 1이 모자를 만들기 위해 깎여 나간 것이 확인됐으며 모아이 석상들이 서 있는 제단과 그 길목에서 70여 개의 모자가 발견됐다. 또 돌 부스러기를 다져 만든 모자 운반 길도 발견됐다.

 연구팀은 무게가 3∼4t씩 나가는 이 붉은 돌 모자가 약 700∼500년 전 제작된 것으로 확인했다. 섬 전체에 모아이 석상이 점차 늘어나자 후손들이 석상 대신 석상 위에 모자를 만들어 씌우는 방식으로 차별화한 것으로 연구팀은 보고 있다. 모자는 부족장들의 붉은색 머리 장식을 본뜬 것으로 부족장의 권위와 능력을 타 부족에게 과시하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들어 올려져 석상의 머리 위에 자리 잡게 됐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연구팀은 덧붙였다.

 이스터 섬의 상징인 모아이 석상은 1200∼15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까지 섬 안에서 900여개가 발견됐다. 큰 것은 높이 10m에 무게가 80t이 넘는다. 돌을 조각하면 영혼이 조각 안에 깃드는 것으로 생각한 폴리네시아인들은 부족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석상 제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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