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4세기 경부터 반투계의 아프리카 인종이 북방으로부터 남하하여 현재 모잠비크의 위치에 정착을 시작했다. 그 후 10세기 경에는 아랍이나
스와힐리계의 상인과 농업산품을 중심으로 교역이 번창하게 되었다. 14, 15세기에는 쇼나족에 의해 짐바브웨로부터 모잠비크에 걸친 대제국이
창설되어 금을 중심으로 광물자원 교역이 아랍인과의 사이에서 행해지고, 그 융성이 극에 달했다. 15세기 후반에는 모잠비크 북부와 중부의 해안선에
아랍인이 완전히 정착했다.
15세기 말에는 포르투갈인이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모잠비크를 방문했다. 16세기에 오면서 포르투갈인은
노예무역을 개시하고 식민지 활동을 본격화하면서 아랍인을 몰아내고 내륙부에 세력을 점점 넓혀 나갔다. 모노마타파 제국의 쇠퇴로 통합되면서 17세기
초에는 모잠비크 전 영토에 걸쳐서 지배권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 포르투갈 정부는 포르투갈인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추진, 그들에게
대농원주(프라자로)로서의 지위를 주었다. 포르투갈인 농원주는 아프리카인을 노동자로서 사용하면서 무거운 세금을 내고 노예시장을 번성하게 하는
것으로 많은 아프리카인, 특히 북부의 마콩데족이나 남부의 송가족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모두
진압되어 일방적으로 크리스트교와 포르투갈
문화의 보급을 진행하는 것으로 포르투갈의 안정된 식민지 경영이 이어졌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열강에 의한 아프리카 분할은 종식되고
포르투갈은 영국 및 독일과의 사이에서 현재의 국경을 확정했다.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프라자로에 의한 대농원 경영을 바꾸어 상업개발 등에 관한
특권을 3대 회사(모잠비크 회사, 니아사 회사, 잠베지아 회사)에 주고 식민지로서 모잠비크 북부와 중부의 경제 개발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러나
3대 회사의 아프리카인에 대한 강권적 지배가 강한 저항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포르투갈은 모잠비크 남부의 경제개발을 도모하기 위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트란스발 지방에서 산출되는 금의 반출 때문에 철도가 로렌시마르게스 항(현재의 마푸토)까지
건설되었고, 매년 8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인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광산 노동자로서 제공했다.
1951년 포르투갈은 모잠비크를 식민지로부터
해외주(海外州)로 정치적 지위를 변경하는 취지의 선언을 했지만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을 한층 강화하게 할 뿐이었다. 1960년대에는 모잠비크 독립을
목표로 해방운동 조직이 로데지아, 케냐, 말라위에서 결성되고 1962년 미국의 시라큐즈 대학교수인 에드워드 몬드라네(Ecuardo
Mondlane)의 밑으로 3개의 조직이 통합되어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이 탄자니아에서 태어났다. 프렐리모(Frelimo)는 1964년에
무력투쟁을 개시하고 포르투갈과의 장기적인 식민지 해방투쟁의 길을 열었다. 1969년에는 Frelimo 의장인 몬드라네가 작은 폭탄에 의해 암살
당했지만 사모라 마셸(Samora Machel)이 뒤를 이어 Frelimo의 세력은 북부로부터 남부에 걸쳐 점차로 광대하게
되었다.
1974년 4월 25일, 포르투갈 본국서 쿠데타가 일어나 식민지 해방의 방침을 가진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하고, 같은 해
9월 7일 포르투갈과 Frelimo와의 사이에서 독립에 관한 루사카 협정이 체결되었다. 다음 해 6월 25일 모잠비크 인민공화국으로 정식 독립,
마셸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수도의 이름은 로렌시마르게스에서 마푸토로 개명되었다.
독립 후, Frelimo 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일당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지만 독립 직후부터 백인 이주자를 주체로 하는 모잠비크 국민저항운동(Renamo :
MNR)이 사회주의정권 타도를 향해 게릴라 활동을 개시하여 내전에 휩쓸리게 되었다. MNR의 배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자금과 무기의
원조를 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모잠비크 불안정화 공작도 심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84년 모잠비크는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소코마티 협정(불가침조약)을 맺어 내전의 종결을 향해 일보 내딛었다. 또 IMF, 세계은행에의 가입이 허락되면서 파탄상태였던 경제활동의 회복을
도모하는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모잠크 정부의 생각과는 달리 MNR의 게릴라활동은 끊임없이 국민의 생활을 위협하며
계속되었다.
1986년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마셸을 이은 시사노(Joao Alberto Chissano) 대통령은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시장경제의 도입을 도모하는 한편, 적극적인 민주화를 추진하고 1990년 11월에는 민주주의적 신헌법을 도입하고 국가재건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또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MNR과의 내전에 대해서도 1990년 7월에 양자간의 직접 교섭을 개시하고 평화의 실현을 향해 강한 교섭을
하여 불안정한 가운데에서도 1992년 드디어 정전이 실현되었다.
o 1498년
: 바스코 다가마가 모잠비크 발견. - 포루투칼의 인도무역에 중간 정착지 역할로 쓰였다.
o 1700년
: 포르투칼의 내륙 진출.(식민지
건설)
o 1932-68년
: 모잠비크는 기근에 허덕이게 되었다.
포루투칼이 현금화할 수 있는 모든 식량을 몰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포루투칼은 모잠비크의 자연자원만을 탐닉했을
뿐 사회적 투자나 경제 활동은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모잠비크는
식민지 하에서 갈수록 황폐해져 갔으며 몇몇 병원과 학교은
한정된 수의 백인과 포루투칼인에게 만 특권이 주어졌었다.
o 1951년
: 포르투갈은 모잠비크를 식민지로부터
해외주(海外州)로 정치적 지위를 변경하는 취지의 선언을 했지만
포르투갈의 식민지 경영을 한층 강화하게 할 뿐이었다.
o 1960년
: 포루투칼 군대는 평화적이 집회에도
발포를 해 600여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것을 도화선으로
하여 독립의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모잠비크 독립을 목표로 해방운동
조직이 로데지아, 케냐, 말라위에서 결성되었다.
o 1962년
: 미국의 시라큐즈 대학교수인 에드워드
몬드라네(Ecuardo Mondlane)의 밑으로 3개의 조직이 통합되어
모잠비크 해방전선(Frelimo)이 탄자니아에서 태어났다.
o 1964년
: Frelimo는 무력투쟁을 개시하고
포르투갈과의 장기적인 식민지해방투쟁에의 길을 열었다.
o 1969년
: Frelimo 의장인 몬드라네가 작은
폭탄에 의해 암살 당했지만 사모라 마셸(Samora Machel)이
뒤를 이어 Frelimo의 세력은 북부로부터 남부에 걸쳐 점차로
광대하게 되었다.
o 1974년
:
- 4월 25일, 포르투갈 본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식민지 해방의 방침을 가진 사회주의 정권이 등장하고,
-
9월 7일 포르투갈과 Frelimo와의
사이에서 독립에 관한 루사카 협정이 체결되었다.
o 1975년
:
- 6월 25일 모잠비크 인민공화국으로
정식 독립, 마셸이 초대 대통령이 되고 수도의 이름은 로렌시마르게스에서
마푸토로 개명되었다.
- 독립 후, Frelimo 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일당 독재에 의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추진했지만 독립 직후부터 백인 이주자를 주체로 하는 모잠비크
국민저항운동(Renamo : MNR)이 사회주의정권 타도를 향해
게릴라 활동을 개시하여 내전에 휩쓸리게 되었다. MNR의
배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가 자금과 무기의 원조를
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의 모잠비크 불안정화 공작도
심해지게 되었다.
o 1984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소코마티 협정(불가침조약)을
맺어 내전의 종결을 향해 일보 내딛었다. 또 IMF, 세계은행에의
가입이 허락되면서 파탄상태였던 경제활동의 회복을 도모하는
단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모잠비크 정부의 생각과는
달리 MNR의 게릴라활동은 끊임없이 국민의 생활을 위협하며
계속되었다.
o 1986년
: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마셸을 이은
시사노(Joao Alberto Chissano) 대통령은 사회주의 노선을
버리고 시장경제의 도입을 도모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민주화를
추진
o 1990년
: MNR과의 내전중 7월에 양자간의
직접 교섭을 개시하고 평화의 실현을 향해 강한 교섭
o 1992년
: - MNR과의 내전에 정전협상 성공
-
11월에는 민주주의적 신헌법을
도입하고 국가재건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