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엠립 (Siem Reap)

 

 

시엠립 (Siem Reap)

 프놈펜에서 국내선으로 40분 거리. 인도차이나 중앙평야에 우뚝 서 있는 이 고대 왕국의 유적에는 물과 햇빛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이 맑은 물에 찬란히 비친다. 이곳은 엄청난 감동과 함께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곳이다. 인도차이나 반도내의 최고 여행지라고 할 수 있다. 무려 600여년 간(790~1432) 캄보디아를 통치한 크메르 왕국의 절대군주들은 생전에 거대한 신전, 사원을 건립하여 죽은 후에는 신과 합체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앙코르 부근에는 많은 신전과 사원이 건설되었다.

 

 어찌 보면 이들이 앙코르의 이러한 건축물에 쏟은 열정은 단순한 신앙심의 발로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다만 신과 동일시되는 통치권자 자신의 사후 살림집을 짓겠다는 염원의 표출로, 결국 신비와 기적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12세기 중엽에는 스루야바르만 2세가 앙코르 사원을 건립하고 다시 반세기 후에는 자아바르만 7세가 앙코르 톰을 건설했다. 백만을 넘었던 앙코르 주민들이 1431년 샴족(타이족)의 침입으로 이 위대한 수도를 버린 후에 캄보디아의 열대림은 수백 년 동안이나 앙코르 사원을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앙코르 왕국은 태국 아유타야 왕조의 세력으로 1431년 지금의 수도 프놈펜 지방으로 옮겼다. 15세기 후반에는 베트남 찬파왕국을 붕괴하고 크메르까지 영향을 미쳤으나 크메르, 베트남, 태국의 압박에 쇠퇴해 갔다.

 이후 쇠퇴하여 버려진 앙코르 왕국은 유적의 존재도 잊혀져 있다가 400여년이 지난 1860년에 프랑스의 탐험가 '앙리무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앙코르에 건축에 쓰였던 석재는 주로 사암이었는데 이 지역의 많은 비 때문에 앙코르의 유적들은 조금씩 파괴되었다. 또 수로의 물 속에도 잡균이 많아서 사암으로 이루어진 건축물을 침식하기 시작하였다.

 

 1859년에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리무오가 캄보디아 톤레삽 호수 근처의 유적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네 번에 걸친 인도차이나 반도 탐험을 하였는데 두 번째 탐험인 1861년 밀림 속의 앙코르 유적을 발견하였다. 그 당시 이 주변은 톤레삽 호 북쪽의 태국 영토였던 시엠립이었다.(시엠립은 1907년에 캄보디아로 반환되었다.)

 일반인의 접근이 일절 금지됐던 앙코르 문화유적은 지난 93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돼 오고 있다.

 

 

앙코르 왕조의 멸망에 대해 대표적으로 세 가지 가설

 첫째, 타이 지역의 아유타야족과의 전쟁 설이다. 앙코르와트 벽화를 보면 앙코르족의 군인들은 제대로 된 갑옷을 입지 않고 있고 방어도구도 나무로 만든 방패 정도다. 이에 반해 아유타야족은 상대적으로 훌륭한 전쟁 장비를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앙코르족이 전쟁에서 지는 일이 많았고, 결국 유적을 포기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아유타야족이 훌륭한 건축물과 거대 도시를 전유물로 쟁취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둘째, 지나치게 거대한 도시를 유지·관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동시대의 런던 인구의 몇 십 배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도시였다. 게다가 이 지역은 전형적인 열대성 기후로 논농사의 발달과 함께 뛰어난 저수시설이 필요했으나 앙코르와트 저수시설은 지나치게 섬세해 조금이라도 수리나 관리를 하지 않으면 작동이 어려웠다.

 그러나 이 또한 의문이 남는다. 과연 민감한 저수시설의 조작이 그들의 선조로부터 수백 년간 이룩해온 문명을 포기할 만큼 심각했느냐는 것이다.

 

셋째, 환경 파괴 때문이라는 것이다. 외교와 논농사를 주로 하는 앙코르족은 당연히 식량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열대우림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저수시설을 비롯한 엄청난 규모의 도시를 지었지만, 소실된 열대우림으로 인한 환경적 재앙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정확히 어떤 환경적 재앙인지 제시해주지 못한다. 추가적으로 콜레라, 홍역,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원인일 수도 있다.

 

 요컨대 세 가지 가운데 하나만이 옳다고 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설득력이 부족한 측면이 세 가지 모두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오랜 시간 일구고 다듬어 온 생활터전을 버린 것은 그곳에 생존에 큰 위협이 되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위협 요소는 기본적인 의식주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으며 정치·사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거대한 앙코르 유적지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함으로써 사회가 쇠락하는 이유를 이해하면 역으로 유지·발전할 수 있는 조건도 알 수 있다. 각자 다방면에서 앙코르 왕조가 이 거대한 도시를 버리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어떤 왕조도 이 거대한 도시를 차지하지 않았던 이유를 상상해 보자.

 

 

<앙코르 문명은 왜 멸망했을까?>

 9~15세기에 걸쳐 존속했으며 13세기 전성기 때에는 동남아시아의 상당 지역을 지배했던 크메르 제국.

 이 제국의 수도인 앙코르는 인구 75만 명의 거대한 도시복합체였다.

 이 도시에 세워진 앙코르와트를 비롯한 1000여 개의 사원은 규모나 기술 면에서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맞먹는다.

 하지만 이 위대한 문명을 꽃피웠던 크메르 제국은 멸망했고 지금까지도 그 멸망 원인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외세의 침략, 왕실의 내분, 혹은 힌두교를 믿었던 크메르인들이 평등을 교리로 하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농민 반란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해상무역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내륙도시였던 앙코르가 단순히 버려지게 된 것인지 등 앙코르의 몰락을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최근 다른 증거가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토목기술의 경이를 보여주는 앙코르의 방대한 수리 시스템의 일부였다.

 우기에는 물을 받아 저수하고 건기에는 물을 공급해 준 이 방대한 수리 시스템이 앙코르를 결국 몰락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새로 힘을 얻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이 도시에서 물은 핵심 요소였다.

 앙코르인들은 이 물을 잘 다스렸고 번영을 얻었지만 그들이 건설한 놀라운 창조물은 끊임없는 보수 관리를 필요로 하고 여기에 이상기후까지 겹쳐 결국 모든 게 무너지면서 앙코르 문명도 무너졌을지 모른다.

 

 

압사라 민속쇼(Dancing Apsaras)

 캄보디아에서 반드시 보아야할 공연이 있다면 바로 압사라 민속춤일 것이다. 압사라(Apsara)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님프에 해당하며, 탄생은 비너스의 그곳과 유사하다. 천상의 선녀이자 무희였으며,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사이렌(Siren)이 되기도 한다.

 압사라쇼는 전통 악기와 춤과 율동으로만 공연이 되며, 여기에 노래와 같은 요소는 첨가되지 않는다. 성격상 오폐라보다는 무극에 가깝다. 공연장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4~5장의 공연으로 나눠진다. 첫번째 압사라들의 서장에서는 압사라들이 나와서 관객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둘째 장부터는 각 지방의 민속 댄스를 선보인다. 댄스의 내용은 주로 주변 환경과 청춘남녀의 사랑이다. 각 장마다 지방 특유의 민속춤을 선보이며, 각 지방의 전통 의상과 악기를 선보이며, 의상과 악기가 지방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중간장에서는 인어공주와 원숭이신 하누만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압사라의 춤을 비롯하여, 공작춤 등으로 마무리가 된다.

 주로 호텔 디너쇼로 공연이 되며, 캄보디아 전통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씨엠립에서 가장 유명한 디너쇼장은 바이욘 II이며,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공연을 보기 힘들다. 공연 중 촬영이 허용되고, 공연이 끝나고 무희들과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앙코르왓의 재발견, 앙리무오 Henri Mouhot(1826~1861)

앙코르의 재발견

 1860년 앙리무오는 앙코르와트 유적을 재발견하였다. 원래 그는 미지의 아시아 대륙을 걸어서 탐험하는 용기있는 젊은 탐험가 중의 하나로 식물학자였다. 그가 프랑스에 가져가 연구할 종들을 수집하기 위한 인도차이나 탐사를 하던 중에 똔레삽 호수 근처의 바탐방(Battambang)이라는 곳에서 프랑스 전도사를 만나 근처 정글에 고대 유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무오는 호기심을 느껴서 탐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빽빽한 밀림을 뚫고 앙코르왓까지 도달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3주를 보냈고, 사원에 대한 문서와 스케치를 작성했다. 1859년초에서 1861년 11월까지 열병으로 죽기전까지 씌여진 그의 '일기장'는 그가 방콕에서 프랑스로 그의 시신이 전달되어진 1863년에 출간되었다.

 맹수와 독충이 우글거리는 폐허가 된 빽빽한 정글 속에서 황폐한 앙코르 사원의 발견에 대한 그의 생생한 기록과 정글 속 여행은 유럽에 한 차례 폭풍을 몰고오게 되었다.

 저명한 루이스 델라포르테(Louis Delaporte)와 같은 다른 프랑스 탐험가들이 1873년 앙코르로 와서 자세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마침내 1907년 극동연구소 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사원의 조심스런 복원과 재건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앙리무오가 첫 발견자인가?

 많은 서적에서 종종 앙리무오가 잊혀진 앙코르 문명을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데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앙리무오가 앙코르 땅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15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 포르투갈의 무역상인이었던 디오고 도 꾸또(Diogo do Couto)는 이 땅을 발견하고서 약간의 기록을 남겼다. 무오의 부친인 불리보(Bouilleveaux)는 당시 바탐방 지역의 프랑스 전도사였는데, 여러명의 서양인 전도사들과 함께 앙코르왓과 크메르 사원들을 무오가 가기 전에 최소한 5회 이상을 방문했다고 한다.

 

앙코르의 생생히 기록한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

 앙리무오의 기록이 폐허가 된 이후의 기록이었던 반면, 고려 충렬왕(忠烈王) 4년, 중국 원나라 연호 지원(至元) 15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서거한지 2년 뒤인 1296년 8월 원나라 사신 주달관(周達觀, 1266~1346)은 원나라 황제(성종)의 사신으로 이곳 앙코르에서 1년간 머물면서 생생한 앙코르의 찬란한 기록들을 남겼다. 그가 기록한 내용에는 당시 황제의 모습과 캄보디아의 풍습과 도시내의 각종 건축물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현재도 앙코르 왕국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고 있다.

 

 

앙코르의 생생한 기록, 주달관(周達觀)의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

 앙리무오의 기록이 폐허가 된 이후의 기록이었던 반면, 고려 충렬왕(忠烈王) 4년, 중국 원나라 연호 지원(至元) 15년, 원세조 쿠빌라이가 서거한 지 2년 뒤인 1296년 8월 원나라 사신 주달관(周達觀, Zhou Daguan)은 원나라 황제 성종의 사신으로 이곳 앙코르에서 1년간 머물면서 생생한 앙코르의 찬란한 기록들을 남겼다.

 

 주달관은 인드라바르만 3세(1295~1308)가 통치하는 이곳 크메르 수도에 1년을 머물면서 크메르 사회를 관찰한 40장 분량의 기록 '진랍풍토기(真臘風土記)'를 남긴다. 그는 종교나, 법제도, 왕위, 농경, 노예제도, 새, 식물, 목욕, 의식주, 도구, 동물, 상거래 등의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은 현재 앙코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으며, 또한 재미있는 여행기로 남아 있다.

 

 '진랍(眞臘)국'이란 당시의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을 일컫던 말로서 그가 기록한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 Customs of Cambodia)'의 내용에는 당시 황제인 인드라바르만 3세의 곁에서 1297년 7월까지 머물면서 기록을 남겼다.

 

 

 꾸준한 교류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그가 캄부자(캄부자 왕국: 802년 자야바르만 2세가 세운 캄부자 왕국. 캄부자 왕국은 미얀마,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반도를 대부분 다스렸다.)를 방문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신은 아니었지만 주달관이 남긴 진랍풍토기와 같은 기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기록에는 바이욘과 바푸욘, 앙코르 왓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당시의 풍습과 일상 생활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도 있다.

 

 주달관은 앙코르 톰(Angkor Thom)에 대해서 여러 개의 출입문을 가진 오대문에 대해서 기록하였는데, 동쪽만 2개의 문이 있고, 나머지는 각각 하나씩이라고 앙코르 톰을 기록하고 있다. 앙코르 톰은 다리로 연결된 강을 가로지르는 넓은 해자로 둘러싸여 있는데, 다리에는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나가의 머리를 당기는 54개의 조각상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앙코르 톰의 대문 꼭대기에는 다섯 개의 불상 두상이 있고, 그 중 네개는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다.

 

 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태국을 시암(Siam) 또는 시엠(Siem)으로 부르는 기록이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바이욘 벽화에서 나타난 압사라상처럼 남녀가 허리에만 옷을 감싸 입고 가슴을 드러내놓고, 맨발로 다니는 기록을 그대로 생동감있게 서술하고 있다. 아름다운 여인이 항상 왕과 왕족의 시중을 들기위해 궁전으로 보내졌고, 여인들은 머리에 장식을 하지 않지만, 손목과 손가락에 금팔찌와 금반지를 끼고 다녔다고 전한다.

 

 크메르의 모든 무역은 여인들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시장에는 가게 대신 바닥에 물건을 펼쳐놓고 여인들이 물건을 매매했으며, 여인들은 거래세를 관리에게 지급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여전히 크메르인들은 모든 재산을 장녀가 물려받고, 생활력이 강한 여아를 선호하고 있다.

 

 크메르인의 가정에는 탁자와 의자가 없으며, 그릇이나 물통같은 생활용품이 없었으며, 죽을 끓이거나 밥을 짓는 도기로 요리를 하고, 국자는 야자껍질로, 그릇은 죽을 흘리지 않도록 짠 나뭇잎을 사용했다고 전한다.

 

 또한 크메르의 승려들은 이미 독자적인 문자를 지녔으며, 5진법에 의한 수리(數理)와 13개월의 연력(年曆), 7일의 요일을 이용하여 천문과 산수에 밝았으며, 엄격한 신분제도와 법령 등을 갖추고 있어서 왕의 복장과 더불어 죄를 지은 죄수들의 발가락을 잘라서 성안 출입을 금하였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황금으로 도금한 사원들이 아침에 햇빛을 받으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가 없었다는 등의 기록을 전하고 있다.

 

 

크메르(Kmer)

 캄보디아를 이루는 주 종족인 크메르족은 1세기 경 남인도에서 이주하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앙코르왓이 건설되는 12세기를 정점으로 점점 쇠퇴하여 20세기 중반까지 태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크메르 말살정책에 의해 잦은 분쟁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크메르의 비극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미국에 의한 베트남전 참전으로 내전에 휩싸이고 크메르 루즈라는 잔혹한 단체가 출몰하여 지금의 캄보디아, 세계 최빈국의 캄보디아가 만들어졌다.

 크메르인들은 원래 힌두교를 믿는 종족이었으나 15세기 경 소승불교가 들어오며, 힌두교와 애니미즘, 불교가 혼합된 형태의 종교가 퍼져있는 상태이다. 또한 1970년대 공산당의 집권전까지 잠시 기독교가 부흥하였으며, 현재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나 새로운 종교의 유입은 없는 상황이다.

 크메르 족은 외형은 키가 작고, 검은 눈과 검은 머리를 갖고 있다. 크메르족의 문화와 관습은 불교와 힌두교가 혼합된 앙코르 왓에 잘 나타나 있다.

 

 

씨엠립의 기후(℃/mm)

도시명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씨엠립

(캄보디아)

최고평균

32.0

33.3

34.6

35.5

35.2

33.5

32.7

32.0

32.2

31.3

30.6

31.0

최저평균

19.7

20.8

26.1

25.1

25.6

24.8

24.8

25.0

24.5

23.9

22.4

20.3

평 균

25.4

27.1

30.4

30.3

29.2

28.8

28.5

27.6

28.4

27.6

26.5

25.7

강수량mm

0.7

3.5

28.0

61.2

175.9

221.3

236.6

151.0

276.1

248.0

81.7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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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 명소

新 세계 7대 불가사의 앙코르 와트(Angkor Wat)(씨엠립)-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 업적의 하나

 12세기 초반(1113-1150), 수리야바르만 2세

 앙코르(Angkor)의 의미는 수도(capital) 또는 도시(city), 와트(Wat)은 타이나 캄보디아의 '불교사원'을 의미한다.

 앙코르 왓비슈누(Vishnu, 힌두교의 세 주신(主神)의 하나.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신으로 후에 크리슈나로 화신(化神)한다.)에게 헌정된 사원으로, 앙코르 유적지 중 가장 큰 사원이며 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크메르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루는 역사적인 예술품이다. 이 사원은 구성, 균형, 설계 기술, 조각과 부조 등의 완벽함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앙코르의 모든 건축물들은 생명을 뜻하는 동쪽이 정문인데 반해, 이곳만이 죽음을 뜻하는 서쪽이 정문이 나 있다.

 

 때문에 이 사원은 수리아바르만 2세의 장례(화장식)를 치르기 위한 사원으로 지어졌다고 추측되어지고 있다. 양각 부조 또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며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도 힌두교의 장례식의 절차에 쓰이는 법도이므로 이 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사원 자체가 너무 거대하여 내부를 다니면서 앙코르 왓의 설계구조를 이해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이 사원의 복잡함과 아름다움은 정말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멀리서 이 사원을 보노라면 긴 통로가 중앙으로 연결되는 지상의 거대한 석조물로 보이기도 하나, 가까이 가서 보면 수많은 층을 이루는 탑들로서, 많은 예술적인 조각과 방, 베란다, 정원 등이 계단으로 이어지는 각각 다른 층, 단에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면에서부터 높이는 전체적으로 크게 3개 층으로 나뉘면서 자그마치 213m나 된다. 층 사이에는 많은 기둥들이 세워진 긴 회랑으로 구분되어 있다. 맨 위의 3층 단에는 5개의 큰 탑이 세워져 있는데, 중앙의 탑이 가장 높다. 탑들의 모양은 연꽃을 본 따서 만들었다. 모든 건물들은 동서를 축으로 정확한 대칭을 이루고 있다. 회랑과 방, 통로들의 지붕은 곡선으로 경사지게 만들어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길고 좁은 산등성이 같이 보이기도 한다. 1920년에 앙코르를 찾았던 영국의 한 역사학자는 이 계단들은 그 용도가 건축 고유의 목적을 초월하여 만들어졌으며(계단이 그렇게 가파른 이유는 그 계단은 원래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이용하도록 만든 것으로, 인간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 위헤 가파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계단에 오르면서 신성한 분위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엄숙해 질 수 있도록 하며, 가벼운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분위기를 고려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앙코르 왓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건축물들의 일련의 반복되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즉 많은 기둥들이 세워진 회랑, 탑, 곡선의 지붕, 상인방, 계단, 그리고 대칭으로 연속되는 십자형의 공간 등이다. 이러한 구조물들은 2개 또는 그 이상들이 높이에 변화를 주어가면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배열 기법은 한 탑과 다른 탑을 연결하는데 많이 이용되고 있다. 지붕은 때로는 높이, 길이 또는 치수의 변화를 갖고 있다. 중앙 탑을 본 뜬 작은 탑들은 눈에 잘 띄는 회랑과 입구 탑 두 장소에 서 있다. 입구의 긴 통로는 입구 탑을 지나 뒤편으로도 같은 모양으로 이어진다.

 왕코르왓은 석조 건축물로 만들어진 우주의 축소판으로, 지상에 있는 우주의 모형이다. 중앙의 탑은 사원의 정 중앙에 세워져 우주의 중심인 메루산을 상징하며 5개의 탑은 메루산의 5개의 큰 봉우리를 나타낸다. 성벽은 세상 끝을 둘러 싼 산맥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해자는 우주의 바다를 상징하고 있다.

 그러니까 앙코르 왓의 3층 중앙 탑들이 있는 곳은 천상계를 상징하고, 2층은 인간계, 1층은 미물계를 나타낸다.

 

 앙코르 왓은 약 210ha 넓이의 사각형의 땅을 성벽으로 쌓고 그 안에 지어졌다. 이 사원부지의 규모는 우선 사암으로 만든 긴 입구 통로(250m)와 해자가 말해준다.

 

 

※ <참고> 메루산(Meru) / 수메루(Sumeru) / 수미산 / 카일라사 산(Kailasa)

 힌두 신화에서 세계의 중심에 솟은, 신들이 거주하는 성스런 산으로 알려져 있다.

 힌두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가장 높은 산은 히말라야.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 어로 "신들의 산"이란 뜻으로 태고적부터 인간은 하늘 가득 솟아 있는 히말라야의 정상에 신들이 거주하고 있다 믿어 경외시했다.

 따라서 신화에서 신들이 거주한다는 메루산(Meru 또는 Sumeru)는 히말라야 산으로 보고 있으며 히말라야의 고행자 신으로 알려진 쉬바 신의 거주지인 카일라사 산(Kailasa) 또한 히말라야가 그 근원이며 그외 많은 신들의 거처 또한 히말라야에 근거를 둔다.

 신들의 거처 메루산은 불교에 유입되어 수미산(須彌山)으로 번역되었다. 불교의 우주관에서 수미산을 설명하면 메루산에 대한 이해가 쉬워진다.

 우주는 세 개의 둥근 대(臺)(해자)를 주춧돌 삼아 서 있는데 대양(大洋)인 금륜 가운데에 수미산이 솟구쳐 우주 중심의 축을 이룬다. 수미산의 높이는 16만유순(十六萬萬由旬 : 1유순은 7㎞)이나 되며 그중 8만 유순(56만km)이 물 위로 솟구쳐 있으며 그 솟구친 부분의 중심을 둘러 사방에 각각 하나씩 네 개의 대륙이 존재하고 그중 남쪽 대륙이 인간이 거주하는 섬부주(贍部洲)이며 그 아래에는 지옥이 있으며 악마들이 거주하고, 수미산에는 곳곳에 신들이 거주하며 정상에는 신들의 왕인 제석천(인드라)이 거주하는 걸로 보고 있다. 즉 수미산 자체가 불교에서 말하는 낙원이며 별도 달도 태양도 모두 수미산을 중심으로 회전하므로 수미산은 곧 우주의 총체인 셈이다.

 

 

1층 외벽 회랑의 부조

회 랑

 이 광장 위에는 1층 전체에 멋진 회랑이 보이는데, 이를 부조회랑이라고 한다. 그 규모는 215mx187m나 된다. 회랑의 외부는 60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고, 내부는 벽으로 되어 수많은 부조가 조각되어 양각되어 있다. 이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곳도 십자형의 회랑이 있는데, 매우 독특한 건축기법으로서 지붕으로 덮이고 사각기둥들이 대칭으로 늘어서 있는 2개의 회랑과 4등분으로 나뉘어 있는 중앙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회랑의 가운데 공간에 있는 기둥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1층을 둘러싼 부조회랑의 넓이는 1,200㎡나 된다. 이 조각은 2m높이로 4면의 내부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그 섬세함과 기술과 구성과 솜씨는 세계 예술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회랑의 바깥벽을 따라 서 있는 기둥들은 조각에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주고 있다. 이 효과는 마치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이 그려진 벽지를 보는 것 같은 착각도 준다. 부조회랑은 각 벽에 2개씩 모두 8개의 구획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각 구획은 각기 독특한 주제를 담고 있다.

 추가로 서쪽 회랑의 구석에 있는 2개의 별실에는 여러 가지 장면들이 조각되어 있다. 부조의 구성은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특별한 내용을 강조하지 않은 것과 나중에 조각된 것으로 생각되는, 또 추가로 조각된 것으로 보이는 어떤 주제를 표현하는 것 등으로 분류된다. 조각면은 보통 2-3개의 군으로 구성이 되고 있으며, 때로는 상부와 하부로 나누어 경계선으로 장식한 것도 있다. 부조 조각의 주제는 크게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인도의 전설과 경전, 그리고 앙코르 시대의 전승 기록 등이다. 어떤 학자는 또 이 부조의 내용 뿐 아니라 배치 또한 주제와 관련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였는데, 그 예는 동쪽 벽에는 해가 뜨는 것(생명, 탄생)과 서쪽 벽에는 해가 지는 것(죽음, 사멸)에 관한 주제를 표현한 것 들이다.

 앙코르 왓에서 쓰인 조각 기법은 조각의 주체를 남겨두고 그 배경을 파내는 기법이었다. 때로는 반대로 음각을 한 곳도 있다. 광택이 나는 곳도 있는데 관광객들이 만져서 광택이 나는 곳도 있고, 일부 조각에는 락카칠을 했던 곳도 있다. 특히 금도금을 하거나 검은 색, 붉은 색 등의 칠을 한 곳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채색들은 아마도 기초 배색이었거나, 접착제의 흔적일 수도 있다.

 이 조각들의 표현 기법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예술 표현 기법이 보인다. 각은 수평으로 길게 평행선을 긋고, 그 안에 물고기들의 모양을 새겼다. 이집트의 예술에서는 계급의 표현을 사람의 크기로 표현하였는데, 앙코르에서도 계급이 높을수록 사람을 크게 새겼다. 전투 장면에서 부러진 행렬용 양산은 격파된 적장을 상징한다. 원근의 표시는 겹쳐진 모양으로 나타내었고, 거리가 먼 것은 벽의 위쪽으로 올라가 있다. 다리를 벌리고 무릎이 굽혀진 모양은 날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앙코르 왓의 회랑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보아야 주제의 연결을 알 수 있다. 서쪽 문 중앙으로 들어와서 오른쪽으로 돌아 시계 반대방향으로 관람을 하는 것이 제일 좋다.

 

 

서쪽 회랑 1. (남쪽 부분 : 쿠륵세트라의 전투)

 두 번째 문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가기 전에 대개 시계 반대 방향, 즉 오른쪽으로 꺾어져 회랑의 부조를 감상하게 되는데 이것이 남쪽으로 뻗어간 서쪽 회랑이다. 이렇게 계속 회랑을 따라 돌면 남쪽, 동쪽, 북쪽 회랑을 보고 다시 서쪽 회랑의 북쪽 면을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 이곳의 벽에는 엄청난 전투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중앙을 향해 왼쪽과 오른쪽에서 진군하는 아래쪽 보병들, 중간의 기마병들 뒤에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연주자들이 보일 정도로 질서 정연하고 여유가 있다.

 그러나 양쪽 군대가 충돌하는 중앙에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다. 활을 쏘고 창으로 찌르고 죽이고 육박전을 벌이는 처절한 장면이다.

 이것이 바로 마하트마 간디, 네루를 비롯한 인도의 지성들 그리고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등지에까지 영향을 미친 인도의 고대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한 장면을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다.

 이것은 인도의 한 지방인 '쿠륵세트라'에서 있었던 왕과 반군인 조카간의 역사적인 최후의 전투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카우라마스'군과 '판다바스'군은 각기 반대편에서 행진을 시작하여 가운데에서 전투를 벌인다. 투구 장식의 모양으로 양편을 구분할 수 있다. 전투의 시작은 군악대의 행진곡에 맞추어 보병들이 전쟁터로 행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전쟁터의 모습은 백병전과 많은 사상자들을 표현하고 있다. 지휘관들과 장군들은 크게 조각하였으며, 말, 코끼리 및 전차 위에서 전투를 지휘하고 있다. 전투방면은 점점 더 격렬해지다가 혼전을 벌이면서 절정에 이른다. 마하바라타 전설의 영웅이며 카우바라스 군의 대장인 비스마(벽화의 시작 위치)가 화살을 맞고 부하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가고 있으며, 아르주나(악마 라후의 얼굴이 새겨진 방패를 들고 있다)가 그의 이복 형제인 크리슈나를 활로 쏘아 죽이고 있다.

 마하바라타에서는 이 전투에서 아르주나라는 장수가 차마 사촌들을 죽이지 못해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때 신분을 숨기고 아르주나의 전차의 마부로 행동하던 크리슈나 신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아르주나에게 진리를 가르치며 친족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죽이라고 가르치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마하바라타의 제 6권의 내용으로 이 부분을 따로 떼어 내어 바가밧 기타라고 하며 이 내용은 훗날 전 인도 지성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내용은 전투에 임해 나약해진 아르주나를 가르치는 것이지만 깊은 철학적,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위급한 때, 어디서 그대에게 이런 나약함이 온단 말인가? 산 자를 위해서도 죽은 자를 위해서도 지혜로운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다. 성공과 실패를 평등히 여기며 집착을 버리고 행동하라. 나는 세계를 파멸하는 다 된 시간으로서 여기에 세계들을 거두어들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오래 전에 이미 바로 나에 의해 죽임을 당했은 즉, 그대는 단지 수단이 될 지어다. 죽여라. 주저말고 싸워라."

 아쉽게도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 수많은 인물들이 각각 누구인지는 잘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다. 단, 오른쪽에서 중앙으로 진군하는 군사들이 아르주나의 군사들인데, 아르주나와 크리슈나 신만은 명확히 알 수 있다. 팔이 네 개인 사람이 아르주나의 전차를 끄는 마부 크리슈나이고 그 전차에 타서 싸우고 있는 이가 바로 아르주나다.

 

 

남서쪽 모퉁이의 작은 방

 이 작은 방의 조각은 '크리슈나'의 생애와 인도의 전설 '라마야나'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돌면서 벽화를 감상한다.

o 동 쪽

- 왼편에는 강의 축제를 묘사했으며, 장기두는 모습도 있다.

- 오른편 : 닭싸움

- 중앙 출입문 위 : 제물을 받는 신들

 

o 남 쪽

- 왼편 : 위에서부터 아래로 발리와 원숭이 수그리바의 싸움, 라마가 활로 발리를 쏘고 있고, 발리는 아내의 품에 안겨 있다. 원숭이들이 그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 중앙과 출입문 위 : 악마들의 살인 '크리슈나'가 불을 끄는 모습

 

 

o 서 쪽

- 왼편 : 시바가 아내 파르바티와 같이 카이라사 산에 앉아 있는 모습

- 중앙과 출입문 위 : 크리슈나가 자신이 묶인 돌과 나무를 들어 올리고 있다.

- 오른쪽 : 카메레온으로 변장한 라바나가 인드라의 왕궁에 나타나는 모습

 

o 북 쪽

- 왼편 : 유액의 바다를 젓는 전설.   - 위 : 태양과 달

- 중앙 출입문 위 : 황금 사슴으로 위장하여 시타의 유괴를 돕는 야차 마리카를 라마가 죽이고 있다.

- 오른편 : 화가 난 인드라가 내려치는 폭풍우로부터 양떼와 양치기를 보호하기 위하여 크리슈나가 고바다나 산을 들어 올려 막고 있는 장면

 

 

남쪽 회랑(서쪽 방면)

 이 회랑에서는 수리아바르만 2세가 이끄는 크메르 군대가 적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웅장한 승리의 행진을 묘사하고 있다. 조각들은 전쟁 방법 등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로 백병전으로 격투하는 장면들이다. 배경에 자연스럽게 나무들과 짐승들을 그려 넣은 것이 매우 색다르다.

 중앙에 있는 열다섯 개의 파라솔 밑에서 코끼리를 타고 원추형 관을 쓰고 있는 인물이 앙코르 왓을 건축한 수리아바르만 2세다. 회랑에 새겨진 문구에 그의 사후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아, 이 문구는 왕이 죽은 후에 새겨 넣었던 것 같다.

 코끼리 코 앞의 삐죽한 막대기 위에 앉아 있는 새가 가루다다.(가루다는 비슈누 신이 타고 다니는 신화 속의 새로 이 새는 후일 중국을 거쳐 우리에게는 금시조로 알려져 있는 새다. 불교 신화 속의 금시조는 머리는 매와 비슷하고 여의주가 박혀 있으며 금빛 날개가 있는 몸은 사람을 닮고, 입에서 불을 내뿜으며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그 가루다 위에 조그맣게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비슈누다.

 큰 성화가 배 위에 실려가고 있는데, 성화를 든 사람, 악대, 광대 등 많은 사람들이 같이 가고 있어 매우 요란스럽고 화려하게 보인다. 바라문 승려들이 큰 심벌즈를 치면서 노래를 하며, 이 행렬을 뒤따르고 있어 왕에게 바치는 진상품들이 가마 위에 실려가고 있다.

 또 이 회랑에는 벽에 사각형의 구멍이 가끔 보이는데, 사원의 보물이나 중요한 것을 보관했던 곳이라는 설이 있다. 회랑 위 부분을 보면 왕(금박을 입혔던 흔적이 있다)이 산에서 청중들을 모아 놓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있다. 아래에는 왕궁의 여인들이 숲 속 산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군대가 사열을 위해 집합해 있고 지휘관은 코끼리를 타고 적군을 향해 행진하는 부대를 이끌고 있다. 지휘관의 계급은 조각 근처에 작은 글씨로 표시해 놓았다.

 회랑 벽의 끝 부분에 가까워서는 태국 군대의 행렬이 시작되는데, 지휘관은 코끼리 위에 앉아 있다. 태국군의 모양은 주름 잡힌 꽃 모양의 치마와 긴 펜던트를 단 혁대, 땋은 머리, 짧은 콧수염, 그리고 투구는 깃털 장식으로 표현하였다.

 크메르 군 중 일부는 뿔 또는 사슴, 말, 새 등의 짐승 머리가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그리고 방패에는 괴물들을 그려 놓았다.

 

 

남쪽 회랑 2(동쪽 방면) - 천국도와 지옥도

 인간에 대한 염라대왕의 심판을 3단계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명도 2단계에 걸쳐서 상세히 조각되어 있다. 37개의 천국은 왕궁에서 즐겁게 노니는 모양으로 설명하고 있고, 32개의 지옥에서는 벌을 받는 모습과 고통을 받는 모습들을 조각하였다. 휘장 모양과 압싸라들에 의해 이 천국과 지옥을 구분해 놓았으며, 맨 밑은 가루다의 행렬로 되어 있다.

 지붕은 1947년에 번개에 맞아 파손되었으나 프랑스가 복구하였다. 회랑의 시작점에 말을 탄 사람들은 금박을 입혔던 흔적이 있다. 벽의 아래 부분에는 군데군데 심하게 파손이 되어 시멘트로 메워져 있다.

 최고 재판관인 '야마'가 물소를 타고 부하들을 지휘하며 서기관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과 지옥을 가리키고 있으며, 그 앞에서 죽은 영혼들이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야마의 저승사자들이 아래쪽으로 가는 함정 문으로 악한 자들을 밀어내고 있으며, 그 밑에는 욕심 많은 자의 몸을 톱질하고 있는 등의 고문과 처벌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법을 어긴 자는 뼈를 부러뜨리고 있다. 다른 벌을 받는 자들은 족쇄를 차거나 머리에 못들이 박혀있기도 하다. 천국의 왕궁은 띠같이 연결된 가루다와 압싸라들이 하늘에서 춤추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동쪽 회랑 1(남쪽 방면)-유해교반(젖의 바다 휘젓기)

 이곳은 앙코르 왓에서 가장 유명한 부조 회랑이며, 그 내용은 인도의 창조설화인 '바가바타-푸라나'에서 유래한다. 악마들과 신들이 끝없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 비슈누가 이 전쟁을 중재하여 우유의 바다를 저어서 불로장수의 약을 만들자고 제의하여 젖의 바다를 젓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온갖 생명체들이 탄생한다는 내용의 전설이다.

 바수키(큰 뱀)의 몸통이 유액(乳液)의 바다를 휘젓는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 이 젓는 동작을 시작하기 위하여 신들과 악마들은 뱀의 몸을 비꼰다. 악마들은 뱀의 머리를 잡고 있고, 신들은 꼬리 쪽을 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축이 되어 리듬 있게 전후로 당기기 시작하여 바다를 휘돌리며 젓기 시작한다.

 

 

 신들과 악마들의 이 작업은 3명이 지휘하고 있는데, (크게 조각되어 식별이 쉽다) 이들은 제일 위에 '인드라'신, 그 밑에 '비슈누'신 그리고 제일 오른쪽에는 원숭이 모양을 한 '하누만'신 등으로 뱀을 간지르고 있다.

 

 우유의 바다는 신들과 악마들이 휘저어 불로 장수의 영약인 '암리타'를 만든다. 또 젖의 바다를 휘젓는 이유는 잃어버린 보물들, 즉 불로 장수의 영약과 행운의 여신 '락슈미', '인드라'의 흰 코끼리 같은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의 추구가 바로 행운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비슈누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일을 1000년 동안 주도하고 있다.

 전체 장면은 3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아래 부분은 여러 가지 실체 또는 추상적인 물고기 및 바다 짐승들로 조각되어 있고, 큰 뱀으로 경계를 두었다. 중간 부분은 한 쪽에는 92명의 악마들(툭 튀어나온 눈과 투구를 쓰고 있다)과 반대편에 88명의 신들(원추형의 모자를 쓰고 있다)을 조각하였다. 이들은 같이 큰 뱀을 잡고 젖의 바다를 휘젓고 있다. 그리고 거북이는 비슈누 신의 다른 모습으로, 오래 동안 휘젓는 행위를 통하여 축이 되었던 만다라 산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거북이의 모습으로 변하여 자기 등위에 만다라 산을 얹어 세상이 가라앉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뒤흔드는 동안 보물들을 찾아냈고 흔들리는 물결 속에서 바로 앙코르 왓에 1500개의 부조로 새겨진 춤추는 선녀 압쌀라가 탄생하게 된다. 이 휘젓기로 인하여 양쪽에서 신들이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고통에 찬 뱀 바수키는 무서운 독을 뿜어 바다를 덮는다. 이 독에 의해 신들과 악마들이 죽게 될까 봐 브라흐마가 나타나 시바에게 이 독을 마셔 없애달라고 요청하고 시바는 그 요청을 받아 그 독을 마셔버리지만, 목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게 된다. 시바가 독을 마시자 그 결과로 불로장생의 영약인 암리타가 액체로 되어 흘러내리게 된다. 악마들이 이 액체를 받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 비슈누는 이 때 아름다운 마법의 여신 마야로 변신하여 이 암리타를 다시 모으고 있다. 그러나 신들은 이 암리타를 얻기 위하여 다시 엄청난 전쟁을 치르게 된다.

 

 

벽에 남은 기록문

 동쪽 회랑의 중간쯤을 막 지나면 앙코르 왓이 불교 사원일 때인 18세기 초에 새겨진 흥미 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그 내용은 마을의 촌장이 그의 아내와 자식의 뼈를 묻어 작은 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며 그 무덤은 지금 회랑의 앞 멀리에 비록 상태는 나쁘지만 아직도 남아 있다.

북쪽 회랑 1(동쪽 방면)

 회랑의 처음 시작에는 크리슈나로 변신한 비슈누가 가루다의 어깨 위에 앉아 있다. 그 뒤에 불의 신 아그니(팔이 여러 개)가 코뿔소 위에 앉아 있다. 이러한 장면이 여러번 반복해서 보인다. 성을 둘러싼 성벽에는 불이 타오르고, 가루다를 탄 크리슈나와 신들의 군대의 접근을 막고 있다. 이 크리슈나가 나오는 장면도 여러번 반복된다. 가루다는 신성한 강인 갠지즈 강에서 물을 떠다가 이 불을 끄고 있다. 코뿔소를 타고 있는 팔이 여러 개인 악마 바나가 반대편에서 접근하고 있다. 제일 오른쪽에는 '크리슈나'(1000개의 머리를 가지고 손을 가슴 앞에서 가리키고 있다)가 시바 앞에 꿇어앉아 악마 바나를 살려달라고 빌고 있는데 이때 시바는 카일라사 산에서 아내 파르바티와 아들 가네쉬(머리가 코끼리)와 같이 앉아 있다.

 

 

북쪽 회랑 2(서쪽 방면)

 바라문 신전의 21명의 신들의 행렬이 고전적인 상징물들을 들고 전통적인 모습으로 말을 타고 있다. 병사들이 뒤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앞에서는 한 신이 악마와 싸우고 있다. 신들이 계속 연이어 나타나고 있는데, 불의 신인 아그니 신으로 그는 코뿔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고, 부의 신인 쿠베라가 야차의 어깨 위에 보이며 전쟁의 신인 스칸다(머리와 팔이 여러 개)가 공작 위에 앉아 있다. 인드라 신은 코끼리 위에 항상 앉아 있다. 4개의 팔을 가진 비슈누가 가루다 위에 앉아 있으며, 머리가 층층이 달린 악마가 칼을 휘두르고 있다. 죽음과 심판의 신인 야마가 칼과 방패를 들고 소가 끄는 마차 위에 앉아 있다. 시바가 활을 쏘고 있으며, 창조신인 브라흐마가 신성한 거위를 타고 있다. 태양의 신인 수리야는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있으며, 물의 신인 바루나는 짐승처럼 자갈을 물린 머리가 5개인 큰 뱀 위에 서있다.

 

 

북서쪽 모퉁이의 작은 방

 이 작은 방의 벽화는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면서 본다. 대개의 조각이 아직 보존 상태가 좋다.

o 북 쪽

- 오른편 : 왕궁의 여인들의 방 풍경

- 중앙 출입문 윗편 : 숲 속에서 시타를 납치하려는 장면

- 왼편 : 라마야나 서사시 중의 한 장면

- 왼편 위 : 원숭이들과 장작더미

 

o 서 쪽

- 오른편 : 거위들이 끄는 마차를 탄 라마가 아유타 왕궁으로 개선하는 장면

- 중앙의 출입문 위 편 : 원숭이들에게 둘러싸인 라마의 동생 락스마나

- 왼편 : 숲 속에서 시타와 하누만의 대화 장면 / 하누만이 시타에게 라마의 반지를 주고 있다.

 

o 동 쪽

- 오른쪽 : 팔이 4개인 비슈누가 가루다 위에 있다.

- 역시 가루다를 탄 크리슈나가 악마를 죽이고 빼앗은 마니파르바타 산을 돌고 오고 있다. 군사들이 죽은 악마들의 시체를 운반하고 있다.

 

o 남 쪽

- 오른편 : 4개의 팔을 가진 앉아 있는 비슈누, 주변에 압싸라들이 둘러싸고 있다.

- 중앙의 출입문 윗편 : 라마와 락스마나가 머리가 배에 붙어 있는 괴물과 싸우고 있다.

- 왼편 : 라마가 활쏘기 시합에서 이기고 있다. 라마와 시타가 같이 앉아 있다.

 

 

 

중앙의 출입문

- 윗편 : 연합군들의 회의 모습

- 왼편 : 라마와 동생 락스마나

- 오른편 : 원숭이 왕 수그리바

- 위 : 압싸라

- 아래 : 9명의 신들 / 말이 끄는 마차를 탄 '수리야', 야차 어깨 위에 선 '쿠베라', 거위를 탄 '브라흐마', 공작을 탄 '스칸다', 말을 탄 신, 머리 3개의 코끼리를 탄 '인드라', 물소를 탄 '야마', 뿔 소를 탄 '시바', 사자를 탄 '파바르티'.

 

 

서쪽 회랑 2(북쪽 방면) - 원숭이의 전투 장면 1 | 원숭이의 전투 장면 2

 이 회랑의 부조는 우리는 서유기로 익숙한, 그러나 인도와 그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많은 나라에서는 라마야나로 알려진 인도의 가장 유명한 대 서사시를 부조해 놓은 것으로, 이 부분은 특히 랑카(스리랑카)의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수많은 원숭이와 사람들과의 전투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이 아니라 랑카 왕국의 악마들이다.

 라마야나는 기원전 5-6세기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한 개인보다는 세월과 함께 여러 사람의 이야기가 첨가되어 방대하게 집대성된 것으로 보여진다.(라마야나의 내용은 기원전 5-6세기가 아니라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그보다 훨씬 전 옛날의 얘기다. 중국의 서유기도 인도의 라마야나 서사시가 중국식으로 개편된 것이다.)

 라마야나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인도만의 문학이 아니다. 이미 그 옛날 페르시아어로도 번역이 되었고 중국 실크로드의 돈황 석굴에서도 티베트어와 코탄어로 된 라마야나가 발견되었으며 몽고어로도 번역이 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미 자신들의 문학으로 토착화되었다.

 캄보디아는 말할 것도 없고 미얀마, 라오스, 태국, 말레이시아 모두 그런 내용이 문학은 물론, 건축, 무용, 음악에 반영되어 있다(인도네시아 발리의 유명한 춤인 일명 원숭이 춤이라고 알려진 게짝 댄스도 라마야나에서 나오는 원숭이들에서 유래가 된 춤이다). 또한 태국의 현재 왕은 자신들을 라마 1세, 2세 등으로 라마야나의 주인공이며 인도인의 영웅인 라마의 이름을 따다 붙였으며, 거리 이름에도 라마라는 이름이 등장할 정도다. 그리고 유명한 방콕의 왓 프라깨우(에메랄드 사원) 에도 라마야나를 주제로 한 벽화가 있다. 또한 방콕 근교에 있는 아유타야라는 도시명은 바로 라마야나의 주요 무대며 주인공 라마의 탄생지인 인도 중부의 도시 아윳디아에서 온 것이다.

 라마야나의 주인공 라마는 우리와도 연관이 있다. 현재 알려진 것과 같이 가야의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이 인도의 아윳디아 국에서 온 것이라면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핏속에도 라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아니 우리 모두의 핏속에 흐르고 있을 것이다.

 자세한 얘기는 라마야나 항목을 참조하고 간단하게 요약을 한다면 코살라국의 왕자 라마의 왕비 시타가 랑카의 악마왕 라바나에게 납치된다. 천신만고 끝에 라마는 원숭이들의 도움을 받아 악마들과 싸워서 자신의 아내를 되찾는다는 얘기다.

 얘기는 간단하지만 그 과정에서 다르마(법, 정의, 의무, 도리)에 대한 교훈적인 얘기, 힌두교 신들에 대한 설화, 그리고 박진감 넘치는 무용담들이 얽혀서 흥미진진한 전 인도 민중이 사랑하는 서사시가 된 것이다. 특히 여기서 등장하는 원숭이 장군 하누만은 영웅적 행위로 라마를 도와서 지금도 인도에서는 원숭이 신 하누만을 모시는 사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원숭이 신은 후일 중국으로 건너가 손오공이 되는 것이니 바로 손오공의 원조로 볼 수도 있다.

 라마가 수그리바의 어깨 위에 서서 활을 쏘고 있고, 동생 락슈마나와 악마 라바나 옆에 서 있다. 가까이에 악마의 왕 라바나가 신화에 나오는 사자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고, 조금 멀리에는 랑카까지 라마를 위해 다리를 놓았던 원숭이 날라가 그 가운데서 두 사자의 머리에 기대어 있다. 날라는 막 사자에게 어깨를 물린 자기 육신을 버리고 있다. 원숭이 왕자는 자신과 악마를 땅에 팽개치는 투구를 쓴 코끼리의 상아를 부러뜨리고 있다.

 이와 같이 앙코르 왓에서는 서쪽 회랑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회랑의 오른쪽(남쪽방면)은 마하바라타, 왼쪽(북쪽 방면)은 라마야나를 배경으로 한 부조가 새겨진 것이다. 인도의 이 두 대서사시가 반영된 것만 보더라도 앙코르 왓이 얼마나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앙코르 왓의 건축 양식은 인도에는 보이지 않는 독특한 것이니 바로 이점이 앙코르 왓이 세계 문화 인류 유산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⑪ 회랑 ~ 중앙사원의 꼭대기까지

▷ 1층과 2층을 잇는 통로

 회랑을 다 돌아본 후 조금 전의 서쪽 정문으로 와서 계단을 오르면 2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이 2층의 벽을 자세히 보자. 갖가지 자세를 취한(하나도 똑같은 자세가 없다고 한다) 아름다운 춤추는 선녀 압쌀라 부조들이 벽을 따라 끝없이 늘어서 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곳도 십자형의 회랑이 있다. 이곳은 지붕으로 덮이고 사각기둥들이 대칭으로 늘어서 있는 2개의 회랑과, 4등분으로 나뉘어 있는 중앙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는 등, 매우 독특한 건축기법으로 지어져 있다. 이 회랑의 가운데 공간에 있는 기둥에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비문이 새겨져 있다.

 1층과 2층을 이어주는 통로의 오른쪽에는 1,000개의 부처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구석에 몇 개의 부처상이 있을 뿐이다.(이 불상들은 후대의 사람들이 갖다 놓은 것으로, 앙코르 왓은 원래 힌두교 사원이다.) 그리고 왼쪽은 메아리의 방이라고 부른다. 여기서는 이상한 메아리가 울린다. 이 메아리의 방 왼쪽 모서리의 구석에 등을 대로 서서 가슴을 치면 울리는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중앙 사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십자형의 회랑 중앙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2층의 왼쪽과 오른쪽 끝 양편에 조그만(?) 석조물이 보이는데 이것도 도서관이라 알려져 있다.

 

▷ 2층 내벽의 압싸라 조각들과 중앙성소으로 올라가는 계단

 2층의 회랑 바깥차수는 100 x 115m이며 외부에는 장식이 없다. 아마 승려들과 왕이 묵상과 수도를 할 수 있는 분위기를 위해서였을 것이다. 2층 회랑의 밋밋한 외부는 화려한 장식이 대신하고 있는데, 1,500명이 넘는 아름다운 천상의 무희인 압쌀라가 끝이 없이 나타난다. 이 압쌀라들은 우유의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2층의 공간에 막 들어서면 압쌀라 상들이 모두 비슷하게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모두 다른 자세들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무희상들은 아직 그 어떤 조각도 압도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정교한 머리카락, 머리 장식 그리고 보석 장신구들을 하고 있다.

 앙코르 왓에서 묘사하고 있는 압싸라들은 보통 2-3명씩 같이 모여 춤을 추고 있으며, 탑의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 형식과는 다르게 거의 정면을 보고 있다. 17세기 캄보디아의 시인이었던 "팡"은 이 압싸라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이 수만의 우아한 모습들은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 않고, 정신이 새로워지며, 마음을 뜨거운 감동 속으로 빠지게 한다. 그들은 사람의 손에 의해 조각된 것이 아니라 분명 신들에 의하여 탄생한 것이다. 살아 생동하고 사랑스러우며 숨쉬고 있는 여인들이다.

 다시 정문 쪽으로 와 계단을 올라(프랑스인들이 설치해 놓은 철계단이 옆에 있다) 세 번째 문을 통과해 3층으로 오르면 갑자기 눈앞에 가파른 계단이 나오고 위로 우뚝 솟은 탑이 보인다. 그리고 주변에 솟은 탑들이 함께 보이는데 바로 이것이 멀리서 보였던 그 탑들이다. 여기도 벽을 따라 수많은 압싸라들이 보인다.

 그리고 좌우로는 조그만 석조물들이 또 보이는데 이곳 역시 도서관들이다. 아마도 하나씩 이 신전을 오를 때마다 필요한 도구나 향료, 음식들을 보관해 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공간은 사람이 없을 때 들어서면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채색의 사암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할 때면 꼭 무슨 신성한 곳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앙코르 왓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원들은 사람이 없을 때 방문하는 것이 좋다(하지만 그런 타이밍을 잡기는 참으로 힘들다).

 지성소(至聖所)인 중앙 탑을 향해 오르는 계단은 매우 가파르다. 사람이 올라 다니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데, 70도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왜 사람이 다니는 계단을 만들었으면서 이렇게 경사를 가파르게 했을까? 학자들은 추정하기를 원래 중앙 사원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신을 위한 공간이라고 한다. 물론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사람들이 드나들기는 하지만, 사제들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 공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강하게 주기 위하여 이렇게 가파른 계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앙성소

 3층에는 왕과 승려들만 출입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다른 층과 같이 별도로 긴 회랑은 없지만 5개의 중앙 탑이 서 있다. 이 탑 중 하나는 사원의 가장 신성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각 변이 60m인 정 사각형의 바닥은 그 높이가 13m이며, 2층에서부터 40m이상의 높이에 있다. 40계단으로 된 12쌍의 층계가 각 면의 정 중앙과 가장자리에 2개씩 위치하고 있어, 3층으로 오를 수 있는데, 그 경사도가 70도나 되어 매우 가파르다.

 이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서쪽 중앙이 더 완만하며 오르기가 쉬우나 현기증이 있는 사람은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시멘트로 계단을 보강해 놓은 남쪽 중앙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이 3층에서는 앙코르 왓 건축구조의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 이 3층은 십자형으로 나누어져 회랑과 4개의 포장된 공간이 있다. 현관과 기둥이 있는 입구 탑들은 각 계단의 위에 위치하고 있다. 2층으로 늘어선 기둥들이 있는 양편에는 통로가 있어서 중앙성소의 입구탑과 연결된다. 최상부층의 코너에는 4개의 탑들이 우뚝 서 있다. 이 3층은 또한 외부가 2중 기둥과 창문과 난간들이 있는 좁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5개의 탑 중 가장 높은 것이 중앙성소로(42m), 신성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

 원래 이 성소는 사방을 향해 4개의 현관이 있었다. 성소의 내부 바닥에는 수직으로 된 함정이 있었는데, 15세기 중반에 왕국이 피난 간 후에 메워졌다. 500년 후, 프랑스의 건축가들이 이 막혀진 바닥의 함정을 발견하였는데, 27m를 파내자 그 바닥에 금붙이들이 나왔다고 한다.

 정상에서 보면 앙코르 왓의 배치와 구조가 나타나게 된다. 이 경관이야말로 조화와 배열을 창조한 천재적인 크메르 건축예술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경관이다. 상층의 바깥회랑을 돌아보면 주변 경치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서쪽의 통로와 중앙 탑 군도 잘 볼 수 있다.

 중앙탑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의 핵심이 되는 곳에 가장 성스러운 곳인 중앙성소가 있다. 즉 이 사원의 중심이며 동시에 우주의 중심에 있는 메루산, 그 메루산의 중심이니 핵심 중의 핵심이 되는 곳으로 바로 절대자가 거주하는 상징적인 곳이다.

 지성소는 동서남북에 네 개의 방이 있고 각각의 방안에는 갖가지 자세들의 불상들이 안치되어 있다. 앙코르 왓 사원은 힌두교 사원이지만, 15세기 이후 불교화 되면서 후대의 불교 신도들이 갖다 놓은 불상들이다. 아마도 예전에는 비슈누 신상이 있었을 것이다.

 최근 앙코르 왓의 훼손이 심해지는 것을 우려한 당국이 3층 중앙탑으로 오르는 길을 폐쇄하고 서쪽으로 나있는 모든 창문 등 서쪽으로 나가는 통로는 폐쇄시켰다.

 

 

앙코르의 저주

 과거부터 북쪽 밀림 속의 큰 도시, 앙코르와트에 가면 반드시 큰 저주가 따른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앙리 무오는 5일 동안 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반쯤 묻힌 유적을 탐험하였다. 무오는 앙코르를 발견한 다음 해인 1861년 9월 여름 열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이는 신들의 건축물을 발견하여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앙코르 톰(Angkor Thom)

 앙코르 톰은 앙코르 왓과 함께 앙코르 문화의 쌍벽을 이루는 곳으로 앙코르 왓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한변이 3km의 정사각형 모양인 앙코르 톰은 높이 8m의 붉은 흙인 라테라이트 성벽과 너비 약 100m의 수로로 둘러싸여 있다.

 앙코르 톰과 중앙 사원인 바이욘은 크메르왕조가 붕괴되기 직전인 1,200년 자야 바르만 7세에 의해 지워진 캄보디아 사원중 최후이며 바로크양식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곳으로 인구 100만의 계속 발전하던 도시였으나 현재는 돌로 만든 기념비만이 옛날의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앙코르 톰에는 미소를 띄며 눈을 감고있는 자야바르만 부처와 남쪽문의 돌 거인상, 나가(Nagas), 코끼리의 테라스, 레퍼왕 사원, 첫번째 복도 내부의 양각조각 등이 있으며, 이들이 우주속의 위대한 왕국을 표상하는 앙코르 톰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바이욘 사원(Bayon)에서는 동서와 남북으로 뚫린 두 개의 도로에 의해 도시가 4등분된다. 앙코르톰의 북쪽에는 왕궁이 자리잡고 있고 그 중앙의 수로에 걸쳐서 바이욘 사원이 건립되었다. 북대문, 서대문, 남대문을 갖추고 동쪽에는 승리의 문과 사자의 문이 있다. 왕궁의 왼편에는 피미안나카스 사원(Pimean Akas)과 바푸욘 신전(Baphuon)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가 있다.

 당시 이곳을 여행한 중국인에 의하면 성 입구의 문지기들은 죄인과 개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성 안에 둥근 지붕으로 된 귀족의 집은 동향이고, 왕은 이곳에서 하루에 두번씩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호화스러운 옷을 입고, 국사를 처리하였다고 한다.

 

 

남문(South Gate)

 일반적으로 앙코르 톰 관광을 시작하는 곳이다. 남문을 비롯한 각 성문앞에는 해자를 가로 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는데 이 다리 양옆에는 각각 54개의 석상이 서 있다. 석상들은 힌두교의 창세 신화인 유해교반(乳海攪拌 : 젖의 바다 휘젓기-앙코르왓 동쪽 회랑에 부조되어 있다.)을 형상화한 것으로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무지개를 의미한다. 사람들이 이 다리를 지나 앙코르 톰으로 들어감으로써 인간세계의 존재에서 천상의 존재로 변화하는 것이다. 주변에 난간을 형성하고 있는 석상들은 왼쪽은 악의 신, 오른쪽은 선의 신이다.

 

 

코끼리 테라스(Elephant Terrace)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

 왕궁의 정문인 동쪽 입구에 약 350m 가량 늘어선 단상으로서 왕이 행사나 군인들의 사열을 관장하던 곳이다. 동쪽 광장을 향하고 있는 단상은 3개인데 양옆은 코끼리들이 부조되어 있고 중앙쪽의 단상은 가루다가 받치고 있다. 코끼리 테라스에 올라가면 서쪽 아래 중앙광장이 한눈에 보이게 되는데 과거 이곳의 영광스런 모습들이 금새 떠올려지게 된다. 또한 당대 세계 최고의 권력과 기품을 가진 왕의 위용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광장 앞쪽 맨 끝에는 12개의 탑이 우뚝 서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용맹스런 군인들의 모습과도 같아 당시 파수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이 탑들 뒤에는 끄레응(Kleangs)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은 창고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따라서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접대한 곳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큰 곳이다.

 

머리가 다섯 달린 말

 큰 나무의 그루터기가 가운데 박힌 주도로에서 갈라지는 보도 앞 계단에는 내부 담벽이 있고, 그 담벽의 기초 부분에는 큰 말의 조각이 있다. 이 단 위에서 오른쪽으로 문둥이 왕 테라스를 향하면 조각이 된 내부 담벽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 옛 건물의 내부 중 일부였던 것 같다. 이 조각은 '머리 다섯 달린 말' 조각인데 매우 생동감이 있으며, 조각 기술이 매우 뛰어나다. 말 위에 층층으로 된 겹 양산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왕의 말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말은 압쌀라들과 무서운 모양의 악마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악마들은 몽둥이를 들고 겁먹은 인간을 쫓고 있다.

 어떤 프랑스 역사가는 이 장면이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eshvara, 아마티불)이 말인 '발라하(Balaha)'로 변신한 것이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최근 코끼리 테라스를 보수하던 중 이 말 조각 근처 옆에서 숲에 파묻혀 감추어져 있던 같은 크기의 머리 다섯의 말을 또 발견했다.

 

 

예술적 가치가 높은 상징물, 레퍼왕 테라스(The Terrace of the Leper King)

 13세기, 자야바르만 7세

 코끼리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는 이 테라스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외벽과 나란하게 안쪽에 겹으로 벽이 되어 있다. 프랑스가 이곳을 보수하면서 바깥벽과 비슷한 구조의 부조가 된 두 번째 벽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일부 건축 전문가들은 이 두 번째 벽이 건축 설계를 변경하여 축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역사 학자들은 이것이 지상의 메루산과 똑같은 지하의 메루 산자락의 일부를 뜻하는 것이라고 전설의 내용을 앞세우기도 한다.

 현재 이곳에 있는 문둥이 왕(Leper King)의 상은 복제품이다. 실물은 프놈펜의 국립박물관에 있다. 문둥이 왕은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앙코르에서 보기 드문 조각으로 학자들 중에는 이것이 '자바'의 스타일이라고도 말한다. 이 특별한 조각의 또 다른 특징은 문둥이 왕이 옷을 거의 벗고 있고, 남성 심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 조각이 문둥이 왕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어떤 역사 학자는 이 조각이 부의 신인 '쿠베라'를 의미한다고도 하는데 그것은 쿠베라가 문둥병자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조각에는 14-15세기의 문자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뜻은 '야마의 심판'이란 의미로 야마(염라대왕)는 죽음의 신 또는 심판의 왕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한 학자에 의하면, 대부분의 크메르 유적지가 사당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왕을 화장한 후 그 유골을 모셔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둥이 왕 테라스에 왕들의 전용 화장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소위 이 '문둥이 왕'의 조각은 바로 야마를 상징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을 제시했다.

 캄보디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왕 앞에 엎드리기를 거절한 한 신하를 왕이 칼로 베었는데, 그 때 그의 침이 왕에게 토하여져 왕이 나병에 걸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역사가들은 자야바르만 7세가 나병에 걸려서 그 바람에 많은 병원을 짓게 된 것이라고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왕이 문둥병자였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문둥왕 테라스 기초의 단의 길이는 25m이며, 외부에는 사암을 덮어 쌓아 조각을 하였다.

 외벽의 부조는 주로 신화의 주제들인 나가(뱀), 가루다, 팔이 여러 개인 거인들, 칼이나 몽둥이를 들고 있는 모습들, 반나체의 여인상, 등의 조각이 매우 깊게 양각되어 있다. 북쪽의 외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내벽의 조각은 보존 상태가 좋다. 전체적인 주제는 외벽과 비슷하나 코끼리, 강 등의 모양이 커튼처럼 아래 부분에 조각되어 있다.

 

 

옛 왕궁터(The Old Palace : 피미안 나카스(Phimeanakas))

 10세기 후반-11세기 초반, 라젠드라바르만 2세

 옛 왕궁터인 피미안나카스는 앙크로톰 내부의 바푸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코끼리 테라스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측면을 둘러 걸어나오면 문둥왕의 테라스에 도달한다. 승리문의 끝에 연결된 코리리테라스의 계단으로 정면으로 들어가면 된다.

 11세기 수르야바르만 1세에 시작되어 유다야디트야바르만 II 에 의해 힌두교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피미안나카스 사원(The temple of Phimeanakas)은 왕궁의 벽으로 둘러싼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주달관은 이곳을 황금탑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원형은 황금의 첨탑들로 올려진 것 같다. 이 사원은 사암벽돌을 쪼개어 올린 것으로 장식이 거의 없다.

 전설에 의하면 앙코 대제국의 왕궁 안에 황급탑이 있었는데, 이곳에는 머리가 아홉 개 달린 사악한 악령(나가)이 살았다고 한다. 이 악령은 매일밤 탑 속에서 왕비나 상궁과 동침을 하기 전에 크메르왕 앞에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만약 왕이 하루라도 빠지면, 그는 목숨을 잃는다고 믿었다. 이렇게 해서 왕의 크메르는 계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두번째 수도였던 왕궁은 나중에 증축된 두번째 건물에 의해 두배로 올려진 5m 높이의 라테라이트의 벽 안에 감싸져 있다. 피미안나카스를 둘러싼 벽 중앙에 라테라이트로 된 사각형의 3층 피라미드 형식의 건축물은 왕실 전용 예배당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복합 건물은 전망을 위해 높이를 줄였다. 탑에 올라가보고 싶은 사람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서쪽 계단을 이용한다.

 현재 남아있는 옛 왕궁터의 흔적으로는 외벽을 감싸고 있었던, 코끼리테라스와 문둥왕의 테라스 그리고 중앙의 탑이 있다.

 

 

앙코르톰을 대표하는 사원인 바이욘(The Bayon)

 12세기 말-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

 앙코르톰을 대표하는 사원인 바이욘 사원은 위대한 건설자인 자야바르만 7세(Jayavarman VII)가 12세기말에 앙코르톰 중심에 건립한 불교 사원으로 약 50개의 탑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거대한 바위산 모양으로 건설된 이 사원은 앙코르의 유적 중 유일하게 우물을 갖추고 있다.

 바이욘 사원 탑에는 웃는 모습을 하고 있는 자야바르만 2세로 추정되는 관세음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부처와 동일시하는 왕의 위력을 세상에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화랑의 벽면에는 그 당시 크메르인들의 역사와 일상 생활을 책대신 기록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시작하여 1층으로 가면 중간 중간에 불상이 있고, 향불 공양을 올리라고 권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주로 공양보다는 시주로 주게 되는 $1에 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2층으로 올라가면 자야바르만 2세로 추정되는 거상들이 기다리고 있다.

 흔히 이곳을 앙코르왓과 견주기도 하지만 앙코르왓이 힌두교의 철학에 의해 지어진 사원인 반면 바이욘 사원은 불교 양식에 의해 지어진 곳이다. 따라서 설립 목적이나, 설계, 건축과 장식에 있어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지어졌으므로 바이욘과 앙코르왓을 잘 비교해 보면 불교와 힌두교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바이욘 사원은 앙코르 왓과 함께 가장 유명한 앙코르 유적지 가운데 하나이다. 두 사원은 예술적인 측면에서는 비슷하나, 건축 목적, 설계, 건축 기술과 장식에서는 매우 다른 점을 갖고 있다. 주변의 울창한 밀림이 이 사원을 가리고 있는 바람에 이 사원이 앙코르톰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또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바욘이 야소바르만 1세의 사원으로 오인되어 건축 연대를 9세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5년 벽에 새겨진 기록에서 관음보살에 관한 내용이 발견되어 이 사원이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세워진 불교 사원이었음을 알게되었다.

 건축연대가 밝혀지기는 했지만, 바욘은 아직도 앙코르 유적지 가운데 수수께끼 같은 사원으로 남아있다. 이 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를뿐더러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 사원은 앙코르 왓이 지어진지 100년 후에 지어졌다. 기초구조와 사원의 초기 건축물들은 폐허가 되어버려 알아낼 수 없게 되었고, 단지 이 사원이 왕궁의 한 가운데에 있으므로 메루산의 의미로 지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이다.

 이 사원의 중간부분은 제 2단계 건축 공사 때에 확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의 바욘 사원은 제 3단계 공사 때 완성된 것이며, 예술성과 건축 기법은 앙코르 후기 때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바욘의 건축 규모와 구조는 다방면에서 장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각 부분들은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서로 평행으로 맞추어져 있다.

 이 사원의 특징은 54개의 탑에 200여 개의 큰 얼굴이 사면으로 조각되어 이 사원을 위엄이 가득한 곳으로 보이게 한다. 약간 굴곡진 입술과 위 눈꺼풀을 내리 감아 그늘진 눈을 한 이 얼굴은 그 표정을 읽기 어렵게 한다. 흔히 관음보살(보디사트바, 아바로키테스바라)이라고 믿어지고 있지만, 왕의 얼굴이라고도 한다. 이 얼굴의 특징은 넓은 이마, 내려감은 눈, 넓은 콧등, 끝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미소짓는 두꺼운 입술 등이다. 이 미소 때문에 '앙코르의 미소'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사면상

 바이욘의 가장 큰 특징은 54개의 탑으로 현재는 36개만 남아 있다. 탑마다 조각된 큰 얼굴은 200여개로 4면에 조각된 사면상은 사원을 위엄있게 보이게 한다. 사면상은 불교사원인 것과 연관해 관세음보살(아발로키테스바라)의 얼굴이자 그의 화신인 자야바르만(Jayavvarman) 7세의 얼굴이기도 하다.

 자야바르만 7세는 캄보디아에서 최초로 마하야나불교(대승불교)를 들여온 왕으로 자신을 중생을 구제하는 관세음보살로 믿고 대승불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갖각지 사원과 빈민구제시설등을 많이 지었다.

 일출시간에는 관관객들이 앙코르왓에, 일몰시간에는 프놈바켕에 몰리기 때문에 바이욘 사원 또한 일출 일몰을 구경하는데는 아주 좋다. 특히 일출과 일몰시간에 빛에 따라 다양한 표정으로 바뀌는 사면상을 볼 수 있어 신비감을 더해 준다.

 

구 조

 바욘은 3개의 층을 이루고 있는 구조이다. 첫 층과 2층은 그 벽에 부조가 조각된 회랑이 있는 사각형 구조이고, 3층 중앙 사원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비록 3층 구조이지만, 그 속은 회랑이 미로처럼 되어 있고, 통로들이 실제로 구별이 힘든 층들로 이어지는 계단들로 매우 복잡하게 되어 빛의 조절과 좁은 미로와 낮은 천정 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 바욘의 동쪽 입구에 들어서면 첫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이 바욘사원의 1층 외벽의 회랑이다.

 이 회랑은 8개의 고푸라에 세워졌는데, 각 모퉁이와 각 변 중앙에 하나씩 있다. 이 고푸라는 모두 십자형의 구조를 하고 있다. 회랑들은 원래 목조 지붕으로 덮여 있었던 것 같다. 동쪽 고푸라의 앞에 있는 기둥에 조각된 압쌀라들은 바욘 특유의 스타일로서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압쌀라의 춤 모양이 되풀이된 것이지만, 그 처리 방법이 모두 다르다. 전통적인 기법과 구성은 3명의 압쌀라들이 연꽃 밭 위에서 춤추는 모습이다. 주로 삼각형의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의 압쌀라 무리가 양쪽보다 조금 크게 조각되어 있다. 배경은 무희들과 꽃들과 잎사귀 무늬의 패턴이 융단처럼 가볍게 에칭된 조각들로 섞여져 잘 어울리고 있다. 또 3명의 무희들이 통상 한 군을 이루지만 한 명이나 두 명의 압쌀라만 있는 경우도 있다.

 

회 랑

 바욘을 둘러싸고 있는 벽은 양각부조가 조각되어있는 회랑으로 되어있다. 내부 회랑에는 주로 신화적인 장면을 묘사되어 있고, 외부 회랑에는 시장, 고기잡이, 닭싸움 같은 일상적인 생활, 곡예사 등이 등장하는 축제, 그리고 참족과의 전투장면 등의 역사적인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 곳의 부조들은 앙코르 왓의 부조에 비해 더욱 깊게 조각되어졌으나 묘사에 있어서는 매끄럽지 못한 편이다. 부조들은 대부분 한 벽에 두, 세 개 층으로 구분되어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가깝고 먼 것, 즉 원근을 나타낸 것으로, 하층의 부조는 전경, 상층의 부조는 원경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바욘 회랑의 설명은 동쪽 입구의 중앙에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이루어지므로 항상 유적을 오른쪽에 두고 관람을 해야한다.

 

⊙ 외부회랑

 외부 회랑은 일상생활의 장면이 매우 재미있게 묘사되고 있는 곳으로, 모든 이들에게 개방되어 졌던 곳이다. 그 외의 나머지 회랑들은 왕과 수도자들에만 제한되어 출입이 가능했다. 외부 회랑의 부조들은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기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회랑의 일부 부조는 작업이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것은 부조의 가장자리 같은 곳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o 동 회랑(East Gallery)

 동 회랑에 조각되어진 부조들은 매우 훌륭하다. 이곳은 위에서 아래로 단계로 구분되며, 열대의 수목들이 배경을 장식한 가운데 군사들의 행렬을 표현하고 있다. 상부의 틀에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전사가 조각되어 있고, 하부의 틀에는 턱수염, 독특한 머리모양, 의상 등으로 보아 중국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조각되어있다. 악사가 전사를 보조하고 있고, 안장 없이 말을 탄 기수가 악사 옆에 묘사되어 있다.

 코끼리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들은 군대의 지휘자들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 중 제일 상부에 있는 휘장과 층층으로 된 파라솔 밑에 앉아있는 지휘관은 자야바르만 7세이다. 기병대와 왕실의 여자들이 왕을 따라 조각되어 있다. 군사행렬의 끝부분에는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는 목조 2륜 짐차로 군대를 위한 음식을 운반하고 있다. 요리를 하는 사람의 모습도 아래에서 볼 수 있다.

 군사행렬의 묘사가 이어지며 야자수 나무에 올라 탄 원숭이 같은 일상적인 생활의 장면이 뒤를 이어 조각되어 있다.

 동 회랑 제일 끝부분의 층층으로 된 건물은 상점을 표현한 것으로, 아래의 두 층은 중국인들, 그 위는 크메르인들을 묘사한 것이다.

 

o  남 회랑(South Gallery)

 남 회랑의 초반에 등장하는 부조들은 바욘에 나타난 조각들 중 가장 정교한 조각들 중의 하나이다. 부조는 1177년 똔레쌉 호수에서 있었던 크메르(머리에 아무 것도 안 쓴 조각)와 참족 간의 해상 전투를 묘사한 역사적인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연꽃을 뒤집어 놓은 듯 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어 쉽게 식별이 가능하다. 배의 뱃머리는 다양한 장신구로 장식되어 있으며, 노젓는 사람과 창, 활, 방패로 무장한 전사들이 묘사되어 있다.

 하부 층에는 똔레쌉 호수의 연안을 따라 일상적인 생활을 묘사한 풍속화로 장식되어 있다. 한 여인의 머리에서 다른 여인의 머리로 쌀을 운반하고, 아이들과 놀고 있은 엄마, 산파의 도움으로 애를 낳고 있는 여인, 병원에 있는 환자 등의 모습이 보여진다. 사냥꾼은 거대한 동물을 잡기 위해 활을 겨냥하고 있으며, 고기잡이 장면이 뒤이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닭싸움 장면, 똔레쌉의 어부, 여자 고기 장수 등이 위아래에 묘사되어 있다. 뒤 이어 등장하는 왕실의 모습은 씨름꾼, 검투사, 장기꾼, 야생 수퇘지간의 싸움 장면 등에 둘러싸인 공주가 조각되어 있으며 전체의 묘사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형상의 윤곽은 아마도 왕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회랑의 부조는 다시 전투 장면이 등장한다. 아래 부조에는 배를 타고 도착한 참(Chams)의 상륙 장면, 상부 부조에는 크메르와의 지상전투 장면이 이어진다. 뒤를 이어서는 왕궁에 앉아서 전쟁의 승리를 축하는 왕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남 회랑의 두 번째 부분은 아래층의 조각만이 완성되어 있다. 군사 행렬이 조각되어 있지만 크메르가 전쟁에 사용하던 무기들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o 서 회랑(West Gallery)

 회랑의 많은 부분의 조각이 미완성 상태이다. 아래 부분은 전사와 그들의 수장,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 산과 숲을 건너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고, 윗 부분은 사원 건설에 사용되던 수단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문 뒤쪽에는 내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남녀가 거리를 메우고 있고, 전투를 준비를 하고 있으며, 전사와 코끼리 무리가 행동에 참여하기 위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 회랑의 두 번째 부분은 손에 손을 잡고 전투하는 장면으로, 무장한 전사들과 방패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전사들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o 북 회랑(North Gallery)

 북 회랑에 나타난 부조의 하이라이트는 서커스, 아크로바트, 씨름꾼과 돼지, 토끼, 사슴, 생선등을 포함한 다양한 동물들의 생명력 있는 묘사이다. 다른 끝부분에는 숲 속과 강변에서 명상하는 고행자와 선물을 받는 여인이 묘사되어 있으며 문과 인접한 곳에는 크메르와 참 과의 전투 장면이 등장한다. 북 회랑의 두 번째 부분에 위치한 벽은 거의 무너져 내렸으며 각 부분의 가장자리는 크메르와 참과의 전투장면이 이어지고 있다.

 

⊙ 내부 회랑

 바욘의 내부 회랑은 방들로 구분되어 둘러싸여 있어, 외부 회랑의 부조처럼 연속적인 묘사를 볼 수는 없다. 동쪽에서 내부회랑을 들어와 왼쪽으로 틀어 부조를 오른쪽에 위치하도록하고 시계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며 회랑을 관람한다. 부조에 나타난 묘사는 힌두교의 신화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o 동 회랑(East Gallery)

 두 개의 탑 사이에 있는 오른쪽 회랑은 수도자와 숲과 산 속에 있는 동물이 묘사되어 있으며, 오른쪽에는 왕과 수도자가 있는 왕궁이 묘사되어 있다. 위쪽의 부조는 전원과 생동감 넘치는 동물이 사냥 장면과 함께 등장하고 있으며 압쌀라가 머리 위를 날고 있다. 전면에서 왼쪽으로는 군사행렬이 등장한다. 부조들은 캄보디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것들은 아니지만 아래층의 부조는 일상생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있다.

 

o 남 회랑(South Gallery)

 남 회랑도 군사행렬과 전사들의 부조가 동일하게 등장하며 일부 회랑은 야자수를 오르는 남자 조각 같은 일상생활과 가루다, 메루산에 있는 거대한 물고기가 묘사되어 있다. 작은 방안에는 통치자와 사자로 보이는 동물과의 싸움과 코끼리 뒷발을 잡고 있는 사냥꾼의 부조를 볼 수 있다.

 두 개의 탑 사이에 있는 벽은 왼쪽에 전사들의 행렬과 왕자와 그의 군대와의 전투 장면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래 층의 부조는 배에서 어망을 던지는 어부의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공주가 있으며 압쌀라가 머리 위에 묘사되어 있다. 두 개의 탑 사이는 왼쪽부터 연꽃 위에 서있는 시바, 삼지창을 들고 있는 시바, 악단에  둘러싸여 춤을 추는 압쌀라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일부는 보존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작은 방에는 오른쪽부터 일상생활과 삼지창을 들고 있는 시바를 향해 내려가는 비쉬누 조각이 아래에 나타난다.

 남 회랑의 마지막 부분은 야생동물이 살고 있는 산과 연꽃 위에서 춤추는 압쌀라들 사이로 걸어가는 공주가 묘사되어 있다.

 

 

o 서 회랑(West Gallery)

 가루다 위에 올라있는 비쉬누와 정복당한 악령의 무리가 부조되어 있다. 작은 방에는 악단에 맞춰 춤을 추는 압쌀라가 있는 궁전 장면이 있으며, 그 위에는 무희와 전투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두 개의 탑 사이의 오른쪽은 사원 건설 장면이 비쉬누와 겹쳐져 있으며, 뒤를 이어 배에서 장기를 두는 두 명을 비롯한 해상의 일상적인 장면이 나타난다. 왼쪽부터는 비쉬누를 오른쪽에 두고 있는 시바가 궁전에 있는 장면과 명상을 하거나 연꽃 사이에서 수영을 하고 있는 수도사가 묘사되어 있다.

 서 회랑의 중앙 뒤쪽은 전사들의 행렬이 묘사되어 있으며 작은 방에는 궁전 장면과 공주에게 옷을 입히는 수행인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부조는 앙코르 왓에도 있는 '유액(乳液)의 바다에 휘젓기(유해교반:乳海攪拌)'를 묘사하고 있다.

 

o 북 회랑(North Gallery)

 궁전 장면, 하인들의 행렬, 야생동물이 살고 있는 산이 묘사되어 있다. 작은 방은 시바가 춤추고 압쌀라가 그 위를 날고 있으며, 비쉬누와 브라흐마가 가네쉬, 라후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벽의 측면은 시바가 비쉬누와 브람 사이에 앉아 있는 부조가 있다.

 두 탑 사이의 오른쪽에는 수도사와 여자와 황소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시바가 있으며, 산에서 명상하고 있는 수도사 부조가 인접하고 있다. 사랑의 신인 카마는 산 정상에서 아내와 명상하고 있는 시바를 향해 활을 쏘고 있다.

 문 왼쪽은 마하바라타의 '카이라사 산을 흔들고 있는 라바나'의 또 다른 장면이 묘사되고 있으며 궁전 장면이 양쪽에 부조되어 있다.

 

 

힌두교의 중심 바푸욘 사원(The Baphuon)

 바푸욘 사원은 바이욘 사원에서 북서쪽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힌두교의 우주관에서 우주중심인 메루(Meru)산을 상징하고 있으며 앙코르 지역에서 세번째로 지어진 사원이다. 또한, 우다야디티야바르만(Udayadityavarman) 2세에 의하여 시바신에게 봉헌된 힌두교 탑이기도 하다. 비록 시바에 봉헌한 사원이지만 많은 비슈누의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사원의 중심은 약 43m로 바이욘보다 높다. 가로 125m, 세로 425m 크기로 동쪽 입구에서 다리 형태로 된 높은 길을 따라 200m 거리에 피라밋 형태의 탑이 솟아 있다.

 사원의 서쪽 벽면에는 열반에 들어 누워있는 부처들로 장식되어 있지만, 일부분은 훼손되어 있어 알아보기 힘들다. 바푸욘 사원은 훼손 정도가 심하여 계속하여 복구중이다.

 

 

◈ 앙코르 최초의 사원 프놈 바켕(Phnom Bakeng)

 9세기 후반 -10세기 초, 야소바르만 1세

 앙코르 왓 북쪽 1,300m, 앙코르톰 남쪽 400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67m 높이의 언덕 위에 위치한 사원이다. 동쪽편의 언덕으로 오른다(계단이 일부 있다).

 일몰 직전에 이 산에 오르면 앙코르 주변의 멋있는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앙코르 왓의 5개의 탑을 다 볼 수 있고, 똔레쌉 호수 옆에 있는 프놈 끄롬의 남서쪽도 보이며 프놈 복의 북동 방향, 프놈 꿀렌과 서쪽 호수의 동쪽 광경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석양이 아름다워 해질무렵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올라와 일몰을 감사한다.

 이곳은 시바에게 바치는 사원으로 지어졌다.

 서기 889년 야소바르만 1세가 즉위한 뒤, 야소하라프라라는 자신의 도시를 롤루오스 북쪽에 세우면서 자신을 상징하는 사원으로 이 프놈 바켕 사원을 지었다. 이 신도시가 지금의 앙코르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을 처음 지어진 앙코르 유적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각 면이 4km로 된 사각의 성벽이 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켕 사원은 바위를 깨어 축조하면서 사암으로 외부를 쌌다. 이 건축 방법의 흔적을 북동 및 남동쪽 모서리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진보된 기술과 더 내구성이 강한 건축자재를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앙코르 유적중 층으로 쌓은 최고층에 5개의 신전을 지은 것으로는 이 곳이 최초로, 이러한 설계는 이후에 많이 적용되었다. 또한 기초 층에도 다른 탑들을 세웠던 배치 구조로는 첫 번째다.

 바켕 사원 탑의 숫자는 우주를 상징한다. 원래 109개의 탑이 메루산을 모방한 모양으로 이 사원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많은 탑이 훼손, 유실되었다. 탑의 배열은 최고층에 5개의 탑, 그 밑단에 5개의 층이 있어 각 단마다 12개씩의 탑이 있으며, 기초 바닥 주위에도 44개의 탑들이 세워져 있다. 5개 층에 각각 세워진 12개의 탑은 황도 12궁의 12년 주기 별자리(물고기자리부터 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게자리, 사자자리, 처녀자리, 천칭자리, 전갈자리, 궁수자리, 염소자리, 물병자리)를 뜻하며, 최고층의 중앙 사원을 제외한 나머지 108개의 탑은 달의 4가지 형상에 음력의 월 평균일 27일을 곱한 숫자이다. 층이 모두 7개(기초, 5개 층, 최상층)인 것은 힌두교 신화의 7개 천국을 의미하는 것이다.

 앙코르에서 자주 보는 모든 건축물들은 모두 크메르의 신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 중 이 사원의 의미는 더 깊은데, 그것은 이 산이 다른 곳 보다 더 특별한 것임을 의미한다. 프놈 바켕은 기단, 중간 5개 층, 최상층 등에 5개의 탑 등으로 배치된 정사각형의 사원이며 최상층의 각 모퉁이와 중간 부분에 큰 탑이 앉아 있다. 기단은 가로 세로가 각각 76m이며, 높이는 13m이다. 기단의 각 면에는 70도 경사의 가파른 계단이 있다. 중간 5개 층의 각 계단 입구 좌우에는 앉은 사자상이 있다. 입구 탑과 같이 담 벽이 사원을 둘러쌓던 흔적이 남아 있다.

 정상 가까이 오르는 경사면에도 앉은 사자상이 둥근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사자상의 모양은 사실적이고 정교하다. 그리고 사암으로 만든 기둥으로 구성된 작은 건물이 오른쪽에 있는데, 2개의 링가가 경계의 구실을 하고 있다. 위로 가면서 통로 가운데에 부처의 발자국이 보인다. 이곳은 시멘트로 기초를 보강하고 나무 지붕을 덮어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정상에 가까이 가면 사원 주위를 둘러쌌던 성벽과 입구 탑의 흔적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두개의 사암으로 된 도서관이 보도의 양쪽에 있는데, 벽에 마름모꼴의 구멍이 있어 쉽게 식별할 수 있다. 이 도서관은 서쪽으로 향하면서 베란다는 동쪽에 있다. 작은 벽돌로 된 사원 탑들이 각 층의 모서리와 계단 옆에 서 있다.

 최상층에는 5개의 탑이 주사위의 5점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다. 중앙의 신전에는 링가가 있는데, 이 링가가 있는 곳은 사방이 트여있다. 주위의 4개의 탑에도 링가가 있으나 두 방향으로만 문이 트여 있다. 중앙 신전의 동쪽 편 바닥에 있는 간격이 고른 구멍들은 지붕을 받치고 있던 나무 기둥들이 있었던 자리로 보인다. 중앙 신전은 가 편의 기둥 아치 부분에 섬세하게 조각된 여신상과 압싸라 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박세이 짱크롱(Baksei Changkrong)

 10세기 중반(947년) 라젠드라바르만에 의해 건립되어 힌두교에 봉헌된 사원이다. 프놈바켕(Phnom Bakheng)으로 가는 주춧계단의 북쪽으로 15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작은 사원은 층층의 피라미드 구조로 길 왼쪽으로 균형잡힌 본신과 10세기의 가장 전형적인 라테라이트와 벽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따듯한 색조로 아름다운 형태를 드러낸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벽돌로 된 담벽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동쪽으로 사암 계단으로 된 축탑의 잔재를 아직까지 볼 수 있다.  

 피라미터는 바닥에서 둘레가 27m, 13m 높이에서 정상까지 15m이다. 4층으로된 라이라이트로 이런 경우 보통 비례감소의 법칙이 잇따른다. 마지막 층이 예배당의 탑을 위해 주조된 형태임에 반해서 처음의 삼층은 단순히 평평히 덮어 씌운 것으로 취급된다. 네 개의 가파른 계단은 많은 이들의 접근을 제한하도록 층마다 높이가 변한다. 위층의 제단으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은 발판이 급하게 경사지고 또 어떤 것은 발판이 심하게 마모되었기 때문에 이 계단을 극히 조심스럽게 이용해야 한다.

 예배당 탑 벽돌로 쌓여져 있고, 접합부에는 회반죽을 사용하지 않고 이었다. 각 측면은 8m에 이르고, 주조된 사암층 사암 위에 서있어, 가장자리가 좁다. 그 크기는 피라미드의 배율과 위로 상승하는 라인으로 인해 상당하며, 꼭대기 부분의 윗 층은 초목의 번식으로 인해 날카로운 윤각을 잃어버려 둥그스럼하다.

 예배당은 동쪽으로 개방되어 있다. 맞은편의 입구문은 사암으로만 되어 있으며, 복잡한 장식으로 조심스레 장식되어 있다. 입구의 가문으로는 동쪽 상인방(lintel)의 갈래 끝과 비교하여, 수직으로된 입사귀 모양의 소용돌이 장식을 주의해서 봐야 한다. 가네샤(Ganesha)가 코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동메본에서도 동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전체 구성물이 작은 인들들로 치장된 소벽임에 비해 그 중앙은 세 개의 머리를 한 코끼리에 타고 있는 인드라상이 눈길을 끌고 있다.

 (가네샤신 : 힌두 신화에 나오는 가네샤 신의 속성과 힘을 그대로 갖춘 자. 신들의 흑막이라고 불린다. 가네샤는 힌두 신화에서 코끼리 형상을 가진 신으로 각종 의식(儀式)에 관여하는 신이자 방해의 신이기도 하다.)

 외부의 석회반죽으로 된 장식은 거의 사라져버렸으나 맞은편 모퉁이 제방의 벽돌에서 데바타신(Devata)의 윤곽을 볼 수 있다. 문설주의 새겨진 장식은 라젠트라바르만의 통치기인 947년에 거슬러 올라가고 시바의 황금상이 오늘날까지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프레아칸 사원(Preah Kan)

 12세기 후반(1191) 자야바르만 7세(얼굴상의 조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초기 건축일 가능성이 많다.)

 프레아칸은 자야바르만이 그의 아버지를 위해 지은 사원이다.

 동쪽은 왕이 출입하는 곳이라 신하들은 서쪽 출입구로 출입을 했는데, 사원의 중앙으로 갈수록 문의 높이가 낮아져서 머리를 점점 숙이게끔 되어있다. 이것은 신성한 중앙 사원에 들어가고, 또 왕을 접견하기 위해 중앙 사원으로 들어갈 때는 복종의 의미로 머리를 숙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현재 보통 서쪽으로 출입하게 되어있는데, 아래의 설명은 반대편인 동쪽에서부터 시작한다.

 4개의 큰 통로가 사원으로 연결되며, 경계에는 큰 뱀을 갖고 있는 거인과 신들을 조각하였다. 이는 앙코르 톰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건축구조는 왕궁에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사원은 1177년 참족을 물리친 후 왕궁을 새로 보수하는 동안 자야바르만 7세의 임시 왕궁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프레아칸은 따 쁘롬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사원의 대부분이 매우 심하게 손상되어 있으며, 일부 복원된 것도 건축 구조상 매우 복잡하게 보인다. 1939년에 발견된 기록 문구에는 프레아칸이 "나가라자야크리"의 고대도시였다고 한다. "자야크리"라는 말은 태국말로 "신성한 검"이란 뜻으로 크메르어로는 프레아칸이 된다. 신성한 검에 대해서는 크메르 역사에 그 전설이 남아 있다. 9세기 말 자야바르만 2세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왕자에게 신성한 보검인 프레아칸을 물려주었는데, 아직까지 그 효험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프레아칸은 그 넓이가 56.7ha에 이르며 4개의 성벽이 겹겹이 싸고 있다. 내부 성은 700x800m의 직사각형 성벽에 둘러 싸여있다. 그리고 해자도 있으며, 내부에는 정자, 큰방, 성소들이 미궁과도 같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신화 속의 괴물 머리를 새긴 돌들과 부처 상이 앉아 있었던 벽감이 늘어서 있는 사열을 위한 도로가 신들과 악마들이 경계를 선 통로 앞에 앉아 있는데, 이 사열도로는 외부 담벽이 있는 곳까지 연결된다.

 3km나 되는 긴 라테라이트 벽에는 큰 가루다와 큰 뱀의 부조가 50m간격으로 새겨져 있다. 동쪽에 난 입구 탑에는 세 개의 현관이 있으며 가운데 현관으로 중앙사원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벽들은 매듭 무늬의 두꺼운 카페트 같이 장식되어 있으며 작은 사원까지 통하게 되어 있다. 작은 여신들도 있고, 가짜 문들이 커튼을 내린 것처럼 조각되어 있다. 외부 벽과 연결되는 오른쪽 길에는 순례자들을 위한 휴식처 터가 남아 있다. 이곳은 두꺼운 벽과 2층 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원의 외벽은 가루다의 사원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정도로 가루다가 많이 조각되어 있다. 외벽에 가루다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이 사원을 보호하고 있다.

 두번째 담의 앞에는 2층으로 된 큰 테라스가 있는데, 사자들과 큰 뱀으로 장식된 난간이 테라스와 5개의 문과 2개의 별채로 된 웅장한 입구 탑으로 연결된다. 이 입구 탑에서 내부 광장 쪽으로 회랑이 연결되는데, 회랑의 외부에는 기둥들이 있고, 내부에는 가짜 창문과 난간들이 있는 벽으로 되어있다. 담벽 안에는 라테라이트 벽으로 된 광장이 십자형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은 회랑과 기둥으로 둘러싼 4개의 작은 광장으로 싸여있다. 이러한 구조의 잔해가 아직 남아있으며, 기둥과 벽면에는 압쌀라들의 조각이 있다. 이 공간은 무희들의 방으로 불렀다고 한다.

 오른쪽에는 크고 두꺼운 기둥들이 2층에 걸쳐 촘촘히 늘어섰다. 이 2층 건물의 용도는 아직 모르고 있으나, 어떤 건축가는 이곳이 도서관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그 이유는 2층 사이에 계단이 없다는 것이다. 또 일부 학자는 이곳이 사원의 이름이 지어진 이후에 정말로 신성한 검을 보관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맞은편에는 벽이 있는 라테라이트 위에 긴 테라스가 있다. 다시 중앙 통로로 와서 무희들의 방을 거쳐, 광장으로 나가면 좌우에 도서관이 서쪽을 보며 세워져 있다.

 다음 회랑은 남녀 신들과 부처상들이 기둥 사이의 벽에 섬세히 부조되어 있는데, 코너에 있는 가루다가 상반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내부의 2개 담벽을 지나면 중앙 신전의 기둥 현관에는 돌비석이 있는데, 사방에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 사원은 광장을 2개로 나누고 있다. 중앙 사원은 십자형으로 사방에 각 1개씩의 현관이 있으며, 내부의 중앙에는 끝이 뾰족한 돔같이 둥근 돌무덤이 있다. 이 장소는 사방의 회랑과 방들을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이다. 중앙 사원의 남쪽으로 걷다 보면 주위의 짙푸른 정글이 시야에 확 들어와 속이 탁 트이게 된다. 또 북쪽으로 가다보면 신들과 악마들이 경계를 두고 있는 통로가 시원히 나타난다. 북쪽의 입구 탑은 나무로 덮여 있다.

 

 

따쁘롬(Ta Prohm) 사원

 12세기 중반-13세기 초, 자야바르만 7세

 이 사원은 서쪽으로 들어가 동쪽으로 나간다. 아침에 오는 것이 정글의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사원 이름은 '브라흐마의 조상'이라는 뜻으로, 아버지를 위해 쁘리아 칸을 지은 자야바르만 7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원이다.

 따 프롬은 통행로만 만들어 놓은 것을 빼고는 전혀 복구를 하지 않은 사원이다. 자연이 어떻게 사원을 무너지게 했는지 그 과정과 결과들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일부러 복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대한 ;스펑(Spung)'이란 열대 무화과나무의 뿌리가 내려와 어떻게 사원을 덮을 수 있었고, 이 나무들이 무너지면 사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하여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돌에 새겨진 범어의 기록이 아직도 선명해 이 사원의 역사를 말해준다. 따 쁘롬에는 당시 3,140개의 마을을 통치하였고 79,365명이 이 사원을 관리하였는데, 18명의 고승과 2,740명의 관리들과 2,202명의 인부들과 615명의 무희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원에 남아 있는 재산 중에는 500kg이 넘는 황금 접시 한 쌍과 35개의 다이아몬드, 40,620개의 진주, 4,540개의 보석, 876개의 중국에서 온 커튼, 512개의 비단 침대 그리고 523개의 양산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숫자가 비록 왕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과장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따 쁘롬 사원의 중요성과 의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 프롬은 앙코르 유적지 중에서 제법 큰 사원에 속한다. 남아 있는 기록이 이 사원의 규모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 260개의 신상과 39개의 첨탑들 그리고 566개의 집단 주거 시설이 있었다. 따 프롬은 연속된 긴 낮은 건물들이 한 층에 있었으며, 보통 사각형의 라테라이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규모는 600x1,000m이었으며 지금은 담벽의 흔적만 남아 있다. 사원의 중심은 통로로 연결되는 연속된 탑들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배치는 사원의 심장부로 가는 길을 성스럽고 엄숙한 길로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엄숙한 분위기는 건축물의 배치보다는 자연과 어우러진 무너진 폐허에서 더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원들은 배치가 대칭이므로 한쪽만 보면 다른 쪽은 무엇이 있는지 대충 알 수 있고, 시간이 없으면 그냥 나올 수도 있지만, 이 사원은 사원 전체가 보리수나무나 탄야 나무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어서 구석구석을 보아야 그런 폐허의 장관들을 목격할 수 있다. 문 하나만 지나면 또 다른 세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고푸라(입구탑)에서부터 시작된다.

 

 

쓰라쓰렁(Srah Srang)

 이 예배당은 아마도 힌두교 사랑의 신 까마(God of Love)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 이 장소는 이상한 마력으로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제국과 온 세계를 암시하며 사람을 끌어들이는 소박한 거주지이다. 마치 물 속에 사랑인 깃든 것 같은 이곳에서 한 때 열렬한 사랑을 했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쓰라쓰렁은 반떼이 끄데이의 동쪽 입구에서 길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길에서 바로 출입이 가능하다. 쓰라쓰렁은 항상 물이 있고, 녹림에 둘러싸여 있다.

 한 프랑스의 고고학자에 따르면 이곳은 앙코르 공원 내에서 하루 중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지어졌고, 불교사원으로 봉헌된 바이욘 양식의 건축물이다.

 쓰라 쓰렁은 300x700m에 이르는 큰 호수에 우아하고 나무랄 데 없는 균형과 스케일의 육지 테라스를 가지고 있다.

 육지부는 연못으로 통하는 우아한고 장엄한 연단이다. 이곳은 사암을 몰딩한 라테라이트로 만들어져 있으며, 연단은 두 마리 사자를 측면에 낀 악마형의 난간을 가진 십자가의 형태로 되어 있다. 정면에는 3개의 머리를 가진 악마를 타고 있는 거대한 가루다가 있다. 배후면에는 머리는 세 개고, 일부는 가루다, 꼬리는 악마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는 신비한 악마상을 만날 수 있다. 악마의 육신은 신비한 괴물의 육체로 지지되는 교단을 걸치고 있다.

 

 

떼이 끄데이(Banteay Kdei)

 방으로 이루어진 성채. 폐허와 혼돈에서 찾을 수 있는 반떼이 끄데이(Banteay Kdei)의 조각품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흥미를 자극하는 장중하면서 그다지 많지 않은 방들은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반떼이 끄데이는 따쁘롬(Ta Prohm)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은 서쪽 건물에서 서쪽으로 하고 양쪽 모두 쓰라쓰렁(Srah Srang)으로 갈 수 있게 통해 있다.

 이 사원은 12세기 중엽에서 13세기 초에 마하야 불교의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동쪽 앙코르왓과 바이욘을 잇는 2개의 다른 예술기의 작품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반떼이 끄데이는 복원되지 않아서 방문객들에게 원형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설계변경과 증측의 흔적을 균형이 잡히지 않은 외관으로 알 수 있다. 반떼이 끄데이는 부드러운 사암으로 만들었고, 많은 회랑과 무너진 현관을 가지고 있다. 사원을 둘러싼 벽은 재사용된 돌로 만들었다.

 사원은 지층에 불교 예배당으로 지어졌다. 이 사원의 원래 디자인 요소로 볼 때 중앙에 예배당과 그 주위를 둘러싼 회랑 그리고 다른 회랑에 연결된 복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해자가 사원의 원래 건물을 둘러싸고 있었고, 또 다른 예배당과 서관이 바이욘기에 추가되었던 것 같다. 500~700m에 이르는 외벽 담당은 라테라이트로 만들어 졌으며 네 개의 출입 탑이 있다. 동쪽의 장방형의 정원은 '춤추는 무녀의 복도'로 알려져 있고, 이 이름은 무희를 포함한 장식에서 유래되었다.

 두 번째 외벽의 출입탑은 3개의 복도를 가진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는데, 두 복도의 끝은 200~320명 정도가 거닐 수 있는 라테라이트 외벽으로 연결되어 있고, 푹 들어간 벽면에는 여신상이 자라잡고 있다. 안마당 쪽으로는 불상이 있다.

 

 

따케오(Takeo)

 따께오는 토마논의 동쪽과 차오세이테보다 사이에 위치하며, 출입은 남쪽이나 동쪽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께오의 첫인상은 거대한 바벨탑을 보는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화려한 장식을 했던 크메르의 다른 건축물과는 달리 단순한 장식을 한것이 오히려 이 사원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탑은 수정탑 또는 유리탑이라 불리우며, 원래 이 사원은 10세기말에서 11세기 초에 자아바르만 5세에서 수르야바르만 1세(Surayavarman I)에 이르는 시기에 건립을 시작하였으나 완성은 하지 못했다.

 완성을 못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이 탑은 왕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으로서 당시 벼락을 맞고서는, 신들의 노여움에 의해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한 수르야바루만이 공사를 중지시켜서 현재와 같은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사원은 장방형의 사각형으로 전체 높이가 22m에 이르는 5층의 피라미드로 메루산의 현신을 상징하며, 시바(Shiva)신에게 헌납된 끄레앙(Kleang) 양식의 복제품이다.

 

 

(Ta Som)

 따솜(Prasat Ta Som)은 닉삔(Nean Pean)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따솜의 출입은 동쪽 입구에서만 가능하다. 이 사원은 12세기 말기에 건립되어 불교신자인 왕의 부친을 위해 바이욘 스타일 양식의 복제품으로 만들어졌다.

 

 따솜은 복원되지 않아 작고, 조용한 사원으로 여유를 느끼며 찾아오는 방문자들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곳이다. 과거에는 따솜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 입구탑 맞은 편에 서있는 커다란 무화과 나무가 자라는 모습이었는데, 동쪽탑 앞에 있는 나무는 베어버렸고, 서쪽에서만 일부 남아있어 볼 수가 있다.

 

 따솜은 네 개의 얼굴로 조각된 입구가 벽을 감고 있는 나무에 둘러싸인 단층의 단 하나의 탑 건물이다. 출입탑은 라테라이트 벽으로 연결되는 양쪽의 작은방을 가진 십자가 형으로 되어있다. 해자로 둘러싼 둑을 지나 악마와 가루다로 장식된 첫번째 출입탑으로 걸어들어 가면, 라테라이트에 사암으로 된 십자가형의 두 번째 벽이 나온다. 입구의 탑은 바깥쪽에 난간이 있는 창문이 있고, 기둥이 있는 현관 앞에 위치한다. 다음의 벽도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된 정자를 가진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폐허가 된 돌무리 속에 서쪽으로 열려진 서고가 있다.

 

 

 

 

바레이 호수(Baray Lake)

 크메르 왕국의 통치기간동안 바레이라 불리우는 약 1000㎢ 크기의 인공저수지를 기반으로 한 관계 시스템으로 각종 용수가 제공되었다.

 서 바레이는 이것들 중 가장 큰규모로 1050년에 건설되었으며, 8kmx2.2km 크기의 저수지는 최대저수량이 40만㎥에 이른다. 이 저수지는 땅을 파서 만든 것이 아니라 둑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저장된 물이 땅의 높이보다 높으며, 물은 논으로 중력차에 의해 보내진다. 이러한 관계 활동은 9세기말경 시작되었고, 이 결과로 매년 건기와 우기를 가리지 않고 다모작의 경작을 할 수 있었다.

 또 다른 거대한 저수지는 앙코르톰 오른편에 있는 중앙의 동바레이로 지금은 말라버렸지만, 그 제방의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오늘날 관계용수는 북동쪽에서 수많은 작은 탱크에 보관되어 지방으로 보내진다.

 서바레이에서 오른쪽으로 프놈바켕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이곳에서는 보통 일몰을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서바레이 호수에서 보트를 타고 보는 일몰 또한 그 감흥이 남다르다. 보통 배 한척에 6~8명까지 탈 수가 있는데, 여러명이 타면 싸게 배를 렌트해서 호수 여기저기를 구경하다가 일몰을 볼 수 있다.

 

 

웨스트 메본(West Mebon) 사원

 앙크로톰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이스트메본 사원, 서쪽으로 공항 북부에 웨스트 메본 사원이 자리잡고 있다. 프라삿 메본은 앙크로톰에서 서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서 바레이(West Baray)의 남쪽 제방을 따라 중앙의 섬으로 배를 타고, 사원의 동쪽입구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웨스트 메본은 인공호수의 중앙 원형의 직경 150m 정도되는 섬에 위치해 있다. 11세기 후반 유다야디타바르만 2세(Udayadityavarman II)에 의해 바퓨욘 양식으로 건립되었고 비슈누신에게 봉헌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사원의 기반은 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있고, 중앙의 사암으로 만들어진 플래폼은 홍토로된 제방과 동쪽 제방으로 길이난 사암과 연결되어 있다. 웨스트 메본은 원래 삼각형의 사암 입구탑를 가진 사각형의 담장으로 둘러쌓여 있었고, 동쪽으로 훼손되지 않은 사당이 있다. 탑의 양측으로는 바퓨욘에서나 볼 수 있는 장식을 한 작은 사각형의 생생한 동물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호숫가를 걷다가 섬쪽으로 돌아보면 붕괴된 지역으로 돌무더기를 볼 수 있다.

 

 

 

이스트 메본(East Mebon) 사원

 이스트 메본(East Mebon) 사원은 거대한 이스트 바레이 호수(7kmx1.8km)의 섬에 세워진 사원이다. 지금은 이 이스트 바레이 호수는 흔적만 남아 있다.

 메본 사원은 피라미드 형의 많은 건축물들이 놓여진 깜찍한 사원이다. 지붕을 덮고 있는 5개의 탑은 질서정연한 사원에 광대한 하늘빛 색조가 물에 반사된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 없다.

 

 이스트 메본은 쁘레럽(Pre Rup)의 북쪽 50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사원의 출입은 동문으로 하면 된다. 이 사원은 10세기 후반 952년에 라잔드라바르만 2세(Rajendravarman II)에 의해 왕의 부친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어, 힌두신인 시바 신에게 봉헌된 쁘레럽(Pre Rup) 양식의 사원이다.

 

 메본 사원은 씨엠립강에서 발원하는 2~7km에 이르는 많은 담수량을 가진 동바레이의 중앙 작은 섬에 서 있었으나 지금은 호수의 흔적만 남아 있다. 한때는 관계용수였던, 바레이 호수는 쌀을 경작하는 평야가 되었고, 방문자들은 한때나마 거대한 호수 중의 장엄한 사원을 상상으로나마 그릴 수 있다.

 

 

 

롤루오스 유적군(The Roluos Group)

 롤루오스 유적군은 씨엠립의 남서쪽 15km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유적군에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로레이(Lolei)"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하리하랄아야(Hariharalaya)의 고대수도와 일치하는 바꽁(Bakong), 쁘라꼬(Prah Ko), 로레이(Lolei)등 3개의 신전이 있다.

 9세기초, 권력을 가진 자바(Java)출신의 자야바르만 2세(king Jayavarman II)는, 도시가 있던 하리하랄아야(Hariharalaya)에 2번에 걸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처음에는 "데바라자(Devaraja)"의 제식이 거행되었던 프놈 쿠렌(Phnom Kulen; Mahendraparvata)에서의 그의 임관식 전에, 이후 다시 한번 더 이루어졌다. 그는 48년간의 통치 후 850년에 그곳에 잠들었다.

 이후, 야소바르만(Yasovarman)이 프놈 바켄(Phnom Bakheng)의 중앙에 위치한 앙코르(Angkor)를 발견해서야 비로소, 자야바르만 2세(king Jayavarman II)를 잇는 후계자가 나오게 되었다.

 

브라만의 시바 신의 의식을 위해 지어진 사원 바꽁(Bakong)

 바꽁(Bakong)은 9세기말(881) 인드라바르만 1세(Indravarman I) 때 브라만의 시바 신의 의식을 위해 지어진 사원이다.

 6번 도로에서 약 1.5km의 모래투성이 도로 아래에서 찾을 수 있다. 프놈펜 방향으로 씨엠립에서 13km 지점에 표지판이 있다. 이 도로는 원래 중앙 예배당의 동일선상에서 북쪽으로 접근하게 되어 있으며, 멀리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거기서 북동쪽 건물의 두번째 벽의 일부의 가장자리를 지나 두번째 탑의 유적 바로 이전에 동안의 끝쪽으로 연결한다.

 피라미드의 형태로 씨엠립 북서쪽의 악욤(Ak Yom)과 프놈쿨린(Phnom Kulen)의 롱첸(Rong Chen)의 절제된 시도 이후 세번째 것으로서 바꽁은 하리하랄라야(Hariharalaya)의 주 사원이었으며, 그곳에서 왕이 신에 대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곳의 우상들은 호수를 경계로 하는 평야 위에 지어져 고귀하게 생각되었으며, 크메르 왕족들이 이곳에 와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을 것이다. 이 산사의 건축이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쿨렌 언덕에서부터 그의 가문에서 시작했던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앙코르 지역에서 층층이 쌓아올린 테라스 위의 모든 사원들 중에서 바꽁은 아마도 힌두교의 이상을 나타내는 메루산의 우주관을 5단계로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가장 근접하게 표현한 사원 중의 하나이다. 나가(Naga)의 세계와 가루다(Garuda), 락사사(Rakshasa), 약샤(Yaksha) 그리고 뜰의 네 핵심 부분에 놓인 마하라자(Maharaja)까지 이러한 세계관을 잘 보여주는 증거물들이다.

 

 

로레이(Lolei) 사원

 로레이(Lolei) 사원은 6번 도로에서 500m 북쪽으로 바꽁으로 이르는 연장 선상에 위치해 있다. 진입로는 이정표의 13km 위로나 바꽁으로 가는 400m 후면으로 씨엠립에서 길의 왼쪽으로 북서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길을 바꿀 수 있고, 거기서 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제방 위로 평야를 600m 지난다.

 로레이는 위치에서 동바레이의 메본 사원과 견줄 수 있다.

 동서로 3.8km, 남북으로 800m에 이르는 큰 저수지로 부조물에서는 인드라바르만 1세가 5일의 정진 끝에 수도(Hariharalaya)에 물을 제공하고, 주변 평야에 관계를 하기 위해 굴착을 시작하였다는 인드라타타카(Indratataka)의 중앙 섬위 위치하고 있다.

 중심주는 이 사원이 9세기말(893) 야소바르만(Yasovarman)의 아버지를 기념하여 인드라바르메스바라에 봉헌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련의 은둔적인 건축물들의 설립허가가 되었고, 모두 야소드하라스라마(Yasodharasrama)의 이름으로 되었으며, 왕의 명령으로 그가 즉위하는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건축물의 외관은 앞을 가린 탑들에 의해 침해되었다. 승려들은 뜰을 정리하기 위해 이렇게 서 있는 탑들 중에서, 개축을 하거나 탑을 허물었는데, 이것으로 원래의 외관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옹벽을 라테라이트로 받치고 있는 2층 건물로 만들어진 이 건물들은 중심 네 계단으로 갈리운다. 이 계단에는 사자로 장식된 측벽과 위의 테라스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치는 이무기돌이 옆에 버티고 있다.

 1층은 전체 너비 9m로 바깥으로 2m 정도의 가장자리를 남기고, 그 끝에는 땅에 엎드려 있는 나가의 본체를 연상시키는 반원추형으로 정리되어 있다. 2층은 동서로 90m, 남북으로 80미터, 높이 2m.4 그리고 가장자리가 2.4m 너비의 바깥 벽에 둘러 싸여있다. 뒤가 받쳐져 있으므로 지금은 묻혀버리고 없지만 원래는 대좌가 서 있었을 네개의 벽돌탑을 지탱하는 옹벽이 되었다.

 

 

쁘라꼬(Prah Ko)

 쁘라꼬는 9세기(879) 말 인드라바르만 1세에 의해 건립되어 브라만 사원으로 시바에게 헌납되었다.

 

 

 

◈ 예술의 극치 반따이이 쓰레이(Banteay Srei) 사원

 10세기 후반(967), 라젠드라바르만 2세 - 자야바르만 5세

 앙코르 톰에서 북쪽으로 38km(약 40분 소요)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시바에게 바쳐진 사원이다.

 반띠아이 쓰레이 사원은, 규모는 작지만 모든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는 가장 아름다운 사원 중의 하나이다. 앙코르에서 복원 작업을 했던 프랑스 건축가들 역시 이 사원을 보석에 비유하거나, 크메르 예술의 극치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반띠아이 쓰레이는 하르샤바르만 2세의 손자이며 바라문교의 승려였던 '야즈나바라하'란 사람이 건축하였다. 전문가들은 이 사원이 다른 앙코르 사원들보다 건축술과 장식에 있어 인도문화에 매우 가깝다고 한다. 특히 정교한 장식의 특별한 조각 기법은 붉은 색의 단단한 사암을 이용함으로써, 자단목에 목각을 하듯이 정교한 기술을 뽐내고 있다. 앙코르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며, 양각의 깊이가 가장 깊어서 거의 소조에 가까운 부조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사원이다. 특히 사원의 양쪽에 부조된 압싸라는 거의 사람 모양과 흡사하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건물 전체를 덮고 있는 구름이나 물을 나타내는 조각들이 매우 깊고 정교하여,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사원은 1914년 프랑스가 발견하였지만, 1924년까지는 밀림이 울창하여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1923년에 유럽인들이 중요한 조각들을 도둑질 해 갔으며, 그로 인하여 당시의 프랑스 정부는 이 사원을 시급히 복구하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도굴범들은 후에 붙잡혀 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도난품들이 다 반환된 후에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 반띠아이 쓰레이는 앙코르에서 처음으로 '아나스티로시스 공법'이라는 것을 이용하여 완벽히 보수된 사원이다. 프랑스는 이 공법을 '자바'의 '보루부두' 지역에서 네덜란드의 기술자들과 같이 실험해 본 뒤에 이 사원의 보수에 응용하였다. 이 사원의 건축에 대한 기록이 1936년 외부 담벽에 있는 입구 탑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원은 동쪽과 서쪽으로 현관이 있고, 라테라이트로 축조된 담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 사원은 모두 세 겹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동쪽 입구는 역시 십자형의 구조에 사방에 문이 달린 탑 형태로, 라테라이트로 지어졌다. 탑의 동쪽 현관 상인방에 머리 셋 달린 코끼리를 타고 있는 인드라 신을 새겨 놓았다. 긴 통로에는 장식된 사암들이 탑을 둘러싸고 있는 담벽과 연결되고 있으며, 통로 양편에는 라테라이트 벽과 사암 기둥으로 된 회랑이 같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고, 회랑의 중간에 작은 입구 탑이 하나 더 서 있다.

 왼편으로는 3개의 큰 강당이 남-북 방향으로 평행으로 있으며 오른쪽 안쪽의 상인방에는 반인-반사자인 형상으로 변신한 비슈누가 조각되어 있다. 비슈누는 악마 왕을 잡아 누르면서 사자의 앞발로 악마의 가슴을 찢고 있다. 통로 끝의 오른편에는 땅에 내려진 상인방이 있는데, 라마야나의 한 장면인 라마의 아내인 시타가 유괴되는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첫번 성곽은 라테라이트 구조로 되어있고, 안쪽 십자형의 입구탑 주변에 해자가 있다. 두번째 성곽도 라테라이트로 된 담에 동쪽과 서쪽으로 입구탑이 서 있다. 내부는 6개의 부속건물이 있다. 동쪽과 서쪽에 각 2개씩의 건물과 그리고 북쪽과 남쪽에는 좀 긴 건물이 하나씩 있는데, 아마 수도자들을 위한 휴식처로 보인다. 서쪽으로 나 있는 입구의 좌우에 도서관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다.

 

성소탑

 두 장서각 사잇 건물이 중앙성소이며 성소의 뒤쪽으로 세 개의 탑을 가진 사당이 날개처럼 연결된다. 성소 군(群)은 겹띠를 가진 높지 않은 기단 위에 붉은 라테라이트 벽돌로 4단의 탑층을 쌓아올렸다. 성소 문은 동쪽으로 열려 있고 중앙 성소에는 쉬바 신의 상징인 링가(Linga, 남근 모양의 돌)이 모셔져 있다. 세 개의 사당 중 두 개는 쉬바신에게 나머지 하나는 비쉬누 신에게 바쳐졌다. 성소 건물의 각 입구에는 짐승의 머리에 인간의 몸을 가진 석상이 무릎을 꿇고 존경심을 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들 중 중앙성소 북쪽에 놓인 것만 진품이며 나머지는 모조품으로 진품은 국립박물관에 옮겼다.

 성소탑 코너마다 섬세한 부조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벽감의 여신과 남신들 부조는 걸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느낌의 여신들은 풍성한 주름의 단순한 옷차림에 땋은 머리 혹은 묶은 머리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앙코르의 사원에 등장하는 수만명의 압사라 부조 중에서 없는, 반띠아이 쓰레이에서만 볼 수 있는 헤어 스타일이라고 한다. 또 큼직한 귀걸이의 무게에 못이겨 귓볼이 쭉 쳐지는 볼륨감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진주 장식의 허리 벨트와 팔과 발목에도 장신구를 착용하고 또 목걸이는 세공까지 한 장면들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정교하고 사실적이다.

 반면 남신들은 위엄있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긴다. 손에 창을 들거나 연꽃 또는 기타 상징물을 들고 서 있는 남신들의 옷차림은 훨씬 단순하며 머리는 뒤로 묶어 동그랗게 마무리했고  표정에는 위엄이 어려있다. 벽감을 둘러 기둥 장식이, 그리고 전체적으로 원숭이 형상의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그 중 중앙성소탑 코너의 남신(수문장) 부조는 대단히 선명하며 걸작품이다. 머리는 뒤로 묶고 한손에는 창을, 다른 손에는 연꽃을 들고 쉬바 신전을 지키고 서 있으며 상인방에는 「라마야나」중에서, 원숭이 왕국의 발리 왕와 수그리바 왕의 전투 장면(북쪽면), 시타의 유괴 장면(서쪽면), 멧돼지(남쪽)가 조각되어 있다. 

 

<발리와 수그리바 형제의 전투>

「라마야나」의 한 장면이다. 원숭이 왕국 키슈킨다의 왕자인 수그리바는 형 발리 왕자가 동굴에서 악마와 교전할 때 형이 죽은 것으로 착각하여 동굴을 막고 귀환, 아버지 사후 왕위에 올랐으나 귀환한 발리는 동생이 왕좌를 노리고 고의로 자신을 죽이려했다 오해하여 수그리바를 내쫒고 죽이려 한다. 부하들과 숲속을 방황하던 수그리바는 라마 왕자(비쉬누 신의 화신)를 만나 랑카 왕 라바나에게 유괴된 그의 아내 시타를 찾아주는 대신 형을 처단하고 왕좌를 되찾는다.

 

중앙사원에 조각된 신들

 사원 각 모퉁이의 벽감에는 남성 및 여성의 신상들이 정교하면서도 보존 상태가 아직 완벽하다. 그 균형미와 예술적 감각도 매우 뛰어나다. 여신들은 땋은 머리를 하거나 둥글게 말아서 옆으로 묶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반띠아이 쓰레이 사원에서만 볼 수 있는 헤어스타일이다. 간편한 복장, 화려하고 큰 귀걸이는 귓불이 처지도록 크며, 진주를 꽃다발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허리띠 옆에 달았다. 치마는 헐렁하게 주름잡아 드리웠다.

 조각의 위쪽에는 사원을 지키는 '깔라'의 흉상이 있는데, 신상과의 경계에 연꽃을 조각하여 구분하였다. 그리고 탬버린을 치는 악대들의 연주에 맞추어 배꼽치마를 걸친 무희들이 춤추고 있다.

 

서관

 쓰레이의 심장부를 마주한 관광객은 감탄을 마지 않는다. 내벽이라고 부르기엔 좀 부족한 나즈막한 담은 거의 허물어졌지만 건물 전체가 정교한 부조로 가득한 건물들은 완벽하게 쓰레이의 명성이 자랑한다.

 좌우로 마주보는 아름다운 건물이 도서관이다. 크메르 건축물에서 도서관이란 실제로 책을 쌓아두는 곳이 아닌 상인방이나 벽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으로 신화를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건물 전체가 한 권의 책이며 쓰레이의 도서관은 힌두교의 2대 서사시인의 「라마야나」와 "「마하바라나」라는 두 권의 책인 셈이다.  단아한 도서관은 서쪽문(뒷편)만 열려있고 나머지는 가짜문 형식으로 새겨져 있다. 벽은 평범한 벽돌로 쌓아올려 상인방의 화려한 부조와 대조를 이루게 했다. 완벽하게 복원된 성소와 도서관에는 금접의 줄이 쳐져 다가서진 못한다.

⊙ 북쪽 도서관

 동쪽 벽 위에서부터 인드라가 짐승들이 사는 숲 속에 우주의 비를 뿌리고 있는 모습이 있다. 인드라는 머리가 세개인 코끼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있으며, 바람과 구름에 둘러싸여 있다.(파도 같은 선으로 표현) 비속에서 큰 뱀이 승천하고 있다. 아기로 변신한 크리슈나가 쟁기를 잡고 있는 그의 형제 발라라마가 지나가고 있다.

 서쪽 벽에는 삼촌인 깜사왕을 죽인 크리슈나에 대한 이야기가 새겨져 있는데, 삼촌이 크리슈나가 어렸을 때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또 크리슈나가 깜사의 머리를 잡고 있다.

 중앙사원 양쪽 모퉁이에 있는 수문장들은 크메르 조각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수문장의 머리는 빗어 올려 원추형으로 묶었으며 연꽃 봉오리를 한 손에 그리고 다른 손에는 창을 쥐고 있다. 문 위의 상인방에는 북쪽으로 원숭이들의 전쟁, 즉 발리와 수그리바, 서쪽에는 시타의 유괴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크리쉬나의 탄생 전설>

 우주 질서의 신 비쉬누는 불의를 처벌하기 위해 여러 화신으로 탄생하는데 그 여덟 번째 화신이 크리쉬나(Krishina)이다. 크리쉬나는 탄생 때부터 고난을 거듭한다.

 마투라 왕국의 왕자 캄사는 아버지를 투옥하고 왕좌를 차지한다. 그의 여동생 데바키 공주(Devaki)는 바수데바(Vasudeva)라는 귀족과 결혼을 하게되는데 캄사 왕은 "데바키 공주가 낳을 여덟 번째 아들로 인해 아버지에게 저지른 죄값을 치루게 될 것이다"라는 불길한 예언을 듣는다. 불안해진 캄사 왕은 여동생에게 감시꾼을 붙히고 데바키가 아들을 낳을 때마다 죽여 버린다.

 그러나 신의 예언은 언제나 실현되게끔 진행되는 것이 힌두교 정의의 섭리이다. 신들은 여덟 번째 아들이 태어나는 날 어둠을 일찍 불러와 파수꾼들을 잠재우고 폭풍우를 내리쳐 시야를 가린다. 그 사이 바수데바는 아기를 가로채어 야무나 강가의 시골에 사는 난디의 집으로 향했다. 신들은 그를 위해 야무나 강물을 갈라 길을 터주고 바수데바는 친구의 갓난 딸아이와 크리쉬나를 바꿔치기 해 궁으로 돌아온다.

 다음날 캄사 왕은 아기 탄생 소식에 서둘러 온다. 데바키는 여자애가 무슨 나쁜 짓을 하겠냐며 살려주길 애원하지만 캄사는 사정없이 돌로 아기를 쳐 죽이려하는 순간 아기가 떨어져 하늘로  솟구치고 신들이 거둔다. 하지만 아기가 바꿔짐을 안 캄사 왕은 푸트나라는 여인으로 하여금 젖에 독을 발라 생일이 같은 날 태어난 모든 아기를 죽이는데 아기 크리쉬나도 그녀의 젖을 빨았으나 오히려 그녀가 사망하고 아기는 무사하자 양부모는 범상치 않음을 알게된다.

 크리쉬나는 성인이 된 다음 탄생의 비밀을 알게되고 캄사 왕을 친 다음 외할아버지를 석방시키고 평화를 되찾는다. 이 전설은 크리쉬나를 통해 형제, 부부, 부자 간의 우애와 지켜야할 덕목을 얘기한다.

 

⊙ 남쪽 도서관

 동쪽 벽에는 여러 개의 머리와 팔을 가진 라바나가 카일라사 산을 흔들고 있고, 이 산은 배경에 숲이 울창한 피라미드 식으로 조각되었다. 시바는 산 정상의 왕좌에 앉아 있는데, 아내 파르바티가 꼭 껴안고 있다. 라바나는 시바의 주의를 끌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산을 흔들고 있다. 산에 사는 동물들과 숨어있던 생물들이 놀라서 숲 속으로 달아나고 있다. 원숭이 같이 생긴 숲을 지키는 자가 손을 들어 라바나에게 "언젠가 라바나는 원숭이에게 죽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산 정상에는 시바가 산의 모든 무게로 라바나를 눌러버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아내 파르바티가 무서워서 어깨에 기대어 있다.

 서쪽 벽에는 사랑의 신인 까마가 카일라사산 정상에 앉아 있는 시바에게 염주를 주고 있다. 시바 밑에는 고행자들이 있고, 인간의 몸과 짐승의 머리를 한 수문장들이 이 장면의 나머지 부분을 완성시키고 있다.

 

 

<카일라스 산(Mt Kailash, 6,714m) 뒤흔들기 전설>

 머리 10개, 팔이 20개, 다리가 4개나 되는 스리랑카의 왕 라바나(Ravana)는 천하무적의 힘에 출중한 용모까지 겸비한 자로서 창조의 신 브라흐만의 숭배자였다. 그는 머리를 모두 떼어내어 브라흐만에게 바치며 찬송한 덕분에 브라흐만은 그를 총애하여 "자신을 포함한 어떤 천상의 신이라도 그를 해치거나 죽이지 못한다"는 권능을 내렸다. 때문에 라바나는 점점 교만해진다. 어느날 라바나는 쉬바신의 거처가 있는 신성한 카일라사 산에 들어가려 하자 원숭이 머리의 수문장에게 저지 당한다. 자존심이 상한 라바나가 격노하여 대들자 원숭이 수문장은 "언젠가 네 운명은 원숭이에 의해 파멸될 것이다"라는 저주를 내린다. 분한 라바나가 카일라스 산 밑둥을 잡고 마구 흔들자 파르바티 여신이 겁에 질리고 화가 난 쉬바 신이 온몸의 힘을 실어 발까락으로 카일라스 산을 꾸욱 누르자 라바나는 산 밑에 깔려 힘을 쓰지 못한다. 놀란 라바나는 당장에 머리를 조아리며 쉬바 신의 권능을 찬양하는 노래를 1천년 동안 부르자 비로소 쉬바 신은 그를 놓아준다.

「라마야나」는 힌두교인으로서 지켜야할 덕목이나 도리에 대해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이야기인데 이중 이 카일라사 산 흔들기 부분은 신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얘기하고 있다. 결론은 감히 신에 대항하고 악행을 저지른 라바나를 처치하기 위해 브라흐만의 권능을 피해 인간 라마 왕자로 환생한 비쉬누신에 의해 실행되며 라마왕자를 돕는 원숭이 족에 의해 라바나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니 예언은 실현되고 정의는 언제나 승리함을 깨우쳐 준다.

 

 

쁘레 룹(Pre Rup)

 품위와 흠잡을 데 없는 균형감을 가지고 있는 이 사원은 동바레이 끝에서 남쪽 방향으로 500m 정도에 있으며, 쓰라 쓰렁(Srah Srang)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 할 수 있는 입구의 탑은 동쪽에 있다. 윗 층 테라스로 올라가려면 동쪽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된다. 다른 사원보다 좀 더 가파르다.

 이 사원 전체가 벽돌과 라테라이트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이 재료들의 따듯한 질감이 가장 잘 나타나는 때는 해가 막 떠오르는 이른 아침이나 해가 질 때이다. 꼭대기 층에서는 두방향으로 전경을 감상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프놈복을 바라보는 동쪽방향이며, 프놈쿨렌의 산들도 보인다. 두번째는 서쪽으로 앙코르왓의 탑들이 멀리서 희미하게 지평선에 걸려서 보인다.

 10세기 후반(961)에 라젠드라만 2세(Rajendraman II)에 의해 건립되어 힌두신인 시바에게 헌납된 쁘레룹만의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원이다. 쁘레룹 건축 디자인의 웅장함은 당대 최고라 할 수 있다. 섬세한 사원의 균형과 규모, 그리고 비율은 동메본에 비해 훨씬 이후에 만들어 졌기는 하지만 동메본과 비교하여 찾아보기 힘든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산위의 마지막 사원으로 쁘레룹은 프랑스인 필립페 스턴(Philippe Stern))이 이곳을 동쪽의 도시라고 호칭하였다. 크메르인들은 이 사원을 화장장이라고 불렀지만,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쁘레룹이라는 이름은 사자의 시체를 불태우는 화장의식을 연상시킨다고 한다. 어떤 고고학자들은 중심부 동쪽 계단의 커다른 통이 화장에 사용되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불교사원 닉삔(Neak Pean)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12세기 후반에 지어진 불교사원이다. 이 사원의 주변에는 네개의 작은연못이 중앙의 큰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데 중앙의 연못은 우주의 정상인 메루산(Mt. Meu, 수미산) 아나바타프타 호수를 의미한다. 여기서 갈려나온 4개의 강은 중앙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4개의 작은 연못을 의미한다.

 중앙연못은 두마리의 나가라 불리우는 영적동물이 지키고 있고 그 중심에는 인간의 형상을 띈 발라타라는 말의 석상이 서있다.

 발라타는 식인귀신이 살고있는 바다에 난파된 배에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날아다니는 말로 진화하였다는 아발로키테스바라의 전설과 연결지어져 있다.

 작은호수와 큰호수를 연결하는 곳에는 작은 암자가 있는데 그 주변으로 코끼리, 말, 사자, 사람 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과거 이곳에서 수행자들이 큰연못의 물을 맞으며 기도를 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쇠락한 힌두사원 초세이테보다(Chau Say Tevoda)

 초세이테보다 사원은 11세기 말부터 12세기 중반까지 수르야바르만 2세(King Suryavarman 2)에 의해 건립되어, 브라만(Brahmanism)에 헌납된 힌두사원으로 바이욘에서 바푸욘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좀 떨어진 곳의 타께오 사원 바로 옆에 위치하며, 현재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다.

 쌍둥이 사원으로 알려져 있는 톰마논(Thom Manon) 사원과 초세이테보다(Chau Say Tevoda) 사원은 양식, 구조, 설계면에서 엇비슷하다.

 

 초세이테보다 사원과 톰마논 사원은 길의 경계로 하여 양쪽에 가까이 붙어 있는 작은 기념물이며 양식과 설계가 유사하다. 비록 이 기념비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지만 고전 예술 양식의 절정기에 지어져, 하나의 시대 건축양식을 나타낸다. 초세이테보다 사원은 현재 톰마논 사원보다 훨씬 더 노후되어 있다.

 초세이테보다 사원은 사각의 설계와 중앙의 사당이 동쪽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동쪽문에는 담으로 둘러싸인 입구에 해당하는 탑이 있으며, 사원의 담장 주변에는 사원을 둘러싼 연못의 흔적을 볼 수가 있다.

 입구 탑은 주춧돌과 계단의 흔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붕괴되어 있으며, 팔각형으로 지지하고 있는 3열의 솟아오른 연결도로와 테라스는 동쪽 입구의 출입탑으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을 지나가다보면 탑의 벽면에 수그리바(Sugriva)와 발리(Vali)의 전투를 그린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북쪽(동쪽면)으로 지나가면 원숭이와 시바(Siva) 그리고 소를 타고 있는 파르바티(Parvati)와 아스파라스가 양각되어 있다.

 

 

앙코르 유적군

■ 앙코르 톰 도성

 12세기 말

 도읍지

 자야 바르만 7세 왕

■ 바이욘 사원

 12세기 말

 불   교

 자야 바르만 7세 왕

■ 바푸온 사원

 11세기 중반

 힌두교

 유다야티다야 바르만 2세 왕

■ 피메나카스 사원

 10세기 중반

 힌두교

 라젠드라 바르만 2세 왕

■ 쁘레아칸 사원

 12세기 말

 불   교

 자야 바르만 7세 왕

■ 따께오 사원

 10세기 중반

 힌두교

 자야 5세 ~ 수리야 바르만 1세 왕

■ 타프롬 사원

 12세기 말

 불   교

 자야 바르만 7세 왕

■ 앙코르 사원

 12세기 초

 힌두교

 수리야 바르만 2세 왕

 

 

톤레삽 호수(Tonle Sap Lake, 'the Great Lake')

 크메르인들의 일상생활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호수다. 크리스탈처럼 맑거나 옥빛을 띤 호수를 기대했다면 미리 실망하는 것이 좋다. 메콩강은 황토흙을 실어나르기 때문에 탁한 황토색을 띤다. 해질녁에 물빛이 황금색으로 물들 때 가장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한다. 호수 주변에서 배를 빌릴 수 있고, 여러명이 간다면 좋은 가격을 협상해 볼 수 있다. 톤레샵 호수는 캄보디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지리적인 경이물 중의 하나이다.

 톤레샵 호수는 길이가 160km이고 너비가 36km에 이른다. 건기(期)에는 3,000㎢의 면적에 수심 1m 정도를, 우기()에는 10,000㎢ 면적에 12m 수심이 된다.

 톤레샵 호수에는 풍부한 민물어류가 있고, 이러한 자원은 물새나 수생동물, 양서류가 살기에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우기가 시작되는 6월 이전까지는 습지에서 고기를 잡는 많은 물새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잉어나 메기, 담치, 청어, 민물농어, 구라미 등의 어류가 서식을 하며, 담수량도 동남아 최대라고 한다. 수 세기동안 이 호수주변의 사람들은 1㎢당 10톤의 어류를 잡을 수가 있었고, 크메르의 주요 자원으로 공급되었다. 또한 이 호수는 수도인 프놈펜과의 주요 수로로 이용되었으며, 호수 주변의 다섯 지방과도 통한다. 요즘에는 관광산업이 많이 활성화되어 프놈펜과 씨엠립 사이에 보트로 여행하는 코스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다. 

 

수상촌

 씨엠립에서 버스를 타고 톤레샵 호수쪽으로 약 40~50분을 가다보면, 야트막한 140m 정도의 산이 보인다. 이 산은 이곳 캄보디아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우기 때는 산 허리가 선착장으로 변한다. 이 지역의 사람들의 생활은 건기와 우기에 따라 뚜렷이 구분된다.

 건기 때에는 이곳 지역이 쌀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로 변하고 우기 때에는 톤레삽 호수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가옥도 이동을 할 수 있는 독특한 형태로 지어지는데, 집을 4~5일을 비우면 집을 아예 통째로 들고가버리는 집도둑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유명한 태국의 수상촌이나 중국, 그리고 유럽의 수상시장 등은 큰강을 끼고, 그 강을 바탕으로 경제가 활성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곳 수상촌도 톤레샵 호수와 그 주변의 경제권역이 이들의 주생활 터전임을 말해 준다.

 이 수상촌은 메콩강을 끼고 사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통된 생활상을 잘 엿볼 수 있는 좋은 생활문화적인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잡은 고기를 젓갈로 만드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배를 저어며 학교에 가는 아이들, 중국계 상인들, 보트 피플이라는 베트남계 빈민들, 생계를 위해 배를 저어 다니는 예닐곱의 아이들, 배에 물건을 싣고 시장에 가는 아낙 등 이들의 삶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왓 트마이(Wat Thmei)

 작은 킬링필드라 불리우는 왓 트마이는 씨엠립 시내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75년부터 4년간 크메르루즈 군에 의해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는데, 영화 '킬링필드'를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 이 대학살은 인간의 잔인함과 전쟁의 참혹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는 그 당시에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을 모아놓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뢰박물관(Landmine Museum)

 30여년에 걸친 내전이 남긴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다양한 지뢰와 폭발물 등이 전시되어 있는 사설 박물관이다. 캄보디아에는 아직까지도 매설된 지뢰가 터져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고, 지뢰의 위험성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들이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다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지뢰에 대한 교육을 시행함으로서 그 위험성을 알리고 지속적인 지뢰 제거 작업을 하고 있다.

 

 

 

씨엠립 현지교통

 씨엠립은 크게 이동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도시가 작아, 지리만 익힌다면 걸어다닐 수도 있다.

 씨엠립의 주요 교통 수단은 앙코르왓 유적 관광을 위한 것이다. 택시는 일반 택시 개념보다는 기사가 딸린 렌트카라 보면 되고, 전세를 내어 앙코르왓 관광이나 국경까지 이동을 하는데 사용한다.

 오토바이 택시는 앙코르왓 관광 뿐만 아니라 시내에서도 이용되며, 기사를 포함해 하루 전세를 앙코르왓 관광을 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렌트하여 앙코르왓 관광을 하는 여행자들도 많다.

 그러나 야간 이동시 아직 도로사정이 좋지않고, 가로등도 없어 큰 위험이 있으니, 이왕이면 야간 이동은 자제하거나 영업용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좋다.

 

 

씨엠립 먹거리

✜ 수끼

 끓는 육수에 얇게 저민 고기, 해산물과 완자어묵, 갖가지 야채, 칼국수, 수제비를 데쳐서 다양한 소스와 함께 즐기는 음식으로 원래는 태국 음식이다.

 태국 사람들이 캄보디아로 많이 왕래를 하면서 수끼집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본고장인 태국에서 만큼이나 그 인기가 대단하다. 이 소스는 캄보디아 전통의 매운 고추와 갖은 조미료로를 첨가하여 독특한 맛이 난다. 수끼를 다 먹고 난 다음에는 우리나라 샤브샤브 음식점에서 처럼 볶음밥이 나오는데 이 또한 별미이다.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 태국식 레스토랑- 챠오프라야(Chao Pra Ya Restaurant)

 이곳 씨엠립의 캄보디아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 비교적 잘 맞는다. 그러나 추천할 수 있는 깨끗한 식당은 드물다.

 차오 프라야 레스토랑은 그런 면에서 두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곳이다. 점심은 주로 패키지 투어의 전용 식당으로 이용되며, 조금만 늦어도 자리를 잡기 힘들다. 뷔페식으로 되어 있으며, 캄보디아 국수를 비롯하여, 씨푸드, 바베큐 등의 태국식 음식을 서비스하고 있다.

 태국 전통의 향료를 자제하여 우리의 입맛에도 거부감이 없이 깔끔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이곳 씨엠립의 식당에서는 물은 제공되지 않고 생수를 사 먹어야 한다.

 

압사라춤을 보며 뷔페식을 즐길 수 있는 곳- 바이욘 II(Bayon II)

 씨엠립에서 압사라 공연을 하는 곳은 많지만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 바이욘 II(BAYON II)를 손꼽는다. 뷔페식 식사를 하면서 1시간 동안 압사라 댄스를 공연하는 곳으로 춤의 질과 내용에 있어 단연 최고로 손꼽힌다.

 예약제로 빨리 가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도 힘들며, 음식을 먹기도 힘들어 진다. 압사라 댄스는 약 8시부터 공연이 시작되며, 약 1시간 동안 지속된다. 처음에 압사라들이 나와서 환영의 인사를 하면서 공연이 시작되고, 각 지방의 민속춤들이 소개된다.

 압사라 댄스는 그 여러 개로 구성된 공연 중의 일부이며, 나머지는 건기와 우기 때 고기를 잡으며 이루어 지는 청춘남녀들의 사랑과 인어공주와 원숭이신인 하누만의 사랑이야기, 압사라들의 춤, 공작새들의 춤 등으로 이루어진다.

 공연 중 사진 촬영이 허용이 되며, 이곳 캄보디아 지역에서는 모든 생수는 술과 함께 따로 주문을 해서 사먹어야 한다. 필수적인 추천 코스이며, 다른 호텔이나 공연장에서도 압사라 댄스를 공연하지만 이곳 바이욘 II의 것이 가장 볼만하다.

 

한국인 입맛에 맞는 시원한 냉면 음식점- 평양 랭면(Pyong Yang Restaurant)

 1964년 북한과의 수교 이후 캄보디아에 직접 투자하여 운영하는 식당이다. 무엇보다 이국에서 북한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에 가본다는 색다른 경험과 종업원들의 간단한 북한 전통 공연도 많은 흥미를 유발하여 단체 여행이나 배낭 여행자에게도 앙코르와트 못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차림상에는 오이무침, 땅콩, 양배추 무침이 반찬으로 나오며, 냉면, 된장찌개, 쌈밥정식, 두부전, 군만두, 주류를 판매하고 있다.

 북한 처녀들의 공연 시간대에 가서 먹는다면 다 불어터진 냉면을 먹게 되니 이 시간대를 피할 것.

 공연은 하루에 4번(12:30, 13:30, 18:30, 19:30) 있다.

 

 

씨엠립 쇼핑

씨엠립 쇼핑 정보

 캄보디아는 농업과 관광산업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제조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대로 기념품등은 수공예가 많아 그 물품이 가진 자체의 독특함과 매력을 느낄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것은 크메르인들의 문화가 디자인된 크메르 스카프와 인도네시아 발리의 우붓에 비교되는 캄보디아 목각 수공예품이다. 가끔 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으나 캄보디아를 다녀왔다는 기념으로 하나 사는 것도 좋다.

 

앙코르 기념품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곳- AKS(Angkor Souvenir Shop)

 아직까지 씨엠립에서는 길거리의 가게들을 제외하고는 기념품을 살만한데가 많지 않다. 오랜 내전과 전쟁으로 인해서 기관 산업들이 모두 파괴되어 공산품들은 모두 인근 주변의 베트남이나 태국에서 수입이 된다. 보통 호텔의 기념품점의 경우에는 가격이 비싸다.

 씨엠립 공원 앞에 위치한 AKS는 그나마 나은 기념품점이다. 각종 앙코르의 석조각들과 기념책자 그리고 티셔츠나 보석들을 팔고 있다. 이곳도 표시된 가격이 싼 곳은 아니다. 그래서 열심히 흥정을 하여 가격을 깍으면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다. 보통 티셔츠는 $2~$3 정도, 풍부한 보석산지로서 에머랄드나 사파이어, 루비 등을 판매한다.

 아직은 가공 기술이 떨어져 가격은 저렴하나 세공기술이 떨어져 품질이 떨어지는 것들이나 어떤 것들은 장신구로서는 나무랄데 없는 것도 있다.

 

다양한 기념품과 캄보디아 서민의 장사풍습이 가득한 곳- 프싸르 마켓(Phsar Chas)

 씨엠립의 타운 남부 강변에 위치한 오래된 재래시장(Phsar Chas)이다. 프싸르(Phsar)은 크메르어로 시장을 뜻한다. 이곳에선 특별히 무언가 구매를 한다기 보다는 그들의 삶을 구경하고, 가끔 그들만의 전통 음식도 맛 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는게 좋다.

 최근에는 앙코르왓을 찾는 관광객이 많아지면서 많이 관광지화 되어 기념품도 팔고 있다. 그러나 역시 현지인들을 위한 기초 생활품이나, 야채, 과일, 생선등이 주요 품목이다.

 

 

씨엠립 즐길거리

고대 크메르 족의 전통 춤- 압사라 민속쇼(Dancing Apsaras)

 캄보디아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공연이 있다면 바로 압사라 민속춤일 것이다.

 압사라(Apsara)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님프에 해당하며, 탄생은 비너스의 그곳과 유사하다. 천상의 선녀이자 무희였으며, 때로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사이렌(Siren)이 되기도 한다.

 압사라쇼는 전통 악기와 춤과 율동으로만 공연이 되며, 여기에 노래와 같은 요소는 첨가되지 않는다. 성격상 오폐라보다는 무극에 가깝다.

 공연장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4~5장의 공연으로 나눠진다. 첫번째 압사라들의 서장에서는 압사라들이 나와서 관객에게 인사를 한다. 그리고 둘째 장부터는 각 지방의 민속 댄스를 선보인다. 댄스의 내용은 주로 주변 환경과 청춘남녀의 사랑이다. 각 장마다 지방 특유의 민속춤을 선보이며, 각 지방의 전통 의상과 악기를 선보이며, 의상과 악기가 지방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진다.

 주로 호텔 디너쇼로 공연이 되며, 캄보디아 전통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씨엠립에서 가장 유명한 디너쇼장은 바이욘 II이며,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공연을 보기 힘들다.

 공연 중 촬영이 허용되고, 공연이 끝나고 무희들과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씨엠립 전통 지압마사지

 중국 전통지압와 태국의 경락마사지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캄보디아 전통 지압마사지이다. 특히 관광 후, 더위에 지쳤을 때 마사지를 받으면 온몸의 피로가 싹 풀린다.

 사우나, 허브샤워도 같이 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이 있다.

 

 

 

스타투어(Star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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