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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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은 필리핀이 가진 눈부신 아름다운만큼이나 아이러니컬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1521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425년간의 외국의 수탈과 지배를 받았고, 다시 마르꼬스에 의해 25년간 독재정치의 지배하에 있었던 나라다. 또 한편으로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하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된 나라이기도 하다.

 필리핀을 가장 장기간 지배했던 스페인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방식 중의 하나로 필리핀인들만의 문화라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기에 스페인 지배 이전의 역사에 대해선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탐험가'와 '정복자'라고 불리우는 그들의 오만과 편견은 소중한 많은 것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자신의 땅에 도착한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원주민들을 수탈하고, '발견'했다며 자신의 땅임을 선언하고, 총과 칼로 그들의 삶을 방해하는 오만불손한 행위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섬나라 필리핀에 어떻게 사람이 살게 되었을까, 스페인, 영국, 일본, 미국의 지배속에서 필리핀인들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필리핀의 기원

<섬나라 필리핀에 어떻게 사람이 정착할 수 있었을까?>

 1만년 전 '뵈름기'라는 빙하기를 맞이했을 때 해수의 일부가 얼어버리면서 육상으로 이동이 가능하게 되었다.(해수면도 현재보다도 100m 이상이나 낮았다)  필리핀 제도는 아시아 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연결된 육지를 따라 자바 섬에서 '자바원인'이라고도 불리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Pithecanthropus erectus)의 일부가 필리핀으로 건너왔다.

 그 후 키가 작고 흑색의 피부를 가졌던 니그리토 족이 육지를 따라 아시아 대륙에서 건너왔으며 그들의 후세는 현재 필리핀 이외에 안다만 제도나 말레이 반도, 뉴기니아 섬에 살고 있다.

 자바원인과 관계된 초기인류로 추정되고 있는, 루손 섬에 사는 니그리토 족은 금세기 초까지도 다른 부족이나 부락을습격하여 사람의 목을 베어 이것을 종교의식에 사용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치아를 줄로 갈아 뾰족하게 하고, 제 2차 세계대전 때에는 일본군에 맞서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50만년전부터 원시사회가 형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빙하시대가 끝난 뒤 인도네시아와 보르네오와 교역을 시작했고, 그 후 중국, 일본, 인도, 이슬람 선원들과 교역을 했다. 그 시대는 농업이 발달한 사회였다. 문화의 기반이 시작된 것은 AD 500년전부터다. 필리핀사람들은 1,000년이 넘도록 금을 캐었으며 철을 제련하였다. 쌀, 코코넛, 사탕수수, 면화 삼, 바나나 등의 농작물들을 경작하였으며 어업과 가축업, 제재업, 방직, 조선업 등의 일을 했다.

 필리핀의 역사는 지금까지 3,000년의 역사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1963년 필리핀의 팔라완섬에 B.C 2만~3만년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두 개골 화석이 발견됨으로써, 역사의 기원이 2만~3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스페인 점령 당시 스페인의 수도사들에 의해 소각되어 버렸기 때문에 고대역사와 문화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금과 천연광석이 가득찬 산맥, 신비스런 동식물이 숨쉬는 숲, 기름진 땅, 장엄한 일몰 그리고 포근한 기후 등 이 미지의 섬이 지닌 보물들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사교적이고 명랑하며 친절하고 낙천적인 기질을 심어 주었다.

 필리핀에 있어서 원주민은 B.C 2만~3만 경에 중앙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이주하여 온 것으로 보여지는 네그로토족인데, 이 네그로토족은 B.C 8,000~3,000년경에 남방에서 이주하여 온 인도네시아족에 의해 산악지방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네그로토족을 추방한 인도네시아족은 B.C 2000 년, B.C 100~130년, A.D 1400~1500 년등 3차례에 걸쳐 필리핀으로 이동하여 온 말레이족에 의해 산악지대로 쫓겨나거나 동화되었다.  이때부터 필리핀의 역사는 말레이족에 의해 주도되어져 왔다.

 

 

스페인 정복이전시대 ( ~ 1517년)

 말레이족은 네그로토족이나 인도네시아족에 비해 문화수준이 높아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집단 부락 생활을 하였다.  7C 경에는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9C 경부터는 인접국과의 교역을 개시하였다. 당시 아랍상인들은 중국중부 연안으로의 통로를 개척할 수 없어 말라카를 기점으로 보르네오 ~ 필리핀~대만을 경유하는 루트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동남아시아 및 서양국가로부터 물자를 아랍인에 의해 북방경로를 통해 필리핀으로 유입되었으며 도자기등 중국으로의 상품은 남방경로를 통해 필리핀에 유입되었다.

 필리핀상품은 아랍상인들에 의해서 중국으로 유입되었는데, 중국 송왕조시대에는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필리핀에서 중국인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중국의 필리핀 진출에 따라 필리핀은 화교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샤므 송남, 통킹 등과 거래를 시작하였으며 멀리는 아라비아 상인들과도 활발 교역을 하였다.

 소규모의 가족중심의 부락 공동체로 통일된 중앙정부나 국가는 성립되지 않았었고 스페인 정복시 전체 인구는 약 50만명 정도였다.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이슬람교도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 이주, Salu 열도로부터 민다나오 일대에 걸쳐서 정착하였으며 1575년경에는 소규모의 영토 국가가 성립되었다.

 필리핀에는 30~100세대로 구성된 바랑가이라는 집단부락체 부족국가가 있었으며 각 바랑가이는 라자 (raja) 라고 호칭되는 전제군주 촌장이 다투 (datu)라는 법령하에 입법, 동법, 행정까지 장악하고 원로 회의의 조언을 받아 바랑가이별로 상호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사회는 3등급으로 나뉘어 귀족, 자유부락민, 노예 등의 계급이 형성되었는데 자유민과 노예계급들의 상위 계급으로의 신분이동은 공훈, 무용, 부의 획득 등으로 가능하였고 부녀자들도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

 이러한 문화는 중국, 인도, 아랍계의 영향을 받았고 인도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子音表를 사용하였으며, 구전문학으로는 의식을 위한 노래와 기록문학으로는 서정시 및 서사시, 드라마등이 발달해 있었다.

 건축으로는 약간의 회교사원건축이 남부지방에서 발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405년 말라카 해협지역에서 대제국을 건설한 말라카 왕국이 15C 중반부터 세력을 필리핀 남부에가지  확장하고 회교를 전파함으로써 회교는민다나오, 파나이에서부터 북으로는 루손섬에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회교족들에 의한
압박에 따라 중국의 인도지방 자국과의 교역이 감소되고 회교들도 축출당함으로써 남부의 회교권을 중심으로 새로운 무역로가 개척되었다.

 그러나 이들 회교족들은 필리핀에 절대적인 기반을 구착하지 못하고 말라카 제국이 구주열강에 의해 멸망하고 필리핀도 스페인에 의해 정복됨으로써 회교족들에 의한 필리핀지배는 막을 내렸다.

 200년에서 1440년까지 이 섬들은 중국의 명왕조 등 여러 힌두말라얀 왕국들의 일부분이었다. 그 후 1565년가지 주요섬인 루손의 북족은 일본에 의해서 지배되었고, 남쪽은 이슬람계의 보르네오와 브루 나이에 의해 일시적으로 통치되었다.

 1400년대 말에 유럽의 국가들이 무역 노선과 종교로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1521년 스페인 국왕의 지원을 받아 마젤란이 사마르섬에 상륙하여 스페인령이라고 선포하였다.

 

 

스페인 식민지시대(1571~1898년)

『스페인의 정복자, 마젤란』

 1521년 3월 16일,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1세의 원조를 받은 포르투갈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호몬혼(Homonhon)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 섬을 당대의 스페인왕 필립Ⅱ세의 소유임을 선언하고 이 섬들을 오늘의 필리핀인 펠리피나스(Felipinas)로 칭했다.

 세부섬의 필리핀 사람들은 중국, 아랍, 이슬람과의 무역관계로 섬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환영하는데 익숙해 있었고 그들을 환영했다.

 마젤란은 이 섬의 원주민들을 천주교로 개종시키고, 그는 곧이어 스페인 군대의 힘을 개종한 원주민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근처에 있는 '막탄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추장인 라푸-라푸(Lapu-Lapu)는 전투중 마젤란을 죽임을 당한다.

 

 

※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 1480?~1521)

 1519년 9월 20일에 에스파냐 남서 해안의 카디스 근교의 항구를 4척의 배로 떠난 마젤란 일행은, 1520년 1월에 남아메리카의 라플라타 강 하구에 도달해 파타고니아에서 겨울을 지내고 그 해 11월, 후에 '마젤란 해협'이라 불리게 되는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나왔다. 괴혈병과 배안의 쥐까지도 잡아먹을 정도의 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며 항해하던 끝에, 1521년 3월에  마침내 괌섬에 도착한다. 그들은 식량을 보급받아 기운을 차리고, 부서진 배를 수리하고 난 다음 사마르 섬에 이르렀다.

 그리고 트라니다드와 빅토리아 호 두척의 배로 4월 7일에 세부섬에 상륙했다. 마젤란은 이곳을 자신의 항해에 지원을 해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 '필리핀'이라 명명하고 원주민들을 천주교로 개종시켰다.

 그러던, 4월 27일 개종된 원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막강한 힘을 과시하기 위해 근처 자신과 동조해주지 않는 막딴섬의 원주민들과 전투를 벌이게 되고 전투도중 추장 '라푸라푸'에게 마젤란이 죽음을 당한다.

 그의 죽음으로 세부인들은 더 이상 방문자들이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살아남은 침략자들은 허둥지둥 섬을 떠났다. 그들은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길에 향료를 모아서 가지고 갔다. 그 후 트리니다드 호가 심하게 손상되어 도저히 항해를 계속할 수 없게되자, 그들은 이 배를 몰루카 제도의 티도르 섬에 내버렸다.

 그리곤 빅토리아 호로 아프리카의 남단을 경유하여 에스파냐로 돌아왔다. 이것이 1522년 9월 6일의 일이다. 출발했을 때 265명이던 선원 중, 약 3년에 걸친 세계일주를 무사히 마치고 에스파냐로 귀국한 사람은 겨우 18명밖에 되지 않았다.

 

 

<식민지의 시작>

 마젤란에 이어 필리핀에 온 스페인인은 1965년 4월 27일 다시 세부섬에 상륙, 1571년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한 이 섬의 잠재력을 깨닫고 세부에서 마닐라로 식민지의 중심을 옮기고 해상무역을 장악했다. 이후 미국에 양도되기 이전까지 330년간 식민지 지배를 당했다.

 1600년경까지 민다나오 섬과 세부섬을 제외한 필리핀 제도 전체를 카톨릭을 전파하며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필리핀과 멕시코에 있었던 신대륙 식민지 사이를 값비싼 물품을 가득 실은 갈레온(galleon; 대형 범섬)이 왕복하며 필리핀의 모든 것을 약탈하였다.

 포르투갈이나 영국, 네델란드 등의 함대를 누르고 에스파냐는 필리핀을 카톨릭의 포교와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지금도 필리핀에 짙게 남아 있는 카톨릭의 영향은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의 자취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통치기간 중에도 민다나오와 술루열도의 강력한 무슬림들은 개종도 하지 않았고 정복도 당하지 않았다.

 1588년 세계최고를 자랑하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한 후, 스페인은 세력은 급속도로 쇠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페인의 필리핀통치 기간중 일부 섬에서는 다른구주 열강 및 필리핀 원주민의 도움을 받았다.

 1574년  중국 해적 리마홍이 4000명이상의 공력을 이끌고 마닐라로 쳐들어왔으나 필리핀과 스페인 연합군이 이를 물리쳤다. 이 일을 계기로 마닐라시내 중국인의 반란을 우려한 스페인은 1579년에 중국인들을 파시그강 연안에 파리안지구를 만들어 중국인 지구로 정하였다.

 또한 늘어나는 중국인들이 경제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스페인 중부는 중국인에 대해 중세를 부과하여 그 재력을 흡수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중국인들과 많은 싸움이 반복되어졌다.

 이에 부장봉기한 중국인들은 퀴아포 및 톤도 지구 건축물에 불을 지르고 주민에 대하여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이 반란은 진압되어졌으나 이와 비슷한 사건이 1662년, 1762년에도 계속되어졌다. 이밖에도 포루투칼은 수 차례 세부로부터 레가스피를 추방하려고 시도 하였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762년 유럽에서의 '7년 전쟁' 결과로 영국이 1년동안 마닐라를 통치했지만, 그것은 스페인 통치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그것보다 스페인의 식민지정책의 강화와 수도사들의 횡포 등의 스페인의 압제정치에 대항해 필리핀의 독립을 요구하는 필리핀 민중의 목소리가 그들의 지배를 위협했다.

 19세기 후반에는 100회 이상의 항거가 일어났었고, 1872년 카비테 사건으로 3명의 필리핀 승려가 사형에 처해진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필리핀국민들의 독립심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투쟁을 제압하기 위해 이시기 가장 큰 영향력을 주었던 사람은 호세 리잘(Jose Rizal)이다.

 1891년 호세리잘은 스페인 식민지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을 지휘하면서 1892년 마닐라에 그 지부를 설치하고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896년 스페인군에 의해 체포되어 같은 해인 12월 30일에 총살형을 당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필리핀인들의 더 큰 분노와 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호세리잘은 지금도 필리핀 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다. 호세리잘이 살해당한 후에 리잘의 동료인 보시파쇼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혁명단체인 카티푸난을 이끌고 애국운동을 벌렸으며 국내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특히 아퀴날도 장군이 지휘하는 군이 스페인군에 대항하여 남부 카지테주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져 아퀴날도 군은 1889.7 스페인 군을 물리치고 자유 평화 박애의 삼원칙에 입각한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하여 스페인 정부는 당시 對쿠바관계에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이어서 필리핀의 반란진압에 주력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반란군측 종교명령의 철폐, 민족의 법적 평등, 언론과 집회의 자유, 재저으이 개선 등의 강하조건과 170만 페소의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아퀴날도장군 등 반란군 지도자를 홍콩으로 추방하였다.

 한편 홍콩으로 추방당한 아퀴날도 장군은 무기구입에 전념하고 필리핀 수복을 노리던 중 1898년 미국과 스페인전쟁이 일어나자 홍콩주재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무기를 지원 받아 미국과 협력하여 카비테에 상륙하여 스페인 군을 물리치고 1898.6.12에는 마침내 필리핀의 독립 선언하고 수도를 마닐라로 정하였다.

 그러나 미군은 같은 해인 12월에 파리에서 미국, 스페인조약을 맺고 스페인에 2,000만불을 제공하는 대신에 필리핀을 양도받음으로써 330년간의 스페인 통치를 종식시키고 필리핀 통치를 실시하였다.

 

 

호세 리잘 (Jose Rizal; 1861~1896)

 호세 리잘은 중국 필리핀 계의 부유한 사탕수수 재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마닐라 대학을 졸업한 다음 유럽으로 건너가 마드리드와 파리, 하이델베르크에서 의학을 배웠다. 풍부한 재질을 가진 그는 의사, 과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역사가, 시인, 소설가, 화가, 조각가 등으로 활약하였다. 특히,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에스파냐의 압제정치와 필리핀의 독립을 온 세계에 호소하였다.

 리잘은 에스파냐 정부의 집중적인 감시 대상이 되어, 국외로 빠져나가 이리저리를 떠돌아다녔다.

 부모와 친구의 반대를 무릅쓰고 1892년에 필리핀으로 돌아온 그는 마닐라에서 비폭력 혁명 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민다나오 섬에 유배되었다. 민다나오 섬에서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4년에 걸친 민다나오 섬에서의 유형생활을 마치고 카티푸난당이라는 이름의 비밀결사에 의한 무력봉기를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1896년 12월 30일에 마닐라의 바군바얀 연병장(지금의 리잘공원)에서 총살당했다.

 

〈나의 마지막 작별〉

                                                                 호세 리잘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태양이 감싸주는 동방의 진주여

잃어버린 에덴이여

나의 슬프고 눈물진 이 생명을

너를 위해 바치리니

이제 내 생명이 더 밝아지고 새로워지리니

나의 생명 마지막 순간까지

너 위해 즐겁게 바치리

 

형제들이여, 그대는 한 올의 괴로움도

망설임도 없이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아낌없이 생명을 바쳤구나

월계수 백화꽃 덮인 전나무관이거나

교수대거나 황량한 들판인들

조국과 고향을 위해 생명을 던졌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두운 밤 지나고

동녘에서 붉은 해 떠오를 때

그 여명 속에 나는 이 생명 마치리라

그 새벽 희미한 어둠 속

작은 불빛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나의 피를 흩뿌려

어둔 새벽 더욱 밝히리라

 

나의 어린 시절이나

젊은 혈기 넘치는 지금이나

나의 소망 오직

동방의 진주 너를 흠모하는 것

검고 눈물 걷힌 너의 눈

한 점 꾸밈도 부끄럼도 없는

티없이 맑고 부드러운 눈

동방의 진주 너를 바라보는 것이었노라

 

이제 나는 너를 떠나야 하는구나

모든 즐거움과 절실한 열망을 버리고

아 너를 위해 가슴 속에서 우러나

만세 만세를 부르노라

우리에게 돌아올 최후의 승리를 위해

나의 죽음은 값지리니

네게 생명을 이어주기 위해

조국의 하늘 아래 숨거두어

신비로운 대지에 영원히 잠들리니

아 행복하여라

 

먼 훗날 잡초 무성한 내 무덤 위에

애처로운 꽃 한 송이 피었거든

내 영혼에 입맞추듯 입맞추어다오

그러면 차가운 무덤 속

나의 눈썹 사이에

너의 따스한 입술과 부드러운 숨소리 느끼게 되리니

부드러운 달빛과 따스한 햇빛으로

나를 비쳐다오

내 무덤가에 시원한 솔바람 불게 하고

따스하게 밝아오는 새 빛을 보내다오

 

작은 새 한 마리

내 무덤 십자가에 날아와 앉으면

내 영혼 위해 평화의 노래를 부르게 해다오

불타는 태양으로 빗방울 증발시켜

나의 함성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게 해다오

너무 이른 내 죽음을 슬퍼해다오

어느 한가한 오후

저 먼 저승의 나 위해 기도해다오

아 나의 조국

내 편히 하늘나라에 쉬도록 기도해다오

 

불행히 죽어간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다오

견디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죽어간 이들을 위해

기도해다오

고난 속에 눈물짓는 어머니들을 위해

기도해다오

감옥에서 고문으로 뒹구는 형제들

남편 잃은 여인들과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다오

 

내 무덤가 십자가 비석도 잊혀져 가면

삽으로 밭을 일궈

내 무덤에서 시신의 재를 거두어

조국 온 땅에

골고루 뿌려다오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형장으로 가노라

내 부모, 사랑하던 이들이여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

 

잘있거라, 서러움 남아 있는

나의 조국이여

사랑하는 여인이여

어릴 적 친구들이여

이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는 안식에

감사하노라. 잘있거라

내게 다정했던 나그네여

즐거움 함께했던 친구들이여

잘있거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여

아 죽음은 곧 안식이니

 

 

미국 식민지시대(1898년~1946년)

 1898년 미국의 조지 드웨이 준장의 스페인 군함을 마닐라에서 격퇴하였다. 미국은 필리핀의 독립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아퀴날도의 도움을 받았으나 1898년 12월 미.스페인인 강화조약으로 2천만 불에 스페인은 필리핀을 미국에 이양함으로써 독립은 무산되었고 미국의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었다.

 1898.6.12 카비테에서 독립을 선언한 필리핀은 말로로스에 임시 수도를 설치하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주의적 헌법제정을 위한 혁명의회를 소집하여 아퀴날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899.1.12 헌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필리핀이 자치능력이 없다는 주장으로 필리핀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고 신탁 통치할 것을 주장하였다.

 윌슨 대통령은 당시 필리핀총독에 임명된 프란시스 해리슨은 1916년 존스법을 제정하여 입법부를 진정한 양원제로 전환시키고 필리핀의 민주적인 정부가 정착 되는대로 독립을 승인하겠다는 의도를 밝혔다. 1918년 오스메나 하워느 의장의 요청에 의해 내각과 양원의장단으로 구성되는 국가의회라는 자문기관을 설립하였다.

 1932년 오스메나 로하스가 인솔하는 독립청원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미의회로부터 최초의 필리핀 독립일자를 인정받는 성과를 거두고 1934년 퀘손의 방문을 통하여 더욱 유리한 필리핀 독립법성립을 보증받게 되었다. 이 법은 필리핀의 10년 후 완전독립준비를 위해 자치령설립을 규정한 것으로 코먼웰스 기간중 미국대통령 대리고 미국인 고등변무관이 마닐라에 주재하기로 되었다.

 1935.3.23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승인되고 1935.3.14 필리핀 국민투표에서 통과됨으로써 성립이 되어 1935.11.15마누엘퀘손 대통령, 세루히오오스메니아 부통령을 수반으로하는 필리핀 코먼웰스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필리핀 정치가 자치로 발전하도록 하려던 미국의 의도는 제 2차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항으로 지연되었고 공항의 결과로 농민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불만이 커져 1924년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였다.

 마누엘케손은 1946에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보장받았으며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퀘손대통령은 코먼웰스정부의 목표로서 노동자 우대법의 성림, 문학장려, 미개간지의 개척, 도로· 교량증설 등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제2차 대전의 발발은 이들 각종의 건설사업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일본군의 점령(1942년~1945년)

 일본군은 1941.12.8 필리핀내 주요 군사지역에 대한 폭격을 시작하였고 1942.1.2 마닐라 점령에 이어서 같은 해 5월 7일에 코레히도를 함락시켰다. 이로 인하여 필리핀 전지역에 대한 군정을 실시했다.

 케손, 오스메나가 워싱턴에 망령정부를 수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닐라의 소수정치인들은 일본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1943.9 라우렐 전상원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독립준비위원회에 의해 신헌법이 정비되고 10월14일 라우렐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일본에 저항하는 26만 명의 게릴라세력은 일본이 추수기 때에 쌀의 수탈을 줄이기 위하여 루손섬 미작 지대를 중심으로 산발적인 공격으로 중부 루손의 상당한 지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1944.10.20 맥아더 장군(D. Mac Arthur; 1880~1964)이 4개사단과 650전함을 이끌고 레이테에 상륙하고 1945.2 마닐라를 탈환함으로써 친일 정부가 무너지고 오스메나를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자치령이 복원되었다.

 일본군은 1945년 더글라스 맥아더가 '돌아올 때'까지 필리핀을 지배하였다. 일본은 위안부, 잔인한 주민 살상으로 많은 피해를 남기고 필리핀을 떠났다. 

 

 

필리핀 공화국(1946년~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 해인 1946년, 지난 10여년간의 약속-독립을 이루어주겠다는-이 이루어지게 된다. 필리핀은 필리핀 공화국으로서 독립하므로서 약 4세기에 걸쳐 계속된 공식적인 외국세력에 의한 필리핀의 지배가 끝났다.

 하지만, 경제분야에서는 미국 회사들의 완전한 소비시장이 되었고 정치쪽도 미국의 간접지배 방식을 띠게 되었다.

 

 

<독재자, 마르꼬스>

 1950년대와 1960년대 필리핀에서는 선거 때마다 집권당이 바뀌었으며, 이는 1965년 페르디난드 마르꼬스(Ferdinand Marcos)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르꼬스는 1969년 재선출 되었으며 1972년 명목상으로는 무정부주의자를 줄인다는 미명 하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그는 또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헌법은 그의 세 번째 통치기간에는 쓸모가 없었다.  비록 이전에 만연하던 폭력은 없어졌지만, 계엄령이 곧 전 필리핀을 지배하게 되었다. 국민들은 부정부패로 고통을 받게 되었으며, 주변 국가들이 경제붐을 이루는 동안 필리핀은 가장 경제력이 약한 나라로 몰락해 갔다.

 1983년 마르꼬스의 정적인 아키노(Benigno Aquino)의 암살은 이미 비틀거리고 있는 경제를 활성화시켜 보고자하던 마르꼬스에 대한 반대를 불러 일으켰다.

 마르꼬스는 1986년 초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선언했으며, 아키노의 미망인 꼬라손 '꼬리(Cory)' 아키노를 지지하기 위해 야당들이 연합했다. 세계 유수의 방송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르꼬스와 아키노를 모두 선거에서 승리를 장담했다.  하지만 '민중'들은 꼬리아키노에게 손을 들어줬으며, 몇일 후에 페르디난드와 이멜다는 하와이로 도망갔다. 결국 독재자 마르꼬스는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코리 아키노>

 아키노가 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그녀를 지지하는 연정은 하나가 되기 힘들었으며, 그녀는 군부와 이전에 마르꼬스를 지지하던 사람들의 후원을 받는데 실패했다. 그녀는 또한 공산 혁명을 추구하는 NPA(New People's Army)와 남부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MNLF(Moro National Liberation Front)를 구슬리는 데도 실패헀다.

 이러한 여러 상황과 필리핀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못하는 그녀의 무능력이 합쳐져 결국 1992년 스스로 권력을 포기했다.

 아키노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지했고, 7번의 쿠데타에서 그녀를 도왔던 피델 라모스(Fidel Ramos)가 그녀를 계승했다.

 

 

<피델 라모스(Fidel Ramos)>

 신교도인 피델 라모스가 카톨릭 교회의 지원없이 1992년 스스로 권력을 포기했다. 그리고 즉시 부정부패와 싸우고, 경제를 희생시키며, 일자리를 만들고, 외채를 감소시키는 정부를 선언했다. 실천력을 가진 강력한 힘으로 그는 곧 불안정한 에너지 분야를 확고하게 했으며, 외국인 투자자에게 투자를 독려했다.

 그리고 심지어 공산당까지 해금하여 국가의 자원을 낭비하는 게릴라전을 끝내려는 시도를 했다. 이 정책은 수많은 어려운 협정을 거친 끝에 MNLF와 평화협정을 맺게 됨으로써 결실을 보았다.

 

 

<역대정권>

  - 1946년   7월 ~ 1948년   4월 manuel A Roxas (자유당)

  - 1948년   4월 ~ 1953년   1월 Elpidio R Quirino (자유당)

  - 1953년   1월 ~ 1957년   3월 Ramos F Magsaysay (국민당)

  - 1957년   3월 ~ 1961년 12월 Carlos P Garcia (국민당)

  - 1961년 12월 ~ 1965년 12월 Diosdado P Macapagal (자유당)

  - 1965년 12월 ~ 1986년   2월 Ferdinand E Marcos (국민당)

  - 1986년   2월 ~ 1992년   6월 Corazon C Aquino (민주투쟁당)

  - 1992년   6월 ~ 1998년   6월 Fidel V Ramos (국민의 힘당)

  - 2000년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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