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마지막 왕조 - 응우옌 왕조(Nguyen Dynasty , 阮王朝(완왕조), 1802~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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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시아는 19세기 이후, 유럽 열강의 침략에 의해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프랑스는 응우옌 왕조 내부의 혼란을 틈타 군대를 파병하여 제1차 후에 조약, 제2차 후에 조약을 맺고 베트남을 보호령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지배 하에서 무거운 세금과 부역, 소금, 알코올, 아편의 전매 등의 착취를 받았다. 저항 운동에 참여한 자의 다수는 비밀경찰에 의해 투옥되고 사형을 당하였다.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로부터 경제적인 수탈뿐 아니라 전통 문화를 파괴당하고 프랑스 문화를 강요당하는 등 전형적인 식민지 정책의 압정을 겪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본국이 독일에 점령되고, 중일 전쟁의 확대에 따라, 일본은 프랑스로부터 중화민국의 물자를 차단시키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권과 친화 정책을 써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 진주를 인정받았다.

 

 

광남 완씨의 시대

 응우옌 왕조의 초대 황제 가륭제(완복영, 완영)는 레 왕조 대월국 (중흥 레 왕조, 후 레 왕조, 1532~1789)의 시대에 현재의 중남부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지방 왕권, 광남 완씨(완씨 광남국)의 출신이다.

 

 후기 레 왕조 시대에 황실은 실권을 잃었고, 북 베트남(통킹) 지방을 지배하는 찐 가문과 남쪽의 응우옌 가문 간의 2대 지방 호족에게 왕권이 분립된다.

 

 두 지방호족은 령 강(송 강)을 국경으로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구전자료에 의하면 이 북-남 양국을 당시에는 쓰 당응와이(Xứ Đàng Ngoài), 쓰 당쫑(Xứ Đàng Trong)이라고 불렀고, 문헌에서는 북하, 남하라고 불렀다. 중국, 일본의 사료에서는 통킹국(교지국), 광남국이라고 불렸으며, 옛 문헌에서는 통킹, 교지국이라고 불렀지만, 두 호족 모두 공적으로는 대월국 황제의 신하를 자칭하여 독자적인 국호나 제호나 연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1771년, 빈딘에서 완구 등 3형제(완악, 완혜, 완려)가 주도한 떠이선의 난이 일어났다. 떠이선(Tây Sơn, 西山)은 3형제가 봉기한 지명으로, 현재의 빈딘 성의 성도이다. 광남 완씨가 반란의 진압에 시간을 소요하자, 통킹의 찐 씨는 이것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군사들을 대거 이끌고 남하하였다. 1774년에 수도 부춘(Phú Xuân, 푸쑤안)을 함락하자, 예종은 남부로 탈출했다. 완씨 3형제(떠이선 응우옌 씨)는 찐 가문에게 항복하였고, 광남완씨 잔당은 계속 토벌되었다. 1777년에는 남부 자딘(Gia Định)이 함락당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왕족이 살해되어 광남 완씨의 응우옌 왕조는 막을 내렸다.

 

 

건국

 응우옌 가문의 멸망으로 레 왕조 지배 하의 남북국은 명목상 찐 씨의 세력권으로 통일되었지만, 실제로는 응우옌 씨의 옛 영토의 주인이 떠이선 응우옌 씨 3형제로 바뀌었을 뿐 남북의 대립구도는 변함이 없었다. 남방의 왕자가 중부 북쪽의 푸쑤언(Phú Xuân)을 근거지로 하는 광남 완씨에게서 중부 남쪽의 꾸이년(Quy Nhơn)을 근거지로 하는 완악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떠이선 왕조

 광남 완씨 멸망 후, 떠이선 응우옌 씨 막내 완혜는 레 왕조의 정치에 개입하여, 찐 왕조를 전복하고 수도를 부춘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떠이선 왕조를 열었다. 떠이선 왕조는 국호를 대내적으로는 대월이라 불렀고, 대외적으로는 안남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떠이선 왕조의 쿠데타로 북방의 왕자가 찐 씨에서 완혜(광중제)로 바뀐 것일 뿐 남북대립의 구도는 해소하지 못했다. 결국 떠이선 왕조의 남북 양 정부(쿠이놀, 푸쑤언)도 대치하며, 항쟁에 돌입했다.

 

 

응우옌 왕조

 1777년 이후, 타이(시암)에 망명하고 있던 광남 완씨의 생존자 응우옌아인(이후 자롱제)은 시암 왕과 프랑스 선교사 등의 지원을 받아 끈질기게 떠이선 왕조에 항쟁하였으며, 결국 떠이선 왕조의 내분을 틈타 10년간의 싸움에 종말을 고하고 떠이선 왕조를 타도하게 되었다. 그는 1802년에 수도를 중부 북방의 부춘으로 정하고 광남 완씨의 응우옌을 재건하였다(1802년부터 응우옌 왕조라고 칭한다.). 재건된 광남 완씨의 응우옌은 연호를 자롱(가륭)이라 고쳤다.

 

 1804년에는 중국의 청나라로부터 월남 국왕으로 봉해지고, "베트남국"을 정식 국호로 삼았다. 응우옌 왕조는 청나라에 조공을 바쳤지만, 주변의 여러 민족이나 제국에 대해서는 황제라고 칭했으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승천흥운(承天興運)을 국시로 삼아 베트남에 작은 중화제국을 구축했다. 국호는 물론이고 국시와 연호도 국내의 공문서에 모두 기재하도록 하였다.

 

 

초기

 응우옌 왕조는 현재의 베트남과 비슷한 영역을 지배한 최초의 통일 정권이었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성급한 집권화를 행하지 않고, 현재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한 북부에는 북성총진을, 자딘(가정)을 중심으로 한 남부[7] 에 자딘성 총진을 두어 대폭적인 자치권을 인정했다.

 

 1815년, 가륭율례(嘉隆律例)가 발표되면서 중국적인 제도가 도입된다. 제2대 황제 민망제의 시대인 1830년대에 들어오면서 청의 제도를 모방한 중앙집권화가 추진되어 과거제도나 성을 구분한 지방제도가 정비되었다.

 이러한 중앙집권화 정책은 북부, 남부 모두에서 반발을 불렀고, 북부에서는 레 왕조의 자손을 칭하는 '레 유양의 난', 남부에서는 가정성 총진 레 문열의 아들 '레 문조개(려문조개)의 난' 등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또 대외적으로는 건국 시에 후원자가 된 시암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캄보디아나 라오스를 둘러싸고 전쟁의 수렁에 빠지게 된다. 내부의 반란은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주변을 둘러싼 캄보디아, 라오스 등의 정세는 기본적으로 샴측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비록 국력은 최대에 이르렀지만, 주변국과의 분쟁으로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프랑스의 침략을 받게 된다.

 

 응우옌 왕조는 건국시에 프랑스인을 비롯한 유럽인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었고, 몇몇 고위급 인사들이 기독교도이기도 했다.(예를 들어 가정성 총진의 려문열 등) 그러나 중국적인 지배체제가 정비되고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부상함에 따라 배타적인 성향이 나타나 기독교는 박해를 받았다. 민망제가 기독교를 엄금하여 외국을 배척하는 분위기로 정국을 진행시킨 것이나, '려문조개의 난'으로 많은 기독교도가 반란군 측에 참가한 사건 등도 기독교가 박해받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프랑스가 1859년 사이공을 점령한 뒤부터 베트남의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는 손상되기 시작했으니, 이 왕조가 명목상은 1945년까지 이어진다고 해도 온전한 국가로서 기능한 기간은 반세기가 조금 넘을 뿐이다. 그러나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로서, 현 베트남 영역이 단일한 정권에 의해 지배되는 첫 모델로서 이 왕조는 중요한 존재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9세기 마지막 왕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호의적이지 못하다. 그 이유는 베트남에서 식민 지배와 공산주의 지배가 연속되고 있는 형편과 무관하지 않다. 식민지 지배에 일조했던 역사학자들은 그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이전 왕조의 실패를 자꾸 들추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기독교도 탄압과 같은 것을 매우 아둔한 실정(失政)으로 몰고 가는 식이다.

 

 혁명성을 강조하는 역사 연구자들도 봉건 시대, 특히 마지막 왕조의 퇴행성을 부각시켜야만 했기 때문에 식민지 시대 관변 사학자들의 평가에 동조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여기에 계급적 또는 민족적 평가도 추가되었다. 예를 들면, 마지막 왕조는 외세를 끌어들여 혁명적 농민 정권을 타파하고 들어선 반동 정권이라는 식의 규정 같은 것이다.

 

 결국 두 그룹의 역사 연구 경향의 합작으로 19세기 왕조의 부정적인 모습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왔다. 여기에는 편견과 자료의 부족 및 왜곡 등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베트남 국내외에서는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자각이 생겨났고 새로운 평가와 추가 자료의 발굴을 통해 마지막 왕조 시기의 역사상이 좀더 객관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다.

 

 정치적으로 응우옌 왕조는 중앙 집권화 작업에 매우 몰두하고 있었다. 두 개의 국가가 나란히 2세기 동안 따로 발전해 왔고, 떠이 썬과 쟈 딘 간의 피비린내 나는 내전이 뒤따른 끝에 가까스로 한 개의 나라가 된 마당이었다. 응우옌 푹 아인이 황제 자리에 오르면서 정한 연호가 쟈 롱(Gia Long, 嘉隆)이었다. 이는 쟈 딘(Gia Dinh, 嘉定)과 탕 롱(Thang Long 昇隆)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었으니, 통일에 부여하는 의미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하노이로부터 사이공까지 연결하는 국로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중국에 국호를 청할 때 처음에는 남 비엣이라고 했다가 최종적으로 '비엣 남(Viet Nam 越南)'이 되어서 현재의 국명 베트남이 생겨났다. 이는 과거 참파 지역을 부르는 이름 월상(越裳)과 홍하 델타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베트남국 안남(安南)에서 각각 한 자씩 딴 것이었다. 즉, 과거 참파 지역에 중심을 두었던 응우옌 씨 영역과 안남이 합쳐졌다는 의미이다.

 

 황제들이 '남북은 한 가족'이라고 줄곧 강조하던 것도 '하나됨'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의 산물이었으며, 남북의 복식까지도 통일해야 할 대상이었으니 북부 여성들에게 남부 여성들의 본을 떠서 치마 대신 바지를 입게 하는 작업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또 한 가지 19세기의 중요한 의미는 유사 이래 가장 큰 영역이 한 정권 아래 지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역적 갈등을 해소하고 국가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험난한 과제였다. 때문에 건국 초기에 왕국은 세계로 나뉘어, 중부는 후에(Hue)에 수도를 둔 황제의 직할령으로, 남부와 북부는 각각 개국 공신 무장들이 총독으로 임명되어 반자치적인 권한을 가지고 지배했다.

 

 그로부터 약 30년 뒤 전국을 성()으로 나누어 중앙 6부를 통해 황제에 직속되는 체제로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남부에서는 3년여에 걸친 반란(레 반 코이 반란, 1833-1835)이 있었으나 결국 진압되었고, 중앙 집권 체제 내에 편입되었다. 이후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병합(1835-1846)하여 영토를 넓힌 후, 국호를 다이 남(Dai Nam 大南)으로 바꾸었다. 1841년부터 캄보디아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태국까지 개입하자 1846년에 철수를 했지만, 한때나마 베트남의 영토가 캄보디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은 19세기 베트남이 보여 주는 역동성의 한 단면이다.

 

 응우옌 왕조 시기는 농업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큰 성과를 보였다. 식민 시대로부터 시작된 한 가지 신화는 남부 메콩 지역이 프랑스의 근대적 기술에 의하여 가경지로 크게 개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부의 개발은 이미 19세기 전반 중에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특히 이 작업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2대 황제 민 망(Minh Mang, 明命, 1820~1841)이었다.

 

 그의 시대에는 메콩 유역뿐만 아니라 북부의 가경지 확대도 큰 성과가 있었다. 홍하 델타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닌 빈(Ninh Binh 寧平)의 광활한 평야 지대는 바닷물을 막고 하천 흐름을 조정하는 대역사를 통해 만들어 낸 땅이다. 남부 메콩 지대에서는 개간에 필요한 농구와 자금을 국가가 대어 주고, 개간한 토지는 일정 기간 세금까지 면제해 주었으며, 개간에 공이 큰 자에게는 관작까지 부여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을 동원하여 농민들이 토지를 개간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남부의 쌀이 전국의 수요를 충당하였고, 잉여 생산물은 동남아시아 각지 및 중국으로 팔려 나갈 정도였다.

 

 농업과 관련된 각종 개혁도 주목할 만하다. 우선, 남부 베트남에서는 토지 측량이 실시되어 토지의 소유 관계를 명확히 밝히는 토지 대장(지부 地簿)이 작성되었다. 대부분의 장부들은 현재 하노이에 있는 문서 보관소에 남아 있다. 이 장부는 당시의 생산 관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매우 중요하고 흥미진진한 자료이다.

 

 토지 측량 과정에서 정부는 남부 베트남에 공전(公田)을 만들어 냈다. 지주로부터 일정 분의 토지를 몰수해 토지 없는 농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서 이는 매우 혁명적인 작업이었다. 단지, 워낙 토지가 풍부한 남부인지라 굳이 농민들이 토지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남부의 특수성을 인정한 조정은 공전 창출을 포기하고 오히려 남부의 생산력 증대에 적합하다고 보는 대토지 소유제를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지주들에게는 둔전(屯田)을 만들고 촌락을 건설하는 작업까지 위임하는 과감한 정책을 내놓았다. 그렇다고 해서 왕조가 지주층을 옹호했다고 평가받을 수는 없다. 단지, 지역에 따라서 정책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중부 빈 딘(Binh Dinh, 平定) 성에 공전의 비율이 사전에 비해 10%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정부가 즉각 지주로부터 일정 부분 이상의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으로 만들고, 그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한 1837년의 사건 같은 것은 동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대외 교역은 주로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나누어졌는데, 특히 공무역의 추이는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서양식 범선은 원양 항해를 위한 선박으로 승조 인원이 적게는 60-70명, 많게는 400~500명에 이른다. 이 배들은 19세기 전반 내내 중국 동남부 해안과 동남아시아 각처에 모습을 드러냈다. 매년 계절풍을 이용하여 한 선단은 중국 광동으로 가고, 또 한 선단은 동남아시아 각지를 방문해 물자를 교역했다.

 

 이 교역을 통해 베트남의 관영 무역선은 끊임없이 선진 무기 및 각종 서적을 사들이고, 관선에 승선한 젊은 유가 관리들은 19세기에 들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해외 정세를 탐지하면서 서양 세력이 들여온 문물들을 관찰했다. 이 외에도 통역관, 기술자, 의료진들도 따라가 일부는 현지에 남아 언어 및 신기술을 습득했으니, 일종의 해외 유학생이었던 셈이다. 새로운 문물 중에서 이들의 관심을 끈 것 중 하나가 증기선이었다. 탐구욕이 왕성한 베트남인들은 수척의 기선을 사들이고 그것을 연구하여 1830~1840년대에 기선을 자체적으로 제작하기도 하였다.

 

 사무역은 초기에 주로 중국인들에 의해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남부 사이공의 중국인 집단 거주지 쩌 런(Cho Lon)이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중국 및 동남아시아를 있는 해외 교역이 크게 성장하였다. 19세기에 들어 베트남으로 이주해 오는 중국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중국인 사회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그러나 민 망 시대에 응우옌 조정은 중국인들의 활동을 억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들의 해외 교역 활동도 금해 버렸다. 그로 인하여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인들의 밀무역이었다.

 

 특히, 대외 반출이 금지되어 있는 쌀을 밀수출하고 그 대신에 아편을 수입하는 것은 골칫거리였다. 중국인들의 활동이 위축되어서 이 시기 베트남이 대외 통상을 억제하고 쇄국으로 치달았다는 비판도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중국인들의 활동이 줄어든 것일 뿐 베트남 상인들의 활동은 여전히 왕성했다. 그리고 중국인에 대한 견제는 베트남 무역 상인들이 성장할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데에서 의미를 가진다.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베트남 교역상들이 관찰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 시대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외국 상인들의 방문도 끊이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사회의 흐름은 유교 이념의 확산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국가의 통합을 위한 사상적 기반으로서 유교는 당시의 지배층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을 것이다. 과거 제도는 정착되었고, 이를 통해 관직에 오른 관리들이 국가를 통치했으며, 과거 시험 제도를 통해 양산되는 유가층이 촌락 단위에서의 유교 이념 확대에 공헌하였다.

 

 유교적 영향이 비교적 약했던 쟈 딘 지역에도 민 망 시기부터는 현 단위까지 관립 교육 기관이 설치되고 빈번한 과거 시험(향시)을 통해 유사들을 양산해 냄으로써 유교 이념이 크게 확산되었다. 민 망 시기인 1830년대에 중앙 조정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던 남부인들이, 185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유사들의 지휘 하에 수십 년에 걸친 항불 투쟁을 전개한 것은 중앙 조정이 의욕적으로 실시한 유교 이념 확산의 결과였다.

 

 유사 이래 가장 조직적으로 행해진 소수 민족 동화 정책은 일체화를 위한 또 하나의 노력이었다. 특히, 베트남인과 이민족이 섞여 살고 있던 남부에서 이러한 정책이 적극적으로 시행되었다. 크메르인이나 중국인 등 이민족들은 베트남인의 복장, 언어 등을 사용해야 했다. 다민족 또는 다문화 사회를 정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이는 매우 무자비한 정책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의 통합과 통일성의 실현에 몰두하고 있던 19세기 베트남 정부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방식이었고, 무엇보다 당시 이러한 정책들이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었다는 그 자체가 응우옌 왕조의 역동성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중국인들까지도 베트남화시켜 버리겠다는 의지는 베트남을 단지 중국 것을 배우고 모방하는 데 바빴던 '작은 중국(Little China 또는 Little Dragon)'으로 희화화하던 식민 시대의 관점을 수정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역사서 편찬이나 지도 제작으로 베트남 영역 구성원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동남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 먼저 시작했던 베트남은 19세기에 들어 이념뿐만 아니라 혈통까지도 하나로 만드는 대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도들로서는 베트남 조정에 대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건국 과정에서 그들의 공헌이 컸고, 그 대가로 적어도 쟈 롱 황제 시대에는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지만 민 망 시기부터 기독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조정으로서는 이유가 있었다. 만약 이 조정이 폐쇄된 사회 속에 살면서 중국적 질서에 안주하고 고루한 유학적 공론에만 천착하고 있었다면 기독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시대 착오적인 과오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했듯이, 응우옌 왕조 시대 베트남은 주변의 어떤 한자 문화권 국가보다 열려 있었다. 그들이 부지런히 관찰하고 있던 바에 따르면, 기독교 뒤에는 서구 세력의 정치적 침략이 있었으니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였다. 반면 당시 철저하게 기독교를 배척하고 있던 일본, 조선, 중국과 같은 나라들은 아직 안전했다. 선택은 자명해진다. 게다가 기독교도들은 내부적으로도 국가의 질서를 흔들어 댈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왕실에 대한 충성보다는 하나님의 나라, 아니면 기독교 형제국들에게 더 큰 유대감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로 이해되었다.

 

 남부에서 1833년에 일어난 반란에는 다수의 기독교도들이 참여하고 있었고, 프랑스인 신부가 그들을 지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정은 경악했다. 프랑스 선교사들의 호소로 인하여 반란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태국 군까지 들어왔었다. 베트남 군에게 밀린 태국 군이 퇴각할 때에는 수천 명의 베트남인 기독교도들이 그들을 따라 태국으로 탈출하는 소동이 벌어졌으니, 조정으로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 망을 비롯한 조정의 관료들은 성경까지 읽으면서 이 종교를 연구했다. 민 망 황제는 신하들과 더불어 자신이 읽은 '노아의 방주'나 '바벨탑 이야기'의 내용을 논하면서 황당무계하다고 비웃고 있었다.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명확해야 하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근거한 그들로서는 성경이란 믿을 수 없는 사건들로 가득한 책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 망 시대의 기독교도들에 대한 정책은 조심스러웠고, 이러한 태도는 다음 대 티에우 찌(Thieu Tri, 紹治, 1841~1847) 시대에도 이어졌다. 그동안 감금했던 선교사들도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선교사 석방을 요구하러 왔던 프랑스 군함들이 사소한 오해로 인해 다짜고짜 다 낭을 포격함으로써 황제 이하 지배 집단의 분노를 유발했다. 그 결과 기독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응우옌 왕조 시기에는 마치 10세기에 걸친 전통 시대 베트남의 문화 역량이 한데 모여 개화하는 듯했다. 특히 문학 방면은 화려했다. 쯔 놈 문학은 그 완숙함이 베트남 민족사에서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니, 응우옌 주(Nguyen Du 阮攸, 1765~1820)가 쓴 『끼에우(Kieu, 翹) 전』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작이다. 베트남 인들의 문화나 일상 생활에 깊숙이 영향을 주는 작품이기 때문에 많은 나라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왔고, 따라서 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지만, 사실 쯔 놈 문학 작품은 온전한 번역이 불가능하다. 내용은 외국어로 전달할 수 있지만, 베트남어 성조가 만들어 내는 운율의 묘미는 도저히 재현해 낼 수가 없다.

 

 『끼에우 전』은 내용만 보자면 별다른 특성은 없어 보인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세계인이 번역 작품을 보고 문학적 감동을 맛본다는 것이 아니라 한 문학 작품이 그토록 한 민족의 생활이나 심리, 예술 활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세계인들에게 알려졌기 때문이다. 쯔 놈 문학은 19세기에 들어서 '국음시가(國音詩歌)'로 불리게 되는데, 베트남인이라면 황제 이하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공유하는 문학 장르로 자리잡게 되었다. 『끼에우 전』보다는 덜 하지만 남부 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룩 번 띠엔(Luc Van Tien, 陸雲僊)』도 매우 유명하다. 이 작품은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유교 이념을 담아 내고 있다.

 

 한문학도 크게 발전했다.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한문학이 많이 창작된 것은 언뜻 보면 당연한 것 같지만, 한문학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그것이 문집 또는 책으로 정리되는 것이 한결같지는 않다. 문화적 관심뿐만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문화 역량과 경제력이 수반될 때 가능한 것이다.

 

 전란에 시달리던 쟈 롱 황제는 문학적 소양으로서보다는 총을 매우 잘 다루던 명사수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뒤를 잇는 민 망, 티에우 찌, 뜨 득(Tu Duc, 嗣德, 1848~1883) 황제들은 문학적 재능 및 학구열이 매우 높았다. 이 시대 한문학의 발전은 수준 높은 문학성으로도 가치가 높지만, 한문학의 주제가 포함하는 사회 문제의 깊이 때문에 주목할 만한 것이 많다. 대표적인 문인 중 한 사람인 까오 바 꽛(Cao Ba Quat, 高伯适, 1809~1854)과 같은 이의 시는 당대 지식인의 진지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다.

 

<모교귀녀(暮橋歸女) - 해 저물녘 다리를 건너 돌아오는 여인>

 아무리 춥다해도 [그 괴로움이] 배고픔만 하겠는가?

 겨[강(糠)] 값이 황금보다 비싸다.

 옷을 잡히고 샀다.

 물먹은 차가운 바람이 다리[교(橋)] 위를 지나가지만 추운 줄을 모른다.

 집에서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을 생각할 뿐.

 (Vu Khieu et. al. 1976 : 196)

 

 지리서나 역사 및 박물지도 많이 출판되었다. 민 망 시대에 지도(대남전도, 大南全圖 및 대남일통전도, 大南一統全圖)가 만들어졌고, 베트남 해안의 해로 및 도서를 조사한다든가, 동식물의 이름들을 정리하는 작업들은 이 시대에 두드러지는 모습이었다. 체제를 갖추고 엄격한 객관성을 유지한 『실록』이 쓰이고, 남북의 공적 · 사적 역사서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흠정월사통감강목(欽定越史通鑑綱目)』이라든가 『역조헌장류지(歷朝憲章類志)』와 같은 수준 높은 역사서를 만들어 낸 것, 지리서 『대남일통지(大南一統志)』의 발간, 법령을 모은 『대남회전사례(大南會典事例)』 등은 19세기 통일 왕조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나온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응우옌 왕조 시기의 결점도 분명 있었다. 우선 캄보디아의 병합에 따른 재정 소모가 너무 과도했다. 병합에 필요한 재원은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었지만, 막상 캄보디아인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태국 군이 개입하여 전쟁이 장기화되자 군비 지출이 증대되었다. 캄보디아로의 전진 기지였던 남부 베트남은 특히 피폐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소수 민족 동화 정책은 수많은 반발을 초래했다.

 

 대부분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이를 위한 국력 소모가 컸고 베트남인들과 소수 민족 사이의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특히 중국인들의 불만은 매우 심해서 나중에 프랑스인들이 들어올 때 이들이 급속도로 친불 세력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기독교도들을 포용하지 못한 것도 역시 결과적으로 큰 손실을 가져왔다. 기독교도와 비기독교 사이의 반목은 심각한 수준이었고 기독교들이 참여한 반란들도 왕조의 국력을 소모시켰다. 기독교도들은 프랑스 군이 들어오자 협조하여 프랑스의 지배를 확대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지역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우선 남부 베트남, 즉 쟈 딘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및 그에 대한 무자비한 진압은 남부인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북부 지역에서의 민심 획득도 버거운 작업이었다. 건국 이후 조정은 적극적으로 북부를 다독이며 인재를 등용하여 중앙 정치에 참여하도록 유도했고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정치 중심지이고 천년 가까이 왕조의 중심이었던 북부의 자존심은 워낙 대단한 것이어서 남부 출신들을 왕조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용의 땅'이었던 탕 롱이 물 한가운데 있는 도시라는 의미의 '하 노이(Ha Noi, 河內)'로 바뀐 데서도 이들의 박탈감은 짐작할 수 있겠다. 북부인들의 인심을 얻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겠지만, 그 전에 프랑스가 들어온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문인 까오 바 꽛은 북부 출신의 유학자이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가난한 삶에는 정치 중심지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린 하노이의 모습 및 그것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애감이 투영되어 있다. 프랑스 군이 5년 뒤에 사이공을 공격했을 때, 중앙군이 사이공 방어 또는 탈환에 병력을 집중하지 못한 이유도 북부에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중앙 집권화 정책이 결과적으로 빚어 낸 문제점도 있었다. 중앙을 강하게 만드는 작업과 병행하여 지방을 약하게 했다. 예를 들면 수도의 왕성보다도 크다고 해서 하노이의 탕롱성과 사이공성을 반으로 줄여 버렸다.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은 약해진 이 양쪽에 대한 공격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문제는 베트남이 프랑스 군에게 패배한 결과에서부터 출발하여 짚어 본 것들이다. 월등한 무기와 정복 의지를 가진 제국주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겨 낼 나라는 없었던 것이 적어도 19세기 아시아의 상황이었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단지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우선 중국 시장으로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베트남 및 주변 캄보디아와 라오스 그 자체도 중요한 시장이었으며 원료 공급지로도 주목되었다. 영국과의 경쟁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이미 영국이 버마 남부, 믈라카, 페낭, 싱가포르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었고, 태국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는 것도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급하게 했다. 민족주의가 발전해 가던 19세기에 프랑스 군인들에게 식민지를 보유한다는 것 그 자체는 국가의 권위와 관계된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처럼 그들도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가질 필요가 있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의 요구도 거셌다. 선교사들을 실은 프랑스 해군 함대들이 1858년에 수도에 인접한 다 낭 항구로 들어왔고, 몇 가지 형식적인 요구 사항을 제시하고는 곧바로 공격했다. 프랑스 측의 의도는 협상이 아니라 식민지 획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항은 강했다. 프랑스 군은 쉽게 다 낭을 점령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베트남의 준비가 철저했던 관계로 이곳을 통해 수도 후에로 바로 진격하려던 프랑스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그 대신 프랑스 군은 사이공을 다음 공격지로 선택했다. 그들은 1859년 사이공 성을 점령하고 1871년까지 쟈 딘 전체를 획득했다. 그런 다음, 1883년에 북부 및 중부까지 획득했다. 청이 개입하여 전쟁(청 · 불 전쟁)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군이 승리하였고, 1885년에 베트남은 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단지 황실은 그대로 유지되고 명목상이나마 중부 지역은 '안남(Annam)'이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지배지로 남아 있었다. 북부 '통킹(Tonkin) 보호령'은 프랑스인과 베트남인이 공동으로 지배하는 형태였고, 남부는 '코친차이나(Cochinchina)'라는 이름으로 프랑스가 직접 지배하는 식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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