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성의 상징, 아오자이(Ao D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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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여성의 상징, 아오자이(Ao Dai)

 아오자이(Ao Dai)는 베트남 여성이 입는 전통의상이다. 아오자이(Áo Dài)는 베트남어로 '긴 옷'이란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매우 긴 상의와 넉넉한 품의 바지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에는 상류계급이 입는 의상이었으나 현대에는 결혼식 예복이나 명절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널리 입는다. 교복이나 유니폼으로도 착용하며 베트남을 상징하는 의복으로 알려졌다.

 

 현대식 아오자이가 처음 등장한 것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였다. 1930년대 디자이너 '응우옌 캇 트엉'은 상의와 하의 모두 넓은 품을 가지고 있던 기존 아오자이와 다른 새로운 형태의 아오자이를 선보였다. 그가 만든 아오자이는 여성의 몸에 딱 맞게 재단되어 상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났으며 색상은 밝고 화려했다. 바지는 나팔바지처럼 아래가 넓어지는 형태로 디자인되었다.

 현대의 아오자이는 화려하고 몸에 꼭 맞는 예복부터 활동성을 살린 평상복까지 다양하게 제작된다.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요?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제발 잊지 말아요. 당신의 푸른 아오자이를."

 내 사랑, 누가 의심하리오. 그토록 사랑스러운 푸른빛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아오자이에 관한 가장 유명한 노래로 꼽히는 '푸른 아오자이(The Blue Ao Dai)'의 한 구절이다.

 

 가냘픈 듯 경쾌한 맵시.

 때로 화려해 보이지만, 은은한 실루엣이 더 멋스러운.

 작은 바람에도 옷깃 휘날리는, 푸른 연가(戀歌) 같은.

 아오자이는 그런 느낌을 주는 옷이다.

 

 베트남 여성의 대표적인 전통의상 아오자이는 많은 기억을 머금고 있다. 역사적 전환기마다 이 옷은 빠지지 않고 논란을 낳았다. 그 점에서 무척 특이한 의상이다.

 옷 하나를 두고 전통과 외부의 가치가 갈등했고, 보수와 미학이 불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러면서 아오자이는 진화해 왔고, 어느덧 베트남의 상징이 됐다.

 

 아오자이(áo dài)는 이름에서부터 어떤 옷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오(áo)'는 '옷'을 '자이(dài)'는 '긴'을 뜻한다. 한마디로 '롱 드레스(Long Dress)'이다. 아오자이는 상의와 바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상의는 치마처럼 길게 내려오는 튜닉(Tunic) 형태다. 상체는 꽉 끼며, '만다린 칼라(Mandarin Collar)'식의 목깃이 있고, 소매는 '래글런(Raglan, 진동이 없이 목둘레에서부터 몸판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소매끝까지 연결된 소매)' 방식이다. 그리고 허리 아래 양옆이 갈라져 있다.

 

 15세기 이전 베트남 여성들은 주로 '아오 뜨 턴(Áo Tứ Thân)'이라는 옷을 입었다. 허리 아래가 네 부분으로 갈라진 긴 드레스로 앞 두 갈래는 벨트 아래의 매듭으로 묶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크 등 가벼운 옷감으로 만드는 이 옷은 아오자이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아오자이와는 달리 따로 바지를 입지 않고 치마처럼 입기도 하는 옷이었다.

 

 일하거나 편하게 다닐 때 입는 옷은 목을 끈으로 묶고 어깨와 등이 드러나게 하는 홀터 탑(Halter Top) 스타일의 셔츠 ‘옘(Yếm)’, 그리고 '바이(Váy)'라는 치마였다.

 

 1407년부터 1428년까지 베트남이 중국 명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여성의 의상은 변화를 맞는다. 명 왕조는 베트남 여성들에게 중국식 바지를 입도록 했다. 이제 아오 뜨 턴 아래에 바지를 함께 입게 된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에도 중국의 흔적은 지속됐다. 베트남 레() 왕조(1428~1788) 역시 유교식 가치관에 어긋난 복장을 금지했다. 그 시절의 가부장적 전통은 여성에게 ‘단정’한 옷을 입도록 요구했다. 노출이 적고, 몸의 곡선이 드러나지 않는 차림을 의미했다. 그러려면 옷이 비치지 않아야 하고, 품이 넓어야 했다. 특히 가슴과 엉덩이 부분의 윤곽이 드러나는 건 금기시됐다.

 

 레() 왕조 말기 17~18세기에 이르러 베트남 북부에서는 찐(Trinh) 가문이, 중남부에서는 응우옌(Nguyễn) 가문이 권력을 잡고 대립했다. 1744년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 푹 코앗(Nguyễn Phúc Khoát)왕은 후에(Huế, 응우옌 왕조의 수도)의 궁궐 내 모든 남녀 신하들에게 중국식 바지, 그리고 앞에 버튼을 단 윗옷(Tunic)을 입도록 칙령을 내렸다. 여전히 긴 치마를 입는 하노이( Nội, 찐 왕조의 수도)의 신하들로부터 자신의 신하들을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1802년 응우옌 가문이 찐 가문을 물리치고 베트남 전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보수적인 정책은 지속됐다. 그 후 지금의 아오자이에 가까운 의상이 확산됐다. 특히 궁궐과 도시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명절이나 축제 때 입는 옷으로 자리 잡았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났지만 대체로 아래는 바지를, 위로는 만다린 칼라가 달린 품이 넓고 긴 윗옷을 입는 방식이었다. 중국 및 만주의 복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농부, 노동자 계층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입는 옷은 여전히 옘과 바이였다.

 

 베트남 여성의 의상은 프랑스의 지배(1858~1954)를 받으면서 또 다시 전기를 맞는다. 그 시대 베트남에는 두 줄기의 흐름이 일었다. 일부 지식인과 도시 부르주아들은 서구의 근대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다른 흐름은 전통을 훼손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 바탕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 또한 단단히 도사려 있었다.

 

 변화의 바람은 특히 하노이에서 강하게 불었다. 전통적인 아오 뜨 턴을 개량한 현대적인 드레스가 그곳에서 선보였다. 부드럽고 얇은 질감이었고, 색깔이 화려했다. 프랑스 교육기관에서 미술을 배운 베트남 화가들은 아오 뜨 턴의 갈라진 네 부분을 두 부분으로 줄였다.

 

 특히 1930년대 하노이에서 활동한 디자이너 응우옌 캇 트엉(Nguyễn Cát Tường)이 선보인 아오자이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르 뮈르(Le mur)'라는 예명으로도 유명한 그는 프랑스 패션에서 영감을 받은 아오자이를 발표했다.

 

 밝은 색상, 몸에 꽉 끼는 품, 양쪽 허리 부분부터 아래까지 갈라진 긴 치맛단, 어깨 부분이 약간 부푼 소매, 비대칭적으로 레이스 장식을 한 목깃, 물결치듯 주름진 옷단, 허리와 가슴 부분에 솔기가 드러나지 않도록 꿰맨 이음새 등이 특징이었다. 바지는 유럽의 나팔바지 식으로 아래가 넓어지는 형식이었으며 엉덩이 부분이 밀착되도록 재단됐다. 이 옷은 이후 '르 뮈르 아오자이(Le mur ao dai)'로도 불리게 된다. '현대식 아오자이'의 탄생이었다.

 

 베트남 여성들은 그 새로운 옷에 환호했다. 여학생, 교사, 간호사 등을 중심으로 시작된 유행은 크게 퍼져갔다. 시골에까지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보수적인 인사들은 아연했다.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응우옌 빈(Nguyễn Bình)이란 시인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그는 시 ‘시골사람들’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벨벳 스카프에, 살랑대는 새틴 바지에 현대적인 아오자이라니!

 오, 그대의 모습에 난 불행한 마음입니다!

 당신의 옘은 어디에 뒀나요?

 지난 봄 곱게 물들인 실크 벨트는 어디로 사라졌나요?

 당신이 입던 네 갈래 드레스는 또 어디에?"

 

 응우옌 빈은 전통의 훼손을 한탄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선정성'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셌다.

 

 몸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과감한 디자인에, 속이 비치는 얇고 투명한 천으로 만든 아오자이까지 등장하자 사람들이 놀란 것이다.

 

 이런 볼멘소리도 나왔다.

 "아오자이는 모든 것을 덮는다. 하지만 모든 것을 드러낸다.

 

 현대식 아오자이의 지지자들도 적지 않았다. 유럽식 진보사상과 자유주의를 접한 이들은 특히 그랬다. 1930년대 생겨난 자립적 문학그룹(self-Reliance Literary Group)인 '뜨 륵 반 도안(Tự Lực Văn Đoàn)' 출신의 예술가들은 '르 뮈르'로 대표되는 현대식 아오자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이들은 "여성들도 시대의 흐름과 함께해야 한다"고 맞섰다.

 

 베트남의 전통적 요소에 여성의 곡선을 살린 유럽식 재단이 결합한 현대적인 아오자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중국식 청삼(Cheongsam)이 비슷한 시기에 등장했던 것처럼.

 

 1954년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끝이 났고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됐다. 사회주의 세력하의 북베트남은 아오자이를 부르주아의 의상이며 식민지 잔재라고 규정했다. 또 노동자의 옷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베트남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호치민(胡志明)은 아오자이를 입지 말자고 호소했다. 아오자이가 다른 의상에 비해 옷감이 많이 들고, 움직이거나 일하기에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캠페인에 동참했고, 북베트남에서는 한동안 아오자이의 모습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미국의 영향 아래 있던 남베트남 여성들은 여전히 아오자이를 즐겨 입었다. 1950년대 사이공의 재단사들은 어깨 부분을 따로 달지 않고 깃에서 소매로 바로 이어지게 되어 있는 '래글런(Raglan, 진동이 없이 목둘레에서부터 몸판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소매끝까지 연결된 소매)' 스타일의 아오자이를 개발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남베트남 정권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됐다. 사회주의 정부는 아오자이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보였다. 한편으로는 민족의 정체성을 간직한 의상이란 존중을 품고 있었다. 1973년 파리에서 열린 베트남평화회담(Vietnam Peace Talks)에서 북베트남 정부의 대표로 파견된 응우옌 티 빈(Nguyễn Thị Bình)이 협정서에 서명할 때 입었던 옷은 아오자이었다.

 

 하지만 남베트남에서 유행하는, '서구화한' 아오자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경기침체, 기근, 캄보디아와의 전쟁으로 1980년대의 베트남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당시 베트남 여성들은 결혼식 등 큰 행사가 있을 때 외에는 아오자이를 거의 입지 않았다. 그나마 입는 것은 주로 품이 넓은 구식 아오자이였다. 아오자이의 침체기가 다시 온 것이다.

 아오자이는 198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부활하게 된다. 경제개혁이 성과를 이루고 생활수준이 나아졌다. 여유가 생긴 것이다. 유니폼 및 교복으로 아오자이를 채택한 국영기업과 여자고등학교 등이 늘어났다. 1989년에는 호치민 시의 여성신문이 최초로 미스 아오자이 대회를 열었다. 대회에 참가한 여성들은 무려 1,600여 명에 이르렀다.

 6년이 지난 1995년에는 미스 베트남이 입은 파란 비단 아오자이가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미인대회(Tokyo’s Miss International Pageant)에서 최고 민속의상(Best National Costume)으로 선정된 바 있다. 당시 <터이 짱 째(Thời Trang Trẻ: New Fashion Magazine)>라는 베트남 패션 잡지는 "민족혼이 또 다시 명예를 얻었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아오자이 열풍은 이후 한참 동안 이어졌다.

 

 현재 아오자이는 '아오자이 베트남'이란 말이 회자될 만큼 베트남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전통의상의 지위에 올랐다. 아오자이는 더 이상 논란의 대상에 오르지 않을 듯하다.

 아오자이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베트남의 유명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소재, 추상적인 모티프를 아오자이에 적용하고 있다. 소수민족의 의상에서 영감을 받기도 한다. 또 목둘레를 드러내거나, 민소매로 하거나, 길게 내려오는 앞뒤 부분에 술 장식을 하는 등 많은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오자이는 결혼식, 축제, 명절, 그리고 공적인 행사에서 기본적으로 입는 옷이다. 또 은행, 호텔, 그리고 큰 레스토랑 등에서는 여성 직원들이 유니폼으로 아오자이를 입는다. 베트남 항공에 오른 적이 있다면 승무원들의 빨간 아오자이를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베트남 남부 지역에서 여고생들의 교복은 대체로 하얀 아오자이다. 재질이 약한 특성과 함께 색깔마저 하얀 아오자이를 입으면 행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교복에서 볼 수 있듯 하얀 아오자이는 여성의 겸손함, 조심성, 그리고 세련된 태도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다.

 베트남 출신 이민자, 이주노동자들이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아오자이는 해외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됐다. 아오자이가 세계의 시선을 끌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 전쟁 때부터였다. 그 시절 서구의 많은 작가, 기자, 그리고 여행자들은 애정을 담은 글로 아오자이를 묘사했다. 베트남의 식민지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인도차이나(Indochine)>, <연인(L’Amant)>이 1992년에 상영되자 아오자이는 더욱 명성을 얻었다. 랄프 로렌(Ralph Lauren),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 등 유명 디자이너들은 아오자이에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아오자이가 국제 패션계의 목록 속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아오자이의 긴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두 가지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기나긴 중국의 지배에 이어 프랑스, 미국의 식민지 시절을 겪은 베트남. 하지만 끝내 독립을 이루었고,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다. 베트남인들은 외침에 끈질기게, 극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면서도 그 적들의 앞선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다. 동서양의 무력이 싸우는 동안, 동서양의 '미학'은 조용히 화해했다. 그 화해의 결과가 아오자이를 낳았다.

 

 또 하나. 외국인 여성들은 아오자이의 고운 자태와 결에 찬사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이 아오자이를 입은 모습을 그려본다. 하지만 곧 실망한다. 아오자이는 어깨가 좁고 마른 몸매의 베트남 여성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다. 아오자이는 외국인 여성들을 좀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아오자이에 대한 신비감과 동경은 오히려 커진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는 아오자이를 이렇게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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