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요?
"우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제발 잊지 말아요. 당신의 푸른 아오자이를."
내 사랑, 누가 의심하리오. 그토록 사랑스러운 푸른빛은 결코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아오자이에 관한 가장 유명한 노래로 꼽히는 '푸른 아오자이(The Blue Ao Dai)'의 한 구절이다.
가냘픈 듯 경쾌한 맵시.
때로 화려해 보이지만, 은은한 실루엣이 더 멋스러운.
작은 바람에도 옷깃 휘날리는, 푸른 연가(戀歌) 같은.
아오자이는 그런 느낌을 주는 옷이다.
베트남 여성의 대표적인 전통의상 아오자이는 많은 기억을 머금고 있다. 역사적 전환기마다 이 옷은 빠지지 않고 논란을 낳았다. 그 점에서 무척 특이한 의상이다.
옷 하나를 두고 전통과 외부의 가치가 갈등했고, 보수와 미학이 불화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러면서 아오자이는 진화해
왔고, 어느덧 베트남의 상징이 됐다.
아오자이(áo dài)는 이름에서부터 어떤 옷인지 짐작할 수 있다. '아오(áo)'는 '옷'을 '자이(dài)'는 '긴'을 뜻한다. 한마디로 '롱 드레스(Long Dress)'이다. 아오자이는 상의와 바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상의는 치마처럼 길게 내려오는 튜닉(Tunic) 형태다. 상체는 꽉 끼며, '만다린 칼라(Mandarin Collar)'식의 목깃이 있고, 소매는 '래글런(Raglan,
진동이 없이 목둘레에서부터 몸판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소매끝까지 연결된 소매)' 방식이다. 그리고 허리 아래 양옆이 갈라져 있다.
15세기 이전 베트남 여성들은 주로 '아오 뜨 턴(Áo Tứ Thân)'이라는 옷을 입었다. 허리 아래가 네 부분으로 갈라진 긴 드레스로 앞 두 갈래는 벨트 아래의 매듭으로 묶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크 등 가벼운 옷감으로 만드는 이 옷은 아오자이의 '전신'으로 볼 수 있다. 아오자이와는 달리 따로 바지를 입지 않고 치마처럼 입기도 하는 옷이었다.
일하거나 편하게 다닐 때 입는 옷은 목을 끈으로 묶고 어깨와 등이 드러나게 하는 홀터 탑(Halter Top) 스타일의 셔츠 ‘옘(Yếm)’, 그리고 '바이(Váy)'라는 치마였다.
1407년부터 1428년까지 베트남이 중국 명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여성의 의상은 변화를 맞는다. 명 왕조는 베트남 여성들에게 중국식 바지를 입도록 했다. 이제 아오 뜨 턴 아래에 바지를 함께 입게 된 것이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에도 중국의 흔적은 지속됐다. 베트남 레(Lê)
왕조(1428~1788) 역시 유교식 가치관에 어긋난 복장을 금지했다. 그 시절의 가부장적 전통은 여성에게 ‘단정’한 옷을 입도록 요구했다. 노출이 적고, 몸의 곡선이 드러나지 않는 차림을 의미했다. 그러려면 옷이 비치지 않아야 하고, 품이 넓어야 했다. 특히 가슴과 엉덩이 부분의 윤곽이 드러나는 건 금기시됐다.
레(Lê)
왕조 말기 17~18세기에 이르러 베트남 북부에서는 찐(Trinh) 가문이, 중남부에서는 응우옌(Nguyễn) 가문이 권력을 잡고 대립했다. 1744년 응우옌 가문의 응우옌 푹 코앗(Nguyễn Phúc Khoát)왕은 후에(Huế, 응우옌 왕조의 수도)의 궁궐 내 모든 남녀 신하들에게 중국식 바지, 그리고 앞에 버튼을 단 윗옷(Tunic)을 입도록 칙령을 내렸다. 여전히 긴 치마를 입는 하노이(Hà Nội, 찐 왕조의 수도)의 신하들로부터 자신의 신하들을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1802년 응우옌 가문이 찐 가문을 물리치고 베트남 전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보수적인 정책은 지속됐다. 그 후 지금의 아오자이에 가까운 의상이 확산됐다. 특히 궁궐과 도시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명절이나 축제 때 입는 옷으로 자리 잡았다.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났지만 대체로 아래는 바지를, 위로는 만다린 칼라가 달린 품이 넓고 긴 윗옷을 입는 방식이었다. 중국 및 만주의 복식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농부, 노동자 계층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입는 옷은 여전히 옘과 바이였다.
베트남 여성의 의상은 프랑스의 지배(1858~1954)를 받으면서 또 다시 전기를 맞는다. 그 시대 베트남에는 두 줄기의 흐름이 일었다. 일부 지식인과 도시 부르주아들은 서구의 근대적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다른 흐름은 전통을 훼손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였다. 그 바탕에는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 또한 단단히 도사려 있었다.
변화의 바람은 특히 하노이에서 강하게 불었다. 전통적인 아오 뜨 턴을 개량한 현대적인 드레스가 그곳에서 선보였다. 부드럽고 얇은 질감이었고, 색깔이 화려했다. 프랑스 교육기관에서 미술을 배운 베트남 화가들은 아오 뜨 턴의 갈라진 네 부분을 두 부분으로 줄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