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희(末喜. 매희(妹喜))

주지육림(酒池肉林) · 걸왕(桀王) · 桀犬吠堯(걸견폐요)

 

말희(末喜. 매희(妹喜), ?~BC 1600)

 말희(末喜)는 하(夏)나라의 마지막 하 걸왕(桀王, 하나라 제 17대 왕)왕비의 한 명이다.

 

 하(夏: BC 2070~BC 1600)나라 걸왕은 악독하고 탐욕스러웠으나 남다른 힘과 지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걸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마침내 하나라를 멸망케 만든 여인이 바로 말희이다. 말희는 걸왕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진상품으로 바쳐진 여인인데 걸왕은 그녀를 보자마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말희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요대(瑤臺)라는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에 빠졌다.

 걸왕은 그녀의 소망에 따라 전국에서 선발한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에게 오색 찬란한 옷을 입혀 날마다 무악(舞樂)을 베풀기도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 주지육림(酒池肉林)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또한 걸왕에게 충성스런 마음으로 나라를 바로 잡으라고 호소하는 충신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거나 쫓겨 나갔다.

 

 또 말희가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를 즐겨 나라의 고가의 비단을 모았다.

 관용봉(關龍逢)이라는 신하가 아뢰었다.

 "전하, 임금에게는 임금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있사옵니다. 자신을 단속하여 예(禮)와 의(義)를 행하고 검소함으로 재물을 아껴 이로써 백성을 이롭게 해야 하옵니다. 이렇게 해야만 나라가 태평하고 전하께선 천수를 누릴 수 있사옵니다. 지금 전하께옵선 날마다 향연을 베풀어 재물을 탕진하심이 끝이 없고 노역동원에 백성들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워 하옵니다. 이를 고쳐 나가지 않는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려 벌을 받을 것입니다. 전하, 속히 바로 고쳐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간하고는 퇴청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걸왕은 그를 잡아 가두었다.

 군자가 이를 듣고서 탄식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다 되었구나!" 

 - 출처 : 劉向(유향, BC 79?~BC 8?) 편술 '新序(신서)' -

 

 이윤(伊尹)이 또 다시 간하였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이윤은 은나라로 도망쳐 탕왕을 섬기게 되었다. 은(殷)나라의 탕왕은 이윤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하나라를 쳐들어간다. 걸왕과 말희는 생포되어 남소(南巣)의 산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이것을 하상혁명 또는 은혁명(革命)이라 부른다.

 

 

 걸이 말희를 얻은 후에 또 다시 민산(岷山)을 정벌하여 완(琬)과 염(琰)이란 두 미녀를 얻어서 말희를 낙수에 버리자, 말희가 은나라의 이윤(伊尹)과 만나 하나라의 내분을 일으켜 결국 걸왕은 은나라의 탕왕에게 멸망하고 말았다는 자료(고본 죽서기년)도 있다.

 

 

 

하(夏)나라 마지막 제17대 국왕 걸왕(桀王, ?~BC 1600)

 제발이 세상을 뜨자 아들 제이계(帝履癸)가 즉위했는데 이가 걸()이다.

 제걸 때 공갑 이래로 제후들이 하를 많이 배반했는데 걸은 덕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치니 백성들은 견딜 수가 없었다. 제걸이 탕()을 불러 하대(夏臺)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주었다. 탕이 덕을 닦으니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로 귀의했다. 탕이 마침내 군사를 거느리고 하걸을 정벌했다. 걸은 명조(鳴條)로 달아났다가 결국은 추방되어 죽었다. 걸은 사람들에게 "내가 하대에서 탕을 죽이지 못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후회스럽다"라 했다. 탕이 천자 자리에 올라 하 왕조의 천하를 대신했다. 탕은 하의 후손을 제후에 봉했고, () 왕조 때에는 기()에 봉해졌다.

- '사기(史記)' 2. '하본기(夏本紀)' -

 

 중국 고대 국가로 알려진 하나라의 제17대 왕이자, 마지막 국왕. 하나라 제16대 왕 발왕의 아들이며, 성은 사(?), 이름은 이계(履癸).

 

 기록에는 웅장한 궁전을 짓고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강을 만들어 그곳에 뱃놀이를 즐겼고, 장야궁(長夜宮)을 건설해 그곳에서 유흥에 빠졌다고 한다.

 

 ()는 말희(末喜).

 

 '사기(史記)'에는 국력이 쇠퇴하고 제후들이 배반했으며 신하들의 충언을 무시하고 폭정을 일삼아 자리에 의해 축출되었다고 전해진다. 추방된 후에 걸은 탕을 죽이지 못한 것을 한탄한 뒤 사망했다고 한다.

 

 

 상나라의 폭군인 주왕과 묶어 하걸은주라 부른다. 주로 두 글자로 줄여서 걸주로 칭하며 폭군의 대명사로 일컫기 때문에, 특히 유교 이념에 따라 세워진 중국과 한반도의 역대 왕조에서 임금이 실정을 저지르거나 하면 그를 섬기는 신하들이 '전하· 폐하는 걸주나 다름없사옵니다' 운운하며 목숨 걸고 처절하게 간언한다든가 역성혁명 혹은 반정의 명분으로 임금이 천의를 위배하였으므로 폐한다고 할 때에도 어김없이 걸주와 매한가지의 군주라는 평으로써 사용되는 것을 여러 사서는 물론이고 문학 작품 등의 창작물, 심지어는 TV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영상 매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덕분에 기억조차 되지 않는 수많은 군주들과는 달리 어쨌거나 많이 인용되고 뚜렷하게 기억되고 있으니 일단은 나름대로 족적을 남긴 군주인 셈.

 

 군사부일체라 논하는 유교 이론이지만 맹자는 걸주와 같은 군주는 의를 해친 잔이자 인을 해친 적 모두에 해당하는 잔적한 자들로 이들을 친 것은 감히 군주를 시해한 것이 아니라 악독한 필부를 마땅히 주살한 것이라며 혁명론의 요지를 논하였다.

 

 한편 공자의 제자인 자공은 멸망한 국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주왕이 지나치게 과도한 오명을 뒤집어 쓴 점을 감안해야 한다며 옹호의 여지를 열게 해주었는데 실제로 이후에 고고학적 성과를 통해 상나라가 실존한 역사상의 국가로 여겨지게 되면서 주왕 치세의 배경과 정치적 입지 등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고, 승자의 기록에 의한 피해자일 가능성도 논해지게 되었지만 여전히 신화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는 하나라와 걸왕의 경우 얄짤없이 그런 거 없다.

 

 걸왕과 관련된 고사성어로 걸구폐요(桀狗吠堯)가 있다. 걸왕의 개가 요를 향해 짖는다는 뜻으로 어떤 사람이더라도 주인편을 든다는 뜻이다.

 

 하나라 걸왕의 최후와 상나라 주왕의 최후가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하나라의 실존성에 관해 지적받는 부분이다. 정작 탕왕에 관련된 기록이 남은 갑골문이 하나라와 걸왕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에서 역시 비마에게 학살자로 언급된다.

 

 '(桀)'이라는 시호는 잔인무도한 폭군에게나 주어주는 악시이지만 후대에 걸이라는 시호를 받은 군주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희대의 폭군인 유욱(劉昱, 후폐제(後廢帝), 463~477 (14세), 남북조 시대 유송의 제8대 황제, 재위: 472~477 (약 5년간)이다

 

桀犬吠堯(걸견폐요)

 桀: 하왕 이름 걸   犬: 개 견   吠: 짖을 폐   堯: 요임금 요

 걸왕이 키우는 개가 요임금을 향해 짖는다는 뜻.

 각자 자기 주인에게 무조건 충성을 다하는 것이나, 악인을 따르는 자가 선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

- 사기(史記)' '회음후전(淮陰侯傳) -

 

 하()나라 걸왕(桀王) 같은 포학한 사람이 기르는 개는 요()임금과 같은 어진 사람을 보고도 짖는다는 뜻이다. 악인을 따르는 자가 선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 그리고 개는 상대방의 선악을 구별하여 짖는 것이 아니라 주인 이외의 사람에게 모두 짖는 것이므로, 선악을 가리지 않고 자기 주인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걸구폐요(桀狗吠堯)’라고도 하며, ‘흉악한 도적인 도척(盜跖)이 키우는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는다.’라는 뜻의 척구폐요(跖狗吠堯)’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회음후전(淮陰侯傳)'

 桀犬吠堯(걸견폐요)의 출전은 '사기(史記)' '회음후전(淮陰侯傳)'이다.

 

 '회음후전(淮陰侯傳)'은 중국 한()나라 때의 무장인 한신(韓信)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신은 유방(劉邦)을 도와 진()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중국을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설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한신이 위(), (), (), ()나라에 이어 제()나라를 함락하고 제나라의 왕이 되자,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에 맞먹는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괴통(蒯通)이라는 사람이 한신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한나라 왕(유방)과 초나라 왕(항우)의 운명은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장군이 한나라 편에 서면 한나라가 천하를 제패할 것이고, 초나라 편에 서면 초나라가 천하를 제패할 것입니다. 따라서 한과 초 두 나라에 이익을 주어 모두 존속하게 하고 한편에는 장군이 서서, 마치 솥의 발처럼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다면(鼎足之勢) 누구도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하늘이 주는 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후에 벌을 받고, 때가 왔을 때 행동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신은 차마 유방을 배신할 수가 없어서 괴통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괴통은 미친 척하고 무당이 되었다. 이후 한신은 유방과 함께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죽여 초한(楚漢)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하지만 유방은 곧바로 한신의 병권을 빼앗고 초왕(楚王)으로 봉했으며, 이후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하는 등 계속해서 한신을 견제했다. 결국 한신은 반란에 공모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는데, 괴통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분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유방은 괴통을 불러 심문하였고, 괴통이 한신에게 모반하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괴통을 삶아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자 괴통은 자신이 이렇게 죽는 것은 원통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천하의 영웅호걸들이 까마귀 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이후 진나라가 사슴(황제의 자리를 뜻함)을 잃어버리자, 천하가 모두 그 사슴을 쫓았고 그중 재주가 많고 발이 빠른 자(유방을 뜻함)가 먼저 그 사슴을 잡았습니다. 그 옛날 흉악한 도적인 도척(盜跖)의 개가 요()임금을 보고 짖은 이유는 요임금이 어질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짖은 것뿐입니다. 그때 신은 오직 한신만을 알았을 뿐 폐하는 알지 못해 폐하를 향해 짖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당시 천하에는 칼끝을 날카롭게 갈아 가지고 폐하께서 하신 일을 자기도 해보려고 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다만 그들은 힘이 모자랐을 뿐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이제 와서 그들 모두를 삶아 죽이려고 하십니까?"

 

 이를 들은 유방은 괴통의 죄를 용서하고 풀어 주었다.

 

 

 

주지육림(酒池肉林)

 酒: 술 주   池: 못 지   肉: 고기 육   林: 수풀 림

 

 술로 만든 못과 고기로 이룬 숲.

 극히 호사스럽고 방탕한 술잔치를 비유하는 말이다.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은 황음무도(荒淫無道: 술과 여자에 깊이 빠져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돌아보지 않음)하고 탐욕스러웠으나 남다른 힘과 지략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하나라를 망하게 한 여인이 있었는데, 바로 말희(妺喜)라는 여자이다.

 걸왕이 한창때, 유시(有施)씨의 소국(小國)을 공격했다. 유시씨는 대항할 힘이 없어 많은 진상품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 진상품 가운데 말희라는 여인이 끼어 있었다. 걸왕은 말희에게 한눈에 반해 빠지고 말았다. 말희는 궁궐을 다시 짓게 하고, 주지육림을 만들어 질탕하게 놀면서 걸을 부패하게 만들었다. 말희는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꾸미어 하 왕조의 국력을 기울게 만들었다.

 

 걸왕의 이런 행태를 보다 못 한 현신 관룡봉(關龍逢)은 눈물을 흘리면서 간하다가 참수되고 말았으며, 선관(膳官, 궁궐의 주방을 맡은 관리) 이윤(伊尹)은 충간을 듣지 않는 걸왕을 버리고 당시 상(商)나라의 수도였던 박(亳)으로 도망쳐 탕왕(湯王)을 섬겨 상나라 창업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당시 탕왕은 덕을 갖춘 군장으로 제후들의 협력을 얻어 국력을 확장해 가고 있었다. 걸왕의 횡포가 날로 자심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그를 떠났다는 것을 안 탕왕은 드디어 걸왕 타도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걸왕은 명조(鳴條)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달아나다가 남소(南巢)에서 죽었다. 이로써 초대 왕 우(禹)로부터 제17대 왕 걸까지 약 500년에 걸쳐(BC 22세기∼BC 17세기) 존재하였던 중국 최초의 왕조였던 하나라는 문을 닫고 말았으며, 탕왕의 상나라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하본기(夏本紀)'에 나온다.

 

 그런데 상나라(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도 하나라 마지막 왕 걸왕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주왕은 자질이 뛰어나고 식견이 높았으며, 두뇌가 명석하여 남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총명할 뿐 아니라 용력도 뛰어나 맹수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뛰어난 체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뛰어난 자질을 덕을 쌓는 데 쓰지 않고, 자만에 빠져 신하들이 간하는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뛰어난 입담으로 자신의 비행을 합리화하거나 덮어 버렸다. 그는 천하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주색과 향락에 대해서도 아주 호탕하여 달기(妲己)라는 여인에게 빠지고 말았다. 달기는 유소(有蘇)씨의 딸로서, 일찍이 주왕이 유소씨를 토벌했을 때 전리품으로 획득한 미녀였다. 주왕은 달기를 얻고 아주 기뻐했으며, 달기의 아름답고 요염한 자태에 빠져 그녀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주왕은 달기가 원하는 대로 궁중의 음악을 더욱 관능적이고 분방한 음악으로 바꾸고, 수도 조가(朝歌)에 녹대(鹿臺)라는 거대한 금고를 만들어 무거운 세금으로 그 금고를 채웠으며, 거교(鉅橋)에 곡식 창고를 세워 곡식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사구(沙丘)의 이궁(離宮)을 더욱 확장하여 그 안에 길짐승과 날짐승을 놓아길렀다. 그는 귀신에 대해서도 오만하고 불경했다. 주왕은 또한 달기의 청을 받아들여 술로 채운 연못과 고기 안주를 매단 나무로 이루어진 주지육림을 만들어 수많은 알몸의 남녀들이 그 안에서 서로 쫓게 하고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益廣沙丘苑臺, 多取野獸飛鳥置其中. 慢於鬼神. 大聚樂歡於沙丘, 以酒爲池, 懸肉爲林, 使男女裸相逐其間, 爲長夜之飮.)」

 

 불평을 하는 백성들에 대한 공포정치의 일환으로 불구덩이 위에 기름을 칠한 구리 기둥을 걸어 놓고 그 위를 걷게 하는 포락(炮烙)의 형(刑)을 시행하였다. 당시 은 왕조에는 천자의 정치를 보좌하는 삼공(三公)으로 서백 창(西伯昌, 후의 주문왕(周文王)), 구후(九侯), 악후(鄂侯)가 있었다. 구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어 주왕의 부인이 되었는데 주왕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구후도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젓으로 담가졌다. 악후가 이를 간(諫)하다가 역시 죽임을 당하고 시체는 포(脯)로 만들어졌다. 서백 창은 이를 듣고 탄식하다가 유리(羑里)의 옥에 갇히고 말았다. 서백의 가신들이 주왕에게 미녀와 재물을 바치고 그를 석방시켰다. 서백은 자신의 영토의 일부인 낙서(洛西)의 땅을 바치고 포락의 형을 면제받은 후, 자기 땅으로 돌아갔다. 충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주왕을 간하였지만 대부분이 죽음을 당하거나 스스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왕자 비간(比干)은 간하다가 심장을 갈기갈기 찢겼으며, 기자(箕子)는 옥에 갇혔다. 주왕은 이밖에도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가르고, 뼈가 시려 강을 건너지 못하는 노인의 다리를 자르는 등 포악한 짓을 자행하였다.

 

 서백 창이 죽고 그의 아들 발(發)이 그 뒤를 이었으니, 그가 바로 주(周)나라의 공식적인 초대 왕인 무왕(武王, ? ~ BC 1043년))이다. 무왕은 아버지 서백 창을 문왕으로 추증하고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사부로 삼아 민심을 끌어모으고 군대를 정비하여 포악한 주왕을 응징하기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그리고 때가 되자 무왕은 주왕을 멸하기 위해 동쪽을 향해 진군을 계속하여 은의 교외인 목야(牧野, 하남(河南) 기현(淇縣) 서남)에서 진을 쳤다. 주왕도 70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목야로 나왔다. 하지만 주왕의 폭정에 시달리던 은나라 대부분의 군대는 무왕의 토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으므로 항복하지 않으면 주나라 군대에 가담해 버렸다. 은나라 군대는 일패도지(一敗塗地: 여지없이 패하여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됨)하고 말았고, 주왕은 목야에서 도망쳐 수도 조가에 있는 녹대 위로 올라가 불을 지른 후, 보석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그 속으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사기' '은본기(殷本紀)'와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나오는데,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이 각각 말희와 달기에 빠져 술로 채운 연못과 고기 안주를 매단 나무로 숲을 만들어 즐겼다는 말에서 '주지육림(酒池肉林)'이 유래했다.

 

 

* 사업을 한다면서 바이어를 접대한다는 핑계로 저렇게 허구한 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있으니, 조만간에 회사가 망할 일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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