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諸葛亮, 181~234)

출생-사망: 181~234

: 공명(孔明)

시호: 충무후(忠武候)

별칭: 와룡선생(臥龍先生)

시대: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

활동분야 : 정치·군사

출생지: 중국 산둥성

 

 낭야군 양도현(琅句郡 陽都縣: 山東省 沂水縣) 출생으로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후한 말, 관직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臥龍先生)이라 일컬어졌고, 207년 유비(劉備)로부터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고 군신수어지교(君臣水魚之交)를 맺었다. 이듬해 오(吳)의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를 대파하는 등의 수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221년 한(漢)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에는 어린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여 재차 오(吳)와 연합, 위(魏)와 항쟁하였으며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 올린<전출사표(前出師表)>, <후출사표(後出師表)>는 이것을 읽고 울지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천고(千古)의 명문으로 여겨진다.

 또 제갈량은 유비가 그를 초빙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초가에 세 번 갔다는 삼고초려(三顧草廬)와 "신은 본래 포의로서 몸소 남양에서 밭갈이하며 구차이 어지러운 세상에 목숨을 보존하려 했을 뿐..."으로 시작하는 출사표(出師表), 그의 용병, 용인술을 대표하는 읍참마속(泣斬馬謖), 칠종칠금(七縱七擒) 등의 우리에게 친숙한 고사성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229년경, 촉한의 승상 제갈량은 다시 한 번 위나라를 정벌하려 떠나며 후주(後主) 유선에게 이러한 <후출사표(後出師表)>를 올렸다고 한다. 이 중에서 "몸을 굽혀 모든 힘을 다하여 죽은 후에야 그만둔다(鞠躬盡瘁 死而後已)"는 먼 훗날 청나라의 강희제가 신조로 삼았을 정도로 유명한 문구다. 그러나 이 <후출사표(後出師表)>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제갈량은 중국사의 무수한 인물 중에서도 공자나 관우와 더불어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적어, 진수가 쓴 <삼국지>와 상거의 <화양국지>, 그리고 제갈량 자신의 <제갈량집>(이 역시 상당 부분이 위작이라는 의심을 받는다)이 전부다. 그리고 이 문헌들을 통해 대략 살펴볼 수 있는 제갈량의 인생 역정은 <삼국지연의>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갈량(諸葛亮, 181~234)은, 자는 공명(孔明), 호는 와룡(臥龍)이다.

 181년에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제갈규는 태산군 승(丞)이라는 비교적 하급직을 지냈고 제갈량이 어릴 때 죽었다. 형주의 융중에서 살게 된 것은 작은아버지 제갈현이 그를 데리고 유표의 식객으로 지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석광원, 석도, 맹공위, 서서등과 학문을 닦았는데, 남들은 학문 자체를 깊이 탐구함에 비해 그는 대략만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뽕나무를 관리하고, 밭을 갈았다.한가할 때는 양보음(梁父音)이라는 노래를 읊고, 무릎을 껴안은 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제갈량은 스스로를 춘추전국시대의 명재상 관중과 명장 악의에 비교했는데, 모두 곧이듣지 않았지만 오직 서서만이 그를 큰 인물로 알아주었다. 그리고 한 발 먼저 유비에게 등용된 서서의 추천으로, ‘삼고초려’의 예우를 받은 다음 유비의 모사(謀士)가 된다.

 

 유표가 죽고 대를 이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유비는 올 데 갈 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제갈량은 동오의 손권에게 가서 그를 설득해 유비와 함께 조조에 맞서게 했다. 적벽대전(赤壁大戰, 208년)에서 조조가 패퇴하자, 유비는 영릉, 계양, 장사를 점령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 때 익주의 유장이 장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유비를 초청하자, 유비는 이에 응해 가맹관에서 싸운 뒤 형주에서 온 제갈량의 군사와 함께 익주를 탈취했다.익주와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스스로 황제를 칭했고, 제갈량은 승상이 되었다(221년). 그러나 형주의 귀속권을 두고 손권과 전쟁을 벌이다가 패배한 유비는 영안에서 숨을 거둔다(223년). 이 때 유비는 제갈량에게 "내 자식놈이 보좌할 만하면 그를 돕되, 부실하다면 그대가 스스로 황제가 되어 다스리라"는 말을 했고 이에 제갈량은 "온 힘을 다하여. 죽기까지 충성하겠습니다"고 대답했다(이 대답에서 <후출사표(後出師表)>의 유명한 문구가 비롯되었을 것이다).

 

 225년, 승상에 익주목, 사예교위까지 겸하여 모든 나랏일을 관장하던 제갈량은 먼저 남중(南中)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 때 적장을 일곱 번 잡았다 일곱 번 놓아주는 아량을 베풀어 남중의 민심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내실을 다지고 후환을 없앤 뒤, 마침내 제갈량은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위나라 정벌에 나선다(227년). 228년 봄, 제갈량에게 위나라의 남안, 천수, 안정 세 군이 항복하면서 촉한군의 기세는 한때 하늘을 찔렀으나, 그가 아끼던 마속이 장합에게 크게 패하는 바람에 원정은 실패했다. 제갈량은 마속을 벤 다음 스스로 벼슬을 세 등급 깎아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네 차례(228년 겨울, 229년, 231년, 234년) 더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사마의를 비롯한 적의 방어를 깨트리지 못했다. 결국 234년 8월, 오장원에서 병사함으로써 유비와 제갈량의 오랜 염원은 물거품이 된다. 그의 아들 제갈첨이 아버지를 이어 무향후가 되고, 그의 부하 강유가 제갈량의 뜻을 받든다며 다시 북벌에 나섰지만 여의치 않았으며 제갈첨과 강유 사이에 분쟁까지 일었다. 이러는 동안 위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부하 등애를 보내 촉한을 공격했으며, 제갈첨이 맞섰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수도 성도가 포위되자 유선이 위나라에 항복함으로써(263년) 촉한은 2대 42년 만에 멸망했다.

 

 이처럼 촉한은 오랜 중국 역사에서 아주 잠깐 존속했던 지방정권에 불과했고, 제갈량의 북벌은 결국 실패로 끝났으나 그의 명성은 죽은 직후부터 전 중국에 진동했다. 죽고 나자마자 그의 영묘(靈廟)를 세우자는 건의가 촉한 전역에서 빗발쳤으며, 나중에 위나라 군대가 촉한을 멸망시킬 때도 그 영묘에 제사를 지내고 제갈량의 무덤을 정중하게 지켰다고 한다. 위나라를 이어받아 천하를 통일한 진(晉)나라에서는 누군가의 재능을 칭찬할 때면 "똑똑하기가 제갈량 못지않다"는 말이 상투적으로 쓰였다고 하니, 제갈량의 명성이 단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만 기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의(演義)>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그가 '완벽한 인간', '신과 같은 사람'이었을까? 진수의 <삼국지>를 토대로 한 근대의 평가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제갈량은 '정치가· 행정가'로서의 기량은 탁월했어도 '군사전략가· 지휘관'으로서의 기량은 그렇게까지 뛰어났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연의>에는 그가 유비에게 등용된 직후 벌어진 장판파 전투에서 유비군이 패배한 이유는 워낙 유비군의 병력이 열세였고 피난민들을 모두 데려가야 한다고 유비가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조조(曹操:155~220)군은 전체적으로 수가 많다고는 하지만 정예병은 수천에 불과했고, 유비군은 수만의 병력이었다. 게다가 장판파에 도착한 조조군의 선발대는 숫자도 5천이었고 수백 리를 쉬지 않고 행군해온 터라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런데 여지없이 패배했던 것이다. 그것은 제갈량의 군사지휘 역량이 부족했거나, <연의>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리 당시에는 아직 유비 진영에서 그리 중요한 위치에 있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유비가 익주(益州)를 차지한 후 조조와 벌인 전쟁에서도 <연의>에는 늘 제갈량이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작전지시를 하고, 유비는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에는 "유비가 출정하면 제갈량은 후방에서 식량과 군수물자 수송을 담당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제갈량이 <출사표>를 쓰고 북벌에 나섰을 때, "위나라에서는 그동안 촉한에 유비 한 사람만 있는 줄 알고 방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제갈량이 병력을 몰고 나오니 당황했다."라고 한다. 실제의 제갈량은 '천재적인 군지휘관'보다 '믿음직한 행정가'로서 유비에게 봉사했음을 알 수 있다.

 

 제갈량이 지휘권을 행사한 것이 분명한 다섯 차례의 북벌에서도 <연의>에서처럼 다 얻은 승리를 '무능한 부하, 어리석은 군주, 불운함' 때문에 놓치는 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인구나 물자에서 위나라의 십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던 익주만을 가지고(게다가 관우, 장비 같은 맹장들도 사라진 상태로) 위나라를 쓰러트릴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다면, 제갈량은 천재 전략가는 커녕 몽상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북벌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유비가 내린 사명을 받들기 위한 몸부림"이거나 "계속적인 공격으로 위나라가 정비할 틈을 주지 않는, 방어로서의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전쟁 목표는 제갈량의 성격과 결부되어, 과감함과 임기응변이 결여된 신중한 작전으로 이어졌다. <연의>에서도 이런 사실은 얼핏 드러난다. 병력이 없는 상태로 사마의(懿, 179~251)의 대군을 맞았을 때, 제갈량은 성문 위에 앉아 태연히 금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를 본 사마의는 "제갈량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는데, 저렇게 대담한 짓을 하는 걸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다."며 퇴각한다. "언제나 조심스럽다"는 것이 제갈량 군대의 장점이자 큰 단점이었다. 처음 출정할 때 우회로를 택해서 단숨에 장안을 공략하자는 위연(魏延, 미상~234년 추정)의 계책을 물리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군사적 재능은 과장되었어도, 제갈량은 분명 다재다능했으며 보기 드문 역량을 갖고 있었다. 촉한군의 열세를 보완하고자 그가 창안했다는 팔진도(八陣圖), 목우(牧牛)·유마(流馬), 연노(連弩) 등은 성능이 과장되기는 했으되 실제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 방식이나 <제갈량집>에 나타난 사상을 보면 그는 유가와 법가를 적절히 조화시켰다. 원리원칙을 중시하고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는 법가의 장점과, 인간적인 대우를 통해 덕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유가의 장점을 그는 모두 살렸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서도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예정된 병사들에게 돌아가라고 함으로써, 병사들이 감격하여 전력으로 싸워 이겼다"는 에피소드는 원칙을 냉정히 지키며 따뜻한 인간미를 잃지 않은 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제갈량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까닭은 그의 우수성보다는 그의 진정성에 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촉한의 황제가 될 수 있었고, 위나라에 항복해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독한 투쟁의 길을 갔다. 후한 말기에서 진나라 통일에 이르는 시대는 도덕이 조소받고 힘이 곧 정의가 되던 시대였다. 동탁(董卓), 조조(曹操), 사마의(懿), 그리고 유비(劉備)는 모두 자신을 믿어준 군주를 배신하고 힘으로 권좌를 차지했다. 한나라 헌제(獻帝)나 유선(劉禪), 손호(孫皓)는 편안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조상이 남겨준 나라를 저 버렸다.

 

 

<蜀相(촉상: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 - 唐, 杜甫(두보)

 

丞相祠堂何處尋(승상사당 하처심)   승상의 사당은 어디서 찾을까

錦官城外柏森森(금관성외 백삼삼)   금관성 밖 잣나무 울창한 곳이지

映階碧草自春色(영계벽초 자춘색)   섬돌에 비친 파란 풀들 절로 봄빛을 띠고

隔葉黃鸝空好音(격엽황리 공호음)   잎 사이 노란 꾀꼬리 부질없이 고운 노래 부르네

三顧頻煩天下計(삼고빈번 천하계)   빈번한 삼고초려는 천하를 위한 책략 때문

兩朝開濟老臣心(양조개제 노신심)   두 대의 걸쳐 충성을 다 한 것은 늙은 신하의 마음

出師未捷身先死(출사미첩 신선사)   출정하여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었으니

長使英雄淚滿襟(장사영웅 루만금)   오래동안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로 옷깃을 적시게 한다네

 

註:

丞相祠堂(승상사당): 成都에 있는 諸葛武候祠를 말함. 묘앞에 제갈량이 직접 심은 잣나무가 있다고함

錦官城(금관성): 사천성 성도

三顧(삼고): 劉備가 제갈량의 초려에 세 번이나 찾아간 故事

兩朝(양조): 蜀의 유비가 개국하고 아들 劉禪에서 망하였으니 양조라함

開濟(개제): 기초를 닦고 사업을 완성함

出師(출사): 제갈량이 출사표를 올리고 삼군을 인솔 출정함을 가르킴

身先死(신선사): 제갈량이 司馬懿(사마의)와 대치하다가 죽은 것을 말함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모신 사당, 무후사(武侯祠 : 우호우츠)

 무후사는 중국 3세기를 풍미한 유비와 장비, 관우 등 촉나라의 여러 명장을 거느린 전설의 전략가, 제갈공명, 그 제갈량을 기리기 위해 서진 영안 원년에 만들어진 사당이다. 무후사의 이름은 제갈량이 죽은 후의 시호인 충무후(忠無候)에서 유래되었다.

 경내로 들어가면 유비전과 제갈량전, 촉한의 문·무관 28위의 동상 및 '제갈고(諸葛鼓)'라 칭해지는 북, 동고(銅鼓) 등의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유비전은 정문으로 들어가 최초의 건물인데 황금의 유비상이 안치되어 있고 벽에는 공명의 정치·군사상의 전략사항으로 유명한 융중대(隆中對)의 액자가 걸려있다.

 

 관우, 장비 등의 문·무관 28인의 상은 옆 동(棟)에 있고 벽에는 그들의 문장과 업적을 기리는 액자와 연(聯)이 전시되어 있다. 제갈고는 공명이 남쪽을 정벌하면서 만든 것으로 낮에는 그것으로 밥을 짓고 밤에는 경보를 발했다고 한다.

 또 무후사 뒤편에는 유비의 묘인 혜릉(惠陵)과 문장, 서법, 석각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꼽힌 당비(唐碑)가 있다.

 무후사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삼국시대의 사당으로 여겨지며 1961년 국무원에 의해서 전국 중요 문물 보호단위로 정해졌다. 무후사가 정확하게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존재하는 무후사는 청대 강희 11년(1672년)에 옛 터 위에 중건된 것이다.

 

o 위치 : 성도시 남부 교외

o 교통편 : 1, 10번 버스, 무후사역

o 개방시간 : 08시~18시

 

 

 

<三顧草廬(삼고초려)>

三 : 석 삼,

顧 : 돌아볼 고,

草 : 풀 초,

廬 : 오두막 려

 

意味:

➀ 군주와 귀인으로부터 특별한 신임과 우대(優待)를 받는 것.

➁ 사람을 초빙(招聘)함에 즈음하여 정성과 예의를 다하는 것.

➂ 예의를 다하여 현인(賢人)을 신하로 맞이하는 것.

 

 蜀(촉)나라 劉備(유비) 밑에는 關羽(관우), 張飛(장비), 趙雲(조운) 등 一騎當千[일기당천 = 혼자서 천 명을 상대함]의 용맹한 장군들이 있었으나, 더불어 군사(軍事)를 의논할 뛰어난 군사(軍師)가 없었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낀 유비가 "바로 이 사람이다"하고 꼽은 인물이, 전란을 피하여 襄陽(양양) 서쪽 臥龍岡(와룡강)이라는 산자락에 초가를 짓고 사는 諸葛孔明(제갈공명)이었다.

 유비는 예를 다하여 정중하게 그를 찾아갔으나, 외출 중이라고 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두 번째 방문 때도 외출 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비는 관우와 장비의 비난을 뿌리치고 세 번째 찾아가, 가까스로 제갈공명을 만나, 자기의 군사(軍師)가 되어 달라고 정중하게 말하였다.

 공명(孔明)도 유비의 성의에 감동하여, 와룡강의 초가에서 나와 유비를 돕게 되었다.

出典: "臣(孔明)本布衣 躬耕於南陽.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 草廬之中." <三國志> '出師表'

 

 

<泣斬馬謖(읍참마속)>

 泣: 울 읍

斬: 벨 참

馬: 말 마

謖: 일어날 속

 

意味: 눈물을 머금고 馬謖(마속)의 목을 베다

 

 촉(蜀)나라 건흥 5년 3월, 제갈공명은 위(魏)를 치기 위해 삼군(三軍)을 이끌어 성도(成都)를 떠나 북진(北進)하여 한중(漢中)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각지에서 위군을 무찌르고 그 해 겨울 장안(長安)을 치기 위해 군사를 기산으로 진격시켜 위수의 서쪽에다 진을 치고 위의 대도독 조진(曹眞)의 군사 20만을 무찔러 위수에서 후퇴하게 하였다. 이때 위는 사마중달(司馬仲達: 179~251)을 써서 새로이 20만을 무찔러 위수에서 후퇴하게 하였다. 이때 위는 사마중달을 써서 새로이 20만 대군으로써 공명의 침공을 막게 하였다.

 사마중달을 기산의 들판에 촉군에 대비한 부채꼴을 진을 폈다. 이를 깨뜨릴 공명의 작전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조진(曹眞)을 대신한 중달이니만큼 공명으로서는 한 군데 불안한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촉군의 군량 수송로인 가정(街亭)이었다.

 만약 그곳을 위군에게 막히면 전선에 촉군은 꼼짝할 수가 없다. 그 가정(街亭)을 누구에게 어떻게 방비케 해야 하느냐를 두고 공명은 고민했다. 그때 그 임무를 맡겠다고 자청한 자가 마속(馬謖)이었다. 그는 공명과 절친한 사이였던 마량(馬良)의 아우로, 재기발랄하여 공명이 남몰래 그의 대성을 기대하여 친아우처럼 사랑하고 있는 부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마중달과 대항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공명은 주저했으나 마속(馬謖)은 열심히 간청했다.

 "오랫동안 병법(兵法)을 공부한 자가 가정(街亭) 하나 수비하지 못한대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만일 패하는 날에는 소인은 물론이요, 일문권속을 모조리 군벌에 처하시더라도 결코 원망치 않겠습니다."

 "좋아, 진중에서는 농담은 없는 법이다."

 마속(馬謖)은 고개를 끄덕이고 공명의 명을 받았다. 공명은 왕평(王平)을 골라 부장(副將)으로 삼고 급히 가정으로 떠나 보냈다.

 가정(街亭)의 산은 삼방(三方)이 절벽으로 되어 있었다. 공명의 명령은 산기슭 길을 사수하여 위군을 접근시키지 말라는 것이었으나 마속(馬謖)은 지형을 보고, 적을 끌어들여 역습하기에는 절호의 땅이라 생각하고 왕평의 간언을 물리치고 산 위에 진을 쳤다. 그 결과 위군에게 포위당하고 물이 끊기자 궁지에 빠진 마속(馬謖)이 전군을 이끌고 산에서 달려내려오는 것을 산기슭에서 포위하고 있던 위군이 공격을 가하여 싸움은 촉군의 참패로 끝났다.

 가정(街亭)이 점령되자 공명은 마속(馬謖)을 보낸 것을 후회했으나 이제는 어떻게 할 도리도 없어 전군을 일시 한중우로 철수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건흥 6년 5월, 가까스로 한중에 전군을 철수시킨 공명은 패전의 책임을 지워 마속(馬謖)에게 참형을 언도했다. 때마침 성도에서 와있던 사자 장원은 마속(馬謖)같은 유능한 인재를 잃는다는 것은 국가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공명은 듣지 않았다.

 "마속(馬謖)은 아까운 인물이오. 허나 그와 같은 사정(私情)은 그가 범한 죄보다도 더 큰 죄가 되오. 마속(馬謖)을 잃는 것은 국가의 손실일지도 모르나, 그를 베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큰 손실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오. 아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더욱 단연코 베어서 대의를 바로잡아야 하는 거요."

 공명은 형리를 재촉하여 마속(馬謖)을 베게 하였다. 마속(馬謖)이 형장으로 끌려가자 공명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마속(馬謖)이여, 용서해 다오. 정말은 나에게 죄가 있고 내가 똑똑하지 못한 데에 있다. 허나 나는 내 목을 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살아서 촉을 위해 네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속(馬謖)의 목은 진중에 내어 걸렸다. 전군사(全軍士)는 공명의 심중을 알고 있었기에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出典: 『三國志』蜀志

 

 

<七縱七擒(칠종칠금)>

七: 일곱 칠

: 세로 종, 바쁠 총

七: 일곱 칠

擒: 사로잡을 금

 

意味: 적을 일곱 번 놓아 주었다가 일곱 번 다시 사로잡음.

 

 제갈량이 북방의 맹장인 孟獲(맹획)을 일곱 번을 사로잡았다가 풀어 준 고사. 자기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함.

 맹획은 蠻王(만왕)으로 용맹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촉의 제갈량과 싸움에서 그는 왕평, 관색 등의 군사를 정신없이 추격하다가 조자룡과 위연을 만나 위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제갈량 앞에 끌려나온 맹획은 포로로 잡힌 변명을 하자 제갈량은 "그렇다면 내가 너를 놓아 줄 테니 가겠느냐?" 그러자 맹획은 "네가 나를 놓아 준다면 나는 돌아가서 다시 군마를 정돈한 후에 한 번 자웅을 결단해 싸워보려 한다. 만약 그때 가서 두 번 잡힌다면 복종할 테다."

 공명은 맹획의 말을 듣자 껄껄 웃으면서 결박을 풀고 음식과 술을 대접한 후에 놓아주었다. 공명의 부하들이 의아해 풀어준 이유를 묻자 "내 이 사람을 잡기는 실로 주머니 속의 물건을 취하는 것같이 쉬운 일이니 아무 걱정들 마시오. 그의 마음이 진심으로 항복할 때까지 자연히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맹획은 풀려나 당일로 瀘水(로수)까지 가서 패잔병들을 만났다. 그는 자기가 사로잡힌 것을 아는 부하장졸들에게 '갇혀 있다가 십여 명의 군사를 죽이고 어둠을 타 도망친 것'이라고 허풍을 떨었다. 이러한 맹획을 공명은 잡으면 풀어주고 잡으면 풀어주길 여섯 번이나 되풀이 했다. 맹획은 일곱 번째로 사로잡히자 공명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항복을 했고, 공명은 그를 남만 땅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남만 사람들은 공명의 은덕에 깊이 감동되어 공명의 사당을 지어 사계절로 祭享(제향)을 지내고 모두 慈父(자부)라 하면서 온갖 진귀한 보물들을 진상하며 두 번 다시는 배반하지 아니할 것을 약속했다.

 이로써 남만이 평정된 것이다. 그런데 촉나라 군사가 회군하려 하는 데 瀘水(로수)에서 구름이 깊고, 안개가 자욱하고 풍랑이 심해 군사들 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다. 위연이 공명에게 고하자 공명은 맹획을 불렀다. 그러자 맹획은 물 속에 있는 猖神(창신)의 장난이라고 답했다. 창신이란 寃鬼(원귀)가 미친 귀신인데 이 창신이 장난을 하면 49명의 사람의 머리와 검은 소, 흰 양으로 제사를 지내면 風定浪息(풍정낭식)이 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명은 소와 말을 잡아 면으로 고기를 반죽하여 사람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리고 회군하니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지고 바람이 잔잔해졌다고 한다. 이것이 최초의 饅頭(만두) 이야기다.

- 出典: 삼국지(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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