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敦煌 : Dunhuang : 뚠황 : DNH)                                         ☞ 돈황여행상품

 

 중국 감숙성 서부에 있는 도시로 주천지구(酒泉地區)에 속하는 현청소재지며 감숙(甘肅)-신강(新疆) 사막 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 펼쳐진 전통적인 중국인 거주지의 서쪽 끝에 해당하며, 서양에서 중국 통치영역으로 들어가는 외국상인들이 처음으로 거쳐가는 교역도시이다.

 

 돈황(敦煌)의 역사는 기원전 111년 한무제가 흉노족을 정복하고 하서 4군의 하나로 돈황군을 두고 역내에는 한인을 이주시켜서 서역 지배의 거점으로 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돈황은 탑리목분지의 북과 남을 지나는 북로, 남로의 거점으로서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되었다.

 

 이 실크로드를 통해서 후한시대에는 불교가 중국 본토에 전해졌으며, 동진시대에는 유명한 막고굴이 만들어 졌다.

 

 당시 돈황은 동서 무역의 대상들이 왕래하는 길목으로서 번영하였고, 중원의 전란을 면한 요충지였다. 당대 645년,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오던 중 머물렀으며, 이후 8세기 반에 걸쳐 왕래가 성하게 되어 황금시대를 맞았다.

 

 돈황의 기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춥다. 더운 7월의 평균 기온은 25.7℃이고, 가장 추운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15.2℃이다. 연중 강수량은 36.8㎜ 정도로 매우 건조한 편이기 때문에 돈황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을 때는 5, 9, 10월이다.

 

 

음식들의 집합장소 사주시장(沙州市場:사저우시장)

 이곳의 음식은 향내도 많이 나고 느끼할 거라는 생각이 언뜻 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돈황은 행정구역 상 감숙성에 속해 있지만 실제로 신장위구르자치구에 가깝기 때문에 음식 역시 신장의 것이 많다. 역시 양고기 등이 많고 주식으로는 쌀보다는 밀가루를 사용한 면 종류가 많다. 또 이 지방의 음식은 대체로 매운 것들이 많아 매운 음식 때문에 고생하는 경우도 있다.

 

사주시장(沙州市場)

 돈황의 동쪽에 있는 돈황시박물관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사주시장으로 옛 돈황이 실크로드의 중계지역으로서 왕성한 활동을 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어서 활기에 넘친다.

 특히 이곳에서는 음식을 늘어놓고 파는 먹자거리가 유명한데, 실크로드 상에서 만날 수 있는 음식들의 총집합장소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지방의 독특한 요리들을 맛볼 수 있다. 다만 시장에서 파는 음식이기 때문에 조금 위생적이지 못함은 각오해야 한다.

 만약 이런 시장에서의 음식이 싫다면 장거리 버스터미널 바로 북쪽으로 뻗어 있는 정자로 부근과 둔황 중심의 교차로 동쪽의 동대가 부근에 음식점이 밀집해 있는 곳으로 가서 식당을 골라 이용하면 된다.

 

 

돈황 여행의 Tip

➀ 아침, 저녁간 기온차가 극심하고 건열풍과 흑사폭풍 등의 자연재해가 있기 때문에 선글라스와 모자, 모래바람을 막을 두건은 필수품으로 꼭 챙겨야 한다. 대체로 5월에서 10월까지가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➁ 돈황 내에는 의료시설이 많이 부족한 상태이다. 풍토병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감기약 및 비상약품들을 준비해 가는게 좋다.

➂ 멋진 일몰, 일출 사진을 찍고 싶다면 명사산, 월아천이 있는 과벽탄(戈壁灘)에 가는게 좋다. 시내에서는 그 정도의 장관을 볼 수 없는데다 시내에서 과벽탄까지는 10km가 넘는 거리이므로 과벽(戈壁) 근처에 있는 칠리진(七里鎭)에 하룻밤 머물면서 일몰, 일출을 모두 멋진 사진으로 남길 수 있다.

 

 

돈황의 기온

도시명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돈  황

(敦 煌)

최고평균

-1.7

4.3

13.3

21.1

26.7

31.0

32.8

32.0

26.5

18.8

8.1

0.2

최저평균

-15.6

-11.3

-3.4

3.9

9.3

13.5

16.1

14.8

8.2

0.4

-6.0

-12.9

평   균

-8.6

-3.5

4.9

12.5

18.0

22.2

24.4

23.4

17.3

9.6

1.0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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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 명소

막고굴(莫高窟)

 중국의 3대 석굴운강석굴, 용문석굴, 돈황석굴인데 그 중 돈황석굴은 벽화가 가장 유명하다. 대동의 운강석굴은 사방 10m가 넘고 높이 15m로 규모가 크지만 돈황의 석굴은 거의 모든 굴이 아담한 편이다. 하지만 돈황석굴의 벽화는 그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며 특히 당나라 때 벽화가 가장 아름답다.

 

 돈황 남쪽 25㎞되는 곳에 있는 명사산(鳴沙山)의 동쪽 절벽에서 남북으로 1.8㎞에 걸쳐 파놓은 석굴의 무리를 말한다. 석굴의 수가 1천 개 이상이라 천불동이라고도 부른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492불로 여기서 나온 벽화만도 2천여 개에 달한다. 총면적은 4천5백㎡으로 한마디로 사막 가운데서 보는 천연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이 막고굴이 처음 조각되기 시작한 것은 동진(東晋) 때인 366년으로, 이후 원나라 때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 방대한 양의 막고굴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연붕괴와 인간들의 무지한 파괴에 의해서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492개의 동굴만이 남아 있다. 492개의 굴을 시대별로 보면, 수나라 이전 120개, 수대 140개, 당대 111개, 오대 7개, 송 원대 35개로 되어 있다.

 

 

 각 굴마다 들어서 있는 소상들은 표정과 자세가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벽에 그리진 벽화는 보는 이의 눈을 찬란한 불교미술의 화려함으로 고정시킨다. 그 중에서 장경동(藏經洞)이라 불리는 제 17굴은 송나라 때까지의 경전이나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고, 제 45굴의 칠존상(七尊像)은 당나라 불교 미술의 걸작품일 뿐만 아니라 돈황 막고굴 전체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제 427굴의 조각과 천불은 수나라 때의 것이고, 제 285굴에 그려진 비천은 위진시대의 걸작품이다. 또한 막고굴에서는 신라의 혜초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돼 세계적인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벽화의 전체적인 내용은 초기에는 민간 신화가 많고, 후기에는 후한시대에 전해진 불교가 중국고대의 신불사상과 결부된 것이 많은 편이다. 또 인도의 쿠샨, 카니시카 왕조시대에 서역으로 전해진 불교예술의 영향이 강하고 주제는 석가가 전생에 선을 권하는, 소위 본생담이 많다.

 

막고굴 제17굴 장경동(藏經洞)

 1900622일 둔황 석굴을 지키던 태청궁 도사 왕위안루(왕원록)가 제16굴을 청소하다가 이상한 공명음을 듣고는 막혀 있던 밀실을 발견하였다. 길이가 2.6m, 높이 3m의 이 석굴에는 5만 점의 고문서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하여 둔황 유물의 정수이자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제17(장경동)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의 유물은 4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오호십육국 시대에서 북송까지의 고문서와 고대악기, 고화, 고서 등등이었다.

 

 변경 지역이라 잦은 이슬람 등 이교도의 침입에 파괴될까 봐 아예 중요 문화재들만 모아서 제16굴의 보조굴에 모아서 폐쇄를 했던 것이 몇 백년 동안 발견되지 않다가 발견된 것이다.

 

 1907년 아우렐 스타인이 이곳을 관리하던 도사 왕위안루(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장경동에서 약 7,000점의 유물을 유출하여 대영박물관에 가져가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연구는 다시 둔황학이라고 이름 붙여지게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가 또 한 번 7,000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유출하게 되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에 묻어져 나간 것이다.

 

막고굴의 역사

 석굴은 당시 둔황을 지배했던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초기-발전기-성숙기-쇠퇴기로 나뉜다. 초기는 북위와 서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도의 영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중앙아시아에서 들여온 청금석 안료와 붉은색이 많이 사용됐다. 대표적인 석굴은 268번, 272번, 275번 굴로, 그 중 268번이 가장 먼저 굴착됐다.

 

 발전기는 수나라(581~618년) 때로 37년간 통치하다 단명한 왕조이지만 이 시기에 101개나 개굴했을 정도로, 불교가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시기다. 부처와 보살의 모습도 중국적으로 변신하여, 불상이 거대해지고 복식이 완연한 중국풍으로 바뀐다. 내용도 초기 석굴에서 석가모니의 전생을 다룬 본생담 등 불전화가 그려졌다면 수나라 때는 경전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간다.

 

 성숙기에 해당하는 당나라(618~907년) 때는 막고굴도 전성기를 맞이한다. 회화, 조각 기법이 한층 세련되고 화려해진다. 이전까지는 관음상과 비천상이 남성이었지만 이 시기에 여성으로 바뀐다. 둔황 시내에 비파를 머리 뒤로 켜는 동상이 서 있는데, 바로 이때 개굴된 112번 굴 벽화에서 착안한 것이다. 총 230개 석굴이 개굴되었는데, 벽화에는 당대 귀족의 생활과 복식, 음악 등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쇠퇴기는 당나라가 안사의 난으로 쇠퇴하면서 찾아왔다. 이 지역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8세기 중반부터 9세기까지 토번(吐蕃, 티베트)이, 11세기부터 12세기 초까지 서하 왕조가 점령하면서, 석굴에도 티베트와 서하 왕조의 양식이 반영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3번 석굴의 천수관음상이다. 그후 원나라가 서하를 멸망시키면서 막고굴도 사막의 모래 속에 묻히고 만다.

 

o Tip

 폭우가 쏟아지거나 모래바람이 심한 날에는 석굴을 개방하지 않는다. 전화로 확인하고 출발하자. 관람객이 많은 날에는 1~2시간 줄을 서서 기다릴 수도 있다. 막고굴 안은 사진기 반입이 금지되어 있다.

 

o 위치: 敦煌市 东南25公里

o 요금: ¥200, 외국인 가이드 ¥20

o 가는방법:

 시청루(西城路)와 밍산루(鸣山路) 입구에서 막고굴행 녹색 중형 버스를 탄다.

 매일 08:00~16:30 사이에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막고굴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버스는 17:00에 출발한다.

 택시로는 편도 ¥50~60.

o 이용시간: 09:00~17:00

o www.mogaoku.net

  

 

돈황예술의 집합지 돈황박물관(敦惶博物館)

 돈황 시내 중심, 로타리에서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1979년 10월에 개관되었다. 수년간 자료를 수집한 끝에 지금은 2000여 개에 달하는 문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동기, 철기, 석기, 목기, 경권 등 13 종류로 분류되어 있다.

 현재는 정식으로 300여 문물이 300㎡에 달하는 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 이것들 대부분은 돈황 주변에서 발견된 출토품들로, 돈황이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당시의 유적들이 주를 이룬다.

 또 전체는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 막고굴의 제17굴에서 출토된 것들, 한·당나라로부터 온 제물들, 그리고 나머지는 양관(陽關)이나 옥문(玉門)에서 출토된 것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첫부분에서 전시하고 있는 전시품들은 12세기 초 중국 고고학상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서, 고대 정츼와 경제, 문화, 예술, 종교, 과학, 민족역사 및 외래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외국학자들이 연구에 심취해 돈황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방전에 이곳의 중요한 물물들이 해외로 많이 유출되어서 지금 이곳에 전시된 것은 발견된 유물들의 작은 일부분이다.

 또 소장품 중에는 막고굴(莫高窟)의 장경동(藏經洞)에서 출토된 돈황유서(敦煌遺書)가 가장 진귀하며, 대량의 한간(漢簡) 또한 매우 높은 문물 가치를 지니고 있다.

 

 

명사산(鳴沙山)

 우는 언덕이라는 의미의 명사는 언덕의 모래들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마치 울음 소리와 같다서 붙여진 이름이다. 특히 이곳에서 보는 일몰 장관은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언덕의 면적이 800㎢에 이르는 대규모 언덕인데 돈황시에서 불과 10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서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돈황시내에서 약 5km 떨어진 산으로, 올라갈 때 모래가 울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사산에는 초승달 같은 호수가 있다. 길이 약 200m, 폭 30m의 이 아름다운 호수는 모래에 파묻힌 적이 없다 한다.

 예전에는 이곳에 신선이 산다하여 샘가 옆에 도교사원이 있었고, 단오날에는 근처 사람들이 모두이 산에 올라가 액을 막기 위해 모래를 타고 미끄럼을 타는 풍습이 있는데 이때 미끄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져 마치 벼락치는 소리같이 들린다고 한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저녘에 노을을 맞으면서 관광하는 명사산, 월아천의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명사산은 돈황의 남쪽으로 5㎞ 떨어진 곳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모래산으로 모래와 돌이 퇴적되어 형성된 산이다. 명사산이라는 말은 개인 날에 모래소리가 관현악기의 소리같이 들리거나 수만의 병마가 두들겨 치는 북과 징소리같이 들리는 일로 유래한 것이다.

 

 

월아천(月牙泉)

 월아천은 명사산 안에 있는 작은 오아시스로서 이곳은 모래산에 둘러싸인 채 수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잠시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는 신비한 샘이다. 초생달 모양의 샘과 주변에 서 있는 나무들이 어우러진 풍경은 사막 안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멋진 풍경이다.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마른 적이 없는 샘으로 초생달 모양을 하고 있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오래 전 돈황이 갑자기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자 어여쁜 선녀가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이 눈물이 샘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샘 안에 초생달을 던져 빛을 찾게 했다고 한다. 겨울에는 물이 얼어붙어 사막의 또다른 볼거리가 된다. 아침 8시에서 일몰시간 때까지 자유롭게 둘러 볼 수 있고 이곳에서 보는 일몰도 정말 아름답다.

 

 

서역으로의 관문 옥문관(玉門關 : 위먼관)

 돈황에서 고비사막을 지나 북서로 82㎞ 쯤에 한나라 때 양관(陽關)과 더불어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던 옥문관이 있다. 돈황은 인도, 이란과 통하는 중국고대 통로로서 옥문관과 양관은 그 통로의 중요한 열쇠였다.

 옥문관을 나와 타클라마칸사막 북쪽길을 따라가면 서역북도를 만나므로, 옛날에는 옥문관을 넘는 것을 출새(出塞)한다 했고, 만리장성 밖을 새외(塞外)라고 했다. 옥문관은 높이 10m의 사방형으로 633㎡에 걸쳐 있고, 옥문관에 올라 멀리 바라보면 한대의 고장성(古長城)을 볼 수 있다.

 또한 옥문이라는 이름은 당시에 이곳을 통해 교류하던 동서양의 물건들 중에서 다량의 옥석이 거래되어 붙여진 것이다.

 전해오는 얘기에 따르면, 옛날 화씨(和氏)라는 사람이 천하에 없는 보옥이라 하여 임금에게 바쳤는데, 돌이라 판명되어 왼다리를 잘렸다. 그 후 다음 임금에게도 바쳤는데 또, 돌이라 판명되어 오른쪽 다리마저 잘리고 만다. 다다음 임금 때 두 다리 잃고 산 아래서 사흘 밤낮을 울었는데, 그 정성이 임금의 주의를 끌고, 그가 받친 옥을 천하에 없는 보옥임을 알게 하고 이를 갈아 옥을 만들었는데, 이 옥이 바로 그의 성을 딴 화씨벽이다. 이 화씨벽은 진시황이 조나라 혜문왕에게 15개 성과 바꾸자고 제의했을 정도로 귀한 보물로 여겨졌다.

 중국에서 옥의 명산지는 서역 화전으로 임금이 입던 옥의의 옥도 모두 이 화전에서 캐어온 것으로 문헌에 나온다. 앞서 말한 전설속에 나오는 화씨벽의 화씨도 옥을 바친 사람이 아니라 '화전에서 난 옥'의 뜻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서역의 관문인 옥문관(玉門關)의 이름을 붙인 것도 이러한 배경을 지니고 있는 이 옥이 들어오는 문이란 뜻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실크로드는 비단 뿐 아니라 옥이 드나들던 옥의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진 벽화묘(西晋壁画墓) 

 서진시대 (265~317년)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고분군들이 대량으로 발견된 지역이다. 자그마한 기념품 상점 안에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 사진들이 사진첩에 끼워져 있고, 실크로드 관련 책자 및 다양한 종류의 서적을 판매하고 있다.

 묘실 안이 상당히 어둡기 때문에 손전등을 하나씩 들고 관광에 임하며 전문 안내원의 인솔을 받아야 한다.

 1600여년 전에 너무나 세밀하게 만들어 놓은 묘분을 보면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지하로 내려간 묘분 입구에는 벽돌형식으로 쌓아 만들어 놓은 대문이 있는데 벽돌 하나하나에 벽화가 새겨져 있고, 각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등잔을 놓았던 자리, 관을 두었던 자리 등의 흔적이 뚜렷하고, 부엌과 화장실 등 이승에서의 집처럼 구조를 꾸몄으며 도굴의 흔적이 있는데 그 기술이 치밀하고 교묘하다.

 

 

◈ 영화 세트장으로 만든 사주고성유적 돈황고성(敦惶古城)

 돈황의 시가지에서 25km 가량 빠져 나와 남동쪽, 명사산이 있는 사막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성이 하나 나타나는데, 이곳이 영화 세트장으로 유명한 돈황고성이다.

 1987년 중일합작으로 대형 역사영화 <돈황>을 찍기 위하여 만들어진 세트장으로 송대의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원본으로하여 사주고성을 그대로 재현하였는데, 그 건축면적이 1만㎡에 달한다. 돈황고성의 건축풍격은 서역의 운치 속에 동, 서, 남으로 난 세개의 성문과 성루가 우뚝 솟아있다.

 성내에는 고창, 돈황, 감주, 흥경, 변량 5개의 주요 도로를 조성해 놓았으며, 도로 양편으로는 불당과 전당포, 창고, 주점, 주택 등이 지어져 있다.

 돈황고성은 당송시기의 서북 요충지인 돈황의 웅장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어 중국 서부건축예술 박물관이라 불리고 있다. 이곳은 중국 서부의 최대 영화 촬영기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미 <봉신연의>, <신용문객잔> 등 2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o 교통: 투어버스 이용 / 택시(20분 소요)이용

 

 

양관(陽關)

 양관은 돈황에서 남쪽으로 70㎞ 떨어진 곳에 있는 관문으로 지금은 폐허만 남아 있다. 양관은 한대의 실크로드 남로상의 중요한 곳으로서, 당시의 왕유가 "그대에게 한잔의 술을 권하니, 서쪽 양관으로 나가면 옛벗이 있겠는가(勸君更進一杯酒, 西出陽關無故人)"라 읊은 곳이다.

 오랜 풍사에 침해받아 지금은 사구 위에 벽의 밑 흔적만이 보일 뿐, 지금은 단지 붉은색 모래산 위에 양관의 눈과 귀의 역할을 했던 봉화대만 남아 있다. 봉화대의 높이는 4.7m, 길이는 8m이다.

 옛날부터 큰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병기, 도기, 화폐 등의 현물 발견되어 골중사지(骨重砂地)라 불렸다.

 양관 근처에는 남호(南湖)와 포도길이 있어 독특하면서도 이국적인 풍경을 즐길 수 있으며 이곳 민속문화를 탐방할 수도 있다.

 

 

백마탑(白馬塔)

 돈황의 남동쪽으로 4㎞ 떨어진 곳에 있는 탑으로, 위치는 돈황이 사주(沙州)라고 불릴 때 지어진 사주고성(沙州故城)의 한 가운데이다. 높이 12m, 9층으로 황백색을 띠고 있으며, 하얀 탑신이 인상적이다. 후진(後秦) 때의 고승 구마라십(鳩摩羅什)의 애마인 백마가 병사하자, 말을 수장하고 그곳에 탑을 세운 것이다.

 구마라습(鳩摩羅什: 344~413)은 인도의 승려로 여러 곳을 편력하며 가르침을 받다 구자국에서 주로 대승교 포교활동을 벌였다. 이후《성실론(成實論)》등 경전 번역에 힘썼으며 삼론(三論) 중관(中觀)을 확립하여 삼론종(三論宗)의 조사(祖師)로 불리기도 한다.

 구마라시바()· 구마라기바(), 줄여서 나습()· 습(), 의역하여 동수(: 중국명)라고도 한다.

 인도의 귀족 구마라염(: Kumārāyana)을 아버지로, 구자국()왕의 누이동생인 기바(: Jivā)를 어머니로 하여 구자국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이름은 부모의 이름을 합한 것이라고 한다.

 7세 때 출가하여 여러 곳을 편력하다가 인도 북쪽 계빈(罽)에서 반두달다()에게서 소승교()를 배우고, 소륵국()에서는 수리야소마()로부터 용수()의 대승교()를 배운 다음 구자국으로 돌아와 비마라차()에게서 율()을 배웠다. 그 후 구자국에서 주로 대승교를 포교하였다.

 383년 진왕()이 여광()을 시켜 구자국을 공략하였을 때 여광은 구마라습을 데리고 양주()로 갔으나, 그 뒤 후진()이 양주를 쳐서 후진왕 요흥()이 401년 구마라습을 장안()으로 데리고 가 국빈으로 대우하였다.

 413년 장안의 대사()에서 69세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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