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주(杭州, Hangz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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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롭고 아름다운 곳 절강성(浙江省 : 저쟝셩)

 절강성은 중국 동해변에 위치하며 인구 435만의 풍요로운 곳이다. 연해에 200개 이상의 섬이 흝어져 있어서 가장 섬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며 아열대에 속해 날씨가 따뜻하고 사계절이 분명하다.

 또 절강성에는 산이 많고 중앙에 전당강이 흘러서 많은 볼거리들이 형성되어 있다. 절강성의 성도(省都)인 항주는 소주와 함께 중국 제일의 관광도시로서 서호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따뜻한 기후와 많은 강수량 덕택에 절강성은 항주의 용정차를 비롯한 녹차의 재배지로도 유명하며 그 생산량도 전국 제일이다. 이 밖에 뽕의 재배도 성하며 비단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해질무렵의 편안함의 있는 절강성의 성도 항주(杭州 : 항조우)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이곳을 보고나서 "세상에서 가장 곱고 멋있는 도시"라고 경탄한 곳이다. 이곳 사람들은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蘇州(소주)와 杭州(항주)가 있다)라는 옛말을 자주 인용한다. 이곳을 놓고 패권을 다투었던 吳 越 南宋(오 월 남송)이 모두 한 때 이곳을 도읍으로 정했었다. 또 唐(당)나라 시인 白居易(백거이, 白落天(백낙천, 772-846))와 蘇軾(소식, 蘇東坡(소동파), 1036-1101))이 이곳에 진사로 부임한 적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젊은이들이 애인과 함께 도망갈 때는 으레 항주(杭州)로 간다고 한다.

 항주는 아열대 기후에 속하여 사계절이 분명하다. 6개의 구와 2개의 현으로 나뉘며, 총면적은 16㎢이고, 인구는 608만 명에 이른다.

 2,100년 전의 항주는 중국의 여섯 개의 역사적인 수도 중 한 곳이었다. 항주와 북경간에 대운하가 건설되었을 때, 도시는 점차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9세기부터 237년 동안 14명의 황제가 항주를 수도로 선택했다.

 

 

항주의 대표 특산품인 용정차(龍井茶)

 중국을 여행할 때 가장 많이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으며, 마실 수 있는게 바로 차(茶)다. 무더운 한 여름에도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마시는 중국 사람들. 그들의 건강비결이 이 차에 있다는 생각도 들게한다. 아무리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어도 호리호리한 체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 역시 이 차에 있는 듯하다.

 원나라 때부터 재배해온 용정차(龍井茶, 룽징차)는 항주(抗州, 항저우)에서 재배되는 대표적인 녹차이다.

 용정이란 명칭은 원래 샘 이름이었고 이어 용정사란 절이 세워졌으며, 이 절에서 차를 재배한 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용정차는 짙은 향, 부드러운 맛, 비취같은 녹색 그리고 참새 혀모양의 잎새라는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어 '4절(四絶)'이라 호평 받고 있다.

 용정은 물을 끓였다가 섭씨 70-80℃ 정도로 식혀서 마시는데, 생선 요리 때 넣으면 비린내가 없어지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냄새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식후에 마시면 가장 맛이 있고 지방질을 분해하므로 닭백숙에 차잎을 넣고 끓이면 아주 담백한 맛을 볼 수 있다.

 용정차에는 비타민 C와 안기산 등 유익한 성분이 다른 차보다 다량 함유되어 있으며 중국 예방의학 과학원의 연구원이 항암 차로 발표한 17가지 차 중의 하나이다. 용정차는 그중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용정차는 모두 16등급으로 나누어지며 1등급차는 청명(4월 5일) 이전에 것으로 명전(明前)차라 하고 2등급 차는 곡우(4월 20일) 이전에 따는 우전(雨前)이다. 3등급은 5월의 것이고, 그외에 여름과 가을에 따는 차는 쟈스민차나 홍차를 만든다.

 용정차는 개운한 맛이 으뜸이며, 서호 바람을 맞으며 용정차 한잔을 마시는 일처럼 운치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 중국차()에 대해

o 茶()의 종류

 발효 정도에 따라 불발효, 반발효, 완전발효로 구분하며 불 발효는 녹차가 대표적이며 전차, 녹차, 용정차(龍井茶)가 있다. 반 발효는 우룡차(烏龍茶))가 대표적이며, 포종차, 철관음차, 자스민차, 천로차, 오룡차, 보이차 등이 있다. 완전발효 차는 홍차가 있다.

 

o 물의 선택

 "물은 차(茶)의 체(體)이요 차는 물의 신(神)이니 진수가 아니면 그 신이 나타나지 않으며 청차(淸茶)가 아니며 또한 체(體)를 볼 수 없다." 차를 마시는 데 있어서 물 고르기가 가장 중요하다. 차잎이 아무리 좋아도 물이 나쁘면 그 맛을 다할 수가 없다.

 

o 차의 선택

 우리나라의 식사에는 전차가, 중국식 식사에는 오룡차가 어울리며 소중하게 마실 땐 철관음, 울적할 때는 쟈스민이나 개운한 맛의 용정차, 옥로차 등이 좋다.

 

o 차 마시는 방법

 찻잔을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바른 자세로 왼손으로는 차의 밑 부분을 받쳐 들고 소리를 내지 않으며 맛을 음미하며 향을 음미하고 조용히 마신다. 또한 중국음식을 먹을 때는 음식마다 맛을 보면 입 속의 음식 향과 맛을 제거하기 위해 반드시 차를 한모금 마신 후 맛을 보는 것이 음식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것이므로 차를 함께 해야 한다.

 

 

음  식

거지닭(叫花鷄)

 중국은 다양한 음식재료와 종류만큼 음식명 또한 외국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뱀요리에 '()'자를 쓰고 닭고기 요리에 봉황 ''자를 붙이는 것은 어찌보면 문학적이기 까지 하다.

 '거지닭'은 중국어의 '叫花鷄'의 의미를 그대로 번역한 요리명으로 이 요리가 만들어지게 된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옛날 중국에 거지들이 먹을 것이 없어 다른 집에서 몰래 닭서리를 하였는데 마땅히 숨길 곳이 없어 닭을 잡아서 땅속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어느날 그곳을 지나던 황제가 어찌하여 노숙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그 닭을 묻어두었던 곳에 불을 지폈고 맛있는 냄새가 나서 땅을 파보았더니 그 속에 노릿노릿 익은 닭이 있어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닭을 진흙에 싸서 구워먹는 정식 요리로 정착하였는데 현대에서의 거지닭은 닭의 내장을 발라낸 후 그 속에 버섯을 비롯한 야채등을 넣고 연잎으로 싼 후 그 위에 진흙을 발라 구워서 만든다고 한다.

 

<적벽부>의 소동파가 즐겼다는 돼지고기 요리

   동파육(東坡肉)

 중국의 음식을 더욱 맛있게 먹는 방법 하나. 바로 음식이름의 의미를 알고 먹는 것이다. 한국 음식이 주로 음식에 쓰인 재료에서 요리명이 나오는 것과는 달리 중국은 음식 재료의 이름을 따오더라도 뱀 요리에는 용을 닭이면 봉황을 요리명에 붙여 문학적으로 이름을 짓는다. 또한 유명인물의 '호'등을 붙이기도 하는데 동파육은 바로 이러한 예이다.

 중국 북송 때 <적벽부>를 지은 소동파라는 시인의 호를 따서 지은 요리로 이 시인은 뛰어난 문학가이면서도 요리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 직접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는데 이 요리를 소동파가 개발해 냈다는 얘기도 있고 소동파가 이 요리를 즐겨서 이름이 붙었다는 소리도 있다.

 일종의 돼지고기 조림으로 돼지의 삼겹살이나 오겹살 부위를 썰어 기름에 튀긴 후 간장 양념에 오래도록 조려서 먹는 요리이다.

 

 

항주의 미녀중국 4대 미인

 전통적으로 중국의 미인은 크게 두지역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항주미인으로 옛부터 이곳 출신의 여자는 황비(皇妃)로서 이름을 떨쳤다. 항주는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도시이면서 비단과 물로 유명한 곳이다. 항주의 미인은 항주를 대표하는 또다른 명물이라 할 수 있는데, 중국의 대표적인 미인인 서시(西施)가 이곳 출신이고 삼국지연의에서 나오는 오(吳)나라의 미인들 대부분 이쪽 지방 출신이라고 전해 내려온다. 이들은 주로 상해나 북경의 대도시로 진출하여 영화계에 많이 진출하고 있으며 스튜어디스로도 많이 활약하고 있다.

 또 하나는 동북미인으로 남남북녀(南男北女)라는 말도 있으며, 중국영토 경영에 함께 경쟁했던 소수민족의 미인들이 선조다. 동북미인은 요녕, 길림, 흑룡강의 동북3성 출신으로서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큰 키에 피부가 희다. 장점은 성격이 시원시원해서 남자들과도 잘 통하며, 단점으로는 척박한 환경에 의해 피부가 거친 편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미인은 흑룡강성 출신의 미인으로 중국의 아나운서들 중에는 이곳 출신이 많다. 또한 세계적인 배우인 공리도 요녕성의 심양 출신이다.

 

 

중국의 4대 미인

✜ 서시(西施)

 하(夏)왕조의 말희, 은(殷)왕조의 달기와 더불어 주(周)나라의 서시는 지금의 항주 출신으로 나라를 말아먹은 미녀로 불린다. 서시가 웃는 것을 보기위해 황제가 변방의 봉화를 올렸다는 고사와 비단찢는 소리를 좋아하여 수많은 국고를 탕진하며 비단을 찢었다는 이야기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그러나 서시는 주나라를 침입한 흉노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오늘날에는 중국의 4대미인 중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고 있다.

 

왕소군(王昭君)

 왕소군은 전한 원제(元帝) 조정의 후궁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그림을 본 원제에게 간택되었고, 오늘날에는 왕소군이 고국 한나라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처절하게 표현되어있는 유명한 시가 남아있다.

 

 

초선(貂蟬)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연환계의 주인공이다. 절세미인으로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기로 결심하고 결국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했지만, 여포가 죽을 때까지 그의 첩으로 지냈다. 또한 초선의 운명이 가인박명(佳人薄命), 즉 여자의 용모가 아름다우면 운명이 짧거나 기구하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더욱 그녀의 미모에 많은 호기심이 여전히 남아있다.

 

양귀비(楊貴妃)

 동양의 클레오파트라로 불리는 당 현종의 총애를 받다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미인이다. 원래 양귀비는 현종의 며느리였으나 35세의 나이를 뛰어넘는 로맨스로 오늘날까지도 유명하다. 양귀비의 모습은 백락천의 "장한가"에 의하면 글래머에 닮은 꼴이라고 한다. 하지만 체구는 작은 편이어서 당현종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새처럼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 전설도 있다.

 

 

항주의 기후(°C)

도시명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항  주

(杭 州)

최고평균

8.1

9.1

13.7

20.1

25.2

28.8

33.4

32.9

27.7

22.7

16.9

10.8

최저평균

0.5

1.8

5.6

11.3

16.4

21.0

24.9

24.4

20.1

14.0

8.0

2.5

평   균

4.0

5.1

9.3

15.4

20.4

24.4

28.5

28.0

23.4

17.7

12.0

6.2

강우량mm

66.2

90.2

123.6

134.2

154.4

215.5

138.3

158.3

169.8

80.8

63.6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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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명소

西湖(서호)

 항주는 西湖(서호)가 있음으로써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玉龍(옥용)과 金鳳(금용)이 은하수에서 만든 진주가 떨어져 호수가 되었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春秋(춘추)시대 말기 吳王 夫差(오왕 부차)와 越王 句踐(월왕 구천)이 항주와 함께 美女(미녀) 西施(서시)를 차지하려고 벌인 싸움은 너무나 유명하다. 서시는 서호를 보고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엔 더욱 좋아요"하고 애교를 피웠다고 한다.

 

 西湖는 남북이 3.3km, 동서가 2.8km, 주위가 15km 정도 되는 인공호로 호수면을 가르는 白堤(백제)와 蘇堤(소제)라는 두제방에 의하여 外湖(외호), 內西湖(내서호), 岳湖(악호), 西里湖(서리호), 小南湖(소남호)로 나뉘어져 한결 아늑한 느낌을 준다.

 

 서호는 항주 서쪽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시에 대해서는 실제 인물인지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월나라 왕인 구천(勾踐)이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던 인물로, 결국은 구천의 계략대로 오나라왕 부차가 서시의 미모에 빠져 나라일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오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상 양귀비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미인으로 꼽힌다.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다. 호수의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서호 안과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명소 10가지를 서호 10경(西湖十景)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교잔설(斷橋殘雪),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요(蘇堤春曜), 곡원풍하(曲院風荷), 화항관어(花港觀魚)등이다.

 

 단교잔설은 중국의 오래된 신화고사인 백사전(白蛇傳)에서 백소정과 허선이 만난 무대가 된 곳으로 옛날에는 다리 중간에 문이 서 있었다고 한다. 문 위에는 처마가 얹혀있었는데 눈이 내리면 눈이 처마위로 쌓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 쌓인 다리가 문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것 같이 보여 단교(斷橋)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평호추월은 넓이 400㎡의 정원으로 호수 수면과 높이가 같아 평호(平湖)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소제춘요는 소동파가 항주에 지사로 부임했을 때 쌓은 둑(제방)으로 사시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봄날 새벽의 경치가 가장 절경이다.

 

 곡원풍하는 소제춘요의 북서에 펼쳐진 풍경으로 여름에 연꽃이 피어 특히 아름답다.

 

 화항관어는 봄에 모란꽃을 보며 용정차를 마실 수 있는 운치있는 공원으로 누각 등이 세워져 있으며 수많은 모란이 피어있는 목단원(牧丹園)이 유명하다.

 

 西湖엔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예로부터 西湖十景(서호십경)이라 하여 다음의 열가지를 최고로 꼽고 있다.

 

西湖十景(서호십경)

① 蘇堤春曉(소제춘효) -

 

北宋의 시인 蘇東坡(소동파)가 쌓은 蘇堤(소제)로 그는 四時사 모두 좋으나 봄은 새벽을 제일로 친다고 했다.

② 平湖秋月(평호추월) -

白堤 서쪽 끝에 호수면과 거의 같게 만든 조망대

③ 斷橋殘雪(단교잔설) -

 

세로로 나뉘는 白堤의 기점으로 중국민화  "白蛇傳(백사전)"에 나오는 白素貞(백소정)과 許仙(허선)이 만나는 곳.

④ 曲院風荷(곡원풍하) -

서북쪽 碑亭(비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호수에 연꽃 향기 그윽한 곳.

⑤ 花港觀漁(화항관어) -

5백여 그루의 모란을 비롯한 1만 5천그루의 꽃나무가 가득한 곳에 잉어가 헤엄치는 곳

⑥ 柳浪聞鶯(유랑문앵) -

서호의 동남쪽에 버드나무 가지사이로 들리는 꾀꼬리 소리가 고운 곳

⑦ 雙峰揷雲(쌍봉삽운) -

호수 남서쪽에 있는 南高峰(남고봉)과 서북쪽에 있는 北高峰(북고봉)이 산수화처럼 보인다.

⑧ 三潭印月(삼담인월) -

 

서호안에 섬이 있고, 또 그 섬속에 호수가 있는데 달밤에 배를 타고 술잔을 기울이면서 보면 특히 아름답다.

⑨ 南屛晩鐘(남병만종) -

 

南屛山(남병산) 중턱에 있는 淨慈寺(정자사)와 靈隱寺(영은사)에서 울려오는 저녁 종소리. 지금은 종이 없어져 종소리를 들을 수 없다.

⑩ 雷峰夕照(뇌봉석조) -

 

雷峰山(뇌봉산) 꼭대기에 있던 雷峰塔(뇌봉탑)에 석양이 비치는 광경. 지금은 탑이 없어졌다.

 

삼도(三島)

소영주. 삼담인월(三潭印月)

 소영주는 서호 세 개 섬중에서 제일 큰 섬이데 1607년에 건설되었다. 그 특색은 호수중에 섬이 있고, 섬안에 호수가 있다는 것이다. 소영주 남쪽 끝에 있는 세 개의 높이가 2m 되는 돌탑은 1621년 소동파가 건설한 세 개의 탑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탑마다 다섯 개의 둥근 구멍이 있는데 달밤에 등불을 거기에 넣어둔다. 그러면 등불과 물속에 비친 달이 서로 어울려 빛나는데 이로하여 삼담인월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杭州-서호-소영주.JPG

 

호심정(湖心亭)

 세 섬중에 제일 일찍 영조한 섬인데 그중의 호심정은 1552년에 건설한 것이다. 호심정 앞에는 청나라 건륭황제가 쓴 '충이(蟲二)'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는데 이는 이곳의 '바람과 달에 변이 없다(風月無邊)'는 뜻이다.

 

완공돈(阮公墩). 완돈환벽(阮墩環碧)

 완공돈은 1809년 청조 절강순무(巡撫) 완원이 지은 것인데 이로 인해 이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서호 삼도 중 제일 작은 섬이다. 여름철이면 완돈환벽장(阮墩環碧莊)에는 밤 유람 문예활동이 있다.

 

삼제(三堤)

소제(蘇堤). 소제춘효(蘇堤春曉)

 길이가 2.8km인 소제는 북송 소동파(1037~1101)가 1089년에 항주 지주(知州)로 있을 때 호수를 준설한 후 호수바닥에서 파낸 진흙을 쌓아서 만든 것이다. '서호경치에 여섯 적교(吊橋)가 끼워 있고, 복숭아 나무와 버드나무가 우거져있다.'는 것은 곧 이곳이 봄날을 이르러 하는 말이다.

 

백제(白堤). 단교잔설(斷橋殘雪)

 백재는 서호 삼제중에 역사가 가장 오랜 제방이다. 이는 백거이(白居易)(772~846)가 항주 태수(太守)로 있을 때 쌓은건데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백(공)제(白(公)堤)라 한다.

 단교(斷橋)는 백제 동쪽 끝에 있다. 민간전설 <백사전(白蛇傳)>중에 백씨부인과 허선(許仙)이 생사이별을 거친후 다시 만난곳이다. 단교잔설(斷橋殘雪)은 유명한 西湖十景(서호십경)중의 하나이다.

 

양공제(楊公堤)

 길이가 3328m인 양제공은 명나라 정덕(正德) 삼년(1508년), 항주 지부(知府) 양맹영(楊孟瑛)이 호수를 준설한 후 호수바닥에서 파낸 진흙을 쌓아서 된것이다. 2003년 다시 건설되었다.

 

고산(孤山). 서령인사(西泠印社)

 고산은 서호의 유일한 천연적인 섬인데 유람구역내에는 고대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남송(南宋) 리종(理宗)과 청나라 강희(康熙), 건륭(乾隆)등 황제들이 여기에 행궁(行宮)을 두고 있었다.

 서령인사(西泠印社)가 있는 곳은 고산의 정수부분으로서 그 교묘하고 우아한 강남원림 예술로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다. 당조의 백거이(白居易)부터 남송의 소동파(蘇東坡), 청조의 정경(丁敬)등 서령팔가(西泠八家)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인들이 여기에 발자취를 남겼다. 서령인사는 1904년에 건설되여 백여년의 역사가 되었는데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금석전각(金石篆刻), 서법, 회화, 학술단체로서 "천하제일사(天下第一社)"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서령인사내에 있는 동한(東漢) 초기의 "삼로휘자기일비(三老諱字忌日碑)"는 지금껏 절강에서 발견된 비석중에서 제일 역사가 오랜 비석이며 또 화엄경(華嚴經)탑등 고대 유적들이 남아 있다.

 

 

西湖의 전설

 옛날 은하수 동쪽에는 玉龍(옥룡)이, 서쪽에는 金鳳(금봉)이 살고 있었다. 이 두 마리의 새는 어느날 은하수의 仙島(선도)에서 흰보석 하나를 발견한다. 그들이 이 보석을 1년 동안이나 열심히 손질한 끝에 이 보석은 반짝반짝 빛나는 훌륭한 보석이 되었다. 그런데 이 보석이 비치는 곳은 모두 경치가 좋은 곳이 되고 사람들에게도 풍성한 열매를 안겨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天宮(천궁)의 西王母(서왕모)는 이를 탐내 天兵(천병)을 보내어 玉龍(옥룡)과 金鳳(금봉)의 사이를 갈라 놓고 보석을 빼앗았다.

 얼마 후 그 보석이 西王母(서왕모)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안 玉龍(옥룡)과 金鳳(금봉)은 勇躍天宮(용약천궁)으로 쳐들어가 마침내 西王母(서왕모)를 굴복시켰다. 바로 그때 西王母(서왕모)가 "앗"하고 놀라서 손을 떼는 순간, 그 보석은 하계로  떨어져 서호가 됐다고 한다. 그  뒤를  쫒아온 玉龍(옥룡)과 金鳳(금봉)도 각각 玉龍山(옥룡산)과 金鳳山(금봉산)이 되어 계속 서호를 수호해 왔다고 한다.

 

 

岳廟(악묘)

 金나라와 맞서 싸운 宋나라의 영웅 岳飛(악비, 1103~1142)의 墓(묘)가 있는 곳. 북송이 멸망할 무렵 금나라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의용군에 가담하여 큰 활약을 한 공로로 장군이 되었다가 그 후 남송 때에 '악가군(岳家軍)'이라는 군대를 이끌고 많은 무공을 세웠던 명장이다.

 당시 금나라 군사들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의 깃발만 보고 후퇴할 정도로 악비를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후 악비는 금나라와의 화평론을 주장하는 진회(秦檜), 장준(張俊)에 의해 무고한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이 악비묘는 남송 가정(嘉靖) 14년(공원 1221년)에 처음 건축되었다.

 악묘의 대문을 지나면 악비의 동상이 있는 충렬사가 있고 '심소천일(心昭天日: 마음이 하늘의 해처럼 밝다.)'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대전으로 들어가면 높이 4.5m에 달하는 악비의 채색 동상이 보인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고 긴 칼을 차고 앉아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기골이 장대하고 헌걸찬(매우 풍채가 좋고 의기가 당당함) 영웅의 모습이다.

 

 동상 위 편에는 악비가 썼다고 하는 '환아하산(還我河山: 나의 강산을 돌려달라.)'이라는 금색 글귀가 있다. 이 글에는 잃어버린 우리 강산을 되찾아오겠다는 악비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동상의 좌우에는 '벽혈단심(碧血丹心: 푸른 피에 붉은 마음)', '정충보국(精忠報國: 정성과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한다)', '충의상소(忠義相昭)', '호기장존(浩氣長存)'이라고 쓴 글귀들이 보인다. 이러한 글귀를 통해 악비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당 안에는 악비의 생애를 벽화로 그려 놓은 것이 있다. 그 중에서 악비의 노모가 출전을 앞둔 악비에게 무공을 세우고 돌아오라는 뜻으로 악비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는 벽화가 인상적이다.

 송나라 고종은 악비가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무공을 세운 것을 치하하기 위해 '정충악비(精忠岳飛)' 네 글자를 직접 써서 깃발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악비는 나라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잃어버린 국토를 다시 찾겠다는 의지를 담아 자신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묘도에는 문무용(文武俑), 석마(石馬), 석호(石虎), 석양(石羊) 등이 늘어서 있고 중앙에 악비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앙에 '송악악왕묘(宋岳卾王墓)'라고 쓰여 있는 곳이 악비묘이고, 오른쪽에 '송계충후악운묘(宋繼忠侯岳云墓)'라고 쓰여 있는 곳은 악운(岳云)의 묘이다. 악운은 악비의 아들이다. 무덤의 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편이다.

 

 악비의 무덤 앞에는 악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죽게 한 진회(秦檜), 진회의 부인 왕씨, 만준설(萬俊卨), 장준(張俊) 네 사람이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있다. 이곳에 오는 중국인들은 민족적 영웅 악비(岳飛)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 간신배들에게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기도 한다. 그래서 철 창살에 갇혀 있는 동상 위에는 침을 뱉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조선시대 김인후(厚, 1510~1560)는 <송사(宋史)>를 읽다가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인 대목을 보고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시대의 충신과 소인이 어찌 나에게 관계되랴만, 자연히 서로 느껴 부질없이 슬피 읊조리네"라는 시를 짓고는 속이 상해서 실컷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중국 내에서는 이렇게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악비와 악비를 죽게 한 진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송나라 때 오랑캐이자 야만족으로 여겨온 금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울 것을 주창한 악비보다는 금나라와의 화해를 주창했던 진회의 외교정책이 타민족을 대거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민족끼리 내분을 조장한 악비는 더 이상 중국의 영웅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靈隱寺(영은사)

 항주 서북쪽에 위치해 있고, 비래봉(飛來峰)을 마주하고 있다. 비래봉에는 10~14세기 경에 만들어진 석불 330여개가 전시되어 있다. 영은사는 동진(東晉) 시대에 인도 승려 혜리(慧理)에 의해 지어졌으며, 선종 10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천왕전(天王殿)에는 "云林禪寺(운림선사)"라고 쓰여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청대 강희(康熙) 황제의 자필로 알려져 있다. 강희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에 들러서 북고봉(北高峰)에 올랐는데, 구름이 자욱하고 안개가 덮인 곳 속에 영은사가 있는 것을 보고 이 네 글자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불공을 드리기 위해 몰려든 중국인들로 늘 붐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높이 33.6m의 중국 저명한 건축물중 하나다. 보전안에는 24.8m의 여래불상이 있는데, 1956년에 절강미술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만든 걸작이다. 대전 양 옆에는 20존자천불상이 있고, 대전 앞에는 송대에 건축된 8각 9층석탑이 있다.

 대웅전 뒤쪽에는 100여 보살들이 모셔져 있는데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도 있다.

 약사여래전에는 월광, 일광보살이 사리보탑을 들고 있으면 주위에는 12지신상이 모셔져 있다. 12지신상은 저마다 자기 띠에 좋은 무기를 들고 있는데 개는 긴 칼을, 돼지는 짧은 칼을 들고 있다.

 영은사의 볼거리 중 가장 유명한 비래봉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209m의 봉우리로, 인도에서 날아왔다는 데서 비래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암벽상에는 오, 송, 원에 이르는 석각조상 330여개가 새겨져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송대의 것인 미륵좌상으로 얼굴이 개성적이고 독특하다.

 영은사내에는 조그마한 계곡이 있어서 특히 비가 오면 사원 전체가 안개에 쌓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계곡옆의 바위에는 조그마한 불상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어서 산책을 하며 꼼꼼히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文化革命(문화혁명) 때는 이곳에 들이닥친 紅衛兵(홍위병)들이 "구시대의 잔재를 일소하자"고 외치며 이 절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온건파들이 이를 막으며 주은래 수상에게 전문을 보내 주은래의 말 한마디로 이 절이 수난을 면했다고 한다.

o 개관시간 : 7시 - 17시, 연중무휴

o 가는방법 : 7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하차.

 

 

六和塔(육화탑)에서 보는 錢塘江(전당강)

 六和塔(육화탑)은 970년에 吳越王(오월왕) 錢弘俶(전홍숙, 948~978)이 전당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밖에서 보면 13층인데 실제는 7층에 높이가 59.89m이다.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가면 전단강을 발 아래로 볼 수 있다. 浙江省(절강성) 제일의 강으로 손꼽히는데, "錢江(전강)의 秋濤(추도)"로 유명하다. 해마다 음력 8월 18일(양력으로 대개 9월 23일경) 전후가 되면 일어난다는 바닷물의 대역류 현상은 남미의 아마존강 대역류와 비교된다.

 이 현상은 錢塘江(전단강)의 나팔형상에 원인이 있다. 杭州灣(항주만)으로 흘러드는 하구 근처에는 100km에 달하는 강의 너비가 상류로 거슬러 올라감에 따라 급격히 좁아져서 六和塔(육화탑) 부근에서는 고작 2km에 불과할 정도로 좁아진다.

 게다가 태양과 달의 인력의 영향을 받아 만조시라도 되면이 대역류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파도치는 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한다. 나이아가라의 굉음을 듣는 듯하다."는 서양사람의 감탄사가 유명하다.

 전당강은 안휘성에서 발원하여 절강성을 가로질러 항주 바다에 이른다.

 

 

 

◈ 서호 십경(十景)의 하나인 오산(吳山)

 삼국지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알고 있는 오(吳)나라의 왕 손권이 이 산에 진을 쳤었다 하여 오나라 오(吳)에 뫼 산(山)을 붙여 오산(吳山)으로 이름 붙여진 산으로 항주의 가장 번화한 상업거리인 연안로(延安路) 남쪽에 위치하며 시내까지 산줄기가 뻗어있다. 명향루, 성황각 등의 유명한 건축물 뿐만 아니라 오래된 고목과 기암괴석들, 사원과 신묘, 소동파 같은 유명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유물들이 많이있다. 산위의 성황각에서는 항주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고 좌측으로는 서호, 우측으로는 전당강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볼거리도 많고 경치도 뛰어나 외국 관광객은 물론, 항주 시민들에게도 인기있는 곳이다.

 

성황각(城隍閣)

 높이 41.6m, 7층짜리 고건축물로 오산의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누각의 모든 조형이 남송과 원대의 건축풍격을 따랐으며 황학루, 등왕각, 악양루와 함께 중국의 강남 4대 누각으로 꼽힌다.

 성황각의 1층에 있는 <남송항성풍정도(南宋杭城風情圖)>는 항주시 공예연구소 연구원을 비롯한 장인등 만여 명이 참여하여 2년만에 만든 작품으로 입체적 조소가 남송 시기의 생활풍속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거대한 응회암에 서호의 전설과 십대 민간고사등을 담은 이 조각도는 길이 31.5m에 높이만 3.65m로 1000여 채의 가옥과 3000여 명이 넘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어 그 시대의 중국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2층에는 소동파, 백거이등 항주 역사에서 의미있는 인물 28명의 인물 조각상과 항주의 중요한 역사적 순간들을 묘사한 11개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고, 3층에는 찻집이 4층에서는 항주 시내와 서호, 전당강등의 경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성황묘(城隍廟)

 명나라의 관리로서 항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주신(周新)을 모시는 사당으로 그의 신주가 영험하다 해서 아직도 많이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다. 성황각과 붙어있기 때문에 함께 돌아보기에 좋다.

 

 

항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거리 하방가(河坊街)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의 많은 도시 중 항주(杭州)의 하방가(河坊街)는 항주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동남연해에 위치한 항주는 2200여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데 "하늘에는 천국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는 말로부터도 항주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유구하고 수려한 항주의 문화와 역사풍토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이 바로 항주의 명산 오산(吳山)기슭에 위치한 하방가이다.

 하방가는 길이 460m, 너비 12m의 거리이다. 일찍이 880여년 전 남송(南宋)시기에 항주는 남송의 도읍지였고, 하방가는 당시 항주의 문화센터와 경제무역센터로 아주 번창했었다.

 

 

 오늘날 하방가는 일부 고건물을 보존하고 있는데 양쪽의 건물은 모두 푸른 기와를 올린 목조건물로 찬연한 고색을 자랑한다. 이 거리는 상업과 약방을 중심으로 하고 민간예술도 펼쳐보인다.

 이 거리에서는 명절때마다 상이한 행사를 펼친다. 음력설이 되면 절간장 행사, 랍팔절이면 랍팔절 행사를 비롯해 다양한 문화와 민속풍토를 자랑하고 있어 이 거리에서는 항주 옛문화를 만끽할 수 있다.

 거리의 찻집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사환들도 전통의상인 긴 창파오 두루마기라를 입고 긴 주둥이의 황동주전자로 찻물을 따르고, 직물공예품가게에서는 현장에서 실을 짜서 공예품을 만든다. 심지어 전통 엿을 만드는 사람도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손님의 눈길을 끈다.

 

 하방가 입구에는 청동으로 주조된 미륵보살상과 그 위에 앉거나 선 동자상 100여존이 있다. 많은 관객들이 이 동상앞에서 미륵보살처럼 항상 즐겁기를 빌면서 기념촬영을 한다.

 하방가를 따라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중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보화당(保和堂)이 보인다. 보화당은 항주에서 가장 유명한 약방인데 오래동안 약을 무료로 배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곁에는 1874년에 개업한 호경여당(胡慶餘堂)이 있는데 건물이 청(淸)나라 때의 건물풍격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하방가는 건물도 특색있고 먹거리도 다양하다. 이 곳에는 남송때의 떡을 비롯해 약 100가지의 먹거리가 있는데 수호지 인물의 한 사람인 난쟁이 무대랑(武大郞)이 기름떡을 팔면서 "저는 기름떡을 팔아 아내를 먹여 살려야 합니다. 키는 작고 못 생겼지만 제 아내 반금련(潘金蓮)은 선녀처럼 이쁩니다. 내 힘으로 내 아내를 먹여살리는…" 하면서 싸구려를 외쳐 사람들의 웃음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방가에는 진흙으로 인형을 만드는 사람, 도자기에 조각을 새기는 사람, 풀로 잠자리를 엮는 사람, 엿으로 인형을 만드는 사람 등 민간예술인이 많다.

 아름답고 고색이 찬연한 하방가는 항주 서호(西湖)의 동쪽, 항주 도심에 위치해 있는데 교통도 편리하다.

 

 

소소소(蘇小小)

 소소소는 남조제(南朝齊)는 전당의 유명한 기생이다. 그녀는 외모가 출중할 뿐만 아니라 "첩은 유벽차(油壁車)에 앉고 랑은 청총마(靑聰馬) 탔다. 어디에서 마음을 맺을 소냐, 서릉의 송백이 절개를 보여 준다."는 명구도 남겼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녀가 죽은 후 서령교 옆에 매장하였다. 소소소묘는 남송시기에 처음으로 세워졌다 하는데 청나라 건륭(乾隆)황제 때 묘위에 정자를 세웠다. 그후 이 정자는 여러번 파괴와 재건의 과정을 거쳐, 1988년에 원래의 자리에 지금의 육각정자를 세우고 모재정(慕才停)이라 이름를 지었다.

 지금의 정자 기둥에는 12수의 주련이 쓰여져 있는데 이는 중국 12명의 유명한 서법가의 필적이다. 모재정은 서호 정자 가운데 주련이 제일 많은 정자이다.

 

 

蘇小小墓    소소소묘 - 천재시인 이하(李賀: 장진주(將進酒)라는 시가 유명함)

 

幽蘭露(유란로)                  그윽한 난초에 맺힌 이슬은,

如啼眼(여제안)                  눈물 머금은 눈망울 같다.

無物結同心(무물결동심)       무엇으로 마음 맺어주랴

煙花不堪剪(연화부감전)       아련한 봄꽃 꺾을 수도 없고.

草如茵(초여인)                  잔디는 보료가 되고,

松如蓋(송여개)                  소나무 그늘은 덮개가 되며

風爲裳(풍위상)                  바람으로 치마를 삼고,

水爲珮(수위패)                  물은 옥패가 된다.

油壁車(유벽거)                  그대가 타던 유벽거 수레 

夕相待(석상대)                  저녁까지 기다리지만

冷翠燭(냉취촉)                  차가운 도깨비 불,

勞光彩(로광채)                  헛되이 광채도 약해지고.

西陵下(서능하)                  그대 무덤 아래로

風吹雨(풍취우)                  바람이 비만 흩뿌리네.

 

 

소소소(蘇小小)

 서시가 항주 출신이라는 데서, 중국의 항주는 미녀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서시만큼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오늘날까지 항주를 비롯한 중국 남부에서 사랑을 받는 항주미인이 있으니 그의 이름이 바로 소소소(蘇小小)이다. 아마도 몸집이 크지 않고 아담해서 소소(小小)라는 이름을 얻었을 그녀가 살던 시기는 남제(南齊 479~502)시대로서, 당나라가 망한 뒤에 양자강 남쪽에서 수많은 왕국들이 교대하던 그런 시기였다.

 그녀는 어려서 부모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서령교(西橋) 부근의 이모집에서 자랐는데, 궁핍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기생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답고 총명한 데다, 시와 노래를 잘 불렀던 재기가 넘치는 여자였기에 곧 수많은 남성들의 연모의 대상이 된다. 하루는 소소가 수레를 타고 서호 부근을 구경하다가 호방한 풍모를 갖춘 청년을 만났다. 그는 한 필의 푸른 준마(청총마:靑馬)에 올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소소는 그의 빼어난 모습에 한 눈에 마음을 빼앗겼다. 청년도 수레(油壁香車)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소소를 보자마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 청총마를 타고 수레를 쫓아왔다. 소소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妾乘油壁車(첩승유벽거) 첩은 유벽거를 타고 있고,

跨靑聰馬(랑과청총마) 낭군은 청총마에 올라 계시니

何處結同心(하처결동심) 어느 곳에서 마음을 함께 나눌까요?

西陵松栢下(서릉송백하) 서릉의 송백 아래에서나.

 

 자기 집이 서릉 숲에 있으니 알아서 찾아오라는 유혹의 노래였다. 소소는 노래를 부른 후 수레를 타고 가버렸다. 그 청년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져 예물을 준비하고 서령교 입구로 소소를 찾아왔다. 청년은 재상이었던 완도(阮道)의 아들 완욱(阮郁)으로, 두 사람은 깊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여자의 신분이 기생임을 안 완욱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며 그를 서울로 불러들이자, 소소는 그 이후부터 온종일 외출을 삼간 채 집안에서 슬퍼하기만 한다.

 세월이 흘러 소소가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고 수레를 타고 나섰다가 연하령(烟霞嶺) 아래 무너진 사당 옆에서 한 청년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청년은 옷차림은 남루했지만 비범하게 보여 반드시 공명(功名)을 날릴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녀는 달려가 이름을 물었다. 서생은 갑자기 생면부지의 젊은 여자가 물어 오자 아주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포인(鮑仁)이라고 합니다." 소소가 말했다.

 "당신에 비록 이곳에 계시지만 반드시 스스로 공명을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공부를 하시려면 서울로 가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은자 100량을 여비로 주고 서울로 가도록 하였다.

 시를 잘 짓고 노래를 잘하는 소소의 명성은 계속 솟아올랐지만 그녀는 아무나 부른다고 응하지 않았다. 하루는 맹랑(孟浪)이라는 다른 지방의 관찰사(觀察使)가 이 지역을 지나다가 소소의 명성을 듣고는 서호에 큰 배를 띄우고 술과 안주를 준비한 다음 소소를 불렀다. 그러나 소소는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다시 부르자 이번에는 지난밤 잔치에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며 피했다. 3일째 되는 날, 심부름꾼이 다시 가자 이번에는 아직도 술이 깨지 않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세 번이나 퇴짜를 맞은 맹랑은 그녀를 혼내줄 방법을 찾고 있었다. 걱정이 된 주위사람들의 권고로 마지못해 맹랑을 찾아갔다. 맹랑은 여러 손님들과 매화를 바라보며 술을 마시다가 아주 기분이 나쁜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은 살려고 온 것인가? 아니면 죽으려고 온 것인가?"

 소소가 웃으며 "살고 싶지 죽고 싶을 리가 있습니까? 그러나 살리고 죽이는 것이 어르신에게 달려 있으니 소녀가 어찌 마음대로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마음이 누그러진 맹랑이 벌로 매화를 제목으로 한 시를 한 수 지으라고 명한다. 소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시를 읊었다.

 

梅花雖傲骨(매화수오골) 매화가 비록 오만하다 하여도,

敵春寒(즘감적춘한) 어찌 감히 봄이 춥다고 덤비겠는가?

若還分紅白(약환분홍백) 만약에 홍백으로 나누어졌다면,

還須靑眼看(환수청안간) 하물며 푸른 눈으로 바라보겠는가?

 

 "연약한 자기가 어떻게 감히 관리에게 덤비며, 딴 마음이 있다면 어찌 눈을 흘기지 않고 제대로 바로 보겠느냐?"하는 내용을 짧은 시로 나타낸 것이다. 죽림칠현의 하나인 진(晉)의 완적(阮籍)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푸른 눈동자로 바로 보고,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 눈동자를 뒤집어 흰자위가 보이게 했다는 이야기(여기서 백안시(白眼視)라는 말이 나왔다)를 교묘히 활용한 것이다. 결국 맹랑은 푸짐한 상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래 몸이 허약한데다 완욱이 떠난 후 상심이 커지면서 결국 병이 깊어져 겨우 열아홉의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는 유언을 통해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서호 변 서령교(西橋) 옆에 묻어달라고 한다. 그런데 소소가 죽고 나서 3일 후 갑자기 심부름꾼이 말을 타고 나타나 소소를 찾는데, 활주자사(滑州刺史) 포상공(鮑相公)이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소소가 사흘 전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포인(鮑仁)은 소복을 입고 황급히 달려와 그녀의 관을 잡고 울면서 말했다.

 "소소소여! 당신은 진정으로 혜안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나 포인이 세상에 나올 수가 있었던 것은 당신과 같은 지기가 아니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나의 지기가 없으니 누구에게 공명을 이룬 것을 자랑하겠습니까?"

 포인은 비통한 마음을 안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서령교 옆에 좋은 땅을 골라 그녀를 묻고 묘비명을 써주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녀의 묘 위에 "모재정(慕才亭:재주를 연모하는 정자)"을 건립하고 기둥에 다음과 같은 대련을 남겼다.

 

千載芳名留古迹(천재방명류고적) 수많은 아름다운 이름들이 옛 자취가 되었지만

六朝韻事著西(육조운사저서령) 육조의 노랫소리는 서령에서 아직도 맴도네.  

 

 이 일이 알려진 이후 내노라 하는 시인들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를 짓느라 너무 고민을 많이 해서 24살 때에 머리가 백발이 된 뒤에 27살에 요절한 당나라의 천재시인 이하(李賀: 장진주(將進酒)라는 시가 유명함)는,

 

幽蘭露(유란로) 그윽한 난초에 맺힌 이슬은,

如啼眼(여제안) 눈물 머금은 눈망울 같다.

無物結同心(무물결동심) 무엇으로 마음 맺어주랴

煙花不堪剪(연화부감전) 아련한 봄꽃 꺾을 수도 없고.

草如茵(초여인) 잔디는 보료가 되고,

松如蓋(송여개) 소나무 그늘은 덮개가 되며

風爲裳(풍위상) 바람으로 치마를 삼고,

水爲佩(수위패) 물은 옥패가 된다.

油壁車(유벽거) 그대가 타던 유벽거 수레

夕相待(석상대) 저녁까지 기다리지만

冷翠燭(냉취촉) 차가운 도깨비 불,

勞光彩(로광채) 헛되이 광채도 약해지고.

西陵下(서능하) 그대 무덤 아래로

風吹雨(풍취우) 바람이 비만 흩뿌리네.

 

 생전에 소소가 타던 마차하며 그의 시에 나오는 결동심(結同心)이란 어귀하며 이런 것들을 살려서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숨져간 한 여인을 처연하게 조문하고 있다.

 유명한 백거이(白居易)도 시를 지어 소소를 그리워하였다.

 

蘇州楊柳任君誇(소주양류임군과) 소주의 수양버들 자랑하고파

更有錢塘勝館娃(갱유전당승관와) 다시 전당에 오니 역시 멋있군

若解多情尋小小(약해다정심소소) 옛 정 풀려고 소소를 찾는다면

綠楊深處是蘇家(녹양심처시소가) 버드나무 우거진 곳이 거기라네

 

 

◈ 용정차를 달이는 샘물, 호포천(虎跑泉)

 호포천은 시내에서 5km 떨어진 서호 남쪽의 대자산 정혜선사(定慧禪寺)내에 있는 유명한 샘물이다.

 이 샘에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호포(虎跑)라는 이름도 이 전설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옛날 당나라 때에 성공(性空)대사가 이 산에 유람을 왔다가 경치는 매우 아름다운데 산에 샘이 없어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신선이 나타나서 호랑이 두마리가 샘을 팔것이라 얘기했고 다음날 과연 두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 맑고 깨끗한 샘을 파 놓았다고 하는 이야기다.

 호포천은 진강의 중냉천, 무석의 혜천에 이어 '천하의 제 삼천'이라 불리며, 이곳의 샘물은 광물질이 적고 분자의 밀도가 높아 맛이 순하다. 이 물에 용정차를 달이면 맑고 향기로운 각별한 맛이 난다고 하여 이 둘을 서호쌍절(西湖雙絶)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주변의 경관도 수려해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o 가는방법 : K4번, 504번 버스와 5번 관광버스를 타고 호포(虎跑)역에서 하차

o 입장료 : 15위안

 

 

龍井(용정)

 용정은 유명한 용정차의 명산지이다. 서부 서산 봉황령(鳳凰領)에 위치해 있으며, 서호 풍경구 3대 샘물 중의 한 곳이다. 샘물은 암석 틈 사이에서 나와서 맑고 깨끗하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용정의 물이 깨끗하여서 이 물로 용정차를 끓이면 그 향기과 맛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한다. 또한 수면 위에서 움직이는 분수령을 발견할 수도 있다.

 龍井(용정)의 물은 虎砲(호포)의 물과 마찬가지로 표면장력이 큰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을 세게 저어도 거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으며, 주화를 넣어도 가라앉지 않고 뜬다.

 

 

동방문화원(東方文化院園)

 항주의 동방문화원은 국가에서 제정한 AAAA급 풍경구로, 전당강(錢塘江)과 부춘강(富春江), 포양강(浦陽江)등 이 세강의 합류지점에 있는 소산구 의교진 양기산(蕭山區義橋鎭楊岐山)의 남쪽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절강성의 중강건설그룹이 투자하여 개발한 곳으로 투자액만 9.5억원(인민폐)를 넘으며, 그 안은 세기광장, 불교지역, 도가지역, 레저구역, 작게 만든 후룬베이얼 초원, 식물원등 8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항주의 중요한 관광지로 항주시에서 소산까지 15km 거리에 떨어져 있을 뿐이어서, 이동이 편리하다.

 동방문화원은 주역의 8괘에 따라 분포되어 있으며, 유가, 불가, 도가 3가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고, 2,728m 길이의 화려하고 예술적인 긴 통로가 문화원을 가로 질러져 있다. 동방의 전통적인 문화가 풍부하게 드러나 있는 곳이다.

 풍부한 문화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동방문화원은 이미 국가에 의해 세계 종교학숙 연구기지, 중국불교문화전시센터, 중화민족 동방문화원, 중화 청소년, 아동 문화예술활동 기지로 지정되었다.

 

 

경항운하(京杭運河)

 대운하(大運河)라고도 일컬어지는 경항운하("운하"라고 약칭하기도 함)는 중국에서나 세계에서 가장 긴 인공운하이다. 북쪽 끝은 북경시이고, 남쪽 끝은 절강성 항주시(杭州市)로 총길이는 1,794km에 이른다.

 경항운하는 북경·천진·하북·산동·강소·절강 등 6개성과 시를 흘러지나며 해하(海河)·황하·장강·회하(淮河)·전당강(錢塘江) 등 5개 수계를 관통하여 남북 교통운수에서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경항운하는 일반적으로 아래의 7개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1. 통혜하(通惠河) : 북경에서 통현(通縣)까지

 2. 북운하(北運河) : 통현에서 천진(天津)까지

 3. 남운하(南運河) : 천진에서 임청(臨淸)까지

 4. 노운하(魯運河) : 임청에서 대아장(台兒庄)까지

 5. 중운하(中運河) : 대아장에서 회음(淮陰)까지

 6. 이운하(里運河) : 회음에서 양주(揚州)까지, 중국 최초의 운하

 7. 강남운하(江南運河) : 장강을 지난 후 진강(鎭江)에서 항주까지

 

 경항운하는 많은 하천과 호소를 이용하여 수로를 건설한 것이다. 춘추시대 말기 오(吳)나라가 제(齊)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양주(楊州) 부근에서 강회(江淮)의 수로를 관통시킨 것이 최초의 운하로 추정된다.

 그 후 이것을 토대로 부단히 남북으로 연장하였으며, 특히 수(隋)나라와 원(元)나라 때에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확장공사에 의해 오늘날의 경항운하의 기본적인 틀이 만들어졌다.

 근대 이후 행상운수와 철도운수의 발달로 경항운하의 효용이 다소 떨어지기도 하였지만,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는 다시 그 가치를 인정하여 수로를 넓히고 수문을 증설였다. 지금도 강소·절강 경내의 운하구간은 계속 중요한 수상운수선으로 쓰이고 있다. 남방의 물을 북방에 끌어들이는 공정의 완성과 함께 대운하는 다시 발전할 것이다.

 

 

송성가무쇼(宋城千古情)

 5000만원 자금의 투자로 이루어진 대형가무공연 "송성 천년의 정"은 프롤로그 "양정(良정)의 빛" 과 "송궁연무(宋宮宴舞)", "금과철마(金戈鐵馬)", "아름다운 서호. 아름다운 전설", "지구촌의 모임"등 4막으로 되어 있다. 시간적으로는 문명의 서광이 처음 나타난 신석기시대로부터 시작하여 2006년 항주 세계휴한박람회의 아름다운 정경을 그려본다. 채색 레이저 쇼는 천여개의 PAR전등과 스모그 기계로 꿈과 환상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백미터 길이의 고리형 회전 화막(畵幕)은 그림중에서 마음껏 즐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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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여개의 귀빈석 이동 의자, 사람을 숨길 수 있는 뇌봉탑(雷峰塔), 모빌 금산사(金山寺)등은 무대를 생동하게 하고 공연을 더욱 정채롭게 가꾸어 준다.

 

 서론

 본론

 1. 송성 가무쇼란 ? (소개)

 2. 제 1막 (항주의 빛)

 3. 제 2막 (금과철마-전쟁)

 4. 제 3막 (아름다운 서호, 아름다운 전설)

 5. 제 4막 (세계는 여기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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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제 1막 항주의 빛

 지금으로부터 약 천년 전,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었던 왕조 중 하나인 송조시대에, 항주 송성을 건립하여 번화한 항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송나라 때 항주는 100만 인구를 갖고 있는 대도시였고 곳곳마다 노래와 춤으로 태평성대를 구가했다. 이 모습을 송나라의 황제가 황궁에서 생일 연회를 거행하는 모습으로 연출하여 각 국의 문무 대신들이 모두 생일 축하차 오고 궁전에서 다채로운 서커스와 아름다운 가무를 여는 것으로 보여준다.

 

》제 2막 금과철마(전쟁)

 남송시대의 영웅 악비의 무용담을 그린다. 송나라가 금나라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악비가 군민들과 금나라와 용감한 전투를 벌여, 승전한 내용을 담고 있다.폭포가 실제 폭포처럼 솟아나오고, 말이 무대를 달리고 대포가 쏘아지는 등 실제 전쟁장면을 방불케 하는 무대 연출이 매우 뛰어나다.

 악비와 당시 상황을 소개해보겠다. 악비는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 한족들의 영웅이다. 악비는 농부출신의 12세기 초 여진의 금나라에 맞서 싸운 남송의 한족 명장이다. 당시 송나라는 금나라의 공격으로 수도 개봉을 빼앗기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마저 포로로 잡혀가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남송의 이름으로 왕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금나라 군사의 대공세로 위기에 빠진 군을 이끌고 항전에 나서 여러 번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1134년 그는 북벌에 나서 호북성에서 하남성까지 진격해 위난에 빠진 송나라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었다. 모두 세 차례 북벌에 나선 그는 한때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 인근 정주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금나라군 에서는 "오히려 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가군(악비의 군대)을 무너뜨리기는 정말 힘들다"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 정도였다.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전장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반면, 악비 장군은 간신들의 모함에 걸려 살해당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이 악비를 민족 영웅이 아니라 충성스런 장군으로 역사적 위치를 격하시켜서 많은 논란이 되었다. 최근 중국은 악비가 무찌른 금나라 역사도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악비가 한족의 민족영웅으로 남으면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중국에서 한족 중심주의를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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