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集安, JIAN)                                                       ☞ 집안관련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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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集安)시는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의 현재 지명으로 길림성 동남쪽에 위치한다. AD 3년경 고구려 제 2대왕인 유리왕이 졸본성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였는데 427년까지 가장 오랜기간(424년) 수도로서 가장 찬란했던 번성기를 누렸던 만큼 1만여개의 고분과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어 이곳이 국내성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

 북온대 대륙성기후로 사계절이 뚜렷하고 연평군기온은 6.5℃이며, 강우량은 약 1000㎜ 정도이다.

 유구한 역사가 말해 주듯 압록강과 훈강 수로의 교통, 내륙과 연결되는 육로 및 북한과 이어지는 철도 등이 잘 발달되어 있으며,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광개토대왕비, 태왕릉, 장군총 등 고구려의 많은 문화 유산이 산재하고 있어 융성했던 시대의 발자취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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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 명소

광개토대왕의 능(太王陵)

 광개토대왕비에서 서쪽으로 약 200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남아있는 높이만 14,8m, 한 변의 길이가 66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많이 무너져 상단부만 보존되어 있고, 철제 계단으로 올라 내부를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다. 내부에는 큰 직사각형 모양의 돌이 두 개 있고, 그 겉은 플라스틱틀로 덮여있는데 대왕과 대왕비를 합장한 것으로 보이며 중국인들이 던진 동전들이 보인다. 복을 빌며 동전을 던진다고 한다.

 대형 돌을 직사각형으로 다듬어 계단식으로 쌓아 올린 구조인 태왕릉은 7단의 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계단 안은 작은 돌들이 채워 넣었져있다. 현재 광개토대왕릉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점도 이색적이다.

 인근 장군총에 비해 능의 정교함과 예술성이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이곳에서 "태왕릉이 산처럼 굳건하고 평안하기를 바란다(願太王陵 安如山 固如岳 )"라는 의미의 명문(銘文) 벽돌이 출토되었고,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좀더 가까우며 손상되지 않았을 때 무덤의 크기도 장군총보다 클 것으로 추정되어 태왕릉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414년 부왕인 19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인 광개토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 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비석. 414년(장수왕 2)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건립하였다. 높이 6.39m, 나비 1.5m, 두께 1.53m의 사면석비(四面石碑)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3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가로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세로선을 그었다.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4면에 총 44행(제 1면 11행, 제 2면 10행, 제 3면 14행, 제 4면 9행), 1775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며 상고사(上古史) 중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적었다.

 능비는 1880년경에 재발견되었는데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불량과 탁본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에 만주를 여행하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 가게노부에 의해 비문의 일부 문자가 변조되었다.

 또 99년경부터는 일본·청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매매를 하기 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감행함으로써, 비면이 마멸되고, 일부 문자가 오독되었다.

 현재는 쌍구본이나 석회부도(石灰付塗) 후의 탁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90년대 이전의 원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능비연구에 난점을 안겨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추모왕(鄒牟王;주몽)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경위가 기술되어 있고, 둘째 부분은 대왕의 정복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셋째 부분은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이 비문에 실려 있는 글은 고구려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제 2부의 정복기사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형식상 8개 기년기사(紀年記事)와 2개의 종합기사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히 신묘년기사에는 다른 기년기사와는 형식을 달리하는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하는 <신묘년기사>가 있어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은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정벌 및 8년의 신라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 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해(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誤讀)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묘→

 능비가 재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근 100여년간 한국·중국·일본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는데, 주로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가 능비연구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능비를 재발견한 중국에서는 주로 비의 건립연대 고증, 재발견 경위에 대한 보고, 비문의 해독, 비문 서체의 가치 등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역사학적 연구로서의 진전은 보지 못했다. 일본의 비에 대한 연구는 초기의 탁본 과정에서 변조 또는 오독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는데, 이것은 능비의 신묘년기사를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의 근거로 제시하기 위하여 <왜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는 모순된 견해를 일본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어, 고대 동아시아 교섭사에 있어서 왜를 주도적으로 보려는 기본적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00년대 한말에 비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일반적인 능비연구는 정인보(鄭寅普)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에서 일본학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 연구사적 출발을 가진다.

 그 뒤 정인보(鄭寅普)의 학설을 토대로 박시형(朴時亨)·김석형(金錫亨)의 수정·보완된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으며, 이진희(李進熙)의 비문변조설(碑文變造說)은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이후에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사의 내재적 발전과정을 해명하고자 하는 능비 본연의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5-413))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은 열 일곱 살에 왕위에 올라 서른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백성들의 평안과 영토확장에 힘썼다. 그리하여 한강이북으로부터 만주 전역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고구려의 기상을 중국 땅에 까지 널리 떨쳤다. 특히 영락이라는 연호를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민족의 독자성을 내외에 알린 훌륭한 왕이다.

연 대

나 이

생애와  업적

375

 

 고구려 국내성에서 태어남.

384

10세

 아버지 고국양왕이 고구려 18대 왕위에 오름.

386

12세

 태자의 자리에 오름.

391

17세

 고구려 19대 왕위에 오름. 처음으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독립국가임을 선포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음.

392

18세

 군사훈련으로 국력을 키우는데 힘씀. 9개의 큰 절을 짓고 불교를 널리 폄. 태학의 문을 넓혀 교육을 장려함.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석현, 관미성 등 10여개의 성을 함락시킴.

393

19세

 관미성을 되찾으려고 쳐들어온 백제를 물리침.

394

20세

 침입해 온 백제군과 수곡성에서 싸워 이김.

395

21세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김. 송화국 유역에 비려국을 침.

396

22세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쳐서 58개 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점령함. 백제 아신왕의 아우를 인질로 삼고 조공을 받침.

400

26세

 5만의 원군을 신라에 보내어 왜군을 몰아 내 줌.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신성, 남소성 등과 7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나 두 성과 평주를 되찾음.

401

27세

 신라로부터 인질로 데려왔던 실성을 돌려 보냄.

402

28세

 연나라의 숙군성을 침.

404

30세

 연나라를 쳐서 고국양왕 때 빼앗긴 현도성, 요동성을 되찾음.

405

31세

 고구려의 요동성을 되찾으려고 연나라가 쳐들어왔으나 패하고 돌아감.

406

32세

 연나라가 목저성으로 쳐들어왔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감.

408

34세

 고운과 국교를 맺어 북방한계선을 확보함.

410

36세

 동부여를 속국으로 만듬.

413

39세

 한강근처에서 서쪽으로 요하강, 북쪽으로 송화강, 북동쪽으로 연해주에 이르는 막강한 왕국을 이름. 가을에 세상을 떠남.

 

 4~5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과 활력의 시대였으며 삼국의 정립이 국제적 교섭을 배경으로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위대한 정복군주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역사상에서 두 번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인으로서의 출생과 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능비가 19세기 말 재발견 됨으로써 대왕의 훈적이 보다 뚜렷한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대왕은 소수림왕 4년(374년) 왕제 고국양왕의 아드님으로 태어났으니,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의 몰년에 해당된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축을 이루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 있어 명암이 엇갈리는 숙명적 사건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은 기록은 희소하지만 대체로 태어나실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성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고대의 영웅사관에 기인하는 기술이라 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대왕의 성품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고국양왕 3년 13세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바로 신묘년(391년)의 일이었다. 대왕은 이후 22년간 짧은 재위기간 동안이었지만 남정 북벌하여 고구려사에 있어서나 한국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였다. 즉, 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로 서쪽으로는 풍부한 철산지인 요동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요하를 넘어 대능하 유역으로부터 멀리 흥안령 산록의 시라무렌강 유역을 원정하고, 동쪽으로는 목단강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에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북으로는 송화강유역의 북만주일원으로 통치영역을 넓히고 남으로는 곡창지대인 한강유역을 획득하는 한편 멀리 낙동강 유역에까지 정복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대왕은 백제, 북연, 동부여, 신라, 가라제국을 조공국으로 복속시키는 한편 태왕호와 영락 년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동방의 패자임을 사해에 알리니, 이는 당시의 고구려가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완성하고 제국질서로 이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위업을 이룩한뒤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임자년(412년)에 죽었다.

 대왕의 본명은 담덕(중국문헌에는 안이라 하였다.)이나 생전에는 호태왕 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비문에 의하면 년호는 영락, 시호는 호우총(: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 모두루묘지 :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대왕의 생전 업적이 잘 나타나 있다.

 

 

◈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 장군총(將軍塚)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묘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집안의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웅장한 형태의 능으로 집안시 북쪽 5km 떨어진 통구고분군에 있다. 고구려의 비약을 상징하므로 '동방의 금자탑' 혹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장방형 화강암 벽돌을 매단 안쪽으로 쌓아 높이 12.4m, 각변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사각형 피라미드 형태로 만든 능이다.

 장군총을 쌓은 화강암은 집안에서 8km 떨어진 고대 채석장에서 겨울에 얼음을 얼려 미끄러지게 하여 운송한 것이다. 능에 이용된 1,100개의 장방형 화강암은 장대석으로 정확한 규격으로 정교하게 잘라 축성하였으며 능 우측에는 철제계단이 설치되어 능 제5단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묘지 내 현실과 능 꼭대기인 상부의 관람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장군총은 발굴전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도난당한 상태로 출토되어 유물이 전무한 상태이다.

 무덤 사방에는 굉장히 큰 돌을 3개씩 기대어 세워놓았는데 북쪽 가운데것이 없어져 지금은 11개만서 있다. 한 개가 없어진 북쪽벽은 현재 조금씩 밀려나오고 있다.

 이런 세운돌들은 '밑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호분석)'이라는 현지 학자들의 주장이다.

 또한 한 면에 3개식 12개를 세워 12지처럼 보호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군총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오른쪽, 그러니까 동북쪽을 보면 마치 고인돌 비슷한 돌더미가 보이는데 이것이 딸린무덤이란 것이다.

 원래 장군총에는 5기의 딸린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다.

 장군총과는 모양도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대단히 작다. 남은 한 기의 딸린무덤도 일찍이 도굴당하고 파괴되어 지금은 밑부분 3계단만 남아 있다. 밑변 길이 9.2m, 계단 높이 1.9m이다.

 이러한 딸린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3개가 있다고 한다. 딸린 무덤은 왕의 첩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장군총은 누구의 무덤인가?

 장군총은 건축규모나 딸린무덤의 수를 볼 때 고구려 때의 왕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장품이 모두 도난당해 누구의 무덤인지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일본 학자들이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묘라는 설을 내 놓았다. 그러나 중국 현지 학자들은 장수왕의 묘라고 주장한다.

 "장수왕은 수도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장본인이고, 또 평양에서 세상을 떴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와서 묻히게 되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중국 현지의 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구려 왕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덤을 준비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도 수도를 옮기기 전에 이미 국내성에 무덤을 준비해 놓았고, 관례에 따라 시신을 옮겨 이곳에 장사지냈던 것이다."

 

 

◈ 우산하 고분군 남쪽에 자리한 7세기 고구려분묘 5회분 5호묘(盔墳 五號墓)

 5회분 4호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퉁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이다.

 6세기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무덤이 특히 중요시되는 이유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함께 풍부한 설화적 내용이 담겨있는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50년대에 발견되어 보존 상태도 좋아 고구려의 풍부한 문화와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고분의 크기는 높이가 8m, 둘레가 160m 정도로 꽤 크며 안에 들어가보면 방이 하나인 단실분이다.

 네 벽면에 3각 고임 돌을 모서리에 평행하게 얹어서 1층 기단을 만들고, 다시금 모서리에 3각 고임돌을 얹어서 2층 기단을 만든 후, 평평한 4각 돌을 얹어서 천정을 마무리 하였다. 이러한 것을 평행삼각고임이라고 하며 후기 단실묘에 주로 나타난다.

 먼저 고분에 들어가면 4벽면에는 북쪽의 현무, 동쪽의 청룡, 남쪽의 주작, 서쪽의 백호가 그려져 있다. 고분 바닥에는 남북에 평행하게 3개의 관상이 놓여져 있고, 4벽면의 위에는 용이 서로 꼬여 길게 무늬를 이룬 띠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 그려진 신선도는 영혼불사(靈魂不死)를 믿는 고구려인들의 내세관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하늘을 날아 사후세계(死後世界)로 간다고 믿었는데, 여기에서 비행(飛行)의 능력을 가진 조류(鳥類)가 매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사후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세관을 형성시켜 벽화고분의 천정 부분에 다양한 모습의 신선도(神仙圖)를 그려놓았다. 1층 기단을 보면, 동쪽에는 우수인(소머리 신), 불의 신, 남쪽에는 야철신, 제륜신, 서쪽에는 연마신, 용탄신, 북쪽에는 일신, 월신이 그려져 있다. 2층의 기단에는 북쪽에 3명의 비천이 있고 동쪽에는 깃발 든 신선과 봉황을 탄 신선. 남쪽에는 공작을 탄 신선과 비천, 서쪽에는 용 탄 신선과 학 탄 신선이 그려져 있다. 맨 위 천정에는 황룡이 꿈틀거리면서 이 고분의 주인공이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보여 준다.

 

 

환도산성(丸都山城)

 유리왕 21년 국내성으로 천도 후 676m의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 만든 총둘레 7km의 산성이다.

 환도산성은 집안시 북쪽 통구강을 따라 약 2.5km 떨어진 환도성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국내성이 평성인 도성인 반면 환도산성은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군사적 위성으로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 혹은 '위나암산성(尉那巖山城)'이라고도 불린다. 발말굽 모양의 불규칙한 타원형 형태의 돌로 쌓아롤린 산성 입구에는 현재 석각으로 된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환도산성에는 현재 약 5m 높이의 북쪽 화강암 성벽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를 비롯해 병영터와 궁전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다.

 

 

국내성(國內城)

 유리왕 22년, 서기 3년부터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427년까지 약 400여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이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북쪽 우산과 서쪽 칠성산에 에워싸인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이다.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국내성은 총면적 13,000평, 성길이 2,686m, 높이 1~5m로 총6개의 성문과 해자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중국정부에서 성을 개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동서남북에 각각 세워져 있던 성문마저 194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 때 소실되었다. 원래 성벽의 높이는 7m였으나 거의 훼손되어 없고 현재 민가가 있는 남서쪽 성벽 3~4m 와 아파트 건물 사이에 위치한 벽 4~5단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집안박물관(集安博物館)

 집안시(集安市) 북쪽에 자리한 단층건물의 고구려 역사박물관으로 주요 역사유적지인 것에 비해 박물관내부가 초라한 곳이다. 박물관 내부는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과 사진자료들을 제1전시실 동청, 제2전시실 정청, 제3전시실 서청의 3개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➀ 제1전시실: 고구려 고분과 산성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지안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고분 분포도와 형태, 주요 고구려산성들의 발굴전 모습들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또한 각 고분 내부에 그려진 벽화묘사본이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➁ 2전시실: 광개토대왕릉비문 자료실로 광개토대왕릉 비문탁본 4장이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곳이다.

 

➂ 제3전시실: 고구려유물전시관으로 각종 토기와 청동화살촉과 칼, 기와막새, 와당, 말안장들이 진열되어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릉에서 출토된 폭 40cm의 쟁기에 달아 땅을 가는 농기구인 쇠보습이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그당시 고구려 농업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던가를 시사하는 것으로 소를 이용한 우경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만포철교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와 북한 만포시를 잇는 총길이 585m의 철교로 압록강 위에 걸쳐져 있다.

 이 철로는 만포를 지나 강계까지 연결되는 노선으로 매일 하루 한차례 국제열차가 경유하는 곳이다. 북한측 철로가 끝나는 지점 언덕에는 흰색의 만초호텔이 4층 규모의 2개 동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다. 만포철교 입구에는 중국 국경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이들의 안내로 철교 중간부분까지의 관람이 허용된다.

 

 

 

◈ 고구려의 첫 수도 졸본(卒本) - 오녀산성(五女山城)

 오녀산성(五女山城)은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번시 시(本溪市) 환인현(桓仁縣)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이다.

 

 오녀산(五女山)의 산세(山体)는 장방형(长方体)이며, 주봉은 해발 820m, 남북으로 약 1,500m, 동서로 약 300m이다.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쌓은 고구려 특유의 테뫼식 축성 양식을 보여준다. 총 둘레가 4,754m에 달하지만  대부분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 성벽이고 인공 성벽은 565m에  불과하다.

 "삼국유사" 기이편에는 고구려의 건국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주몽은 하백의 딸 유화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의 아들로서, 동부여 금와왕의 궁궐에서 나고 자랐으나 금와왕의 아들들과 불화하여 마침내 졸본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세웠다고 한다.

 오녀산성은 바로 그 졸본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오녀산성 내부에서는 청동기 후기에서 고구려  초기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고구려  건국 과정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에도 중요한 거점성으로 활용했고, 요· 금시대에도 계속 사용되었다.

 오녀산 정상부에는 남북 길이 600m, 동서 너비 200m인 평탄지가 펼쳐져 있는데,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지를 이루고 있다. 산성은 정상부의 평탄지와 완만하게 경사진 동쪽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산성의 평면은 대체로 불규칙한 장방형으로 신발 모양에 가깝다.

 전체 면적은 60만㎡로서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 성벽을 포함하여 성벽의 전체 길이는 4,754m에 달한다. 대부분 천연 성벽이고, 인공 성벽은 565m에 불과하다. 북벽과 서벽은 거의 모두 천연 성벽이며, 남벽도 424m 가운데 인공 성벽은 150m밖에 안된다. 인공 성벽은 대부분 경사가 완만한 동벽의 남반부에 위치해 있으며, 산기슭에 돌로 축조했으며, 외벽은 장대석으로 기초부를 튼튼하게 조성한 다음 쐐기형 돌과 북꼴돌을 맞물리도록 견고하게 쌓은 반면, 내벽은 괴석이나 판석으로 겉쌓기한 다음 하단에는 흙을 북돋우어 성벽을 보호했다.

 성문은 남문, 동문, 서문 등 모두 3개가 확인됐는데, 동문이 혼강 골짜기와 성곽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며, 좌우의 성벽이 직각을 이루는 동문을 옹성의 시원적인 형태로 파악하기도 한다.

 산성에서는 수원(水源)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데, 오녀산은 해발 800m의 암반산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일 년 내내 물이 솟아나는 천연샘(天池)이 있다. 동쪽 산기슭에도 오녀천(五女泉)이라 불리는 샘이 있다.

 한편  산 정상부 동남단의 자연 석대(石臺)에 서면  주변 경관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점장대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파악된다.

 

 오녀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남북 길이 1500m, 동서 너비 300m이고, 전체 약 8km이다. 압록강(鴨綠江)의 지류로 비류수(沸流水)로 비정되는 혼 강(渾江) 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200m 높이의 절벽 위에 위치하고 있어 천연의 요새가 되어 왔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홀본성(忽本城) 또는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된다. 중국의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에 흘승골성(紇升骨城)이라고 처음 언급되었다. 『광개토대왕비』에는 홀본성(忽本城)이라고 하고, 삼국 시대 관련 다른 기록들은 대체로 졸본성(卒本城)이라 쓰고 있다. 《고려사》 공민왕조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으로 쓰여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수도를 홀승골성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조선 후기의 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오녀산성의 옛 이름인 우라산성의 발음이 위나암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고구려의 국내성은 이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999개 계단을 오르고 약 4시간 정도 소요.

 

* 桓龙湖(환룡호수)

호수 둘레는 약 80km,총 용량은 34.6억㎥, 수심은 약 60m정도이며, 리아오닝성(辽宁省)의 최대 인공호수이며, 최대 담수 양식장이다. 호수내 삼림 면적은 243㎢, 국가급 삼림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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