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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자기의 명품브랜드 경덕진(景德鎭,
Jing de Zhen, 징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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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자기의 명품브랜드 경덕진(景德鎭,
Jing de Zhen, 징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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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진(景德鎭, Jing de Zhen,
징더전)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도자기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도시의 면적은 약 5,248㎢이며 인구는 약
150만 명 (2022년)이고, 그 중 60%가량이 도자기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연평균기온은 17℃, 연강수량은
1,693~1,793m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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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瓷都(자도,
도자기의 도시)"라는 별칭을 인정받고 있고, 중국 정부가 제일의 역사 문화도시라
일컫은 바 있을 만큼 이 곳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는 그 품질과 예술적 가치가 국제적 수준을 자랑한다.
또한 인근의 많은 산봉우리가
보여주는 수려한 장관으로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데 그중에서도 오룡희주(五龍戱珠,다섯마리의 용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 등 볼거리가 많은
주산(珠山)풍경구가 가장 유명하다.
경덕진의 도자기는 문헌기록에 따르면 한대(漢代)에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원래는 신평(新平)이나 창남(昌南: China가 유래된 이름)이라고 불리우던 도시의 이름이 "경덕진"으로 바뀌게 된 것도 바로
도자기 때문이라고 한다.
북송(北宋)
경덕연간(景德年间:11세기)에 진종황제가 항주로 파견한 관리가 어용도자기 제작을 감독할 때 통과한 모든
도자기 하단부에 "경덕년제(景德年制)"라고 글을 남긴 것에서 이 곳의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이 후 전국의 재주있는 도공들은
다들 경덕진으로 몰려들어 이곳의 도자기 공예 기술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고, 원대부터 이곳 특산품으로 새로운 도자기(청화자靑花瓷,
유리홍釉里紅)가 개발되었으며, 명청대에 이르러 최고의 번영기를 맞아 해외 40개 국가로 수출해 "白如玉、薄如紙、明如鏡、聲如磬(옥처럼 하얗고,
종이처럼 얇으며, 거울처럼 맑고, 옥구슬 같은 소리가 난다 "는 극찬을 듣는 명품이미지를 널리 알리게 되었다.
경덕진을 찾은
관광객들은 다채로운 색상의 도자기를 구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옛 가마터를 구경하거나 직접 도자기 굽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o
가는 방법 : 환감선(皖赣线, 안휘성과 강서성을 지나는 철로)의 거의 모든 열차노선은 대부분 경덕진에 하차한다. 상해쪽에서 558번이 직행이고,
북경/복주 방향의 열차는 45,46번이 있다. 또한 무원(婺源))에서 오는 리무진도 편리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무원을 들렸다가 경덕진으로
찾아온다.
o 입장료: 고자요(古瓷窯) 50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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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더전시(景德镇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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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더전시(景德镇市)는 중화인민공화국 강서성 동북에 위치하는 지급시이다. 옛날부터 도자기 생산지로서 유명하여 국가역사문화명성으로 지정된 대외개방 도시이기도 하다.
장시성 동북부에 위치하여 서북쪽은 안후이성 둥쯔 현(東至縣), 남쪽은 완녠 현(萬年縣), 서쪽은 포양 현(鄱陽縣), 동북쪽은 안후이성 치먼 현, 동쪽은 더싱 시, 우위안 현, 동남쪽은 이양 현과 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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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는 아열대성으로 비가 많이 내리지만 기온은 온화하다. 주위를 산들이 둘러싸고, 하천도 많다. 시 지역의 해발은 320m이다.
원래는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의 땅이었던 곳이었다가, 진나라때 구강군 번현(番縣)과 예장군 파양현(鄱陽縣)으로 나눠졌다. 다시 동일한 행정구획으로 합쳐진 것은 남북조시기로, 동진(東晉)은 이곳에 진(鎭)을 설치하고 신평진(新平鎭)이라고 불렀다. 그 이후, 당나라는 624년 이곳에 신평현을 설치했으나, 716년 신창현(新昌縣)으로 바꾸었으나, 창 강(昌江)의 남해안에 위치한다고 하여, 창남진(昌南鎭)으로 불리었다. 742년에는 신창현에서 다시금 부량현(浮梁縣)으로 개명되었다. 1004년에는 북송 진종(眞宗) 원효제(元孝帝)의 연호이던 경덕(景德)을 따라, 경덕진(景德鎭)으로 개명되어 부량현에 속했다. 1960년에 부량현에서 독립해 나와, 부량현을 포함한 징더전 시가 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한나라 때부터 이미 도자기 생산이 시작되어 있었다고 추측되며, 송대에는 청화 백자 매병 등, 원, 명, 청의 시대에는 이른바 청화라고 불리는우수한 품질의 자기를 생산해, 궁정에서도 이용되는 한편, 유럽, 이슬람권 등 해외 여러 나라에도 널리 수출되어 '차이나'의 어원이 되었다. 광둥성 포산, 후베이성 한커우, 허난성 주시안 진과 함께 중국 4 명진으로 이름났다. 문화대혁명 때는 ‘구문화’라고 매도되어 홍위병에 의한 피해를 입었다.
도자기 이외에 차도 옛날부터 중요한 산품이었다. 또 최근에는 각종 공업도 발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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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의 고향 도자기의 수도 징더전(景德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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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China)는
‘중국’과 ‘도자기’를 동시에 일컫는 말이다. 당나라
때 창난전(昌南鎭, 창남진)에서 생산된 아름다운 자기가
유럽 곳곳으로 수출됐는데, 유럽인들은 이 도자기를 '창난(昌南)'으로
불렀다. 당시 유럽에서는 자기를 굽지 못했다. 유럽 귀족들은
'창난'을 구하는 데 혈안이 됐다. '창난'이 인구에 회자되는
와중에 ‘차이나’로 변음됐고 '차이나=도자기=중국'이란
개념이 형성됐다고 이곳 사람들은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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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난전은
현재 중국 장시(江西)성 징더전(景德鎭, 경덕진)의 옛 이름이다.
창난전 도자기를 아꼈던 송나라 진종(眞宗)은 서기 1004년
즉위와 동시에 연호를 '징더(경덕)'로 정하고, 이 연호를
창난의 지역 명칭으로 하사했다. 이후 징더전 자기는 황실에서만
사용됐다. 황산(黃山)의 품에 안겨 창장(長江, 장강)의
젖을 빨고 있는 징더전의 도자기석(石)과 고령토(高嶺土)는
한나라 도공들이 이곳에서 자기를 빚기 시작한 이후 2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계 최고의 도자기 원료로 꼽혀 왔다.
징더전시는
인구가 150만명으로 중국 내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도시다.
그러나 징더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곳이 왜 세계 ‘도자기의
수도’로 불리는지 알 수 있다. 150만명 중 50만명이 도자기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1만여명의
도예가들이 이들과 교류하고 있다. 도자기 전문 학교와
대학 및 연구소가 1400개에 이르며, 국공립 및 사립 도자기
박물관도 100개가 넘는다. 전통 방식의 도자기 가마와 현대식
도자기 공장은 어림잡아 1000여개에 이른다고 한다. 시내
상점의 대부분이 도자기 가게다. 거리의 쓰레기통까지 모두
도자기로 이뤄진 그야말로 ‘도자기 천하’이며 세계 제1의
요업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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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과거 도자기 공장 단지를 그대로 활용해 13만㎡ 규모로
2011년에 조성한 '타오시촨(陶溪川, 도계천)'은 징더전
도자기가 생산되고 전시되고 판매되는 핵심 공간이다. 작은
개울이 모여 큰 하천을 이루듯 울창한 '도자기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뜻이다. 붉은 벽돌의 옛 공장 외관과 도공들의
손때가 묻은 온갖 시설물은 그대로 둔 채 공장 내부를 모두
현대식 도예 스튜디오로 개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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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을
버리던 폐기물 처리장은 분수 쇼가 펼쳐지는 연못으로 바뀌었다.
밤이면 화려한 불빛이 켜지는 높은 공장 굴뚝과 스튜디오
창문으로 보이는 온갖 자기의 자태가 황홀한 야경을 연출한다.
매주 토요일이면 타오시촨의 거리는 도자기 야시장으로
바뀐다.
징더전시는
타오시촨의 스튜디오를 세계 각국의 도예가와 학생들에게
무료로 대여해 주고 있다. 스튜디오는 도자기 생산은 물론
판매, 전시 및 박물관 기능까지 한다.
타오시촨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도자기 3대 강국인 한·중·일에서
온 디자이너가 타오시촨의 설계를 맡았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승효상씨가 최고 책임자였다. 타오시촨 단지를 관리하는
도자기문화관광발전공사 류즈리(劉子力) 사장은 "이곳
건축물 중 승효상 선생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면서
"그가 디자인한 공간에서 한·중 도예가들이
꿈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류 사장은 또 "도자기에는
정치도, 외교도, 언어도 필요 없다”면서 “한·중
관계의 부침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바로 징더전"이라고
덧붙였다.
타오시촨은
‘이쿵젠’(邑空間)이라는 대학생들만의 공간도 있다. 이
건물에는 3000여명의 도예 전공 대학생들이 운영하는 가게
83개가 들어서 있다. 물론 임대료는 무료다. 하지만 3개월마다
판매 실적을 평가해 입점하는 대학생을 교체한다.
징더전은
빚기, 그림 그리기, 조각, 유약 바르기, 굽기 등이 모두
분업화되어 있다. 이 때문에 대학에도 각 과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과가 세분화되어 있다.
이러다
보니 제작 기간이 1/4로 단축되고 가격도 1/10로 낮츨 수
있으니, 판매가는 비슷하니 수익도 많이 난다.
징더전에서
가장 큰 박물관인 7층 건물의 ‘도자기 박물관’은 징더전
도자기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당대 이후 황실에
진상됐거나 세계 각지에 수출된 자기 3만여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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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국보급인데, 그중 원나라 때의 '청화매병(靑花梅甁)'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자기가 만들어진 시대 및
그림의 예술성, 자기의 빛깔로 보면 청화매병을 넘어서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의 자기는 수천 점씩 보존된 반면 청화매병은
200여점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의
다른 전통 유물들이 박물관에 박제화된 것과 달리 도자기는
중국 역사와 지금도 함께 호흡하고 있다. 심지어 전통 유물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도자기 산업은
더욱 발달했다. 물론 이 시기 도자기들은 마오쩌둥의 얼굴과
혁명 구호를 그려 넣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타오시촨
도자기 거리에는 전통 자기 예술을 구현하려는 도예가는
물론 일상생활에서 쓰는 현대 도기 제품을 생산하는 장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 틈바구니에서 3D(3차원) 프린터로 도자기를 척척 찍어
내는 젊은 창업가들도 있다. 도자기처럼 3D 기술과 어울리는
제품도 없다. 3D 기술이 중국의 미래 도요 산업을 이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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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더전(景德镇)의 기후(℃)
도시명 |
기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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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
2월 |
3월 |
4월 |
5월 |
6월 |
7월 |
8월 |
9월 |
10월 |
11월 |
12월 |
징더전
(景德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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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평균 |
10.2 |
12.6 |
16.5 |
22.8 |
27.6 |
30.1 |
33.8 |
33.7 |
30.2 |
25.2 |
19.0 |
13.2 |
최저평균 |
2.5 |
4.7 |
8.1 |
13.6 |
18.4 |
22.2 |
25.2 |
24.8 |
21.1 |
15.5 |
9.3 |
3.7 |
평
균 |
5.6 |
7.9 |
11.6 |
17.5 |
22.4 |
25.7 |
29.1 |
28.6 |
24.9 |
19.5 |
13.3 |
7.6 |
강수량mm
|
87.6
|
117.6
|
191.9
|
228.8
|
235.2
|
310.3
|
230.1
|
135.0
|
75.6
|
71.1
|
74.5
|
47.3
|
강수일수
|
13.0
|
14.0
|
18.1
|
16.7
|
16.4
|
15.9
|
12.1
|
11.3
|
9.2
|
8.6
|
8.0
|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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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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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도자기 역사가 숨쉬는 곳 도자문화박람구(陶瓷文化博覽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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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넘는 도자기 역사를 지니고 있는 중국 도자기의 대표도시! 이렇게 멋진 수식어가 붙는 경덕진에 도자기 박물관이 빠질 수
없다.
도자문화박람구는 경덕진 서부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 지정 박물관으로 고요자장(古窯瓷場)과 도자민속박람관(陶瓷民俗博覽館)으로 구성되며
풍성한 볼거리와 다채로운 체험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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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자장(古窯瓷場)
고요자장은 요즘 보기힘든 명(明),청(淸)시대의 어용(御用)도자기
가마터와 건물들을 재현했다.
이곳에서는 뛰어난 품질과 멋스러움으로 황제에게만 바쳐지던 어용도자기의 제작 과정을 참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관광객이 직접 도자기를 빚어보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의 역대 주석들도 경덕진을 방문할 때면 꼭 빼놓지 않고 들렸을 만큼 이름난
명소이며 최근 중국 내 관광객 뿐 아니라 해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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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민속박람관(陶瓷民俗博覽館)
도자민속박람관은 명, 청대 건축물이 주를 이루는 정원식
박람구역으로 고대 가마터, 도자기 거리, 천후궁 등이 다양하게 자리하고 있다. 정원식으로 꾸며져 아름답고 깨끗한 주변 경관이 인상적이며, 상쾌한
기분으로 박람관을 둘러볼 수 있어 좋다. 건축물들이 자연친화적으로 설계되어 조화롭게 어우러져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특별히 주말이면 도자
음악(瓷樂) 연주가 옛 모습대로 공연되어 관광객들의 눈과 귀가 더욱 즐겁다.
o
가는 방법 :
환감선(皖赣线, 안휘성과 강서성을 지나는 철로)의 거의 모든 열차노선은 대부분 경덕진에 하차한다.
상해쪽에서 558번이 직행이고,
북경/복주 방향의 열차는 45,46번이 있다.
또한 무원(婺源))에서 오는 리무진도 편리해서 많은 관광객들이 무원을 들렸다가 경덕진으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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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자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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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중국도자기는 신석기시대에 허난 성(河南省,
하남성)과 간쑤 성(甘肅省,
감수성)에서 발견된 채색된 토기로서 연마된 표면은 흑색·
적색· 적갈색·갈색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직경이 넓은 발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며 그외에 다리가 3개 달린 큰 솥 모양의 정(鼎), 소젖통 모양의 다리가 달린 가(斝)와 역(鬲), 길고 넓은 대(臺)가 놓여 있는 두(豆)가 있는데 이러한 조형은 청동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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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BC 1400년에 백도(白陶)라는 혁신적인 토기가 제작되었는데 그 기형과 장식은 당시에 유행했던 의식용 청동기와 매우 유사하다. 유약은 주대(周代) 후기에 처음 나타나 한대(漢代)에 그 질이 현저히 향상되었다.
즉 한대에는 시유된 경질도기의 전통이 확립되고 북쪽의 저장(浙江,
절강)이 주요 제작지로 부상했다. 형태는 신정(神亭: 뼈항아리(骨壺(골호))의 일종으로 윗부분에 인물이나 누각을 얹어 장식한 것)이나 농장에서부터 단순한 돼지우리, 조리용기, 남녀와 동물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6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의 질이 점차 향상되고 유약도 장석유약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고 초보적인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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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는 반투명한 자기가 제작되고 8세기 전반에는 매우 화려한 당삼채(唐三彩)가 다량으로 제작되었다. 청색·
녹색· 갈색· 황색· 오렌지색을 섞어 채색한 당삼채는 껴묻거리(副葬品,
부장품)인 도용(陶俑)과 실용기로 구분된다.
도용들은 생동감과 위엄이 넘치면서도 개개의 특징들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중에서도 당삼채가 사라지는 756년 안녹산의 난 직전의 것들이 가장 묵중하고 건강하게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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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유약이나 다채(多彩) 유약이 입혀진 항아리·
주전자· 주발· 잔(盞)· 접시 같은 그릇들은 그 장식에서 이국적인 요소를 보여줄 뿐 아니라 외국 금속용기의 형태를 토대로 한 것도 있어 주목된다. 또한 색상이 다른 2가지 태토를 자유롭게 또는 규칙적으로 혼합한 연리문(練理紋) 도자기도 나타난다.
송대(宋代,
960~1297)의 여러 도요지에서는 장석질 유약으로써 세련되고 단순한 형태의 청자와 백자가 제작되었다.
정요(定窯)에서는 백자가 주로 생산되었는데 태토가 매우 희고 경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며, 유약은 상아색을 띠고 시유된 표면이 매끄럽다. 이 가마에서는 주로 발·세반(洗盤)·반(盤)·접시 같은 실용기들이 제작되었다. 정요도자기의 결점은 엎어놓고 구우므로 구연부(口緣部)에 유약이 없기 때문에 매우 얇은 동이나 은을 그릇에 맞게 잘라 소성 후에 구연부에 씌운 것이다.
청자요지로 북방에는 요주요(耀州窯)·
린루요(臨汝窯)· 균요(鈞窯), 남방에는 룽취안요(龍泉窯)·
관요(官窯)가 있었다. 요주와 린루요의 기본적인 자기유약은 황록색 또는 갈록색의 투명유약이며, 실용적인 기형에 주로 대담한 당초무늬와 목단(牡丹)을 새기거나 압인했다. 균요의 청자는 유약에 혼합된 소량의 산화철이 환원되면서 발색하므로 소성온도와 속도에 따라 표면의 질감과 색상의 변화가 다양하다.
12세기초 동을 사용하면서 동의 양이 과다해 생겨난 산화작용으로 인해 표면에 이끼 같은 녹색의 작은 결정이 생기게 되었고 이는 균요자기에 매력을 더해 주었다. 역시 발·반·접시 같은 실용기가 주종을 이루었으며 14세기에는 묵직한 화반, 수반, 향로, 커다란 세반 등도 제작되었다. 저장 성(折江省,
절강성)의 룽취안요는 송의 대표적인 청자요로 태토가 정선되고 종류가 다양해졌으며 흰색을 띤 것을 제외하고 유약이 칠해지지 않은 굽의 드러난 부분은 타서 밝은 적갈색을 띠었는데, 이것은 남방청자와 북방청자를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고 있다.
가마의 구조는 도염식(倒炎式)이었으며, 기형이 단순하고 균형이 잘 잡힌 발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청동기의 영향을 받아 삼족의 격·
궤 ·존(尊, 술그릇)·과 같은 것도 있었으며, 수출용은 외국인의 취향에 맞도록 제작되었고 가마가 가장 번영했던 13세기말부터 대량생산되었다. 관요는 송 왕실에서 북방의 린루요를 대신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궁중용 기물을 제작했다.
유약은 옅은 녹색에서 연보랏빛을 띤 청색에 이르는 청자유약이 사용되었다. 소성할 때 자연적으로 생긴 자기의 기면 균열을 나중에는 도공들이 장식효과로 사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빙열(氷裂)을 유도해냈다. 푸젠 성(福建省,
복건성)의 건요(建窯)에서는 짙은 갈색과 검은색의 다완(茶盌)이 제작되었는데 이들은 소위 유적천목(油滴天目)과 흑유자기의 유약을 변화시켜 토끼털과 같은 문양 효과를 낸 토끼털 천목우로 유명하다.
허베이 성(河北省,
하북성)의 츠저우 요(磁州窯,
자주요)에서는 술병과 자기로 된 베개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장식은 갈색 또는 흙색의 하회장식이고 모티프는 꽃이 많다. 이 장식법은 소지에 어두운 색의 이장을 칠한 다음에 이것을 긁어서 문양을 나타내는 것인데 한국의 박지분청기법과 같다. 송의 도자기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영청(影靑)이다. 이는 백색 소지에 푸른기가 도는 유약을 시유한 것으로 이것은 장시 성(江西省,
강서성)과 후베이 성(湖北省, 호북성)에서 구워졌는데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이집트의 카이로에서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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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1206~1368)의 도예 중심지는 징더전(景德鎭,
정덕진)이고 이때 가장 중요한 성과는 중국도예에 혁명적인 효과를 가져온 반투명 자기를 처음 만든 것이다. 또한 이미 9세기부터 사용하고 있었던 중동으로부터 하회의 코발트 청색 안료가 도입되어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생산되었다. 청화백자는 해외수출용과 내수용으로 제작되었는데, 해외수출용은 전통적인 중국 도자기와는 전혀 다르고 이슬람 금속공예의 장식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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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접시·반·발들과 같이 구연부가 열려진 형태와 매병(梅甁)·주전자처럼 구연부가 닫혀진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는 일본·인도차이나·페르시아에서 모방되었고 델프트와 그밖의 유럽 도자기에 영향을 미쳤다. 내수용은 수출용의 육중한 그릇에 비해 매우 작아서 높이가 26cm를 넘는 것이 거의 없었으며, 제단용 병과 3발이 달린 소반 등이 있다.
명대(明代,
1368~1644)의 주요요지도 역시 경덕진으로 이곳에 관요가 설치되어 청화백자가 다량으로 생산되었고 다채색의 백자도 생산되었다. 코발트는 16세기말까지 거의 페르시아에서 수입하여 사용했다. 도자예술이 특히 발전했던 선덕연간(宣德年間,
1425~1435)에 제작된 청화백자의 특징은 강한 청색, 힘차게 조절된 선, 전면에 비례하여 조화를 이룬 문양이다.
이들은 근동으로부터 들어오는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훨씬 더 중국의 전통에 부합되게 도자기를 제작하여 외국의 기형이나 장식과 더욱 뚜렷하게 대조되었다. 성화연간(成化年間,
1465~1487)의 청화백자는 선덕연간의 청화백자에 나타난 코발트 안료의 농축되고 집약된 효과가 매우 고르게 입혀진 회청색으로 바뀌었고, 비교적 섬세하여 자신감이 없는 '궁정완'(宮廷盌)이라는 새로운 양식이 나타난다.
또한 청화백자에 시유한 백색 바탕에 노란 에나멜로 문양을 채색하는 청화황채(靑華黃彩)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기법은 홍치연간(弘治年間,
1488~1503)과 정덕연간(正德年間,
1506~1521)에 가장 유행했고 가정연간(嘉靖年間,
1522~1566)까지 계속되었다.
백자에 5가지 색의 유약으로 그린 오채기(五彩器)가 제작되었는데 정덕연간의 오채는 형태와 장식의 순수함에서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정덕연간에는 이슬람 궁정에서 파견된 환관들이 그곳으로 수출될 청화백자의 문양을 감독하기도 했으며, 이중에는 S자형의 꽃을 그린 모하메트 소용돌이 장식이 눈에 띤다. 이슬람교도인 환관들 사이에서 애용되었던 마호메트 요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으며, 종류는 대부분 필통·등잔·상자 같은 문구들인데 이들은 페르시아나 아랍 문자들로 장식되었다.
가정연간에는 백자소지의 타락이 현저해지며, 산화철적색(토마토 적색) 바탕에 금색으로 시유한 발이 나타난다. 용을 음각한 위에 황색유약을 시유한 것도 있다. 융경연간(隆慶年間,
1567~1572)과 만력연간(萬曆年間,
1567~1620)에는 녹·황·자·철홍색을 시유한 기물과 만력오채 그리고 다량의 청화백자가 수출용으로 제작되었지만 궁중에서 사용된 도자기들은 가정연간의 것과 거의 비슷했으며 대량생산과 궁중의 엄격한 요구, 경덕진의 질좋은 점토층의 고갈 등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품질이 떨어졌다.
청대(靑代:1644~1912)에도 많은 도자기가 유럽으로 수출되었는데 수출용 도자기는 내수용과 구분되어 생산되었다.
재료를 정선하고 제작을 통제해 정교하게 마무리되었으나 명나라의 도자기에 비해 생동감이 떨어진다. 그러나 강희연간의 도자기는 형태·표면·색상 등에 있어서 송대 도자기의 세련미를 재현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중국과 서양에서 가장 아낌을 받았다. 특히 명나라 영락연간(永樂年間,
1403~1424)에 유행한 난각(卵殼) 자기인 완을 모방한 것은 원품보다 완벽할 정도이다.
강희 말기부터 징더전의 채색자기에 서양적인 취향이 점차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고월헌(古月軒)이라는 양채(洋彩) 에나멜 도기에서 가장 현저하다. 장식이 유럽 풍경이거나 중국 꽃이라 하더라도 사실적인 묘사나 명암법, 원근법 등 서양의 특징을 보여준다. 강희제 때 청화백자의 소지는 뛰어난 백색으로 유명하며, 문양과 그림은 명나라 때의 것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고 투각한 도자기가 옥공예품의 영향을 받아 부흥되기도 했다. 유약은 동적색이 단색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연분홍, 녹색, 망간흑색, 황색, 금박 등이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녹색은 후기에 출현한 것이며 터키옥색도 나중에 나타난 것이다. 한편 유럽 도자기도 중국에 영향을 주었는데 유럽 상인들의 취향에 따라 문장이 그려지고, 초기 마이센 도자기가 중국에 들어오기도 했다. 징더전에서 제작된 순백자는 유럽으로 수출되어 독일·네덜란드·영국에서 장식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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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화백자(靑華白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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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원대 중기에 처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 청화백자가 제작된 것은 조선 초기로 짐작된다. 15세기경 청화백자에는 중국 명대의 문양과 기형 등이 거의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청화백자로는 청화백자매조죽문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 등이 있다.
16세기에는 한국적인 성격이 강해져 회화적인 필치의 초화·포도·
칠보 무늬 등이 나타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청화 안료가 부족해 철화백자의 생산이 증가하는데, 이는 청화백자보다 거칠고 태토는 회백색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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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청화백자도 태토로 만들어지고 기벽이 얇아졌으며 송하인물무늬가 나타난다. 17세기 중반 이후 다시 청화백자가 증가하여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8~19세기 이후에는 감상용 자기로서 문양의 종류가 화훼·초충·
산수· 길상 등 다양해졌다.
중국에서는 청화(靑華)로, 일본에서는 청화(靑花)로 많이 쓴다.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청화백자와 관련하여 청화(靑花)·
화자기(畵磁器)· 화사기(畵沙器)· 화기(花器)·
화기(畵器) 등의 용어가 보인다. 현재는 '푸른색의 무늬'라는 의미에서 청화(靑華·
靑畵· 靑花) 등의 용어가 통용되고 있다. 청화백자는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제작시기에 관해서는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만당(晩唐)에서 송대(宋代)에 발생하여 원대(元代)에 발전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원대 중기에 시작되었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원대 징더전(景德鎭,
정덕진) 가마에서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로 수출되고, 명(明)의 선덕연간(宣德年間,
1426~1435)·성화연간(成化年間, 1465~1487)에는 매우 우수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으며 이후 청대까지도 백자의 주류를 이루었다. 산화코발트 계열의 안료는 본래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견되어 사용되었는데 서역 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지면서 회청(回靑)·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렸으며, 한국에서도 청화백자 전래 초기에는 그렇게 불렸다.
한국에서 청화백자가 제작된 것은 조선 초기로 짐작되며 '효종실록(孝宗實錄)' 6년(1655)에 태종이 고려의 국자박사(國子博士)로 있을 때 애용했던 청화잔(靑花盞)에 관한 기록이 있어 중국 원대의 청화백자가 적어도 고려말에는 한국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부터 회청을 수입하여 국내에서 청화백자를 제작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수입안료의 구입난으로 세조 때 국산안료인 토청(土靑)을 개발·사용하려는 시도를 했고, '예종실록(睿宗實錄)'에도 토청개발 및 시험번조에 관한 기사가 있으므로 이미 세조 이전에 번조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5세기경 청화백자는 주로 중국 명대 청화백자의 문양과 기형 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많은 유사점을 보여준다. 양질의 우수한 백자를 생산하고 있었던 경기도 광주지역의 가마에서는 조선초부터 왕실에서 사용할 사기제조를 위해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번조를 감독하고, 청화백자의 문양을 화원으로 하여금 그리게 했다.
이 시기의 청화백자가 발견되는 가마터로는 오전리(梧田里)·
도마리(道馬里)· 무갑리(武甲里)· 관음리(觀音里)·
도수리(陶水里) 요지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청화백자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紋壺)·
청화백자망우대명국충문(靑華白磁忘憂臺銘菊蟲紋)전접시·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銘松竹紋壺) 등을 들 수 있다.
16세기에 들어서면 문양과 기형에서 중국적인 특징들이 차츰 사라지면서 한국적인 성격이 강해져 회화적인 필치의 초화무늬(草花紋)·포도무늬·칠보무늬 등이 나타난다. 17세기 전반경에는 임진왜란 이후 경제적 타격으로 청화 안료가 부족해 철화백자의 생산이 증가하는데 이들은 번조방법에 있어서도 청화백자보다 거칠고 태토 역시 회백색을 띤다.
따라서 청화백자도 회백색의 태토로 만들어지고 기벽이 얇아지는 현상을 보이며 송하인물무늬(松下人物紋)가 나타난다. 이러한 청화백자가 출토되는 곳으로는 무갑·
관음· 대쌍령(大雙嶺)· 곤지암(昆池巖)· 정지(亭支) 등이 있다. 17세기 중반 이후에 다시 청화백자가 증가하며 이러한 현상은 18세기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17세기말 신대리(新垈里) 가마터에서는 회백색 태토의 철화문이 그려진 백자들이 발견되었다.
1717~1720년의 오향리(五香里) 가마에서는 담청을 띤 설백색 백자편과 각(角)이 있는 파편들이 발견되는데, 궁평리와 관음리에서는 신대리와 오향리 가마의 특징이 동시에 나타나는 파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이들 두 가마의 중간 시기에 놓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처럼 청화백자의 생산이 증가되었다는 것은 요업(窯業) 자체가 회복·안정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왕실전용 사기제조장이었던 분원이 왕실상납용뿐만 아니라 일반 판매를 목적으로 사사로이 번조하게 되는 것과도 상관이 있다.
18~19세기 이후 이와 같은 상황은 더욱 가속화되고 갑발에 넣어 정교하게 구우면서 감상용 자기로서의 성격이 강해진다. 제작방법에서도 여러 가능성이 시험되었으며 기물의 종류도 급격히 많아지고 이 가운데 문방구류의 증가는 특히 눈에 띈다. 이러한 사치풍조를 견제하려는 왕실의 노력이 있었지만 막을 수 없었으며 문양의 종류는 화훼(花卉)·초충(草蟲)·산수·길상(吉祥) 등 다양해지고, 청화안료의 사용범위도 단순히 문양을 그리는 것 이외에 다른 안료와 혼용하거나 채색을 하는 등 폭넓게 사용되었다.
따라서 조선초부터 고급기명이었던 청화백자는 조선 말기에는 왕실뿐만 아니라 일부 민간에서도 향유하게 되었다. 이 시기 청화백자들이 수습된 가마터로는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금사리·
분원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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