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산(武夷山, 우이산) 무이구곡(武夷九)

무이산 여행상품

 

 인구가 약 21만 명에 달하는 복건성의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소도시로 무이산풍경구가 있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무이산에는 36개의 봉우리와 72개의 동굴과 99개의 암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풍경구를 흐르고 있는 구곡계에서는 뗏목을 타고 하류로 내려오는 즐거움도 가질 수가 있다.

 해발 750m에 달하는 무이산을 중심으로 한 자연공원이다.

 또한 무이산은 차의 산지로 유명하다.

 특히 여기에서 재배되는 차는 "무이암차(武夷巖茶)"로 불리우며, 최고의 품질로 황제에게 상납되었을 정도라고 하니 그 품질을 짐작할 수 있다.

 

 

무이산(武夷山) 풍경구 둘러보기

 무이산(武夷山) 남쪽 입구에 천유봉(天遊峰), 일선천(一线天), 호설암(虎啸岩), 구곡계(九曲溪) 풍경구 등 주요 볼거리가 집중돼 있고, 북쪽 입구에서는 대홍포(大红袍)와 수렴동(水簾洞)이 가깝다.

 규모가 워낙 커서 핵심 풍경구만 돌아보아도 2일이 걸린다.

 각 풍경구를 셔틀버스가 긴밀하게 연결한다. 셔틀버스 정류장에 근무하는 직원에게 목적지를 이야기하면 무전기로 버스를 불러준다.

 입장권을 살 때 셔틀버스 표를 일괄 구입하게 돼 있다. 모든 풍경구에서 입장권을 매번 검사하니, 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구곡계에서 타는 뗏목은 입장권에 포함돼 있지 않다. 양쪽 출입구에 있는 매표소와 뗏목 선착장인 싱춘 부두(星村码头)에서 뗏목 티켓을 별도 판매한다.

 

 

무이산 여행의 백미 대나무 뗏목 투어 - 구곡계(九曲溪)

 구곡계는 '무이산의 영혼'으로 꼽힌다.

 6인승 대나무 뗏목을 타고 1시간 30분 남짓 9.5km에 달하는 구곡계를 미끄러지듯 유람한다. 개울이 9번 굽이쳐 흐른다는 의미에서 이름 지어졌다. 바닥이 드러날 만큼 맑은 물빛이 인상적이고, 뗏목을 타고 바라보는 기이한 봉우리가 압권이다. 단하지모의 검붉고, 개성 넘치는 36개 봉우리가 구곡계를 어루만지듯 감싸고 이어진다. 군데군데 짙푸른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뽐낸다.

 

 본래 일곡(一曲)에서 구곡(九曲)까지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였다. 하지만 요즘은 순풍에 돛단배처럼 구곡에서 일곡 방향으로 물살에 순응하며 유람한다. 구곡에는 청개구리를 닮은 청와봉(青蛙峰), 팔곡에는 여성의 풍만한 젖가슴을 닮은 쌍유봉(双乳峰), 칠곡에는 비 오는 날이면 수천 가닥의 물줄기가 절벽 아래로 비단실처럼 흩날린다는 삼앙봉(三仰峰), 사곡에는 웅장한 기세의 대장봉(大藏峰), 가장 수려한 구간으로 꼽히는 이곡에는 예쁜 소녀가 꽃을 물고 있는 옥녀봉(玉女峰)이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구곡계는 무이산 입장료와는 관계없는 '별도의 관광지'이다. 우이 산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싱춘 부두(星村码头)까지 간다. 6명이 한 조로 뗏목을 타는데, 직원들이 알아서 짝을 지어 주니 혼자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뗏목 유람을 마친 지점에서 송나라 때 거리를 재현한 쑹제(宋街)가 가깝다. 여기서 지도와 간단한 기념품을 사고, 시간이 있다면 무이궁(武夷宫)까지 걸어서 둘러보아도 좋다.

* 요금: ¥130

* 가는 법: 셔틀버스 타고 주취시 주푸 마터우(九曲溪竹符码头) 하차.

 

 

무이산(武夷山) 여행 시기

구곡계(九曲溪)의 물이 불어나는 6, 7, 9월을 포함한 봄, 가을이 여행하기에 좋다.

 1월이 가장 추운 계절로 평균 온도가 10℃쯤 된다. 산을 오르기에는 불편함이 없지만, 구곡계에서 뗏목을 탈 때는 무척 춥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동경했던 구곡계(九曲溪) 유람

 주자학의 대표 학자 주희가 이곳을 배경으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썼다.

 '골짜기마다 산이 돌고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돈다(曲曲山回转 峰峰水抱流).'라는 구절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다.

 조선 시대의 대표 유학자인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지은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화양구곡가(華陽九曲歌)>가 바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모범으로 삼아 지은 것이다.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이 가장 가 보고 싶어 했던 중국 여행지가 바로 무이산(武夷山), 그중에서도 구곡계(九曲溪)였다고 한다.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

  (산무산불수 수무산불청)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곡곡산회전 봉봉수포류)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아가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돈다.

 

 

일 곡 (一 曲)

"일곡 시냇가에서 낚시배에 오르니

만정봉이 맑은 물속 푸른 하늘에 잠겨있네

무지개 다리는 한번 끊어진 후 소식이 없고

골골마다 암봉에는 비취 빛 안개가 자욱하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일곡 -

 

 일곡 계곡의 북쪽에는 대왕봉이 솟아있고 대왕봉 왼쪽에 만정봉(亭峯)이 있다. 만정봉은 해발 500m 정도의 산으로,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 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곳에도 가학선관의 흔적이 있다.

 

수광석(水光石)

 수광석은 청천석(晴天石)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도 천애절벽이 계속되고, 암벽에는 마애석각의 글이 많다.

제시암에는 명나라때 척계광(戚繼光)이 지은 시도 있다. 척계광은 왜구를 정벌하여 명성이 높은 장수였는데 황제의 부름을 받아 북벌을 하러 가는 길에 무이산에 들러 이 시를 새겼다고 한다.

 "대장부가 이미 남쪽에서 왜구를 정벌하고, 이제 북쪽에서 오랑캐를 평정하려 하니, 황금관에 도포를 입고 다시 올 것을 기약하노라"(大丈夫旣南靖島夷 便當北平胡虜 黃冠布袍 再期游此...)"

 

대왕봉(大王峰)

 대왕봉은 무이산에서 가장 웅장한 바위산으로 옥녀봉 맞은편에 있다. 높이는 해발 300여m이지만, 구름을 뚫고 하늘을 받치고 우뚝 선 모습이 영웅의 형상을 하였다. 전설에서 대왕은 근면, 용감, 지혜의 미덕을 갖춘 이상적인 남성이었다.

 바위틈으로 좁은 길이 대왕봉 정상으로 통하는데 몸을 굽히고 무릎으로 기어 산 정상에 오르면 무이산 지역 일대가 한눈에 펼쳐진다. 

 

 무이구곡은 일곡에 이르러 숭양계(崇陽溪)로 들어간다.

 주자의 무이구곡가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읊어졌다. 무이구곡가로 인해 무이산의 구곡은 더욱 유명해졌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런 류의 노래를 지어 "뱃노래는 주자에서 시작된다(棹歌首唱自朱子)."고 하였다.

 

 

이 곡 (二 曲)

"이곡에 우뚝 솟은 옥녀봉이여

꽃을 꽂고 물가에 서 있으니 누구를 위해 꾸몄는가

도인은 황대몽(荒臺夢)을 다시 꾸지 않는데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_ 주자, 무이구곡가 중 이곡 -

 

 이곡에는 옥녀봉이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한 자태를 자랑한다. 옥녀봉 아래에는 목향담(沐香潭)이 있고, 옥녀봉 왼쪽에는 면경대(面鏡臺)가 있어 이곡의 산수는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이 수려하다. 주자의 이곡가는 이러한 경치를 읊은 것이다.

 

옥녀봉(玉女峰)

 이곡에 이르러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하다는 옥녀봉을 만난다. 정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절벽은 광택이 나서 마치 옥석을 조각한 모습으로, 절색의 소녀가 맑은 물가에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형상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옥녀는 옥황상제의 딸이었다. 하늘에 살던 옥녀(玉女)는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어 돌아갈 줄을 몰랐다. 우연히 대왕(大王)과 알게 되어 서로 사랑을 하여 자식을 낳고 인간세계에 살았다. 이를 본 철판도인(鐵板道人)이 옥황상제에게 고하자, 옥황상제가 크게 노하여 철반도인에게 옥녀를 잡아오도록 했다. 옥녀는 대왕과 같이 인간세계에서 살고자 하여 뜻을 꺾을 수 없었다. 철반도인은 마법을 써서 옥녀와 대왕을 돌로 만들어 계곡의 양쪽에 두어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옥녀봉과 대왕봉 사이에는 철판장(鐵板障)이란 병풍 바위(障)가 있는데, 철판도인이 대왕봉과 옥녀봉이 만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라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관세음보살이 대왕과 옥녀를 불쌍히 여겨 옥녀봉 맞은편에 면경대(面鏡臺)를 두어 서로 얼굴을 비춰보게 하였다고 한다.

 옥녀봉 아래에는 옥녀가 목욕했다는 욕향담(浴香潭)이 있고, 네모난 인석이 있다. 옥녀와 대왕의 정표라고 한다.

 

 

삼 곡 (三 曲)

"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노젖기를 그친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나무 밭이 바다가 된 것이 지금부터 언제런가

물거품같고 바람 앞 등불 같은 우리 인생이 가련하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삼곡 -

 

 삼곡에는 험준한 암벽으로 된 소장봉이 있고, 소장봉 바위굴에는 홍교판와 가학선관이 있다. 주자는 가학선관을 고대 중국의 남방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관(棺)으로 보았는데, 가학선관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읊고 있다.

 

소장봉(小藏峯)의 홍판교(虹板橋)와 가학선관(架壑船棺)

 와룡담을 돌아가면 또 천길 절벽의 소장봉이 나온다. 소장봉에도 아득한 절벽위 틈사이에 배모양의 목제 관이 있으니 홍판교(虹板橋)와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전설에 이르기를 가학선관은 신선이 하늘로 날아가면서 남긴 배(舟)로서 배안에는 유골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바람에도 썩지않고 천년을 그대로 있다.

 가학선관(架壑船棺)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관(棺)을 말하고, 홍교판(虹橋板)은 무지개 다리판이니 선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천애 절벽 위에 있는 가학선과 홍교판은 사람들에게 많은 호기심을 자극하여 신선의 전설을 담고 있다.

 주자는 가학선관을 고대 남방 소수민족이 사용하던 관이었다고 보았다. 무이 선관은 은(殷)나라 말기에서 시작하여 주(周)나라 초기까지 있었다고 하니, 3800여년 복건성에 살던 소수 민족의 유물이 된다.

 

 

사 곡 (四 曲)

"사곡의 양쪽에는 두개의 바위산이 있는데

바위틈 꽃에는 이슬이 맺혀 푸르르네

금닭(金鷄)이 울어 아침을 열지만 아무도 본 이가 없고

달은 텅빈 하늘에 가득하고 물은 웅덩이에 가득 차있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사곡 -

 

 사곡에는 거대한 암산인 대장봉과 선조대가 마주보고 있다. 대장봉 암벽 중간의 금계동굴(金鷄洞)에는 새벽을 알리는 금닭이 있었다고 하고, 그 아래에는 무이구곡에서 가장 깊은 와룡담(臥龍潭)이 있다. 대장봉과 선조대 절벽에 핀 꽃은 이슬을 머금고 있고, 새벽에는 금닭이 울고 밤에는 달빛이 와룡담에 그윽히 비치는 사곡의 정경을 읊었다. 

 

대장봉(大藏峯)

 사곡으로 돌아 들면 엄청난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이름하여 대장봉이라 했으니, 도가(道家)가 대장경(大藏經)을 숨겨둔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의 수십길 절벽에는 두개의 작은 굴이 있다. 위에 있는 굴을 구과암(鷗巖)이라 하는데, 굴안에는 벼(稻草)가 자란다. 언제 누가 갖다 놓았는지도 모르고 몇 백 년이 지났는지도 모르지만 지금도 스스로 열매를 맺고 자란다고 한다. 아래에 있는 굴이 금계동(金鷗洞)이다. 이 굴안에는 선관(船棺)이 있다.

 

제시암(題詩巖)

 대장봉 아래의 와룡담(臥龍潭)은 구곡 중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와룡담에 이르러 뱃사공은 길다란 대나무 삿대를 물속에 집어넣지만 끝에 닿지는 않는다.

 대장봉 건너편에 제시암이 있는데, 암벽에 석각의 시를 가득 새겨 놓았다. 무이산에는 400여 곳의 마애석각이 있다는데, 제시암이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선조대(仙釣臺)

 사곡의 북쪽에 선조대가 있으니, 신선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라고 한다. 선조대 절벽위 바위틈에는 낚시대 한개가 비스듬히 나와있다. 천년을 두고 썩지도 않고 그대로 있어 무슨 물건인지 알 수 없는데, 사람들은 강태공이 이곳에 와서 낚시질을 했다고 한다.

 

 

오 곡 (五 曲)

"오곡은 산이 높고 구름이 깊어

언제나 구름비에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숲 사이의 나그네를 알아보는 이 없고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오곡 -

 

 오곡은 무이구곡의 중심이다. 계곡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峰)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주자가 세운 무이정사가 있다. 이 시의 높은 산은 은병봉을 가리키고, 평림(平林)은 무이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이다. 산은 높고 구름이 깊어 연우가 항상 평림의 입구에 가득한데, 나그네 즉 주자가 수풀 속을 거닐 때 들려오는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는 감정을 노래했다. 이 노래 중에서 "뱃사공의 노래 소리에 만고의 수심이 깊어지네"의 "乃聲中萬古心"은 "애내성중만고수(愁)" 등으로 우리 민요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갱의대(更衣臺)

 갱의대는 신선이 잔치에 가려고(또는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은 곳이라고 하며, 또는 선인이 신선이 되어 날아간 곳이라고도 한다. 목욕갱의(沐浴更衣) 갱의승천(更衣昇天) -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을까? 옷을 갈아입고 하늘로 올라갔는가?

 

호리동(狐狸洞)

 경의대를 지나면 까마득한 절벽위에 작은 집이 있다. 호리동이라 하니, 여우굴이란 말이다. 명나라 때 저명한 도사의 도량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남명정(南溟靖)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주자의 애정 고사가 담긴 곳이다.

 

 

육 곡 (六 曲)

"육곡의 시퍼런 병풍 바위는 푸르른 물굽이를 휘감아 돌고

종일토록 이끼는 사립문을 덮고 있네

나그네가 노에 몸을 기대니 바위에서 꽃이 떨어지는데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고 봄빛은 완연하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육곡 -

 

 무이구곡은 육곡에 이르러 북쪽에 우뚝 솟은 쇄포암을 바라보며 휘감아 돈다. 쇄포암에는 수천 수만의 물줄기 자국으로 쭉쭉 내리뻗은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쇄포암 아래는 산을 등지고 계곡을 앞에 둔(面溪背山) 그윽한 곳이어서, 주자는 이곳에서 저절로 바위꽃이 떨어지고 원숭이와 새가 놀라지 않는 자연의 극치를 노래하였다.

 

향성암(響聲巖)

 육곡에 들어서면 계곡 양쪽에 높은 절벽이 막아, 여기에서 소리를 지르면 양쪽 절벽에 메아리가 부딪치며 멀리 퍼져나간다. 그래서 이름하여 향성암이다.

 향성암의 절벽에는 송(宋) 원(元) 명(明)대의 마애석각(磨崖石刻) 20여 개가 있다. 그 중에는 주자가 새긴 "서자여사(逝者如斯)"란 글도 있다.

 

- 쇄포암(晒布巖)

 육곡에서 크게 물굽이를 치는 곳에 무이산 제일의 바위산이 있으니 쇄포암(晒布巖)이다. 천유봉 아래로 도끼로 깍은 듯한 수십길의 바위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수직으로 내리뻗은 절벽에는 수천 수만의 폭포가 흐른 자국이 있어 마치 길다란 흰색 천을 걸어 햇볕에 말리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웅장한 모습이 신선의 손바닥 같다고 하여 선장암(仙掌巖)이라고도 하였다. 암벽 아래에는 "벽립천인(壁立萬)"이란 석각이 있는데 "만길 절벽"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천유봉(天遊峰 - 높이 : 750m)

 천유봉은 천길의 절벽위에 암봉이 우뚝 솟은 무이산 최고의 절경이다. 그래서 옛부터 천유봉을 무이산 제일의 경치(武夷第一勝景)라 했고, 천유봉에 오르지 않으면 무이산을 구경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실같이 이어진 좁은 길을 올라 정상에 이르면 수많은 봉우리가 내려다 보이고, 구곡의 돌아드는 모습이 완연히 눈에 들어온다.

 천유봉은 높이로 말하면 삼앙봉에 미치지 못하고, 우뚝한 모습으로 말하면 대왕봉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함으로 말하면 옥녀봉에 비치지 못하고, 험한 것으로 말하면 접순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천유봉은 육곡에 위치하여 절경이 제일이다.

 그래서 천유봉에 오르면 도교의 이상세계인 봉래선경(蓬萊仙境)에 들어선다고 했다. 천유봉 정상에 있는 천유각(天遊閣)은 도교의 천궁(天宮)을 본따서 만든 것이라 한다.

 

접순봉(接筍峰)

 천유봉 맞은편에는 첨예하게 솟은 바위산이 있다. 커다란 바위산에는 세갈래의 균열이 생겨 세 개의 암석같은데, 마치 대나무 순이 솟는 모양이다. 다동의 남쪽에서 올라가는 길은 좁은 계단이 까마득한 정상까지 가파르게 이어져 아찔한 느낌을 준다.

 전설에 의하면 접순봉 아래에 석당사(石堂寺)란 절이 있었는데 1명의 부지런하고 착한 승려와 99명의 게으르고 나태한 승려가 있었다고 한다. 깍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육병(肉餠)이라 부르는 세 개의 바위덩어리가 있는데, 게으른 99명의 승려가 떡이 된 것이라고 한다.

 

운와(雲窩)

 운와는 구름이 나온다는 굴이다. 굴속에서 항상 하얀 구름이 피어올라, 모이고 흩어지며 온 산에 퍼져 나가 운무(雲霧)의 환상을 이룬다

 무이산의 구름은 천만가지의 자태를 자랑하여 계절에 따라 구름 모양이 다르고, 아침 저녁으로 구름 모양이 다르고, 날씨에 따라 구름 모양이 모두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무이산의 구름은 운해(雲海), 운룡(雲龍), 불광(佛光), 홍교(虹橋), 탄운(呑雲), 와운(臥雲) 등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다동(茶洞)

 천유봉 오르기 전에 다동이 있는데, 무이산에서 가장 좋은 차가 나온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사방 주위로는 천길 절벽이 둘러싸서 시원한 피서처가 된다.

 무이산은 바위틈에서 자라는 암차(巖茶)가 유명하여 원나라 때에는 황실의 다원이 있었다. 무이산 암차는 중국 10대명차의 하나인데, 그 중에서 대홍포(大紅袍)가 가장 진귀하다.

 

무이정사(武夷精舍)

 천유봉 가는 길에 무이정사가 있다. 1183년에 주자가 만든 정사이다. 주자는 이곳에서 10년동안 있으면서 학문을 논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 무이정사에는 인지당(仁智堂), 은구실(隱求室), 지숙재(止宿寮), 관선재(觀善齋), 한서관(寒棲館), 만대정(晩對亭), 철적정(鐵笛亭) 등의 많은 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무이정사임을 알리는 팻말과 허물어진 건물만 남아있어 무이정사를 찾는 나그네의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무이산 대왕봉 아래에는 주자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이학정종(理學正宗)" 등의 현판과 주자상을 두었고 회랑에는 주자의 일생을 전시하고 있다.

 

무이궁(武夷宮)

 주자기념관 옆에는 도교의 궁관인 무이궁이 있다. 무이궁은 무이산에서 가장 오래된 궁관이다. 당나라 때인 742~755년사이에 설치되어 송나라 때는 300여 칸에 이르렀고 "충우만년궁(沖佑萬年宮)"이란 사액을 받았다. 송나라 때는 주자, 육유, 여조겸 등 25명의 유명한 학자가 충우관에 와서 제사를 주관하여, 매년 가을 무이군(武夷君)에게 제사하였다. 현재는 용정(龍井)과 만년궁(萬年宮), 삼청전(三淸殿) 등이 남아있다.

 

 

칠 곡 (七 曲)

"칠곡에 배를 몰아 푸른 여울에 올라서

은병봉과 선장암을 다시금 돌아보네

사람들은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지만

텅빈 하늘에는 석당(石堂)이 해맑게 솟아있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칠곡 -

 

 칠곡에는 달공탄(獺控灘)이란 여울이 있다. 달공탄에서 아래쪽을 보면 육곡에 은병봉과 선장암(쇄포암)이 보이고 석당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솟아있다. 배가 칠곡으로 올라감에 은병병과 선장암이 돌아보는 듯하고 석당이 하늘 높이 솟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다른 본에는 칠곡가의 뒷귀절을 "지난 밤 봉우리에 비가 내리더니, 나는 듯한 물줄기가 몇 줄기런가"라 되어 있다.

 

삼앙봉(三仰峰)

 칠곡에 들어서면 멀리 삼앙봉이 보인다. 해발 717m로 무이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커다란 세개의 봉우리가 층층히 일어나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렇지만 산이 높고 길이 험해 아직 계단이 없어 여기에 오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한다.

도원동(桃源洞)

 높은 산이 물가에 솟아 절벽을 이룬 금계동(金鷄洞)을 지나 방생담(放生潭)의 물이 돌아가는 곳에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 도원동으로 들어가는 산문이 있다

 도원동문을 들어서면 뽕나무와 연못이 있고 복사꽃이 만발한 이상세계가 그곳에 있다. 그래서 이곳은 인간세계 바깥의 무릉도원(世外桃源)이라 한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숭아 꽃은 아득히 물에 흘러가는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가 있으니 인간 세계가 아니로다

-도연명(陶淵明) -

 

 

팔 곡 (八 曲)

"팔곡에 바람 불어 구름이 개려 하는데

고루암(鼓樓巖) 아래에는 물이 돌아드네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말게

여기부터 속인은 올라갈 수 없다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팔곡 -

 

 팔곡은 산이 높아 물살이 빠르고, 각종 동물 모양의 바위가 많다. 고루암 아래에는 사자모양을 한 바위도 있고, 거북 모양을 바위도 있다. 그런 팔곡의 정경을 사람들은 별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느덧 신선이 사는 곳이 가까왔음을 말하고 있다.

 

품자암(品字巖)

 팔곡의 북쪽에는 3개의 커다란 바위가 품(品)자 모양의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품자암은 삼교봉(三敎峰)이라고도 하는데,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의 삼교를 가리킨다.

 품자암이란 이름에서 보듯이, 무이산에는 유· 불· 도의 삼교가 모두 들어있다. 유가로 말하면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요, 불가로 말하면 극락국(極樂國)이요, 도가로 말하면 도원동(桃源洞) 이다.

 

쌍유봉(雙乳峰)

 쌍유봉은 팔곡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팔곡의 북쪽에 있다. 바위의 풍만한 모습이 어머니의 젖가슴과 같다고 하여 쌍유봉이라 한다. 연꽃 봉우리가 나란히 있는 모습이라고 하여 병연봉(幷蓮峰)이라고도 한다.

 

수상동물원

 팔곡에는 사자, 낙타, 코끼리, 거북이 모양의 바위가 많아 물위의 동물원이라고 부른다.

 

 

구  곡 (九 曲)

"구곡에 다달으니 눈앞이 활연히 트이는데

상마(桑麻)에 맺힌 이슬, 평천(平川)을 바라보네

뱃사공은 다시금 무릉 도원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이 바로 인간 세계의 별천지라네"

- 주자, 무이구곡가 중 구곡 -

 

 평천은 구곡의 끝에 있는 지명이다. 이곳은 개천이 평평하게 흐르는데, 뽕나무 삼나무가 들을 채우고 기름진 논밭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어 무릉도원의 경치라고 한다. 이곳에 와서 또다시 별천지를 찾으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이상세계라고 노래하였다.

 

뗏목 뱃놀이

 무이구곡 유람은 상류인 구곡에서 시작하여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일곡에 이른다. 뗏목은 굵은 대나무 7-8를 엮은 것을 두개씩 잇대어 만들었는데 6개씩의 좌석이 있다. 뗏목의 앞뒤에 뱃사공이 있어 삿대를 저어간다.

 

백운암(白雲巖)

 구곡에는 백운암이 있다. 남송때 학자인 여조겸(呂祖謙)이 머물며 학문을 닦던 곳이다.

 백운암 옆에는 극락국(極樂國)이란 바위굴이 있다. 극락은 불교의 이상세계로서, 극락국에서 거주하면 마음을 정화하여 인간의 번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한다. 극락국은 암벽 중간에 걸려있어 "무릎으로 기고 뱀같이 업드려서(膝行蛇伏)" 가야 한다고 한다.

 

 

 

무이산(武夷山) 수렴동(水簾洞)

수렴동(水簾洞)

 수렴동(水簾洞)은 무이산에서 가장 큰 바위굴이다. 수렴동은 물줄기가 반은 떨어지고 반은 흩어지는 경관이 마치 발(簾(발 렴))을 친 것 같아 수렴동이라 한다.

 높이는 100여m에 이르는데, 정상이 비스듬히 앞으로 나와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암벽 위에는 물이 흘러 정상에서 아래로 폭포를 이룬다.

 물이 떨어져 생긴 웅덩이에는 용이 산다고 해서 목룡담(沐龍潭)이라 한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을 때는 물줄기가 허공에 떠서 무려 100여m를 내리친다고 하니,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 물줄기가 날아 흘러 곧바로 삼천 척이나 떨어진다. 웅장하고 멋진 폭포의 모습을 그린 말)"이란 말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삼현사(三賢祠)

 수렴동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는 집 한채가 있으니 삼현사(三賢祠)이다.

 삼현사는 유자휘(劉子翬, 1101~1147)와 주자(朱子, 1130~1200), 유보(劉甫, 1110~1181)를 모신 사당이다.

 유자휘는 무이산 오부리(五夫里)에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에 은거하여, 병산선생(屛山先生)이라 불린 남송 때의 학자이다. 유자휘는 주자의 스승으로서, 주자를 데리고 수렴동에 와서 학문을 가르쳤다. 그래서 주자가 소년기에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스승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유보도 수렴동에 은거하여 주자, 채원정(蔡元定, 1135~1198) 등과 교유한 남송 때 학자이다. 수렴동 암벽에는, 1181년 7월 23일에 주자와 채원정이 유보의 초청을 받고 수렴동을 유람했다는 내용의 주자가 손수 쓴 글이 남아있다.

 1147년 유자휘가 서거한 후 수렴동에 병산선생사당을 세우고 주자가 쓴 "백세여견(百世如見: '영원히 뵙는 듯하다'는 뜻)"의 현판을 붙였다. 그 후 유보와 주자가 서거한 후 유자휘의 좌우에 모시고 삼현사라 칭했다.

 청나라 때는 승려가 삼현사를 점거하기도 하고, 후에는 공자, 노자, 석가를 모시고 삼교당(三敎堂)이라 한 적도 있는데 1944년에 다시 삼현사의 옛 이름을 회복하였다.

 

 

◈ 바늘처럼 가는 절벽 산책로 일선천(一线天)

 산신령이 요술을 부린 것 같은 좁은 절벽 틈새를 걷게 되는데, 그 틈이 얼마나 비좁은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면 가느다란 선처럼 보인다. 몸무게가 90kg 이상이거나 폐쇄 공포증이 있다면 걷지 않는게 좋다. 절벽 사이 공간이 점점 비좁아지면서 중간에 몸이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체험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중간에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올 수 없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어떻게 해서든 전진해야 한다.

 이 스릴을 느끼려는 중국인들이 엄청 몰린다. 성수기에는 30분 이상 서서 기다려야 일선천 초입에 들어설 정도다. 일선천을 통과하면 산책로를 따라 호소암까지 걸어서 갈 수 있다. 그러나 빠른 걸음으로도 30분 정도 걸리는 짧지 않은 길이다. 일선천 초입으로 돌아 나와서 셔틀을 타고 호소암까지 가는게 낫다. 걷는데 너무 힘을 빼면 호소암 정상까지 등반이 벅찰 수 있기 때문이다.

* 가는 법: 셔틀버스 타고 호소암(虎啸岩) 하차

 

 

◈ 다채로운 단하지모를 볼 수 있는 호소암(虎啸岩)

 호소암(虎啸岩)은 천유봉과 함께 무이산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할 풍경구다.

 기암괴석 위에 거대한 동굴이 있는데 바람이 드나들 때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가 나서 이름 지어졌다. 구곡계의 2곡 남단에 위치한 해발 510m 봉우리로, 340개 계단을 오르면 정상에 도착한다. 계단이 가파르고 험준해서 호한파(好汉坡)라고 부르는데, 오르면서 바라보는 풍경과 정상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 모두 절경이다.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40분 만에 도착한다.

 무이산의 지질은 단하지모인데, 단하지모란 붉은 사암이 오랜 세월 지질 운동을 거치면서 풍화· 퇴적된 단층 지형을 가리킨다. 천유봉이 구곡계의 푸른 물결과 단하지모의 기이한 산세를 대비해서 바라볼 수 있는 곳이라면, 호소암은 다채로운 단하지모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호소암을 오르다 보면 멀리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봉긋 솟은 쌍유봉(双乳峰)이 눈길을 끈다. 정상의 전망대(观景台)에서 표지판을 따라 3~4분 정도 걸으면 정명교(定命桥)가 나온다. 두 봉우리를 돌다리로 연결해 놓았다. 그 밑은 한없이 깊은 낭떠러지라 아찔하다.

* 가는 법: 셔틀버스 타고 호소암(虎啸岩) 하차.

 

 

무이산(武夷山) 최고의 절경 천유봉(天游峰)

 무이산(武夷山)의 핵심 봉우리다.

 "천유봉에 오르지 않으면 무이산을 보았어도 본 것이 아니다.'란 말이 있을 정도다.

 최고 해발이 409.6m로 지상과의 낙차를 감안하면, 실제 높이는 215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상까지 848개의 계단이 지그재그로 이어지면서, 고봉을 오르는 스릴을 느낄 수 있다. 오르는 길이 단선인데다 무이산의 최고 하이라이트로 꼽혀 언제나 여행객 행렬이 이어진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가야 여유롭게 등산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중턱에 있는 반산정(半山亭)에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끝내준다. 거대한 단하지모 봉우리를 U자 모양으로 감싸 흐르는 비췻빛 구곡계이 눈에 들어온다. 반산정에서 정상까지는 경사가 급하다. 천천히 조심해서 오르자. 지상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이면 오를 수 있다. 지상에서 ¥3이면 살 수 있는 음료를 산정에서는 ¥12에 판매하니, 음료수와 간식을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내려가는 길은 따로 있다. 표지판에 한글로도 적혀 있으니 그 방향을 따라 내려오면 된다. 중간에 중정공원(中正公园)이라고 적힌 패방을 지나 30분 정도 내려오면, 천유봉 산행 시작점에 도착한다.

 천유봉으로 오기 위해 셔틀버스를 탔던 지점 방향으로 걷다 보면 자양서원(紫阳书院)이 나온다. 주희가 무이산에 기거하며 10년간 성리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학정종(理学正宗) 건물 안에 주희가 제자를 가르치던 장면을 밀납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중앙 주희상 뒤로 충효염절(忠孝廉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청렴하고 절개를 가져라)이라 적힌 사자성어가 눈에 띈다.

* 가는 법: 천유봉(天游峰) 가는 셔틀버스 탑승.

 

 

◈ 한가로운 차밭 산책로 대홍포(大红袍)

 무이산(武夷山) 최고의 명차인 무이암차(武夷岩茶) 생산지이다. 무이산 풍경구의 북쪽 출입구에서 가깝다. 무이암차는 이름처럼 절벽 틈에서 자란다. 대홍포는 우롱차(乌龙茶)의 일종으로, 봄에 찻잎이 날 때 햇빛을 받은 모습이 마치 차나무가 불에 타오르는 것처럼 붉다하여 이름 붙여졌다.

 전설에 따르면 병에 걸린 황후가 이 차를 마시고 낫자, 임금이 자신의 붉은 용포를 차나무에 하사했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고도 한다. 대홍포는 무이산에서 생산되는 무이암차 중에서 으뜸으로 꼽힌다.

 거대 바위 사이로 차밭이 펼쳐지는 대홍포 풍경구는 보성 녹차밭의 모습과는 다르다. 이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도 있지만, 완만하게 펼쳐진 산책로를 따라 조용하게 걷고 싶다면 방문해도 좋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한가롭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모수다료(母树茶寮)이라고 적힌 노천 찻집이 나온다. 찻집 앞 검은 절벽에 대홍포 차나무의 모수(母树) 6그루가 자라고 있다. 수령은 350년 정도 되었고, 한해 생산되는 양이 500g에 불과하여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2007년 7월을 마지막으로 차 생산은 끝이 났다. 시간이 여유 있고, 걷기를 좋아한다면 대홍포에서 수렴동(水帘洞)까지 더 걸어도 좋다. 두 코스를 걷는 데는 2시간 이상 필요하다.

* 가는 법: 셔틀버스 타고 대홍포(大红袍) 하차

 

 

주희(朱熹, 1130~1200)의 돌무덤

 문인 황간(黃幹, 1152~1221)이 쓴 주자행장(朱子行狀)에 의하면  주자(朱子)의 조적(祖籍)은 무원(婺源)이며, 태어나기는 남검 우계이다. 처음 우거한 곳은 숭안(崇安) 오부리(五夫里)이고 만년엔 고정(考亭)에 자리를 정하였다. 묘소는 건양현(建陽縣) 당석리(唐石里) 대림곡(大林谷)으로 되어있다.

 봉분은 물론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사성(莎城)까지 모두 강에서 주워온 돌로 남김없이 뒤덮여 있었다. 부인 유씨와 함께 묻혀있다.

 복건(福建) 지방은 모두 그렇게 묘를 만든다고 한다.

 주희의 무덤은 북서쪽에 자리잡고 남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성벽은 조약돌로 쌓고 중앙은 봉인하고 그 뒤에는 큰 돌비를 세웠다.

 무덤은 봉황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무덤의 위치는 주희가 일생 동안 택한 것으로 뒷면에 구룡바위가 있고, 토분은 자갈로 원을 그리며 쌓았고, 약 200㎡, 묘지의 보호구역은 약 15,000㎡이다.

 무덤 앞에는 상석과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향로가 있고, 무덤 앞의 양쪽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인 망주석 있다. 높이 약 2m의 비석에는 "송선현 주자 부인유씨 묘(宋先賢朱子夫人劉氏墓)" 라고 적혀있다. 청나라 강희제 56년(1717)에 세웠다.

 돌로 뒤덮여 있는 것을 제외하면, 이 사상사의 거인이 잠들어 있는 무덤은 평범한 규모이다. 아니 초라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하기야 생전에 무슨 대단한 권세를 누린 것도 아니고, 충만한 부를 누린 것도 아니었으니, 학자다운 무덤이다.

 1980년대 이후, 주희의 묘는 푸젠성(福建省)의 성급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 유학의 아버지 주자(朱子, 1130~1200)

 본명은 주희(朱熹).

 송대의 유학자이자 사상가.

 송의 유학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하여 주자학을 완성시켰다.

 우주의 구성 원리를 형이상학의 '이(理)'와 형이하학의 '기(氣)'로 보았으며, 훈고학(訓詁學: 유교 경전의 글자와 구절을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을 주된 방법으로 하는 학문)의 사상적 한계를 벗어나 우주론적인 체계를 정립했다.

 그의 유학은 주자학이라고 불리며, 후대 동아시아 문화권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정착되었다.

《사서집주(四書集註)》, 《태극도설(太極圖說)》, 《가례(家禮)》등 40권에 달하는 사서를 남겼다.

 

 주자(朱子)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존칭으로, 그는 송 대의 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시켰다. 그의 학설은 "공경을 기본으로 삼아 그 근본을 확립하고,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경지에 이른 후, 자신의 입장에 대입하여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라는 개념이 중심으로, 명· 청 시대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의 사상과 저술, 교육론은 조정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공자와 맹자 다음으로 숭배되었고, 풍부한 독서와 세밀한 분석을 중시하는 그의 학풍은 후세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의 주변 국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주자(朱子)는 아버지 주송(朱松)의 부임지였던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그와 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희(熹)이며,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이다. 다섯 살에 《효경(孝敬)》을 배웠으며, 사색을 즐겨 하늘 저 끝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대과 급제자들의 연령은 평균 35세이었으나, 그는 18세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1151년에는 이부(吏部)의 임관시험에도 합격하여 천주(泉州) 동안(同安) 지방의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임지로 향하기 전 유학자 이동(李侗)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1153년에야 비로소 부임했다. 성리학의 정통 후계자였던 이동에게서의 수학으로 그는 마침내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등의 사상을 이어받게 되었다.

 

 1162년 효종(宋孝宗, 남송 제2대 황제, 1127~1194, 재위: 1162~1189)이 즉위하면서 치국에 대한 방책을 논의할 것을 명했다. 주자는 상서를 올려 문학을 배척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기 위해 지식을 닦는 일)와 성의정심(誠意正心: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을 주장하며 이학(理學)으로서 황제를 보필하고자 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1163년 그는 다시 격물치지(格物致知 : 사물의 이치(理致)를 연구하여 자기의 지식을 확고하게 함 )를 진언했으며, 금나라가 침입하여 조정이 주전(主戰)과 주화(主和)의 두 파로 나뉘자 주화의 폐단을 들면서 주전의 입장을 강력히 밝혔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가열되는 파당 정치에 염증을 느껴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주자(朱子)는 정이정이(程頤)의 "천지 간에 존재하는 이(理)는 유일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만물에 존재한다."라는 사상을 공부했으며, 장식(張栻)과 교제하면서 심성론(心性論)을 확립했고, 여조겸(呂祖謙)과 교류하면서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주장을 담은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했다. 한편 그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육상산(陸象山)을 만나 학문을 통해 만물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178년 주자는 남강군(南康軍)의 지주에 임명되었고, 그곳에 백록동 서원을 다시 세워 육상산 등의 명사들을 초빙하여 강학을 실시했다. 당시 서원은 사립학교 같은 개념으로 관립학교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예비학교였던 것에 비해 진정한 학문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곳이었다.

 

 주자(朱子)는 민생을 걱정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1181년 상평차온공사가 되었을 때는 마을에 곡식창고인 사창을 설치하여 춘궁기에 구제미를 대여해 줌으로써 쌀값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무사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건의했다. 또한 장주(漳州)와 담주(潭州)의 지주를 지낼 때는 조세를 감면하고, 풍속을 개선하고, 학교를 세웠다.

 

 영종(宋寧宗, 남송 제4대 황제, 1168~1224, 재위: 1194~1224)이 즉위한 후 주자는 시강으로 발탁되어 《대학(大學)》을 강술했다. 그러나 그는 태황태후의 친척으로써 권력가였던 한탁주(韓侂胄, 1152~1207)를 비판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다가 한탁주의 눈에서 벗어나 불과 45일 만에 파직되었다. 한탁주는 주자를 수반으로 하는 학파를 '위학(僞學)'이라고 탄압하고, 주자를 따르는 무리 59명을 '위학당적(僞學黨籍)'에 기입해 박해했다. 그러나 주자는 1196년 관직을 그만두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계속했다. 1200년 주자는 몇 명 남지 않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뒤 '문(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227년 태사(太師)로 증정된 후 휘국공(徽國公)에 봉해졌으며, 1241년 공자의 사당에 모셔졌다.

 

 주자(朱子)는 공자 이후 경전에 주석만을 다는 훈고학적 유학의 한계를 탈피하고 개인의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통치의 기반이 되는 학문으로 재탄생시켰다. 한편 그는 북송 시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등 유학자 다섯 명의 사상을 종합하여 발전시켰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와 기는 온전한 하나로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한편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일어나서 나타나지만 불순한 기로 인해 악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로 이루어진 우주와 만물은 태극에 의해 생성되고 움직이며, 만물은 각각의 태극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각각의 태극은 각자 완전하다고 했다.

 

주자(朱子, 1130~1200)의 권학문(勸學文) - 우성(偶成: 우연히 이루어짐. 뜻하지 않게 지어진 시)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물위 금일불학 이유내일)   오늘 배우지 않고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물위 금년불학 이유내년)   금년에 배우지 않고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아라.

 日月逝矣歲不我延 (일월서의 세불아연)   날과 달은 가고 세월(歲: 해)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鳴呼老矣是誰之愆 (오호노의 시수지건아)    늙었구나.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겠는가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 학난성)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一寸光陰不可輕 (일촌광음 불가경)   짧은 시간이라도 가볍게 여기지 말아라.

 未覺池塘春草夢( 미각지당 춘초몽)   연못가 봄 풀은 꿈을 아직 깨지 못했는데

 階前梧葉已秋聲 (계전오엽 이추성)   계단 앞 오동잎이 이미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주자(朱子)는 과거 급제 후 50여 년간의 생애 중 40여 년을 강학에 힘썼다.

 확실하게 문하생으로 밝혀진 수만 해도 530여 명에 달하며, 저술 역시 방대한 양이다.

 그는 '논맹집주혹문(論孟輯註或問)', '시집전(詩集傳)', '주역본의', '역학계몽(易學啓蒙)', '효경간오(孝經刊誤)', '가례(家禮)', '소학근사록(小學近思錄)', '대학장구', '중용장구', '석존예의(釋尊禮儀)', '맹자요로', '예서', '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 '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 등 약 80여 종에 이르는 저술을 남겼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서집주(四書集注)'로, 유교의 네 가지 경전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이르는 '사서(四書)'라는 명칭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무이산(武夷山) 먹거리

 대부분의 식당 앞에 채소 좌판이 깔끔하게 펼쳐져 있다. 원하는 야채를 고르고, 요리 방식을 주문하면 그대로 요리해 주는 형태라서 중국어를 모르면 주문하기 어려울 수 있다. 두자취에서도 가장 번화한 다왕펑루(大王峰路) 일대에 KFC와 더커스(德克士, Dicos) 햄버거 가게가 있다.

 

교정 활어 마을(桥亭活鱼小镇)

 현지인들 사이에서 모임, 외식 장소로 인기다. 음식이 깔끔하고 분위기와 서비스도 좋은 편이다. 민물고기를 쓰촨식으로 매콤하고 얼얼하게 조리한 카오위(烤鱼), 수이주위(水煮鱼), 생선 머리를 후난식으로 매콤하면서도 담백하게 조리한 위터우왕(鱼头王)이 메인 요리이다. 메뉴판에 사진이 있어서 주문하기 어렵지 않다.

• 위치: 武夷山市 度假区 大王峰北路 49号 兵哥根雕 2楼

• ☎: (0599)531-8977

• 이용시간: 10:00~22:00

• 요금: 1인 ¥50~

• 가는 법: 6번 버스 타고 화차이(华彩) 정류장 하차, 도보 5분.

 

1호 계어관(壹号溪鱼馆)

 민물고기 요리 전문점으로 소박한 가게 분위기처럼 농가 요리를 주로 판매한다. 생선을 담백하게 쪄낸 칭정훙옌위(清蒸红眼鱼)가 대표 메뉴이고, 버섯볶음, 두부 요리 등 볶음 요리가 맛있다는 평이 많다.

• 위치: 武夷山市 度假区 三菇街 邮电局前老街(邮电局前三湘卤味对面的玉华街50米最后一家)

• 이용시간: 09:30~23:30

• 요금: 2인 ¥80~

• 가는 법: 6번 버스 타고 싼구환다오(三姑环岛) 정류장 하차, 우전국 방면으로 도보 10분.

 

화원 중식당(华苑中餐厅)

 무이산 두자취에서 고급 호텔로 손꼽히는 위에 화 호텔 부속 중식당이다. 맛이 담백하고 짜지 않은 무이산의 토속 음식 전문점으로 유명하다. 점심, 저녁 뷔페의 음식이 다양하고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가격은 ¥198으로 비싸다.

• 위치: 武夷山市 度假区 大王峰路 悦华酒店 1 楼

• ☎: (0599)523-8999

• 이용시간: 07:00~22:00

• 요금: 1인 ¥100~

• 가는 법: 6번 버스 타고 타이양청스창(太阳城市场) 정류장 하차, 도보 5분.

 

 KFC(肯德基)

 KFC는 혼자 여행하는 외국인이 무이산 두자취에서 한 끼 해결하기 좋은 곳이다. 주변에 식당이 많지만 음식 재료를 어떻게 요리해 달라고 말로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 꺼려지는 이들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없다. 옆집 라오싸이싱동 카페이관(老塞行动咖啡馆)의 커피 맛도 좋다.

• 위치: 武夷山市 度假区 大王峰路 武夷风情商苑(近三姑环岛)

• 이용시간: 06:00~23:00

• 요금: 1인 ¥30~

• 가는 법: 6번 버스 타고 싼구환다오(三姑环岛) 정류장 하차.

 

 

무이산(武夷山) 숙소

 무이산 풍경구의 남쪽 출입구와 북쪽 출입구를 잇는 6km 남짓한 대로변이 두자취(度假区)이다. 이 일대에 숙소가 길게 늘어서 있는데, 특히 남쪽 출입구에서 버스로 2~3정거장 거리에 있는 태양성 일대가 머물기 좋다. 음식점과 마켓이 즐비하다.

 

금강지성(Jinjiang Inn, 锦江之星)

 KFC 바로 맞은편에 있는 저가 체인 숙소다. 객실에서 무선 인터넷이 잘 잡히고, 여행자에게 필요한 식당, 기차표 판매 대리점, 중국 은행이 가까이 있어 편리하다. 요금에 따라 객실 크기, 창문의 크기와 방향, 침대 크기가 달라진다.

• 위치 : 武夷山市 三菇度假区 大王峰南路10号

: (0599)517-3999

• 요금: 2인실 ¥149~179

• 가는 법: 6번 버스 타고 싼구환다오(三姑环岛) 정류장 하차.

 

세븐 데이즈 인(7 Days Inn, 7天酒店)

 위치가 상당히 좋다. 옆에 기차표 판매 대리점, 중국 은행이 있고, 남쪽으로 300m 정도 걸으면 KFC가 있다. 배낭여행자들을 위해 세탁기도 설치해 놓았다. 객실은 요금에 따라 규모, 침대 크기, 창문의 방향과 크기가 다르다. 샴푸와 바디 샴푸는 구비돼 있으나 1회용 칫솔과 비누는 없다. 객실에서 무선 인터넷이 잘 잡힌다.

• 위치: 武夷山市 三菇度假区 大王峰北路6号

: (0599)523-9888

• 요금: 2인실 ¥152~209

• 가는 법: 6번 버스 타고 싼구환다오(三姑环岛) 정류장 하차, 중국 은행 방면으로 도보 5분.

 

시티 118 체인 주점(都市118连锁酒店)

 외관은 딱히 좋아 보이지 않는데, 객실은 3성급 이상 수준이다. 침대가 널찍하고 이불이 깔끔하다. 객실에서 무선 인터넷도 잘 잡힌다. 미끄럼 방지에 신경 쓴 샤워 부스에서 뜨거운 물도 잘 나온다. 숙소 바로 앞이 버스정류장이라서 우이 산을 오가기도 편리하다.

• 위치: 武夷山市 三姑度假区 大王峰路 红袍街站台

: (0599)525-8222

• 요금: 2인실 ¥159~229

• 가는 법: 6번 버스 타고 훙파오부싱제(红袍步行街) 또는 솽리(双利) 정류장 하차.

 

베스트 웨스턴(九曲度假酒店)

 구곡계 뗏목을 타는 싱춘 부두에 있다. 베스트 웨스턴 체인 중 하나로 이 지점은 리조트 형식으로 지었다. 실외 수영장과 넓은 정원이 투숙객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객실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룸 면적이 넓은 편이다. 여유롭게 휴가 분위기를 즐기기에 적합하다.

• 위치: 武夷山市 星村镇 九曲花街C区(武夷山度假区)

: (0599)526-2888

• 요금: 2인실 ¥488~678

• 가는 법: 우이산 남풍경구에서 싱춘마터우(星村码头) 가는 셔틀버스 타고 종점하차.

 

 

 

스타투어(Star 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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