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蘇州, 쑤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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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전체가 운하로 이루어진 곳 소주(蘇州)

 "上有天堂, 下有蘇杭.(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杭州(항주)와 함께 중국에서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양자강 삼각주 평원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물의 도시이다. 그리고 정원庭園(정원)과 물로 대변되는 중국 남방의 대표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기온은 온난습윤하며, 교통이 매우 발달되어 있다. 전체 면적은 8,488㎢인데, 그 중 평원이 4,654㎢를 차지한다. 인구는 약 710만 명(2022)이며, 그 중 시내 거주 인구는 105만 명이다.

 

 BC 514년에 도시가 성립되었으며, 현재까지 25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서한 초기에는 동남부의 최대의 도시로 번영하여 "사주지부(絲綢之府: 비단의 도시)", "어미지향(魚米之鄕: 바다가 가까워 살기 좋은 곳)", "원림지도(園林之都: 정원의 도시)" 등으로 칭해졌다. 지리적 장점과 견직물 산업의 활성화로 예로부터 부유한 상업 도시로도 유명하다.

 

 이때에 소주에 세워진 탑들이 많아서 지금도 송대의 탑이 가장 많이 남겨져 있고, 소주의 자랑인 정원도 이때부터 많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명, 청대에 이르러서도 그 명성이 덜하지 않았고, 지리적 장점과 견직물 산업을 활성화시켜 부유한 상업 도시로서 그 명목을 계속 유지해 왔다.

 

 또한, 도시의 발달과 더불어 소주의 정원도 유명해져 "천하의 원림은 강남에 있고, 그중 소주의 정원이 가장 으뜸이다"라는 말을 탄생시켰다. 소주의 정원은 정교함이 특징으로 중국 남방 고전원림건축예술의 정화라 할 수 있다. 송대부터 이어진 정원은 200가구에 이르렀고, 지금은 10군데 정도가 복원되어 외부에 개방되고 있다. 그 중 송대의 창랑정(滄浪亭), 원대의 사자림(獅子林), 명대의 졸정원(拙政園)과 유원(留園)이 가장 대표적인 강남의 원림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쑤저우(蘇州, 소주) 역사

 쑤저우는 BC 484년경 건립되어 얼마 동안 오(吳)나라의 수도로 있었다. 그러나 진(秦: BC 221~BC 206)이 들어선 후 장강 남쪽, 즉 지금의 장쑤 성과 저장 성(浙江省) 대부분을 관할하는 회계군(會稽郡)의 군청소재지인 우셴이 세워졌다.

 

 춘추전국 시대, BC 514년 오왕 합려(闔閭, ?~BC 496,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제24대 임금이며, 제6대 왕, 재위: BC 514~496)가 나라를 세우고, 현재 쑤저우가 있는 지역에 성을 만들었다. 합려는 BC 496년 호구(虎丘)에 묻혔다.

 BC 473년 오나라는 월나라(越)에 패망하였다.

 월나라도 BC 306년에 초나라(楚)에 패망하게 된다.

 이로써 쑤저우의 황금기는 끝이 나고, 2,500년 동안 그 고대도시는 반문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AD 129년 후한(後漢)은 회계군을 분리하여 오군을 설치하고 쑤저우를 군청소재지로 삼았다. 쑤저우라는 이름은 수(隋581~618)가 중국 남부를 통일한 589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대운하의 건설로 중국의 대곡창지대로 급성장한 지역의 행정·상업 중심지가 되었다. 당(唐:618~907)은 갑자기 커진 이 도시를 2개의 현으로 나누었다. 당 몰락 후의 정치적 분열기에 이 지역에서 일어난 오월(吳越)이라는 독립정권은 타이후 호 주변 지역에 대규모 간척사업을 실시했다. 쑤저우는 송(宋: 960~1279)· 원(元: 1279~1368) 시대에도 계속해서 번영을 누렸다.

 

 13세기에 이 도시를 방문한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 마르코 폴로도 쑤저우의 화려함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양쯔 강 삼각주에 토사가 쌓이고 계속된 관개·간척 사업으로 바다에 접근하는 일이 불가능하게 되기 전에는 쑹장 강(松江)과 쑤저우 강(蘇州河)을 통해 곧장 바다로 나갈 수 있었으므로, 얼마 동안 외국선박이 정박하는 항구 구실을 했다.

 

 명대(1368~1644)와 청대(1644~1911) 초기, 쑤저우의 번영은 최고조에 달했다. 수많은 지주(地主) 가문들의 근거지로서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규모 정원들이 많은 작은 연못 주위에 들어섰다. 이 도시의 부유함은 견직업과 자수 같은 부차적인 수공예 등에서 비롯되었다. 쑤저우는 또한 상업 자본의 주요출처였으며, 재정· 금융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태평천국운동(1850~1864) 기간인 1860~1863년에 걸쳐, 이 운동의 지도자 이수성(李秀成)이 지휘하는 태평군이 쑤저우를 점령하고 있었다. 쑤저우는 태평천국의 개혁정책이 효과적으로 시행된 몇 도시 가운데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파괴되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많이 복구되었으나 상업상의 패권을 놓고 이웃 도시 상하이(上海)와 겨루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된 후 1896년 이 도시는 대외무역에 개방되었으나 중요한 성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열강(列强)의 경쟁으로 대부분 소규모 수공업 형태로 운영되던 이 지역의 견직업이 심한 타격을 입었다. 이 무렵 공단과 면직물을 제조하는 몇 개의 근대식 공장이 설립되었으며 대형 전기발전소도 들어섰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근대식 공장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쑤저우는 1937~1945년 일본에 점령당했다.

 

 1908년 쑤저우와 상하이· 난징(南京)을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 노선이 개통되었다. 1936년 이 노선과 상하이-항저우(杭州) 간 주 노선을 자싱(嘉興)에서 연결하는 지선이 건설되었다. 또한 간선도로를 이용하여 장강 삼각주 지역 내에 있는 쿤산(昆山)· 창수(常熟) 및 상하이·항저우로 갈 수 있다. 그러나 운송수단으로는 수로를 많이 이용한다.

 

 이 도시는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20세기초 쑤저우대학교와 쑤저우미술대학이 설립되었으며 얼마 후 쑤난(蘇南) 공업대학과 양잠전문학교도 세워졌다. 1950년대말 쑤저우는 전통 수공예의 도제(徒弟) 양성체제로 인해 명성을 얻었다.

 

 1950년대 철강공장이 들어섰으나 중공업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견· 면직물 산업은 대규모 산업으로 재건되었다. 쑤저우는 사찰· 누각· 석각벽화(石刻壁畵) 등과 함께 150여 개의 우아한 정원을 자랑하는 도시이다. 1978년 재건된 중국정원협회는 국제적인 학술교류단체를 조직했다.

 

 

추천 자전거 투어

 소주(蘇州)는 작고 아담한 도시로, 다리품을 팔아도 그리 힘들지 않은 곳이다. 버스를 타더라도 한 버스노선에 볼만한 관광지는 거의 다 들어 있으며, 소주반점(蘇州飯店)과 고소반점(故蘇飯店)사이의 자전거 렌탈가게에서 자전거를 빌려 하루종일 돌아다닐 수도 있다.

 자전거로 하이킹을 하면서 여유로운 시가지 풍경과 푸른 가로수, 길 옆을 흐르는 수로를 맘껏 감상할 수 있다. 또 소주는 유명한 운하도시로 운하옆의 주택가가 있는 독특한 풍경을 볼 수도 있다. 이러한 풍경은 소주 길가나 상점에서 파는 채수묵화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또 운이 좋아 저녁노을이 지는 풍교에 서서 노을에 비친 운하를 바라볼 수 있다면, 평생에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소주(蘇州) 실크

 소주(蘇州)의 비단과 자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대표적인 예술품으로, 관광지나 쇼핑 센터에서 실크로 만들어진 실크 이불, 이불 덮개, 스카프, 잠옷, 블라우스 등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지나치게 값이 싼 것들은 나일론이 섞여 있는 것일 수 있으므로 품질을 잘 살펴보고 구입하는 것이 좋다.

 비단 외에도 그림, 서예, 비취 공예품, 부채 등도 인기가 많다. 또한 차, 월병, 벨벳 담요 등은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특산품이다.

 

 

소주의 기후(℃)

도시명

구분/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소 주

(蘇 州)

최고평균

7.8

10.5

13.1

23.0

25.1

27.8

34.0

28.1

24.2

23.6

19.1

12.8

최저평균

1.2

4.2

6.6

13.9

17.6

21.5

26.6

21.0

17.1

15.5

10.3

3.4

평 균

3.4

4.6

8.9

14.8

19.5

24.0

28.5

28.0

23.4

17.9

12.1

6.0

강수량mm

39.0

58.8

81.2

102.3

114.5

152.0

128.2

133.0

155.6

60.5

51.2

34.7

 

 

 관광 명소

◈ 중국 4데 정원중의 하나인 拙政園(졸정원)

 소주(蘇州) 동북쪽에 위치해 있고, 명 정덕(鄭德) 4년(1509년)에 지어졌다. '졸자(拙者)가 정치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유원(留園), 이화원, 승덕이궁(承德離宮)과 함께 중국 4대 정원에 꼽힐 정도로 매우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곳이다. 미경으로 인해 홍루몽 대관원(大觀園)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졸정원은 명나라의 왕헌신이 조성했다고 전해지는데, 화원은 동, 중, 서 세 부분으로 나뉘며, 명대의 전통적인 건축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창살 무늬가 모두 다를 정도로 섬세하며, 건물은 용의 형상을 띠게 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반영하였다.

 

 총 면적은 5만㎡이며, 그 중 3/5정도는 연못이 차지한다.

 연못을 중심으로한 작은 정자나 복도, 산을 본떠 돌로 만든 석가산이 만들어져 있는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이색적인 건물인 견산루, 파산랑과 경치를 보기위해 지어진 원향당 등이다.

 

 

장계(張繼)의 시로 유명한 한산사(寒山寺)

 寒山寺(한산사)는 당나라 시인 張繼(장계)의 시 "楓橋夜泊(풍교야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寒山寺(한산사) 원래 梁나라 天監(천감)연간(502~517)에 창건되었다. 당나라 貞觀(정관) 연간(672~649)에 奇人(기인) 승려인 寒山(한산)과 그의 동료인 拾得(습득)이 살았다는 데서 원래 이름인 妙利普名塔院(묘리보명탑원)이라는 긴 이름을 버리고 점차  寒山寺(한산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 살던 승려 寒山(한산)은 시인으로 3백여수의 시를 남긴 사람인데, 그의 친구 拾得(습득)과 함께 화상이 대웅전 안에 남아 있다.

 대웅전은 높이가 12.5m이며, 뒷 편에는 유명한 종이 있는데, 높이가 2m이고 직경이 1.4m이다. 당대의 청동 유두종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인이 광서(光緖) 32년에 바친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일부 파괴되어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인 1911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다.

 이곳에는 또 이 절을 찾아온 유명한 시인들이 남긴 시 寒山寺三十六首(한산사삼십육수)등이 걸려 있다. 한산사는 당나라의 시인 장계(張繼)의《풍교야박(楓橋夜泊)》은 장계가 노를 저어 마을로 돌아가던 중 밤중에 풍교에 배를 정박해 두고 있는데 그 때 마침 한산사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

       月落烏啼霜滿天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네

       江楓漁火對愁眠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자고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에는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에 종소리가 객선에 이르네.

 

 

 

◈ 소주의 상징인 호구(虎丘 : 후치우)

 북서쪽으로 5㎞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원래 이름은 해용산(海涌山)이었는데,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여졌다. 춘추시대 오(吳)왕인 합려(闔閭, ?~BC 496, 재위: BC 514~BC 496)가 이곳 연못 아래에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합려의 무덤을 만들 때 관 속에 검 3,000개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이 검들 중에는 훗날 명검으로 전해지는 검들이 포함되어 있다. 혼란했던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BC 259~BC 210 (49세), 진나라의 제1대 황제, 재위: BC 220~BC 210 (10년간)) 은 이 검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도굴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도굴은 중단되었다. 지금은 이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검지(劍池)라고 부른다.

 

 송대 시인인 소동파(蘇東坡)는 "到蘇州而不遊虎邱, 乃是憾事" : 소주에 와서 호구를 구경하지 않은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라는 말을 했을 만큼 경치가 아름답다.

 

 40m 높이의 언덕 정상에는 호구탑이 있는데, 높이가 47.5m이며 수나라 때 지어진 것이다. 소주에서 가장 쉽게 눈에 띄는 건축물로 몇 차례의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북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단 호구탑 내부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현존하는 중국 최고(最古)의 벽돌탑으로 961년에 완성되었다. 

 

 호구산 입구 오른쪽에 있는 시검석(試劍石)은 오왕 합려가 천하의 명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시험삼아 잘랐다는 전설이 있는 돌로, 실제로 가운데가 돌로 쪼개져 있다.

 

 그곳에서 좀 더 올라가면 넓게 펼쳐진 돌이 있는데, 이곳이 1,000명이 앉아서 승려의 설법을 들었다고 하는 천인석(千人石) 있다.

 

 그 외에도 소동파가 즐겼다는 샘물인 제삼천(第三泉)이나 오왕 합려의 유체와 함께 3,000여 개의 검이 묻혔다고 하는 검지등이 있다. 검지에서는 진시황이나 손권(孫權)도 명검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지만 단 1개의 검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고진양묘(古眞孃墓)>

 진양(眞孃)은 당나라 때 소주의 이름난 기생이었다. 본디 姓은 '明',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약한 몸을 의지할 곳이 없어 기생이 되었다. 거문고는 물론 서화에도 뛰어났고 솜씨 또한 탁월했다. 정절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묘 위에 꽃나무가 돋아 '꽃무덤'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대 시인묵객들이 칭송하는 시를 읊어 그 넋을 기렸으며, 청나라 건륭10년에 해능 진광이 그 묘자리를 찾아 정자를 세우고 '古眞孃墓'라는 글씨를 새겼다.

 무덤 아래 바위 글씨 '향혼(香魂)'

蘇 州-古眞孃墓.JPG

 

 

◈ 중국 4대 정원의 하나인 유원(留園)

 중국 4대 정원의 하나로 1525년에 만들어진 정원이다. 졸정원(拙政園)과 함께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정원이다.

 명나라 가정 연간(1522~1566)에 서시태가 개인 정원으로 만들었다.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동원(東園)이라고 불리었으나, 몇 번의 개축을 거쳐 청(淸)대에 유원(留園)이라는 이름이 되었다.

 유원의 총 면적은 3ha로 동, 서, 중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각각 산수, 회랑, 자연경관, 전원풍경이라는 주제가 설정되어 있는데, 그 중 서원은 주로 토산으로 되어 있고 산위에 단풍나무가 있으며 전체에 연결되어 있는 700m 길이의 장랑(長廊)과 장랑의 벽면에 화창(花窓)이 있다.

 

 소주 원림 건축특색의 하나인 화창(花窓)이 유원내의 회랑에 각기 다른 모양으로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이 창문은 일종의 장식품일 뿐 아니라, 창문에 비치는 정원의 풍경들을 걸을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그림으로 연출하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또, 동원에 있는 관운봉(冠云峰)은 한덩어리의 태호석(太湖石)으로 높이가 6.5m, 무게가 약 5톤 정도인 소주 원림중에서 가장 큰 호석이다. 이 관운봉은 송대에 한 석농이 소주에서 약 40km 떨어진 태호변에서 크고 작은 돌조각을 모아 조각한 후 호수의 충적작용을 이용해 몇 년간 완정한 모양으로 만든 것이라고 해 더 놀랍다.

 관운봉(冠雲峰)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태호석은 태호석의 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명석(名石) 중의 명석이다.

 녹나무로 만들어진 오봉선관(五峰仙館)이라는 청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있다.

 

 

반문삼경(盤門三景)

 반문은 소주에서 유일하게 남은 성벽으로 소주시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반문자체보다는 '반문삼경(盤門三景)이라 불리는 서광탑(瑞光塔), 오문교(吳門橋), 반문성루(盤門城樓)가 유명하다.

 특히, 서광탑은 AD 3세기에 처음 세워져 강소성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 현재의 서광탑은 북송시대의 전탑(전塔/벽돌탑)으로 탑의 높이는 43.2m, 8면 7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벽, 회랑, 탑심(塔心)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광탑에서는 일찍부터 여러차례에 걸쳐 진귀한 문물들이 발견되었는데, 1963년에는 1층 탑벽 내에서 목각 불상 두개와 3층 탑심에서 석불 1개 등이 발견되었으며, 1978년에는 3층탑심에서 사리보장과 관음보살, 여래보살의 조각상, 목각인쇄물과 경전 100여권이 발견되었다. 이것들 모두 오대(五代)에서 북송(北宋)시대까지의 문물들이다.

 

o 교통: 2번, 5번 관광버스나 7번, 30번, 701번 버스를 타면 반문경치구 정거장에서 내릴 수 있다.

o 입장료(변동가능): 25위안

o 개방시간: 08:00~16:45

 

 

북사탑(北寺塔. 보은사)

 소주시의 중앙을 관통하고 있는 인민로의 북부에 있는 강남 지역에서 제일 높은 76m의 탑이다. 원래 창건한 것은 양(梁)나라 때이지만, 현존하는 것은 남송(南宋)때인 1153년에 중건(重建)한 것이다. 나무와 벽돌로 만든 8각형 9층의 불탑으로소주시의 심벌이기도 하다.

 탑의 동쪽에는 명대에 중건된 남목관음전(楠木觀音殿)이 있는데, 이는 소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전된 명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탑내에는 나무계단이 있어서 올라가 소주 시내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이 탑이 있는 북사(北寺)는 1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소주시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o 개방시간 : 07:45~17:30

o 가는방법 : 1, 101번 버스를 타고 북사탑에서 하차

o 입장요금 : 5원(변동가능)

 

 

원대의 대표적 정원, 사자림(獅子林:스쯔린)

 원림로(園林路) 23호에 자리잡고 있는 원대의 대표적인 정원으로 원(元)말기 1342년에 고승인 천려선사(天如禪師)와 그의 제자가 그들의 선생인 중봉신승(中峰神僧)을 기념하기 위해 사원으로 건립한 곳이다. 그 정원에 스승이예전에 살았던 저장성(浙江省) 천목산(天目山) 사자암(獅子岩)과 비슷한 사자 형태의 태호석을 수없이 배치하였기 때문에, 그 후에 사자림(獅子林)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정원의 전 면적이 약 1헥타르로 영롱한 태호석으로 이루어진 석가산(石假山)이 그 중 가장 유명하다.

 이 산은 정원의 반을 차지하는데, 정원의 구조를 보면 남동쪽이 산이고 북서쪽이 연못으로 되어 있다. 또 정원 둘레에는 회랑을 둘렀는데, 사면이 통하게 되어 있으며 위아래에 굴곡이 있고, 회랑벽에는 67개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은 송대 4대 서예가인 소식(蘇軾), 황정견(黃庭堅), 미비, 제양(祭襄)이 쓴 것이다. 또 문매각, 과폭정, 와운실, 하화정 등의 건축물이 있는데 조형이 서로 달라 서로 다른 정취를 풍긴다.

 

o 길잡이: 소주 민속박물관과 화폐박물관이 옆에 위치하고 있어 함께 돌아보면 편리하다. 또한 원림로(園林路)를 따라 북쪽으로 100m정도 가면 졸정원이 나온다.

o 교통: 관광전용 1, 2, 5선(線)이나 2번, 3번, 4번, 40번, 701번 버스이용

o 입장료: 성수기: 30위안 / 비수기: 20위안 (변동가능)

o 개방시간 : 07시~17시

 

 

망사원(網師園)

 소주(蘇州)에서 가장 작은 정원으로 전형적인 청대의 주택정원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송대 순희(淳熙)년간(1174-1189)에 한 관리의 정원으로 처음 지어진 이곳은 그 당시 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하여, '만권당(萬券堂)'이라 불렸으며 '어은(漁隱)'이라는 명칭도 있었다. 그 이후 주인없이 버려지다 청대 건륭(乾隆)년간에 관리 송종원(宋宗元)이 만권당 옛터에 별장을 짓고 모친을 봉양하면서 '망사원(網師園)'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망사(網師)'는 어부를 의미한다.)

 정원의 전체면적은 5400㎡이며 동쪽의 저택, 중앙의 주원(主園), 서쪽의 내원(內園) 세부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1981년 미국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공개된 중국정원 "명헌(明軒)"의 모습은 이곳 망사원의 서쪽에 있는 내원 "전춘(殿春)"을 복제하여 만든 것이다.

 특히, 망사원에서의 야화원(夜花園)에서는 강소성의 지방희극인 곤곡(昆曲)과 민간문예인 평탄(評彈)등 중국 강남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연과 문화를 소주의 운치있는 정원의 야경 속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

 

o 교통: 관광전용 2번버스나 일반 2번,4번,14번,31번 버스이용

o 입장료: 성수기: 30위안, 비수기: 20위안

o 개방시간: 8:00~17:00

 

o 야화원 입장료: 80위안(변동가능)

o 야화원 개방시간: 19:30~22:00

 

 

장계의 시로 유명한 다리, 풍교(楓橋)

 楓橋夜泊(풍교야박) _張繼(장계)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달은 지고 까마귀 우는 찬서리 가득한 하늘,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강가 단풍과 고기잡이 불빛에 근심 속에 잠을 청하는데,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로부터

 夜半鍾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밤 종 소리가 여객선까지 이르른다.

 

 여객선을 이용해 떠도는 나그네가 풍교에서 하루밤 정박을 하면서, 나그네의 수심을 노래하고 있는 시로 당(唐)대 시인 장계가 지었다.

 풍교(楓橋)는 소주시내를 가로지르는 대운하를 잇는 다리로 강남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치형 돌다리이다. 다리 위로 도로가 나있으며, 남북을 오가는 선박이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옛날에는 밤이되면 뱃길을 봉쇄하였기 때문에 이곳은 좋은 휴식지가 되어주었고 이름도 "봉교(封橋)"라 불렸다. 후에 장계가 이 다리를 배경으로 '풍교야박'이라는 시를 쓰면서 "풍교(楓橋)"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풍교를 중심으로 <풍교야박> 고시의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고시(古詩), 옛다리(古橋), 옛거리(古街), 옛운하(古運河)가 이루는 독특한 분위기의 풍경구역을 이루고 있다. 북쪽 구역으로는 고대시가지의 특색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중앙 구역으로는 대형 고대 지방극 무대와 운하박물관이 있어 고대 운하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남쪽 구역으로는 녹지지대를 중심으로한 강풍초당(江楓草堂)과 부두가 있다.

 

 

소주 운하

 소주(蘇州)의 거리와 운하로 만들어진 수로에 당대의 최고의 시인들이 모여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운하의 도시로 불리던 소주는 동양의 베니스라고 불리운다. 낭만적이고 운치가 있는 소주운하는 시내의 어디를 가나 만나볼 수있다. 주요한 교통로로 자리잡고 있으며, 중국은 이 운하를 통해 외국으로의 물자와 자원을 이동시켰으며,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고 있다.

 운하옆에 우거져있는 버드나무는 옛 수양제가 가장 좋아해서 자주 그 운하위의 길을 거닐었다고 한다. 이 운하에서 뱃놀이를 하며 중국인들이 삶과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태호(太湖)와 임하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 계원(啓園)

 석가화원(席家花園)이라고도 불리는 계원(啓園)은 소주 동산진(鎭) 옹항촌 북면에 위치하고 있는 정원으로 태호(太湖)와 서로 임하고 있다. 소주에 있는 모든 원림(園林) 중 유일하게 산을 기대고 곁에 호수를 두고 지은 정원이다. 중앙의 화원과 사면의 홀, 복랑(復廊), 정원을 휘감는 호수, 모형 산, 갖가지 건축물들의 구도가 규형을 잘 이루고 있으며 조화롭다.

 

o 교통: 20번 버스를 타면 석가화원 정류장에서 하차할 수 있다.

o 입장료: 20위안

o 개방시간: 07:30~17:00

 

 

창랑정(滄浪亭)

 소주(蘇州)에는 4대 명원(名園)이 있다. 이 창랑정은 그 4대 명원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약 100여 년의 역사를 가진다. 면적은 약 1ha로, 규모는 작지만 세련된 배치와 구조에 대나무가 잘 어울린다. 취령롱(翠玲瓏), 화창(花窓), 청향관(淸香館), 명도당(明道堂)이나 500명의 석각이 있는 오백명람사(五百名覽祠) 등이 볼 만하다.

 창랑이라는 이름은 굴원(屈原)의 시 어부사(漁父詞)에 나오는 창랑지수(滄浪之水)에서 따온 것.

 

 

이원(怡園)

 소주(蘇州) 명원 특유의 특색 있는 부분을 활용하여, 청대에 만들어진 정원이다. 원래는 청나라 때 관리의 개인정원이었다.

 면적 0.6ha로 규모는 작지만, 아기자기한 조성이 볼 만한 곳이다.

 쑤저우시의 가장 중앙의 번화가인 관전가에서도 걸어서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쇼핑하는 중간에라도 잠깐 들러볼 수 있다.

 

 

 

소주의 유명 도교사원, 현묘관(玄妙觀)

 소주(蘇州)에서 향불이 가장 많이 피워지는 곳은 불교사원이 아닌 도교사원 현묘관(玄妙觀)이다. 현묘관은 서진(西晉)시대에 처음 지어져 이미 17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관내 남송(南宋)시기에 지어진 삼청전(三淸殿)은 중국 강남지역의 최대 목조건축물로 기둥 60개가 받치고 있으며, 처마곡선이 아름다운 이중지붕이 얹혀있다 전내에는 봉양의 높이가 17m에 달하는 삼청(상청(上淸), 옥청(玉淸), 태청(太淸)) 소조가 앉아있는데, 송대 소조작품중에서도 월등하다 할 수 있겠다.

 

 

소주박물관(蘇州博物館)

 졸정원 서쪽에 있는 것으로, 쑤저우(蘇州) 주변의 출토품이나 문물을 볼 수 있다. 상(商), 주(周)나라 이래의 고대의 청동기나 도검, 서화 등이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쑤저우다운 것은 견직물이나 자수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는 것. 남송(南宋), 명(明), 청(淸) 시대의 궁정 연회때의 헌상품이기도 했던 작품도 볼 수 있다.

 

 

분수쇼가 펼쳐지는 호수공원 금계호

 금계호는 주말 야간이면 화려한 분수쇼를 선보이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 분수쇼는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지며 조명과함께 최고의 볼거리를 선사한다.

 

 

◈ 쑤저우 최대의 번화가 관전가(觀前街)

 쑤저우(蘇州) 최대의 번화가로 서울의 명동과 같은역할을 하는 곳이다.

 중국 전통 음식, 물건 외에도 세계적인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모두 입주해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보대교(寶帶橋)

 소주시 남쪽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따라서 걸쳐 있는 길이 317m의 아치형 석교이다. 전체 53개의 아치형 공교로 이어져 있어 중국 최장(最長)의 석교로 간주되고 있다. 이 보대교 주변의 운하는 수천 년 동안 그 자리를 고수했는데 화베이지방의 만리장성과 같은 수준의, 화중지방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보대교를 따라 걸으면서 보는 주위의 풍경은 강남지방의 잔잔한 풍경의 매력을 또하나 더해 주고 있다.

 

 

화이안(淮安, 회안)

 화이안(淮安, 회안)시는 쑤베이(蘇北) 중심에 자리 잡고 있으며 남쪽으로 쟝쑤(江蘇)성의 성도인 난징(南京)시와 188km 떨어져 있고, 동북쪽으로는 유라시아 대륙교(亞歐大陸橋) 교두보인 리엔윈강(連雲港)시와 135km 떨어져 있다.

 

 동으로 옌청(鹽城)시와 이어졌고, 남으로는 양저우(揚州)시와 인접했으며, 서와 서남 방향으로는 안후이(安徽)성과 근접하며, 북으로는 리엔윈강(連雲港)시와 쉬저우(徐州)시 및 얼마 되지 않는 쑤치엔(宿遷)시와 인접하다. 예로부터 '장려한 동남 제일주(壯麗東南第一州)'라 불리고 있다.

 

 쑤베이(蘇北) 중심에 있는 화이안(淮安)은 고대 화이하(淮河) 남부에 위치해 이같이 불렸다. 경내의 부지 전부가 황화이(黃淮) 평원과 쟝화이(江淮) 평원의 접합부에 속하며 서남쪽은 완둥 구릉지의 산맥과 이어졌다. 경항대운하가 경내를 관통했고 훙저호(洪澤湖)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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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이안(淮安)은 많은 명인을 배출해냈다. 현대사의 위인인 저우은라이(周恩來)의 고향이 이곳이며, 역사적으로 대 군사가인 한씬(韓信), 한푸(漢賦) 대가 메이썽(枚乘), 여성호걸 량훙위(梁紅玉), 서유기(西遊記)의 작가 우청은(吳承恩), 애국 장령 관톈페이(關天培), '로우찬유우찌(老殘遊記)'의 작가 류어 등의 인물들이 배출됐다.

 

 화이안(淮安)에는 저우은라이(周恩來)의 옛 집터, 그가 다닌 서당, 기념관, 유물 진열관 등이 있다. 그밖에 노자가 머물렀던 라오즈산(老子山)이 있으며 쒸이 경내에는 주위엔장(朱元璋)의 고조부와 증조부 및 조부의 능묘인 밍주령(明祖陵)이 있다.

 

 

 

창수(常熟, 상숙)

 소주(蘇州) 북쪽 44km 거리에 위치.

 곡창지대의 중심이기 때문에 이곳의 대갑해(大閘蟹)와 상숙미(常熟米)는 전국적으로 유명.

 창수(常熟, 상숙)는 중국의 경제가 가장 발달한 장강 삼각주에 위치하며 장강에서도 황금 수로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큰 경제중심지인 상하이(上海)시와 인접하여있고 수저우(蘇州), 우시(無錫), 난퉁(南通) 등의 대도시들에 둘러싸여 있어 남달리 좋은 지역적 우세를 가지고 있다.

 지세가 완만하고 기후가 온화하며 날씨가 매우 좋아 매년 풍년을 거두어 '창수'라고 불리는 바 예전부터 '강남의 어미지향(江南魚米之鄕)'이라는 호칭을 가지고 있다.

 

 창수는 국가 역사문화 명성 도시로 5000년의 문명 기원과 연혁을 가지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씽둥(興東) 우원교의 선구이자 공자 문하 “십철(十哲)”중 하나로 “남방의 공자(南方夫子)”라 불리는 위엔얜(言偃)이 있는가 하면 근대 청조시대 두 개 조대 황제의 스승이자 장원을 얻은 재상 웡퉁허(翁同和) 등 매우 많은 유명한 역사 인물들이 나타났다. 당조에서 청조에 이르기까지 재상이 9명, 장원이 8명, 진사가 483명이나 있었다. 역사의 기나긴 흐름은 창수에 대량의 인문 재산을 남겨 주었다.

 

 국가 타이후(太湖) 풍경구역에 위치한 위산(虞山) 국가 삼림공원과 쌍후, 사쟈방(沙家浜) 풍경지역 등은 창수로 하여금 국내외에 이름을 떨친 관광명승지가 되게 했다. '7개의 시냇물이 모두 바다로 통하고, 십리 청산의 절반이 성안에 포함된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빼어난 자연 경관은 또한 창수에게 독특한 풍모를 가져다주었다.

 

 창수는 산이 푸르고 물이 수려하여 경치가 유달리 아름답다. 십리 위산(虞山)은 봉우리가 기복을 이루었고 산비탈의 절반이 도시에 진입했다. 쌍후, 쿤청후(昆承湖)가 산 아래 엎드려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친촨허(琴川河)가 도시를 관통하며 아담한 정원, 고요한 골목 거리와 조화를 이루어 산, 물, 도시, 정원이 조화로운 통일체를 형성한 독특한 우중(吳中)의 풍모를 나타내고 있다. 매우 많은 명성고적과 세상에 이름을 날린 싸쟈방(沙家浜)은 창수로 하여금 국내외에 널리 이름 날린 유람 명승지가 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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