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성의 성도 석가장(石家莊, Shijiazhuang)

 

 중국 허베이 성[河北省] 중서부의 도시이며 허베이 성의 성도(省都).

 석가장의 이름의 유래는 크게 3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말그대로 석씨성의 사람들이 많은 마을이었고, 둘째는 석탄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고, 셋째는 원래 십가장이라 불렸는데 후대에 와전되었다고 한다. (十과 石의 발음이 같다.)

 석가장촌의 이름은 명대에 등장하는데 청대 획록현지(鹿县志)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다.

 근래에 들어서 하북성의 성도로 지정된 것은 모택동시정 보정과 석가장이 성도로 번복되어지다가 주은래가 다시는 바뀌는 일이 없다고 공표하면서 지금까지 하북성의 성도로 남아 있다.

 

 석가장은 화베이(華北) 평원 가장자리, 서쪽으로 뻗은 타이항 산맥(太行山脈) 기슭에 있으며 북쪽에는 후퉈 강(滹沱江)이 흐른다.

 

 한(漢)나라가 들어선 BC 206년 이전에는 조(趙)나라에 속해 있었고, 한대(漢代:BC 206~AD 220)부터 수대(隋代:581~618)까지는 같은 이름의 현(縣)으로 존속했다. 이 현은 당(唐:618~907) 초기 지방정부를 재편할 때 폐지되었다. 그뒤로는 현지의 시장도시에 지나지 않았으며 약간 북쪽에서 번창하던 정딩(正定)에 종속되어 있었다. 스자좡은 정딩과 마찬가지로 화중지방에서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주요 역마차도로 위에 있었으며 냥쯔관(娘子關)을 거쳐 산시 성(山西省)으로 넘어가는 도로 부근에 있었지만, 이 지역의 교역 중심지는 정딩이었다. 평야지대와의 교통도 정딩에 집중되었는데, 주변의 후퉈 강이 비록 여름과 가을에는 배가 다닐 수 있었지만 다른 기간에는 너무 얕아서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05년 베이징-우한(武漢: 한커우(漢口)) 철도가 이 지역을 지나게 되자 스자좡도 중국의 주요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교역이 촉진되었고, 농민들은 환금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1907년 이곳과 산시 성(山西省) 중부의 타이위안(太原)을 연결하는 스타이 선(石太線)이 개통되고 역이 들어섰다. 베이징, 톈진(天津), 산시 성(山西省)을 잇고, 뒤이어 스타이 선이 남서쪽으로 확장되면서 산시 성(陝西省)까지 이어지는 간선철도 변에 자리잡게 됨으로써, 현지의 시장도시에 불과했던 스자좡은 단번에 중국 전체에서 중요한 교통 중심지로 발전했다. 1930년대말 일본에 점령된 뒤 산둥 성(山東省) 북부의 더저우(德州)까지 철도가 가설되어 톈진-푸커우(浦口) 간선철도 및 산둥 성의 칭다오(靑島) 항과도 연결되었다. 스자좡은 또한 널리 뻗은 도로망의 중심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대규모 철도도시였을 뿐 아니라 산시 성(山西省)과 그보다 더 서쪽에 있는 지역 및 화베이 평원에서 생산된 농산물, 특히 곡물· 담배· 면화의 집산지이자 상업 중심지였다. 1935년 무렵에는 경제 중심지라는 면에서 정딩을 크게 앞질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 도시의 성격은 또 한 번 바뀌었다. 허베이 성 서부의 대도시로서 행정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공업도시로도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냥· 담배· 유리 등 몇몇 제조업 공장은 이미 전쟁 전에 세워졌다. 그러나 도시의 공업화계획이 추진된 것은 1949년 이후의 일이었다. 1948~1958년의 10년 동안 인구는 3배 이상으로 불어났고, 1950년대에는 대규모의 면방적·면방직·날염·염색 등의 섬유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이 지방에서 나는 농산물을 가공하는 여러 공장들이 있으며, 1960년대에는 비료·가성소다 등을 생산하는 화학공장도 들어섰다. 엔지니어링의 기지이기도 한 이 도시에는 트랙터 부품공장도 있다.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타이항 산맥 기슭의 징싱(井陘)· 훠루(獲鹿) 탄광에서 캐낸 석탄은 화력발전소로 보내져 이 지역 공업에 필요한 전력생산을 위해 쓰인다. 국내선 정기항공편을 운항하는 공항이 건설되어 수송 중심지로서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었다.

 

 

◈ 중국 북방지역 최대 규모의 불교사찰, 융흥사(隆興寺)

 융흥사는 석가장에서 18km 떨어진 곳에 있는 정정(正定)이라는 작은 도시에 위치하는 중국 북방지역 최대 규모의 불교사원으로 사원 내에 칠십척이 넘는 청동으로 만든 대불(大佛)상이 있어 대불사(大佛寺)라고도 부른다. 사찰은 수(隋)나라 개황(開皇) 6년(서기 586년)에 처음 지어졌으며, 전체 면적이 6만4천㎡에 달한다. 절 내에는 수(隋)나라부터 시작하여 당(唐),송(宋), 원(元),명(明),청(淸)대의 각 시대별 문화적 특색이 살아있는 4개의 전(殿)과 5개의 누각, 2개의 정자, 1개의 단(檀) 등 건축물들이 사찰 내부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융흥사의 대표적 건축물로는 천왕전(天王殿)과 마니전(摩尼殿), 대비각(大悲閣)등이 있다. 마니전 내에는 중국 내에서도 보기 드문 관음보살상인 명대 가정(嘉靖)년간에 만들어진 도좌관음보살상이 있으며, 북송때 지어진 전륜장각 내에는 누각 아래에 직경 7m의 8각형 목재로 만들어진 전륜장(轉輪藏)이 있다. 대불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질 만큼 이 절의 상징이 된 대불상은 대비각에 모셔져 있는 청동 관음상으로 971년에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21.3m이다.

 

 

포독채(抱犢寨)

 옛날 포독산으로 불렸던 포독채는 역사인문환경과 자연풍광이 일체를 이루는 명산고적으로 석가장시에서 서쪽으로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580m로 산세가 높으며 구불구불한 오솔길이 남쪽과 북쪽의 언덕을 잇고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탁트인 600여 묘 넓이의 땅에 현재 중국에서 가장 큰 산정문방(山頂門坊) 남천문(南天門)과 돌로 조각된 5백 나한당, 중국 최대 규모의 금색 옻칠을 한 벽화장식의 한신사(韓信祠)와 장성의 성벽 등이 있다.

 새로 만들어진 '서원(西苑)-연화산(蓮花山)-포독채(抱犢寨)'를 잇는 1800m 길이의 관광 케이블카는 중국에서는 유일하게 갈아타는 곳도 없으며, 중간탑도 없는 완전봉쇄형 왕복 케이블 카이다. 최고 높이는 271m로 포독채의 중심 관광지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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