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延吉 : 이엔지)

포토 갤러리

 

◈ 중국속의 작은 한국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

 길림성 동부에 위치하여 러시아,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이 4만 3547㎢, 인구가 약 250만 명 정도로 11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중 40%가 조선족이다. 조선 말기부터 한국인이 이주하여 이곳을 개척하였고 이전에는 북간도라고 불렀다. 이후 1952년 9월 3일에 자치구가 설립되어 1955년에는 자치주로 승격되었다.

 연길(延吉)·도문(圖們)·돈화(敦化)·화룡(和龍)·용정(龍井)·훈춘(琿春)의 6개시와 왕칭(汪淸)·안도(安圖) 2개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하천으로는 도문강·송화강(松花江)·목단강(牡丹江)·소분강(綏芬江) 등이 있고, 도문강 유역에는 '동북아 금삼각주(東北亞金三角州)'라고 불리는 국제개발지, 훈춘경제개발지가 있다.

 조선 말기 우리 민족에 이주하면서부터 연변은 한반도와 역사를 같이 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으며 그 때문에 청산리항일전승지(靑山里抗日戰勝地)·봉오동(鳳梧洞)항일전승지·일송정(一松亭) 등 유적지가 많다.

 

◈ 한국의 숨결이 살아 있는 도시 연길(延吉 : Yanji, 이엔지)

 연길은 2,00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0여년 전부터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이며 중국 조선족 문화의 중심지로 백두산과 가까워 매년 많은 한국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연변에서는 사람들의 옷차림, 집, 길거리를 둘러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우리 나라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는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자치주 스스로 그 민족 나름대로의 지역을 가꾸어 나가도록 하는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우대 정책에 따라 연변자치주 내의정부기관이나 신문 광고 등에 조선족 자체의 문자를 우선적으로 쓰고 있고, 그 때문에 연변의 거의 모든 옥의광고가 한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한글이 공용어로 되어 있다.

 연길은 중온대 반습윤기후에 속해, 여름에는 무덥고 비가 많이 내리며 겨울이 길고 춥고 뚜렷한 대륙성 계절풍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연평균 기온은 5.7℃, 최저 -32.7℃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연길의 면적은 390㎢, 인구는 약 25만 8000명(1993)에 달하며 주변 농업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집산지이다. 이곳은 청(淸)나라 말기에 간무국(墾務局)이 설치된 뒤 발달하였기 때문에 국자가(局子街)라고도 불렀다.

 1902년 옌지청[延吉廳]이 설치되고 1909년 부(府)가 되었으며, 1913년 중화민국 수립 후 현(縣)이 되었다. 1909년 간도협약(間島協約:젠다오협약) 이후에 교역주로서 개방되자 많은 한국인 이민이 이주하여 시의 주변지역을 개척하였다. 부근에 석탄·금 등의 광산이 있고 광공업이 발달해 있다. 한국어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으며, 의과대학·연변대학 등이 있다.

 

음  식

개고기(狗肉)

 연변주위에는 인삼이 많이 재배되고 유명하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인삼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삼보다 더 귀한 식품은 다름 아닌 개고기이다.

 한랭성 기후에 속하는 길림성은 역사적으로 만족, 한족, 조선족 등 다종의 민족이 거주했던 곳이다. 옛부터 개고기는 몸을 뜨겁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만주족과 조선족들에게 있어서 술과 더불어 먹는 귀한 보신 식품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여행하다보면 냉면식당만큼 많은 개고기 전문식당을 볼 수가 있다. 개고기를 요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개고기탕냉면'은 이곳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다.

 

양꼬치

 중국의 가장 흔한 포장마차 간식이라 할 수 있는 양꼬치는 중국어 발음으로는 '양러우촨'이지만 조선족 사투리로는 양뀀으로 불린다. 꼬치 종류 역시 양고기가 가장 인기있긴 하지만 소고기,쇠힘줄,돼지고기등 다양하여 골라먹을 수 있다. 양꼬치는 우리나라의 닭꼬치같이 손가락 마디 정도로 썬 양고기를 철사등에 대여섯조각씩 꿰서 숯불에 살짝 구운 후 그 위에 고추장 소스를 발라 다시 한번 구우면서 고추가루와 즈란이라 불리는 향료를 찍어 먹는 요리이다.

 즈란이라는 향료가 입맛에 안맞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즈란이 양고기 특유의 노린내를 없애주는 역할을 하기때문에 진정한 양뀀의 풍미를 느끼기 위해서 찍어 먹는게 좋다.

 

 

산천어(山川魚)

 산천어는 몸길이가 약 20cm정도 되는 연어과의 물고기로 송어와 비슷한 형태와 맛을 갖고 있다. 백두산에서 맛볼 수 있는 산천어는 백두산 천지에서 자라는 것으로 수온이 여름에도 섭씨 20℃이상 오르지 않는 맑은 물의 계류에서 서식하기에 천지는 적합한 서식지라 할 수 있다. 산천어를 파는 많은 음식점에서는 이 산천어가 북한의 김일성 주석만이 먹었었다고 선전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산천어가 원래부터 천지에 서식하진 않았으며, 현재 천지에서 잡히고 있는 산천어는 일부러 천지에 풀어넣은 것이다. 백두산 밑의 많은 식당들에서 회나 찜으로 먹을 수 있으며, 고소하면서도 싱싱한 맛이 일품이다.

 

 

※ 쇼  핑

동방곰락원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해서 연길 지역을 여행하다보면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곰사육 농장으로 웅담 관련 제품을 판매를 위해 웅담으로 만든 술을 시음하게 한다.

 주변지역의 곰의 사육 실태에 대한 설명과 곰을 사육하는 모습 등을 시연해 준다.

 

백두산 주변의 쇼핑

 백두산 천지 입구나 장백 폭포 입구에는 백두산 돌이라며 보석처럼 빛나는 가짜 화산석을 펼쳐놓고 파는 잡상인들이 많다. 장백폭포나 백두산 입구에서도 산에서 재배한 산삼이나 영지버섯, 산나물 등을 파는 잡상인들이 있으나 귀한 약재는 대부분 가짜이다.

 

 

연길의 기후(℃)

도시명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연  길

(延 吉)

최고평균

-7.2

-3.1

4.9

14.8

21.6

24.0

26.6

26.9

22.0

14.7

3.7

-4.9

최저평균

-19.9

-17.0

-8.8

-0.5

6.5

12.5

16.9

16.9

8.9

0.0

-8.5

-16.9

평   균

-14.3

-10.6

-2.4

6.6

13.5

17.8

21.6

21.5

14.8

6.8

-3.0

-11.4

강수량mm

4.1

4.9

10.7

23.4

49.4

82.0

98.6

122.8

67.4

28.4

13.3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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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 명소

龍井(용정)

 연길에서 버스를타고 40분을 달리면 해란강이 흐르는 용정에 닿을 수 있다. 지금은 비록 일송정 큰 솔의 그림자는 없지만 해란강을 보며 선구자를 불러보는 감격을 누릴 수 있다.

 용정이란 이름은 전설에서 유래한 것으로 용정에는 원래 물이 없었다고 한다.『한 착한 소년이 물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파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지쳐서 우물가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그후에 우물가에 무지개가 비치고  천둥소리와 함께 용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샘물이 솟았다. 그후로 이곳에 마을이 생겼고 용정이라 명명하였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이다.

 

 

◈ 윤동주가 다녔던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민족 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이다.

 현재는 용정제일중학교(龍井第一中學校)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실제로 학생들이 이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단 신관과 구관으로 나뉘어져, 구관 앞에는 그의 대표적인 시 <서시>가 세겨져 있는 윤동주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으며, 건물 2층에는 기념전시관이 꾸며져 있다.

 기념관에는 사진, 화보,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이 곳은 재야 운동가였던 문익환 목사와 정일권 전 총리의 모교이기도 하다.

 

 

延吉四市場(연길사시장)

 북간도의 후예들이 우리말을 크게 외치며 장사하는 곳으로 60,70년대 우리나라의 남대문시장을 연상케 한다. 중국에 와서 말이 통하지 않던 것이 이곳에 오면 시원하게 해결된다. 동포끼리라는 것을 내세워 물건을 비교적 싼값으로 살 수 있다. 그러나 연길사람들은 중국의 다른곳에 사는 교포들로부터 연변깍쟁이라느 말을 들을만큼 똑똑하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시장 안에는 연변특산품을 미롯하여 순대와 족발 등을 파는 곳까지 있어 발길이 닿는 곳마다 흥취가 난다. 전통적인 한국음식도 여기에서는 싼값에 사먹을 수 있다. 

 

 

해란강(海蘭江)

 두만강 지류로 선구자에서 언급된 용정지역의 강이다. 이 강이 선구자에 언급된 이유는 우리 민족이 간도 지방에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해란강 주변의 들판이었고, 그 중심 젖줄이 해란강이었기 때문이었다.

 

 

두만강(豆滿江)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접경에 위치한 강이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분단의 아픔을 지닌 곳이며, 최근에는 월북자들이 이곳에서 생사를 달리하는 가슴아픈 장소가 되고 있다.

 길이 547.8㎞, 유역면적이 32,920㎢며, 주요 지류인 상류는 현무암으로 된 용암대지 및 화강암· 화강편마암으로 된 무산고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백두산과 무산 사이에서 흘러드는 소홍단수나 서두수에서 비롯되고 있다.

 두만강 유역은 동계혹한 기후에 속해 있어서 강우량이 적고, 일대 산림의 대부분이 성숙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연안에 넓은 초원이 발달하여 목축이 성하고, 부령에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가 설치되어 있다.

 

<눈물젖은 두만강의 유래>

 1919년 조선3.1독립운동의 실패로 수많은 조선동포들은 원한을 품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연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1930년대부터 도문에는 두만강나루의 착선장이 생겼는데 이 곳이 바로 나라잃고 부모처자 생리별 하던 원한의 두만강 나루터였다. 1935년 가을 북간도(연변)순회공연차로 도문에 도착한 극단<예원좌>일행이 투숙한 려관에서 밤중에 만주(동북)땅에서 반일투쟁을 하다가 살해당한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는 녀인의 애절한 호곡소리를 듣고 커다란 충격을 받은 작곡가 리시우 선생은 망국의 원한과 민족의 설음을 통탄하며 <눈물젖은 두만강>을 창작하였다. 도문 공연에서 극단의 소녀화술배우 장월성이 이 노래를 처음으로 부르게 되였는데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고 절찬을 받았다. 서울에 돌아간후 시인 김룡호선생을 찾아 가사를 다듬고  가수 김정구 선행을 청하여 레코드에 취입하도록 하였다. 그 이후부터 이 노래가 민간에 급격히 류행되였는데 사람들은 조국이 그리울 때도 이 노래를 불렀고 떠나간 옛님이 그리울때도 이 노래를 부르게 되였다.

- 연변조선족전통문화연구쎈터 정리-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에 얽힌 사연>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는 독립투사 문창학의 부인인 김증손녀(당시30세)가 상해 임시정부 시절 3.1독립운동에 참가한 남편을 찾아 중국 독립군이 있다는 곳이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10여년을 찾아 다니던 어느날 두만강가에 있는 용정(도문)에서 남편 문창학씨가 이미 사형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당시 머무르던 용정(도문) 여관방에서 원망과 슬픔에 겨워 밤새도록 목놓아 통곡을 하였는데 당시 한국에서 유랑극단 생활을 하던 작곡가 이시우씨가 옆방에서 흘려 나오는 여인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 하였다가 이튿날 여인의 사연을 알아본바 너무나 가슴 아파 그 심정을 오선지에 담았는데 작사자 김용호 선생이 노랫말을 붙이고 김정구 가수가 부른 노래가 오늘날 불멸의 노래인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이다.

 독립투사 문창학씨는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출신으로 1921년2월2일 대한 군정서 김학섭의 인솔하에 소총 10정, 탄약 150발, 폭탄 2개씩을 가지고 웅기항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일본군경의 경계가 심하여 2월 5일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고, 오후 8시에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 일본순사를 사살하고 주재소에 폭탄 2발을 투척한 후 일본군경과 교전하다가 피신한 후 만주 훈춘에서 맹렬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1년 12월에 체포되어 압송된 후 1923년 12월 2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꽃다운 청춘인 41세에 사형당하였다.

 

 

<눈물젖은 두만강>- 김정구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 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圖門(도문)

 연길에서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을 달려 도문에 이르면 두만강 건너편의 북한땅이 보인다. 두만강을 건너는 도문강대교의 국경경비초소를 보면 국경선에 와있다는 것이 실감난다. 유람선을 타고 도문강을 따라 가면 북한쪽 강가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과 부녀자들이 강가에서 빨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가까운 곳은 서로 큰소리로 몇마디 말도 건넬 수있을 정도로 가깝다.

 연길에서 도문까지는 열차로 1시간 정도면 도착하며, 도문역에서 도문강대교는 도보로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도문시는 작은 변경도시이므로 도문역 주변에 있는 도문賓館(빈관)에 숙박해야 한다. 여권 신분증확인등 복잡한 수속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반여관에는 투숙이 불가능하다. 식사는 도문시 자유시장(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에는 한국식 전문 식당에서 삼계탕, 보신탕, 된장찌개나 불고기, 야채등을 먹을 수 있다. 

 

 

일송정(一松亭)

 '일송정 푸른 솔은...'으로 시작되는 노래와 항일독립운동을 그린 동일의 영화가 있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에 보면 길 오른쪽의 야산 위에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송정'이다. 전에는 늠름한 자태의 소나무가 한그루 서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작은 소나무 한그루와 정자가 있다. 또 이곳에서 혜란강의 물줄기를 볼 수 있지만 지금은 물줄기가 말라 모습이 미흡하다.

 용정 시민들의 말을 빌리면, 오래 전 이곳에는 정자 모양의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소나무 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고 한다. 이를 미워한 일제가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일송정을 고사시켰다고 전해진다. 1980년대 후반 중국정부 당국에서 이곳에 '일송정'이라는 이름의 정자를 건립하여 이를 기념하고 있다고 한다.

 

선구자(先驅者)

 가곡의 하나. 윤해영(尹海榮) 작사, 조두남(趙斗南) 작곡.

 이 가곡의 가사는 북간도 용정(龍井)을 배경으로 작시한 것으로, 가사 첫머리의 <일송정(一松亭)고개>는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며, <해란강(海蘭江)>은 그 옆을 흐르는 강 이름이다.

 조두남은 당시 망명청년으로서 1933년 21세 때 이 시에 곡을 붙였다. 이 곡은 광복 후 대중에게 많이 불려졌으며, 특히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바리톤 김학근(金學根)의 독창으로 발표된 것을 당일 기독교방송국에서 녹음하여 이 곡의 앞부분을 <정든 우리 가곡>이라는 프로그램의 시그널뮤직으로 7년 동안 사용함으로써 더욱 애창되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 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동주의 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일제강점기의 저항시인으로 <서시><별 헤는 밤> 등의 숱한 작품을 남긴 민족시인 윤동주. 40분 정도 걸리는 용정(龍井)의 조선족 기독교인 공동묘지에는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그의 묘가 있다. 도로가 포장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바닥의 요철이 심해서 일반 승용차는 접근하기 어려우며 지프차로 겨우 갈 수 있다. 용정에서 연길까지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린다. 대성중학교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서 있으며, 한국에는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의 후신인 연세대학교 교내에 윤동주 시비가 서있다.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집안(集安)

 중국 집안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1,2000여 기가 넘는 무덤떼이다.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 근방에도 1,000기 밖에 없는데 그 보다 10배가 훨씬 넘는 무덤들이 한 곳에 몰려 있다는 것은 전세계에서도 유래가 없는 일이다.

 집안시 안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무덤떼는 모두 32개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1962년 봄 집안시 전체의 문화유물을 전면적으로 조사할 때 파악한 숫자에 따르면 모두 12,358기나 된다고 한다. 일본의 한 학자가 "고구려인들은 땅의 절반은 주거지로 절반은 무덤으로 사용하였다"고 했는데 실감나는 이야기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414년 부왕인 19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인 광개토왕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퉁거우[通溝] 지방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왕의 비석.

 414년(장수왕 2) 광개토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건립하였다.

 높이 6.39m, 나비 1.5m, 두께 1.53m의 사면석비(四面石碑)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묘호(廟號)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마지막 3글자를 본떠서 일명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도 한다.

 받침돌이 없이 비신(碑身)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자의 크기와 간격을 고르게 하기 위하여 각 면의 위와 아래에는 가로선을 긋고 매행은 약 13㎝ 간격으로 가는 세로선을 그었다. 필체는 한예(漢隸)의 팔분서(八分書)에 가까운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14∼15㎝ 정도 크기의 문자가 4면에 총 44행(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 1775자가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1534자이며, 상고사(上古史) 중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적었다.

 능비는 1880년경에 재발견되었는데 재발견된 초기에는 비면의 상태불량과 탁본여건의 미비로 단편적인 탁본이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 유행하였을 뿐 정교한 원탁은 87년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882년경에 만주를 여행하던 일본군 참모본부의 밀정인 중위 사카와 가게노부에 의해 비문의 일부 문자가 변조되었다.

 

 또 1899년경부터는 일본·청나라 양국에서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거나 고가매매를 하기 위해 보다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감행함으로써, 비면이 마멸되고, 일부 문자가 오독되었다.

 현재는 쌍구본이나 석회부도(石灰付塗) 후의 탁본이 주류를 이루고 있을 뿐, 1890년대 이전의 원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능비연구에 난점을 안겨주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추모왕(鄒牟王;주몽)의 건국신화를 비롯하여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으로부터 광개토왕에 이르는 대왕의 세계(世系)와 약력 및 비의 건립경위가 기술되어 있고, 둘째 부분은 대왕의 정복활동과 토경순수(土境巡狩)기사가 연대순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셋째 부분은 능을 지키는 수묘인연호(守墓人烟戶)의 명단과 수묘지침 및 수묘인관리규정이 기술되어 있다. 이 비문에 실려 있는 글은 고구려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는데, 제2부의 정복기사는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형식상 8개 기년기사(紀年記事)와 2개의 종합기사로 구분할 수 있는데, 특히 신묘년기사에는 다른 기년기사와는 형식을 달리하는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공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新羅以爲臣民>라고 하는 <신묘년기사>가 있어 능비연구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이것은 신묘년(391)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을 적은 기사라기보다는, 대체로 영락 6년의 백제정벌 및 8년의 신라정토의 명분을 나타내는 전제문인 동시에 영락 6년에서 17년에 걸쳐 진행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집약기술한 집약문일 것으로 추정되며, 해(海)자를 비롯한 일부 문자가 변조 내지 오독(誤讀)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여,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광개토대왕묘→

 능비가 재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근 100여년간 한국·중국·일본 학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는데, 주로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가 능비연구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능비를 재발견한 중국에서는 주로 비의 건립연대 고증, 재발견 경위에 대한 보고, 비문의 해독, 비문 서체의 가치 등에 대한 금석학적 연구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역사학적 연구로서의 진전은 보지 못했다. 일본의 비에 대한 연구는 초기의 탁본 과정에서 변조 또는 오독된 자료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는데, 이것은 능비의 신묘년기사를 고대 일본의 한반도 진출의 근거로 제시하기 위하여 <왜가 한반도를 침략하여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당시 동아시아의 역사적 상황과는 모순된 견해를 일본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어, 고대 동아시아 교섭사에 있어서 왜를 주도적으로 보려는 기본적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00년대 한말에 비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일반적인 능비연구는 정인보(鄭寅普)의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에서 일본학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 연구사적 출발을 가진다.

 그 뒤 정인보(鄭寅普)의 학설을 토대로 박시형(朴時亨)·김석형(金錫亨)의 수정·보완된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으며, 이진희(李進熙)의 비문변조설(碑文變造說)은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허구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고구려사의 내재적 발전과정을 해명하고자 하는 능비 본연의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5-413))

 고구려의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은 열 일곱 살에 왕위에 올라 서른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백성들의 평안과 영토확장에 힘썼다.  그리하여 한강이북으로부터 만주 전역에 이르는 드넓은 영토를 확보함으로써  고구려의 기상을 중국 땅에 까지 널리 떨쳤다.  특히 영락이라는 연호를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민족의 독자성을 내외에 알린 훌륭한 왕이다.

연 대

나 이

생애와  업적

375

 

 고구려 국내성에서 태어남.

384

10세

 아버지 고국양왕이 고구려 18대 왕위에 오름.

386

12세

 태자의 자리에 오름.

391

17세

 고구려 19대 왕위에 오름. 처음으로 '영락'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독립국가임을 선포함.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음.

392

18세

 군사훈련으로 국력을 키우는데 힘씀. 9개의 큰 절을 짓고 불교를 널리 폄. 태학의 문을 넓혀 교육을 장려함.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쳐서 석현, 관미성 등 10여개의 성을 함락시킴.

393

19세

 관미성을 되찾으려고 쳐들어온 백제를 물리침.

394

20세

 침입해 온 백제군과 수곡성에서 싸워 이김.

395

21세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크게 이김. 송화국 유역에 비려국을 침.

396

22세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쳐서 58개 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유역을 점령함. 백제 아신왕의 아우를 인질로 삼고 조공을 받침.

400

26세

 5만의 원군을 신라에 보내어 왜군을 몰아 내 줌.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신성, 남소성 등과 7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나 두 성과 평주를 되찾음.

401

27세

 신라로부터 인질로 데려왔던 실성을 돌려 보냄.

402

28세

 연나라의 숙군성을 침.

404

30세

 연나라를 쳐서 고국양왕 때 빼앗긴 현도성,요동성을 되찾음.

405

31세

 고구려의 요동성을 되찾으려고 연나라가 쳐들어왔으나 패하고 돌아감.

406

32세

 연나라가 목저성으로 쳐들어왔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감.

408

34세

 고운과 국교를 맺어 북방한계선을 확보함.

410

36세

 동부여를 속국으로 만듬.

413

39세

 한강근처에서 서쪽으로 요하강, 북쪽으로 송화강, 북동쪽으로 연해주에 이르는 막강한 왕국을 이름. 가을에 세상을 떠남.

 4~5세기의 동아시아는 격동과 활력의 시대였으며 삼국의 정립이 국제적 교섭을 배경으로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정세속에서 위대한 정복군주가 탄생하였으니 바로 고구려 제19대 임금인 광개토대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역사상에서 두 번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연인으로서의 출생과 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능비가 19세기 말 재발견 됨으로써 대왕의 훈적이 보다 뚜렷한 실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 사실이 바로 그 것이다. 대왕은 소수림왕 4년 (374년) 왕제 고국양왕의 아드님으로 태어났으니, 바로 백제의 정복군주인 근초고왕의 몰년에 해당된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의 축을 이루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대립에 있어 명암이 엇갈리는 숙명적 사건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대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담은 기록은 희소하지만 대체로 태어나실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성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한다. 이는 물론 고대의 영웅사관에 기인하는 기술이라 할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대왕의 성품을 반영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고국양왕 3년 13세에 태자로 봉해졌다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니 바로 신묘년(391년)의 일이었다. 대왕은 이후 22년간 짧은 재위기간 동안이었지만 남정 북벌하여 고구려사에 있어서나 한국민족사에 있어 한 시대를 구획하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 위업을 이룩하였다. 즉, 대왕은 위대한 정복군주로 서쪽으로는 풍부한 철산지인 요동을 확보하고 이를 기반으로 요하를 넘어 대능하 유역으로부터 멀리 흥안령 산록의 시라무렌강 유역을 원정하고, 동쪽으로는 목단강유역으로부터 연해주 일원에까지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북으로는 송화강유역의 북만주일원으로 통치영역을 넓히고 남으로는 곡창지대인 한강유역을 획득하는 한편 멀리 낙동강 유역에까지 정복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대왕은 백제, 북연, 동부여, 신라, 가라제국을 조공국으로 복속시키는 한편 태왕호와 영락 년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동방의 패자임을 사해에 알리니, 이는 당시의 고구려가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완성하고 제국질서로 이행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위업을 이룩한뒤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임자년(412년)에 죽었다.

 대왕의 본명은 담덕(중국문헌에는 안이라 하였다.)이나 생전에는 호태왕 또는 영락대왕으로 불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비문에 의하면 년호는 영락, 시호는 호우총(:국강상광개토지평안호태왕, 모두루묘지 :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으로 대왕의 생전 업적이 잘 나타나 있다.

 

 

◈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 장군총(將軍塚)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묘로 고구려 20대 왕인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집안의 고구려 고분 중 가장 웅장한 형태의 능으로 집안시 북쪽 5km 떨어진 통구고분군에 있다. 고구려의 비약을 상징하므로 '동방의 금자탑' 혹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장방형 화강암 벽돌을 매단 안쪽으로 쌓아 높이 12.4m, 각변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사각형 피라미드 형태로 만든 능이다.

 장군총을 쌓은 화강암은 집안에서 8km 떨어진 고대 채석장에서 겨울에 얼음을 얼려 미끄러지게 하여 운송한 것이다. 능에 이용된 1,100개의 장방형 화강암은 장대석으로 정확한 규격으로 정교하게 잘라 축성하였으며 능 우측에는 철제계단이 설치되어 능 제5단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묘지 내 현실과 능 꼭대기인 상부의 관람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 장군총은 발굴전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도난당한 상태로 출토되어 유물이 전무한 상태이다.

 무덤 사방에는 굉장히 큰 돌을 3개씩 기대어 세워놓았는데 북쪽 가운데 것이 없어져 지금은 11개만 서 있다. 한 개가 없어진 북쪽벽은 현재 조금씩 밀려나오고 있다.

 이런 세운 돌들은 '밑 기단 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호분석)'이라는 현지 학자들의 주장이다.

 또한 한 면에 3개씩 12개를 세워 12지처럼 보호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장군총 위에서 북쪽을 바라보며 오른쪽, 그러니까 동북쪽을 보면 마치 고인돌 비슷한 돌더미가 보이는데 이것이 딸린무덤이란 것이다.

 원래 장군총에는 5기의 딸린무덤이 있었는데 지금은 1기밖에 남지 않다.

 장군총과는 모양도 판이하게 다르고 크기도 대단히 작다. 남은 한 기의 딸린무덤도 일찍이 도굴당하고 파괴되어 지금은 밑부분 3계단만 남아 있다. 밑변 길이 9.2m, 계단 높이 1.9m이다.

 이러한 딸린무덤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도 3개가 있다고 한다. 딸린무덤은 왕의 첩들이라는 설이 있으나 아직도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o 장군총은 누구의 무덤인가?

 장군총은 건축규모나 딸린무덤의 수를 볼 때 고구려 때의 왕능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부장품이 모두 도난당해 누구의 무덤인지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일본 학자들이 장군총은 광개토대왕의 묘라는 설을 내 놓았다. 그러나 중국 현지 학자들은 장수왕의 묘라고 주장한다.

 "장수왕은 수도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장본인이고, 또 평양에서 세상을 떴는데 어떻게 이곳까지 와서 묻히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에 중국 현지의 학자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구려 왕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무덤을 준비해간다. 그렇기 때문에 장수왕도 수도를 옮기기 전에 이미 국내성에 무덤을 준비해 놓았고, 관례에 따라 시신을 옮겨 이곳에 장사지냈던 것이다."

 

 

서기 3년부터 427년까지 약 400여년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 국내성터

 유리왕 22년, 서기 3년부터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427년까지 약 400여년동안 고구려의 수도가 자리했던 곳이다.

 졸본성에 이은 고구려 제2의 수도였던 국내성은 사각형 방형으로 북쪽 우산과 서쪽 칠성산에 에워싸인 배산임수의 천연요새이다. 압록강 서쪽에 위치한 국내성은 총면적 13,000평, 성길이 2,686m, 높이 1~5m로 총6개의 성문과 해자가 갖춰져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중국정부에서 성을 개수하면서 옹성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연변-집안-국내성.JPG

 또한 동서남북에 각각 세워져 있던 성문마저 1947년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전투 때 소실되었다. 원래 성벽의 높이는 7m였으나 거의 훼손되어 없고 현재 민가가 있는 남서쪽 성벽 3~4m 와 아파트 건물 사이에 위치한 벽 4~5단만이 겨우 남아있을 뿐이다.

 

 

◈ 우산하 고분군 남쪽에 자리한 7세기 고구려분묘 5회분 5호묘(盔墳 五號墓)

 5회분 4호묘는 중국 길림성 집안시 퉁구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무덤이다.

 6세기 중반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무덤이 특히 중요시되는 이유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함께 풍부한 설화적 내용이 담겨있는 신선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50년대에 발견되어 보존 상태도 좋아 고구려의 풍부한 문화와 생활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고분의 크기는 높이가 8m, 둘레가 160m 정도로 꽤 크며 안에 들어가보면 방이 하나인 단실분이다.

 네 벽면에 3각 고임 돌을 모서리에 평행하게 얹어서 1층 기단을 만들고, 다시그 모서리에 3각 고임돌을 얹어서 2층 기단을 만든 후, 평평한 4각 돌을 얹어서 천정을 마무리 하였다. 이러한 것을 평행삼각고임이라고 하며 후기 단실묘에 주로 나타난다.

 먼저 고분에 들어가면 4벽면에는 북쪽의 현무, 동쪽의 청룡, 남쪽의 주작, 서쪽의 백호가 그려져 있다. 고분 바닥에는 남북에 평행하게 3개의 관상이 놓여져 있고, 4벽면의 위에는 용이 서로 꼬여 길게 무늬를 이룬 띠가 그려져 있다.천정에 그려진 신선도는 영혼불사(靈魂不死)를 믿는 고구려인들의 내세관과 관련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하늘을 날아 사후세계(死後世界)로 간다고 믿었는데, 여기에서 비행(飛行)의 능력을 가진 조류(鳥類)가 매개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앙은 사후에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는 내세관을 형성시켜 벽화고분의 천정 부분에 다양한 모습의 신선도(神仙圖)를 그려놓았다. 1층 기단을 보면, 동쪽에는 우수인(소머리 신), 불의 신, 남쪽에는 야철신, 제륜신, 서쪽에는 연마신, 용탄신, 북쪽에는 일신, 월신이 그려져 있다. 2층의 기단에는 북쪽에 3명의 비천이 있고 동쪽에는 깃발 든 신선과 봉황을 탄 신선. 남쪽에는 공작을 탄 신선과 비천, 서쪽에는 용 탄 신선과 학 탄 신선이 그려져 있다. 맨 위 천정에는 황룡이 꿈틀거리면서 이 고분의 주인공이 심상치 않은 인물임을 보여 준다.

 

 

길림성 집안시(集安市)에 위치하고 있는 단층건물의 고구려 역사 박물관 집안박물관

 집안시(集安市) 북쪽에 자리한 단층건물의 고구려 역사박물관으로 주요 역사유적지인 것에 비해 박물관내부가 초라한 곳이다. 박물관 내부는 고구려 고분에서 출토된 각종 유물들과 사진자료들을 제1전시실 동청, 제2전시실 정청, 제3전시실 서청의 3개관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o 제1전시실: 고구력분과 산성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지안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고분 분포도와 형태, 주요 고구려산성들의 발굴전 모습들이 사진으로 남아있다.

연변-집안-집안박물관.JPG

 또한 각 고분 내부에 그려진 벽화묘사본이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o 제2전시실: 광개토대왕릉비문 자료실로 광개토대왕릉 비문탁본 4장이 천장에서부터 바닥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는 곳이다.

o 제3전시실: 고구려유물전시관으로 각종 토기와 청동화살촉과 칼, 기와막새, 와당, 말안장들이 진열되어 있다. 특히 광개토대왕릉에서 출토된 폭 40cm의 쟁기에 달아 땅을 가는 농기구인 쇠보습이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 이는 그당시 고구려 농업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던가를 시사하는 것으로 소를 이용한 우경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환도산성(丸都山城)과 통구무덤떼

 유리왕 21년 국내성으로 이전한 후 676m의 반원형 산봉우리와 주위 능선을 이용해 만든 총둘레 7km의 산성이다.

 환도산성은 집안시 북쪽 통구강을 따라 약 2.5km 떨어진 환도성 중턱 해발 700m에 자리하고 있다.

 국내성이 평성인 도성인 반면 환도산성은 유사시 적군과 대치하기 위해 쌓은 군사적 위성으로 '산성자산성' 혹은 '위나암산성'이라고도 불린다. 발말굽 모양의 불규칙한 타원형 형태의 돌로 쌓아 올린 산성 입구에는 현재 석각으로 된 안내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환도산성에는 현재 약 5m 높이의 북쪽 화강암 성벽과 말에게 물을 먹이던 음마지, 전투를 지휘하던 점장대를 비롯해 병영터와 궁전터 흔적들이 일부 남아있다.

 음마지(飮馬池)는 음마만(飮馬灣), 연화지(蓮花池)라고도 부르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말에 물을 먹이던 곳이다.

 

 

압록강(鴨綠江)

 압록강의 명칭은 〈신당서 新唐書〉에 "물빛이 오리 머리색과 같다 해 압록수(鴨綠水)로 불린다"는 기록에서 유래한다.

 길이 925.502㎞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이다. 국경하천으로서의 길이는 806.503㎞이며, 유역면적은 6만 3,160㎢인데, 이 가운데 우리나라에 속하는 유역면적은 3만 1,226㎢, 중국에 속하는 유역면적은 3만 1,934㎢이다. 양강도 김형권군의 남쪽에 솟은 명당봉(明堂峰:1,800m) 북동계곡에서 발원해 지경천(地境川)·웅이강(熊耳江)을 합치면서 북류한다.

연변-집안-압록강.JPG

혜산시 강구동에 이르러 백두산 장군봉 남서계곡(지금까지 알려진 압록강의 발원지)에서 발원한 보혜천(普惠川)과 합류해 서쪽으로 유로를 바꾸어 감입곡류하며, 삼수천·장진강·후주천·후창강을 합류한다.

 다시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부근에서 유로를 남서쪽으로 바꾸어 중강천·호내강·자성강·삼풍천·장자강·위원강·초산천·충만강·동천·남천·영주천·구곡천·합수천·당목천·삼교천을 차례로 합한 뒤 평안북도 용천군 진흥노동자구 남쪽에서 서해로 흘러든다.

 

 

 

白頭山(백두산)

포토 갤러리

 연길에서 자동차편으로 용정을 거쳐 5시간을 달리면 미인송 소나무들의 발그레한 줄기들이 미끈미끈하게 뻗어 있는 장관이 전개된다. 공기가 너무 맑아 선경에 온 것 같다.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려면 새벽에 가는 것이 좋으므로 대개 이곳에 있는 二道白河公司(이도백하공사)에서 경영하는 호텔에서 1박을 해야 한다. 이튿날 새벽 5시쯤 일어나 중국쪽 백두산 정상인 천문봉으로 올라가는 중국군 소속 지프를 타면 편리하다.

 안개속을 뚫고 20여분을 지그재그로 오르면 침엽수림이 점점 작아지다가 이끼로 변한다. 화산암만이 널려 있는 곳에 차가 멈추면 거리서부터 50m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二道白河(이도백하)를 따라 배두산천지로 가다 보면 멀리 장백산온천이 있다. 이 온천은 온도가 83℃나 되서 계란을 삶아 먹을 수 있을 정도다 이곳에서 온천욕을 할 수 있는데, 피부병에 아주 효험이 좋다고 한다.

 

기후와 기온

o 백두산의 기후

 백두산 산정과 천지 일대의 겨울은 사실상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지속되며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기간은 7,8월 두달 뿐이다. 연평균 기온은 6℃~8℃, 연중 최고기온은 섭씨 18℃~20℃, 최저기온은 - 47℃ 정도이다.

 풍향은 주로 여름철에 서풍 또는 남서풍이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다. 풍속은 최대 초속 60m, 연평균 강수량은 1500㎜(2500㎜나 되어 우리나라 최다우지대라는 설도 있다),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나 되고 기상상태가 변화무쌍하여 백두산 등정에는 안전을 위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백두산 등정은 현재 중국 길림성을 거쳐서 가능한데 일반인이 오를 수 있는 시기는 매년 6월 20일에서 8월 10일 까지의 짧은 기간뿐이다. 백두산은 하루에도 수십차례나 기상이 급변하기 때문에 관광 최적기인 7월에 등반을 하더라도 천지의 경관을 구경할 수 있는 확률은 높지 않다. 더욱이 백두산 연봉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기회포착은 아주 어렵다고 한다.

 백두산 등정을 위해서는 7월의 성하(盛夏)에도 방한복을 준비해야 하며 예측 불가능한 소나기에 대비한 우산,우의의 준비도 필수적이다. 또한, 등반 중 사람이 날려갈 정도의 돌풍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으므로 각별히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o 백두산의 기온

 백두산은 해발고도가 높고 안개가 많아 6월에서 8월의 일조율이 45~ 50% 밖에 안되고 겨울철이면 온누리가 눈에 덮혀 복사 반사가 심하여 대단히 춥다.

 계절별로 보면 겨울은 대단히 길고 봄과 가을은 짧다. 기후학적으로 이지역에는 여름이 없다. 중국쪽 천지 기상대(사진)에서 측정한 자료에 의하면 연평균 기온은 -7.3℃, 북한지역에서 측정한 자료에 따르면 -8.3℃이다. 이 숫자는 동아시아지역의 기상대에서 측정한 연평균 기온 가운데 가장 낮다.

 백두산에서 가장 더운달은 7월로 월평균 기온이 8.7℃이고 가장 추운달은 1월로 월평균 기온이 -23.3℃이다. 이 지역에서 기온의 분포는 서쪽이 낮고 동쪽이 높으며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다. 평균 기온이 낮기 때문에 무상기(서리가내리지 않는기간)도 대단히 짧다. 천지에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날짜는 8월 7일이고 끝나는 날짜는 이듬해 6월 18일이어서 무상기는 겨우 72일 밖에 안된다.

 

 

o 강수

 이 지역은 지세가 높고 해양과의 거리가 가깝고 삼림 지역이어서 강수량이 많다. 그가운데 에서도 백두산은 비가내리는 중심이다. 북사면에 있는 천지 기상관측소의 연강수량은 1,340mm인 것으로 측정되었고 남사면에서는 2,501mm이다. 해발 고도가 낮아지면 강수량도 점차 적어진다.

 예를 들어 해발 710m인 이도백하의 강수량은 698mm이지만 해발 1,845m인 온천에서는 1,013mm이다. 강수량은 6월에서 9월 사이에 가장 많은데 그 가운데 7월이 가장많다. 12월에서 2월 사이에 강수 량이 적은데 그중에서도 1월의 강수량이 가장적다.

 비는 1년 동안에 209일 정도내리는데 그중에서도 7, 8월에 강수량이 가장 많아 이 두달사이에 맑은날은 불과 며칠밖에 되지 않는다.

 바람과 대기 순환 그리고 지형의 영향을 받아 백두산 산정은 서풍과 편 서풍이 주로 분다. 산 아래는 편서풍이지만 여름철에는 동남풍이 증가되고 겨울철에는감소된다.

 바람의 속도는 연평균 풍속이 초당 11.7m이다. 풍속이 가장 약한 8월 에도 초당 6.9m인데 이것은 산아래 최대 풍속의 배가 된다. 8급 이상의 폭풍 일수는 270일 안팎이고 폭풍이 가장 많은 달은 12월로 한달 동안에 29일에 달한다.

 이처럼 편서풍이 강하게 불기에 백두산 화산체에 있는 소나무는 서쪽 으로 나뭇가지는 아예 없고 남쪽과 북쪽에는 짧은 나뭇가지가 약간 남아 있고 동쪽으로만 나뭇가지가 자란다.

 

o 안개

 백두산은 공기 중 습도가 많은데다가 지형이 높아 안개가 많다. 관측에 따르면 안개 끼는 날짜가 1년에 264일로 중국의 아미산등 2, 3개 산지 다음으로 많다.

 한랭한 계절에 안개가 낄 때는 성에가 생기는데 1년에 179일이나 나타나니 아시아에서는 최고로 안개가 많이 끼는 지역인 셈이다.

 

o 찾아가는 방법

 연길에서 용정-송화강-二道白河 (이도백하)-백두산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백두산으로 가는 최단거리 노선이다. 교통수단은 택시, 중형버스, 대형버스 그리고 헬리콥터까지 있다. 백두산 등반은 7, 8월이 적기이나 7월말부터 8월 중순경이 가장 무난하다.  백두산에는 9월초에 눈이 온다.

 

마지막 폭발

 '조선실록'의 1702년 6월 3일 기록은 백두산 화산 분출이 대규모였음을 보여준다.

 "하늘과 땅이 갑자기 캄캄해졌는데 연기와 불꽃 같은 것이 일어나는 듯하였고...흩날리던 재는 마치 눈과 같이 산지사방에 떨어졌는데 그 높이가 한 치 가량 되었다."

 

 

天地(천지)

 백두산 풍경중 최고로 뽑히는 천지는 화산의 분화구에 생성된 것으로 해발 2,200m 높이에 위치해 있으며, 백두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는 데에서 "천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원형을 띠고 있으며 전체 면적은 10㎢, 호수 주위 길이가 13㎞, 평균수심이 204m 정도이다. 천지는 옛부터 안개가 많고 1년 중 맑은 날이 거의 없다. 천지를 둘러싸고 백두산의 16개 봉우리가 솟아 있으며 천지의 물이 흘러 장백폭포와 온천을 형성한다. 또 장백폭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천지를 닮은 작은 호수가 있어 '소천지(小天地)'라고 불린다.

 천지의 수심 중 가장 깊은 곳은 373m나 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가장 깊은 화구호(칼데라호)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연평균기온은 -7.3℃, 평균수온은 0.7~11℃이며, 11월에 얼어붙었다가 6월이 되어서야 녹는데 얼음의 두께가 1.2m나 된다.

 천지의 수질이 매우 깨끗하여 먹을 수도 있으며, 주로 지하수와 강수량으로 채워진다. 이곳에는 잉어를 비롯한 몇 종류의 어종이 서식하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의 국경 호수로서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의 발원지이다.

 하지만 이곳의 기후가 불규칙하고 거센 바람과 폭풍우가 자주 발생해서 여행객들이 맑은 날에 천지의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기란 쉽지 않다.

 천지는 또 국경선이 통과해 중국과 북한의 경계에 놓여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천지의 크기와 물

 천지는 백두산 화산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주위 산봉들의 해발고도는 2,500m 이상이고 수면의 해발 고도는 2,189m로 세계 화산호 가운데 가장 높다.

 동서 길이는 3.54km이고 남북 길이인 천지의 지름은 4.5km이다. 천지 둘레의 길이는 14km이고 면적은 9.12㎢이다.

 

천지 물은 어디서 오는가?

 천지의 저수량은 약 20억㎦. 대형 저수지의 몇십 배에 해당 된다. 천지 물은 달문(闥門) 을 통해 북쪽에 있는 용문봉과 천황봉 사이의 승사하((乘槎河, 통천하)를 따라 일년 사시절 송화강 상류로 흘러 들어간다.

 물의 내원에 대하여는 여러 이론이 있다. 하지만 1990년 초 조사에 의하면 천지 물의 내원은 대기강수(빗물), 집수구에서 흘러 드는 지표수와 지하에서 공급되는 지하수이다. 세 가지 내원 가운데 지하수의 공급량은 전체 천지 공급수량의 61.5%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천지 호면에 내리는 빗물은 1년 사이에 천지에 공급하는 수량이 30.76%를 차지한다. 다음으로는 천지 집수면적 50.57㎢. 천지에 흘러드는 지면 경류이다. 공급되는 수량은 천지 공급수의 7.73%를 차지한다. 이처럼 천지의 중요한 내원이 지하수이기 때문에 여름철에 천지 물을 마시면 차고 시원하며, 기온이 한랭하고 온누리가 설원을 이룬 겨울철에도 얼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 내려간다.

 

천지 물은 마실 수 있는가?

 과학적인 분석에 따르면 천지 물은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좋은 점이라면 내원이 대부분 지하수이기에 무색, 무미하고 깨끗하고 차다. 천지물의 투명도는 16m나 되고 가장 더운달인 8월에도 천지 표층수의 온도가 섭씨 8~10℃, 20m 이하의 수온이 섭씨 3.5~4℃이다. 그러므로 마시면 이가 시릴 정도로 차서 사람들에게 시원한감을 준다. 천지의 물은 10월 중순부터 얼기 시작하고 이듬해 6월 중순에야 녹으므로 이 사이에는 미생물이 얼어 죽고 여름철이라 하더라도 수온이 낮기에 미생물의 번식률이 매우 낮아 호숫물에 함유된 미생물이 적어 깨끗하다. 천지 물의 중탄산 함량은 주위 암석에 있는 나트륨장석의 분해로 일반적인 음료수에 비하여 약 10배 정도 더 많아 마시면 시원하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미량원소도 적당하게 있어 인체에 유리하다. 그러나 백두산천지는 화산호이고 또 몇 곳에서는 온천이 나오기에 인체에 불리한 화학원소들도 있어 음료수로는 적당하지 않다

 

 

백두산

 백두산(2,744m)은 우리 민족의 성지이며 5천 년 역사 속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꿈을 폈던 곳이다.

 백두산은 중생대부터 신생대 초에 걸쳐 1,000m~1,500m의 융기 고원상에 형성되었다가 다시 신생대 제3기 말부터 제4기 초에 다량의 현무암이 분출하여 반경 30리에 걸쳐 최초 종상화산을 형성한 뒤 차차 냉각됨에 따라 균열이 생기고 산정 부분이 함몰하여 칼데라호인 천지를 형성하였다.

 

천지 못

천지의 이름

 천지는 천지 창조의 신비함을 간직한 천상의 호수라는 뜻으로 대택, 대지, 용왕담, 달문담, 신분, 용궁지, 천상수, 달문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천지의 물이 마르지 않는 이유

 칼데라호인 백두산 천지 못은 연중 물이 마르지 않는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천연 호수이다. 천지는 북쪽으로 흘러 나가 중국의 장백폭포에서 덜어진다. 2744m의 고도에 위치한 천지 못은 마르는 법이 없다. 백두산 천지 못을 둘러싸고 있는 옥설봉, 마천우, 청석봉, 백운봉, 백암봉, 비류봉, 쌍흥봉 등은 수면으로부터 약 500m의 고도를 이루는 높은 봉우리들이다. 따라서, 백두산의 천지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들 산지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의 양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백두산 정상부분은 연중 기온이 매우 낮은 이유로 인해 1년중 여름철 2~3달을 제외한 나머지 달에는 눈과 함께 강수량이 매우 많은 편이다. 그리고, 증발량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호수의 물은 쉽게 마르지 않는 것이다.

 

천지의 물은 어디로 흘러 가는가?

 천지는 물이 불어도 수위가 50cm 이상을 넘지 않으며, 그 이상이 될 때는 북쪽의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달문을 통해서 '승사하'라는 계곡을 통해서 흘러 넘친다. 달문은 천지에서 유일하게 물이 빠져 나가는 통로로 폭이 약 30m 가량 되는 좁은 계곡인데 만주인들은 '대궐문'이라고 부른다. 이곳을 통해서 빠져나온 물줄기는 약 900m쯤 강을 타고 내려가 높이 64m의 장백폭포(비룡폭포)로 떨어져 만주의 송화강으로 흐른다.

 

천지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먼 옛날에 살던 압록 송화 도문의 세 처녀가 천지의 경치에 반하여 하늘의 계율을 어기고 목욕하러 왔다가 도문 선녀의 옷이 물에 떠내려가는 바람에 승천하는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이를 안 천왕이 진노하여 천지의 물을 세 갈래로 갈라 놓아. 오늘날의 압록강, 송화강, 도문강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천지에 사는 생물

 천지 호반에는 눈 속에서 곱게 피어나는 만병초를 비롯하여 126종의 식물이 분포한다. 또한, 산천어를 비롯한 한두 가지 종류의 물고기와 몇 종의 식물성 플랑크톤과 이끼류가 살고 있다.

 

 

장백폭포(長白瀑布 : 창바이푸뿌)

 천지 북쪽에 결구가 형성되어 있고, 천지의 물이 결구를 통해 1천여m의 긴 협곡까지 흘러 폭포를 형성했다. 장백폭포는 높이가 60여m의 웅장한 폭포로 200m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폭포는 크게 두 갈래의 물줄기로 나눠져 있고 동쪽 폭포 수량이 전체 수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며 떨어진 물은 송화강(松花江)으로 유입된다.

 중국 북방의 폭포들은 모두 겨울에는 얼어서 그 모습을 볼 수 없지만, 오로지 장백폭포만은 일년 내내 멋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또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비룡폭포(飛龍瀑布)"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백두산의 소천지(小天地)

 백두산 아래, 장백폭포가 흐르는 계곡을 따라 내려와 약간 우측 용문봉 줄기 아래에는 자그마한 연못, 소천지가 있다. 중국에서는 은환호(銀環湖)라 이름 붙여 놓은 곳이다.

 소천지의 분위기는 한적한 숲 속에 있는, 백두산 꽃 요정들의 숨겨진 놀이터 같다. 소천지는 호수의 수면에 주변의 산과 초목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여름이면 주변에는 갖가지 앙증맞고도 고운 꽃들이 올망졸망 피어난다. 노랑만병초가 호수 주위에 피고 좀설앵초가 곳곳에 피어난다.

 

 특이한 점은 물이 계곡에서 유입되지만, 빠져나가는 곳 없이 모두 바닥으로 스며든다.

 소천지는 은가락지 호수(銀環湖, 은환호)라고도 불린다.

 둘레는 260m, 면적 5,380㎡, 깊이 10여m이며 사철 마르지 않는다.

 생성 내력에 대해서는 제4기 빙퇴석이 만든 호수라는 설(說)과 백두산 천지의 분출로 형성된 소분화구라는 설이 있는데 후자의 설이 더 유력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하 삼림(地下森林, 디샤선린)

 사철 어둑어둑하고 습기가 많은 지하삼림 일대는 전나무 가지에 이끼가 붙어서 자라고 있다.

 지하 삼림(地下森林, 디샤선린)이란 북파 산문의 소천지 아래 지역에 있는 지반이 깊게 파인 원시림이다.

 백두산이 분화하면서 생긴 거대한 계곡에 남북 2,500~3,000m에 걸치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호랑이를 비롯한 각종 맹수가 서식한다.

 지반이 낮은 곳에 펼쳐진 원시림 숲이라 해서 지하삼림(地下森林)이라 부른다.

 

 

녹연담(綠煙潭) 폭포

 소천지 바로 아래가 녹연담이다.

 푸른 옥을 담고 있듯이 물빛이 옥빛이라 하여 '녹연담(綠煙潭)'이라고 한다.

 악화림대(岳樺林帶)는 백두산 해발 고도 1,800~2,100m의 고산지대(高山地帶)에 자생하는 자작나무림대를 말한다. 백두산의 녹연담(綠煙潭)은 바로 이 악화림경관대(岳樺林景觀帶) 내에 위치해 있다.

총 4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높이는 약 26m이고, 2개의 폭포가 흘러 내려 연못을 이루고 있는데 마치 푸른 옥을 담고 있는 것처럼 녹색 물빛을 띤다.

 계단을 따라 내려와 연못 속을 들여다보면 송어같이 생긴 '천지어(天地漁)'가 유유자적 헤엄치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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