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

양귀비(楊貴妃)의 여지(荔枝) ∥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 개원지치(開元之治) ∥ 虛有其表(허유기표)

천보난치(天寶亂治) ∥ 양국충(楊國忠) ∥ 고역사(高力士) ∥ 중국의 궁녀(宮女) ∥ 이임보(李林甫)

 

 중국 봉건 사회의 황금 시대라 일컬어졌던 당왕조의 개원 연간을 정점으로 그 후 이어지는 천보 연간(天寶年間: 742~756)에는 그렇게 번영했던 당왕조의 발전상도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은 결코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잠재해 있던 경제적· 사회적인 근원적 병폐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당시 간신들의 횡포와 현종(玄宗, 685~762 (77세)), 당나라 제6대 황제, 재위: 712~756 (44년간))의 양귀비(楊貴妃)에 대한 무분별한 총애가 그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림보(李林甫)가 조정의 실권을 한손에 쥐게 된 736년에 현종은 사랑하던 무혜비(武惠妃, 699~738)를 잃었다. 무혜비를 잃은 현종은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후궁에는 아리따운 미녀가 3천명이나 있었으나 누구 하나 현종의 마음을 끄는 여인은 없었다.

 

 이럴 즈음 현종의 귀를 속깃하게 하는 한가지 소문이 현종의 관심을 끌었다. 수왕비(壽王妃)가 보기 드문 절세의 미녀라는 소문이었다. 현종은 은근히 마음이 끌려 환관에게 명하여 일단 수왕비를 자신의 술자리에 불러오도록 하였다.

 

 현종은 수왕비를 보자 한눈에 마음이 끌렸다. 수왕비는 빼어난 미모일 뿐 아니라 매우 이지적인 여성으로 음악· 무용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술자리에서 현종이 작곡한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의 악보를 보자 그녀는 즉석에서 이 곡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마치 선녀가 지상에 하강하여 춤을 추는 듯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수왕비야말로 다름 아닌 후의 양귀비(楊貴妃)로서 현종 황제와 양귀비의 로맨스는 이 만남을 계기로 그 막이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의 본명은 옥환(玉環)으로 원래는 현종의 열여덟째 아들 수왕 이모(李瑁)의 아내였다.

 

 수왕 이모는 현종과 무혜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니 양귀비는 바로 현종의 며느리인 것이다. 56세의 시아버지 현종이 22세의 며느리와 사랑을 불태운다는 것은 당시로서도 충격적인 스캔들이 아닐 수 없었다.

 

 현종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선 양귀비 자신의 뜻이라 빙자하여 그녀를 여도사(女道士)로 삼아 우선 남궁에서 살게 하고 태진(太眞)이라는 호를 내려 남궁을 태진궁(太眞宮)이라 개칭하였다. 현종은 수왕 이모에게 죄책감을 느껴서였는지 수왕에게 위씨의 딸을 보내어 아내로 삼게 하였다.

 

 태진이 귀비로 책봉되어 양귀비로 불리게 된 것은 그 후의 일이지만 남궁에 들어온 태진에 대한 현종의 열애는 대단한 것이었다. 남궁에 들어온지 1년도 채 못되어 태진에게서는 마치 황후가 된듯한 도도한 행동마저 보였다.

 

 현종과 태진 이 두사람은 깊은 밤도 오히려 짧은 듯 해가 높이 떠올라도 잠자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렇게하여 일찌기 흥경궁에 근정전을 세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무에 열중하던 현종 황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하여 마치 딴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남궁에 들어온지 6년 후 태진은 귀비로 책봉되었다. 명실 공히 양귀비가 된 셈이다. 궁중의 법도상 귀비의 지위는 황후 다음이었으나 이때 황후는 없었으므로 사실상 양귀비가 황후의 행세를 하였다. 양귀비는 더욱 더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그녀의 일족들도 차례차례 고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양귀비는 고아 출신으로 양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갔기 때문에 혈연을 같이 하는 친척은 없었지만 현종은 양귀비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양씨 일족에게도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楊釗)는 별로 품행이 좋지 않았는 데도 불구하고 민첩하고 요령있는 행동으로 점차 현종의 신임을 받아 현종으로부터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 후 재상 이림보와 대립하였고, 이림보가 실각한 후에는 안록산과도 대립했던 양국충(楊國忠 ?∼756)이 바로 양귀비의 6촌 오빠이다.

 

 천보(天寶) 10년(751) 칠월 칠석날에 있었던 일이다.

 

 현종은 화청궁에 거동하여 장생전에서 양귀비와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이윽고 밤이 깊어 하늘에는 은하수가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건만 웬일인지 칠석의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양귀비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현종은 왜 우느냐고 달래듯 물었으나 양귀비는 그저 울음만을 계속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다.

 

 이윽고 양귀비는 눈물을 닦으면서 띄엄띄엄 그의 심정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하늘에 반짝이는 견우성과 직녀성, 얼마나 아름다운 인연입니까.

 저 부부의 지극한 사랑, 영원한 애정이 부럽습니다. 저 부부와 같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역사에도 자주 기록되어 있지만 나이가 들면 가을 부채처럼 버림을 받는 여자의 허무함,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 서글퍼 견딜수가 없아옵니다..."

 

 양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는 현종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손을 서로 붙잡고 그들의 영원한 애정을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에게 맹세하는 것이었다.

 "하늘에서는 비익조(比翼鳥)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連理枝)가 되어지이다."

 

 이 뜻을 풀이하면, '비익조'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새로, 암수가 한 몸이 되어 난다는 데서 사이가 좋은 부부를 상징하고, '연리지' 또한 중국 전설에 나오는 나무로, 뿌리는 둘이지만 가지는 합쳐져 하나가 된다는 데서 부부의 깊은 애정을 상징한다. 현종과 양귀비는 이 '비익조'와 '연리지'처럼 영원히 떨어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 것이다.

 

 개원(開元) 24년(736)부터 천보 연간에 걸쳐 조정에서는 간신이 제멋대로 정사를 농락하고 현종은 양귀비에게 정신을 빼앗겨 당왕조의 정치는 부패 일로를 치닫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번영의 뒤에 숨겨져 있던 위기가 점점 심화되어 갔다.

 

 우선 농촌에서는 균전제가 무너져 국가의 세입원이 위협을 받게 되고 이에 따라 조정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었으며 군사 체제의 토대가 되었던 부병제가 무너져 군대를 모집해도 응모하는 자가 없어 군의 사기와 전투력이 급격히 저하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변경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절도사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그의 손에 장악하고 있어 일단 유사시 당왕조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 위험성마저 내포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정세로 보아 당의 현종 왕조의 위기는 폭발 일보 직전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양귀비(楊貴妃, 719~756)의 여지(荔枝, 리치)

 관공 개발 거리가 있으면 사족을 못 쓰는 중국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중국에 시인 두보(杜甫, 712∼770 (58세))의 무덤이 여덟 군데나 있는 것만 미루어봐도, 티끌만한 연줄이라도 있으면 관광지로 개발하는데 서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송나라 때 지은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에 보면 양귀비의 아버지 양현담(楊玄淡)이 촉주(蜀州), 즉 지금의 사천성 숭경고을 호방(戶房)으로 있을 무렵 귀비를 낳았다 했다.

 아명이 복실복실하다 하여 옥환(玉環)이라 했으며, 어릴 적부터 부산했던지 아버지의 직장인 현청(縣廳) 앞 연못 속에 자주 빠지곤 했던 것 같다.

 

 양귀비(楊貴妃)가 유명해진 다음 그 연못을 낙비지(落妃池)라 불렀다는 것이 문헌상 남은 양귀비의 유일한 탄생 유적이다.

 

 장강(長江) 최상류인 민강(岷江)이 수십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도강언(都江堰)에서 동남쪽으로 8km를 가면 취원진(聚源鎭)이 나오고, 다시 서쪽으로 2km 남짓 가면 양귀비 때문에 지어졌다는 영상촌(迎祥村)이 나온다. 그곳 둘레 120m 남짓 되는, 중국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잡초와 수초가 어우러진 못이 바로 양귀비가 빠졌다는 낙비지(落妃池)이다.

 

 이곳에는 '귀비어주(貴妃御酒)'라는 토주 간판만이 유적지임을 묵시하고 있다.

 

 아버지가 죽어 고아가 된 옥환은 하남에 사는 작은 아버지 양현규(楊玄珪)의 집에 맡겨졌는데, 등에 업혀 울며 넘어가던 낭자령(娘子嶺)이란 고개 이름이 고향에 남아 있는 유적 가운데 또 하나이다.

 

 낭자령(娘子嶺)은 황실에서 현종(玄宗, 685~762 77세), 당나라 제6대 황제, 재위: 712~756 (44년간))이 양귀비를 낭자라는 애칭으로 불렀음을 들어 안녹산의 난에 쫓긴 현종이 성도로 피난올 때 귀비가 넘은 고개라는 말을 듣고, "낭자여 낭자여 울부짖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도강언에서 서역으로 넘어가는 고산 준령의 잘룩한 고개로, 멀리 바라볼 수는 있으나 양자령(羊子嶺)이라는 지명마저도 파괴돼 있다.

 

 장강을 따라내리며 굳이 양귀비의 유적을 찾는다면, 양귀비가 즐겼다던 과일 여지(荔枝)를 공급하기 위해 조성되었다던 비자원(妃子園)이 배릉(陪陵) 강변에 지명으로 남아 있다.

 

 장강 삼협으로 출발하는 유람선이 중경(重慶)에서 떠나 처음 만나는 강변 도시가 배릉으로, 180km 정도 지점이다. 바로 이곳에서 고을살이를 했던 시인 백낙천(白樂天)이 남긴 여지에 대한 글을 보자.

 

 '여지(荔枝)는 이 고을 특산인데 나무 모양이 반쯤 편 우산 같고 버들잎 같은 나뭇잎이 겨울에도 푸르다. 열매는 딸기 같은데 속살은 빙설 같고 맛은 새콤달콤한 우유죽 같다. 열매가 가지를 떠나면 하루 사이에 빛이 변하고, 이틀에는 향이 변하며 사흘이면 맛이 변한다.'

 

 중국에서도 사천과 광동에서만 나는 이 열대 작물을, 한무제(漢武帝, BC 156~BC 87 (69세), 재위: BC 141~BC 87 (54년간))가 남방을 정략했을 때 여지나무 1백 그루를 옮겨다 궁 안에 심고 삼품 벼슬을 내려 왕자 기르듯이 했는데 모두 죽고 말았다고 한다.

 

 한무제에 못지않게 여지 없이 못살았던 이가 또 양귀비였던 것이다.

 

 현종은 섬섬옥수로 여지를 까먹는 양귀비를 보면, 취해서 몽롱해진 술이 깰 정도로 황홀해 했다.

 

 시인 두보의 '병귤(病橘)'이란 시에 보면, '남해(廣東)의 사신들 수만리 길 여지를 바치고자, 말 타고 산곡을 달리다 죽은 말 기백 마리인가.'한 것을 보니, 양귀비의 입맛을 맞추고자 한 여지 민폐가 극심했던 것 같다. 오십 리 간격으로 감시 초소를 두고 백 리 간격으로 숙소를 두어 밤낮으로 말을 달리게 했으니, 수천 리 길이 말발굽이 일구는 먼지로 잘 날이 없었다 한다.

 

 양귀비의 여지가 두보의 시에처럼 광동산이냐, 그렇지 않으면 양귀비의 고향인 사천산이냐는 역사의 쟁점이 되고 있다. 하지만 여지는 양귀비가 자랄 데 먹었던 향수 식품이고, 그 여지의 공급을 위해 비자원을 만든 것이며 송나라 채양(蔡襄)의 '여지보'나 한유(韓維)의 '비자원 여지를 보내준 데 감사하는 글' 등에 의해 사천 배릉산(陪陵山)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칠일 낮, 칠일 밤을 달려 조달했다는 문헌을 통해 거리상으로 광동에서는 그 맛을 댈 수 없었을 것이다.

 

 여지맛은 성도산은 시고 씨앗이 굵고, 광동산은 달고 씨앗이 작았으며, 중경의 배릉 여지는 그 중간 맛이다.

 

 그 배릉에서 뱃길 따라 76km를 내려가면 이 세상 모든 귀신이 집산한다는 귀성(鬼城), 즉 풍도(豊都)에 이른다. 이승의 모든 사자는 이곳에 와서 죄과를 심판받고 내세의 삶을 배정받게 되어 있다.

 

 양귀비도 목을 매어 죽임을 당한 직후 이 귀성에 와서 담당 판관의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워낙 술수가 능란해서 추파와 뇌물로 천당도 지옥도 아닌 봉호도(蓬壺島) 선계(仙界)에 옥비태진원(玉妃太眞院)이라는 궁전을 짓고 살게 됐다고 이 귀성의 전설은 전한다.

 

 죽은 양귀비를 못 잊어 눈물로 지새우는 현종에게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양통유(楊通幽)라는 도사가 찾아와, 이 귀성을 통해 양귀비의 소재를 찾아 서로 정을 나누게 했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그 귀성 강쪽으로 망향대(望鄕臺)가 있는데, 사자들이 이곳에서 정든 고향을 마지막 바라본다는 곳이기도 하다. 양귀비도 이곳에서 화청궁(華淸宮)을 내려다보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지금은 관광객의 명소가 되어 있다.

 

 

 

◈ 당나라 제6대 황제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762, 재위: 712~756 (44년간))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년 9월 8일~762년 5월 3일, 재위: 712~756)는 중국 당나라의 제6대 황제다.

 별호는 당명황(唐明皇)이며, 당 예종 이단(唐睿宗 李旦, 662~716, 재위:710~712)의 3남이며, 어머니는 소성황후(昭成皇后) 두씨(竇氏)이다.

 현종은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598~649. 재위: 626~649)) 이후 당나라 재번영을 이끌기도 했으나 동시에 쇠퇴시킨 황제이다.

 이융기(李隆基)는 처음에 초왕(楚王)으로 책봉되었으나, 후에 임치왕(臨淄王)으로 책봉되었다. 일찍이 별가 등 요직을 맡았으나, 당시 황후인 큰어머니 황후 위씨(韋皇后(위황후), 660?~710)에게 모함을 받아 수도 장안으로 소환되었다.

 

 710년, 위씨가 딸 안락공주(安樂公主, 684~710)와 결탁하여 황제인 중종 이현(唐中宗 李顯, 656~710, 제위: 684.1~684.2)을 죽이자, 이것을 알아챈 이융기는 우림군 병사를 소집, 궁중으로 들어가 위씨와 안락공주를 죽이고, 이어 위씨 가문 모두를 몰살시켰다. 또한 자신의 할머니인 성신황제 무씨의 집안 무씨 일가까지 몰살시켰다.

 

 이어, 고모 태평공주(太平公主, 665~713)에게 아버지 예종 이단(睿宗 李旦, 662~716, 재위: 684~690, 710~712)의 복위 주도 운동을 맡아달라 하였고, 그로 인해 이단(睿宗)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고, 이융기는 평왕(平王)에 책봉되었다가 큰형인 이헌(당 양제 이헌(唐 讓帝 李憲), 679~741)의 양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712년 9월 8일, 이때는 이융기의 27번째 생일이었다. 예종 이단은 황태자 이융기에게 황제의 위를 물려주고 연호를 선천(先天)이라 하니, 이가 당나라 제6대 황제인 현종이다.

 

 현종 이융기가 즉위했으나, 그의 고모 태평공주는 황위를 노리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은밀히 여러 번 이융기를 독살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며, 713년에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그 일당을 모두 죽여 버렸다.

 

 현종 이융기는 1년 뒤 713년에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현종을 섬기던 관리중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요숭(姚嵩, 650~721), 한휴(韓休, 672~740), 송경, 장구령(张九龄, 678~740), 소숭 등이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중에도 요숭의 공이 가장 높아, 이융기는 그를 승상에 임명하기도 했다. 요숭은 그에게 가난의 퇴치를 포함한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이융기는 이것을 모두 수용하였다. 한휴(韓休)는 언제나 이융기에게 직언을 올렸다. 하지만 소숭은 이융기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첨을 하였다 한다.

 

 이융기가 재위 초기에 얼마나 민생위주의 정치에 전력을 쏟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융기는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전해진다. 심지어는 나라에 가뭄이 돌자, 황궁의 쌀을 배고픈 민중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과 인척을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여 정치가 문란해질 위험을 미리 막았다. 또한 이융기는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이융기의 훌륭한 정치덕분에 당나라의 국력은 당연히 강성해졌으며,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개원(開元)의 치()'로 불렀다.

 

 이러한 치세가 계속되자, 당 현종 이융기는 거만해져서 자신을 위해 직언하는 훌륭한 대신들을 내치고 자신에게 아첨을 떨고 순종하는 신하들을 중용하였다. 또, 이원을 세워 광대들을 키워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융기는 유능한 장구령을 해임하고 이임보(李林甫)를 승상으로 임명했는데, 이임보는 무식하고 무능한 인간이지만 아첨에 뛰어나서 이융기의 총애를 받아 승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또한 이융기에게 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고 19년간이나 국정을 전횡한 간신배이기도 하다.

 

 737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무혜비마저 죽자, 방황하던 이융기는 어느 날, 한 여자를 본 순간 그녀에게 반해버려 만사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결국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高力士: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사랑을 독차지한 환관(宦官))를 시켜 그녀를 데려오게 한다. 그녀가 바로 수왕비 양옥환이었다. 양옥환은 이융기의 며느리였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이융기가 그녀를 자신의 13남인 수왕 이모에게서 가로챘던 것이다.

 

 이리하여 745년, 이융기의 나이 61세 때에 27세인 양옥환(楊玉環)은 귀비에 책봉된다. 귀비는 황후 다음가는 자리였던 지라, 당시 황후가 죽고 없던 차에 그녀는 황후의 역할을 대신하다시피 했다. 이 여인이 바로 양귀비(楊貴妃)이다.

 

 현종 이융기는 죽은 양귀비의 아버지에게 대위제국공이란 벼슬을 내리고, 그녀의 숙부와 세 명의 친오빠에게도 높은 벼슬을 하사하였다. 또한 양귀비의 세 명의 언니를 모두 국부인으로 책봉하여 그 세도가 매우 어마어마했다.

 

 이융기는 그 중에서도 양귀비의 셋째 언니 괵국부인에게도 반해, 그녀와도 애정 행각을 벌였다. 그녀를 질투한 양귀비가 괵국부인을 황궁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말도 있다. 이에 노한 이융기는 양귀비를 궁에서 내치기까지 했다.

이 양귀비의 일가 친척 중에서 가장 세도를 누린 사람은 양귀비의 사촌 오빠 양검이다. 양검은 이융기에 총애를 받아 이융기에게 '국충(國忠)'이란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임보가 죽자, 양국충(楊國忠, ?~756)은 승상에까지 올라 국정을 전횡하였다. 양국충도 소인배요 간신배인지라, 충신은 죽이거나 내치고, 아첨꾼들을 이융기 옆에 붙여놓는 등 갖은 전횡을 일삼았다.

 

 당시 내쳐진 양귀비는 양국충의 집에 있었는데, 양국충이 환관 고력사와 담합하여 양귀비와 이융기의 관계를 화해시키려 했고, 이융기는 결국 그 화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양귀비와 같이 화청궁에서 목욕을 했는데, 그녀의 육체를 본 이융기는 다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747년, 이융기는 절도사 안록산(安祿山)이 장안으로 오자,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고, 여기서 안록산과 양귀비가 처음 대면을 하게 된다. 안록산은 이융기와 양귀비의 총애를 받아, 양귀비의 수양아들이 되었고, 변방의 국방까지 책임지게 되었다. 양귀비는 늙은 이융기 대신 젊고 체구가 우람한 안록산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때, 승상 양국충은 안록산의 등장으로 점점 위기감을 느꼈고, 이융기에게 안록산을 모함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는 언제나 안록산을 변호하여 그를 위기에서 구했다. 양귀비는 조정의 권세까지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757년 12월, 태상황 이융기는 장안으로 돌아왔고, 감로전에 거처하며 쓸쓸한 나날을 보냈다. 5년 뒤인, 762년 5월 2일에 양귀비에 대한 그리움과 지난날의 영화에 대한 허무함 때문에 병이 들었다. 그는 옥피리를 처량하게 불고, 궁녀를 불러 자신을 목욕시키라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5월 3일 새벽에 붕어하니 그때 나이 78세였다.

 

 생전 존호는 초창기에는 개원신무황제(開元神武皇帝)를 받았으며, 이후 추가와 개칭을 반복하여 최종적으로 존호가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이다. 양위 후 태상황으로서의 존호는 태상지도성황제(太上至道聖皇帝)이다.

 정식 시호는 지도대성대명효황제(至道大聖大明孝皇帝)이다.

 묘호는 현종(玄宗)이며, 능호는 태릉(泰陵)이다.

 

 며느리이기도 했던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화제가 되어 장한가(長恨歌)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 성리학자 이현일(李玄逸, 1627~1704) 등은 그의 저서 갈암집(葛庵集)에 '당나라 현종이 재물을 긁어 모으고 사치를 일삼았다.(唐玄宗斂財侈費)'고 비판하였다.

 

 

안사의 난(安史之亂, 763)

 천보(天寶) 14년인 755년, 안록산은 변방으로 돌아가, 부하 사사명과 함께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반란이 일어나자 이융기와 양귀비, 양국충과 그 일가 친척들은 모두 장안에서 피신하였고, 반란군은 계속 장안을 향해 진격했다. 하지만 이융기(李隆基)를 호위하던 관군이 일행이 머무르고 있는 마외파에서 양국충과 그 일가를 모두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양국충이 놀라 허둥거리자, 군인들은 그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버리고, 시체를 여러 조각으로 찢어갈겼다.

 

 이들은 이융기가 쉬고 있던 역관에서 계속 시위를 하자, 신하 위견소(韋見素), 위방진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자 이융기 자신이 그들을 설득을 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양귀비(楊貴妃)를 죽일 것을 강요하였고, 고력사(高力士) 역시 선택이 없다고 하자, 이융기는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역관 옆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 때는 756년이었다. 양귀비가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군인들은 환성을 내지르며 다시 이융기를 호위해 서쪽으로 행군했다. 그러나 같이 따라온 황태자 이형(李亨, 제7대 황제 숙종(肅宗), 711~762) 은 마외파에 남아 조정 일을 주관하였고, 북쪽으로 올라가 영무에서 황제에 오르고, 이융기를 태상황으로 삼았다.

 

 

 

개원지치(開元之治)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다스린 개원(開元) 연간의 치세.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이다.

 

 개원의 치(開元之治)는 당 현종이 다스렸던,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을 가리킨다. 당 현종은 713년 연호를 개원(開元)으로 바꾸고,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그의 휘하에는 유능한 재상들이 많았는데, 요숭(姚崇), 한휴(韓休), 송경(宋璟), 장구령(張九齡), 소숭(蕭嵩) 등이었다. 이들 모두 각각의 능력이 출중하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였다 한다. 그중에도 요숭의 공이 가장 높아, 당 현종 이융기는 그를 승상에 임명하기도 했다. 요숭은 그에게 치국의 10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당 현종은 이것을 모두 수용하였다.

 

 이밖에 한휴(韓休, 672~740)는 언제나 당 현종에게 직언을 올렸다. 하지만 소숭(蕭嵩)은 이융기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아첨을 하였다한다. 잔소리가 심한 한휴에 대해 신하들이 왜 내치지 않느냐고 묻자 당 현종 또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한휴 때문에 짐은 마르더라도 천하와 백성들이 살찌면 아무 여한이 없다."라는 것이다. 당 현종이 재위 초기에 얼마나 정치에 전력을 쏟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 현종은 중앙의 유능한 관리를 지방에 도독이나 자사로 파견하였고, 적성에 맞지 않는 관리는 모두 교체하였다고 한다.

 

 당 현종은 사찰과 승려의 수를 줄이고, 권력가들을 제압하는 한편, 조정을 정비하여 상벌을 엄정히 나누어 주어서 중종 이현 이후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을 안정시켰다.

 

 심지어, 나라에 가뭄이 돌자, 당 현종은 황궁의 쌀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어진 정치를 행하였고, 환관과 인척을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러한 정치를 하자 당의 국력은 강성해졌으며, 당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태평성세에 버금가는 치세를 하여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당시의 연호인 개원(開元)을 따 '개원의 치(治)'로 불렀다. 이러한 그의 치세도 745년 양옥환을 귀비로 맞으면서 서서히 끝자락을 달리게 된다.

 

 

 

虛有其表(허유기표)

 虛: 빌 허   有: 있을 유   其: 그 기   表: 걸 표

 1. 유명무실하다.   2. 겉만 번지르르하다.   3. 빛 좋은 개살구

 

 虛有其表而无其实(허유기표이무기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하고 내용이 없다.

 

 '명황잡록(明皇雜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唐, 618~907) 현종(玄宗) 때 신하 중에 소숭(蕭嵩)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체구가 크고 키가 훤칠한데다 건장하고 당당하여 장상(將相)의 풍모를 가졌다. 어느 날 현종은 재능이 뛰어난 소정(蘇頲)을 재상으로 임명하고자 소숭에게 임명장 초안을 작성하게 하였다. 소숭은 열심히 노력하여 작성한 초안을 현종에게 올렸다. 그런데 문학성이 높은 현종은 초안의 내용 중 '국지괴보(國之寶: 국가의 귀중한 보물)라는 문장에서 괴(瑰: 구슬 이름 괴)자에 대해 한마디 하였다.

 "짐이 알기로는 소정의 아버지 이름이 괴()인데 이걸 다른 글자로 바꾸고 다시 작성하게."

 소숭은 두려운 나머지 식은땀을 흘리며 반나절이 지나도록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그렇게 낑낑대다가 어렵사리 다시 써 올렸다. 현종은 매우 훌륭한 문장일 거라고 생각하며 초안을 다시 보았다. 그러나 현종은 크게 실망하였다. 거기에는 '괴보(寶)'를 '진보(珍寶)'로 바꾼 것 외에는 아무것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이다. 소숭이 나간 후 현종은 매우 화가 나서 초안을 내던지며 말했다.

 "소숭, 이 사람은 풍모에 걸맞지 않게 속은 텅텅 비었구먼!"

 소숭처럼 겉은 아주 훌륭하지만 내용이 충실하지 못한 것을 '허유기표(虛有其表)'라 한다. 유명무실(有名無實)과 같은 성어이다.

 

 

 

천보난치(天寶亂治)

 태평성세가 계속되며 재위 중반을 향해가자 명군 현종도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명재상들을 멀리 하고 아첨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하여 국정이 문란해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 당은 모병제로 유지하는 대규모의 군진과, 이를 지역별로 엮어서 통솔하는 절도사직을 신설하였고 천보 연간으로 넘어갈 즈음에는 절도사직 10개가 설치되었다. 736년에 그 유명한 이임보가 재상의 일원이 되어 명신 장구령을 몰아내 버리면서 불길한 징조가 감돈다. 그리고 737년, 현종은 황태자 이영, 악왕 이요, 광왕 이거를 사사시키고 738년 충왕 이여를 황태자로 세워 황태자를 교체했다. 게다가 즉위 초기의 현종은 상당히 검소한 인물이었지만, 이 시기 즈음부터는 검소함이 사라지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보통 기점으로 잡는 건 741년에 연호를 개원에서 천보(天寶)로 바꾼 이후로, 이 때문에 현종 후반의 치세를 개원성세에 대비하여 천보난치(天寶亂治)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외 정책에서는 유명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무장 고선지가 서역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일시적으로 영토가 크게 넓어졌고 재정도 나아졌으나, 이슬람 세력의 등장, 이들과 충돌한 천보 10년(751년)에 일어난 탈라스 전투 이후로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내치 측면에서는 고종 이후 측천무후의 치세를 거치면서 몰락했던 관롱 귀족세력이 유명한 간신 이임보를 필두로 내세워 다시 정국을 장악했으며, 개원의 치를 펼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빈천한 가문 출신의 과거제로 입문한 관료들은 세력을 상실하고 밀려나게 되었다. 752년 이임보가 사망한 이후 총애하던 후궁 무혜비 사후 맞아들인 양귀비로 인해 양씨 일가가 전횡하게 되었고, 이에 국정의 문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때 이임보는 장성 안쪽의 내지 절도사직을 문신이 아닌 무신이 담당하게 함으로써 권력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아예 막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로 인해 오히려 지방 절도사들의 세력이 급성장한 탓에 결국 이임보 사후 절도사직을 셋이나 역임하던 안녹산이 변방의 정예 병력들을 장악하게 되었고 755년 양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수도 장안까지 들이쳤고, 현종은 사천을 향해 피난가기에 이르렀다. 이임보가 권력을 잡은 지 19년 만의 일이었다.

 

 피난길에 이게 다 양귀비와 양국충 때문이라고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들고 일어나서(마외정변), 양국충은 그들에게 살해되고 양귀비는 병사들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양귀비와 양국충이 목숨을 잃자 일단 사태는 수습되어 무사히 피난갈 수 있었지만 현종은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사천에 피난 가 있는 동안에 다른 방면으로 피난을 보내 분조를 이끌고 있던 황태자가 병사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숙종이 되었다. 자칫하면 황실의 분란이 일어날 위기였지만, 현종에게도 공연히 고집을 부렸다가는 상황이 더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파악할 총기는 아직 남아 있었는지, 양귀비의 죽음으로 더 이상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는지 어쨌는지 황태자에게 정식으로 양위를 인정하고 사천에서 순순히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양국충(楊國忠, ?~756)

 당나라 중기의 재상(宰相).

 양귀비(楊貴妃)의 친척으로 등용(登用)되어 재상 이임보(李林甫, ?~752)와 결탁, 재정적(財政的) 수완을 발휘함으로써 현종(玄宗)에게 중용(重用)되었다. '국충(國忠)'이란 이름도 이 무렵 현종이 내렸다. 안녹산(安祿山)과의 반목으로 '안사의 난'을 자초하였다. 난이 일어나자 현종을 따라 쓰촨[四川]으로 달아났으나, 도중 마외역(馬嵬驛)에서 군사에게 살해되었다.

 

 양국충(楊國忠, ?~756년 7월 15일)은 중국 당 왕조의 무관, 정치가로 양귀비(楊貴妃)의 사촌 오빠이다. 본명은 양소(楊釗)이다. 환관 고력사 등과 결탁한 환관 정치로 40여 개의 관직을 독점하여, 외척 정치의 표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안녹산(安祿山)이 '국충 타도'를 명분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현종을 따라 촉국으로 도피했다. 이때 마외역에서 병사에게 살해당했다.

 

 

 양소(楊釗)는 원래 군인이었는데, 성격이 난폭하였다.

 750년 천보(天寶) 9년 사촌 누이동생 양옥환(楊玉環)이 귀비가 되자 현종은 양귀비의 오빠인 그에게 '국충(國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 시어사(侍御史)의 관직을 하사했다. 양국충은 초기에는 이림보(李林甫)와 손을 잡고, 구세력을 몰아내는 데 협조를 하였으며, 현종은 승상 이임보(李林甫)를 견제하기 위해 양국충을 신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751년 천보 11년 남조와의 전쟁에서 6만명의 군사를 잃었고, 천보 13년 6월에도 패함으로써 두 번의 출병에 20만의 군인들을 잃게 되었다.

 

 752년 천보 12년 이림보가 죽자 그를 대신해서 우상(右相)이 되어 40여 개의 관직을 독점했다. 또한 조정을 전횡하고 사당(私黨)을 결성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는 한편, 공공연히 뇌물을 수수하였다. 관리를 임명할 때도 사적인 친분관계에 따라 임명했다.

 

 755년 천보 14년 안사의 난이 발발했다.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킨 명분은 '양국충 토벌'이었고, 6월에는 동관을 점령했다. 7월 13일 양국충은 당 현종에게 쓰촨성 지난으로 피난을 권유하여 승인을 얻었으며, 장안의 민중들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도망을 가는 비겁한 행동을 하였다. 7월 15일 현재의 산시 성 싱핑인 마외역(馬嵬驛)에 이르자 굶주린 성난 군인들이 양국충을 향해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군사들을 이끌던 진현례 장군 또한 양국충이 이 환란을 유발했다고 생각하여 모반의 계획을 환관 이보국(李輔國)에게 알렸다. 결국 양국충은 이들에게 잡혀 사형당하는 최후를 맞이하였고 만고의 역적으로 회자되었다.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 군인들의 소요에 당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게 되었다. 황제를 보필하던 조정 대신들은 현종에게 당장 태자 이형(李亨, 제7대 황제 숙종(肅宗), 711~762)에게 황제의 보위를 넘기라는 주청을 올렸고, 이리하여 현종은 마침내 영무에서 태자 이형에게 제위를 물려주어야 하였다.

 현종 자신은 서촉청두로 들어갔다.

 이형(李亨)은 당 숙종(肅宗)으로 즉위하여 연호를 천보(天寶)에서 지덕(至德)으로 바꿨다.

 

 

 

◈ 당(唐)나라 현종(玄宗)의 사랑을 독차지한 환관(宦官) 고역사(高力士, 684~762 (78세))

 중국 당() 현종(玄宗) 때의 환관(宦官)으로서 위황후(韋皇后)와 태평공주(太平公主) 세력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현종(玄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권세를 부려 당() 후기(後期)에 환관(宦官)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길을 열었다.

 

 당나라 고주(高州) 양덕(良德) 사람. 풍앙(馮盎)의 증손이다.

 환관 고연복(高延福)이 길러 자식으로 삼아 성을 고씨로 바꾸었다. 환관이 되어 현종(玄宗) 때 내시성(內侍省)의 일을 맡았는데, 사방으로 보내는 공문서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위씨(韋氏)의 난을 평정할 때 공이 커서 현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근면하고 신중하게 일을 처리하여 발해군공(渤海郡公)에 봉해졌고, 총애가 지극했다.

 

 숙종(肅宗)이 태자였을 때 형(兄)의 예로 섬겼다. 표기대장군을 거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올랐다. 안사(安史)의 난 때 현종을 모시고 촉(蜀)으로 들어갔다. 숙종 상원(上元) 원년(760) 무주(巫州)로 방축(放逐)되었다가 두 해 뒤 사면되어 돌아오는 도중 병사했다. 부귀영화가 왕후(王侯)에 못지않았다. 당나라 때 환관이 발호한 것은 그에게서 비롯되었다.

 

 본명(本名)은 풍원일(馮元一)이다.

 고주(高州) 양덕(良德, 지금의 광동성 전백현(廣東省 電白縣)) 출신이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 때인 698년(聖暦 원년)에 환관(宦官)이 되어 입궁하였으며, 환관(宦官) 고연복(高延福)의 양자(養子)가 되어 성과 이름을 고역사(高力士)로 바꾸었다.

 '역사(力士)'라는 이름은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불상(佛像)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는다.

 

 입궁한 뒤에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 이단(李旦)의 아들인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 685~762)와 가까이 지내며 그의 심복(心腹)이 되었다. 그리고 710년 이융기(李隆基)가 정변을 일으켜 위황후(韋皇后, 660?~710) 일파를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713년 태평공주(太平公主, 665?~713) 일파의 모반(謀反)을 진압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융기(李隆基)는 712년 아버지인 예종(睿宗)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황제가 되었는데, 곧 '개원(開元)의 치()'라고 불리는 당()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끈 현종(玄宗, 재위 712~756)이다.

 

 현종의 통치기에 고역사는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권세(權勢)를 누렸다. 현종은 전제 황권을 강화하고자 측근인 환관(宦官)의 권한을 확대하였다. 감군제도(監軍制度)를 만들어 환관을 파견해 지방군을 감시하였으며, 중앙의 금병(禁兵) 통수권도 환관(宦官)에게 부여하였다. 또한 환관을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는 추밀사(樞密使)로 임명하여 환관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고역사는 현종의 신임을 배경으로 내정(內廷)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의 지위에 올랐으며, 개원(開元, 713~741) 연간(年間)의 후기(後期)에는 신료(臣僚)들이 올리는 상주(上奏)를 미리 심의하여 필요한 것들만 황제에게 보고할 정도로 조정(朝廷)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처럼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742~756) 연간(年間)에 고역사는 황족들조차 그의 눈치를 보아야 할 정도로 막강한 권세(權勢)를 누렸으며, 그 때문에 당() 후기(後期)에 나타난 환관(宦官) 세도(勢道) 정치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740년(開元 28년)에 양귀비(楊貴妃, 719~756)를 후궁(後宮)으로 들여왔으며, 이임보(李林甫, ?~752)와 양국충(楊國忠, ?~756) 등을 등용하여 정치를 문란케 하였다. 또한 안녹산(安祿山, 705~757)을 조정에 추천하여 뒷날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날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755년 양국충(楊國忠)과 반목한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역사는 현종과 함께 쓰촨(四川) 방면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장안(長安) 서쪽의 마외역(馬嵬驛)에 이르렀을 때 양씨(楊氏) 일족(一族)에 불만을 품은 병사들은 양국충(楊國忠)을 죽이고 현종에게 양귀비(楊貴妃)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현종은 처음에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고역사의 설득으로 결국 양귀비는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756년, 현종이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숙종(肅宗, 재위: 756~762)이 즉위하자 고역사는 환관(宦官) 이보국(李輔國, 704~762)의 탄핵을 받아 무주(巫州, 지금의 湖南 黔陽)로 유배되었다. 762년(보응(寶應) 원년) 현종이 죽자 고역사는 사면되었지만, 현종의 죽음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음식을 끊고 슬퍼하다가 낭주(朗州, 지금의 호남 상덕(湖南 常德))에서 죽었다.

 

 숙종(肅宗)의 뒤를 이은 대종(代宗, 재위: 762~779)은 고역사의 현종에 대한 충정(忠情)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의 관위(官位)를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현종의 유지(遺志)에 따라 현종의 능묘(陵墓)인 태릉(泰陵, 지금의 섬서성 포성현(陝西省 蒲城縣))에 그의 배장묘(倍葬墓: 중심 능묘를 수호하기 위한 달린 무덤)를 만들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중국의 궁녀(宮女)

 궁녀(宮女)는 궁중에서 일을 하는 여자를 가리킨다. 초기 궁녀는 대부분 여자 노예나 여자 포로, 범죄자 아내로 충당했다. 이후 역대 궁녀 가운데 일부는 민간에서 뽑았다. 고대 과거처럼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반드시 양가집 규수에서 나와야 했다. 

 

 역대 궁녀는 얼마나 되었을까?

 서한(西漢, 전한(前漢), BC 202~AD 8) 초기 궁녀는 10명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무제 (漢武帝, 전한 무제(漢武帝, BC 156~BC 87 (69세), 재위: BC 141~BC 87 (54년간)) 당시 궁녀는 1천 명을 넘었다.

* 당인 궁악도(唐人 宮樂圖): 궁중의 빈비(嬪妃) 10명이 커다란 사각형 탁자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동한(東漢) 환제(桓帝,132~168, 후한의 11대 황제, 재위: 146~168) 당시 궁녀는 5천~6천 명이었다.

 그러다가 진나라 무제 사마염(서진(西晉)의 초대 황제 사마염(西晉 世祖 武皇帝 司馬炎, 236~290 (54세), 재위: 265~290 (29년간))) 당시는 궁녀가 1만 명을 넘었다.

 당(唐)나라 현종 (당나라 제6대 황제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762, 재위: 712~756 (44년간)) 개원(開元, 713~741), 천보(天寶, 742~756) 연간에는 궁녀 숫자가 4만 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명(明)나라에 이르자 궁녀 숫자는 다시 9천 명으로 줄었다.

 

 청나라는 명나라 궁녀 제도를 따랐다. 강희황제(康熙皇帝, 1654~1722 (68세), 재위 1661~1722)는 명나라 중엽 이후 궁녀가 너무 많다는 점을 감안해 궁녀 숫자에 제한을 두었다. 그러나 옹정제(雍正皇帝(옹정황제), 1678~1735, 재위: 1722~1735)와 건륭제((淸) 고종(高宗) 건륭황제(乾隆皇帝, 1711~1799 (88세), 재위 1735~1796 (61년간)) 이후 점차 늘었다. 일부 궁녀는 황제, 황후, 비빈, 공주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직급에 따라 궁녀(宮女) 숫자로 달랐다. 청나라 강희황제 때는 이런 규정이 있었다.

 황태후(皇太后)는 궁녀(宮女) 12명,

 황후(皇后)는 10명,

 황귀비(皇貴妃)는 8명,

 귀비(貴妃)는 8명,

 비빈(妃嬪)은 6명,

 귀인(貴人)은 4명,

 상재(常在)는 3명,

 답응(答應)은 2명의 궁녀를 각각 둘 수 있었다.

 이들 궁녀가 주로 하는 일은 비빈들의 옷과 음식, 생활을 돌보는 것이다. 비빈이 궁중에서 황제와 동침할 때 궁녀도 옆에서 시중을 든다. 궁중 시침(侍寢: 임금을 모시고 자는 일을 이르던 말)이라는 것은 황제가 잠자는 것을 돌보는 것이다. 이것은 비빈이 제왕의 총애를 얻는 필연적인 길이다.

 

 비빈이 너무 많고 황제가 누구와 잘지 결정하는 만큼 비빈은 총애를 얻기 위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당나라 현종은 비빈들이 많다보니 다양한 방법으로 함께 잘 후궁을 골랐다.

 대표적인 방법은 주사위를 던져 이긴 후궁과 자는 것이다. 

 

 또 비빈들의 머리에 꽃을 꼽게 한 뒤 나비를 풀어놓았다. 나비가 앉은 후궁이 그날 밤 황제를 모셨다.

 진나라 무제 사마염은 서기 273년, 전국에 혼인을 금지시켰다. 궁녀를 뽑기 위해서였다. 원래 궁녀는 5천 명이었다. 이후 오나라를 멸망시킨 뒤 오나라 궁녀 5천 명을 받아들여 궁녀가 1만 명으로 늘었다.

 

 진나라 무제는 밤마다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후궁을 돌아다니다 양이 어느 후궁 거처 앞에 서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러자 비빈들은 황제를 모시기 위해 거처 앞에다 양이 좋아하는 소금을 뿌리거나 대나무잎을 꽂았다. 이것을 양차망행이라고 불렀다.  

 

 비빈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황제의 은총을 다투는 것과 함께 그들을 돌보는 궁녀들도 우연한 기회에 황제의 은총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가장 성공을 한 궁녀는 한나라 무제(漢武帝, BC 156~BC 87, 재위: BC 141~BC 87 (54년))때 위자부(衛子夫, 무사황후 위씨(武思皇后 衛氏, ?~BC 91)라고 할 수 있다. 위자부는 원래 평양공주의 가녀(여자 가수)였다. 평소에는 공주를 시중들었다. 평양공주(平陽公主 劉氏, ?~?, 전한 경제와 효경황후 왕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한 무제의 누나이다. 위자부는 올케인 동시에 시누이이다.)는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대갓집 규수들을 불러모아 집에서 교육을 시켰다. 한무제가 비빈을 뽑을 것에 대비해서였다. 어느날 황제가 공주댁에 들렀다. 공주는 미리 준비를 한 규수들을 단장시켜 선을 보였다. 하지만 한무제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공주는 가녀들에게 춤과 노래로 흥을 돋구도록 했다. 그런데 황제가 이중에서 위자부(衛子夫)를 마음에 들어했다.

 

 평양공주는 위자부를 궁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정작 궁에 들어가서는 황후가 시기를 했고, 황제도 위자부를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나중에 일단의 궁녀들을 궁에서 내보낼 때 황제가 위자부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위자부는 서둘러 출궁시켜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황제는 마음이 약해져 도로 궁에 남도록 했다. 결국 위자부는 황후 자리까지 올랐다. 

 

 송나라 진종(眞宗, 968~1022, 북송 제3대 황제, 재위: 997/998~1022/23)의 이신비(李宸妃)는 원래 장헌태후(章獻太后, 969~1033)를 시중드는 어린 궁녀였다. 어느날 진종이 우연히 지나다가 세수를 할 때 어린 궁녀가 세수대야를 들고 시중을 들었다. 황제는 세수를 하면서 궁녀와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어린 궁녀가 기회를 틈타 황제가 아뢰었다. 어젯밤 꿈에 깃털 옷을 입은 선비가 맨발로 하늘에서 내려와 곧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종은 당시 아들이 없어 고민을 하던 터여서 어린 궁녀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리고는 당장 어린 궁녀를 안고 침대위에 올랐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궁녀는 임신을 했다. 이듬해 황자를 낳았다. 바로 이진비(장의황후 이씨(章懿皇后 李氏, 987~1032, 인종(송 인종(宋仁宗), 1010~1063, 북송의 제4대 황제, 재위: 1022~1063)의 생모)가 되었다.

 

 송 휘종(宋 徽宗, 1082~1135, 북송의 제 8대 황제, 재위: 1100~1125) 시대 교귀비(喬貴妃, 1081~?)와 위비(韋妃, 현인황후(顯仁皇后), 1080~1159)는 처음 입궁할 때는 정황후(鄭皇后, 현숙황후(顯肅皇后), 1079~1131)를 시중드는 궁녀들이었다. 이들은 일을 같이하면서 의자매를 맺었다. 그리고는 먼저 누군가 잘되면 어려운 시절을 잊지 않고 다른 쪽을 챙겨주겠다고 약조를 했다. 훗날 교씨가 먼저 휘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자 잊지 않고 위씨를 천거해 위씨도 은총을 입었다. 결국 두사람 모두 비가 되었다.

 

 잘못 은총을 입는 경우도 있었다.

 한나라 경제(문경지치(文景之治) 한경제(漢景帝, BC 188~BC 141 (47세), 전한 제6대 황제, 재위: BC 157~BC 141 (16년간))는 후궁인 정희(程姬)를 불렀다. 그러나 공교롭게 정희가 월경이 있어 모시지를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러자 정희를 모시는 궁녀 당아(당희(唐姬), 장사정왕 유발(長沙定王 劉發, ?~BC 129? 128?, 후한 광무제(後漢 光武帝)의 현조부이다) 낳음)가 자원해서 황제를 모시겠다고 나섰다. 경제는 당시 너무 술을 많이 마셔 궁녀 당아를 정희인줄 잘못 알고 함께 잠을 잤다. 궁녀 당아는 하룻만에 임신을 했고 궁녀 신분을 벗어나 비빈의 대열로 들어섰다. 

 

 궁녀들도 모두 등급이 있다.

 수나라 양제(隋煬帝 楊廣, 569~618, 수나라의 제2대 황제, 재위: 604~617)는 3부인(三夫人), 9빈(九嬪), 27세부(二十七世婦), 81어처(八十一御妻)를 두었다.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가 3부인이고, 가장 높은 1등급이다.

 순의(顺仪), 순용(顺容), 순화(顺华), 수의(修仪), 수용(修容), 수화(修华), 충의(充仪), 충용(充容), 충화(充华)가 9빈이다. 2등급이다. 

 첩여(婕妤)는 12명으로 3등급이다.

 미인(美人), 재인(才人)은 15명으로 4등급이다.

 보림(保任) 24명은 5등급이다.

 어녀(御女) 24명은 6등급이고, 채녀(采女) 37명은 7등급이다. 모두 124명에 이른다.  

 

 당(唐)나라 제도는 황후(皇后) 아래 귀비(貴妃), 덕비(德妃), 숙비(淑妃), 현비(賢妃)를 둔다.

 비() 아래는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仪), 수용(修容), 수원(修媛) , 충의(充仪), 충용(充容), 충원(充媛)등 9빈(九嬪)을 둔다. 

 9빈(九嬪) 아래 첩여(婕妤), 미인(美人), 재인(才人) 각 9명을 둔다.

 여기에 다시 보림(寶林), 어녀(御女), 채녀(采女) 각 27명이다.

 이들 여인들은 그나마 궁중에서 계급이 높고 지위가 있는 궁녀들로, 수많은 궁녀들의 극히 일부다.

 

 황제의 은총을 받기 위해 수많은 여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암투를 벌인 궁중 뒷얘기는 언제나 호사가들의 관심거리다. 삼천 궁녀가 아니라 만명이 넘는 후궁과 궁녀들이 황제 한사람을 놓고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봉건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는 듯하다.  

 

 

중국 황제의 잠자리 일정

 역사문헌을 통해 전해지는 중국 황제의 성생활은 조선의 왕보다 휠씬 자유롭고 문란했다. 진시황은 1만 명의 후궁을 거느렸고, 당나라 현종은 후궁과 궁녀를 합쳐 많게는 약 4만 명을 거느렸다. 중국의 경우에도 황제의 성생활에 대한 유교적 규범이 '주례(周禮)'라는 책에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황제의 행동은 조선의 왕만큼 유교에 얽메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주례(周禮)'에 의하면 중국 황제는 황후(皇后) 1명을 위시하여 부인(夫人) 3명, 빈(嬪) 9명, 세부(世婦) 27명, 여어(女御) 81명 등 정부인(황후(皇后)) 1명과 후궁 120명 두게 되어 있다.

 중국의 황제는 조선의 왕과 달라 후궁들과 집단합방을 했다. 황제는 황후를 제외한 후궁들과는 집단합방이 원칙이었는데, 세부와 어처는 한 자리에 9명씩 황제와 집단합방을 했다. 특이한 점은 하루도 쉬지 않고 황제가 부인들과 합방을 하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다. '주례(周禮)' 규정에 의한 한달 동안 황제의 잠자리 일정을 보자.

 

 01~09일: 81명의 어처들과 매일 밤 9명씩 한 조가 되어 합방

 10~12일: 27명의 세부들과 매일 밤 9명씩 한 조가 되어 합방

 13일: 9빈들과 돌아가며 황제와 동침

 14일: 3부인들과 돌아가며 황제와 동침

 15~16일: 황후 혼자서 황제와 동침

 17일: 3부인들과 돌아가며 황제와 동침

 18일: 9빈들과 돌아가며 황제와 동침

 19~21일: 27명의 세부들과 매일 밤 9명씩 한 조가 되어 합방

 22~30일: 81명의 어처들과 매일 밤 9명씩 한 조가 되어 합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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