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사의 난(安史之亂)

사사명(史思明, ?~761), 사조의 · 양귀비(楊貴妃, 719~756 (38세)

 

안사의 난(安史之亂)

 안사의 난(安史之亂, An Lushan Rebellion)7551216일부터 7632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 부하인 사사명과 그 자녀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이다. '안사의 난'이란 안록산과 사사명(史思明, ?~761)의 첫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안록산의 난 또는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한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하고서 9년간 지속했다. 이 기간동안 당나라의 인구는 3600만명이나 줄었다. 위구르족에 의해 구출되나 위구르에 의해 장안은 황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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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5년 안록산(安祿山)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 756년 1월 안록산은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한다.

- 756년 6월 장안(長安)을 점령한다.

- 756년 7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楊貴妃)가 자살한다.

- 757년 위구르족이 장안을 정복하고 유린한다. 1월 안록산은 그의 맏아들인 안경서(安慶緒)에게 사형당한다.

- 759년 안경서가 안록산의 부장이던 사사명(史思明)에게 사형당한다.

- 761년 사사명이 맏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사형당한다.

- 762년 당(唐) 현종(唐 玄宗)이 사망한다.

- 763년 사조의(史朝義)의 자살로 난이 평정된다.

 

 안록산(安祿山, 703~757년 1월 30일)은 당나라의 무장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다.

 

 아버지가 이란계 소그드인, 어머니가 돌궐족이다. 

 안(安)이라는 성은 소그디아나의 부카라(지금의 우즈베키스탄)를 가리키는 중국식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명(兒名)은 안록사(安綠絲)이며 녹산(禄山)이라는 이름은 빛을 의미하는 이란어 로우샨(rowshan)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그의 부족 지도자인 카파간 카간이 716년에 죽게 되자, 일족들은 혼란을 피하여 중국으로 망명했다.

 

 영주에서 호시아랑을 맡았는데 6개 국어를 능통하였다. 30대에는 장수규를 섬겨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742년에는 평로절도사가 되었다. 변경 방비를 잘 맡아서 현종의 신임을 얻었다. 744년에는 범양절도사, 751년에는 하동절도사로 부임하면서 군사 병력 가운데 3분의 1을 장악했다. 안록산은 나라 이름을 연(燕)으로 정하고 황제를 칭하였다. 안록산이 사망한 이후에도 안경서가 연나라의 황제를 자처하면서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천보 4년(天寶, 755, 현종(唐 玄宗)의 연호) 안록산(安祿山, 703∼757)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 일찌기 안록산은 천보 원년(742) 새로 설치된 평로 절도사가 되고, 같은 3년에 범양(范陽) 절도사를 겸하였다. 안록산은 체중이 230근(약 200kg, 우리 나라의 근과 다름)이나 되는 보기 드문 뚱뚱보로 그의 뚱뚱한 배는 무릎을 덮을 정도였다고 한다.

 

 양귀비(楊貴妃)는 이같은 안록산이 마음에 들었다. 익살스럽고 털털하며 모나지 않고 수수한 그의 성격을 바탕으로 안록산은 손쉽게 현종과 양귀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안록산은 양귀비(楊貴妃)의 수양아들이 되고 싶다고 자청하여 입궐하면 먼저 양귀비에게 인사를 올리고 다음에 현종을 배알하였다.

 

 그 후 안록산은 수시로 궁중에 출입하였으며 때로는 한 밤을 궁중에서 지새워 물러가지 않은 일이 있어 양귀비와의 추문이 널리 세상에 퍼졌건만 현종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다시 안록산에게 하동(河東) 절도사를 겸하게 하였다.

 

난의 원인 및 배경

 당왕조(618∼907)는 현종(: 재위 712~756) 때 국력이 절정에 달하였고 전통문화도 집대성되어 외형적으로는 화려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초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온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 및 조용조(調) 세제의 이완(), 부병제()의 붕괴 등으로 왕조의 기반이었던 자립 소농민층이 와해되기 시작하여, 이들은 토지를 상실하고 유민화하였다. 당왕조는 토지와 유리된 도호()를 조사하고, 전지()와 재산에 대한 과세(), 모병()의 조직화 등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존속을 꾀하려 하였으나 측천무후() 시대에 억압되었던 귀족들이 현종대에 들어와 세력을 잡았고, 관료층 중에서도 구래()의 문벌귀족들은 농업생산력의 발전, 대토지 소유제의 전개, 상업자본의 이용 등으로 새로 진출한 교양인이나 지주·상인층 출신의 능리()와 대결하여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 세력을 잡은 문벌·귀족 출신의 재상 이임보() 등은 가렴주구(求: 여러 명목의 세금을 가혹하게 억지로 거두어들여 백성의 재물을 무리하게 빼앗는 일)에 여념이 없었고, 세력 유지를 위해 변방 절도사로 이민족이나 평민 등도 등용시켰다. 특히 징병제가 파탄된 후, 절도사들은 대량의 용병을 지휘하는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는데,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하에서 현종 ·이임보 ·양귀비 등에게 신임을 받아 유주()· 평로()· 하동()의 절도사를 겸임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심화되고 있을 때, 이임보가 사망하자 중년을 넘기면서 정무()에 지쳐 양귀비()와의 애욕생활로 나날을 보내던 현종 밑에서 재정을 장악한 양귀비의 일족인 재상 양국충()은 동북 국경 방비를 맡아 대병을 장악한 번장() 안녹산과 대결하는 실력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난의 경과

 양국충은 현종에게 안녹산이 모반하려하므로 소환하도록 요구하였다. 755년( 14) 11월, 안녹산은 거란()·철륵()등 이민족의 정예() 8,000여 기()를 중심으로 한병()· 번병()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간신 양국충 토벌을 구실로 범양(: )에서 거병하여 동도() 낙양(陽)으로 진격하였다.

 

 현종은 장안에 호화로운 주택을 지어 안록산에게 주는 등 친자식처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록산이 모반을 일으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현종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도 처음에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잇달아 들어오는 안록산의 반란 보고를 들은 현종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황한 현종이 수도 장안을 수비할 병력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으나 전투를 할 만한 군사는 전무한 상태였다.

 

 그 때 세상은 바야흐로 수십년 동안 태평 세월을 누려왔기 때문에 아무 방비가 없이 안록산의 반란군은 파죽지세로 진격을 계속하여 낙양을 함락시켰다.

 

 낙양을 함락시켰다고 하지만 안록산의 반란군은 인심을 얻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각 지방이 아무 방비가 없었기 때문에 안록산의 반란군이 마음대로 진격할 수 있었으나 후에는 이곳 저곳에서 백성들이 의병을 조직하여 반란군의 진격을 저지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안을 지키는 동쪽의 요충지 동관은 모두 안록산의 수중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현종은 친위군에게 출진 준비를 명하긴 하였으나 안록산의 반란군과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밤이 새자 현종은 연추문을 열어젖히고 양귀비와 그의 자매, 황족, 측근, 대신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무장한 천명의 친위군이 이들을 호위하여 서남쪽 촉 땅으로 향했다.

 

 수행하던 장병들은 굶주리고 피로에 지쳐 지금까지 꾹 참아오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재상 양국충의 잘못 때문이다'라고 분개하여 양국충의 목을 베고 이어 현종의 거처를 포위하였다. 그리고 소리높여 '양귀비를 주벌하라'고 외쳐댔다. 이들 병사들의 분노에 찬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키자 현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현종은 눈물을 삼키며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메어 죽을 것을 명하였다. 양귀비가 죽자 장병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길을 재촉하였다.

 

 양귀비가 죽은 후 10여일 후에 장안도 함락되었다. 현종은 오로지 촉 땅으로의 피난길을 재촉할 뿐이었다. 연도의 백성들은 현종의 피난 행차를 가로막으며 가는 것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현종은 태자에게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이르고 자신은 계속 길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현종 황제에게 상황 천제라는 존호를 받들어 올리고 태자 이형(李亨)이 즉위하니 이 이가 당의 숙종(당 숙종 이형(唐肅宗 李亨, 711~762516, 당나라의 제7대 황제, 재위: 756~762)이다. 이때가 천보 15년(756)이었다.

 

 한편 안녹산은 실명과 등창으로 건강이 악화된 데다 횡포해져 757년 1월, 아들 안경서(安慶緒, 723~759)에게 암살되고 안경서는 범양의 본거지를 사사명(史思明, ?~761)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숙종(肅宗)은 태자 광평왕을 병마원수로, 곽자의를 부원수에 임명하여 삭방군과 위구르 원군 도움으로 장안과 낙양 탈환에 성공하였다. 그후 하묵 13군을 장악하고 8만 명의 병사와 함께 당에 투항했던 사사명이 758년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토벌군을 상주에서 대파한 안경서를 죽이고 낙양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761년 2월 사사명도 아들 사조의(史朝義)에게 살해되어 반란군은 그의 지휘하에 들어갔으나 사조의는 당나라를 도운 위구르군의 공격과 범양절도사 이회선(李懷仙)에 의하여 763년 1월 타도되었다(자살함). 이로써 9년 여에 걸친 대란은 종결되었다.

 

난의 영향

 이 난으로 인해 이민족을 중심으로 한 반란군과, 위구르 원군에 의하여 낙양· 장안· 양경은 황폐화되었고, 난의 평정을 위해 지방에 파견된 절도사가 병권을 장악하자 종래의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는 무너졌다. 군사적 지방분권화 현상이 강화되고 화북지방은 오랫동안 반독립적 상태가 지속되었다. 군비조달을 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염전매의 급증으로 당왕조 체제가 붕괴되었다.

 

 균전제하의 조용조 세법은 양세법으로 전환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약화로 귀족세력은 타격을 받고 토호와 상인들이 번진 무력세력과 결합하여 정치, 경제적 성장을 달성하게 되자 중국 고대의 율령 지배 체제와 이에 수반되는 문화는 변질되었다.

 

참고

 안사의 난의 주인공인 안록산(安祿山)은 거란인

 안록산은 양귀비()의 양자로 들어가는등 신임을 얻었다고 하지만 양귀비보다는 안록산의 나이가 훨씬 많았다.

 이러한 안록산은 당나라의 동북면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세계사책 어느곳에서도 안록산이 거병한 곳의 표시가 없다.

 당시 당나라는 절도사체제였는데 안록산은 3곳의 절도사를 겸임하는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후방에 있었던 발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안록산은 쉽게 거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Samarkand)와 부하라(Bukhara) 주위에 있던 소그디안(Sogdian)왕국을 안식국으로 불렀는데, 그 안에는 강국(康國)과 안국(安國)이 나뉘어 있었다. 이 지역에는 위구르족, 회족, 페르시아인, 소그드인, 돌궐족, 창족, 기타 서양인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그들이 중국에 이주하여 지역명을 따라 안, 강으로 득성하였다. 이들은 혈연 관계는 모두 다르며 중국 안에서의 득성 시기도 차이가 있다.

 

 안록산의 성씨에 관한 자료들은 안(安)과 강(康)으로 서로 헷갈린다. 이유는 강, 또는 안, 어느 쪽이던 안록산이 소그디안이지만 안록산의 친부가 강(康)씨이고 양부는 안연언이기 때문에 생기는 다른 차이에서 기인했다. 중국 문헌의 공식 서술도 안연언은 안씨, 안록산은 친부는 강씨로 되어 있다. 본래 성이 강이므로 여러가지 억측이 있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후에 한나라가 서역과 교역하면서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므로 중국 안에서 안, 강으로 득성하였다고 알려 졌지만, 실제로는 주나라 무렵에도 서역 주변에 사람들이 민족이나 지역 명을 하는 경우가 있어 왔다. 후한 때 안국 출신 안세고는 안연언과 같은 지역 출신이지만 생몰 년도 다르고, 중국 한성 득성 시기도 다르다. 안연언도 안록산의 친부는 아니다. 서역인이 왕조를 세운 후당의 황제 이종후(李從厚), 군의 대권을 잡았던 인물로 안중회(安重誨), 주홍소(朱弘昭)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서역인 출신으로 후당이 건국하기 전에는 돌궐식 성을 사용하였다.

 

 중국 고대에도 안씨가 있는데 초나라 전욱(顓頊)에서 나온 계통이 있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을 안남으로 불러서 베트남 출신들이 안씨 성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타 중국 남방 해안 지역에서도 안씨가 있다고 하는데 연원은 명확치 않다.

 

비만

 안록산은 매우 뚱뚱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랫배가 무릎까지 처지고 몸무게가 230근(약 200kg)에 달했다고 한다.

 현종이 그 불룩한 뱃속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을 때 "단지 충심(忠心)만이 들어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해서 현종이 대놓고 웃음을 터트렸다. 

 거란족 출신으로 10세에 안록산이 직접 거세를 한 환관 이저아(李猪兒)를 군인처럼 곁에 두었는데 이저아는 안록산이 옷을 갈아입을 때 머리로 배를 받쳐 들고 허리띠를 매어줬다고 한다. 너무 배가 커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허리띠를 맬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뚱뚱했기 때문에 말년의 눈병과 실명은 당뇨병의 영향으로 추측되고 있다. 뚱뚱했던 것과는 별개로 몸놀림 자체는 재빨랐던 듯 하다. 안록산은 호선무(胡旋舞: 고구려(高句麗)나 강국(康國: 현재의 사마르칸트) 등에서 전래된 당나라 궁정 연회 춤의 하나.)라는 춤을 잘 췄다고 전하는데 이 춤은 서역에서 전래된 춤으로 머리 위에 그릇을 올려놓은 상태에서 아주 빠른 속도로 빙글빙글 도는 춤이다. 이런 춤을 잘 춘다는건 뚱뚱한 체격과는 별개로 매우 민첩하고 운동 신경이 좋았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활을 잘 다루었으며 스스로도 그 활솜씨를 자랑으로 여겼다.

 

양을 훔친 일화

 732년 안록산이 양을 훔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유주 절도사였던 장수규에게 이 일이 드러나자, 장수규는 안록산을 검으로 목을 베어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안록산은 장수규에게 일갈(一喝: 한 번 큰소리로 꾸짖음)하였다.

 "공은 양번(襄樊)을 멸하고 싶지 않으시옵니까? 어찌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자신에게 일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장수규는 안록산을 풀어주었고 이후 자신의 부하로 삼았다. 안록산은 장수규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고, 이후 안록산은 장수규의 양자가 되었다.

 

발에 난 사마귀

 명황잡록(明皇雜錄)에 보면 장수규의 한쪽 발바닥에는 사마귀가 있었는데, 발에 난 사마귀는 관상에서는 귀한 자리에 오를 상으로 간주되었다. 안록산이 장수규의 발을 씻기다가 이 사마귀를 발견하고 유심히 쳐다보자 장수규가 웃으며 "내가 지금 이런 자리에 오른 것이 다 그 발의 사마귀 때문이지"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안록산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상하네요. 저는 양쪽 발에 다 사마귀가, 그것도 무늬를 그릴 정도로 나 있는데 저는 왜 당신처럼 귀하게 되지 못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걸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안록산의 위험성을 경고한 인물들

 장구령(張九齡, 673~740, 당나라의 재상)

 시흥문헌백(始興文獻伯))은 당 현종에게 "안록산이 위험하니 검으로 목을 베어 죽여야된다"고 경고를 하기도 하였다. 안록산이 해족과 거란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에게 사형을 내리려고 할 때 당 현종은 안록산을 특별히 사면하였다. 장구령은 "안록산이 이리의 새끼와 같아서 좀처럼 길들일 수 없고 반란을 일으킬 상이 있기 때문에 안록산을 처형하라"고 건의하였지만 당 현종은 왕이보(王夷甫)가 석륵을 알아본 고사를 가지고 "충량한 이를 그릇되게 해치지 말라"며 장구령의 건의를 일축하고 안록산을 돌려보냈다. 결국 장구령의 경고는 이후에 제대로 들어맞게 되었는데 안록산이 군사 반란을 일으키자 당 현종은 이전에 장구령이 자신에게 한 경고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장구령의 경고를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왕충사(王忠嗣, 705~749)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죽여야 한다"고 현종에게 간하였으며 이후 간신이었던 양국충조차도 "안록산은 분명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였다. 게다가 사촌이었던 안사순(安思順, 695?~756, 소그드인 출신으로, 당현종 시기 저명한 당나라의 번장. 안록산의 일족이다.)도 안록산이 난을 일으킬 거라고 하였다.

 

 가서한(哥舒翰, ?~757, 당나라의 장군)

 서평무민왕(西平武愍王))과의 관계

 사촌이었던 안사순과 마찬가지로, 가서한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사명(史思明, ?~761)

 사사명(史思明, ?~761)은 당나라의 무장으로 755년에서 763년까지 당나라를 뒤흔든 안사의 난에서 안록산의 부장으로 활약을 했다.

 7571월 안록산이 둘째 아들 안경서(安慶緒, 723~759, 연의 제2대 황제)에게 암살되자, 그 후 759년 안경서를 암살하고 난을 이끌게 된다.

 결국 자신도 761년 맏아들 사조의(史朝義, ?~763)의 반란으로 암살되는 기이한 운명을 맞았다.

 

사조의(史朝義, ?~763, 연 제4대 황제, 재위: 761~763)

 연(燕)나라의 마지막 황제. 

 사사명(史思明, ?~761)의 장남.

 761년, 사조의는 군사를 일으켜 사사명을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사사명 휘하 부장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763년, 사조의는 위구르 제국군과 당군의 협공으로 도피하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당나라의 장수로 영주(營州) 녕이주(寧夷州)에서 태어났다. 사조의는 항상 사사명과 전투에 함께 나섰고, 사사명이 안록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사조의는 기주(冀州)와 상주(相州)를 수비했다. 759년, 사사명이 안경서를 죽이고 낙양에서 대연황제로 칭제하자 사조의는 회왕(懷王)으로 책봉되었다.

 

 하지만, 사사명이 막내아들 사뢰청(史賴淸)을 익애하고 첩의 소생인 사조의를 제거하려 하자 761년, 사조의는 마열 등과 군사를 일으켜 사사명과 동생 사뢰청을 죽이고 연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 해에 연호를 현성(顕聖)으로 개원하였다.

 

 이듬해 762년, 모우가한(牟羽可汗, 위구르 제국의 제3대 가한, 재위: 759~780)의 위구르군대와 복고회은僕固懷恩, ?~765, 튀르크계 부족인 철륵(鐵勒, 퇼레스(Töles)) 9성 중 복고부 사람으로,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위로 올라선 인물이다.)의 군대가 연합하여 정주와 변주에서 연나라 군대를 깨뜨리자 사조의는 유주로 퇴각하였고, 이어서 위구르-당 연합군은 위주, 활주, 복주 그리고 막주까지 뿌리를 뽑았다.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자 연에 예속돼 있던 절도사 후의일, 이회선, 전승사 등은 바로 사조의를 배반하고 당 조정에 귀순하였고, 사조의는 이후 북쪽으로 계속 도주했지만 가는 곳마다 받아주지 않았다.

 

 이윽고 763년, 사조의는 해(奚), 거란(契丹)으로 피신하려 했으나 이회선이 관군을 이끌고 추격해왔고 사조의는 끝내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사후 그의 시신을 찾은 이회선과 관군이 목을 베어 장안으로 보냈고 사조의의 목은 효수되었다.

 

 

 

◈ 양귀비(楊貴妃, 719~756 (38세)

현종(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사랑

 당나라 6대왕 현종(唐玄宗, 685~762, 재위: 712~756 (44년간))의 총비

 1756. 6. 15 '안사의 난'을 피해 도주하다 자결 아닌 자결로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다.

 

 서쪽으로 도성 문 백여 리를 나오더니,

 어찌 하리오! 호위하던 여섯 군대 모두 멈추어서네

 아름다운 미녀 굴러 떨어져 말 앞에서 죽으니

 꽃비녀 땅에 떨어져도 줍는 이 아무도 없고, 

 비취깃털, 공작비녀, 옥비녀마저도. 

 황제는 차마 보지 못해 얼굴을 가리고

 돌아보니 피눈물이 흘러내리네.

- 백거이(白居易, 772~846 (74세)) '장한가(長恨歌)' 중에서

 

당 현종, 살기 위해 사랑하던 양귀비를 버리다

 위는 당나라를 대표하는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서사시 '장한가(長恨歌)'에서 묘사한 양귀비의 죽음이다.

 

 시 속에서 양귀비를 총애하던 황제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외면하며 오로지 피눈물만 흘리는 소극적이고 비겁한 남자일뿐이다. '안사의 난'을 피해 쓰촨으로 도망가던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의 가마가 마외파에 이르렀을 때였다. 호위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 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 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대가 쫓아오고 피난 가마는 조금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다급해진 현종은 병사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양귀비의 일족은 병사들에게 내어주어 주살하게 했고 사랑해 마지않던 총비 양귀비는 내팽개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다고 했던 양귀비가 환관 고역사(高力士, 684~762 (78세))의 손에 이끌려 죽으러 가는 것을 그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양귀비는 마외파 인근 불당 앞 배나무에 비단천으로 목을 매어 죽었다. 자결했다고도 하고 고력사가 죽였다고도한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38세였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여인,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의 10여 년 권세는 이렇게 끝이 났다.

 

양귀비(楊貴妃)는 애초 현종의 며느리였다

 양귀비(楊貴妃)는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과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 한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고 중독시키는 아편 꽃에 양귀비란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녀의 미모는 어지간히도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본명은 양옥환(楊玉環)이며 잠시 도가에 입문했을 때 법명은 태진(太眞)이다.

 

 산시성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쓰촨성 관리이던 숙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양옥환은 노래와 춤에 능하고 미모가 출중해 17세에 당 현종의 18번째 아들인 수왕 이모(李瑁)의 비가 되었다.

 

 수왕 이모(李瑁)는 당 현종과 무혜비(武惠妃)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황제계승권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수많은 왕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당나라 6대 왕 현종. 그의 치세 전반기는 태평성세였지만 양귀비를 만난 후 나라와 백성을 위태롭게 했다.

 

 양옥환과 수왕의 사이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별 풍파 없이 양옥환이 수왕과 6년간 결혼생활을 이어간 것을 보면 그다지 나쁜 사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 현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양옥환은 수왕 이모와 천수를 다하며 해로하였을지도 모르고, 당나라도 혼란에 휩싸여 자멸의 길로 걸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자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6년간 수왕 이모의 아내로 살던 23살의 양옥환은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고력사는 총애했던 무혜비가 죽고 나서 외로워하는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중국전역의 미녀들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그 중에 수왕 이모의 아내 양옥환이 특히 아름답다고 들은 고력사는 그녀를 현종의 술자리로 불러낸다.

 

 양옥환은 이 자리에서 음악 애호가였던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자신의 장기인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 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현종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랑에 눈이 먼 현종, 정치는 관심 밖으로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주위의 눈은 신경 쓰이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현종은 일단 양옥환을 화산(華山)으로 보내 도교의 도사로 입문시킨다. 도가에서는 일단 입문을 하면 그 이전에 있었던 속세의 일들은 다 지워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종은 이런 도가사상을 자기의 몰염치한 사랑에 이용했다. 이때 양옥환은 태진이라는 도호를 얻었다.

 

 그 사이 미안해진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하였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일단 도사를 모셔와 가르침을 받는다는 핑계로 태진궁을 짓고 그곳에 양옥환을 살게 하였다. 이때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이후 양옥환은 27세가 되던 해 귀비 책봉을 받아 양귀비(楊貴妃)가 되었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 다름없는 귄력을 휘둘렀다.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현종은 젊었을 때 꽤나 정치에 소질이 있는 황제였다.

 

 치세 전반기는 현종의 연호를 따 '개원(開元)의 치(治)' 라는 칭송을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기나긴 태평성세에 마음이 해이해진 현종은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멀어 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다. 양귀비를 낀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백성들의 삶은 급속히 몰락해 민심은 흉흉해졌다.

 

양귀비(楊貴妃) 친인척을 대거 등용, 대표적 부패권력 양산

 그러나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 누대로 유명한 온천,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천리 밖에서 열리는 과실 여지(荔枝, 리치)를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였다.

 

양귀비(楊貴妃)의 세 자매까지 한국(韓國괵국(虢國)

 양귀비는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빠 양소는 건달 출신의 부도덕한 간신배였지만 현종에게서 국충(國忠)이라는 이름까지 하사 받았다. 양국충은 당 현종 말기의 대표적 부패권력이었으며 끝내는 안사의 난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다.

 

  양귀비의 언니들도 비록 양귀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다. (양귀비의 세 자매도 각각 한국부인(韓國夫人), 괵국부인(虢國夫人), 진국부인(秦國夫人)으로 봉해졌다.) 어느날 현종은 괵국부인(虢國夫人)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다.

 

 '장훤(張萱), 괵국부인유춘도권(虢國夫人遊春圖卷-송 휘종의 모본), 8세기, 52 x 148cm, 요녕성박물관 - 이 그림은 황제의 애첩 양귀비의 두 자매와 괵국부인이 시녀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외출하는 것을 묘사'

 

 양귀비는 현종의 사랑을 영원히 붙잡아 두려고 매번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였고 또 목욕을 즐겨 늘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역사서에는 그녀의 용모를 '자질풍염(資質豊艷)'이라 하였는데 이는 '풍만하고 농염하다'는 의미이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매일 온천물에 몸을 닦고 새로운 화장법으로 미모를 가꾸어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백거이(白居易) '장한가(長恨歌)'에서 양귀비와 현종의 사랑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연꽃 휘장 속에서 보낸 뜨거운 봄밤

 봄밤에 너무 짧아 해가 높이 솟았구나.

 황제는 이날 이후 조회에도 안 나오네

 후궁에 미인들은 3천명이나 되었지만

 3천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네.

 금으로 치장한 궁궐에서 화장을 끝내고 기다리는 밤

 백옥누각에 잔치 끝나면 피어나는 봄

 

무십일홍 권불십년, 자결 아닌 자결로 38세의 생을 마감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 꽃은 열흘 붉은 것이 없고 권세는 10년을 가지 못 한다)'이란 말이 있듯이 양귀비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양귀비의 몰락은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인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정계로 진출한 인물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楊貴妃)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만큼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이 바로 안사의 난이다.

 

 현종은 양귀비를 데리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장안에서 100여리쯤 가 섬서성 마외파에 도착했을 때였다. 성난 군중들과 현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은 나라꼴을 이렇게 만든 양귀비와 그 일족들을 처벌하기를 원했다.

 

 현종은 사랑과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는 양귀비와 함께 장렬히 죽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종은 양귀비를 보호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백성의 분노를 수수방관함으로써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하였다. 정치를 내팽개치고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 모든 책임을 양귀비에게 덮어씌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현종은 사랑보다는 자신의 목숨을 선택했다. 결국 현종의 뜻을 알아차린 환관 고력사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양귀비가 자결 아닌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나자 현종은 그녀의 시체를 수습해 인근 조그마한 산에서 장사 지냈다.

 

 양귀비가 죽고 간신히 피난길을 떠났던 현종은 황위를 아들 숙종(당 숙종 이형(唐肅宗 李亨, 711~762516, 당나라의 제7대 황제, 재위: 756~762)에게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다. 이후 그는 숙종에게 안사의 난을 진압하도록 모든 것을 맡긴 채 자신은 양귀비만 그리워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 속에서 6년 세월을 보내다가 762년 5월 3일 7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양귀비의 죽음에 대해서는 또 다른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대단해 고력사나 따라간 군졸들이 차마 죽이지 못하여 그녀를 일본으로 탈출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양귀비는 30여 년을 일본에서 더 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유물과 사당, 무덤이 일본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의 후손이라고 족보까지 들고 나선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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