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8대 명주(名酒) - (10대 명주)

두강주(杜康酒)

 

 

술 문화

 우리의 '원샷'에 해당하는 말이 중국에서는 '깐'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의 주도는 술자리가 처음 시작됐을 때 술을 연거푸 석잔 '깐 깐 깐'하는 것이다. 빈속에다 세잔 연거푸 독주를 들이키게 되면 그런 주법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의 경우에는 초반부터 완전히 취해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일단 길들여지면 우리의 술자리보다 편한점이 있기도 하다. 중국사람들도 우리처럼 반강제적으로 술을 권하기도 하고 술 못 먹으면 사회생활 하는데 지장이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일단 깐, 깐, 깐을  한 후에는 자기가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그렇지 않으면 마시지 않아도 된다.

 

 중국사람들은 절대로 잔을 돌리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사람과 술을 마실때 주의 해야할 점이기도 하다. 우리처럼 술 마시면서 웃고 떠드는 건 그들도 상당히 좋아하지만 음주습관까지 같지는 않다. 술잔 돌리기가 우리에게나 정감있는 것이지 중국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아주 큰 곤혹감을 줄 뿐이다. 또한 중국사람들은 술을 아주 좋아하고  즐기지만 정도 이상으로 마셔서 술주정을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그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가 힘들다. 술은 처음 배울때가 중요하다지 않은가. 중국사람들의 술버릇이 좋은 이유는 혁명전 때의 삼엄함 때문이란다. 그때에는 술이 취해 조금이라도 행동을 허투루 했다가는 곧 자아비판에 회부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잔이 다 비기전에 술을 첨가해 따르는 첨잔습관등이 우리와는 다른 음주문화이다.

 

 

 중국에는 지방마다 한두 개 정도의 특산주가 있을 정도로 술의 종류가 매우 많을뿐더러 알코올 도수가 보통 40~60도로 매우 독한 것이 유명하다. 종류에는 증류주인 백주(白酒), 양조주인 황주(黃酒), 한방약을 이용한 약주(藥酒), 과일 등을 이용한 과실주(果實酒), 그리고 맥주 등이 있다.

 

1. 황주(黃酒)

 곡류나 잡곡류를 원료로 해서 만드는 양조주이다.  황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샤오싱에서 생산되는 샤오싱주(紹興酒)이다. 대개 알코올 도수는 20도로 다른 중국술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샤오싱주를 오랫동안 병에 담아두면 향이 진해져서 맛이 좋아지는데, 이것을 노주(老酒)라고 한다.

 

2. 백주(白酒)

 고량(高梁) 즉 수수 등의 곡류나 잡곡류를 원재료로 해서 만든 증류주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갈(白干兒) 즉 고량주라고 하는 중국술은 이 백주를 가리킨다. 중국 술이 독하다고 하는 것은 이 백주를 두고 하는 말로, 보통 알코올 도수가 50~60도가 되고 더욱진한 것은 65도까지 되는 것도 있다.  백주로 유명한 것은 귀저우성에서 생산되는 마오타이(茅台)주, 산시성에서 생산되는 펀(汾)주, 허난성에서 생산되는 두캉(杜康)주 등이다. 그리고 수수, 밀, 옥수수, 찹쌀, 멥쌀 등 5종의 곡물을 재료로 해서 빚은 우구예(五穀液)도 유명하다.

 

3. 과실주(果實酒)

 과실주로는 포도주가 일반적이다.  그 외에는 약초를 배합하여 만든 웨이메이쓰(味美思)주 등이 있다.

 

4. 약주

 한방약초 등을 사용하여 만든 술로 일반적으로 자양강장을 위한 술이기도 하다. 종류로는 오갈피나무의 껍질 등 10여종의 약초를 고량에 넣어 만든 오가피주, 펀주에 대나무 잎 등의 약초를 넣어 만든 죽엽청(竹葉靑) 등이 있다.

 

5. 맥주()

 맥주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종류를 자랑하는 술로, 각 지방마다 고유 브랜드를 가진 것이 많다. 그중에서 칭다오의 맥주가 가장 유명한데, 독일과 기술을 제휴하여 만든 것이다. 그 외에 베이징, 상하이, 시안 등지에 각각의 브랜드를 가진 맥주들이 있다.

 

 

중국의 8대 명주

 중국에는 모두 4천5백여종의 술이 있는데 그 중에 명주 칭호를 받는 술로는, 마오타이주(茅臺酒), 분주(汾酒), 오량액(五粮液), 죽엽청주(竹葉靑酒), 양하대곡(洋河大曲),노주특곡(蘆酒特曲), 고정공주(告井貢酒), 동주(董酒)가 있다.

 

마오타이(茅臺酒)

 마오타이(茅台酒)의 산지는 귀주성(貴州省) 인회현(仁懷縣) 모태진(茅台眞)이고 800여년의 역사가 있으며, 1915년 파나마 국제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은 적도 있다.

 생산지인 모태진(茅台眞)에는 특수한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 곳은 귀주(貴州)고원의 제일 낮은 지점인 분지에 위치하고 있는데 해발은 440m 밖에 안되고 고원의 기류와 멀리 떨어져 있어 하루 종일 안개가 자욱하다. 여름에는 35-39℃에서 지속되는 고온기가 5달이나 되고 일년 중 절반이상이 무덥고 습한 안개 속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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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특수한 자연조건은 술의 원료를 발효, 숙화(熟化)하는데 매우 유리하며 동시에 모태주(茅台酒)의 독특한 향기를 내는 미생물을 형성시키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일으킨다. 만약 이런 자연조건이 없었다면 술의 맛도 변하고 특수한 향기도 없을 것이다.

 모태진(茅台眞) 주위지역과 전국 일부 술 공장에서 모태주(茅台酒)를 모방하여 생산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다.

 모태주(茅台酒)는 110여가지에 달하는 향기를 가지고 있으며 마신 후 빈잔에도 오랫동안 향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향기성분은 술 제작과정 중에서 향료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전부 반복적인 발효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다. 술 도수는 52~54°사이를 유지하며 중국의 유명한 술 가운데서 도수가 제일 낮다.

 모태주(茅台酒)의 제작기술은 다른 술과는 다른 생산 공정을 갖고 있고 생산주기는 7달이다. 생산해 낸 술은 창고에 4년 이상 저장하고, 다시 20년, 10년, 8년, 5년, 30년, 40년씩 저장한 술과 혼합한 후 시음을 통해 엄선한 후 판매한다. 모태주(茅台酒)의 상표는 내수판매용과 수출용 두 가지로 나뉘는데 내수는 "금륜패(金輪牌)", 수출은 "비선패(飛仙牌)"이다.

 

 

분주(汾酒)

 중국 산시성(山西省) 펀양현(汾陽縣) 행화촌(杏花村)에서 생산되는 분주는 1천 5백년 역사를 자랑하고 알콜도수 61도의 고도주(高度酒)로 술빛이 맑고 빛나며 청향형(淸香型: 깨끗하고 산뜻한 맛으로 향이 약한게 특징)에 속한다.

 맑고 투명한 색, 은은한 향, 그리고 청렴한 맛 – 이 세 가지가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로 불리고 있으며, 알코올 도수는 40~65도이다.

 지하의 심연암반수인 신천수를 이용해 만들었으며 땅에 묻어 3주 동안 발효시킨 뒤 2년 반 이상 창고에 저장한 후 출고 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인만큼 분주의 애칭도 특별하다.

 옛날부터 감천가양(甘泉佳釀: 좋은 샘물로 잘 빚은 좋은 술), 액체보석(液體寶石: 액체로 된 보석)이란 칭송을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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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량액(五粮液)

 중국의 남서부 쓰촨성(四川省)과 원난성(雲南省)을 경계로 구이저우성(貴州省)이 자리잡고 있다. 이 구이저우성은 양자강의 상류 지역으로, 산수가 빼어나고 기후가 온난하며 물자가 풍부하다. 삼국지에서 유비의 본거지였던 파촉이 바로 이 지역이다. 이 구이저우성에서는 중국의 명주가 많이 생산되는데, 그 가운데 우리앙예(五粮液)가 유명하다. 이 술은 중국의 증류주 가운데 가장 판매량이 많다.

 명나라 초기에 만들어진 오량액은 수수, 쌀, 찹쌀, 옥수수, 밀 등 5가지 곡물을 재료로 한 곡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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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술은 처음 빚은 사람은 진씨라는 사람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오량액의 독특한 맛과 향의 비결은 곡식 혼합비율과  첨가되는 소량의 약재에 숨어 있다. 이것은 수 백년 동안 진씨 비방으로 알려져 내려왔다.

 원래는 여러 가지 곡식을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잡량주라 불렀지만, 500년 전쯤부터 5가지 곡물만을 사용해서 오량액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알코올 도수는 60정도로 꽤 높은 편이지만 부드러운 맛을 지니고 있다.

1949년 현재의 중국 정부가 들어선 뒤 해마다 열리는 주류 품평회에서도 우리양예는 마오타이와 함께 중국의 대표하는 명주로 꼽힌다.

 1956년 전국곡주 질량품평회에서 1등을 차지했으며, 중국의 증류주 가운데 판매량이 가장 많은 술이다.

 

 

✜ 명주의 고향 쓰촨, 오량액(五粮液)

 국가 명주 6종 생산되는 술의 본고장

 청년 이백과 말년 두보의 생애도 교차

 

 예로부터 쓰촨(四川省) 지역은 중국에서도 술 좋은 곳으로 소문이 났는데 현대라고 사정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비옥한 땅이 드넓게 펼쳐져 있어서 곡물이 풍부한 데다 여름에 무덥지 아니하고 겨울에 혹한이 없는 기후가 좋은 술을 빚어내는 근본 요인이 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국가명주로 손꼽히는 17종의 배갈 가운데 6종의 배갈이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사정도 이러한 자연환경과 수천 년을 이어온 양조 역사를 바탕에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쓰촨성의 성도(省都)인 청두(成都)를 대표하는 술은 '전흥대곡주(全興大曲酒, 현재는 '수정방'이 대표 브랜드임)'이며 이곳에서 북쪽으로 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미옌주현(綿竹縣)에서는 국가명주 '검남춘(劍南春)'이 생산된다. 청두에서 남서쪽으로 4시간쯤 달리면 장강(長江) 가의 술 도시 이빈(宜賓)에 닿게 되는데 이곳에는 중국 농향형(濃香型) 배갈을 대표하는 '우량예(五粮液)'의 생산기지가 있다. 또한 여기서 강을 따라 2시간여를 더 가면 중국 최고(最古) 발효지(醱酵池)의 술임을 자랑하는 '루저우라오자오(濾州老, 현재는 '國1573'이 대표 브랜드)'가 생산되는 루저우(濾州)를 만난다.

 

 이곳의 강 건너편이 꾸린현(古藺縣)인데 여기서는 또 다른 국가명주'‘낭주(郎酒)'가 빚어진다. 루저우에서 북쪽으로 훌쩍 거슬러 올라가면 사홍현(射洪縣)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의 국가명주는 '타패주(牌酒)'이다. 미옌주에서 사홍현까지의 여러 명주 생산지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 보면 거대한 U자가 그려짐을 볼 수 있는데 중국의 애주가들은 이를 옛 파촉(巴蜀)의 대지 위에 그려지는 'U자형 명주(名酒) 띠'라고 일컫는다.

 

U자형 명주 벨트 형성돼 있어

 술이 시인을 부른 것일까, 시인이 술을 찾은 것일까?

 이곳 쓰촨은 중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생애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미옌주에서 차로 한 시간쯤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장요우시(江油市)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이백의 고향이다.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이백이 10년 넘게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이론없이 이백의 고향으로 부르고 있다.

 

 이백이 태어난 곳은 현재의 키르기스스탄 공화국의 타커마커(托克馬克)시 부근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청두까지의 거리는 우리나라 서울에서 만주를 돌아 베이징, 시안을 거쳐 청두까지 가는 길보다 더 멀다. 무슨 곡절이 있어서 이백의 윗대 어른들은 그 먼 변방에 살았고 어떻게 다시 어린 이백을 데리고 이곳까지 왔는가?

 

 전하길, 이백의 증조부 이정(李貞)이 측천무후(則天武后)에 반대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 자결했으며 그 아들을 비롯한 족인(族人) 600~700명은 현재의 내몽고 지역으로 추방되었다. 이후 이백의 조부는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무후가 죽은 뒤 사면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중원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귀환 도중 '반역자'의 후손들에게는 이 사면령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사천성 면주(綿州)로 달아났으며 그래서 귀착한 데가 창융현(昌隆縣. 지금의 장요우시) 청련향(靑蓮鄕)이었다. 그 사이 드나듦이 있었지만 이백은 스물네 살 때 장강을 타고 만유(漫遊)를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이백이 살던 때 이 지역의 이름난 술이 바로 '검남소춘(劍南燒春)'이란 것이었는데 '검남'은 이 지역의 별칭이며 '소춘'은 소주란 뜻이다. 일찍이 이백이 모피옷을 저당 잡히고 통음(痛飮)했다는 '해초속주(解貂贖酒)'의 일화도 이 술에서 비롯되었다.

 

 두보가 성도(청두)로 온 것은 서기 759년 12월로 그의 나이 46세 때였다. 33세 때 처음 낙양에서 11세 연상인 이백을 만나 깊은 교감을 가졌던 그는 안녹산(安綠山)의 난을 거치면서 몹쓸 고초는 모두 겪었다. 궁핍을 의복처럼 걸치고 다녔던 그가 비로소 안일과 평안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성도에서 지낸 몇 년간이었다. 때마침 벗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던 엄무(嚴武)가 성도의 최고 벼슬아치로 부임하였기에 개울가에 초당을 짓고 마음 편히 시를 지을 수 있는 여유도 가졌다.

 

 51세 되던 해 여름, 엄무가 조정 중책을 맡아 장안으로 불려 갈 때는 면주(綿州. 지금의 면양)까지 따라가 그를 전송했는데 엄무와 작별하고서도 두보는 곧 성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성안에서 반란이 일어나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1년 뒤, 엄무가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가 되어 다시 성도에 부임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서둘러 성도로 돌아오던 두보는 '술로는 돈 안 내고도 마실 수 있던 비통주를 기억한다(酒憶筒不用)'며 다시 찾는 성도를 그리워했다. '비통주'는 당시 성도 교외의 비현(縣)에서 생산되던 대나무통 술이었다.

 

 청두의 샐러리맨들이 가장 즐겨 마신다는 중저가 배갈 '풍곡주(豊谷酒)'가 있는데, 한 병에 90위안(우리 돈 1만5000원 정도) 안팎인 이 술은 17세기 후반부터 미옌양(綿陽)의 풍곡(豊谷)에서 생산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미옌양의 옛 이름이 면주다. 두보와 엄무가 작별의 정을 나눴던 이곳은 또 취한 이백이 단번에 시 백 편을 지었다는 전설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풍곡주는 그 첫맛이 자극적이었지만 농향주답게 강렬하고 깊지는 않다. 입안에 도는 향도 썩 괜찮았는데 깔끔하게 걷히는 뒷맛이 훨씬 좋다.

 

중국 배갈 시장의 최강자 우량

 서울 한복판에도 중국 배갈의 광고판이 나붙었다. 명동 거리에서도 쉽게 눈에 들어오는 '우량예(五粮液)' 광고가 그것이다. 일찍이 우리한테 소문난 배갈은 '마오타이주(茅台酒)'였지만 마오타이는 그 독특한 향 탓에 우리네 입맛을 제대로 끌지 못했다. 때문에 90년대 중반부터 우리네 애주가들이 우량예를 만난 것은 중국 배갈의 새 지평을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강렬하면서도 부드럽고 진하면서도 은은한 농향형(濃香型) 배갈의 진면목을 우량예를 통해 대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배갈 시장의 대세 또한 농향형이다. 우량예를 필두로 한 농향형 배갈들이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손쉽게 마오타이의 매출액을 꺾어버린 우량예는 중국 배갈의 새 전설이며 그 기세는 여전히 위력적이다.

 

 우량예 술 회사는 장강의 최상류, 즉 금사강(金沙江)과 민강(岷江)이 만나는 쓰촨성 이빈시(宜賓市)에 있다. 지도상의 '장강'이라는 표기도 이곳 이빈에서 시작한다. 의빈(이빈) 지역의 양조 역사는 선진시대(先秦時代)까지 올라가지만 순수하게 곡식으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당대(唐代)부터다. 서기 765년 봄, 쪽배를 타고 고향으로 가던 두보는 당시 융주자사(戎州刺史) 양모(楊某)의 초대를 받고 이곳에 들렀다. 연회에서 젊은 술꾼들과 기생들이 어울려 노는 양을 보곤 즉흥으로 '(기생들이 일어나 주인에게) 짙푸른 중벽 춘주를 올리고 가는 손으로 분홍빛 여지 열매를 까는구나(重碧拈春酒 輕紅擘枝)'라는 시구를 남겼다. 이때부터 이곳 술은 '중벽주(重碧酒)'로 불렸다.

 

 우량예 양조기술의 발전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은 '요자설곡(姚子雪曲)'이라는 술의 등장이다. 이는 송대(宋代)의 의빈 양반 요씨(姚氏) 집안에서 만든 술이었는데 옥수수, 쌀, 수수, 찹쌀, 메밀 다섯 가지 곡식을 원료로 하였다. 명대(明代)에 의빈 사람 진씨(陳氏)가 요씨의 주업을 계승하였지만 당시의 교양인들은 이 술을 여전히 요자설곡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이를 '잡양주(雜粮酒)'라고 불렀다. 1909년 선비 양혜천(楊惠泉)이 이 술을 마셔보곤 말하길 "이처럼 좋은 술을 잡양주라고 하는 것은 너무 속된다. 비록 요자설곡이 점잖기는 하지만 술의 본체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하다. 이 술은 다섯 곡식의 정화(精華)로 빚어진 것이니 오량액(五粮液)이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우량예란 이름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우량예를 빚는 데 쓰는 물은 민강의 깊은 데서 길러지는데 이를 '민강강심수(岷江江心水)'라고 한다. 수수, 쌀, 찹쌀, 밀, 옥수수 등 다섯 가지 원료는 현지 특산의 정선된 것이며 누룩은 밀로 만든 대곡(大曲)을 쓴다. 누룩 균을 배양하는 시간도 40일 정도로 평균 30일 정도인 다른 술보다 길다. 구덩이 속 발효기간은 70~90일에 이른다.

 

우량예 공장은 거대한 산업단지 방불

 청두에서 네 시간여 고속도로를 달려 도착한 이빈시. 시골답지 않게 버스터미널 건물이 국제공항인 양 크고 깔끔하다. 터미널에서 우량예 공장까지는 택시로 10여 분. 공장 정문 앞에는 술 회사가 운용하는 전용 택시들이 대기하고 있다. 공장을 구경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택시를 타야만 한다. 30~40분 구경에 요금은 50위안이다. 우량예 회사의 정식 직원이기도 한 택시 기사는 장쩌민, 후진타오 등 국가 지도자들이 모두 이곳을 다녀갔다고 자랑이 대단하다. 영빈관인 일월궁(日月宮) 뜰에서 내려다보는 술 공장은 거대한 산업단지와 흡사하다. 사방 10여㎞의 공장 전경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3만여 종업원을 거느린 우량예 회사가 지역 사회는 물론 중국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한 까닭도 알 만하다. '십리주성(十里酒城)'이라는 말이며 '사람 중에 으뜸은 황제, 장강의 시작은 의빈, 시문학의 우두머리는 이백과 두보, 술의 꼭대기는 우량예(人之頭皇帝 江之頭宜賓 詩之頭李杜 酒之頭五粮液)'란 자랑도 함부로 나온 것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2008년 영업수익 300억위안을 달성한 우량예는 현재 12개의 자회사를 거느리는 명실상부한 중국 배갈업계의 최강자이다. 2008년 기준 우량예의 브랜드 가치는 480억5600만위안으로 평가된다. 오량춘(五粮春), 오량신(五粮神), 오량순(五粮醇) 등의 술들은 이름만 봐도 우량예 계열임을 알 수 있지만 장삼각(長三角),양호춘(兩湖春), 현대인(現代人), 금육복(金六福), 유양하(瀏陽河) 같은 배갈들이 우량예에서 직간접으로 만든 술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 한국인들이 베이징에서 즐겨 마시는 '경주(京酒)'도 마찬가지다.

 

 서기 765년 5월, 성도(청두)에 머물던 두보는 작은 배에 가족들을 태우고 이 강을 떠내려간다. 전란(안녹산의 난)은 끝났지만 아직 그의 고단한 생은 끝나지 않았다. 생계의 후원자이며 자기 시의 진정한 이해자였던 엄무가 이 해 4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같은 해 정월에는 절친한 친구 고적(高適)마저 병으로 세상을 떴다. 세 해 전에 이미 이백이 죽었고 그 뒤를 이어 왕창령(王昌齡), 저광희(儲光羲) 같은 저명 시인들이 차례로 이승을 버렸다. '(문단의) 호걸준사로 어떤 이가 남았나? 문장이 쓸리고 땅이 온통 비었는데...(豪俊何人在 文章掃地無)'라고 애통해했던 두보는 이제 제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었다. 더 이상 성도에 머물 수 없게 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작정을 했다. 민강에 배를 띄운 그는 가주(嘉州)를 거쳐 융주(戎州. 지금의 이빈)를 지나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54세 나이. 기침으로 고생하며 중풍 기운도 조금 있었다. 귀는 어둡고 눈은 흐렸다. 동(東)으로 흘러갔던 두보는 끝내 고향 언저리에도 이르지 못한 채 동정호(洞庭湖) 기슭에서 생애의 마지막 숨을 거뒀다.

- 글: 최학(jegang5@naver.com) -

 

 

죽엽청주(竹葉靑酒)

 죽엽청주와 분주를 생산하는 산서성(山西省)은 중국술의 전통적인 발원지 이기도 하다. 죽엽청주는 고량을 주 원료로 10여가지의 천연약재를 첨가, 양조한 술로 음주후 나타나는 두통등의 부작용을 전혀 느낄 수 없으며 기(氣)를 충족시킬뿐 아니라 혈액을 잘 순환시키는 작용을 한다고 평가된다.

 옅은 금빛으로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죽엽청주는 독특한 효능이 있다.

 약재를 넣었기 때문에 다른 술에 비해 조금은 독특한 향을 가지고 있다.

 죽엽청주는 제 2회, 제 3회 국가주류 평가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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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하대곡(洋河大曲)

 옛 청나라와 명나라에서도 유명했던 양하대곡은 장쑤성에서 생산되는 증류주이자 백주이다.

 자세한 주조과정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신비로운 술이기도 하다.

 알콜도수 48도의 양하대곡은 강소성(江蘇省)에서 생산되는데 중국 국내는 물론 국제평주대회(國際評酒大會)에서 여러차례 상을 받았다. 중국의 평주가(評酒家)들은 양하대곡이 달콤하고 부드러우며 연하고 맑고 깔끔한 향기 등 다섯가지의 특색을 지니고 있어 일반술의 음주량을 초과 하더라도 음주후 나타나는 불편한 증상이 전혀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소스는 탕수육 소스와 비슷한 맛이다.

 

 

노주특곡(蘆酒特曲)

 노주특곡은 4백년의 역사를 지닌 사천성(四川省) 노주(蘆州)에서 생산되며 향기가 농후하고 순수한 것이 특징이다.

 노주특곡은 알코올 농도 45도인 증류주이자 백주이다.

 중국의 백주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발효시키는 술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송나라 때에는 루저우의 술공장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국가 수입의 10%를 차지했다고 한다.

 현재 루저우라오자오를 생산하고 있는 루저우라오자오지우예(泸州老窖酒业)의 생산공장은 명나라 시기부터 유명했던 양조장에 위치하여 당시의 저장창고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1573년 양조장 주인이 처음 땅굴을 파 술을 저장했다는 저장 동굴은 현재 중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루저우라오자오는 은은한 향을 지니면서도 달콤하고 깔끔한 맛으로 중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17년 파나마 국제주류품평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향이 농후하고 순수한 것이 특징이다.

 

 

고정공주(古井貢酒)

 45도의 고정공주는 술 중의 '모란꽃'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색이 맑고 향기가 청아한 것이 특징이다

 옛날 삼국지(三國志)의 조조(曺操)가 신의(神醫)로 유명한 화(華)의 고향 안소성(安微省)의 <고정(古井)>물로 사용하여 만든이 술을 한제(漢帝)에게 조공을 올려 황제의 칭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고정공주(古井貢酒)>란 이름이 붙은 유래가 됐다.

 고량과 밀, 완두콩으로 만든 누룩을 사용해 발효한 고정공주는 1963년 선발대회에서 8대 명주로 선발되었다.

 

 

동주(董酒)

 귀주성(貴州省)의 준의(遵義)시에서 생산되는 동주는 산속의 순수한 산천수와 양질의 고량을 주 원료로 빚어진 술이다.

 동주는 그 생산기술과 배합공정이 국가비밀에 속할 정도로 중국에서 아주 귀한 술로 인정받고 있는데, 동주는 양질의 고량을 주 원료로 산속의 순수한 산천수(山川水)를 사용하고 여기에 1백30종의 유명 약재를 첨가하여 만든다.

 백주중에서 가장 맛과 향이 특이하고 개성적인 술이다.

 죽엽청주나 리큐르주는 술이 다 발효시킨 상태에서 향이나 약제를 첨가하는데, 이 동주는 처음부터 제조 과정에서 약제를 혼합하여 발효과정을 거친다.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는 4회 금상에 빛나는 영예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대중주 공부가주(孔府家酒)

 아름다운 도자기의 형태로 된 용기의 형태 때문에 어느덧 한국인들에게도 많이 친숙한 술로 다가오는 공보가주는 중국의 역사명주(歴史名酒)로 유명한 술이다.

 당초 공자의 집안(孔府)에서 술을 빚기 시작한 것은 명(明)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고량과 밀, 보리, 완두 등의 재료를 이용해 특색있게 빚어낸 이 술은 공자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빚었던 술로 알려져있다. 허나 점차 이 술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대접을 시작했던 것이 어느덧 연회에서 사용되는 술로 자리를 잡았고, 그 명성이 더욱 널리 퍼지면서 대중주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공보가주는 고량과 밀, 보리, 완두를 재료로 하여 빚어낸 백주(白乾兒)의 일종이며, 재료에 들어간 고량으로 인해 과일 배(梨)의 그윽한 향이 일품인 술이라 할 수 있다(정확히는 배의 향은 아니고, 고량의 향).

 

 산동성 곡부(曲埠)지방의 특산품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실 저급하게 만든 제품이 아니라 나름대로 상당히 고급주류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여타 주류에 비해 가격적인 부담도 적은 편이라는 강점 덕분에 중국에서도 일상적으로 아주 친숙한 주류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공부가주(孔府家酒)와 공보가주(孔寶家酒), 어떤 표기가 맞나?

 두 제품 모두 곡부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는 제품이다. 워낙에 명주이니만큼, 다양한 양조장에서 같은 술을 만들고 있는데, 각각의 양조장에서 만든 제품은 양조장에 따라 각기 다른 상표로 시장에 출시되고 있다.

 

 

중국의 대표 서민술 이과두주(二鍋頭酒)

 중국의 대표 서민술 이과두주(二鍋頭酒)

 중국을 보는 또 하나의 창 - 배갈(白酒)

 '베이징의 자존심' 대중 명주가 되다

 

 중국 배갈(白酒) 중에서 무엇보다 우리 한국인에게 친숙한 것은 '이과두주(二鍋頭酒)'이다. 예전부터 중국집에서도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

 적은 돈으로도 취기를 하나 가득 얻을 수 있는 술이 이과두주뿐이니 서민 대중 또는 가난한 대학생들의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名酒-二鍋頭酒.jpg

 톡 쏘면서도 깔끔한 이 배갈이 그러한 싼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는 원료에 있다. 일반 배갈들이 수수를 주원료로 할 때 이과두주와 같은 저가의 배갈들은 대부분 밀기울(밀에서 가루를 빼고 남은 찌꺼기)을 원료로 쓴다. 누룩을 만들 때도 효모균을 넣으며 아예 누룩 대신에 당화 효소를 쓰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발효 기간을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술의 추출량도 크게 늘릴 수 있다. 양조법이 간단하면서 여러가지 향을 내기도 쉽기 때문에 저가의 중국 배갈들이 대부분 이 방법을 쓰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증류로 받아낸 술이 '이과두'

 '이과두주'는 분명 술의 이름이지만 고유명사가 아니다. 더더욱 특정 회사의 상품 이름도 아니다. 단지 술을 빚는 방법에서 얻은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과두주를 생산하는 회사는 무수히 많으며 상품도 수백 가지가 넘는다.

 일반적으로 증류를 통해 술을 받아낼 때 첫 번째로 받아내는 술을 '과두(鍋頭)'라고 한다. 이 술은 알코올 농도가 높아 보통 75도 이상이 된다. 이후 농도는 점점 옅어져 마침내 마셔도 괜찮을 만한 술이 되는 것이다. 무색무취에 향도 전혀 없는 술이지만 자극감이 생각 밖으로 덜해 순순히 목을 타넘어 간다. 그러나 이러한 과두로는 일반인의 구미를 끄는 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한 번 더 증류 과정을 거치는 ‘2과두’ 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배갈을 만들 때 그 원료는 대여섯 차례에 걸쳐 발효구덩이와 찜솥에 들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주원료는 밀, 수수, 옥수수 등이지만 저가의 배갈을 만들 때는 옥수수대, 밀기울, 쌀겨 등이 쓰인다. 원료를 일정 비율로 잘 분쇄한 다음 솥에 넣고 물을 부어 찌는 것은 모든 배갈 양조의 첫 번째 일이다. 잘 익은 원료를 꺼내 누룩을 넣고 골고루 섞은 다음 발효구덩이에 넣는 것이 그 다음 작업이지만 값싼 배갈은 누룩 대신 당화 효소를 쓰는 경우가 많다. 고급술은 이후 한 달 이상의 발효과정을 거치지만 저가술들은 보통 5일 후에 꺼내 끓여서 술을 받는다. 여기까지가 제1과이다.

술을 받은 후, 찜솥에 있던 원료들을 모두 꺼내 가래질을 하면서 식힌다. 이과두주의 경우, 여기에 소량의 새 원료와 효모를 넣어서 잘 섞는다. 이것이 다시 구덩이에 들어가 발효과정을 거치면 한 순배의 작업이 끝나는 것이다. 5일 후 꺼내서 또 술을 내리는데 이것이 제2과가 된다. 이때 흘러나오는 술이 본래의 이과두이다. 물론 고급술들은 이때도 효모 대신 누룩을 쓰며 발효기간도 훨씬 길다.

 

 

베이징을 기반으로 양조기술 발전해

 그렇지만 오늘날 서울이나 베이징에서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이과두주들은 위에서 말한 바의 본래의 양조법과는 차이를 두고 만들어진 것이다. 정통 배갈의 본고장이 쓰촨(四川), 궈이저우(貴州) 등지라면 이과두주의 홈그라운드는 베이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과두주는 특별히 이곳에서 양조기술이 발전되고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베이징 지역에 증류기가 전해져서 소주(燒酒, 배갈)를 빚기 시작한 것은 금(金)나라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에도 베이징은 중도(中都)로 불리는 국가의 중요 도시였다. 청나라 중기 무렵, 성 안의 양조장들이 좀 더 나은 술을 만들기 위해 제조 공정의 개혁에 나섰는데 그때 처음으로 냉각 솥을 여러 개 설치하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술을 증류할 때 냉각기로 사용하는 솥을 '석과(錫鍋, 주석 솥)' 또는 '천과(天鍋)'라고 불렀는데 세 개의 냉각 솥으로 술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

 보통 증류 술을 받아낼 때 맨 처음에 흘러나오는 술을 '주두(酒頭)'라 하고 마지막으로 걸러지는 술을 '주미(酒尾)'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 주두나 주미는 알코올 도수가 너무 높거나 다른 성분이 섞여 있어서 좋은 술이 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 술을 따로 걸러 재처리해야 했는데 이렇게 주두와 주미를 잘라내는 것을 '겹두거미(頭去尾)'라고 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일찌감치 이 방법을 쓰고 있었지만 이과두주는 냉각 솥 세 개를 사용함으로써 이 작업을 더 체계적이고 쉽게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과두주는 두 번째 냉각 솥에서 흘러나온 술만 취하면 됐기 때문이다. 이과두주라는 술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음은 물론이다.

 청나라 말기에 이르면 이과두주의 제조 공법은 베이징의 다른 지역까지 전파되어 술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 베이징 사람들이 이과두주를 자랑할 때마다 언급하는 시 구절이 있다. 청대(淸代)의 시인이라고 하지만 정사에도 이름이 보이지 않는 오연기(吳延祁)라는 시인의 것인데 시의 전문(全文)을 찾기도 어려운 걸 보면 어느 술 회사에서 임의로 퍼뜨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自古人才千載恨 (자고인재천재한) 자고로 인재가 드물어 한탄했는데

 至今甘醴二鍋頭 (지금감례이과두) 오늘날 감미로운 술 이과두가 있다네.

 

 

대표적 이과두주 어떤 게 있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베이징과 그 인근 지역에서 주로 생산되며 특히 베이징의 서민 대중들이 가장 즐겨 마시는 배갈이 이과두주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과두주가 싼 가격에 판매되는 것은 아니다. 상품에 따라서 300~400위안이 넘는 고가의 이과두주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베이징 권역에서 생산되는 이과두주가 수십 종이 넘는데 여기서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몇몇 대표적인 이과두주를 소개한다.

 

홍성이과두주(星二鍋頭酒)

 초록색의 투박스러운 병, 붉은 바탕에 흰 글자를 새긴 상표를 붙인 이 술은 베이징 이과두주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배갈 팬들에도 가장 낯익은 술이다.

 

 홍성이과두주를 만드는 북경홍성주식회사는 1949년 5월에 세워졌는데 이는 신 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만든 기업 중 하나다. 건국 초기 생활수준이 낮았던 중국 대중들이 경제적인 부담 없이 마음 놓고 마실 수 있는 술은 이과두주밖에 없었다. 따라서 생산 초기부터 국가가 술의 가격을 정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때문에 60년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회사가 생산하는 10여 종의 이과두주는 가장 저가의 배갈로 인식되고 있다.

 

이 술은 달고 진하며 뒷맛이 깔끔한 데다 가격까지 저렴해 소비자들로부터 한결같은 총애를 받고 있다.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술'의 대명사가 된 홍성의 저가 배갈들은 지난 60년 동안 소비량에 있어서 북경 지역 시장에서 꾸준히 우두머리 자리를 지켜 오고 있다.

 

 홍성이과두주는 전통의 양조기술에다 현대의 미생물기술을 결합시킨다. 수수를 주원료로 하며 보리와 완두로 누룩을 만들어 당화발효제로 쓴다.

 

 1949년 5월, 중국 중앙인민정부의 조치에 따라 북경의 전통 있는 기존의 양조장들, 즉 용천(龍泉), 동천용(同泉涌), 영화성(永和成), 동경천(同慶泉) 등 12가(家)의 양조장들이 하나로 흡수되어 '북경홍성'이 되었다.

1949년 8월 최초로 홍성이과두주가 생산되었으며 9월에 시장에 선을 보였다. 대중들은 이 술의 달고 강렬한 맛에 반했으며 싼 가격에 흡족했다. 머잖아 홍성이과두주는 ‘대중 명주’라는 영예를 얻었으며 홍성은 곧 이과두주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1949년 300톤에 지나지 않았던 생산량은 현재 6만톤으로 늘어났다. 일반이 가장 즐겨 찾는 500ml 55도의 홍성이과두주가 시중에서 6위안에 팔리고 있다.   

 

북경이과두주(北京二鍋頭酒)

 대표 상품 ‘북경이과두주’로 유명한 북경이과두주업주식회사는 2002년 8월에 만들어졌다. 1949년 건립된 국영 북경대흥주창(北京大興酒廠)이 회사의 전신이다.

 

 <북경통사(北京通史)>의 기록에 따르면 대흥주창은 80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갖는다. 금(金) 대정(大定) 3년(1163년) 금의 세종(世宗)이 조서를 내려 대흥 소윤(小尹)에게 좋은 술을 다시 만들라고 명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금란주(金瀾酒)'는 그 맛이 진하고 깨끗할 뿐만 아니라 달고도 상쾌하여 금 왕조의 높은 계층들이 즐겨 마셨다.

 

 원(元) 영종(英宗, 1322년)에 이르러 북경에는 100여 개의 양조장이 설치돼 '아자길주(阿刺吉酒)'라는 배갈과 좁쌀로 빚은 '황주(黃酒)'를 생산하였다. 명(明), 청(淸) 양대에 걸쳐 황가(皇家)의 금원(禁苑)이었던 영해(瀛海) 행궁은 황제의 사냥터로 유명한데 이곳에도 양조장 하나를 만들었다. '유흥소과(裕興燒鍋)'라는 이름의 이 양조장에서는 전적으로 황궁에서 사용되는 어주(御酒)를 만들었다. 북경 동인당 약국이 문을 연 후부터는 규정된 약들이 이 술에 들어갔는데 현지의 늙은 인부들이 당나귀 수레에 술을 가득 싣고 동인당으로 가곤 하였다. 1949년 9월 유흥소과가 국유화되면서 이름도 국영 북경대흥주창으로 바뀌었다.

 

 전통 양조법으로 제조되는 북경이과두주는 수수를 주원료로 하고 밀기울로 만든 누룩을 쓴다. 처음과 마지막 술을 버리고 가운데 술만 쓰는 겹두거미의 양조법에다 원주(原酒)를 장기간 보존시킨다는 점은 여타의 배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란산(牛欄山) 이과두주

 북경순흠농업주식회사(北京順農業股有限公司)의 자회사인 우란산주창(牛欄山酒廠)은 1952년 10월에 세워졌다. 북경시 순의구(順義區) 우란산진(牛欄山鎭)에 있는데 호수를 끼고 있는 주변 풍경이 아름답다. 직원의 숫자는 1500여 명이다.

 

 우란산 지역의 술 문화 역사는 3000년 이전의 서주(西周)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2년 회사 근처에서 출토된 솥과 술잔 등 8건의 청동기 기물 중 다섯 개가 술과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분석 결과 이들 유물은 서주 시대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란산 이과두주의 역사는 청대(淸代)에서 시작되는데 <순의현지(順義縣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100여 명의 전문가들이 소주를 빚었는데 이 술은 별나게 달고 깨끗하여 평북지역의 특산이 되었다. 인근 고을과 시장에 팔리면서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퍼졌는데 그 중에서도 우란산 술이 가장 유명하였다."

 

 우란산 술은 수수와 밀을 원료로 하며 완두와 보리로 누룩을 만든다. 청향형의 이들 술은 '우란산'을 대표 상표로 하며 110여 종의 술을 생산한다. 회사에서는 원료 수수의 질과 양을 담보하기 위하여 수수 주산지인 동북지방에 원료 공급기지를 세웠다. 술을 빚는 데 사용되는 물은 우란산 지구의 국가 수원(國家水源) 팔창(八廠)의 물을 끌어 쓴다.

 

황가경도(皇家京都) 이과두주

 북경 황가경도 본사는 천안문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북수교(北樹橋)에 있다. 연간 생산량은 1만여 톤이 넘으며 직원의 수는 500여 명, 자산은 1억 위안이다. 경왕자주(京王子酒), 취류하주(醉流霞酒), 이과두주 등 계열 상품은 120여 종에 이른다.

- 글: 최학 소설까· 우송대 교수 (jegang5@naver.com) -

 

 

 

21세기 신 국가 명주 수정방(水井坊, shuǐ jǐng fáng)

 중국 最古 발효지서 생산되는 고급술

 프리미엄 전략으로 엘리트 계층 유혹

 

 2000년 3월 중국 축구계가 크게 요동쳤다. 관록을 자랑하는 '사천전흥축구팀(四川全興蹴球隊)'이 갑자기 '사천수정방팀(四川水井坊隊)'으로 이름을 고쳤기 때문이다. 팬들과 관계 인사들이 영문을 몰라 하는 사이에도 '수정방/이라는 이름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名酒-水井坊.jpg

 

 

 기존의 배갈과 다른 깔끔한 맛과 향을 풍길 뿐만 아니라 비싼 가격과 세련된 디자인으로 우리나라 애주가들 사이에도 짧은 기간에 빠르게 입소문을 탄 중국 배갈 '수정방(쉐이징팡)'은 이렇게 전격적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술 또한 어느 날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수정방의 정체(?)를 알려면 먼저 '전흥대곡주(全興大曲酒, 취엔싱따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쉽게 말해 수정방은 전흥대곡주의 돌발적이면서도 도전적인 변신이기 때문이다.

 

 비록 이러한 변신에는 새 자본과 첨단의 양조 기법이 전제돼 있다고 해도 본체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원료의 선별 가공은 말할 것 없고 대체적인 양조 방식도 전흥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수정방이 나타났다고 해서 전흥주가 사라진 것도 아니다. 수정방은 전흥주 술 회사가 만든 새 브랜드의 제품이며 회사는 일단 이 술에 투자와 경영을 올인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쓰촨 청두(成都)에서 생산되는 전흥대곡주는 술의 향이 짙고 환한 데다 맛이 유독 깨끗하여 예부터 애주가들이 '향기와 맛이 가장 두드러지는 술'이라고 칭송했다. 청두는 예부터 여름에 무더위가 없고 겨울에 큰 추위가 없는 데다 기름진 땅이 넓게 펼쳐진 탓에 농업이 흥성하였다. 오곡이 풍성하니 절로 술을 만들고 마시는 풍습이 성할 수밖에 없었다. 당대(唐代)의 시인 장적(張籍, 766?~830?)은 당시 청두의 융성한 술 시장 풍경을 자신의 시 '성도곡(成都曲)'에 잘 그려 놓고 있다.

 

 ▲ 성도곡(成都曲) - 장적(張籍)

 錦江近西烟水綠 (금강근서연수록)  금강에 푸른 물안개 자옥한데

 新雨山頭枝熟 (신우산두지숙)  비 내린 산등성이엔 여지가 익어가네.

 萬里橋邊多酒家 (만리교변다주가)  만리교 옆에는 술집도 많은데

 游人愛向誰家宿 (유인애향수수가숙)  한량들은 오늘 밤 또 뉘 집에서 묵을까 한다네.

 

 전흥대곡주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청나라 건륭(乾隆, 1711~1799) 때부터다. 이 무렵 어떤 산서(山西) 사람이 행화촌(杏花村)에 본거를 둔 '분주(汾酒)'의 양조 기술을 청두에 전했다. 이후 기술은 끊임없이 개선· 발전되어 마침내 독자적인 양조 방법을 만들어냈으며 여기에 물과 흙, 기후의 특성이 보태지면서 독특한 풍미와 특별한 격을 갖춘 전흥주가 나온 것이다.

 

 전흥주의 양조 방법은 전통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원료의 발효를 위해 연수(年數)가 서로 다른 구덩이를 쓰며 발효기간도 60일 정도로 길다. 증류할 때 처음과 마지막으로 받은 술은 희석한 후 새 원료에 섞어 다시 발효시키고 중간에 얻은 술만 배합 과정을 거치게 한다.

 

 전흥대곡주는 1963년 제2회 전국주류평가대회서 영예의 금장을 받아 국가 명주의 반열에 들었으며 이후 제4회, 제5회 대회에서도 금장을 받았다.

 

고고학적 대발견과 새 브랜드 전략

 1998년 8월, 전흥주 회사는 청두시 금강 가의 수정가(水井街)에 있는 양조장 시설을 개축하다가 뜻밖의 역사적인 발견을 했다. 그전에는 알지 못했던 고대의 양조장 시설들이 땅속에서 속속 드러났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정가(水井街) 주방유지(酒坊遺趾)'의 발견이다.

 

 수정방은 청두의 옛 동문대교(東門大橋) 밖에 있다. 1999년 고고학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서로 다른 지층에서 각기 시대가 다른 발효지와 양당(堂: 쪄낸 원료를 식히고 새 원료를 섞는 곳), 아궁이 터, 시루를 놓았던 자리 등의 유적들이 발굴됐다. 조사 결과 이는 원, 명, 청 3대에 걸친 옛 양조장의 흔적들이었다. 이 발견은 국가에 의해 '1999년 전국 10대 고고학적 발견'의 하나가 되었으며 진시황 병마용(兵馬俑)에 버금가는 발견으로 일컬어지면서 중국의 애주가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유적지는 2001년 6월 중국 국무원의 공포를 거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우리 식의 국보)로 지정됐다.

 

 그동안 여러 배갈 회사들이 자기네 발효지가 500~600년 된 것이라고 자랑하고 선전해 왔지만 구체적인 실물로써 공인된 것은 명대(明代)인 1573년에 설치된 루저우 라오쟈오(瀘州老)의 발효지가 가장 오래된 것이었다. 그러나 수정방의 이 발견으로 430여 년의 발효지 역사는 단숨에 600년으로 훌쩍 뛰어오를 수 있게 되었다.

 

 전흥주는 그동안 같은 쓰촨에 근거를 둔 우량예나 루저우 그리고 이웃 뀌이저우(貴州)에서 생산되는 마오타이의 성가에 가려 시장 확장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따라서 자기네 앞마당에서 펼쳐진 이 세기의 고고학적 사건을 호재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시장을 키우는 데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2000년, 전흥주의 성도전흥주창은 새 자본의 투입과 함께 아예 회사 이름을 사천수정방주식회사(四川水井坊公司)로 고치고 대표 브랜드 '수정방'을 출시하였다.

 

 수정방 유적지는 청두 시내 중심지에서 차편으로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선전과 홍보에도 서구적 방식을 도입한 수정방답게 먼 나라에서 온 방문객을 위해 호텔까지 차편을 보내주는 호의를 잊지 않는다. 출근 인파로 붐비는 수정방 거리에 위치한 유적지의 겉모습은 예전 우리네 정미소를 연상케 한다. 나무판자로 얽어놓은 지붕은 통풍창이 많아서 빗물이 그냥 새어들 듯하다. 현재도 사용되는 발효지들이 즐비한 가운데 발굴을 끝낸 옛 양조장 터가 조명을 받고 있다. 퇴적층에 따라 명대, 청대, 현대가 선명하게 구분된다. 술 만든 이들의 6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이 놀랍기만 하다.

 

 당신은 수정방을 마실 자격이 있는가?

 술의 고급화와 함께 고가(高價) 책정으로 경쟁 술들을 이기겠다는 것이 수정방의 기본 전략이었다. 처음 수정방이 병당 600위안이라는 당시 시장 최고가로 출시되었을 때 먼저 당황한 것은 이를 팔아야 하는 영업소들이었다. 그들이 따져 물었다.

 "너희가 마오타이냐, 우량예냐? 이렇게 비싸서 누가 사겠어?"

 이에 대해 수정방의 대답은 분명했다.

 "그들도 이제는 낡은 이름이다. 마오타이, 우량예와 비교하면 당연히 그들이 더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보다 더 오래된 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고객들에게 이렇게 말해 보라. 당신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발효지에서 만든 가장 아름다운 술을 마신다. 술에는 별난 미생물들이 조성한 특별한 성분이 있다. 이렇게 말해도 값이 비싸다고 불평을 하겠는가?"

 

 한편, 수정방은 물건을 달라고 해도 웬만한 업소에는 아예 제품을 넣지 않았다. 업소의 수준이 떨어지면 상품 자체의 격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업소의 기준까지 엄격히 정했던 것이다. 대신 업소의 판매가는 출고가의 1.5~2배로 하여 그만큼 많은 이익이 업소에 돌아가게 하였다. 업소로서는 대단히 유혹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수정방의 또 하나 영업 특징은 ‘창구효과’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소비자의 의견을 중시하고 대외적인 서비스를 강조한다. 모든 고객에게 매월 회보를 보내는가 하면 명절과 생일을 찾아 꽃다발을 보내기도 한다. 광고에서도 수정방의 특색은 잘 드러난다. 시내버스에 광고판을 붙이는 것은 제품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한다. 여타의 배갈 회사들이 텔레비전 광고에 광고비의 90% 이상을 쓰지만 수정방은 50%만 투입한다. 여기서 생기는 여유로 신문·잡지를 장악하거나 도로변에 광고탑을 세우는 것이다.

 

 차별화는 제품과 포장의 디자인에도 적용되었다. '상품(商品)은 디자인이다'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술병과 포장도 가장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하였다.

 

 자못 무모해 보이는 수정방의 전략은 시장에서 제대로 통했다. 경제발전으로 더욱 주머니가 두둑해진 중국의 애주가들은 남들과의 차별성을 위해서도 새로운 술, 더 기품 있는 술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정방은 대대적인 광고와 판촉 활동에 힘입으면서 중국의 최고급 식당과 연회석을 점령해 나갔다.

 

 자신감을 얻은 수정방은 해외에도 눈을 돌렸다. 뉴욕과 파리, 런던의 술자리에도 수정방을 올리겠다는 야심이었다. 이를 위해 2006년에는 윈저, 조니워커 등을 생산하는 영국의 대형 주류업체 디아지오(Diageo)와 손을 잡았다. 품질 검사와 관리, 마케팅의 선진적 기법을 디아지오에서 얻겠다는 계획이었다. 2008년 전흥주 보유의 수정방 지분을 49%까지 장악했던 디아지오는 올해 4%를 추가 매입해 최대 주주(53%)가 됐다. 이와 함께 수정방은 중국 고급 배갈 시장에서 마오타이, 우량예와의 다툼을 더욱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

 

 수정방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문물(文物)', '문화(文化)', '문명(文明)'이다. 다분히 고고학적 대발견을 상품 이미지로 돌리는 한편 너무 호사스럽고 값비싸다는 부정적 여론을 희석시킨다는 의도도 품고 있다. 수정방이 규정하고 있는 자신들의 고객 즉 ‘문화인’이란 우리 식으로 하면 엘리트 남성인데 중국어를 직역하면 '고급지식분자(高級知識分子)'가 된다. 이들은 35~55세 사이의 전통적 교양을 가진 남자들이며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높고 자기 현시욕이 있는 이들이다.

 

 이 엘리트들은 속이 차 있으며 태도가 신중하고 말이 적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음악을 들으며 신문을 보고 아침을 먹은 후에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사무실로 출근한다. 컴퓨터를 켜서 메일을 확인한 뒤 비서가 기사를 체크한 신문을 읽고 그날 처리해야 할 문건들을 살핀다. 오후가 되면 사무실을 떠나 만나볼 사람들을 만나고 저녁에는 뜻 맞는 친구나 업무 파트너를 만나 저녁을 같이 먹고 골프 약속을 한다. 이들이 곧 수정방의 고객이라고 규정하고 판촉의 모든 노력을 여기에 겨누는 것이다. 그래서 수정방이 배갈 애호가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수정방을 마실 자격이 있는가?

글: 최학 소설가·우송대 교수(jegang5@naver.com)

 

 

⑫ 중국의 10대 명주 서봉주(西鳳酒, 시펑주)

 서봉주(西鳳酒)의 중국 산시성 펑샹현의 장기숙성 증류주이자 특산품 중 하나로, 유래는 은상(殷商)시기부터 시작되어 2,600년의 역사를 지닌다. BC 139년 중요한 외교 예물로 서봉주가 사용되면서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 서부아시아로 넘어가기도 했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의 어주 및 당나라·송나라 당시 큰 인기를 얻은 술이다.

 

 화강주류에 따르면 서봉주는 농향형과 청향형이 복합적으로 어울린 봉향형 술에 속한다. 무색 투명에 부드러운 입맛과 향을 담고 있어, '여왕의 술'이란 별칭처럼 당현종(당나라 제6대 황제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762, 재위: 712~756 (44년간))의 총애를 받은 양귀비(楊貴妃, 719~756)와 닮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특히 서봉주는 싸리나무와 계란 흰자, 유채기름 등으로 밀봉한 옹기 주해(酒海)로 맛을 내는 특징을 가진다. 옹기로 숙성시켜 술의 잡내를 없앴다는 독특함을 가진다.

 

 서봉주의 최소 숙성기간은 3년부터 있으나 주력상품은 10·20·30년 숙성 제품이다. 33도부터 최대 65도까지3 다양하며, 30년 숙성에 45도, 500ml 기준 20만원 선이다.

 

 서봉주(西鳳酒)의 주원료는 수수와 샘물이며, 누룩은 보리와 완두로 만든다. 양조방법이 일반 백주와 다른데, 대형 숙성 용기인 주해(酒海)를 이용한다. 주해는 싸리나무 가지로 엮어 만들어 거대한 바구니처럼 생겼다.

 

 내부를 밀랍, 유채기름 등으로 발라서 서봉주의 풍미에 영향을 준다.

 연속 발효법을 사용해 11~14일 정도 발효시킨다. 서봉주의 생산주기는 1년이며 한 번 사용했던 발효지를 재사용하지 않고 새로운 발효지를 만들어서 사용한다. 3년 이상 저장한 후, 정성스럽게 뒤섞는 과정을 거쳐 제품화한다.

 

 서봉주(西鳳酒)는 전형적인 봉향형 대곡주로, 짙은 향기가 뛰어나며 깨끗하고 구수하다. 1952년 제1회 전국주류평가대회에서 금장을 받아 중국 명주가 되었고 이후 4번의 금장을 받았다. 2011년 중국 백주 브랜드 가치 6위다.

 

 시펑주(西鳳酒) 제조회사는 바오지 시(寶鷄市) 펑샹 현(鳳翔縣) 류린 진(柳林鎭)에 있는 '싼시시펑주공장 그룹(陝西西鳳酒廠集团有限公司)'이다. 이 회사의 전신은 1956년 중국 정부 지원으로 창립된 '국영 섬서성시펑주공장(國營陝西省西鵬酒廠)'이다. 현재 서북 지방에서 최대 규모의 명주 제조회사로서 2010년에 회사명을 개칭했다.

 

 이 그룹은 총 자산 40억 위안이며 직원은 약 4,000명이다. 산하에 무역·부동산·호텔·포장 분야 15개 자회사를 두고 있으며 중국의 백주 제조회사 3위권 진입에 노력하고 있다.

 시펑주의 알코올 도수는 33도부터 65도까지 지역별 선호도에 따라 다양하게 출시된다. 또한 여러 가지 시리즈의 다양한 라인업이 있고 모델 수도 상당히 많다. 중국 주류 도매상에서 제공하는 가격은 인민폐 140~900위안(한화 2만 3,000원~15만원)이다. 더 고가의 프리미엄 주류도 여러 개다.

 

 시펑주의 대표적인 시리즈에는 봉향경전(鳳香經典), 화산논검(華山論劍), 국화자(國花瓷), 진황어연(秦皇御宴) 등이 있다. 봉향(鳳香)을 느끼기에 제일 일반적인 술은 100~200위안 대 가격의 서봉주 6년산과 봉향경전(鳳香經典) 10년산(소매가격: 198위안(한화 약 3.3만원))이다. 봉향경전 10년은 면세점에서 구할 수 있다. 봉황경전 30년산은 888위안(한화 14.8만원), 50년산은 1.79만 위안(한화 298만원)에 거래된다.

 

 화산논검(華山論劍) 시리즈는 '사조영웅전(射鵰英雄傳· 1957년)'· '신조협려(神鵰俠侶· 1959년)'· '녹정기(鹿鼎記·1972년, 마지막 작품)' 등의 무협소설로 유명한 중국 무협소설의 지존 진융(金庸· 1924~2018) 선생이 화산에서 문학 활동을 했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탄생된 브랜드다. 8년산은 188위안(한화 3.1만원) 가격이 붙어있다.

 

바오지 시(寶鷄市) 펑샹현(鳳翔縣) 탐방

 바오지 시는 싼시(陝西)성의 지구급 시(베이징 등 직할시와 일반 현급 시 사이의 중형 행정구역.

 면적은 우리나라 면적의 10% 전후가 될 정도로 넓은 경우가 많다)로, 옛 이름은 진창(陳倉)· 옹성(雍城)이었으며,'염제(신화속 인물인 염제 신농(炎帝神農) 황제)의 고향', '청동기의 고장' 이라고 부른다.

 

 면적은 1.81만㎢, 상주인구는 현재 약 380만 명이었다. 시 관할 3개 구(區)와 9개 현(縣)을 두고 있다.

 시펑주가 탄생한 펑샹현은 예로부터 상서로운 봉황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으로, 염황(炎黃: 중화민족의 시조인 염제와 황제) 및 고대 주(周)나라· 진(秦)나라 문화의 발상지이자 술의 고향이라고 불린다.

 바오지 시에서 동북쪽으로 44㎞ 거리에 있으며, 관내에 12개 진(鎭)을 두고 있다. 면적은 1,179㎢, 인구는 약 53만 명이다. 옛 명칭은 '용(雍· 화할 옹)'이었으며 당 나라 때 펑샹(鳳翔)으로 개명했다. 싼시성이 최초로 공포한 성(省)급 역사문화 도시다.,

 펑샹의 역사는 유구하다. 선진(先秦)의 19명의 왕공이 이곳에서 294년간 도읍을 정했고 소동파(蘇東坡)가 펑샹현에서 첨서판관(簽書判官)의 벼슬을 한 곳이다.

 

※ 先秦: 중국사 시대 구분의 하나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여 진 제국(秦帝國)을 세운 BC 221년 이전의 시대로, 주로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를 지칭한다.

 천년 원림(園林) '둥후(東湖)'는 '시푸(서부· 西府: 당 나라때 펑샹 지칭)' 삼절(三絶: 세 가지 뛰어난 것)로 칭한다. 소동파의 명편(名篇) '희우정기(喜雨亭記)'에 '유림의 술과 동호의 버드나무는 모두 아낙네의 손으로 만든 것처럼 공교롭다(柳林酒 東湖柳 婦人手)'라고 자랑했는데, 유림주는 시펑주, 동호는 '둥후'를 말한다.

 

 펑샹(鳳翔)은 중국 민간 공예미술의 고장이자 '청동기의 고향', '시펑주의 고장'이란 명예를 가지고 있으며, 펑샹에서 만든 독창적인 흙인형(泥塑)으로 인해, '2018~2020년 중국 민간문화예술의 고장'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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