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宋나라의 영웅 岳飛(악비, Yue Fei. 1103~1141)

 

宋나라의 영웅 岳飛(악비, Yue Fei. 1103~1141)

 출생-사망: 1103~1141

 자: 붕거

 시대: 남송

 주요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

 

 남송 초기의 무장(武將)이자 학자이며 서예가.

 북송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으며, 남송 때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지만 무능한 고종(高宗, 남송 1대 황제, 1107~1187, 재위: 1127~1179)과 재상 진회(秦檜)에 의해 살해되었다.

 

 자는 붕거(鵬擧)이며 상주 탕음현의 가난한 농민 출신이지만 금()나라 군사의 침입으로 북송(北宋)이 멸망할 무렵 의용군에 참전하여 전공을 쌓았다. 북송이 망하고 남송 때가 되자 무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후베이[湖北] 일대를 영유하는 대군벌(大軍閥)이 되었다. 그의 군대는 악가군(岳家軍)이라는 정병(精兵)으로, 유광세(劉光世)· 한세충(韓世忠)· 장준(張俊) 등 군벌의 병력과 협력하여 금나라 군대의 침공을 화이허강[淮河], 친링[秦嶺] 선상(線上)에서 저지하는 전공을 올렸다. 당시 악비의 군대는 사기가 충천했고 금나라 군대는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갔다.

 

 하지만 당시 남송 조정에서는 재상인 진회(秦檜)가 금나라와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였으며 연일 승전보를 알려오는 악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주전파(主戰派)인 군벌과 이상파(理想派)의 관료들 사이에 분쟁이 지속되었고 1141년 금나라와 강화를 주장하였던 재상 진회(秦檜)는 군벌끼리의 불화를 틈타서 그들의 군대 지휘권을 박탈하고 중앙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조정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39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진회가 죽은 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1914년 이후에는 관우(關羽)와 함께 무묘(武廟)에 합사(合祀)되었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 '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악비(岳飛)는 송나라 남송(1127∼1279) 초기의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금나라(1115∼1234) 때 여진족 군대에 대항해 싸웠던 남송 초기의 장군이다. 학자로서도 뛰어났으며, 저서《악충무왕집(岳忠武王集)》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고,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았다가 뒤에 충무로 개정되었으며, 1204년 왕으로 추존되어 악왕(鄂王)이 되었다. 명나라 이후 한(漢)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중국의 어린이 날 한 초등학교에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초등학생이 쓴 "정충보국(精忠報國: 정성과 충성을 다바쳐 나라에 보답한다.)"이라는 네 글자를 보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 네 글자를 가슴에 새겨두고 되새겼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네 글자는 중국 남송 때의 명장인 악비(岳飛)의 고사로부터 나온 문구이다.

 시진핑은 악비의 고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고 이를 계속 되새긴 것일까요?

 

충신 악비(岳飛)의 시작

 악비(岳飛), 자는 붕거(鵬擧)이며, 중국 남송 초기의 무장(武將)이다.

 1103년 출생하여 1141년 사망하였고, 하남성의 농가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해 글읽기를 즐겼으며, 병서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타고난 장사로 십대에 3백 근의 활을 사용했으며, 활 솜씨 또한 백발백중이었다고 한다.

 유년 시절을 학문과 무예를 연마한 악비는 이후 군대에 들어갔다.

 이후 병졸생활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던 악비는 금나라군이 남하했을 시기에는 동경에서 군관을 지냈고, 이때부터 악비의 명성은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명장 악비(岳飛)

 악비의 명성은 다양한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동경에서 군관을 지내던 시기, 악비는 기병 백여 명과 함께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훈련을 하던 중, 갑자기 훨씬 많은 금나라군이 악비 앞에 나타났다. 병사들은 동요했지만, 악비는 적장의 목을 베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고 이 일로 악비의 용맹함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악비는 금나라의 침략을 막는 것을 자신의 천명(天命)으로 생각해 계속 맞서 싸웠고, 여러 차례 금나라군을 대패시켜 서른두 살에 ‘절도사’에 오르게 되었다.

 이런 악비의 승리는 단순히 악비의 무예가 뛰어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악비는 싸우기 전 장수들과 함께 작전을 의논해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았고, 결론이 난 후에야 싸움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악비는 전투에서 매번 승리했으며, 이에 금나라 군사들은 악비의 군대를 '악가군'이라 부르며 무서워하며, '태산을 무너뜨리기는 쉽지만, 악비의 군사를 물리치기는 쉽지 않다'는 말이 떠돌았다.

 또한 악비는 엄격한 규율로 백성에게 피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얼어 죽더라도 백성의 집 재목으로 불을 피우지 않으며, 굶어 죽어도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 않는다.'는 규율 아래, 행군 도중 마을을 지날 때도 백성의 집에서 숙영을 취하지 않았으며, 백성의 물건을 탐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군법으로 처리했다.

 악비는 이러한 악가군을 이끌고 금군의 침공을 회하(淮河), 친령(秦嶺), 선상(线上)에서 저지하고, 금에 점령당했던 영토를 일부 수복하는 성과를 올렸다.

 

악비(岳飛)의 죽음

 이렇게 훌륭한 명장이었던 악비는 왜 죽었을까? 전사(戰死)일까? 아니다. 악비는 반역으로 몰려 죽었다.

 당시 남송에는 화평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가 있었는데, 주화파의 우두머리는 재상 진회(秦檜)로 그 힘이 막강했다.

 화평을 주장하던 주화파의 입장에서 매번 승전보를 울리던 악비는 화평에 방해가 되는 인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진회는 금과의 밀약을 통해 악비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감찰어사인 만사설(萬俟卨)을 이용해 악비의 죄목을 날조하고, 신하들을 움직여 조정에 상소를 올려 악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이에 악비는 관직을 내놓았지만, 진회는 이에 멈추지 않고 악비를 모반(謀反)으로 몰아 죽이고 말았다.

 1141년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악비는 무고한 누명을 쓰고 양자 악운과 악가군의 최고 간부인 장헌과 함께 투옥된 뒤 살해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 악운의 나이는 23세였다. 그리고 북방의 영토를 포기하고 금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화의(和議)를 체결하였고, 이 화의를 굴욕으로 본 인사들에 의해 당대에 복권 여론이 조성되었다.

 1155년 진회가 죽고 난후 혐의가 풀리고 명예가 회복되었으며, 1178년 무목(武穆)의 시호를 받고, 구국(救國)의 영웅으로 1204년 악왕(鄂王)으로 추봉되어 항주의 서호 부근의 악왕묘(岳王廟)에 배향되었다. 뒤에 충무(忠武)의 시호가 가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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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비 드라마, 정충악비(精忠岳飞)

 악비는 중국에서 관우와 함께 충신이자 명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수 중 하나이다.

 그만큼 중국에서는 인기를 끌고 있는 장수인데, 2013년 이러한 악비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중국에서 제작되었다.

 청나라 시대 악비에 대해 그린 소설, '설악전전(設岳全傳)'을 각색해 만든 것으로 악비의 전 생애를 그렸다.

 악비의 치열했던 삶만큼 길지만 재미있는 이 드라마는 69부작으로 중화권 톱스타인 황효명과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던 가수 '유승준'이 금국 왕자 역으로 출연해 화제가 되었다. 실제로 그만큼 인기가 있어 한국에서도 방영되기도 했다.

 악비가 이순신 장군과 비교가 되는 건 아마도 그의 불우한 생과 구국의 영웅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악비가 올출을 대패시키다(岳家軍大敗兀朮)>

 악비는 상주 탕음(湯陰, 하남성 탕음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했으며 특히 병서를 좋아했다. 또한 힘이 유달리 강해 십대 때 이미 3백 근의 활을 사용했다. 무예가 출중한 주동(周同)에게 활쏘기를 배웠으며 백발백중의 명궁수가 되었다.

 이후 악비는 군대에 들어갔으며, 금나라군이 남하했을 때는 동경에서 군관을 지내고 있었다. 하루는 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황하 기슭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금나라군이 눈앞에 나타났다. 얼핏 보아도 적군의 수가 적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군사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악비는 침착하게 이렇게 말했다.

 "당황하지 마라. 적들은 우리보다 많지만 우리 병력이 얼마인지는 모른다.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을 쓰면 이길 수 있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돌진해 적장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이에 고무된 병사들도 그를 따라 용맹하게 돌격했고, 적들은 숱한 사상자만 내고 황급히 도망쳤다. 이 일로 인해 악비의 용맹이 널리 알려졌으며, 몇 년 후에는 종택(宗澤, 1059~1128)의 수하 장군이 되었다. 악비도 종택과 마찬가지로 금나라의 침략에 대항하는 일을 자신의 직책으로 여겼다. 종택이 죽은 후에는 건강 부근에서 금나라군과 싸웠으며, 금 태조(金太祖)의 아들 올출(兀朮)이 북으로 퇴각할 때는 한세충(忠, 1189~1151)과 함께 금나라군을 여러 번 크게 무찔렀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금나라군을 대패시키는 큰 공을 세워 서른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절도사가 되었고, 그 이름을 당시의 명장인 한세충, 유광세(劉光世), 장준(張俊) 등과 나란히 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그는 천고(千古)에 전해질 사() 「만강홍(滿江紅)」을 써서 금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야 말겠다는 웅대한 기상을 표현했다. 악비는 규율이 엄격했는데, 한번은 병사 하나가 백성의 삼 껍질 한 묶음을 가져다가 나뭇단을 묶는 것을 보고 그 병사를 군법에 의해 처단했다. 악비의 군대는 행군 도중 마을을 지날 때도 백성의 집에 들어 숙영을 하지 않고 길가에서 노숙했다. 백성들이 집으로 끌다시피 청해도 누구 하나 집에 들어가는 병사가 없었다. '얼어 죽더라도 백성의 집 재목을 뜯어 불을 피우지 않으며, 굶어 죽더라도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악비군의 규율이었다.

 

 악비는 싸우기 전에 항상 장수들을 모아놓고 작전을 의논하곤 했으며 그런 다음에야 결단을 내리고 싸움을 시작했다. 때문에 싸움에서 매번 이겼으며, 금나라군은 모두들 악비 군대를 무서워했다. 그들 사이에서 '태산을 무너뜨리기는 쉬워도 악비의 군사를 무너뜨리기는 힘들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1140년 10월, 금나라는 또다시 화의 협정을 어기고 전국의 정예부대를 총동원하여 송나라를 네 갈래로 공격해 왔다. 총대장은 올출(兀朮)이었다.

 

 악비는 부장 왕귀(王貴), 우고(牛皐), 양재흥(楊再興)으로 하여금 각자 군사들을 통솔하여 적군의 남진을 막게 하는 한편, 하북 의병 대장 양흥(梁興)에게 사람을 보내어 하동과 하북의 의병들로 하여금 적군의 후방을 기습하게 했다. 그리고 악비는 언성(郾城)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며칠 후에 세 부장이 이끄는 군대들은 모두 승전보를 올리고 차례로 영창(潁昌, 하남성 허창시 동쪽), 진주(陳州, 하남성 회양시), 정주(鄭州)를 수복했다. 승승장구로 전진하던 악비의 군대는 동경에서 45리쯤 떨어진 주선진(朱仙鎭)까지 밀고 들어갔다. 악비의 군대가 주선진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접한 하북의 의병들은 모두들 기뻐하며 황하를 건너 악비의 군대에 합류했다. 백성들은 수레로 식량들을 운반해 왔으며, 어떤 사람은 향로를 이고 와 춤을 추며 악비의 군대를 환영했다.

 

 

 

岳廟(악묘)

 金나라와 맞서 싸운 宋나라의 영웅 岳飛(악비, 1103~1142)의 墓(묘)가 있는 곳. 

 북송이 멸망할 무렵 금나라에 항거하기 위해 조직된 의용군에 가담하여 큰 활약을 한 공로로 장군이 되었다가 그 후 남송 때에 '악가군(岳家軍)'이라는 군대를 이끌고 많은 무공을 세웠던 명장이다.

 당시 금나라 군사들은 악비가 이끄는 군대의 깃발만 보고 후퇴할 정도로 악비를 매우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후 악비는 금나라와의 화평론을 주장하는 진회(秦檜), 장준(張俊)에 의해 무고한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이 악비묘는 남송 가정(嘉靖) 14년(공원 1221년)에 처음 건축되었다. 악묘의 대문을 지나면 악비의 동상이 있는 충렬사가 있고 '심소천일(心昭天日: 마음이 하늘의 해처럼 밝다.)'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대전으로 들어가면 높이 4.5m에 달하는 악비의 채색 동상이 보인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어 입고 긴 칼을 차고 앉아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기골이 장대하고 헌걸찬 영웅의 모습이다.

 

 

 동상 위 편에는 악비가 썼다고 하는 '환아하산(還我河山: 나의 강산을 돌려달라.)'이라는 금색 글귀가 있다. 이 글에는 잃어버린 우리 강산을 되찾아오겠다는 악비의 굳은 의지가 담겨 있다. 동상의 좌우에는 '벽혈단심(碧血丹心: 푸른 피에 붉은 마음)', '정충보국(精忠報國: 정성과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한다)', '충의상소(忠義相昭)', '호기장존(浩氣長存)'이라고 쓴 글귀들이 보인다. 이러한 글귀를 통해 악비가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당 안에는 악비의 생애를 벽화로 그려 놓은 것이 있다. 그 중에서 악비의 노모가 출전을 앞둔 악비에게 무공을 세우고 돌아오라는 뜻으로 악비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는 벽화가 인상적이다.

 

 송나라 고종은 악비가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많은 무공을 세운 것을 치하하기 위해 '정충악비(精忠岳飛)' 네 글자를 직접 써서 깃발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악비는 나라와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고 잃어버린 국토를 다시 찾겠다는 의지를 담아 자신의 등에 '정충보국(精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묘도에는 문무용(文武俑), 석마(石馬), 석호(石虎), 석양(石羊) 등이 늘어서 있고 중앙에 악비묘가 자리잡고 있었다.

 

 중앙에 '송악악왕묘(宋岳卾王墓)'라고 쓰여 있는 곳이 악비묘이고, 오른쪽에 '송계충후악운묘(宋繼忠侯岳云墓)'라고 쓰여 있는 곳은 악운(岳云)의 묘이다. 악운은 악비의 아들이다. 무덤의 규모는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편이다.

 

 악비의 무덤 앞에는 악비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죽게 한 진회(秦檜), 진회의 부인 왕씨, 만준설(萬俊卨), 장준(張俊) 네 사람이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동상이 있다.

 이곳에 오는 중국인들은 민족적 영웅 악비(岳飛)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들 간신배들에게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기도 한다. 그래서 철 창살에 갇혀 있는 동상 위에는 침을 뱉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조선시대 김인후(厚, 1510~1560)는 <송사(宋史)>를 읽다가 진회(秦檜)가 악비(岳飛)를 죽인 대목을 보고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른 시대의 충신과 소인이 어찌 나에게 관계되랴만, 자연히 서로 느껴 부질없이 슬피 읊조리네"라는 시를 짓고는 속이 상해서 실컷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중국 내에서는 이렇게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악비와 악비를 죽게 한 진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송나라 때 오랑캐이자 야만족으로 여겨온 금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울 것을 주창한 악비보다는 금나라와의 화해를 주창했던 진회의 외교정책이 타민족을 대거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 프로젝트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같은 민족끼리 내분을 조장한 악비는 더 이상 중국의 영웅이 될 수 없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간신(奸臣) 진회(秦檜, 1090~1155)

 진회(秦檜, 1090~1155)는 남송의 재상으로 자는 회지(會之)이며 현재의 난징강녕(江寧) 출신이다.

 

 금나라와의 외교 정책에 있어 화평(和平)을 진행하고, 강화를 주창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주전파인 악비와 한세충(韓世忠, 1089~1151) 같은 군벌을 탄압하고, 그 후도 스스로의 권력 유지를 위해 공포 정치를 동반했기 때문에, 후세에 매국노, 즉 한간(漢奸:중국에서 외국 침략자와 내통하거나 부역, 협력한 사람을 이르는 말)으로 지탄받았다.

 

 1115년 과거에 합격하고 순조롭게 출세했다. 1127년 정강의 변(靖康之變, 靖康年間, 1126∼1127)이 발생하고 진회와 많은 신하들이 포로 신분으로 같이 끌려가게 된다.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1126년 송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 패하여, 중국 사상 정치적 중심지였던 화북을 잃어버리고, 황제 휘종(徽宗, 1082~1135, 재위: 1100~1125)과 흠종(欽宗, 1100~1161, 재위: 1126~1127)이 금나라에 사로잡힌 사건을 말한다. 정강(靖康)은 당시 북송의 연호이다.)

 

 정강의 변으로 화북지역을 점령한 금나라는 화북 통치를 위해 꼭두각시 국가인 초나라를 세울려고 했지만, 진회는 이것을 맹렬히 반대를 했기 때문에 금나라 수뇌부에 의해 북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금나라의 중신이 달려와 밀약을 맺고, 남송의 주전론을 억누르고 화친을 결정했다고 소문을 흘린 후에 풀려났다.

 

 1130년, 진회는 금나라를 탈출해 가까스로 남송의 황제 고종에게 도착했다. 고종은 진회가 돌아온 것을 보고, 상당히 즐거워하며, 당일로 예부상서에 임명하고, 다음해에는 재상에 임명한다. 그 후 일시적으로 재상에서 파면되기도 하지만 곧바로 복귀하고 금나라와의 화평교섭 추진에 노력을 다했다.

 

 정강의 변에 끌려갔던 진회 자신도 힘을 갖추지 못한 대책없는 주전론에 의한 피해자였으며, 악비를 비롯한 강경파 주전론자를 극도로 경계하였다.

 

 당시는 금과의 교전에서 공을 세운 악비 등의 군벌 세력이 대두하고 있었고, 주화파의 진회를 비판했다. 이에 진회는 군벌 간의 알력을 이용하여, 군벌의 힘을 견제하고, 그 군대를 중앙군에 편입하여 주전파들을 숙청하였다.

 

 1141년, 화친을 반대하고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를 탄압하고 관직으로부터 추방하였다. 특히 당시의 구국의 영웅이라고 일컬어 졌던 악비를 반역죄로 몰아 처형했다. 그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일이 있을 것이오"(其事體莫須有)라는 말로 처형의 이유를 한세충에게 설명했다. 이것이 후에 그 평가를 현저하게 낮추는 이유가 된다.

 

 주전파(主戰派)를 억눌렀던 진회는 다음 해 1142년에 드디어 금과의 화친을 추진시킨다. 그러나, 이 화친은 양국의 역관계를 반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화친조약으로 황하 강 이북의 땅을 금나라에게 양보했을뿐만 아닌 매년 25만냥의 은과 25만필의 비단을 조공바쳐야했고, 남송의 황제가 금의 황제한테 '신하의 예'를 취한다는 것이 화친조약의 주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그 후에 진회는 매국노, 즉 한간(漢奸)으로 지탄받았고, 그 후에도 진회에 대한 비난은 그치지 않았지만, 남송의 재상이었던 진회는 그러한 반대파에 대해서는 철저한 탄압을 하는 공포 정치를 펼쳐 반대파에 대한 강경 탄압을 한다.

 

 1155년, 재상에 있은 지 20년 만에 66세로 사망했다. 사망하자 신왕(申王)으로 추증하였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1206년, 남송(南宋) 영종(寧宗) 개희(開喜)2년 4월에 왕작(王爵)이 추탈되어 시호를 유추(謬醜), 그 뒤인 1254년, 남송 이종(理宗) 보우(寶祐) 2년 2월에 시호를 유한(謬狠)으로 고쳤다.

 그리고 그 후손이 진대사, 진승은이라고 한다.

 

 

* 진회(秦檜)의 평가

 진회는 사후, 매국노라는 오명을 뒤집어 썼다. 당시의 상황에서 군사력이 약한 남송의 현실적인 처세였다는 판단에도 불구하고, 악비를 숙청하여 처형시킨 행위가 후세에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진회 자신도 악비를 죽인 것에 대하여는 상당히 번민하였지만 아내의 재촉을 받고 죽일 것을 결의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악비를 죽인 진회 부부는 아직도 악왕묘에 포박된 채로 꿇어 앉아서 전시되고 있다. 옛날 중국에는 이 상에 침을 뱉거나 차는 습관이 있었으나, 지금은 침을 뱉거나 차서는 안 된다는 안내가 붙어 있다.

 

 남송이 망한 이후에도 악비가 영웅시되었으며, 그에 반해 진회의 악명은 점점 높아져 매국노의 대명사로서 다루어졌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쓰지 않는다.

 

 일설에 따르면 유탸오가 진회에 불만을 가진 민중이 밀가루 반죽으로 진회의 모습을 만들어 튀겨 먹었던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 중국에서 외부 민족의 역사를 끌어안아 중국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는 역사공정 작업이 활발해 짐에 따라, 송을 정복한 금나라 역시 중국 역사의 일부로 인정되면서, 지금까지의 평가와는 반대로 대항자 악비가 절하되고, 진회는 유연한 외교로 국가를 대환란에서 구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일반 시민들의 평가는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으며, 악왕묘 역시 그대로 유지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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