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막의 오아시스 타운, 고대 유적도시 팔미라(Palmyra)

 

 팔미라(Palmyra)는 시리아 사막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던 번성했던 오아시스 타운 중의 하나였다. 실크로드 위에 위치하고 있는 역사적인 도시로 비할데 없는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시리아를 방문한 이들이 다마스커스와 함께 반드시 들르는 시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로 손꼽힌다. 로마황제 아우렐리우스의 명령하에 파괴되기 전까지 로마와 극동지역을 연결하는 교두보 역활을 하는 교역의 중심지였다. 지금 이곳에서 방문객은 과거 전성기때의 모습을 그대로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유적들을 보며 그 모습을 짐작해 볼 수 있다.

 

 18세기에 들어와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여라 나라의 발굴작업으로 팔미라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묻혀져있던 유적에서 발견된 조각술, 특히 공예품의 수준이 놀랍다.

 

 도시의 기본 구조 자체가 로마식으로 정교하게 계획된 모습이다. 길게 뻗은 주로(主路)와 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도로를 통해 바둑판처럼 구획을 나누는 방식이다. 교차로에는 탑문을 세우고, 길 양쪽으로 신전, 극장, 아고라, 공중목욕탕, 왕궁, 법원 등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했다. 팔미라의 입구 역할을 하는 아치형 석조문을 통과하면, 1㎞가 넘는 대로가 나타난다. 길 양쪽에는 높이 9.5m의 원기둥들이 늘어서 있다.

 건축물 중에는 거대한 벨(Bel) 신전과 극장만이 원형을 보존하고 있을 뿐 나머지는 모두 파손되어 터만 남아 있다. 도시 서쪽 외곽에는 무덤의 계곡이 펼쳐져 있다. 탑묘, 가형묘, 지하 분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을 볼 수 있다.

 

 팔미라(Palmyra)는 지금의 시리아 힘스 주에 있었다. 팔미라라는 이름은 셈어가 사용되기 이전의 이름인 타드무르, 타드모르, 투드무르의 그리스어·라틴어 형태이다. 129년경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방문한 후 자유시(civitas libera)가 되었다.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식민도시(colonia)의 지위를 얻어 세금이 면제된 후 3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227년 이란과 메소포타미아 남부 지역에 파르티아인들을 몰아내고 사산 왕조가 들어서자 곧 팔미라의 교역로인 페르시아 만으로 가는 길이 폐쇄되었다. 270년 팔미라 군대가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하자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272년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때 아나톨리아와 팔미라는 다시 로마에 종속되었다. 그후 계속 다마스쿠스와 유프라테스를 잇는 포장 도로였던 스트라타디오클레시아나의 주요 연결지 역할을 하던 팔미라는 634년 초대 이슬람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632~634 재위)의 명을 받은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에게 정복되었다.

 

 팔미라의 언어는 아람어였으며 동방과 서방 사이에 있는 도시의 위치를 반영하듯 문서체와 메소포타이마 흘림체 등 2개의 문자 체계가 있었다. 팔미라 관세표로 알려진 2개의 언어로 쓴 큰 서판과 위대한 대상 지도자들의 조상 밑에 새겨진 명판을 통해 대상의 조직과 팔미라 교역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팔미라인들은 페르시아 만을 거쳐 인도와 교역했으며 나일 강의 콥토스, 로마, 시리아의 도우라에우로푸스 같은 도시들과도 거래했다.

 

 팔미라의 아람족이 섬기는 주요신은 별들의 운행을 주관하는 볼(바알 신인 듯함)이었으나 곧 역시 별의 운행과 관련이 있는 바빌로니아의 벨 마르두크 신과 동일시됨으로써 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팔미라인들은 주신 벨과 태양신 야르히볼 및 달의 신 아글리볼을 관련지어 생각했다. 그외에도 '하늘신'이며 하다드와 거의 같은 페니키아의 바알 샤멘을 중심으로 한 세 신들이 신봉되었다. 2세기에 이르러서야 '그 이름이 영원히 축복을 받을 자비롭고 선하신' 이름 없는 신에 대한 숭배와 함께 일신론적 경향이 나타났다.

 

 팔미라 유적들을 보면 고대 도시의 도로망 계획이 명확히 드러난다. 동서로 뻗은 중심가에는 거대한 진입로 시설과 함께 분수·조각·꽃밭 등이 설치된 3개의 공원이 있으며 남쪽에는 광장·원로원·극장이 있다. 다른 유적으로는 '디오클레시아누스의 진지'라고 하는 거대한 복합 건물과 벨·야르히볼·아글리볼을 모신 팔미라인들의 성소가 있다. 건축의 경우에는 거의 모든 유물에서 코린트식 건축 양식을 볼 수 있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이란의 영향도 분명히 발견된다.

 

 고대 팔미라 유적지에 세워져 있는 지금의 타드무르 시는 시리아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 교차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란의 키르쿠크와 레바논의 트리폴리를 잇는 송유관이 지난다. 팔미라 유적지는 1980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벨 사원(Temple of Bel)>

 팔미라 유적지 동쪽 끝에 자리잡고 있는 사원으로 거대한 아치와 기둥들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남아있는 사원의 벽면에서는 당시의 정교한 조각술을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 새겨져 있다. 200㎡ 규모의 커다란 정원부지를 포함하고 있다.

 기원 후 1세기 경 여신 '알 라트'의 사자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자상이 벨 사원 입구를 장식하고 있다.

 

 벨 신전(Temple of Bel)은 시리아의 고대도시 팔미라(Palmyra)에 있는 사원이다. 셈족(Semitic People)의 신전으로 32년경 지어졌다. 셈족은 고대 바빌로니아 종교의 최고 신인 벨 마르둑(Bel Marduk)을 중심으로 태양의 신인 야르히볼(Yarhibol)과 달의 신 아그리볼(Aglibol)을 삼위 신으로 모셨다. 비잔틴 제국 시대에는 기독교 교회로 사용되었다가 12세기 무렵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1980년에는 벨 신전을 포함한 팔미라의 고대 유적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벨 신전은 고대 중동의 건축술과 고대 그리스-로마 양식(Greco-Roman Architecture)이 잘 드러난 건물이다. 신전은 석조 건물로 동서 30m, 남북 5m 정도 크기의 직사각형 모양 건물이다. 사방에는 약 200m 길이의 장벽이 둘러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요새와 유사한 형태다. 장벽 안에는 정원이 있었으며 벽을 따라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이 정원과 신전을 둘러싸고 있었다. 신전은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있었으며, 신전 건물 앞 정원의 중앙에는 재단인 셀라(Cella)가 위치했다. 또한, 성직자가 식 전에 몸을 깨끗이 할 수 있는 물웅덩이인 풀(Pool)도 있었다. 신전 주위에는 장벽 안쪽과 마찬가지로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이 늘어져 있었다. 서쪽을 통해서 들어가는 입구에는 세 개의 개선문(Monumental Gateway)이 있는데, 1132년경 아랍 무슬림들이 벨 신전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2015년 8월 IS(이슬람국가)에 의해 벨 신전이 파괴되었다. IS는 폭파를 위해 약 30톤 분량의 폭약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장벽을 제외한 중앙의 신전과 주위의 기둥들이 모두 파괴되어 흔적만 남았다. IS는 2015년 5월 팔미라를 정복한 이후 팔미라 사자상(Lion of Palmyra) 등 여러 유적을 훼손했으며, 벨 신전을 파괴하기 며칠 전에는 팔미라의 바알샤민 신전(Temple of Baalshamin)을 폭파했다.

 

 

<바알샤민 신전(Baalshamin Sanctuary, 일신전( 神殿))>

 서기 17년 시리아의 고대도시 팔미라에 지어진 신전으로,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폭풍과 강우를 지배하는 여신 바알샤민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바알샤민은 '하늘의 주님'이란 뜻으로 이스라엘이나 아랍의 유일신 호칭과 같은 뜻이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통치 시절인 130년에 규모를 키웠으며 그 후 2세기, 3세기 때에 계속 보수하였으며 그 위에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여 지금의 형태로 남아 있다.

palmila-Baalshamin Sanctuary.jpg

 

 팔미라에는 신을 경배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향과 향수를 바른 제물을 바치는 많은 제단이 있다.

 1954~1956년에 제단의 뒤에서 발견된 베베 야디벨(Bebe Yadi’bel) 가족의 무덤은 원래의 장소에 그냥 있지만 많은 동상은 현재 도심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명각과 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실마리, 매우 잘 만들어진 건축상의 경향 등이 보이는 수백의 유물들도 박물관에 소장, 전시된다.

 

 바알샤민 신은 폭풍의 신이지만 다산과 풍년을 관장하던 신이다. 사막이 가뭄을 견뎌낼 수 있도록 식물과 자비로운 평야의 계절로 바뀌면 수확에 도움이 되는 비를 내리고 유목민에게는 목초지를 제공하는 신이다. BC 800년경에 하마(Hama)의 왕 자키르(Zakir)가 가장 좋아했던 바알샤민에 대하여 특별한 문헌을 기술하였다. 그 후 바이블로스(Byblos) 왕이 문헌 본문에 바알샤민의 초상화를 그리고 명각했다.

 팔미라에서는 두 개의 언어로 표현되어 있는데 팔미라어로는 '위대하고 자비로운 바알샤민', 그리스어로는 '기도를 들어주고 부여하는 가장 높은 제우스'이다.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그러나 2011년부터 계속된 시리아 내전으로 상당수 유적이 손상된 데다가 2015년 5월부터 IS(이슬람국가)의 점령하에 놓임으로써, 그해 7월 IS에 의해 파괴되었다. 

 

 

<팔미라의 기념문 테트라필론(Tétrapylon)>

 팔미라의 기념문 테트라필론(Tétrapylon)은 바알샤민 사원에 있다. 사원 유적 중에서 가장 잘 보전되어 있으며 2세기 초에 세워졌다. 4개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고 기념상을 받친 초석의 콘솔(Consoles)과 함께 아직까지 본래 형태가 손상되지 않고 보전되어 있다.

 콘솔에는 팔미라시대와 그리스시대 당시 도시의 지배자를 찬양하는 내용의 명각이있다. 

 

 

 

◈ "뜨거운 모래사막 한가운데 땅 속에서 솟아오른 듯한 환상적인 도시 팔미라(Palmyra)."

 이것은 영국의 여성추리작가 아가사 크리스티가 팔미라를 방문한 후, 그곳에 매료되어 묘사한 구절이다. 시리아의 동부 사막지대 한복판에 세웠던 로마시대의 대도시 팔미라는 흔히 사막의 궁전이라고 불리며,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경이에 찬 감동과 찬탄으로 채워준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를 출발한 자동차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사막 길을 달린다. 사막에 만든 도로는 폭이 좁고, 노후했지만 다행히 교통량이 많지 않아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질주한다.

 

 다마스쿠스를 출발하여 약 240㎞쯤 달렸을 때 사막의 단색풍경에 익숙해진 눈에 갑자기 녹색의 울창한 야자수 숲이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신기루가 아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에 도달한 것이다.

 

 팔미라가 있는 곳은 유프라테스강과 다마스쿠스 사이의 광대한 사막지대 안에 있는 오아시스 지역이다. 오늘도 이곳의 에프카(Efqa)샘에서는 수량이 풍부한 맑은 물이 바위틈 사이에서 솟아나 일대를 풍요롭게 적셔주고 있다. 이곳은 높이가 10m 이상 되는 종려야자와 대추야자 나무들이 큰 숲을 이뤄 주변의 사막과 대조가 되는 녹색의 이색지대다. 팔미라의 야자수는 고대부터 유명했다. 원래 이곳은 이름도 타드몰(Tadmor·구약의 다드모)이었다. 고대 셈족어로 야자수라는 뜻이다. 오아시스 도시로 발달한 팔미라는 예로부터 사막을 왕래하며 장사하던 카라반(caravan)들이 피곤한 몸을 쉬고 물을 공급받던 사막의 경유지였고, 동과 서를 잇는 교역도시였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은 한때 이곳까지 영향력을 확장한 때도 있었다(구약 역대하 8장). 그러나 대부분 역사에서 팔미라는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위상을 유지했다. 또 이곳을 지나는 대상들에게 세금을 거둬들였고, 사막의 교역로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대가로 통과세를 받기도 했다. 팔미라의 주민 중에는 국제 교역에 능력을 발휘하는 거상들도 생겨났다. 그 결과 팔미라는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팔미라의 전성기는 희랍과 로마시대였다. 그 때 도시의 이름도 본래의 타드몰에서 팔미라로 바뀌었고, 독자적인 군대를 가진 강력한 도시 국가로 발전했다.

 

 로마제국시대에도 팔미라는 대체로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오늘날 이곳에 남아있는 유적들의 대부분은 1∼3세기 로마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서기 260년대 팔미라에는 오데나투스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유능해 팔미라의 마지막 융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그는 의문의 암살을 당한다. 역사가들은 왕의 암살 배후에 음모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음모의 주모자로 왕비 제노비아(Zenobia)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낸다. 제노비아는 야심만만한 여자였다.

 

 스스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후손이라고 주장(역사가들은 이를 근거가 없는 것으로 일축한다)한 제노비아는 투구를 쓰고 말을 달리는 것이 취미였다. 그는 당당한 배포에 미모까지 갖춘 여걸이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동전에 주조된 그의 모습은 상당한 미모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왕이 죽자 왕위에 오를 왕자가 미성년이라는 것을 구실로 모든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제노비아의 지나친 야심은 자신과 팔미라의 몰락을 가져오는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서기 272년 제노비아는 아들에게 황제의 칭호를 수여하고 황제의 어머니로 자처했다. 로마의 황제가 이를 묵과할 리 없었다. 아우렐리안 황제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팔미라로 진군해 성을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극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팔미라를 빠져 나왔으나 유프라테스강을 건너려는 순간 로마 기병대에 붙잡히고 말았다. 제노비아는 황금사슬에 묶여 로마로 호송되었고 이로써 팔미라의 영광은 영원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더욱이 11세기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팔미라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후 사막에 몰아치는 모래바람은 팔미라의 유적을 모조리 모래 더미 속에 파묻어 버리고 말았다.

 

 오랜 망각의 시간이 지난 후 1930년대에 와서 팔미라의 발굴과 복원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약 16만평에 달하는 넓은 면적에 엄청난 유적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어 아직도 그 작업의 완결은 요원해 보인다. 팔미라에서 발굴한 유적은 전형적인 로마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내면적으로는 팔미라의 고유한 문명과 로마의 건축문명이 만나서 이룩한 독특한 문명이다. 사막의 도시 팔미라는 동양과 서양 두 문명이 만나 새로운 문명을 잉태한 문명의 산실이었다.

 

<3,400년전 고도 문명 꽃피운 도성>

 1928년 봄 시리아 해안 지역의 작은 마을에서 한 여인이 밭을 경작하다가 땅 속에 묻혀 있던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석판을 들어올리자 놀랍게도 그 밑에는 부장품이 가득한 고대의 묘실이 드러났다.

 이 소식은 그 지역을 관할하던 관리를 통해 불란서 파리까지 알려졌다. 당시 시리아는 불란서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었다. 묘실에서 발견된 부장품을 조사한 불란서 고고학자들은 크게 놀랐다. 적어도 3000년은 된 고대 유물이기 때문이었다.

 

 곧 고고학자 클로드 세페르(Claude Schaeffer)를 발굴단장으로 하는 고고학 팀이 그곳으로 파송됐다. 20세기 성서고고학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되는 우가리트(Ugarit)의 발굴은 이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고고학자로서 세페르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묘실의 발굴은 고대 공동묘지 발굴로 이어졌고, 이것은 다시 고대 문명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우가리트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는 평생을 우가리트 발굴에 바쳐 3000년 이상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우가리트 문명을 세상에 알려 준 공헌자로서 고고학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

 

 우가리트의 위치는 오늘날 시리아의 최대 항구도시 라타키아(Latakia)로부터 북쪽으로 10여㎞ 떨어진 해안 지역이었다. 봄, 여름이면 노란색 샤므라 꽃이 뒤덮어 오늘날은 라스 샤므라(Ras Shamra·샤므라 꽃이 피는 갑)이라고 불린다.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바닷가 언덕 위에 있는 우가리트는 신석기시대까지 소급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성이다. 그러나 이곳이 도시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2000년경이었다. 우가리트의 번영을 가져다 준 것은 지중해의 섬 키프로스(성경의 구브로)와 한 교역이었다. 키프로스 섬은 고대부터 구리 생산으로 유명했다. 우가리트는 그곳에서 구리를 수입해 구리가 귀한 지역에 팔았다. 이러한 국제 교역은 우가리트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어 서기전 14∼13세기에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우가리트의 발굴자 세페르의 최대 업적은 궁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왕실문서를 보관했던 방을 찾아 낸 것이다. 그 방에서는 수천 점에 달하는 토판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가리트에서 발굴된 토판 문서들은 이스라엘의 사해 근처에서 발굴된 사해사본과 함께 금세기의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손꼽힌다.

 여기서 잠시 고대 시대의 문자 기록에 관해 살펴보자. 고대 근동지역에서 최초로 문자를 사용한 것은 서기전 3000년대 후반이었다. 오늘날 이라크 남부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수메르(Sumer) 문명이 일어났고, 그곳에서 가장 먼저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문자는 그림 형태인 상형문자였다. 그러나 곧 쐐기 모양의 글씨체인 쐐기문자(설형문자·cuneiform)로 발전되었다. 설형문자는 고대 근동지역 전역에 널리 확산되어 사용되었다.

 

 문자의 사용은 곧 토판문서를 만들어 냈다. 토판문서란 진흙을 물에 개어 책정도 크기의 진흙판을 만들고, 그것이 굳기 전에 대나무 같은 도구를 사용해서 글씨를 눌러 쓴 것이다. 이것을 햇볕에 말리거나 뜨거운 불에 구워 내면, 돌같이 단단해져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다. 고대 근동지역의 왕실 문서 보관소 기록들은 대부분 이러한 토판문서다. 우가리트궁전에서도 이러한 토판문서들이 대량으로 출토됐다.쐐기문자 형태로 기록된 우가리트의 토판문서들을 연구한 고대 언어학자들은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는, 우가리트에서 사용된 언어는 그 지역에서만 사용된 독특한 것이었다. 학자들은 이것을 우가리트어(Ugaritic)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언어는 구약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와 동일한 셈족어로 두 언어는 언어학적으로 대단히 가까운 관계다. 히브리어와 언어적 유사성 때문에 우가리트어는 오늘날 히브리어연구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구약학자들에게 우가리트어는 필수적으로 공부해야 할 언어다.

 

 둘째로, 우가리트 토판문서는 쐐기 문자를 사용한 최초의 알파벳(alphabet) 기록이다.

 

 우가리트 사람들은 모두 30개에 달하는 자음과 모음을 고안, 이를 사용해 엄청나게 많은 기록을 남겼다. 이것은 문화사적으로 획기적인 일이다.

 이들 토판문서의 기록은 서기전 1000년대 후반 그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특히 종교 연구에 더없이 귀중한 자료다.

 

 지금부터 3400년전,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던 우가리트는 서기전 12세기 경 계속된 가뭄과 지진, 그리고 외적의 침입으로 몰락했다. 그후 오랫동안 동면의 세월을 지나 세페르의 발굴에 의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Zenobia)'- (출생-사망: 미상~274년 추정. 재위기간: 267년~273년)

 제노비아(Zenobia)도 클레오파트라 7세 못지 않은 동방의 아프리카 대륙의 여왕이다. 제노비아가 동방의 여왕이긴 했지만 순수 아프리카인은 아니었다.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집시이고 어머니는 이집트 사람으로 청갈색 피부와 새까만 눈동자가 매력적인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미모 뿐만 아니라 낙타를 모는 기술도 뛰어나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대신해 집시 부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팔미라는 당시 교역 중간지로서 엄청난 부를 가지고 세계적으로 융성한 도시였는데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다. 이 팔미라에서 당시 팔미라의 자유를 꿈꾸는 독립투사들이 있었는데 로마 시민권자로 팔미라를 통치하고 있던 오데나투스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사막에서 능숙하게 낙타를 모는 사람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보는 그 사름은 바로 제노비아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의 페르시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도움이 되고 팔미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제노비아는 이 오데나투스의 후처로 알려져 있는데 오데나투스의 전처와 자식들을 그녀가 모살(謀殺)했다는 설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마케도니아계 이집트 왕가의 혈통이라고 칭했고 평소에 클레오파트라 7세를 존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7세보다 훨씬 뛰어난 자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오데나투스가 거둔 많은 승리는 바로 제노비아의 지략과 스스로가 장수가 되어 싸우는 그 무용(武勇)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267년 결혼 9년째, 그녀가 27세가 되었을 때 오데나투스가 암살 당한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은 제노비아를 의심한다. 그녀의 정치적 야망과 능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남편이 죽은 후 그는 어린 아들 바발라투스를 섭정한다는 명분으로 사실상 팔미라를 통치한다. 그리고 269년에는 로마 제국의 곡창 지대로서 황제 속주이기도 했던 이집트를 점령해 버린다. 사태가 이쯤되면 로마 황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녀는 어느새 로마 제국 동방 지역을 점령해서 팔레스타인, 레바논, 소아시아까지 세력을 떨친다. 급기야는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아우구스트를 아들에게 수여하고 자신은 황후격인 아우구스타라고 부르도록 한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270년에 즉위하면서 제노비아의 불행이 시작된다. 지휘력에서는 차이가 없었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강국 로마의 황제라는 점에서 그녀보다 우세했고, 그가 토벌 친정군(討伐親征軍)과 함께 진격하자 팔미라가 지배하던 속주들은 로마 황제에게 신하로 따르겠다고 맹세했다.

 패색이 짙어지면 지배자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하게 마련이지만 제노비아는 달랐다. 그녀는 신속하게 군대를 움직여 아우렐리아누스를 맞아 싸웠다. 제노비아는 스스로 진두에 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고 한번은 로마군에게 승리하기도 했다.

 로마군은 인마에 시와 에메사 시 전투에서 승리하여 제노비아를 팔미라에서 쫓아냈다. 그녀의 유일한 실책은, 남편 오데나투스는 로마의 동맹자였지만 그녀는 로마에 맞섰다는 것이었다. 로마 제국은 아직 강적을 멸망시킬 힘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팔미라는 방어전에 임했지만 로마군은 병력을 증강해 도시를 이중 삼중으로 포위했다. 제노비아는 사막에 잘 맞는 낙타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로마 기병대의 추격으로 포로가 되었다. 항복한 팔미라 시는 로마군이 돌아가려 하자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으니 분노한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를 철저히 파괴했다.

 이로써 273년에 팔미라 왕국은 해체되었다.

 

 그 후 그녀는 로마에서 거행된 개선식에 붙들려 간다. 당시 개선식에서는 전쟁에서 패배한 부족장이나 포로들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관례였는데 자신이 가진 보석들을 모두 걸친 제노비아는 당연히 로마 시민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동방의 화려함과 그녀의 미모에 감탄했다. 그 이후에 팔미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로 나뉜다.

 첫 번째는 아우렐리아누스 로마 황제가 그녀를 로마 교외 티볼리에 있는 별장에서 살게 했고 제노비아는 로마 사교계의 명사가 되어 살았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팔미라가 모조리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단식 끝에 숨졌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나중에 로마의 용서를 받아 로마 원로원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시나리오가 그녀다운 최후라고 생각한다.

 

 시리아인들은 해가 저문 뒤에는 팔미라의 폐해에는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제노비아가 갑옷을 입고 낙타를 타고 나타나 로마 군단을 물리쳐 달라면서 간청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시리아인들 조차 그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 해가 진 후에는 팔미라에 가지 않는다.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