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Alexandria)

☞ 좀 더 자세히

 

 오랜 혼돈과 외침으로부터 헤어난 정통 이집트의 30년 왕조의 넥타내보 왕이 중앙 정부의 왕권을 회복한지 18년만에 다시 페르시아의 두 번째 침공으로 왕권을 상실하고 멀리 아프리카 내륙으로 좇겨나 버린지 불과 몇 년 후에 이번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쳐들어 왔는데 이것이 기원전 322년으로 이때는 이미 이집트 땅에는 많은 그리스인들과 유태인 정착민이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테네와 이집트는 기원전 600여년경부터 문화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많은 이집트인들이 렐레닉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태인들 역시 바빌론의 느브가네쟈(Nebuchadnezzar) 왕의 이스라엘 정복으로 피난나온 난민들이 아스완 남쪽 엘레판틴(Elephantine)등 이집트에 정착하여 여러대를 살아온 사람들로서 유태인들도 희랍어나 이집트어만을 일상 용어로 사용하고 있었다.

 

 331년 이집트의 아몬 신전들 중 가장 멀리 신비속에 쌓여있는 시와(Siwa) 오아시스에 찾아가서 아몬(Amon) 승려들로 부터 이집트 파라오(Pharaoh)왕의 후예 즉 신의 아들임을 인지받은 알렉산더 대왕은 라코티스(Rhakotis)에 자기의 도시를 건설하여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으로써 아세아 대륙 진출에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판단 자신이 계획한 도시를 건설하도록 그의 건축가 디노크라테스에게 명령하였는데 이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이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 자신은 그로부터 8년 후 죽은 시체로 돌아오게 되어서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가 건설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은 그의 왕국을 무너지게 하였고, 이집트는 그의 장군이었던 포톨레미 소티에의 하이 포톨레마익 왕조가 동포구와 서포구로 나뉘어져서 발전하였다. 이때 햅타스타디온(Heptastadion)이라 알려진 육지와 파로스(Pharos)섬을 연결하는 매립 공원도 완성되었다.

 그리고 훗일 이 섬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였던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연안국과 세계의 무역 중심지가 되어 문화와 예술의 전당이 되어 찬란하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에 수학자, 천문학자, 지리학자, 철학자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석학들이 새로운 학문을 터득하여 세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포톨레미 3세는 도서관을 만들어 백롤이 넘는 파피루스를 소장하도록 하여 학문적 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많은 학문들 중에 신학도 상당히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때에 예루살렘의 엘이자 제사장은 히브리어나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일상 용어로 사용되었던 아라마익(Aramaic)을 전연 모르는 이집트 유태인들을 위하여 보낸 72인의 히브리어 번역사들은 피로스섬에 들어가서 모세 오경(Pentateuch)을 72일 만에 완성했다고 하며 이어서 구약성서의 원본인 셉두아기트도 이곳에서 완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270 B.C)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유태인수가 예루살렘보다 많았다고 하는데 이런 현상은 이집트 사람들과 유태인들과 희랍 사람들간에 항상 반복하는 종교 이론의 현장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포톨레미 왕조는 희랍인과 이집트인들이 같은 신전에서 공히 신봉할 수 있는 신화적 종교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고대 이집트의 오사이리스(Osiris)신화를 희랍의 디오니서스(Dionysus)와 동일시하여 이것과 햅샛인 황소(Apis)신과  접목시켜 세라피스(Serapis)라는 신화적인 새로운 종교를 탄생시켰다. 때로는 희랍의 제우스 신의 모양을 한 이 새로운 종교는 알렉산드리아는 물론 지중해 연안국들에까지 퍼져 나갔다.

 이렇게 화려하게 번영하던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의 코브라독에 의한 자살로 로마의 아우그스트는 이집트를 로마의 주(Province)로 삼아서 로마 제국의 식량 공급원으로 확보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유태인들에 대한 아우그스트 황제의 지나친 편역을 결국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과 유태인간의 분쟁과 폭동으로 발전했고 이 폭동은 포톨레미 3세가 세운 도서관에 화재를 유발하여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많은 귀중한 자료들 중 약 49만점이 불타 버렸다.

 

 알렉산드리아의 주인이 바뀌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이 새로운 시대에 따라서 기독교가 들어 왔는데 AD 64~68 로마의 네로(Nero)황제 시대에 성 마가(St. Mark)가 알렉산드리아에 들어와 유태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것이 소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시작이라 한다.

 중부 이집트의 바하나사(Bahanasa)에서 발견된 200년경의 콥틱 문자로 된 복음서들은 마가 사도의 이집트 여행을 증명하고 있다.

 기원 180년경 신학자 판타내우가 설립한 알렉산드리아 카테체티칼 학교는 클레멘트나 오리겐과 같은 기독교 초기의 큰 학자들을 배출한 곳이다.

 이렇게 알렉산드리아는 초기 이집트나 주변의 기독교 교육 중심지로서 중요한 곳이었다. 이를 뒷 받침하는 중요한 자료가 1945년 이집트의 남부 지방인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된 것으로 12나그 함마디 코딕스 또는 나그 함마디 도서라고 부르는 것인데 당시의 일상 용어였던 콥틱 문자로 기록되여 있는 신구약의 복음을 비롯하여 그레코-로만의 신비 문화, 희랍 철학과 신화, 페르시아의 배화교, 마니교, 기독교 그노스틱(Gnostic)과 고대 이집트의 토속 종교, 협약서, 교육서, 그리고 아직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 문서들을 막라한 것들인데 당시의 애굽 정교나 정립되지 않은 혼란한 기독교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기원 249~251년 로마의 데시우스 황제는 전 이집트 국민들에게 로마군 입회하에 이단교인파간을 신봉토록하고 신봉 증명서를 발부하였는데 이것이 이집트 기독교사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를 내었고 또한 은둔자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은둔 수사들 중 안토니난 바울같은 이는 홍해 주변의 성지를 찾아 은둔하면서 수많은 은둔자들의 신앙적 지도자가 되었다.

 기원 284년 디오크레티안 황제는 새법을 개정하여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284년 8월 29일로서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콥틱 순교 달력의 원년이 된 이집트 박해 최악의 시기였다고 한다.

 기원 312년에 콘스탄틴 황제가 입회한 최초의 교회 집회인 니케아 집회가 열렸을 때 동방교착의 대표들은 이집트, 시리아, 앗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와 안티옥, 예루살렘, 알멘니아 등이었고, 이 중 이집트 대표단은 알렉산더 주교를 대표로 그의 부제 아타나시우와 아리우스 장로와 그의 지지자들과 은둔 수사들, 포타몬(아몬 숭배자들), 마그나 그리고 여타의 모든 종파를 총막라 하였다.

 

 그리고 서방을 대표해서 로마와 고트였는데 이 집회에는 총 318명의 신학자나 기타의 관계자가 모였다. 당시의 이 모임에서 가장 큰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알렉산드리아의 대표 알렉산더 대주교의 부재인 아테나시우의 주교였었는데 니케아 신조안이 인증되었다. 그러나 신학적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동서로 나누어진 이론 분쟁은 로마의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점차로 종교내에 정치적 힘이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기원 375~395년 데유도시우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로마는 호노리우스 황제와 콘스탄티노플의 아카디우스 황제간의 정치적 분리가 생겼고 이후 알렉산드리아의 이론분쟁은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영향하에 들어 가게 되어 알렉산드리아의 교황으로 데오필루스가 부임하였고, 그리고 그는 고대 이집트와 포톨레마익 왕조의 유산들인 고대 종교의 신전들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동서방 교회의 이론 분쟁은 계속되여서 기원 451년에 마지막 이론 통일 노력인 칼세돈 집회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집트는 아주 굳어 버린 동서방의 양립 교회의 어느쪽에도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운영해 나아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때에 생겨난 콥틱 교황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전례로 함께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기원 639년 아랍의 이집트 침공으로 수도를 현재의 카이로로 정하자 알렉산드리아의 찬란한 영광은 서서히 퇴락하다가 12세기 십자군에 의하여 멸망 위기에 처했다.

 

 그러다가 17세기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으로 유럽의 혁신 문화가 알렉산드리아를 통하여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고 이집트의 케디브 모함멧을 알리는 이집트 현대화 계획하에 나일강물을 알렉산드리아로 끌어 들이는 운하 모함무디에(The Mahmudeih)를 건설하여 식수원을 확보케 함으로써 알렉산드리아는 다시 옛 후광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설되면서 지중해에 연해있는 항구로서 유럽과의 교역 중개소로 그 중요성을 확인시켰고 지금은 이집트의 최대 항구도시이며, 인구가 약 200만이나 되는 이집트 제 2의 도시로서 중공업을 꿈꾸는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 연안에 면해 있는 유럽쪽의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지중해 연안의 아름다운 5대 미항 중의 하나이다.

 

 이집트의 마지막 왕이었던 파룩왕은 아름다운 몬타자궁(Mantaza Palace)을 지었는데 이집트 혁명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파룩왕의 궁전은 현재 호텔과 공원으로 바뀌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고대 이집트의 유산과는 다른 문화 유산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그레코-로만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아름다운 새로운 문화와 이집트 종교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희랍-로마-콥틱으로 연결되는 약 4만점의 유산들은 카이로의 콥틱 박물관과 회교 박물관등과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1~2세기 경의 카타콤은 이집트에서는 유일한 로마 시대의 부유한 개인의(가족) 무덤으로서 암반을 깍아 만든 수직 무덤인데 내부는 삼층으로 되어 있고 실내 장치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 문화의 영향으로 인한 혼돈된 특이한 무덤 장치가 당시의 종교관을 짐작케하는 아주 이채로운 유산이다.

 이 지하 무덤은 훗일 로마의 기독교도 박해를 피하여 이집트 기독교도들이 은신처로 사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성 마가가 이집트에 들어와서 최초의 복음을 전파하여 개종케한 유태인 신발수선공의 옛 집터에 세워진 마가 기념교회와 그 지하에 있는 성 마가의 머리가 묻혀 있는 지하 무덤은 현재 애굽 정교에서 관리하고 있다.

 

 

가는 방법

항공

 알렉산드리아의 엘 노우즈하(El Nouzha) 공항으로 카이로에서 매일 3~5편의 항공편이 운항되고 있다. 소요시간 45분, 요금 $29. 운행 중지, 연발착 등이 잦아 불편하다.

 

기차

 카이로에서 06:00~20:00 사이에 매일 15편이 운행된다. 소요시간 2:30분. 요금 $5.

 

버스

 카이로에서 05:00~18:00에 매일 13~15회 운행된다. 소요시간 3:30분. 티켓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구입.

 

 

◐ 알렉산드리아 기후(℃)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알렉산드리아

최고평균

18.3

19.3

20.9

24.0

26.5

28.6

29.7

30.4

29.6

27.6

24.1

20.1

최저평균

9.1

9.3

10.8

13.4

16.6

20.3

22.8

23.1

21.3

17.8

14.3

10.6

평   균

13.8

14.3

15.9

18.7

21.6

24.5

26.3

26.8

25.5

22.7

19.2

15.4

강우량mm

52.8

29.2

14.3

3.6

1.3

0.01

0.03

0.1

0.8

9.4

31.7

52.7

 

 

 

 관광 명소

BC 2세기의 암굴 고분인 앵거스 고분(The Tomb of Angus)

 BC 2세기의 암굴 고분. 그리스와 이집트의 혼합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안뜰을 사이에 두고 2개의 고분이 있는데, 둘다 입구, 홀, 사체 안치를 위한 예배당으로 나뉘어 있다. 예배당의 벽에는 고대 이집트의 장례행렬 모습과 그리스 신화의 세계가 함께 그려져 있다. 건축 양식에도 두 세계가 혼합되어 있다.

o 개장 : 09:00~16:00. 금요일은 휴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상을 얹기 위해 폼페이의 기둥(Pompei's Pillar)

 지금의 알렉산드리아에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이 적은데, 이 폼페이의 기둥은 그 적은 유물 중 하나이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의 상을 얹기 위해 세워진 것이므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둥이라고도 부른다. 높이 30m, 지름은 상부 2.3m, 기부 2.7m나 되는 큰 기둥이다. 아스완에서 가져간 적색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토대의 돌은 세티 1세와 프사메티코스 등의 유적에서 모은 것들이다. 한편 이 기둥은 항해 중인 배들의 목표물로도 이용되었다 한다.

 주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에 세라피스 신을 모시던 신전 세라페움의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o 개장 : 09:00~16:00.

 

 

1~2 세기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최대의 지하분묘 카타콤베(Catacombs of Kom el Shuqafa)

 1~2 세기경에 만들어진 이집트 최대의 지하분묘로서 로마 양식으로 지하 3층까지 있다. 기독교 공인 전에 그리스도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지하 교회나 무덤을 카타콤베라고 부른다. 본래는 귀족들의 묘지였으나, 3세기 이후는 일반 시민의 공동묘지로 사용되었다.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 공물대가 놓인 방, 예배당, 석관이 놓인 방 등 천장이 낮은 석조의 방들이 차례로 나타난다. 여러 카타콤베 중 로마 부근의 것은 지하통로의 길이가 500㎞ 이상 되기도 한다.

 또한 카타콤베에는 원시 기독교 예술의 귀중한 재산이 되고 있는 조각, 그림,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 이태리의 아피아 거리에 있는 성 칼리스토의 카타콤베가 가장 유명하다.

o 개장 : 09:00~17:00.

 

 

몬타자 비치 기슭의 조금 높은 구릉 위에 몬타자 궁정(Montaza Palace)

 알렉산드리아 북동쪽 17km, 몬타자 비치 기슭의 조금 높은 구릉위에 있다. 원래 왕가의 여름 별장으로 1892년에 세워졌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는데, 정원에는 수백 그루의 야자나무가 있고, 스포츠 시설이며 레스토랑, 매점 따위도 갖추어져 있다. 150ha의 부지 안에 있는 팔레스틴 호텔은 별장 하나를 개조한 것으로 분위기가 좋다.

o 개장 : 11:00~19:00, 08:00~14:00(금, 일요일, 단 팔레스틴 호텔의 출입구는 24시간 개방)

 

 

로마 시대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그레코로만 박물관(The Greco Roman Museum)

 알렉산드리아와 그 주변에서 발견된 BC 3세기에서 AD 3세기에 걸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1892년 설립하여 현재는 약 4000점의 유물을 가지고 있다.

 정면 홀에서 왼쪽으로 6호실에서 20호실까지 연이어 있는데 이쪽을 먼저 보고, 반대편 1~5호실은 나중에 보는 것이 좋다.

Egypt_alexandria-The Greco Roman Museum.jpg

 6호실은 성우 아피스의 상, 7호실은 람세스 2세 흉상, 9호실은 파이윰 지방 출토품, 10호실은 황금 귀걸이를 한 고양이, 12호실은 세라피스 신 흉상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입상, 13호실은 클레오파트라의 두상, 14호실은 바닥의 모자이크, 16호실은 흰 대리석의 나일 신 조상등이 볼 만하다.

 

 

해양박물관(The Aquarium & Hydrobiological Museum)

 도로를 사이에 두고 수족관과 전시관으로 나뉘어 있다. 수족관에는 지중해, 홍해, 나일 강에 살고 있는 각종 물고기, 조개, 산호, 악어 따위가 들어 있다. 수조는 36개로 한 곳에 모여 있다.

 전시관과 수족관은 1매의 입장권으로 들어 간다.

 

 

로마 원형극장(The Roman Amphitheater)

 그레코 로만 박물관에 가까운 콤 알디카 유적 속에서 1964년 발견된 원형극장. 좌석은 유럽산 대리석이고, 원주는 아스완의 화강암과 소아시아의 녹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좌석은 13단, 700~800명이 앉을 수 있다. 의자에는 로마 양식의 조각이 새겨져 있고, 연극 공연이나 격투기 대회에 쓰였다.

 이집트 유일의 그리스, 로마 시대의 공동목욕탕이 있다. 콤 알디카의 유적 주위는 공원으로 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카이트 베이 요새(Fort Qaitbey, The Citadel of Qaitbey)

 파로스섬은 원래 세계 7대불가사의로 손꼽히던 파로스섬의 등대가 있었던 곳이며, 두개의 항구를 가진 주요 항구였다. 등대는 전쟁과 재해로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 요새가 세워졌다. 이 요새는 1480년 술탄 카트이베이가 알렉산드리아의 고대 등대 위에 세운 것이다. 지금은 오래된 성채의 안에서 등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세계 7대불가사의의 하나로 등대는 높이가 125m에 아래에 노동자들을 위해 약 300개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56km 전방에서도 그 빛이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14세기 대지진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교통

 알렉산드리아 시내에는 철도, 전철, 버스, 택시 등이 다닌다. 시내의 관광지는 오라비 광장에서 반경 2km 이내의 3개 지역에 있으므로 택시를 이용하거나 걸어다니는 것이 좋다.

 

 

알렉산드리아의 음식점

✜ 로란토스

- 주로 오리엔탈 요리를 취급한다. 시시카바브 4개에 7파운드.

- 오픈시간 : 08:00 ~ 20:00.

- 주소 : 44 Safeya Zaghloul St.

☎ : 20-482-2200

 

 

✜ 엘리트

- 카페테리아로서 카페카프치노 50PT, 크림샌디 130PT, 점심, 저녁도 가능하다.

- 오픈시간 : 08:00 ~ 01:00.

- 주소 : 43 Safeya Zaghloul St.

☎ : 20-482-3592

 

 

✜ 파스트로디스

-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3개의 가게 중 하나. 페이스트리 부문과 레스토랑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입구에서 먼저 각양각색의 케이크가 진열된 것을 보면 놀라울 정도다. 사들고 갈 수도 있지만, 바깥의 카페테리아에서 차와 함께 즐기는 것이 좋다.

- 식사는 30~60파운드.

- 연중무휴. 09:00~24:00.

- 주소 : 374 Al-Guish Ave.

☎ : 5877868

 

 

✜ 제페리온

- 몬타자 비치에서 택시로 10분 남짓 걸리는 아부키르라는 항구에 있다. 신선한 어패류를 먹을 수 있다. 중간 크기의 생선 3마리와 새우 8마리의 소금구이, 샐러드, 빵, 와인 1병에 38파운드로 싼편.

 조리법을 지정하지 않으면 모두 구워서 내온다. 계절에 따라서는 싱싱한 섬게도 먹을 수 있다.

- 오픈시간 : 12:00~24:00.

☎ : 20-560-1319

 

 

클레오파트라(Cleopatra, BC 69 ~ BC 30)

 이집트의 여왕.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후의 왕(재위 : BC 51~BC 30).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딸.

 

 아버지의 사(B.C. 52)후 그 유언에 따라 9세이던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동 통치하였다. 그녀의 가계는 원래 이집트 인이 아니라 그리스 인과 마케도니아 왕통의 혼혈이었으나 높은 교양과 미성(美聲)을 자랑하고, 특히 미녀로서뿐만 아니라 그 지성과 수완으로 이집트의 종교에 깊이 관심을 보여 태양신 라(Ra)의 딸처럼 행세, 이집트 인들의 깊은 신뢰를 얻었으며 강대한 로마의 세력 앞에서 기울어져가는 이집트의 국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한 비극의 제왕이기도 했다.

 

 BC 51년에 클레오파트라가 파라오 율법에 따라 남동생과 결혼을 하고 남편이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권력투쟁을 하여 왕좌에 오른 후 마케도니아의 마지막 여왕이 되었다. 궁정 안의 권력 다툼으로 한때 동생에게 쫓겨났다.

 

 BC 38년 이집트에 원정 온 케사르의 힘을 빌어 동생과 그 일파를 패사(敗死)시키고 케사르의 애인이 되어 그를 따라 로마에 왔는데 케사르가 부르투스에게 암살되자 44년 귀국, 그 해 전 남편의 동생과 결혼했다.

 

 그 후 암살범 부르투스를 추격하여 이집트에 온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배신 행위를 문책코자 그녀를 만났으나 그녀의 유혹에 매혹, 재입국하여 서로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노한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정벌군과 아르메니아에서 싸워 이겼으나 '악티움 해전'에서 패전, 안토니우스는 자살하고, 그녀는 포로가 되어 로마에 연행되었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묘지를 참배하고는 틈을 보아 태양신 라(Ra)의 사자라고 믿어온 독사를 풀어 자살을 감행, 옥타비아누스의 감복을 받아 여왕의 예우로서 안토니우스와 합장되었다.

 

 그녀는 소문처럼 뛰어난 미녀는 아니었으나, 비범한 화술, 풍부한 결단력, 겁을 모르는 용기와 뛰어난 재기 등이 그 미모와 어울려 파란 많은 그녀의 생애와 함께 많은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문(Cleopatra's Gate)

 터키 남부의 아다나에서 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타루수스(Tarsus, 다소)는 사도 바울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인데 이 다소에는 또 하나의 알려진 곳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Cleopatra's Gate)'이다.

 도시의 중심 광장에 서 있는 허물어진 성문이 바로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역사적인 장소로 알려져 있으며 고대의 다소는 12m 간격으로 3개의 분리된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를 영접한 키드누스 강가에 세웠다고 전해지는 문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문'인데 혹은 '암캐의 문'이라고도 한다.

 후에 기독교 국가가 된 비잔틴 제국은 이 문을 '바울의 문'이라고 불렀다.

 문이 서있던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고 지금은 강이 훨씬 더 멀리 물러나가 버려 시내 한 복판에 위치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BC 41년 면세 헤택을 베풀기 위해 타르수스(다소)를 내방중이었던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암살된 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의 권력자였는데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 카시우스를 도와준 프톨레미테(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는 로마의 동맹국이긴 하지만 사실상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소환에 선뜻 응하지 않고 몇 번이나 독촉을 받은 끝에 타르수스로 향하는데 키드누스 강에서의 선상 파티에 안토니우스를 초대하게 된다.

 

 그 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금은 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 안에는 온통 꽃들이 깔려있고 금접시와 보석 박힌 금술잔이 빛을 발하는 가운데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로 치장해 아름다움의 절정을 이루는 29살의 클레오파트라가 감미로운 선율이 흘러나오는 금빛 차양 안에 비스듬이 누워 안토니우스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이런 화려한 파티에는 많은 비용이 들겠군요"라고 말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지금까지 파티에 쓴 비용은 하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시녀에게 식초를 잔에 담아 오라고 명령하였다.

 

 그 때 클레오파트라는 온 몸에 값비싼 보석을 많이 달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는 양 쪽 귀에 늘어뜨린 커다란 진주 귀걸이가 가장 눈에 뜨였다.

 식초잔을 받아 든 클레오파트라는 한 쪽 귀걸이를 떼내어 식초잔에 담구어 버리는데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식초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 버리고 만다.

 진주가 다 녹자 클레오파트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 버리고 다시 귀걸이 한 쪽을 술잔에 마져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클레오파트라의 대범함에 문책할 마음을 철회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이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이야기는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가 쓴 책 '박물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시저를 사로잡아 이집트를 지켰던 클레오파트라는 이번에도 지혜와 미모로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BC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키프로스, 시리아, 리비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 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고 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는 '왕중의 여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져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꿈은 오래 가지 못하는 것, BC 31년,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연합군간의 전쟁인 '악티움 해전'에서 참패하게 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클레오파트라의 진주에 숨은 비밀

 로마의 실력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적을 도와 주었다는 일로 항의하기 위해 이집트를 방문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이를 해명하기 위해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이 때 진주를 활용하게 된다. 단순한 진주가 아닌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유일한 진주 귀걸이를 이용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녀는 성대한 연회 중에 시종에게 식초를 담은 술잔을 가져오게 하고 진주 귀걸이 한쪽을 술잔에 담근다.

 안토니우스는 흥미롭게 이를 지켜보게 되고 술잔에 들어간 진주는 서서히 녹아버리고 만다. 클레오파트라는 진주가 녹은 이 식초를 마셔버리고 귀걸이 한쪽을 다시 술잔에 담그려 하자 안토니우스는 그 진주의 귀함과 클레오파트라의 대범함에 결국 자신의 항의를 철회하고 클레오파트라에게 마음을 뺏기게 된다. 이것이 바로 '클레오파트라의 진주'에 관한 이야기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떤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취했을까.

 진주의 주 성분은 석회석이다. 따라서 식초를 포함한 모든 산에 잘 녹는다. 이때의 화학 변화는 다음과 같은 반응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석회석(CaCO3) + 아세트산(2CH3COOH) = 아세트산칼슘((CH3COO)2Ca) + 물(H2O) + 이산화탄소(CO2)

 

 식초는 아세트산을 포함하고 있고, 아세트산은 석회석으로 된 바위를 녹여 아세트산칼슘이라는 염을 만드는 성질이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진주 역시 석회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산을 이용해 진주를 녹인 사실 자체는 과학적으로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과연 클레오파트라가 진주를 곧바로 녹여 마실 수 있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녀가 마신 식초는 당연히 몸에 해를 주지 않을 정도의 약한 산성을 띠었을 것이다. 따라서 진주 알갱이가 녹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연회 당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가지 해석은 당시의 화학 지식을 많이 갖춘 클레오파트라가 진주를 녹일 수 있는 어떤 물질을 연회가 시작하기 전 미리 식초에 타놓았다는 것이다. 한편 클레오파트라가 흰색의 석회로 된 가짜 진주를 귀에 걸고 있다가 교묘하게 속였다는 설명도 있다. 그러나 당대 최대의 부자이자 위대한 이집트의 여왕이 상대방을 속이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하나의 가능성은 여왕이 식초와 함께 진주를 통채로 삼킨 상황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들고 있던 잔이 금속잔이었다면 진주가 실제로 녹았는지 아무도 확인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클레오파트라가 인기를 끈 이유는 미모뿐 아니라 뛰어난 지략도 한몫 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따라 잡기-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감독 : 조셉 L. 맨키위즈(Joseph L. Mankiewicz, 1909~1993)

주연 :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1932~2011),

         리처드 버튼(Richard Burton, 1925~1984)

         로디 맥도웰(Roddy McDowall, 1928~1998)

         렉스 해리슨(Rex Harrison, 1908~1990)

개봉 : 1963년

상영시간 : 256분

 

 로마의 세력권 아래 있던 이집트에는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동생이 함께 통치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세계를 지배해가던 로마의 실권자 시저는 이집트의 내전을 해결하기 위해 이집트로 입성하고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난다. 그녀의 도도하고도 아름다운 매력에 이끌린 시저는 내전을 해결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도와준다.

 그러나 그녀의 야심은 그칠 줄 모르고 시저의 힘을 얻어 전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꿈꾼다. 클레오파트라의 유혹에 빠진 시저는 로마에 부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고 둘 사이에는 아들까지 생긴다. 오랫동안 이집트에 머물렀던 시저는 다시 전쟁을 치르고 드디어 로마에 입성한다.

 국민들의 시저에 대한 신뢰는 뜨겁지만 원로원의 몇몇 무리는 시저의 집권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시저의 초대로 클레오파트라가 로마에 오지만 시저는 결국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살해된다. 시저를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세계를 지배하려던 클레오파트라의 야심은 물거품이 되지만 그녀는 시저의 신임을 받던 안토니우스와 다시 사랑에 빠지는데…

 그러나 적국의 공격과 계속되는 간신들의 모반 속에 안토니우스 역시 혼란에 빠지고 클레오파트라는 자결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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