➏ 시나이(Sinai) 반도

 

 넓은 모래벌판이 약 200km에 걸쳐 동과 서로 펼쳐지는 반도의 북쪽 지중해 연안과 남으로 가면서 땅의 모양이 점점 좁아지면서 풀 한포기 자랄 수 없는 돌산들로 변해서 좁아진 반도의 끝은 홍해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이렇게 세모꼴인 반도는 물이라곤 거의 없고 다만 몇몇 지역의 조그마한 오아시스들이 있을 뿐이다. 겉으로 보면 아주 쓸모없는 땅으로 보이나 이 땅은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도 각양 각색이다.

☞ 다른 지도

 

 신학자들은 성서의 땅(Land of Bible)이라 부르고 지리학자들과 기타의 학자들은 매혹의 땅(Enchantments)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왕들은 이땅을 가르켜 돌콰즈의 땅(Malachite, 공작석)과 이땅의 별명이었던 터키옥(Turquoise)과 대리석(Marble)등의 광산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이곳은 고대 이집트의 오사이리스(Osiris) 신화와 연관되어 있었다.

 

 또한 이땅과 이땅의 광산에서 종사하는 광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성을 하였고 하토(Hathor)여신을 숭배하는 신전을 만들었다. 현재 발견된 신전의 벽과 폐광이된 광구 앞에 세워졌던 비석의 기록에는 기자의 대 피라밋의 주인이었던  키욥왕과 스내프로 왕등의 구왕조의 왕들과  핫셉숫수, 투트모스 3세와 랍세스 3세등 수천년에 걸친 왕조의 수많은 왕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구왕조말에 이땅은 외세와 베드윈의 침략을 잠깐 받기도 하였으나 곧 다시 이집트의 영토로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이땅은 정치적인 분쟁이 끊임없이 행해졌는데 그것은 이땅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다. 시나이 반도는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육상 통로일 뿐만 아니라 지중해 저편에 있는 유럽 대륙이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홍해와 인도양 뱃길을 따라 동양으로 갈 수 있는 교량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옛부터 이땅은 문화 교류와 통상 교통로로서 아주 중요한 땅이었던 관계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모세에 의한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며 또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겠다. 현재의 시나이 반도내의 아스팔트길과 전통적으로 말하는 출애굽의 길은 꼭 일치한다고 할 수 없으나 대개 사람들은 전에 있던 길을 따라 새로운 길을  만드는 관습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아스팔트 길을 전연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시아니 반도와 나일 계곡(아라비안 사막)을 연결하는 스에즈 운하의 해저터널을 지나서 15km 정도 남행하면 화려하지는 않으나 대추 야자나무가 무성한 조그만 오아시스가 하나 나오는데 이곳을 아랍어로 오윤무사(Oyuon Musa)라고 부른다. 여기가 성서상의 마라(출16:23)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139km 정도 더 가면 아브 잰니마(Abu Zenima)인데 지금은 석유자원의 수송항이지만 3500년 전 고대 이집트 때는 마카(Markha)라고 부르던 곳으로서 주변의  마가라 광산에서 나오는 톨콰즈석을 수송하는 중요한 항구였다.

 

 마가라광산의 주변 사라빗 엘까딤(Sarait El Khadim)동굴속에서 알파벳의 기록문(Protosemitic Text of Sinai)이 발견되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고어들 중 최초의 기록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계속 스에즈만(홍해)을 따라 남행하면 라스 사라팁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스에즈만을 버리고 내륙으로 뻗어있는 외디 파이란(Wadi Fairan) 계곡이 삼거리의  죄측길은 파이란 계곡을 계속 따라 가는 길이면서 파이란 오아시스를 거쳐서 성 카더린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리고 우측길을 60km 정도 더가면 엘드어(EL TUR)라는 곳이 있는데 여기가 엘림(출 15:27)으로 간주되는 장소인데  종려나무 70주와 12개의 샘이 있고 비잔틴 시대 때의 찬란했던 흔적은 간데없고 4세기때 건립된 조그마한 교회가 하나 남아 있다. 다시 삼거리에서 성카더린으로 가는 길인 와디 파이란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파이란(Fairan)오아시스에 도착한다.이 오아시스가 성서의 르비딤(Rephidim)인데 이곳이 이스라엘이 출애굽후 처음으로 아말랙족(Amalekits)과 여호수아(Joshua)가 전쟁을(출 17:8-16) 치룬 곳이다. 이 계곡을 와디히브린(Wadi Hebran)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히브리(유태)가 지나갔다는 것이다

 

 파이란 오아시스(Pyran Oasis)는 길이가 4km 정도인데 시나이 반도 내에서는 가장 큰 오아시스이다. 그리고 와디 엘세이크(Wadi El Sheikh)로 들어가 50km 정도 가면 성 카더린 수원(Monastery of St. Catherine)이 나온다. 이 수도원 자리가 호렙산(Mt. Horeb) 아래인데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만난 장소이다(출 3:1). 모세의 출애굽 600년 후에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야(Elijah)도 호렙산 정상에서 하나님과(왕상 19:9-18) 대화 하였던 성산이다.

 

 기원 2세기 초에서 중엽에 이르면서 로마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지자 많은 애굽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시나이  반도의 성지들 주변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는데  이것은 은둔자(Hermit Monks)들이 은둔 생활에서 집단 생활(Monastic Life)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원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모후인 헬레나 왕후(Empress Helena)에게 베드윈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이 청원이 헬레나 모후로 하여금 기원 330년  떨기나무 앞에 조그만 성모 교회와 탑(Tower)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기원 527~565년에는 저스티니안 황제가 현존하는 수도원의 성벽을 축성하여 수도원을 요새화 하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인 기원 542년에 저스티니안 황제의 건축가이며 축성의 장본인인 성 스테파노(Stephanos)는 카톨리콘(Katholikon) 본부 교회를 설계하여서 9년 후인 551년에 완공  하였는데 교회는 바실리카 스타일에 빨간 화강암으로 세운성모 기념 교회도 포함되어 교회 내부에 들어가 버렸다. 이 교회의 동단(APSE) 반타원형의 벽면 전체에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 벽호는 변하 장면(마태 17:2)인데 6세기 것으로서 동방 교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또한 보존 상태가 거의 완벽한 것이다.

 

 성 카더린이라는 이름은 기원 7세기경 수도원의 한 수사가 꿈에서 천사의 인도를  받아 3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성 카더린산 정상에서 찾아 이 수도원으로 옮겨 오면서  원래의 이름인  변화(Stransfiguration) 수도원과 바뀌었다. 수도원이 생긴 후 아랍 침략자도 십자군도 오토만 터키의 지배자들도 그리고 나폴레옹에 이르기까지  전부 이 수도원에  대하여 보호령을 내렸다. 그래서 1500년이나 가까운 이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3500여점의 필사본과 기타의 물건들은 로마의 바티칸 다음으로 많은 것인데 기독교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1844년과 1859년에 독일의 신학자 콘스탄틴 티센돌프가 찾아낸 시나이 사본(Codexsinaticus)은 4세기것으로 지금은 영국 대영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현재 수도원이 소장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5세기 7~8세기경에 재 사본한 시리아사본(Codexsyriacus)이다. 이렇게 오래된 많은 사본들 외에도 인쇄 기술이 발명되어 인쇄한 초기의 인쇄본 5000여점과 수천천에 달하는 5~17세기의 성화들을 소장하고 있다.

 이 수도원 옆으로 모세산(시내산)에 오르는 두 개의 길과 완만한 능선으로 된 길로서 정상까지 통상 3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된다. 해발 2285m의 모세산을 비롯해서 이곳에는 해발 2000m가 넘는 산들이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 뿐이다.

 

 모세의 출애굽 사건과 연관된 성산(The Holy Mountain)인 호렙산 정상에는 기원 4세기경에 세워진 조그마한 교회 자리에 1934년에 다시 세운 성 삼위일체 교회가 있다.

 수도원에서 동쪽으로  펼쳐지는 와디 마라(Wadi Marra)계곡을 따라 나가면 에인 후드라(Ain Hudra)라고 불리는 신광야(성서상으로는 신광야 또는 바란 광야라고 함) 일부를 통과하여 시나이 반도 동쪽 해안인 아콰바만을 향해 계속 내려가게 된다. 아콰바만의 누웨이바(Nuweiba)에서 해안을 따라 북으로 75km쯤 가면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인 타바(Taba)에 도착하게 된다.

 

 누웨이바에서 남으로 가면 시나이 반도 남단에 있는 라스카니사(Raskania)와 쌀므엘 쎄이크(Sham El Dheikh)라는 반도의 가장 뽀족한  끝에 닿느데 이 일대의 바다는 아름다운 붉은 산호들이 많은데 홍해라는 바다 이름은 여기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또한 물이 아주 맑아서 수중을 휜히 볼 수 있으며,그리고 이곳에서는 아세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을 한눈에 바라볼 수있다.

 

 시나이 반도 북쪽 지중해 연안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인 라파(Rafah)에서 스에즈 운하의 콴타라(Quantara)까지 펼쳐지는 모래 벌판이 돌산들이 즐비한 남쪽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그러나 이곳이고대로부터 아프리카-아세아 통상로로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모세 출애굽 사건후 1200년 후에 아기 예수님과 그의 가족이 이길로 해서 평화의 땅을 찾아 피난 하였다. 고대 이집트왕 아모스(Ahmos I : 5000 B.C)는 희소스(Hyhsos)를 이끌고 멀리 유프라테스강까지 정벌한 것이 이집트 최초의 아세아 정벌 기록이다. 이 후 많은 이집트왕들이 이길을 통하여 아세아 대륙으로 진출하였던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집트의 중요한 통상로인 이길은 역시 반대로 힘이 강대한 다른 나라들에게도 이집트를 침공하는데 아주 중요한 군사도로가 되어서 기름진 나일강 하류 곡창 지대를 항상 탐하였다. 이길을 통하여 들어온 외국군들은 희소스, 앗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아랍군, 십자군등 그리고 가장 최근의 이스라엘군등 끊임없는 통로였다.

 현대의 이길은 군데군데 사람들이 정착하여 사막을 농지화하고 있는데 엘 아라씨 주변에서 생산되는 참외, 복숭아, 포도등 기타의 과일들은 이제 이집트의 명산품이 되어가고 있다.

 

 

르비딤(Rephidim, 파이란=오아이스)

 알루스에서 시나이 광야 사이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유숙지로 예전엔 매우 기름진 평야와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는 와디 파이란(Wd. Feiran) 혹은 와디 레파이드(Wd. Refayid) 근처로 추정한다.

 

 출애굽기에는 아말렉에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웠다는 기록과 이곳에 마실 물이 귀하다는 기록이 있다.

 르비딤(르피딤, 훼이란)은 신 광야와 시내 광야 사이에 있는 골짜기 지역(출 17:1∼16,19:2, 민 33:14∼15)으로 시내산 북서쪽 20㎞ 지점인 제벨 세르발(Jebel Serbal)의 북쪽에 전개되는 비옥한 평원 와디 훼이란(Wadi Feiran)으로 알려지고 있다. 르비딤은 평원이란 뜻으로 홍해를 건너 시내산으로 가는 노정에 있는 가장 큰 오아시스 마을로 도로를 따라 4㎞ 정도에 걸쳐 대추야자 나무와 잡목들이 우거져 있다. 홍해의 바닷가 길을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가 '알 투르-성 카타리나 길(al tour-St.Cathrine Rd)'에 접어들어 동쪽 산악 지대로 방향을 틀면 사막과 석회함 지대를 지나 곧 불타오르는 듯 한 화강암 계곡으로 접어든다. 화강암 계곡은 마른 와디(우기 철에만 물이 흐르는 강)인데 마라의 샘에서 277km 즈음에 '오아시스 훼이란(Oasis Feiran)'이 나온다. 학자들은 이곳을 성경의 르피딤과 동일시한다.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했던 에제리아 수녀는 그의 순례기에서 성산 시나이를 순례하고 나서 파란을 거쳐 산중 여행을 하다가 해안으로 여행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시나이 산에서 파란까지의 거리가 35마일(약 56km)이나 된다고 기록하는데 아마도 이곳이 오늘날 훼이란이라고 하는 르비딤이지 않나 싶다.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훼이란까지는 포장도로를 따라 약 62km이다. 신 광야를 떠나 도착한 르비딤은 마실 물이 없었고(탈출 17,1-7) 더구나 아말렉 족이 길을 막고 서 싸움을 걸어왔다. 깊은 계곡 양쪽으로는 화강암 기암괴석이 자리하고 있어 우회할 수 있는 길도 없고 물이 없어 왔던 길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외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민수 33,14-15 알루스를 떠나서는 르비딤에 진을 쳤는데, 그곳에는 백성이 마실 물이 없었다. 르비딤을 떠나서는 시나이 광야에 진을 쳤다.>

 

 모세는 이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여 백성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시험하고 모세와 다툰 일로 인해 이곳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고 불렸다(출 17:1∼7). 또한 이곳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가 모세에게 부장제도를 권면하여 재판을 시행하도록 한 곳이다(출 18:13∼27). 오늘날 이곳에는 마을 한가운데 4세기 경부터 내려오는 수녀원이 있어 성경과 관련된 곳이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 수녀원 내부는 취재가 일절 금지되어 있다. 이 수녀원 바로 남쪽에는 모세 수도원의 폐허가 있으며 계속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해 아말렉을 물리쳤던 풍차의 언덕으로 불리는 제벨렛 타후네(Jebelet Tahunet)가 있다(출 17:8∼16).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는 곳곳에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르비딤에서의 싸움은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겪어야 할 고난이 있음을 보여준다.

 

르비딤(Rephidim) 지역

 르비딤은 현재 '와디 베이란' 또는 '와디 레파이드'로 이름하며 시나이 반도 최대의 오아시스 종려 숲이 있는 곳으로서 홍해에서 60km, 시내산에서 54km 떨어진 이 '바란 오아시스'는 '시나이의 진주'로 불리워지고 있다. 르비딤은 창세기 21장 12절에서 하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며, 이드로가 양을 치던 장소이다.

 아말렉 족은 에사우의 아들 엘리파즈가 소실 팀나에게서 얻은 아말렉(창세 36,12)이 시조이다. 그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의 혈족으로 취급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시기부터 사울 왕 시대에 걸쳐 유다의 남쪽 지역에서부터 이집트의 국경과 시나이 반도에 걸쳐 살다가 사울 왕 때 사울과 다윗에게 전멸 당하고(1사무 15,7; 27,8; 30,17) 그 후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집트를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처음으로 진로를 방해했던 아말렉 족은 신명기에서 '아말렉인들을 치라는 명령'을 언급할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원히 각인되게 된다.

 <신명 25,17-19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오던 길에 아말렉인들이 너희에게 한 짓을 기억하여라. 그들은 너희가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에 너희와 길에서 마주치자, 하느님 두려운 줄도 모르고 너희 뒤에 처진 사람들을 모두 쳐 죽였다. 그러므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가 차지하도록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에서 너희 주위의 모든 적을 물리쳐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면, 너희는 하늘 아래에서 아말렉인들에 대한 흔적조차 없애 버려야 한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발라암의 네 번째 신탁에서 '민족들 가운데 첫째'로 언급되며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선포하고 있다.

 <민수 24,20 그런 다음에 그는 아말렉을 보며 신탁을 선포하였다. "민족들 가운데 첫째인 아말렉. 그러나 그의 종말은 영원한 멸망이 되리라.">

 

아말렉(Amalek)과의 전투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령하고 그는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오른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자 아론과 후르는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발아래 놓고 그를 그 위에 앉힌 다음 모세의 팔이 처지지 않도록 팔 한쪽씩 모세의 두 손을 받쳐주니 여호수아는 해가 질 때까지 싸워 아말렉을 무찔렀다. 모세는 이 첫 승리를 기념하여 제단을 쌓아 그 이름을 '야훼 니씨'라고 하였다. '주님은 나의 깃발'이라는 뜻이다. 아론과 후르가 모세의 팔을 받쳐 주었던 것처럼 르비딤의 어원은 '지지, 후원(support)'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말렉과의 첫 전투를 통해서 오합지졸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서로 협력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값진 교훈을 배운 것이다. 모세가 서 있었던 언덕은 해발 220m의 나지막한 언덕으로 '풍차의 언덕(Jebel et Tahuneh)'이라고 하는데 한때 기념 수도원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탈출 17,8-16 그때 아말렉 족이 몰려와 르피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였다.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겠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그의 발아래 놓고 그를 그 위에 앉혔다. 그런 다음 아론과 후르가 한 사람은 이쪽에서, 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일을 기념하여 책에 기록해 두어라. 그리고 내가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하늘 아래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는 것을 여호수아에게 똑똑히 일러 주어라." 모세는 제단을 쌓아 그 이름을 '야훼 니씨'라 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손 하나가 주님의 어좌를 거슬러 들리리니, 주님과 아말렉 사이에 대대로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마라의 샘(Well of Marah)

 홍해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 일행이 마라(Marah)에 이르렀을 때, 목이 말라도 샘물의 물이 너무도 써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것을 마라라고 불렀다.(출 15:22~26)

 사람들이 모세에게 불평을 하며 "도대체 무엇을 마시란 말입니까?" 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모세가 주를 외쳐부르자 주는 모세에게 나무를 보여주었다. 모세가 그 나무를 물 속으로 던지니 그 샘물이 달콤하게 변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율법을 정하고 그들을 시험하여 말씀하시길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따르고, 옳은 것을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율법을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을 너희에게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 (출 15: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열두개의 우물과 70개의 야자수 나무가 있어 그 물가에 숙소를 정하였다.

 

 

성 캐더린 수도원(Monastery of St. Catherine)

 로마제국시대,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기에 독실한 기독교 인으로서 예수를 섬기던 출중한 지성과 용모를 갖추고 있던 캐더린이라는 소녀가 황제로부터 개종을 권유받았음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끝내 순교한 일이 있었다. 이 수도원은 그 소녀의 이름을 따서 성 캐더린이라고 불리운다. 거룩한 땅이니 신을 벗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가 신을 벗었다고 하는 시내산 기슭에 위치한 이 수도원은 4세기에 수도사들에 의해서 처음 건립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으로 착공된 요새가 6세기에 완공된 뒤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은 곳이다.

 

 11세기 이슬람시대에도 종교적 균형을 유지했으며 나폴레옹 또한 이 수도원을 보호하여 보수 작업을 명령하기도 하였다. 교회의 외관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어서 예수와 모세등을 표현하고 있다. 수도원의 일부 벽은 지진으로 붕괴되어 재건되었고 종이 달려 있는 탑이 있다. 내부에는 성 캐더린이 대리석 석판아래 매장되어 있고 2000점이 넘는 역사적인 성물(聖物)과 성화(聖畵)가 장식되어 있어 경건함을 더해준다. 수도원 경내에는 모세가 시내산에 입산할 때 주위에 타오르던 불꽃에도 불구하고 타지 않았다는 잡목이 있던 곳에 예배당이 자리잡고 있고 도서관으로서는 로마 바티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어 귀중한 성경사본과 희귀본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이 있다.

 

캐더린 도서관(Catherine Library)

 캐더린 수도원 안에 있는 도서관은 성경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희랍어로 쓰여 있으나 시리아어, 콥트어, 이디어피아러, 아랍어 등으로 쓰여진 사본들도 3500여점 정도 소장하고 있다. 그중 시리아 사본을 5세기경의 신약성서를 번역한 것으로 번역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시내산 사본과 함께 이 도서관에서도 가장 귀중히 여겨지고 있다.

 시내산 사본은 4세기 경에 희랍어로 쓰여진 것으로 신약성경 전체의 사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1944년 독일 신학자 티센도르프가 캐더린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그는 그 중의 43매를 얻었다. 그후 1859년 다시 방문했을 때 이 양피지를 복사하여 러시아로 가져가 황제 도서관에 소장되었었으나 러시아 정부에 의해 팔려 지금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75년 캐더린 수도원 한쪽 벽에서 또다시 희귀 사본들이 발견되었으나 수도원측에서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시내산(Mt. Sinai, 2,286m)

 시내산은 출애굽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십계명을 받은 산이다. 불붙은 떨기나무 사이로 하나님이 나타나신 호렙산이 바로 곁에 있고 성 카타리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카트리나산도 정상에서 보인다.

 시내산은 이집트 영내에 있지만 카이로에서 가는 것보다 이스라엘 최남단 도시인 엘랏에서 가는 것이 더 가깝다. 시내산에 오르는 길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수도원의 수사들이 만들어 놓은 가파른 3570계단의 길과 완만한 능선으로 된 길로서 정상까지 3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된다.

 

 이곳에는 해발 2,285m의 모세산을 비롯하여 해발 2,637m의 세르발 산(Mt.Serbal)등 해발 2,000m가 넘는 산들이 즐비하지만 어느 산이건 하나 같이 흙이 한줌없는 돌산들뿐이다. 시내산 밑에는 순례자들이 머무를 수 있는 숙박 시설이 있어서 잠을 자고 새벽에 2,286m의 시내산 정상을 올라갈 수 있다. 정상에는 모세가 40일 40야를 머물렀다는 모세 교회가 세워져 있고 교회 안에는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장면,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십계명을 받아 들고 있는 장면, 그리고 모세가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그림이 있다.

 

 

 시내산 정상에서 700여 계단을 내려오면 좌측에 샘이 있는데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간 사이 아론과 장로들이 모세를 기다린 곳이라 한다(출 24:1-2). 또한 아합 시대의 엘리야 선지자가 이세벨을 피해 숨어있었다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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