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성전(Temple of Jerusalem)

 

◈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신을 예배하기 위하여 세운 신전(神殿)인 예루살렘 성전(Temple of Jerusalem)

 예루살렘 성전은 세 차례 지어졌다. 제일 처음에 솔로몬에 의해서, 두 번째 스룹바벨에 의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롯에 의해서 지어졌다.

 제1성전은 솔로몬왕이 세운 솔로몬 성전이다. 이것은 BC 587년경 바빌로니아의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 2세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2성전은 유대인들이 바빌로니아 포로 상태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의 지휘로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재건축한 스룹바벨 성전이다. 이 성전은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제3성전은 유대 왕 헤로데가 폐허가 된 스룹바벨 성전 터 위에 세운 헤로데 성전인데, 이것은 70년 로마군이 파괴하였다. 현재의 '통곡(痛哭)의 벽'은 이 제3성전 서쪽 벽의 남은 잔해에 해당한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으면서 감사함으로 지었다. 아버지 다윗에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성전 건축을 자기가 완성할 수 있었기에 감사의 맘으로 건축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거의 난민과 다름없는 백성들의 힘을 모아서 빈약한 재정 및 노동력을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정성으로 극복해 가며 성전을 지었다. 그의 성전은 비록 초라했기는 했지만(스 3:12-13) 뜨거운 신앙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헤롯의 성전은 앞선 두 성전과 달랐다. 비록 역대 성전 중 가장 잘 지은 성전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하나님의 성전이 불신자에 의해서도 세워질 수 있다는 상징적 건물이 됐다. 이방인인 두매 출신의 헤롯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화 정책으로 헤롯 성전을 건축하였다. 옛 성전 터전위에 B.C.20년에 착공하여 외형은 9년만에 완성되었으나 세부 공사는 A.D.63년경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한편 예수님은 이같은 헤롯 성전을 가리켜 이것을 무너뜨리면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에 상징에 불과한 헤롯 건물 자체를 가리키신 것이 아니라 그 건물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자체이신 당신을 죽이면 삼일만에 다시 사실 것을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었다.(요 2:10) 어쨌든 근 80년이 넘게 걸려 세운 이 헤롯 성전은 그 성전의 주인되신 하나님은 믿지 않은 불신의 결과 그저 죽은 건물로 존재하다가 AD 70년 완공된지 불과 수년 후에 영원히 함락되고 만다.

 

 오직 성전 서쪽 외벽만 역사를 위해 남겨 두었는데, 이 벽은 아직까지도 유대인들의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헤롯왕의 무덤 헤로디움(Herodium, 해롯의 궁전), 베들레헴 인근

 베들레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언덕위의 유적이 바로 헤롯왕의 무덤이 발견된 헤로디움이다. 헤로디움은 헤롯의 궁전이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헤롯왕의 유골함 등이 발견되었다.

 

<구약 시대의 성전>

솔로몬 성전(The Temple of Solomon)

 솔로몬에 의해, 모리아 산에 세워졌다. 7년의 공사 기간. (왕상6:38) 참고로 솔로몬 궁은 13년 동안 지어졌다.(왕상 7:1) 하지만 이 성전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의 군대에 의해 불질러지고 모든 기물들이 탕취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왕하25:8-11)

 

스룹바벨 성전(The Temple of Zerubbabel)

 스룹바벨은 다윗의 혈통을 지닌 자로서, 유대백성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던 중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킨 지도자였다.

 고레스 왕은 BC 53910월에 바벨론을 정복하고 이듬해인 BC 538년에 유다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귀환케 하였는데, 그때에 스룹바벨은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았다. 스룹바벨은 포로 귀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였다.(5:2) 페르시아 왕 다리오 1(522-486) 때에 이르러 학개와 스가랴의 권유로 완성되었다.(6:13-15) 하지만 이 성전도 오늘날까지 존재하지는 못했는데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알렉산더 제국이 4등분 되었고 그들 중에 하나를 통치했던 시리아의 아니오커스 에피파네스로부터 심하게 더럽혀지면서 성전의 모습을 상실하게 된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그때 안티오커스는 성전 앞에 제우스 신 제단을 만들어 놓았고 돼지들을 제물로 바치게 했으며 그 일들을 위해 배도한 제사장들을 사용했다고 한다.

 

헤롯 성전(The Temple of Herot)

 그렇게 더럽혀진 성전을 로마 제국에 돈을 주고 유대의 분봉왕이 된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46년 동안 보수한다. AD 20(2:20) 그것을 헤롯성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예수는 반드시 그것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 예언하셨다.(24:1-3) 그리고 AD 70년 경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그 성전은 훼파되었다.

 

<루살렘 성전은 몇 번 파괴 되었는가?>

 제대로 된 답변이 올라오지 않고 있군요. 예루살렘 성전은 총 3회에 걸쳐 건립되었다. 다만 세 번째 건축은 기존의 성전을 확장보수한 것이며, '제3성전(the Third Temple)'의 건설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제3성전은 메시아의 강림 이후에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의 성전('제1성전')은 솔로몬 왕이 건설을 명하여 BC 957년에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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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 4세기 이상 존속해 왔는데, BC 586년 바빌로니아의 나부-쿠두리-우수르(Nab?-kudurri-usur, 개역판 성서의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파괴했을 때 성전도 함께 파괴되었다.

 

 그 뒤 BC 539년에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개역판 성서의 '바사') 제국의 왕 키루스 2(개역판 성서의 '고레스')는 바빌로니아에 끌려와 있던 유다인들의 귀환과 성전 재건을 허용하였으며, 이에 따라 스룹바벨의 주도 하에 BC 535년에 착공되어 20여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구약성서 에스라서에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2성전'이다.

 

 그 후 5세기 이상이 지난 서기 1세기 초반에, 로마 제국을 등에 업은 괴뢰 통치자였던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 기존 성전이 너무 낡았고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중건을 선언했다. 이것은 이두매인 출신인 헤롯이 유다인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추구한 것이며, 46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 성전의 확장이었기 때문에, 새로 지은 것을 '3성전'으로 부르지는 않는다.

 

 이 성전은 오래 존속하지 못했고, 서기 66년에 시작된 유다인들의 반란이 진압되는 와중이었던 서기 70년에 로마군이 이 성전을 파괴했다. 이후 성전은 재건되지 않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통곡의 벽'은 과거 성전의 일부이다.

 

- BC 20년에 착공한 헤롯 성전은 15층 높이의 웅대한 건축물로서, 지성소와 성전에 있어 이전 성전들의 평면도를 따라 이루어졌다. 성소는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의 자리에 세운 것으로서, 완공하기까지 18개월이 걸렸다.

 

- 성전을 둘러싸고 있는 바깥뜰은 A.D 64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다.

 

<롯대왕(Herod the Great, BC 73?~BC 4 (69세))>

 헤롯왕 일가의 첫왕이다. 헤롯은 유대의 귀족. 에돔의 총독 안티파텔의 아들로서 이 부자는 유능하고 간교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BC 63년 폼페이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로마는 다시 왕위를 두고 두 왕자의 싸움이 있었다. 안티파텔은 그 혼란중에 교묘히 유대땅을 관할한 통치권을 얻어내고 그 아들 헤롯은 갈릴리지역을 관할하는 분봉왕에 오른다. 그러나 이내 반란이 일어나 헤롯은 로마로 도피하고, 다시 원로원의 힘으로 유대의 왕으로 임명된다. 이스라엘에서는 그를 저지하는 처절한 내란이 계속되었으나 그는 로마로부터 군대를 얻었고 이를 저지한다.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헤롯은 유능하고 간교하며 잔인한 인물이었다. 군중앞에서의 웅변술,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외교술, 전쟁에서의 승리를 장담하는 결단력 등 로마의 황제도 탄복할 만한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유능함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일이 로마를 위해 조공을 징수하는 능력은 백성에게서 잔인한 착취를 일삼았다. 이런 그가 백성들의 환심을 위해 세운 성전이 스룹바벨의 성전이라고 불리우는 헤롯의 성전이다. 예루살렘의 제2성전인 헤롯의 성전은 크고 웅장하고 화려했다. 성전건축은 BC 19년에 시작되었으나 그가 죽은 BC.4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헤롯은 본문의 기록처럼 대학살을 저지를만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백성의 환심을 한몸에 받는 젊은 대제사장을 수영장에서 익사시켰으며, 총애하던 왕비를 목 매달아 죽이고 죄없는 두 아들마저도 처형했으며, 동박박사가 다녀간 이후 자신이 죽기 바로 전에 또 다른 아들을 처형했고 임종 당시까지 유대의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했다. 동방의 박사들이 유대의 왕을 찾을 때 왕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는 본문의 기록은 그가 죽기까지 사악함이 더 했음을 온 이스라엘이 느끼는 것이었다. 요셉이 멀리 애굽까지 망명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단이 이 땅에서 메시아의 시작을 방해함은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권세를 가지고 또 그의 충성되고 유능한 살인병기 헤롯을 내세웠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 이 성전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 , 제단, 출입구 등 각종 치수는 요세푸스, 미쉬나 등에 언급되어 있으나, 해석상 차이가 있다.

 

 이 문서는 신약에서 유아학살을 명한 헤롯왕에 관한 것이다. 헤로데스 1(BC 73?~BC 4) 또는 헤로데(공동번역), 헤롯대왕(개역한글판)은 로마 제국 시대에 유대 지방에 분봉된 왕이었다. 흔히 기독교 신약성서 마태복음서(마태오 복음서) 2장에 나오는 동방 박사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어린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운 일로도 유명하다.

 

 헤로데의 아버지는 이도메네아의 안티파트로스, 어머니는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의 공주 키프로스로 헤로데는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며, 그의 가문은 이도메네아의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이었다. 이도메네아(이두매, 에돔)는 유대 남쪽의 지역이며, 마카베오 가문의 요한 히르카우스에 의해 정복당한 후 유대교로 개종했다. 한글성서에서는 이도메네아 지방을 이두매(개역한글판, 개역개정판, 표준새번역)또는 에돔(공동번역성서)으로 번역했는데 그 이유는 '에돔'을 헬라어로 '이두매'라고 하기 때문이다. 영어 성서에서는 이두메아(Idumea, NIVNASB), 이두마에아(Idumaea, KJV)라고 한다. 따라서 헤로데는 유대인이 아니라, 에돔에서 태어난 외국인이었고, 이는 유대 사람들이 헤로데를 싫어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래서 헤로데는 유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솔로몬 왕 시대의 영광이 담긴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고, 로마 군인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유대교 우대정책과 수도시설 개선사업을 실시했다.

 

 안티파트로스는 폼페이우스나 카시우스와 같은 로마의 유력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BC 47년 유대의 지방행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살이던 아들 헤로데를 갈릴래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BC 43년 아버지 안티파트로스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자 그는 암살자를 처형하고 돌아와 당시 명목상 유대의 왕가였던 하스몬 왕조의 공주 마리암의 청혼을 받았다. 당시 마리암은 아직 10대였으나 헤로데는 첫번째 부인인 도리스와 3살 난 아들 안티파트로스(헤로데의 아버지의 이름과 같음)를 버리고 마리암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유대교 제사장(사제) 가문과 결합하였다. BC 40년 하스몬 왕조의 안티고노스와 파르티아가 유대를 침공하자 그는 로마로 도망쳤고 거기서 로마 원로원으로부터 '유대의 왕'의 칭호를 받았고 BC 37년 유대로 돌아와 안티고노스를 이기고 집권한 이래 34년간 유대의 왕으로 다스렸다. 마르쿠스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사이의 내전 당시 헤로데는 안토니우스를 지원했으나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하자 로도스 섬에 있던 옥타비아누스를 만나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의 왕'의 지위를 다시 한 번 인정받았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는 마리암을 깊이 사랑하는 한편 또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간통죄로 처형했는데, 여기에 마리암의 동생인 살로메와 친어머니인 알렉산드라가 개입하였다고 한다. 마리암의 처형 이후 알렉산드라는 헤로데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을 여왕으로 선포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헤로데가 그녀를 재판없이 죽였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서에 묘사된 대로 헤로데를 잔인하고 음흉한 광기어린 군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지만,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힘쓴 선견적인 통치자이기도 했다.

 

 BC 25년에는 유대 지방에 대가뭄으로 기근이 나자 이집트로부터 곡물을 수입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

 

 헤로데는 자기 영토에 일종의 건축붐을 일으키고 많은 도시와 요새를 건설했다.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이 왕궁을 건설하고 국경에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새로이 정비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 배를 건조하는 데 꼭 필요했던 아스팔트를 사해에서 추출하여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배분하여 독점하였고 아우구스투스로부터 키프로스의 구리 광산을 임대하여 돈을 벌어들였다. 당시에 그가 건설한 도시로 유명한 것은 카이사레아 마르티아와 그 항구, 그리고 옛 사마리아의 유적 위에 세워져 아우구스투스에게 봉헌된 세바스테인데 카이사레아는 나중에 유대가 로마의 직할령이 된 후 그 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또한 유대인이 솔로몬 시대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했는데 이것을 헤로데의 성전 또는 그냥 두번째 성전이라고 부른다. 헤로데는 그외에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로도스 등에 수많은 건물을 지었고, 로마의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짓는 등 유대 전통과 맞지 않는 이교적인 일을 많이 했다. 올림픽 경기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그 주관자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대 지역에서는 헤로데에 대한 반감을 가진 유대인이 많았는데 메시아가 도래하면 헤로데의 통치가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라사이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면 그는 그리스-로마인들이나 유대 지역 외의 유대인에게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았고, 아나톨리아와 크레네에 사는 유대인의 보호자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헤로데의 가정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과 처형으로 얼룩졌다. 그는 여섯 번 결혼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인 마리암을 죽였고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장모까지도 죽여 버렸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살았으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했다. 후계자 문제를 두고 수차례 유언을 번복하기도 하고 결국, 왕위를 물려주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재판에 올려서 아우구스투스의 허락하에 처형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BC 4년 봄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유언을 통해 자기 영토를 3명의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에게는 자신의 전 영토를 주었고, 헤로데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리(갈릴래아)와 페레아를, 헤로데 빌립보 1세에게는 골란 지역과 베타니아, 트라코니티스를 각각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유언은 아우구스투스의 허락을 얻지 못했고 결국 세 아들 모두 ''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

 

헤롯의 유아학살(The Massacre of the Innocents)

 헤로데는 기독교의 신약성서에서 잠깐 언급이 된다. 신약의 동방박사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유아살해 전승이 그것이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직후 동방에서 박사 세사람이 커다란 별에 이끌려서 헤로데에게로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있다며 경배하고자 한다고 전한다. 헤로데는 그 아이가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제(제사장)들에게 그 새로 태어난 왕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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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언자들의 기록을 살펴본 사제들은 그 아이가 베들레헴에 있다고 하고 헤로데는 동방박사를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그 아이를 찾거든 내게 알려주시오, 나도 그 아이에게 경배를 드려야겠소...'라고 말한다.

 

 동방박사는 아기 예수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헤로데에게 알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그냥 돌아가 버린다. 한편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헤로데가 예수를 죽일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을 하고 헤로데는 동방박사에게 속을 것을 알고 베들레헴과 그 근처의 모든 2살 이하의 갓난 아이는 모두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요셉과 그의 가족은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서 살다가 그의 아들 헤로데 아르켈라우스의 밑에서 사는 것을 피하려고 나자렛의 갈릴래아로 옮겨간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의 기록외에는 다른 복음서나 기록이나 역사 기록에서는 관련 기록이 없기 때문에, 유아학살전승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서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해 유아학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는데,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역사가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아내 미리암, 세 아들(알렉산더, 아리스토불루스, 안티파터)를 죽이라고 할 정도로 잔인한 헤롯의 성품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유아학살의 만행을 저질렀을 수 있다고 보는 해석이다.

 

 반대로 헤로데의 잔인한 성품과는 별개로 그러한 학살이 근본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보기도 한다. 헤로데가 아내와 아들들을 죽였을 때 당시로서는 합법적 수단으로써 죽였는데, 헤로데는 법을 무시하거나 전횡을 일삼는 군주가 아니었음에도, 유독 베들레헴의 유아학살만은 불법적 수단으로써 죽였기 때문에 그 진실성이 의심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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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근본적으로 헤로데에게는 살인(사형)에 대한 권한이 없었고, 헤로데가 죽였던 아내나 아들들은 모두 총독의 허가를 받아서 죽였다. 그리고 예수뿐만 아니라 모세의 경우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나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에게도 그와 비슷한 설화가 전해 온다는 점을 들어 허구적 장치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태오복음서의 예수 유년 시절 이야기는 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왜냐면 예수 시대의 유아학살 이야기와 성 가족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는 모세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헤로데 대왕에 의해 말살되었다는 이야기는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 남자 어린이들이 파라오의 민족말살정책으로 학살당했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또한 성 가족이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했다는 이야기는 모세가 파라오를 피해 이집트와 가나안 사이의 지역인 미디안으로 피난했다가 파라오가 죽자 이집트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신약성서에는 헤로데 대왕보다는 그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요한의 체포와 처형과 관련하여 더 많이 언급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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