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Gruziya, Georgia, Saqartvelos Respublika. 사카르트벨로)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중 하나로 수도는 트빌리시이다.

 중세에 강력한 조지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10~13세기였다.

 오랫동안 터키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1921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기에 조지아의 경제는 현대화되고 다양화되었다.

 1991년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1990년대는 조지아에 있어 불안정하고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시기였다.

 독립 후 최초로 구성된 정부가 전복되었고,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주의 운동들이 등장했다.

 

 공식 이름은 조지아 공화국(Saqartvelos Respublika. 사카르트벨로)이다.

 과거에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이다.

 

 흑해 동남해안을 끼고 있으며, 카프카스 산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 러시아, 남쪽으로 터키, 동남쪽과 남쪽으로 아제르바이잔 및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조지아에는 3개의 민족 자치공화국이 포함되는데, 북서쪽에 아브하지야(주도는 수후미), 남서쪽에 아자르(주도는 바투미), 북쪽에 남오세티아(주도는 츠힌발리) 자치공화국이다.

 

 조지아인들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깊으며, 그들의 문화유산 역시 유구하고 풍부하다. 중세에 강력한 조지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10~13세기였다. 그 후 오랫동안 터키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918~1921년에 조지아 독립국을 유지했다가, 1921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 1936년 조지아는 소련의 위성연방공화국으로 편입되어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될 때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다. 소비에트 연방기에 조지아의 경제는 현대화되고 다양화되었다. 가장 독립적 성향이 강했던 연방공화국 가운데 하나였던 조지아는 1989년 11월 19일 독립적 주권을 선언했고, 1991년 4월 9일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1990년대는 조지아에 있어 불안정하고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시기였다. 독립 후 최초로 구성된 정부가 전복되었고,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주의 운동들이 등장했다.

 

 

자연환경

 조지아 대부분의 지역은 산악지대로, 카프카스 산맥에 속하는 봉우리들의 평균 높이가 4,600m 이상에 이른다. 카프카스 산맥이 차가운 북풍을 막아주고 흑해의 영향을 받아 기후는 온난하다. 조지아 서부에서는 습윤한 아열대성 해양기후가 나타나는 반면, 동부는 온대성 습윤기후에서부터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까지 다양하다. 흑해 연안에 비옥한 콜히다 저지가 있으며, 리오니 강과 잉구리 강이 그곳을 지난다.

 

 

국민

 조지아인들은 처음부터 카프카스 산맥 주변에 정착한 민족으로 추측되며, 4세기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다. 6세기부터 여러 봉건국가들이 이 지역에 세워졌으나 13세기에 몽골을 비롯한 이민족들에게 침략당하면서 500만 명에 이르던 인구가 크게 줄어드는 대참사를 겪었다. 19세기초 러시아에 합병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인구가 13세기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조지아인(그들 자신은 카르트벨레비라고 함)들은 카르트벨리야어족(남카프카스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며, 대부분이 조지아 정교회의 신자이다. 소수민족으로는 아르메니아인(약 8%), 러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등이 있다.

 

 

경제

 공업이 발달했으며 수력발전· 광업· 기계산업 등이 특히 활발하다. 석탄, 망간, 비금속계 광물이 채광되며 1956년부터는 철도 생산되고 있다. 전동차· 대형차량 및 토목공사 장비를 비롯하여 선반· 정밀기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며 무기질비료· 합성섬유· 의약품 등의 화학공업도 이루어진다. 그밖에 면· 모· 실크 등의 천연섬유와 그것을 소재로 한 의복이 생산된다. 조지아의 농지는 부족하고 경작하기도 어려워 홍차· 감귤류· 포도· 사탕무· 담배 등 노동집약적 농업에 적합하다. 이밖에 교통 기반시설이 잘 정비되어 있다.

 

 

정치 사회

 1990년 복수 정당의 참여가 보장된 가운데 자유총선거가 치러졌다. 이 선거는 비공산당 연합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들은 1991년 조지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1992년 조지아는 1921년에 제정된 소비에트 시대 이전의 헌법을 복원시켰다. 같은 해 헌법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행정부 권한의 허용범위에 관한 오랜 논쟁 끝에 1995년 새 헌법을 채택했다.

 

 국가의 수반인 대통령이 광범위한 권한을 행사하며 총리와 내각을 임명한다. 입법부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235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최고회의이다. 사법부는 지방·시 법원과 최고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0년대까지 소련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조지아 공산당이 유일 정당으로서 국가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점차 고조되는 민족주의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개혁 정책에 힘입어 많은 정치집단이 등장했다. 현재 주요 정당으로는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이 결성한 조지아시민연합, 개혁 성향의 국민민주당, 조지아 독립을 촉진하기 위해 1989년에 결성된 조지아인민전선, 1893년에 결성되었다가 조지아의 소련에 병합으로 해산되었던 조지아사회민주당 등이 있다.

 

 조지아는 최고 수준의 의료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온천으로 유명하다. 중등교육까지는 무상 의무교육이며, 각 단계마다 높은 진학률을 보인다. 대부분의 학교에서 조지아어를 사용한다. 대표적인 고등교육 기관으로 1918년에 설립된 트빌리시국립대학교가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발행되고 있는데 대부분 조지아어를 사용한다. 라디오 방송은 조지아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조지아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 예술

 조지아는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4세기에 문자가 만들어졌고, 5세기부터 조지아 특유의 문학이 나타났다. 조지아인·그리스인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친 고대의 고등교육 기관이 조지아 중부의 콜치스에 있었으며, 중세에는 중세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인 이칼토· 겔라티의 학당들이 12세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했다.

 

 12세기에는 조지아인의 민족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민족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 (Vepkhis-tqarsani)>가 나왔다. 그 후 18세기에 작가 술칸-사바 오르벨리아니, 소설가· 시인· 극작가 일리아 차프차바제 등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극작가 기오르기 에리스타비가 근대 조지아 연극을 확립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서정시인 아카키 체레텔리, 카프카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 자연시인 바자 프샤벨라 등이 활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조지아 출신인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많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소설가 미헤일 자바히슈빌리, 시인 티치안 타비제가 처형되고 시인 파올로 이아슈비리는 정부의 비판을 받고 자살했다. 1987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텐기즈 아부라제 감독의 영화 <후회(Repentance)>는 당시의 억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조지아는 연극과 건축 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 조지아 연극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연극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왔으며, 아르메니아 건축과 더불어 비잔틴 양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조지아의 건축문화는 오늘날 많은 수도원· 교회 등의 대형 건축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신문· 정기간행물이 조지아어로 발행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조지아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조지아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조지아(Georgia) 개요

o 위치: 아시아 북서부

o 수도: 트빌리시

o 면적: 69,700

o 공식명칭: 조지아(Georgia)

o 인구: 약 400만 명(2022년)

o GDP: 162$(2022년. 세계 126위)

o 기후: 아열대성기후

o 민족 구성: 조지아인(84%), 아르메니아인(6%), 아제르바이아인

o 언어: 조지아어

o 정부/의회형태: 중앙집권공화제 / 다당제 & 단원제

o 종교: 조지아정교(84%), 이슬람교(10%)

o 화폐: 라리 (GEL)

o 국가번호: 995

o 인구밀도: 56/

o 전압: 220V / 50Hz

o 도메인: .ge

 

 

조지아(Georgia) 역사

 조지아 일대에 처음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목축과 농업에 종사하던 부족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콜치스 라고 알려진 전설적인 부(富)의 땅은 고대 그리스인들에까지 알려졌다. BC 65년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AD 337년 이후 3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 간의 분쟁에 휘말렸다. 654년 이후 아랍의 칼리프들이 이 일대를 다스렸는데, 그들은 티플리스(트빌리시) 시를 거점으로 토후국을 건설했다.

 

 8세기 말부터 12세기까지 아르메니아에서 기세를 떨쳤던 바그라티드 왕조가 조지아인들과 카프카스 혈족이 살던 이 지역을 통일했다.

 

 바그라트 3세(975∼1014)는 조지아 동부와 서부의 모든 공국을 하나로 통합했다. 조지아는 타마라 여왕의 재임(1184∼1213) 동안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에서 북서쪽으로 체르케스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범(汎)카프카스 제국을 이루면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범카프카스 제국이 몽골의 침략을 받은 1220년부터 조지아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1386∼1403년에 티무르의 맹공격을 받고 경제적·문화적으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타격을 입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함락되면서 조지아는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와 교류할 수 없게 되었고, 그후 3세기에 걸쳐 투르크와 페르시아인들의 계속되는 침공에 시달렸다.

 

 1783년 러시아와 조지아 조약을 맺어 독립을 보장받는 대신 러시아의 종주권을 인정하기로 했으나, 1795년 페르시아의 공격을 받았을 때 러시아로부터 원조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1801∼64년 조지아 내의 왕국들은 차례로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조지아를 모든 외부세력으로부터 보호하여 그 실체가 말살되는 것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조지아는 1917∼21년에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지배권에 속하는 자카프카지예라는 이름의 나라에서 자카프카지예 독립국으로, 이어 조지아 독립국이 되었다. 조지아 독립국은 처음에는 독일 보호령이었으나 이어 영국에 점령되었다가 1920년 1월 사실상 독립했고, 1921년 연합국으로부터 합법성을 인정받았다.

 

 1921년 2월 적군에 의해 소비에트의 지배를 받는 자카프카지예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1936년에 조지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대체되면서 소련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1990년 조지아 역사상 최초로 복수 정당이 참여한 가운데 자유총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독립을 기치로 내세운 비공산 연합이 승리해 정권을 잡았고, 1991년 4월 9일 조지아는 마침내 독립을 선언했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한 즈비아트 감사후르디야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감사후르디야의 권위적 통치는 지지세력의 반발을 초래했고, 1991년 말에는 내전이 발발했다. 결국 감사후르디야는 1992년 1월 대통령직에서 축출되고, 3월에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소련 외무장관 출신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가 그의 뒤를 이었다. 조지아는 1992년 국제연합(UN)에, 1993년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했다.

 

 1992년 북서쪽에 위치한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이 분리 독립을 선언하자 조지아 정부가 군사적 대응에 나서면서 조지아는 내전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1993년 7월 러시아의 중재로 양측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며, 이에 따라 UN 조지아 정전감시단(UNOMIG)이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브하지야 자치공화국 및 남오세티아 내의 분리 움직임과 다른 내부적 위협들에 대처하는 한편, 미국·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우호적 관계를 통해 신생 공화국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는 중이다.

 

 

출입국 정보

비자

- 여행 목적인 경우, 무 비자 입국 가능 (90일 체류)

- 유효기간 3개월 이상 남은 여권

 

출입국 주의사항

- 휴대품 통관기준 까다로우므로 주의 필요 (면세 한도 숙지)

 

 

 트빌리시(Tbilisi) 기후()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트빌리시

(Tbilisi)

최고평균

1.5

4.1

10.5

18.0

23.3

26.8

28.8

28.5

24.6

18.0

10.0

3.8

최저평균

 -5.5

-3.3

0.3

5.6

10.5

14.0

15.6

15.0

11.1

5.7

1.6

-2.6

평 균

 -2.0

0.4

5.4

11.8

16.9

20.4

22.2

21.8

17.9

11.9

5.8

0.6

강수량mm

40

36

38

46

70

77

64

58

42

32

49

43

 

 

관광 명소

트빌리시(Tbilisi)

 트빌리시(Tbilisi)는 조지아의 수도이다.

 도시의 면적은 726㎢이며 인구는 약 140만 명이다.

 

 트리알레티 산맥과 카르틀리 산맥 사이를 흐르는 쿠라(조지아어로는 므트크바리)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458(또는 455)년에 건설되었으며, 같은 해에 조지아 왕국이 수도를 므츠헤타에서 트빌리시로 옮겼다. 트빌리시는 자카프카지예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길을 장악하고 있던 전략상의 중심지였다.

 

 1386년에는 티무르에게 약탈당했다. 투르크인들에게도 몇 차례 정복되었으며 1795년에는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거의 불태워졌다. 마침내 1801년 러시아인들에게 점령되었으며, 블라디카프카스에서 대(大)카프카스 산맥을 가로질러 트빌리시에 이르는 조지아 군용도로를 건설하여 교통장애를 개선했다. 1872년에 흑해의 포티, 1883년에 카스피 해의 바쿠까지 철도가 부설되었다. 1921년 조지아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문화 및 교육 중심지로서 종합대학교와 그밖의 여러 고등교육기관를 비롯해서 100여 개가 넘는 연구소들이 있다.

 

 또한 공업 중심지로서 경공업이 활발하여 전동차· 공구· 농기계· 전기장비 등이 생산되며, 기관차 등의 각종 철도차량 수리소가 있다. 직물, 가죽제품, 신발류, 가구, 맥주, 포도, 알코올 음료 및 다양한 식품도 생산된다. 1966년에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트빌리시 올드타운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19세기 절충형 도시구조의 형태를 보여주는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간직하고 있는 건축 구조물들은 5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건축물로, 트빌리시의 신시가지와 대조를 이룬다.

 많은 유적들이 기독교 건축양식의 사조를 알 수 있고, 고대 도시로서의 가치가 높아 트빌리시 역사지구로 지정되어 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시오니 성당(Sioni Cathedral)

 최초 건립 이후에 외세의 파괴에 의해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끝없이 재건에 재건을 거듭한 시오니 성당은 트빌리시의 '시오니 쿠차'라는 거리명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575년경 이베리아의 왕자 구아람이 교회를 세우기 시작해, 그의 후계자 아다르나제의 재임 시절인 639년에 완성되었다.

 이런 오랜 역사를 견뎌내고 남아있는 교회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물다.

 

 

자유의 광장(Freedom Square)

 트빌리시의 자유 광장 한복판에 자유기념비(35m)가 있다. 꼭대기에 건국신화의 성(聖) 조지(5.6m) 금빛 동상이 있다. 말을 타고 용을 찌르는 모습이다.

 황금빛 동상이 화려하게 자리잡은 트빌리시 자유의 광장은 트빌리시의 중심에 위치하며 구 시청사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트빌리시 관광의 시작점이자 끝점 루스타벨리 거리(Rustaveli Avenue)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도 다시 중심이 되는 곳, 그곳이 바로 루스타벨리 거리다. 조지아가 낳은 세계적인 대 작가인 루스타벨리(Shota Rustaveli, 1172~1216)의 이름에서 그 명칭을 정하였다.

 이곳은 한 나라의 수도의 최대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데 국력이 약한만큼 우리나라의 명동이나 강남같이 화려하고 볼거리로 넘쳐나는 거리는 아니지만 유럽의 느낌과 러시아의 느낌 그리고 또 동양적인 느낌이 묘하게 어우려진 곳이다. 여유있는 시민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트빌리시 관광을 하기 위해서 이곳은 반드시 거쳐야하는 관문 쯤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각종 대중교통이나 관광정보, 맛집, 호텔등이 밀집해 있는 것도 그 이유중에 하나다.

o 주소: Freedom Square to Kostava Street, Tbilisi, Georgia

 

 

나리칼라 요새(Narikala Fortress)

 트빌리시 구시가 뒷편 언덕 위에 세워진 나리칼라 요새는 4세기경에 페르시아인이 짓기 시작하여 아랍족장이 8세기경 왕궁을 지으면서 완성된 곳으로 트빌리시에서 가장 오래된 방어시설 중 하나이다.

 나리칼라는 옛 페르시아어인 나리 칼라(Nari-Kala)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접근 불가능한 요새'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를 이용한 이동도 가능하며, 요새에서 BC 4세기경 축조된 트빌리시 올드타운을 조망할 수 있다.

 

 

트빌리시 시내 야경투어

 도심 한가운데 쿠라강이 흐르는 트빌리시 올드타운에서 은은한 가로등에 비춰져 멋스러움을 더해지는 올드타운의 골목골목을 구경한다. 이후 푸니쿨라에 탑승하여 트빌리시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에 올라 도시 전체의 야경을 관광한다. 또한 전망대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음료를 제공한다.

o 소요시간 약 1시간~1시간 30분

 

 

 

시그나기(Sighnaghi)

 조지아(그루지아)의 카케티(Kakheti)주에 있는 마을이다.

 면적: 2,978㎢

 

 조지아(그루지아)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카케티 주에 속한 마을로 동명의 자치 지구인 시그나기의 행정 중심지이다.

 전체 인구는 약 2천 1백여 명으로 조지아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마을 중 한 곳이다.

 

 와인과 전통 방식의 카펫, 조지아의 전통 음식인 므츠와디(mtsvadi) 등이 이 마을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자연 환경이 아름답고 역사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관광지로써도 인기를 얻고 있다.

 

 시그나기와 주변 지역은 1975년부터 역사 지구로 지정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다. 특히 18세기에 지어진 요새의 유적과 두 곳의 조지아 정교 교회가 이 마을에 있으며, 마을 근교에 9세기에 건축되고 17세기에 재건된 성녀 니노의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이 있다.

 

 1762년에 조지아의 왕인 헤라클리우스 2세(King Heraclius II)의 지원으로 이곳에 마을이 세워졌으며 이 지역을 공격하고 약탈을 일삼는 다게스탄 부족들로부터 마을을 보호할 수 있도록 요새를 건축하였다.

 

 이후 약 100여 가구가 이 마을에 자리를 잡았으며 상업과 무역이 발달 하였으나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마을의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어 농업을 주요 산업으로 하는 작은 마을로 퇴화되었다.

 

 독립 이후 현재까지 조지아 정부에서는 이 마을을 조지아 관광 산업의 요지로 육성하기 위해 근본적인 재건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o www.signagi.com.ge

 

시그나기 성벽(Sighnaghi Wall)

 길게 장관을 이루며 둘러싸여 있는 방어용 벽은 18세기 후반, 국왕 엥르크 2세에 의해 세워졌다.

 23개의 벽에 세워진 망루는 각 인근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지었다.

 이곳에서 코카서스 산맥과 알라자니 계곡의 아름다운 장관을 전망할 수 있다. 

 

 

 

시그나기 와이너리 투어(Sighnaghi Winery Tour)

 이곳에서는 와인을 만들 때 과육은 물론 줄기, 씨, 껍질을 모두 '크베브리'라 불리는 달걀 모양의 항아리에다 넣고 밀봉한다.

 마치 우리가 겨울 김장김치를 땅속에 묻어 숙성의 과정을 거치듯 5~6개월 정도의 숙성 과정을 거쳐 빚어내는 조지아 전통 와이너리를 볼 수 있다. 

 

 

 

성녀 니노의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

 성녀 니노(St. Nino, 296~338년경 또는 340년경)의 보드베 수도원(Bodbe Monastery)는 조지아 정교회 수도원 단지로 조지아 카케티 주시그나기 마을에서 2km 거리에 자리한다. 본래는 9세기에 건축되었지만 특히 17세기에 의미깊게 리모델링되었다. 그 수도원은 4세기에 조지아의 여성 복음 전도자 성녀 니노의 유적과 성골함이 안치되어 있을 정도로 그녀와 관계가 많은데 기인하여, 오늘날에는 수도회로 기능하며 조지아에 있는 주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보드베 수도원은 알라자니 계곡이 보이는 가파른 산허리의 커다란 편백 나무 숲에 둥지를 틀었다.

 

 현존하는 교회는 3돌출 앱스가 있는 3-본당 회중석 바실리카이며, 그 성당은 본래 9~11세기 사이에 건축되었지만, 그 다음에 의미심장하게 재건축 되었다. 외부와 내부 벽에는 모두 회반죽이 칠해져 있어 17세기와 17세기의 복구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 수도원에는 성녀 니노의 묘소 뒷편에 건축된 앱스가 있는 소형 홀 교회는 대형 측랑이 있는 바실리카와 연결되어 있다. 단독으로 있는 3층 종탑은 1862~1885년 사이에 세워졌다. 바실리카 주변을 두르고 있는 만들어진 벽은 17세기의 어느 때에 파괴되었지만 2003년에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수도회에서 약 3km 거리에는 1990년에 축조된 성 자불론과 성 소사나의 작은 채플 성당이 있다. 그 성당은 성녀 니노가 주보성인이며, 지방 전설에 따르면, 그녀의 기도를 통하여 나타났고 치유의 은사가 내려졌다고 한다.

 

 조지아의 전설에 따르면, 성녀 니노는 조지아인들이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하는 것을 보고 카케티에 있는 보드베 계곡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죽었다(약 338~340년)고 한다. 미리안 3세(통치. 284~361)왕의 간청으로, 니노가 묻힌 곳에 작은 수도원이 건설되었다. 그 곳은 수도원에 의해 옹립된 카케티의 왕들이 즉위식 장소로 선호하기도 했다. 1615년에는 페르시아의 아바스 1세 샤의 대군에 에게 강탈당한 보드베 수도원은 카케티의 테이무라즈 1세 왕(통치. 1605~1648)에 의해 복원되었다. 보드베에서의 부도원 생활의 부흥과 함께, 신학교가 개설되었다. 또한 그 수도원은 조지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교 서적 보관소 가운데 한 곳이며, 몇몇 종교 작가들과 문인들의 고향이다.

 

 

 조지아가 러시아 제국에 합병(1801)되고 난 후에도, 보드베 수도원은 대도시 주교 존 마카슈빌리 아래서 번영을 계속했고 차르 러시아의 알렉산데르 1세의 후원을 받았다. 1823년, 그 수도원은 수리되었고 벽화로 장식되었다. 1837년에 존이 죽음으로 1810년 부터 있던 조지아의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 대리는 그 수도원의 수도회를 폐지했고 그 수도원을 사목구 성당으로 전환했다. 10년이 지나고, 수도원은 다시 파손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1860년에 대수도원장 마카리우스 (바타타슈빌리)가 수도원을 복원하기 시작했으며 성가 학교를 설립했다. 성녀 니노가 주보성인인 그 채플 성당은 1880년대에 미하일 사비닌에 의해 재단장 되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데르 3세 차르는 그 곳에 수녀원을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1889년에 그 수도원을 방문했다. 소생한 수도회는 자수와 미술을 가르치는 학교도 운영했다.

 

 1924년, 소비에트 정부는 수도원을 폐지했고 그곳을 병원으로 개조시켰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이후에, 보드배 수도원은 수도회를 다시 시작했다. 그 복원 작업은 1990~2000년 사이에 이루어 졌으며 2003년에 재개되었다.

 

 

 

◈ 풍요로운 역사를 간직한 중세의 도시, 조지아의 옛수도 므츠헤타(Mtskheta)

 조지아(그루지야) 자카프카스 지방에 있는 도시.

 트빌리시 북서쪽 16km, 쿠라강()과 아라그비강의 합류점에 있다.

 2∼5세기에는 이곳에 있던 이베리아(조지아) 왕국의 수도였다.

 종교 중심지이며, 스베티츠호벨리대성당과 즈바리성당 등이 남아 있다.

 구릉 위에는 조지아왕이 살던 아르마즈지헤성(城) 유적이 있고, 벽돌제조· 제재· 성냥제조 등이 활발하다.

 러시아혁명 전까지 이곳은 노아의 후손 므츠헤토스(Mtskhetos)가 창건한 곳이라고 주장되었다.

 

므츠헤타의 역사적 기념물들(Historical Monuments of Mtskheta)

 조지아(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지점의 므츠헤타에 있는 고대와 중세 유적들. 특히 기독교 관련 건축물이 많으며,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있다.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에 하나로 과거 이베리아(Iberia) 왕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곳이다. 므츠헤타가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던 시기인 4세기 초 기독교가 전파되어, 초기 기독교 관련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교회들은 코카서스 지방의 대표적인 중세 종교 건축물이다.

 

 '살아있는 기둥 교회'라는 의미를 가진 스베티즈코벨리(Svetitskhoveli) 대성당은 이곳에 기독교가 전파되던 4세기에 최초로 건립된 성당으로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과거에는 왕이 머무는 왕궁이자 왕묘 역할까지 겸했으며,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도 이곳에서 치렀다. 현재도 종교적인 위치는 변함이 없어서 므츠헤타와 트빌리의 대주교이자 조지아 정교회 총주교가 이곳에 머물고 있다. 조지아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녀 니노(St. Nino)가 아라크비(Aragvi) 강의 지류와 므츠헤타가 만나는 이 지점을 조지아 최초의 교회를 세울 장소로 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건물은 11세기에 재건된 것으로 옆에서 보면 중앙으로 갈수록 높아지는 계단형 구조를 띠고 있으며, 중앙에 약 40m 높이의 원통형 돔이 있다. 건물 외벽은 크고 작은 아치로 장식되어 있고, 16~17세기에 그려진 내부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십자가 성당'이라는 뜻의 즈바리(Jvari) 성당은 6세기에 건립되었으며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도 성녀 니노와 관련된 전설이 전하는데, 성녀 니노가 므츠헤타에서 가장 높은 이 언덕에서 기도를 한 뒤 십자가를 세웠고, 그 자리에 성당이 들어섰다고 한다. 545년 가로 8.3m, 세로 5.5m의 소성당이 들어섰고, 586~605년 사이에 바로 옆에 가로 20.2m, 세로 16.25m의 대성당이 들어섰다. 성녀 니노가 꽂았다는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므츠헤타에는 11세기에 지어진 삼타브로(Samtavro) 성당, 기원전 3세기의 아르마즈지헤(Armaztsikhe) 요새, 기원전 1세기의 아르마즈지헤 성을 비롯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Svetiskhoveli Cathedral)

 장엄한 분위기의 스베티츠 호벨리 성당은 조지아의 기독교의 개종을 상징하기 위해 세워진 성당이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독특하고 환상적인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우뚝 솟은 내벽을 가진 이 성당은 조지아에서도 최대의 고대 건축물이다.

 또한 수세기 동안 조지아 왕들의 대관식과 장례식등이 이루어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 므츠헤타 언덕에 있는 즈바리 수도원(Jvari Monastery)

 므츠헤타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조지아인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곳으로 통한다. 즈바리(Jvari)는 십자가를 뜻하는데, 4세기 초 이베리아 왕국의 미리안 3세를 기독교로 개종시킨 성녀 '니노'가 당시의 이베리아 왕국 수도였던 므츠헤타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서 기도를 드리며 포도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세웠고, 그곳에 즈바리 수도원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 건물 안에 보관된 대형 십자가를 볼 수 있으며, 이 십자가 안에는 성녀 니노의 십자가가 있다고 한다.

 수도원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므츠헤타 시내와 세 갈래로 흐르는 쿠라강의 멋진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 자연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카즈베기(Kazbegi)

게르게티 성 삼위일체 성당(Gergeti Trinity Church, 츠민다 사메바 성당)

 비잔틴 양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원뿔 모양의 돔을 가운데에서 이고 있는 성당이다.

 대천사 미가엘과 가브리엘,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황금빛 바탕에 그려진 천장의 모자이크는 12세기에 제작되었다.

 2,170m의 고지에 지은 성당으로 케비(Khevi) 지방에 있는 유일한 십자 모양의 교회이다.

 앞으로는 하얗게 눈덮인 카스베이산(5,047m)의 봉우리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사륜구동 지프차를 타고 20여분간 올라 간다.

 

 

카즈베크산(Kazbek Mt. - 5,047m)

 높이는 5,047m이다.

 카즈베크는 조지아어()로 '얼음 산'을 뜻한다.

 캅카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봉 중 하나이다.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북서에서 남동으로 뻗은 캅카스산맥 중앙부에 있으며, 두꺼운 빙하로 뒤덮인 성층화산이다. 200㎞ 서쪽으로 캅카스산맥에서 가장 높은 엘브루스산(5,633m)이 펼쳐져 있다.

 안산암· 유문암의 용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해발고도 3,300m 이상은 빙하로 덮여 있다.

 산기슭의 완사면은 방목지로 이용된다.

 해발 1,700m에 위치한 소도시 카즈베기에서 출발하여 고산목장을 가로질러 4,500m의 마일리 고원을 지나 정상을 등정할 수 있다.

 영국인 더글러스 프레시필드(Douglas Freshfield)가 1868년 최초로 등정에 성공하였으며, 등정하기 좋은 적기는 6월∼9월이다.

 

 

 

◈ 손을 뻗으면 하늘과 맞닿을 것 같은 구다우리(Gudauri)

모자이크 파노라마 조형물(Mosaic Panoramic Sculpture)

 조지아 구다우리에 위치한 모자이크 조형물은 소련 시절 러시아와 조지아 양국 간의 우정의 기념비이다. 모자이크 타일화가 붙어 있는 이 거대한 기념비는 12개의 반우 아치를 두고 콘크리트와 돌로 쌓아올린 것이다.

 1783년 체결된 게오르기에프스크 조약 200주년을 기념하여 1983년에 러시아-조지아 우정의 탑 모자이크 타일화가 붙어 있는 기념비이다.

 담배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을 표현한 타일화는 단순하면서도 분방하게 현실과 그 현실에서 비롯된 희망과 꿈을 모자이크로 표현한 그림이다.

 조지아-소비에트의 우정을 기념ㄹ해 만들었다는 모자이크 그림의 절반은 러시아, 나머지 절반은 조지아의 상징들을 담고 있는데, 실제 관계는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고 한다.

 

 

 

아나누리(Ananuri)

아나누리 성채와 교회(Ananuri Fortress Complex)

 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한 아나누리 성채는 13세기 아라그비 백작의 성이였으나 수도원 성채와 교회가 함께 들어선 복합건물이다.

 성채 뒷편 망루에 올라 진발리 호수와 성채의 전경은 장관을 이룬다.

 

 

 트빌리시에서 키즈베키를 가려면 조지아-러시아 군용도로를 이용한다. 이 도로는 실크로드의 교역로로 이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지아가 구소련의 연방국가였을 때도 이 도로를 이용했다.

 높은 대코카서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도 이들간의 교류는 이 군용 도로를 통해 많이 이루어졌다.

 

 이 군용도로를 타고 가면서 길가에 나타나는 양떼들과 소떼들, 그길고 야생화에서 시선을 빼앗기고 있던 중 갑자기 에메랄드 저수지가 하나 나타난다. 구소련 시절 강둑을 막아 수력발전소를 만들었고 이로 인해 진발리 저수지(Zhinvali Reservoir)가 생겼다.

 저수지를 조금 지나면 중세풍의 성채가 나타난다.

 슬픈 피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아나누리 성채이다.

 성채의 옆모습은 높은 성벽이 둘러 쌓여 있고 각기 다른 시기에 세워진 정방형과 원통형의 망루가 솟아있다. 두 개의 성곽과 서로 다른 구조의 교회 두 채가 서로 나란히 있고 성벽 밖은 진발리 산과 저수지가 성채의 배경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로 봐서 방어 목적의 요새이다. 지금은 두 채의 교회만 보이지만 원래는 세 채의 교회가 있었다.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하나는 전전히 파괴되었다.

 아나누리 성채는 건축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원래는 이곳 아나누리는 실크로드 상에 위치해 있고 열대 강국들의 지배를 여러차례 받으면서 다양한 건축 스타일이 혼합되어 나타났다. 그레코-로만, 비잔틴, 페르시아 제국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아나누리 성채는 카즈베기로 오고 가는 관광객들이나 러시아를 오가는 무역상들이 잠시 쉬어가는 장소다. 이곳 중간 지점에서 사람들은 잠시 화장실도 이용하고 아나무리 성채에 얽힌 슾픈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관광객들이 반드시 한 번쯤은 쉬어가는 장소라 기념품이나 먹을거리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아나누리 성채의 슬픈 이야기>

 아나누리(Ananuri Village)는 13세기부터 실로드의 한 축을 담당했던 무역 통로의 주요 거점 마을이었다. 지금도 조지아와 러시아 간의 무역사들은 아나누리 마을이 있는 군용도로를 이용한다. 13세기의 아나누리 마을은 이지역을 통치하던 아라그비 에리스타비(Aragvi Eristavi) 왕조의 소유였다.

 16~17세기 경이 되어서야 아라그비 산과 강을 배경으로 세워진 아나누리 성채는 이후 수많은 전쟁을 겪었다. 전쟁 때마다 이곳은 피로 얼룩졌다. 이곳을 지재하려는 두 가문의 뺏고 뺏기는 싸움 속에서 두 가문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아라그비 백작은 아나누리에서 약간 떨어진 크사니(Ksani) 지역의 샴스세(Shamshe) 공작 가문과 철천지 원수 지간이었다.

 1739년 샴세스 공작 가문은 군대를 이끌고 이고으로 쳐들어 와 아라그비 백작 가족과 백성들을 죽였다. 아라그비 백작은 항복을 하면서 자신의 가족들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샴스세 공작은 처음에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백지장에 불과했다. 아라그비 가족은 승모승천교회와 바로 붙어있는 네모난 모양의 탑 속에 들어가 숨었다. 이 탑은 가늘고 높게 만들어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외부인이 쉽게 알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탑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높은 위치에 있었고, 사다리를 이용해야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라그비 백작 가족들은 탑 안으로 들러간 후 사다리를 치우자 적들은 그 탑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적들은 다른 방법으로 그 탑에 불을 질렀다. 이렇게 해서 아라그비 백작 가족은 모두 이 탑에서 죽었다.

 그러나 샴스세 공작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그의 악행이 세상에 알려지지 시작했다. 4년 후 이 지역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샴스세 공작을 이 성채에서 쫓아냈다. 농민들은 아라그비 백작의 친척인 테미라즈 2세(Teimirai Ⅱ)를 초청하여 직접 이곳을 통치하도록 요청하고 이 성채를 맡겼다. 그러나 이 성채의 터가 나빠서인지 테미라즈 2세 역시 농민들에게 인심을 잃었다. 농민들은 다시 반란을 일으켜 테미라즈 2세를 다시 쫓아냈다.

 이렇게 철천지 원수였던 두 가문은 모두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주변에서 가장 강력했던 카케티 왕 에레클 2세(Erekle Ⅱ)가 농민봉기를 진압하고 이 지역을 완전히 통치한다.

 

 

 

◈ 고대 동굴도시 우프리스치케(Uplistsikhe)

 우프리스치케는 동부 조지아에 있으며, 시다 카르틀리의 고리시에서 10km 거리에 있는 암석 도시이다.

 

 '주의 요새'로도 불리는 우프리스치케는 기원전 6세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동굴 도시 조지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형 정착지 가운데 한 지역이다.

 

 므트크바리 강의 좌측 제방에 바위를 잘라 건설된 그 고지대 도시는 초기 철기 시대에서 후기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구조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아나톨리아와 이란에서 건너온 다양한 암석 절단 기술들이 적용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교와 기독교 건축 양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조합이 주목할만 한다.

 

 우프리스치케는 고고학자들이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형 정착지 가운데 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전략적으로 고대 카르틀리 (또는 고전 고대 작가들에 의해 이베리아라고도 알려진) 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그 도시는 나라의 주요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 도시의 연륜과 중요한 지위는 조지아의 중세 시대 문헌에서 그 도시의 창건자가 신화속의 므츠츠케토스의 아들이며 카르틀로스의 손자인 우플로스로 묘사되게 했다.

 

 4세기에 카르틀리의 기독교화와 더불어, 우프리스치케는 새로운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인 므츠헤타와, 나중에는 트빌리시에게 그 입지가 넘어가며 중요했던 지위는 쇠퇴했다. 그러나, 8~9세기에 무슬림의 트빌리시 정복 기간 동안에 우프리스치케는 조지아의 중요한 아성으로 재출현했다. 14세기에 몽골의 침입으로 그 도시의 궁극적인 빛은 상실하게 되었다. 그 전쟁의 결과로 도시는 사실상 유기되었고, 어쩌다 외국이 침입 하면 임시 피난처로 사용될 뿐이었다.

 

 

 

 우프리스치케 단지는 잠정적으로 거의 8헥타아르에 이르는 세 부분인 남부(하부), 중부(중앙), (북부)상부로 분할 될 수 있다. 중앙 부분은 가장 큰 부피의 암석-절단 구조로 제작되었으며, 남쪽 지역과 세폭 절단 암석 통로와 터널로 연결 되어 있다. 좁은 골목길들과 드문드문 보이는 계단들은 중앙 "도로"에서 다른 구조로 변형되며 퍼진다.

 

 몇몇 큰 구조물들에는 통나무 모양을 본떠 바위에 새겨 넣은 장식과 정간이 있는 터널식-둥근 천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동굴에는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다. 그 몇 곳의 큰 구조물들의 후면과 측면에는 니치가 있기도 하는데, 아무래도 의식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 단지의 정상에는 기독교 바실리카가 있는데, 그 성당은 12세기에 석재와 벽돌로 건축되었으며, 거기서 고고학적 발굴로 금, 은, 동의 보석과 도예품들과 조각품들의 견본들을 포함하는 무수히 많은 다른 시대들의 가공품들이 발견되었다. 그 가공품들 중 상당수는 트빌리시 국립 박물관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가장 취약한 지역의 여러 부분들은 1920년에 고리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2000년에 제한 보호 프로그램을 착수한(세계 은행과 조지아 정부가 합동한) 조지아의 문화 유산 기금은 그 기념지의 하층부 기반 불안으로 그 지역의 안정성은 보장하기 힘들다고 경고했다.

 

 우프리스치케 동굴 단지는 2007년 부터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잠정적으로 포함되었다.

 

 

고리(Gori)에서 태어난 소련 통치자 스탈린 박물관(Joseph Stalin Museum)

 스탈린은 1878년 조지아의 작은 마을인 고리에서 태어났으며, 그가 죽은 1953년 이곳에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박물관 내부에 들어서면 스탈린의 석상을 먼저 보게 되며, 2층 전시관에는 일생 동안 그와 관련된 기록물들을 볼 수 있다.

 박물관 외부에는 스탈린이 4년간 거주했던 작은 생가가 보존되어있으며, 얄타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탔던 열차도 전시되어 있다.

 

 

 

쿠타이시(Kutaisi)

 조지아 중서부, 리오니 강 중류 지역

 면적: 70㎢

 리오니 강이 카프카스 산맥 기슭에서 흘러나와 저지대로 유입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자카프카지예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콜치스·이베리아(카르틀리)·아브하지아·이메레티아 등 조지아 역대 왕국들의 수도였다.

 

 러시아에 정복된 뒤로는 지방행정구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격동의 역사 속에 여러 차례 약탈을 당했으며, 특히 1691년에 있었던 투르크인의 약탈은 매우 심했다.

 

 11세기에 보그라티드인이 세운 대성당의 유적이 도심부의 언덕에 있으며, 이곳으로 좁고 구불구불한 길들이 나 있다. 도시 외곽에는 12세기에 지은 겔라티 대성당과 수도원, 석회석 동굴과 공룡 화석이 있는 사타플리아 자연보호구역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에는 공업 중심지로서 트럭· 펌프· 채굴기· 직물(특히 견직)· 식료품 및 그밖의 소비재가 생산된다.

 리오니 강에는 수력발전소가 있으며, 사범대학이 있다.

 

겔라티 수도원(Gelati Monastery)

 겔라티 수도원은 조지아 서부의 이메레티의 쿠타이시 근교에 있는 수도원 단지이다. 그 곳에는 조지아의 왕 건설자 다비트에 의해 설립된 수녀원의 성모 마리아 성당과 성 게오르게와 성 니콜라스의 13세기의 교회들이 있다.

 겔라티 수도원은 오랜시간 조지아의 문화와 지성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 곳에는 가장 저명한 조지아인 과학자들과, 신학자들, 철학자들이 교수로 있는 아카데미가 있으며, 많은 교수들이 이전에 국외 정교회의 여러 수도원들이나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만간 아카데미에서 활동해 왔다. 과학자들 중에는 이오아네 페트리치아르센 이칼톨레이와 같이 저명한 학자들이 있다.

 

 겔라티 아카데미서 펼쳐지는 광범위한 활동과 작품들 덕분에, 사람들은 그곳은 "신헬라스" 그리고 "제2의 아토스"라고 부른다.

 겔라티 수도원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12~17세기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벽화들과 필사본들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카쿨리 3폭화는 1859년에 도난당하기 전까지 안치되어 있었다.

 칼레티에는 조지아의 훌륭한 왕 가운데 한 명인 건설자 다비드(조지아어로 읽으면 다비트 사그마셰네벨리)의 능이 있다. 그의 묘소 가까이에는 1139년에 데메트레 1세 왕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간자 출입문이 있다.

 1994년, 갈라티 수도원은 국제 연합 교육 과학 문화 기구(UNESCO)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그 유산은 장기간의 방치가 야기시킨 손상에 대하여 주의를 요하기 위해서 2008년 세계 기념물 기금에 의해 2008년 절멸 위기에 처한 세계 기념물 감시 목록의 100위 안에 선정되었다.

 

 

바그라티 성당과 겔라티 수도원(Bagrati Cathedral and Gelati Monastery)

 통일 조지아의 초대 왕인 바그라트(Bagrat) 3세의 이름을 딴 바그라티 성당은 10세기 말부터 건설하기 시작하여 11세기 초에 완공되었다. 1691년 터키인들에 의해 일부 파손되었지만 그 유적이 아직 쿠타이시((Kutaïssi) 시 중심부에 남아 있다.

 12세기와 17세기 사이에 지어진 복합 건축물인 겔라티 수도원(Le monastère de Ghélati)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 작품과 벽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본 성당과 수도원은 조지아 중세 건축양식의 전성기를 대표한다.

 

 겔라티 수도원은 그 건축양식, 모자이크, 벽화, 에나멜 세공, 금속세공 등으로 인해 특히 중요하다. 이곳은 수도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과학, 교육의 중심지였으며, 그 안에 설립된 아카데미는 고대 조지아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였다. 겔라티 수도원은 ‘건설자’ 다비드 4세의 통치기(King David, 1089~1125)와 타마르 여왕의 통치기(Queen Tamar, 1184~1213) 사이의 정치적으로 강력하고 경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 즉, 중세 조지아의 ‘황금기’에 건축되었다. 수도원의 건축은 1106년 다비드 왕에 의해 시작되어, 1130년 다비드 왕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데메트레(Demetré) 왕의 통치 하에 완공되었다.

 

 13세기부터 14세기에 걸쳐 건물들이 증축되었지만 이어진 외침과 내전으로 인해 수도원 곳곳이 파손되었는데, 1510년 터키 침략자의 성당 건물 방화에 의한 피해가 가장 컸다.

 

 

 수도원의 복구 작업은, 16세기 서(西) 조지아 가톨리코스(Katholikos, 동방 그리스도교에서 일부 교회에서 사용되는 수장의 칭호)의 거처가 되면서 시작되어 17세기,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겔라티 수도원은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파괴되지 않고 무사했지만, 19세기 초에 조지아가 러시아에 합병되자 주교구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바그라티 성당은 리오니 강 왼쪽 둑의 언덕에 있으며, 길고 구불구불한 계단으로 지면과 연결되어 있다.

 

 1691년 터키인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지만 그 유적이 아직 쿠타이시 중심부에 남아 있다. 장식이 화려한 기둥머리, 창 사이 벽, 둥근 천장의 흔적들이 성당 내부에 남아 있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인데, 십자가의 가지에 해당하는 네 부분들 중 동쪽, 남쪽, 북쪽으로 뻗은 것은 그 반원형 애프스(apse)으로 마무리되며, 서쪽으로 뻗은 부분은 정사각형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바그라티 성당의 겉면, 기둥머리, 기반 등에서 보이는 서로 다른 장식 양식들은 세대를 이으며 건축을 진행했던 각 통치자들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성당의 본관이 만들어지고 곧이어 3층탑이 그 북서쪽 모퉁이에 지어졌는데, 이는 쿠타이시 주교의 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겔라티 수도원의 전체 구역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현재는 동쪽으로부터 들어갈 수 있지만, 본래는 수도원을 건설한 다비드 4세의 무덤이 있는 남쪽 현관이 입구였다. 구역 중앙에는 성당 본관 건물이 있으며, 그 서쪽으로 성 조지 성당이, 그 뒤편에는 2층짜리 성 니콜라스 성당과 아카데미 건물이 있다. 성당의 각 외벽에는 아치가 설치되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건물의 모습을 강조하고 있다. 창문 이곳저곳으로부터 빛줄기가 흘러 들어오는 성당 내부는 거대한 둥근 천장으로 덮여 장엄한 공간을 연출한다.

 

 문이 세 개 달린 서쪽의 정문 출입구로 들어서면, 12세기에 애프스의 반원형 천장에 그려진 유명한 모자이크(황금색 배경을 뒤로 두 명의 대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와 아기예수의 채색화)가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보다 나중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들은 성서의 장면들과 다비드 4세 등 역사적 인물들을 묘사하고 있다. 성 조지 성당은 13세기에 만들어진 높다란 건축물로서, 천장이 둥글고 세 개의 애프스가 돌출되어 있다. 성당의 천장은 두 개의 육중한 돌기둥과 애프스의 모서리들로 지탱되며, 내부에는 창문들이 많아서 빛이 잘 들어온다.

 

 서쪽 현관에는 벽화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원래의 모습을 잘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성당 본관의 벽화들은 16세기 무렵에 그려진 것이다. 성 니콜라스 성당은 13세기 말에 지어진 독특한 구조의 2층 건물이다. 1층은 아치에 둘러싸여 사방으로 열려 있으며, 천장이 둥글고 크기가 작은 2층은 성당의 본래 기능을 하며 돌계단을 통해 1층과 이어져 있다. 전체적으로는 크고 넓은 1층 위에 다면체의 형태를 띤 2층을 올린 구조로 되어 있다.

 

 12세기에는 성당 본관 북쪽의 샘물 위로 기둥이 네 개 달린 둥근 지붕의 석조 차양이 만들어졌고, 13세기에는 한 개의 방과 벽면이 뚫린 아치형 종탑이 증축되었다. 아카데미 건물은 다비드 4세 때 만들어진 것으로, 넓은 아치형 창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건축물이다. 14세기에는 본래 있었던 세 개의 출입구 중앙에 화려한 장식의 현관 하나가 증축되었다. 건물 벽은 원래부터 색이 칠해져 있었으며, 돌로 만들어진 의자들이 벽을 따라 배열되어 있다.

 

 오늘날 쿠타이시와 관련하여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적들은, 오늘날로부터 6세기를 거슬러 올라간 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시기,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과 페르시아는 조지아를 놓고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쿠타이시는, 리오니(Rioni) 강을 건너는 다리 한 편에 자리한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로서, 언덕 정상에 세워진 요새가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중세 초기 도시의 전형적 모습이다. 5세기 전반, 아칠(Archil)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도시 규모가 크게 성장했다.

 

 () 조지아가 아랍인들에게 점령되었던 5세기 중엽, 이곳은 왕실의 거처로 선택되었다. 도시는 10세기~11세기에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10세기 말 통일된 조지아의 첫 번째 왕이었던 바그라트 3세의 명으로, 바그라트 대성당을 짓기 시작했고 이 건축은 11세기 초에 완성되었다. 이 건축은 건축적 발전을 한 단계 높여준 것이며 그간 통일을 목표로 벌어졌던 분쟁의 종식을 상징했다. 대성당은 조지아 각 지역 대표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개관되었다.

 

 겔라티 수도원의 건축은 중세 조지아의 '황금기'에 건축되었다. 수도원의 설립자인 다비드 4세와 타마르 여왕의 통치 기간 동안 지속된 이 기간 동안 조지아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을 구가했다. 이 황금기는 여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데메트레가 통치했던 1130년에 끝이 났다. 수도원의 일부는 조지아 왕가의 가족 묘지로 쓰였다. 이런 이유로 수도원은 왕가의 소유지가 된다.

 

 수도원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학식 높은 한 왕이 온 정성으로 바쳐 계획한 아카데미(학술원)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이었다. 왕이 추진했던 여러 기획 중 하나로서 아카데미는 종교 서적들과 세속 서적들을 조지아어로 번역하고, 여러 가지 학문적 주제들을 가르쳤다. 13세기 내내 그리고 14세기 초까지, 수도원에는 여러 건물이 증축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외침과 왕국 내부 반란들이 빈번해졌고, 이 때문에 수도원은 많이 훼손되었다. 1510년에는 투르크족이 침입하여 성당에 화재를 일으키고 이로써 대규모 피해를 입기에 이르렀다.

 

 16세기 초 수도원에 서(西) 조지아의 총대주교(katolicos)가 머물게 되면서 대규모 복원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공사는 17~18세기에도 계속 되었다. 1691년, 투르크족이 또 다시 조지아를 침공했고, 대성당을 폭파했다. 이 때, 지붕과 중앙 돔이 무너졌다. 다행히, 대성당의 남쪽과 동쪽 입구는 파괴되지 않아, 19세기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오늘날엔 이 부분도 폐허가 된 채로 남아 있다. 투르크족의 침입에도 겔라티 수도원은 파괴되지 않았으나 조지아가 러시아에 복속된 19세기 초, 수도원은 주교관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모차메타수도원(Motsameta Monastery)

 모차메타 수도원은 쿠타이시로 부터 6km 지점에 위치하며, 츠할치텔라 강이 굽이치는 곳의 깍아지른 절벽 위에 지어진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수도원이다.

 

 오늘날의 교회는 11시기에 건설되었으나, 역사적 기록에는 8세기 정도에 이미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츠할치텔라 강(tskhaltsitela River)은 '붉은 강'이라는 뜻으로 8세기에 아랍이 침략해 왔을 때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나 강물이 붉게 물들여져 붙여진 이름이다.

 

 그때 갑자기 사자가 나타나 피살된 왕족들(다비드와 콘스탄틴)의 시신을 강에서 언덕위의 교회로 끌어올려 유골을 지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현재 수도원에 들어가면 아르그베티의 공작이며 형제인 다비드와 콘스탄틴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성스런 유골함있으며, 제대 옆으로 3번 기어가서 이 유골함을 터치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 경이로운 자연과 중세마을의 조화 우쉬굴리(Ushguli)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우쉬굴리는 코카서스 산맥의 최고봉 중 하나인 슈카라(Shkhara-5,068m)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유럽 최고지대 마을이다.

 약 2000년 전부터 형성된 이 마을에는 현재도 2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우쉬굴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메스티아에서 4륜 차량을 이용해 3시간 가량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조지아에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에 중세 시대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많은 여행객들은 자연의 웅장함을 만끽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다.

 

 

어퍼 스바네티(Upper Svaneti)

 조지아(그루지야) 메스티야 지방에 있는 중세 유적

 

 1996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트빌리시 북서쪽 약 260km 지점 자캅카스 서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기원전부터 높은 문화수준을 유지하였는데, 11세기에는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심지로서 금속공예· 나무조각· 회화· 건축 등이 발달하였으나, 15세기 이후에는 점차 고립되어 경제와 문화면에서 급속히 쇠퇴하였다.

 

 산악지대여서 겨울이 한해의 절반 이상이므로 집의 구조를 반농반목(半農半牧)에 알맞게 만들었다. 면적은 30∼130㎡로 다양하며 대부분 2층으로 되어 있다. 1층은 나무로 된 칸막이를 두어 주거공간과 가축을 기르는 공간으로 나누었고 방마다 복도가 딸려 있어서 추운 바깥 공기를 막을 수 있다. 2층은 여름철의 주거공간이나 가축사료와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썼다.

 

 집집마다 3∼5층에 방어용 탑을 설치하였는데, 2층과 지붕이 붙은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2층에서 탑으로 올라갈 때는 옮겨가며 쓸 수 있는 통나무 사다리를 사용하였으며 탑의 맨 꼭대기층에는 적에게 돌을 던지거나 화살을 쏘기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을 덮었다.

 

 

 

 성당은 대부분 10∼12세기에 지은 건물이다. 잘 다듬은 돌로 지었으며 규모가 작아서 가장 큰 곳의 면적이 약 20㎡에 불과하다. 건물 파사드에는 성서의 주요 장면과 성인의 일생을 부조로 새겨 넣었고 안에는 비잔틴미술 양식에 조지아인 특유의 독창성을 더한 벽화를 장식하였다.

 

 그밖에 뛰어난 금속공예기술을 이용하여 금속에 정 등으로 무늬를 돋을새김한 뒤 금으로 도금한 성상과 성배(聖杯)·십자가 등 종교적인 작품도 많다.

 

 

 

◈ 흑해의 진주 바투미(Batumi)

 조지아 아자르 자치공화국의 수도

 면적 64.9㎢

 터키 국경선에서 북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으며 흑해의 만에 면해 있다. 중세시대에 세워졌으며 투르크의 지배를 받다가 1878년 러시아에 양도되었다.

 옛날에는 그리스인의 식민 도시였다. 17세기 이후부터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고, 주민의 이슬람교화가 진행되었다. 1878년에는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에 체결된 산스테파노 조약에 의해서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1901년에는 스탈린이 바투미에서 파업을 일으켰다. 러시아 혁명 뒤에는 터키군이나 영국군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점령되었다. 1921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

 조지아 정교회나 가톨릭, 이슬람교, 유대교, 아르메니아 정교회 등 많은 종교가 혼재하는 도시이며 각각의 종교의 사원·교회를 볼 수 있다.

 15세기에 카카베르 구리엘리 왕자 시대에 오스만 제국의 군대가 바투미를 정복했다. 하지만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했다.

 중요한 항구이기도 한 이 도시에는 바쿠로부터 송유관을 통해 오는 석유를 이용하는 정유공장이 있다. 그밖에 조선업·기계제작업·아연도금업·가구업 등과 다양한 경공업 공장들이 있다. 이처럼 공업이 발달한 도시이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경관을 기반으로 한 유명한 휴양지이기도 하다.

 많은 공원과 거리에 이국적인 식물들이 자라고 있고, 시의 북쪽에 있는 바투미 식물원에는 아열대와 열대성 식물이 풍부하다. 차 농장들은 시의 외곽지역에 있으며, 사범대학과 종합기술대학이 있다.

 

 바투미는 흑해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고,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온난 습윤 기후를 나타낸다. 바투미의 기후는 흑해의 서기류의 영향을 받았다. 바투미는 조지아 뿐만아니라 캅카스 지역에서 가장 습하고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인데, 주변에 높은 산이 있어서 일년내내 비가 많이 내린다.

 바투미의 1년 평균 기온은 약 14°C이다.

 

바투미 시티(Batumi City)

 바투미는 흑해에 면한 조지아의 항만 도시이다.

 이 도시는 조지아 정교회나 가톨릭, 이슬람을 비롯한 많은 종교가 혼재하고 있으며 각각의 종교의 교회, 사원을 볼수 있다.

 또 오스만 지배를 받은 역사로 인해 터키식 문화가 많이 남아 있다.

 

 

❋ 2세기 콜키스에 속한 로마의 도시 고니오 - 고니오 요새(Gonio Apsaros)

 1547년 고니오는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했으며, 1878년 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해방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일부분이 되었다. 고니오 요새 내에는 12사도 가운데 한 명인 성 마티아의 무덤이 있다고 여겨지고 있으나 발굴을 금지하여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으며, 관광 산업이 붐을 이루고 있으며, 여름이면 트빌리에서(고니오 북쪽으로 15km) 바투미 해변 보다 일반적으로 더 청정하게 여겨지는 해변을 즐기기 위해 고니오를 찾고 있다.

 

 

메데아의 조각상(Statue of Medea)

 메데이아는 황금 양털을 찾기 위해 콜키스로 떠난 아르고 호의 원정대 아르고나우타이의 대장이자, 정의감 넘치는 이올코스의 왕의 아들인 이아손에게 반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아손을 없애려는 아버지의 의도를 알게 되고 양털을 취하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가 담긴 조각상이다.

 

<메데이아(Medea)>

 메데이아(Medei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이다. 메데아 혹은 메디아라고도 한다.

 콜키스왕이자 태양신의 아들인 아이에테스의 딸로, 황금양 신화의 주인공인 프릭소스의 부인 칼키오페와는 배다른 자매지간이며 압시르토스 등을 동생으로 두었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손녀이며 키르케나 파시파에 등에게는 친조카가 된다.

 황금양피를 찾으러 콜키스에 온 영웅 이아손에게 반하게 되었으며, 이아손을 없애려는 아버지의 의도를 알고는 그들이 황금양모를 취하게 큰 도움을 주었다.

 메데이아는 이아손과 함께 그리스로 도피를 했는데 자신들을 쫓아오는 아버지에 대항해 동생인 압시르토스를 죽여 콜키스의 배가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먼 바다로 도망칠 수 있었다. 이에 신들이 분노하여 항해가 어렵게 되자 메데이아는 고모인 키르케를 찾아 키르케의 도움으로 신들의 노여움을 잠재웠고, 그제서야 순조로운 귀향을 할 수 있었다.

 한편, 메데이아는 지옥의 여신이자 모든 주술과 마술을 총괄하는 여신 헤카테를 숭배하는 마법사이기도 했다. 메데이아는 황금양피를 가져오면 왕위를 넘겨주겠다던 펠리아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마술로 그를 속여 솥에 들어가 죽게 만들었다.

 이에 이올코스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아이들을 데리고 코린토스로 피하였는데,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배려로 편히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아손이 코린토스의 공주 글라우케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메데이아는 마법을 건 옷을 공주에게 보내 글라우케와 크레온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자신의 아이들 또한 죽게 했다.

 그 후, 메데이아는 이아손을 떠나 테세우스의 아버지인 아테네왕 아이게우스 1세와 결혼한다. 테세우스가 찾아오자 그가 아이게우스의 자식임을 알아보고는 독주를 먹여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아들인 메도스와 함께 아테네를 떠난다.(메도스가 아이게우스의 아들이라는 설과 이아손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메데이아는 이후에 고향인 콜키스로 돌아갔는데 그때는 숙부인 페르세스가 아버지 아이에테스를 몰아내고 콜키스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그를 죽이고 왕위를 되찾았다. 이후 아들 메도스가 콜키스를 메디아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그곳의 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일설에는 메데이아가 사후에 죽은 자들이 머무르는 축복의 땅인 엘리시온에 들어가 영웅 아킬레우스와 맺어졌다고도 한다.

 

 

❋ 음식, 와인과 함께 활기찬 아치형 모양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해변가 마을 바투미 해변(Batumi Beach)

 북쪽으로는 코카서스산맥이 바다를 따라 시작되며 봄철에 매우 잘 보이며, 보다 적은 산맥들이 동쪽과 남쪽, 터키 산맥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아열대 기후로 인해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시원하며, 태양이 자주 비춰 햇살이 강하다. 바투미 사람들 역시 햇살처럼 밝고 친절하며 손님들을 환대해 준다.

 

 

 

천연 탄산수로 유명한 보르조미(Borjomi)

 보르조미(Borjomi)는 조지아중부, 카르틀리 주(Kartli) 서부의 도시이자 물의 깨끗한 휴양지로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의 광천으로부터 분출하는 광천수가 유명하고, 이 도시 이름의 광천수도 있다. 인구 약 16,000명이다.

 가까운 보르조미 계곡은 경승지이다. 또 제정 러시아시대의 귀족의 별장도 있고, 지금은 관광 자원이 되고 있다.

 보르조미는 바쿠리아니와 제휴했고, 2014년 동계 올림픽 개최에 입후보 했으나 동계 올림픽 위원회 측에서 거절하였다.

 

보르조미(Borjomi) 탄산수

 조지아를 방문하면 태초에 빚었던 크베브리(Qvevri, 황토 항아리) 와인과 보르조미 내추럴 미네랄 워터를 레스토랑 식탁 위에서 항상 만날 수 있다. 조지아 국민들이 가장 자랑하는 것은 와인, 천연광천수, 장수마을이다. 보르조미는 구 소련시절 3대 보물로 볼가 자동차, 아에로플로트 항공사, 보르조미 광천수를 꼽았다.

 

 보르조미는 코카서스 산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코카시스 산맥에 장수마을이 많이 있으며 코카서스 산맥의 줄기에 위치한 보르조미-하라가울리 국립공원(Borjomi-Kharagauli National Park)은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재돼 있다. 국립공원 안에 850~2500m에 걸쳐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 보호구역으로 수원지는 지하 8000m에서 용출돼 나오는 빙하 광천수를 그대로 사용한다.

 

 보르조미 역사는 1000년 전부터 이미 식수로 사용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 후 1세기경에 지역의 주민들이 석조 목욕탕을 세워 온천욕을 한 흔적도 있다. 1829년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비해 러시아 척탄병(擲彈兵, 수류탄병) 부대장인 파벨 포포프(Pavel Popov) 대령이 이곳에 파견됐는데 심한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는 중에 보르조미의 온천욕으로 치유됐다. 1841년 러시아 주재 코카서스 총독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음 직전의 딸에게 보르조미를 마시게 한 후 병이 말끔히 낫게 되면서 치유의 물로 명성을 높였다. 러시아, 조지아의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만성 위염, 위궤양, 간 질환, 신장 결석, 숙취해소 등에 좋으며, 특히 소화질환, 당뇨병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르조미는 러시아 황제에게 진상됐던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탔던 광천수다. 보르조미의 상업화는 1890년 보르조미 제조공장을 세웠고, 1894년에 병입한 보르조미를 판매하기 시작, 1953년 근대식 설비를 갖춘 제1생산 공장이 준공되면서 1961년 미국, 프랑스 등 15개국에 수출, 프리미엄 워터로 인정받았다. 해외 수출이 많아지고 소련 전역에서 보르조미를 찾은 소비자들이 증가하면서 1969년 제2의 생산 공장이 증축됐다. 1992년 조지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최대 소비 시장이었던 소련 시장이 폐쇄돼 경영난에 허덕이게 됐다. 1995년 조지아 정부가 보르조미 회사를 국유화하면서 제1공장을 현대식 설비로 교체하고, 병과 상표를 새롭게 디자인, 재기를 노려 다시 러시아에 수출을 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그리고 1997년 다시 제2공장을 현대식 설비로 증축하면서 위생관리 시스템을 완벽하게 갖췄다. 2004년 수요가 공급을 따라가지 못하자 공장의 설비를 현대적인 첨단 대량생산 시스템과 물류창고를 확장했다. 2005년 연간 2억 병 생산에 도달한 보르조미는 국제인증기관인 '뷰로베리타스(Bureau Veritas)'의 ISO 22000을 획득했다. 그러나 2008년 북경 올림픽 개막식 날 러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으나 패배하면서 러시아로 수출 길이 막히자 러시아 내에서 가짜 보르조미가 판을 치게 됐다.

 

 보르조미는 '코카서스 산의 빙하가 녹아 60여 종류의 미네랄을 함유한 광천수는 해발이 높은 지역에서 용출돼 천혜의 울창한 숲과 계곡을 거쳐 가장 깨끗하고 순수한 자연의 물'이라고 한다. 또한 보르조미는 국제품평회에서 많은 수상을 했다. 1907년 SPA 그랑프리, 1909년 카잔 그랜드 골든 메달, 1911년 드레스덴 디프로마 오브 호너(Dresden Diploma of Honor), 1940년 스탈린 황금훈장, 1975년 부다페스트 황금 메달, 1998년 노보시비르스크 금메달, 1996년, 1997년, 1998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금메달 등을 수상했다. 

 

 '보르조미'는 고경도이면서 다양한 미네랄 맛을 느끼면서 탄산의 부드러우면서 강한 느낌도 있고, 짠맛이 잘 조화된 맛이 일품이다. 미네랄 총 용존량(TDS)은 5,673㎎/ℓ이며, 경도 450㎎/ℓ, 칼슘 100㎎/ℓ, 마그네슘 50㎎/ℓ, 나트륨 1,000㎎/ℓ, 칼륨 12㎎/ℓ, 중탄산염 5,000㎎/ℓ 등이 함유돼 있고, pH7.5로 약알칼리수다. '보르조미'는 화산암 암반층을 통과하면서 천연 미네랄이 풍부하게 함유되고 여과되면서 12℃로 분출하는 클래식 탄산수로 먹는 샘물의 품격을 찾은 애호가들이 마시기에 가장 적합한 물이다. 특히 '보르조미'는 칼슘과 마그네슘의 비율이 2:1로 인체의 땀 구조와 같아 몸에 잘 흡수되기 때문에 운동 후에 마시면 갈증을 없애는 데 좋다.

 

 호텔 레스토랑을 찾아오는 단골 고객들 중에 탄산수를 추천한다면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물로 '러시아 황제의 물', 그리고 '러시아 3대 명물이었던 조지아 장수하는 천연 탄산수'라고 추천하면 고객은 매우 만족하면서 '물에도 이런 프리미엄 물이 있네.'하고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보르조미'는 조지아의 먹는 샘물 중에서는 가장 클래식한 탄산수이며, 부호나 미식가들뿐만아니라 전 국민이 선호하는 물로 음식과 함께 마시면 격식이 달라진다. 또한 음식과 조화에 있어서는 조지아 전통요리, 돼지 바베큐, 소고기 안심 스테이크를 주문한 고객들에게 추천해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가 있다. 또한 술을 많이 마신 고객들에게 권할 경우 숙취제거에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 가정에서 배달시켜 먹는 양념한 BBQ에 콜라대신 마시면 BBQ 풍미도 살리고, 건강에도 좋다.

 

 

❋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보르조미 국립공원(Borjomi National Park)

 조지아 중남부에 위치한 코카서스산맥의 일부로 유럽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이다.

 약 7만 6천 헥타르의 규모로 자연숲과 산림 초원지대로 구성되었으며 희귀 동식물들이 생존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서 트레킹도 즐길 수 있으며, 그뿐만 아니라 중세 역사를 간직한 주위 마을과 아름다운 풍경이 인상적이다.

 

 

 

협곡과 동굴 도시 바르지아(Vardzia)

 바르지아(Vardzia) 동굴 도시는 조지아 남부의 아스핀자 근교 므트크바리 강의 좌측 제방이 있는 에루셸리 산의 측면에 동굴들을 내어 구축한 동굴 수도원이다.

 

 조지아의 외딴 시골 땅에, 소(小)카프카스 산맥의 육중한 절벽 표면을 파서 만든 복잡한 구멍들로 이루어진 벌집 같은 형상이 무크바리 강변으로부터 웅장한 모습으로 솟아올라 있다. 이는 12세기에 이곳에 형성된 광대한 동굴 도시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흔적이다. 외부적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장관이지만, 바위투성이 표면 뒤에 숨겨진 도시의 야망과 구조에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

 

 무슬림 투르크인의 침입이 항상 골칫거리였을 때, 조지아의 기독교 왕 기오르기 3세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궁경 가까운 곳에 있는 바르지아를 군사 요새로 삼고자 계획했다. '바르지아'라는 이름은 기오르기 왕의 딸인 타마르(Thamar, 1160~1213)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었을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고자 외쳤던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오르기가 1184년 죽자, 타마르가 이 계획을 이어받아 바르지아를 요새화된 수도원으로 변모시켰다. 여왕이 된 그녀는 조지아가 강력하고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위대한 시기를 다스렸으며, 바르지아는 그녀의 미래상을 표출하는 데 잘 어울리는 장소가 되었다. 바르지아는 그 동굴 건축으로 알려진 가장 뛰어난 장소였다.

 

 전성기에 다다랐을 때 이 도시는 기적적인 창조물로 여겨졌으며, 열세 단에 이르는 수천 개의 방은 5만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안에 연회장, 마구간, 도서관, 빵집, 목욕탕, 와인 저장고, 그리고 웅장한 주 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의 북쪽 벽에는 타마르와 그녀의 아버지를 그린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있다. 정교한 관개 체계가 물을 공급해 주었고 경작 중인 계단식 밭에도 물을 주었다.

 

 1200년대 후반에 지진이 일어나 도시 일부가 파괴되었고, 겉으로 드러난 출구는 한때 보이지 않게 가려졌으며, 1500년대에는 페르시아인들이 침략해 약탈을 일삼아 이 도시의 멸망을 가속화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도달하기 힘든 곳에 있는 이 유적지는 거의 눈에 띄지 않은 채 감춰져 있었으나, 복구 작업을 위한 최근의 노력과 홍보로 인기가 상당히 높아졌다.

 

* 역사

- 몽골족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건설되었으며, 므트크바리 강 근처의 비밀 통로들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하다. 13개 층에 6천 개가 넘는 방이 있으며, 교회, 왕실, 고지대 농업용수 설비가 마련되어 있다.

- 1283년 경, 삼츠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도시의 2/3 가량이 파괴되어 동굴의 외관이 드러났으며 관수 설비가 붕괴되었다.

- 13세기에 베카 자켈리의 통치 기간 중, 도시의 교회가 보강되어 재건축 되었고 외관을 드러낸 종탑이 증축되었다.

- 1551년에 타흐마습 1세 샤가 지휘하는 페르시아가 그 수도원을 습격했으며, 중요한 모든 성상들을 약탈하면서 사실상의 모든 기능을 상실하였다.

 

헤르트비시 요새(Khertvisi Fortress)

 메스케티 지역에 있는 남부 조지아에 위치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요새 중 하나로, 조지아의 왕조 봉건 기간 내내 사용하였다.

 기원전 2세기에 처음 지어졌으며,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13세기 몽골의 침략과 16세기에는 투르크인들에 의해 파괴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소련 시절에 군사기지로 쓰이다 1991년 독립 후 현상태로 복원되었다.

 

❋ 절벽산을 깎아 만든  바르지아 동굴 수도원

 바르지아 동굴 수도원은 조지아 남부 므트크바리 강 근처의 에루셸리 산 측면에 동굴을 내어 만든 수도원이다.

 1185년 몽골의 칩입에 대비하여 조성되었으며, 1283년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2/3가 파괴되어 현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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