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GREECE)

아테네(Athens)메테오라(Meteora) 산토리니 섬(Santorini Island) 크레타 섬(Creta Island)

미케네(Mycenae) 로도스(Rodhos)

포토 갤러리

 에게해를 요람으로 하여 싹튼 나라 그리스 문명은 오늘날의 서구 문명을 잉태한 어머니일 것이다.

 기원전 에게해의 해상 국가들과 공동의 신들과 문화를 소유한 도시 국가들이 향유한 앞선 민주정치과 인본주의의 기틀은 후에 르네상스를 거쳐 서구 문명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름다운 푸른 바다, 푸른 올리브 나무, 오렌지와 레몬, 하얗게 빛나는 건물들이 인상적인 해안 도시들, 인류 유적 제 1호라 일컬어지는 파르테논 신전등 수없이 많은 유적과 유물들 속에서 오늘날의 문화를  유추해 본다면 과거와 미래와 그리고 오늘 속에서 시간을 초월한 인류의 모습과 슬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칸 반도에 지금 위치하고 있는 그리스는 과거 아테네의 지혜도, 스파르타의 용기도,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의 패기도 사라진 것이 사실이다.

 위대한  호머가 노래한 그 영광은  이제 모두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지금의 그리스는 고대의 유적으로 먹고 산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만큼 관광산업이 주요한 국가수입원이 되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약성서의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성지이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기후를 가진 그리스는 지중해와 더불어 유럽의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개 요

o 국  명: 그리스 공화국(The Hellenic Republic)

o 수  도: Athens(인구: 약 350만 명)

o 면  적: 131.957㎡(본토 81%, 도서 19%. 세게 97위)

o 인  구: 약 1,080만 명(2016년)

o GDP : 2,071억$(2015년. 세계 43위)

o 언  어: 그리스어

o 종  교: 그리스 정교(Greek Orthodox : 98%)

             이슬람교(Muslim : 1.3%). 기타(0.7%)

o 국경일: 3. 25

o 정부형태: 내각책임제

o 국  회: 단원제(의석수 300명)

o 화폐단위: 유로

o 지  형: 산지 43%, 평지 30%. 구릉지 27%

o 기  후: 지중해성 기후

o 군사력 : 150,500명(육군: 110,000, 해군: 19,500, 공군: 21,000)

o 시  차

- 일광절약 실시기간 : 한국시각 = 아테네시각+6시간(3월말-10월말)

- 일광절약 미실시기간 : 아테네 시각 + 7시간(11월-3월말)

 

 

지 리

 유럽 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2000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지리적 형태를 띄고 있다. 현재 도시화로 인하여 삼림자원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섬들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기 후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에는 햇빛이 뜨겁지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그 열기를 식혀준다. 하지만 건조한 날씨로 여름의 습기로 인한 불쾌지수의 영향은 없으며 저녁에는 시원한 편이다.이런 이유로 그리스인들은 보통 저녁 늦게까지 많은 활동을 한다.

 여행시에는 가벼운 옷차림이라고 할지라도 저녁때 입을 스웨터나 잠바가 필요하며 가을은 우기이므로 우의를 준비해야 한다.

 

인 구

 2003년 현재 총인구는 약 1,070만 명, 인구 구성은 연소층(0∼14세) 21%, 청소년층(15∼39세) 36%, 장년층 (40∼59세) 25%, 노년층(60세이상) 48%로서 인구증가율은 0.29% 이다.

 인구분포는 평지(국토면적의 약 40%)인 대도시 및 해안지방에 집중되어 있음. 아테네 수도권(인근 피레우스 포함) 지역에 약 350만 명, 북부지역의 테살로니끼시에 약 5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종 교

 그리스는 종교국가로서의 성격이 강하며, 국민의 98%가 그리스정교(Eastern Orthodox Church of Christ)를 신봉하고 있음. 헌법에는 그리스정교를 Prevailing Relegion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나 사실상 국교와 다름 없다.

 

언 어

 언어는 그리스어를 말하지만, 많은 그리스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나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벽촌에 가서도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또한 독일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독일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리스어는 4000년 동안 구전되었고, 3000년의 문자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대 유럽어이다.

 오늘날 그리스에는 일반인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고 있는 구어체(Popular Language)와 고전 그리스어에 가까운 문어체(Purified Language)의 두가지 언어가 병행되고 있다.

 

사회보장

 사회보장은 국가에서 관장하며 모든 국민은 의료혜택과 연금을 받는다.

 모든 직장인은 의무적으로 IKA(국가사회보장기관)에 가입해야 하며, 매달 봉급의 43.86%(피고용자 15.90% + 고용주 27.96%)를 납부하고 퇴직 후 연금으로 받게된다.

 

 

아테네 기후() 

지   역

구분/월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아테네(Athens)

최고평균

12

13

16

20

25

30

32

32

28

23

18

14

최저평균

6

6

8

11

16 

20

22

22

19

16

11

 8

평   균

9.3

9.9

11.3

15.2

20.0

24.6

27.6

27.4

23.5

19.0

14.7

11.0

강우일수

12

11

11

9

7

4

3

3

4

9

12

13

 

 

그리스 약사

가. 그리스 문명의 기원

 그리스 문명의 기원인 에게(Aegea) 문명은 전기 크레타문명(혹은 미노스문명, B.C 3000∼1400)과 후기 미케네문명(B.C 1400∼1200)으로 구분되며, 이 문명의 주인공은 아케아인, 이오니아인, 에올리아인, 도리아인임.

 고대 그리스인은 B.C 1000년경까지 씨족공동체를 유지하다가 B.C 8∼9세기에 폴리스(Polis)를 형성하였고 스스로를 "헬레네"인이라고 지칭하면서 선민의식을 갖게됨.

 

나. 고대 국가시대

 고대 폴리스(Polis)가 발전하여 형성된 도시국가들 중 가장 일찍 성장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로서 각각 독자적 정부형태를 발전시켰고, 대외적으로 식민도시 건설을 통해 세력을 확장함.

 페르시아전쟁(B.C 492∼479) 후 아테네는 Pericles(B.C 495∼429) 황금기를 맞이하였으며 펠로폰네소스전쟁(B.C 431∼404)등 내란이 이어졌으나, 연극, 철학, 역사, 수사학 등 모든 학문 분야에 두드러진 업적을 남김.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가 삼분되면서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안티고노스" 가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이 시기와 로마 지배 기간의 일부에 해당하는 헬레니즘 시대(B.C. 323∼30)에는 폐쇄적, 자기 만족적 폴리스(Polis) 문명에 동방적 요소를 가미시켜 개방적이고 보편성있는 문화를 발전시킴.

 

다. 이민족 지배 시대

》로마 비잔티움 지배기간(B.C. 2세기∼A.D. 1453)

ㅇ B.C. 2세기경부터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아 그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로마제국 분열(A.D. 295) 후에는 비잔티움(동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감. 당시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 문명을 보존, 전파시키는 중심지 역할을 함.

 

》오토만 제국 지배기간(1453∼1830)

 ㅇ오토만 제국의 지배하에서 이슬람교로의 개종은 원칙적으로 자유였음. 그러나 이슬람교도가 되면 지배계층의 특권을 누릴 수도 있었던데 반해, 개종을 거부한 기독교도들은 비잔티움 시대의 농민이나 봉건제하의 농노와 같은 비참한 생활을 감수해야 하였음.

ㅇ18세기 후반 불란서혁명 이후 유럽에 팽배하였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1821∼27년간 입실란티스(Ypsilantis) 형제의 거병으로 시작된 독립 항쟁이 확산되었고 마침내 영국, 불란서, 러시아의 지원하에 1830.2 런던의정서에 의해 독립이 보장되어 3.25 독립왕국이 수립됨.

 

라. 근대국가 형성기간(1830∼1913)

 독립왕국이긴 했으나 영국, 불란서, 러시아에 의한 내정간섭이 지속되었고 Otto 국왕 치하기간(1830∼1863)중 3명의 섭정에 의한 개혁도 실패하였음. 1843년 영국, 러시아의 조종에 의한 군부 쿠데타 발생 등 정국 불안이 계속되었으며,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 회복을 목표로 한 "Megali  Idea(위대한 계획)"도 주변 강대국에 의해 좌절됨.

 George 1세 치하(1863∼1913)인 1863년 입헌군주국이 되었으며, 1872년부터는 대외 지향적인 Heodoros Deliyiannes와 국내 우선주의자인 Charilaso Tricoupes가  주도하는 양당에 의해 정국이 주도됨

 1878년 사이프러스가 오토만 제국 지배로부터 영국 지배로 넘어갔으며 그리스는 1912∼13년에 발생한 제 1,2차 발칸전쟁에서 승리하여 마케도니아의 일부 지역을 회복함.

 

마. 양차 세계대전기간(1914∼1949)

 제 1차 세계대전 기간중 국왕 Constantine 1세와 수상 Venizelos의 의견 대립으로 1916년 동 국왕이 국외로 추방됨. 불가리아와는 뉘이(Neuilly)조약을, 터키와는 세브르(Sevres) 조약을 맺어 인근국가와 국경을 확정함. 그러나 세브르 조약은 터키의 Mustafa Kemal에 의해 무효화되었고 이에 따른 터키와의 전쟁 결과 1923년 로잔느(Lausanne) 조약이 체결되어 양국간에 현재와 같은 영토 경계가 확정됨. 로잔느 조약에 의거 해외로부터 130만의 그리스인들이 입국하게 됨으로써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됨.

 1923년 이후 국내정치 최대 현안은 왕정의 존속 여부였으며, 1924년에 공화정이 선포되었으나 1935년 왕당파의 승리로 왕정이 부활되는등 정치 불안이 계속됨. 대외적으로는 인접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영국, 불란서와의 협력 관계를 긴밀히 유지함.

 제 2차 세계대전중인 1941.1∼1944.10월 간에는 독일, 이태리, 불가리아 등 기축국에 의해 점령당하였으며, 동 기간중 좌익인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과 좌익 공화파인 민족민주연맹(National Democratic League)이 레지스탕스 운동을 전개함. 이들은 국왕의 전후 귀국에 반대하는 동시에 망명 정부와도 대립함. 1944.10. 망명정부 수반인 George Papandreou는 소수의 영국군과 함께 아테네로 돌아와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무장 해제와 해산을 시도하자 내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 바, 1947년 트루만 독트린에 따른 미국의 군사재정 지원으로 동 내란은 1949년에 종식됨.

 

바. 입헌군주제기간(1949∼1967)

 입헌군주제로 복귀한 후 내각의 잦은 교체로 정정이 불안해짐. 1964년 Paul국왕의 서거로 왕위를 계승한 Constantine 국왕이 1965.7 당시 George Papandreou 수상과의 반목을 기화로 내각을 일방적으로 해산함에 따라 국내정정이 극도로 불안해졌으며 1967.4 George Papadopoulos 육군대령을 중심으로한 우익군부에 의한 무혈 쿠데타가 발생하여 구주 역사상 최초의 군사정권이 수립되었고 Constantine 국왕은 국외로 추방당함.

 

사. Papadopoulos 군사정권 기간(1967.4∼1973.11)

 Papadopoulos 대령 주도하의 군사정권은 표면적으로는 민주헌정을 표방하였으나, 정당 활동 금지 및 계엄령 실시 등 사실상 군부독재 정치를 실시하였고, 마침내 Papadopoulos 자신이 1967.12 총리에 취임한데 이어 1972.3에는 섭정에 즉위하였음. 그리고 1973.6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국체를 왕정에서 대통령 중심제 공화정으로 변경한 후 동년 7월에 대통령에 취임함. 그러나 이에 반발한 Demetrios Ioannides 헌병 준장에 의한 역쿠데타가 동년 11월에 발생하여 새로운 군사정권시대를 맞이하게 됨.

 

아. Ioannides 군사정권 기간(1973.11∼1974.11)

 Ioannides 장군을 주축으로 한 소수 혁명주도 장교들은 혁명 이후 Phaidon Gahizikis 중장을 대통령으로 하고 민간인 Adamantios Androutsopoulos를 수상으로 하는 민간내각을 구성하였으나 실제 권력은 Ioannides 장군 주도하의 소수 군부인사들이 장악함.

 1974.7 사이프러스내 Enosis 운동(사이프러스와 그리스 병합운동)을 지원하여 사이프러스내 군부 쿠데타를 유발시키고 Makarios 사이프러스 대통령을 축출함. 그러나 터키의 군사개입 으로 사이프러스 분단이 초래되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Androutsopoulos 민간 내각과 군부 세력들이 퇴진함.

 Ghizikis 대통령은 당시 불란서에 망명중이던 Constantine Karamanlis 전총리에게 조각을 위촉함으로써 민정복귀가 이루어지고 계엄령 및 언론통제가 해제되었으며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정치활동이 다시 허용됨.

 

자. Karamanlis 신민당 집권기간(1974.11∼1981.10)

 1974.11 민정이양을 위한 총선거에서 Karamanlis 총리가 창당한 신민당이 압도적으로 다수의석(총 300석중 220석, 득표율 54%)을 확보하여 단독내각을 구성하였고, 1974.12 국민투표를 통하여 입헌 군주제가 폐지되었으며 1975.6 공화제 헌법이 선포됨.

 집권초기 신민당 정부는 오랜 군정에 따른 국민들의 민주화 여망에 부응키 위하여 대내적으로는 공산당 합법화등 좌익세력에 대한 관용, 언론통제 폐지 및 시장 경제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발칸제국 및 제 3세계와의 관계 개선에 주력함.

 그러나 국내 좌 .우익세력간의 충돌, 경제적 불황, EC 가입문제, 사이프러스 사태 해결 부진, 터키와의 분쟁 격화 등으로 대내외 정세가 점차 불리하게 되자 신민당은 국민의 재신임을 묻기 위하여 1977.11 조기 총선거를 실시함. 동 조기총선에서 신민당은 단독내각 구성이 가능한 의석(171석, 득표율 41.84%)을 다시 확보하였으나 1974년 총선에 비해 49석을 상실하는등 지지율이 크게 하락함.

 이에 자극을 받은 신민당은 국민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체제 정비를 추진, 1980.5 Karamanlis 총리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George Rallis를 신민당 총재 및 총리에 임명함. 그러나 1974. 11 민주 회복과 함께 창당된 Andreas Papandreou 총재가 이끄는 사회당(PASOK)의 강력한 도전을 받게 됨.

 

차. Papandreou 사회당 집권기간(1981.10∼1989.6)

 1981.10 실시된 총선에서 사회당(총재: Andreas Papandreou)은 총 의석 300석중 172석(득표율 48%)을 확보, 정권교체를 이룩함. 이러한 정권교체에는 신민당의 7년 장기집권에 대한 국민들의 권태감과 고물가, 고실업률등 민생문제에 대한 정부시책의 실패 및 프랑스의 사회당정권 등장에 따른 심리적 영향 등이 배경을 이루고 있음.

 사회당 정부는 선거공약 사업의 일환으로서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하였는 바, 선거연령 인하(종전 20세에서 18세로), 세속혼과 이혼인정 및 간통죄 폐지, 그리스 정교회의 시민생활 간섭 축소, 대학교육 체제의 개혁,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 임금의 인플레 연동제 등을 채택함.

 그러나 사회당 정부가 선거공약 사업이었던 EC 및 NATO 탈퇴, 그리스 주둔 미군기지 철수 등을 이행하지 못한 한편, 인플레율과 실업율의 증가, 국제수지 적자확대에 따른 외채증가등 경제사정의 악화로 국민의 지지도가 점차 하락 추세를 보이고, 1984.6 구주의회 선거에서 사회당과 근소한 차이의 득표에 고무된 신민당이 총재를 고령의 Averof 대신 Mitsotakis로 교체하는 등 정치기반을 보강하는데 주력하자 조기 총선을 검토하게 됨.

 사회당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율이 더 이상 하락하기 전에 조기총선을 실시키로 결정하고 85.5로 예정되었던 의회내 대통령 선출을 동년 3월로 앞당겨 실시하여 Karamanlis(신민당출신) 대통령 후임에 전직 대법원 판사인 Christos Sartzetakis를 선출하는 한편, 85.10로 예정된 총선을 동년 6월에 실시함으로써 총의석 300석중 161석을 확보(득표율 45%)하여 근소한 차이로 신민당을 누르고 재집권, 단독 내각을 재구성함. 또한 1986.3 총리와 의회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통령의 행정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헌법개정을 단행함으로써 집권 제 2기(85∼89) 정치권력 기반을 강화함.

 

카. 신민당 주도 과도연립정부 기간(1989.7∼1990.4)

 1989.6 실시된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총 300의석중 145석을 얻어 사회당(125석)보다 다수의석을 확보하였으나, 절대 과반수 미달로 1989. 7 공산당을 위시한 좌파연합(28석)과 임시 내각을 구성하였음.

 1989.11 제2차 총선에서는 신민당이 148석, 사회당이 128석, 좌파연합이 21석을 얻어 어느 당도 절대 과반수 의석을 얻지 못하여 6개월 이내 제3차 총선을 실시하는 조건으로 3당이 전 그리스은행 총재인 Zolotas를 총리로 천거하여 3당 연립내각을 구성함.

 

타. Mitsotakis의 신민당 집권(1990.4∼1993.10)

 90.4 총선결과 Mitsotakis 총리가 이끄는 신민당은 총의석 300석중 150석을 획득하고, 1석을 확보한 민주개혁당(85년 신민당에서 분당)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가까스로 과반수인 151석을 확보, 집권하게 됨.

 이어 90.5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 신민당의 Karamanlis 후보가 재적의원 300명 중 153명의 지지를 획득, 대통령에 당선됨.

 

파. Papandreou 사회당 재집권(1993.10∼1996.1)

1993.10 총선 결과, 사회당(PASOK)이 49%의 지지율로 의회에서 총 300석중 171석을 확보함으로써 재집권함. 또 95.3 대통령 선거에서는 K. Stephanopoulos 후보가 재적의원 300명중 181표를 획득, 당선됨.

 

하. Konstantin Simitis 사회당 집권(1996.1.∼)

 Papandreou 총리가 건강 악화로 96.1 사임하자 Konstantin Simitis가 총리직을 승계함. 사회당(PASOK)은 96.9 조기총선에서 41%(의회 300석중 163석 확보)의 지지율을 확보하여 재집권함.

 2000.4 조기총선에서 집권 사회당(PASOK)이 3회 연속 재집권에 성공함.(43%지지율, 의석 300석중 158석 확보)

 

 

여행 길잡이

소지품 분실 유의

- 치안사정은 전반적으로 양호하나, 동구 및 중동 난민들에 의한 절도, 들치기, 소매치기 사건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음을 감안, 주의 요망.(아테네 중심지인 신타그마, 옴모니아 광장 주변 및 해변가에서 범죄행위가 수시로 발생함)

- 여권, 현금, 신용카드 보관에 유의가 요망됨.(특히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 또는 취침중 소지품을 도난당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함. 뷔페 식사를 위해 이석 중 의자에 걸어놓은 가방/핸드백이 사라짐)

- 현금이나 신용카드를 분실할 경우, 여행에 상당한 차질이 생기므로, 현금은 나누어 보관함이 바람직함.

- 소지품 분실시 대사관이 협조 가능한 내용 (여권을 분실했을 경우, 신원을 확인하여 여행증명서를 발급함(사진 2매, 수수료 8 US$ 지참 요망), 현지경찰에 신고하는 방법을 안내해 주나, 금전적 대부, 항공권 재발급 수속 대행, 현지경찰에 피해 신고서 제출 대행, 분실물 수색, 범인 체포등은 어려우니 숙지 바람)

 

낯선 사람 경계 요망

- 현지에서 친해졌거나, 낮선 사람들이 음료수나 음식을 권할 경우 신변안전에 유의해야 함. (이들은 한두마디의 한국말을 구사하거나, 한국전 참전용사가족, 또는 한국에 많은 호감이 있는것처럼 친근감을 표시하며 접근, 수면제가 든 음료수등을 마시게 하여 절도행위를자행하며, 이들이 준 음료수를 호의로 잘못 알고 마신후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함)

- 경찰관을 사칭, 신분증 조사 또는 위조지폐 검색한다며 소지품을 강탈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으니 주의가 요망됨.

 

건강 유의사항

- 지중해성 기후로 여름은 고온 건조하고, 겨울은 저온다습하며, 봄. 가을은 한국기후와 유사하나 기간이 짧음.( 여름 온도가 39-40℃까지 가끔 상승하므로, 탈수, 일사병 주의 요망)

- 풍토병은 없고, 특별한 전염병 예방주사는 필요하지 않음

- 수돗물보다는 가급적 생수 이용(수돗물에는 석회성분 함유)

- 의약분업으로 의사 처방제를 첨부해야 약 구입이 가능하므로 구급약등 상비약 사전 준비 요망

- 야간의사 문의나 긴급의료기관 전화번호 : 131번

 

기타

 야간 아테네 술집을 이용시, 외국 여행객에 바가지를 크게 씌워 피해를 보는 경우가 빈번하니 주의 요망

 

 

 

관광 명소

 

아테네(Athens)메테오라(Meteora) 산토리니 섬(Santorini Island) 크레타 섬(Creta Island)

미케네(Mycenae) 로도스(Rodhos)

 

코린트(Corinth)

 '코린토스'라는 지명으로도 불리우는 코린트는 고대로부터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그리스 남북 육상교통의 요충지이며, 이오니아해(海)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로 크게 번영한 도시였다.

 호메로스의 시(詩)에는 중요한 도시로 되어 있지 않으나, 시(市)의 유적에서 미케네 시대 전기의 도기(陶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먼 옛날부터 번영해 온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시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무역으로 크게 번영을 누려 왔으며, 그리스의 여러 폴리스가 쇠퇴한 헬레니즘시대에도 상업도시로서 번성하여 '헬라스의 별'이라고 일컬어졌다.

 일찍부터 그리스 제일의 도기제조 중심지가 되어 코린트식 도기를 생산하였으나, 나중에는 그 지위를 아테네에 빼앗겼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고대에는 여러 차례 국제회의의 개최지가 되었다. BC 146년 로마가 이를 철저히 파괴해 버렸는데, BC 44년에 재건되어 다시 번영하였으며, 신약성서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고린도書). 그러나 521년에 지진으로 큰 타격을 입어 중세 이후 쇠퇴하다가 1858년 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현재의 새 코린트시는 구(舊)코린트시의 북동쪽 약 5km의 지점에 있으며 코린트현(縣)의 주도(主都)이다. 코린트만의 연안에 위치하며 아테네 등의 도시와 철도· 간선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자체자원은 거의 없으며, 카란토(코린트의 건포도라는 뜻)· 올리브유· 견직물· 펠로폰네소스의 북동부에서 생산되는 곡류 등을 수출하고 있다.

 따라서 코린트 관광의 핵심은 '구 코린트' 즉 '코린트 고대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이다.

 

고대 코린트 유적지(Ancient Corinth)

 B.C. 146년 로마군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고대 도시국가를 B.C. 44년 로마 황제 시저가 재건한 로마 시대의 유적이다. 코린트시에서 약 8km 떨어진 아크로코린트 산기슭에 있다. 고린도 유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B.C. 6세기 경에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기 위해 건설한 아폴론 신전으로, 그리스 신전 중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다. 건축 당시에는 38개의 원주로 된 신전이었으나 현재는 7개의 원주만이 남아 있다.

 이 밖에 신전 남쪽에는 상점 등의 흔적이 있는 아고라가 있으며, 아고라에서 북쪽 레카이온 항구까지 이어진 레카이온 거리에는 배수구까지 있었다고 한다. 입구 근처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저 일족의 상 등 출토된 발굴품을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고대 코린트 유적 박물관

 고대 코린트 유적 박물관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의 유물이나 출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 중 검고 붉은 색조의 그림이 그려진 코린트의 항아리는 특히 유명하다. 이 '코린트의 항아리'가 세계 각지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것이 뜻하는 바는 기원전 7세기경 무역 도시로서 최전성기를 누린 코린트가 당시 전세계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묘지의 장식물이었던 날깨 달린 스핑크스도 있다.

 

 

코린트 운하(Corinth Canal)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의 지협지형인 이오니아 해의 코린티아코스 만과 에게 해의 사로니코스 만을 연결하는 바닥 너비 21m, 표면 너비 25m, 깊이 7m, 길이 6,343m의 운하로 프랑스 자본의 민간회사에 의해 1882∼93년에 굴착되었다. 이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아테네의 외항 피레에프스와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사이의 항로를 320km 단축하였다. 수위(水位)가 일정하여 갑문이 없으나 약간의 조류에도 항행에 주의가 필요하다.

 예로부터 이 운하를 만들 계획이 있었으며, 로마의 황제 네로도 6,000명의 유대인 포로를 동원하여 공사에 착수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운하의 수면 위 60m에 길이 33m의 다리를 놓았으나 철도교(鐵道橋)는 폐쇄하였다.

 

 

 

데살로니카(Thessaloniki)

 데살로니카는 기원전 315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이복 동생 카스텔이 대왕의 누이 동생이며 자기 아내인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이다.

 당시 데살로니카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리이스인이었고, 상당수의 유다인, 로마인, 그외 다른 민족들이 있었다. 이 도시는 소아시아와 로마의 교차지이며, 군사지역, 상업 도시, 그리고 그리이스 철학이 뿌리를 깊게 내린 곳이다.

 7세기에 동로마 제국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빼앗은 후 데살로니카는 동서 로마 제국에서 콘스탄노플(비잔티움) 다음 가는 대도시로 번창했다.

 1430년 이후 거의 500년 동안이나  터어키 지배하에 있다가 1912년에 와서야 그리이스인들이 다시 차지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인구 100만 정도의 그리이스 제 2의 도시이다. 사도 바울로가 데살로니카에 간것은 50~51년 경의 제 2차 전도 여행때였다. 그는 필립비에서 설교를 하다가 투옥당하고 해당 당국에서 그도시를 떠나 달라고 종용하자 그곳을 떠나는 참이었다. 그는 에냐지아 국도(VIA EGNATIA)를 따라서 서쪽으로 가다가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루가는 이 도시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 경위를 매우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다(사도 17 :1-10). 바울로는 이곳에서 적어도 몇 달을 머물렀으며,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유다인들에게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등을 돌리자 하는 수 없이 이방인들에게로 가서 전도를 했다. 그러나 몇몇 데살로니카 사람들은 바울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았으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로가 유다교를 배신한 변질자로 단죄하고 바울로를 고소하여 내쫓을 기회만을 노리다가 바울로가 유숙하고 있던 야손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 때 바울로는 실라와 같이 간신히 탈출하여 베레아로 갔다.

 데살로니카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신자 생활을 성실히 이행하는 그곳 신자들이 처음 신앙 생활할 때를 회상하며 계속 열성으로 정진할 것과 그중에서도 종말을 떳떳이 맡이 할 수 있는 건전한 생활(5:6, 4:3, 2:12-13, 19:20)을 하도록 가르치고 격려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신설 교회에 목자로서의 끊임없는 배려와 종말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믿는 그곳 이방인 신자들이 제기한 죽은 자들의 운명과 자신들의 처신에 관한 문의(4:13)에 답하기 위해서이다.

 데살로니카에서 베레아를 거쳐 아테네에 온 바울로는 디모테오를 다시 데살로니카로 보내 그 곳 사정을 알아 보게 했다. 디모테오가 방문을 마치고 돌아올 때 바울로는 이미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에 와 있었으며(3:6-10) 여기서 그는 디모테오와 실라를 만나 데살로니카 교회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다.

 데살로니카 전서는 사도 바울로의 첫 서간일 뿐 아니라 신약성서 중에서도 제일 먼저 쓰여진 것이다.

 이 서간은 어렵고 까다로운 신학적 논제가 없으며 부자지간이나 사제지간에 이루어지는 단순하고 다정한 대화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로는 데살로니카 전서를 발송하고 얼마 후에 데살로니카 교회의 신자들이 종말이 왔다고 무절제한 생활을 한다고 들었다. 또 개종자들이 겪고 있는 핍박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님의 재림 때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의해 핍박자들에게 내릴 무서운 형벌을 강조했다. 이 서간의 목적은 다음 3가지로 볼 수 있다.

➀ 박해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믿음을 굳게 지키도록 신자들에게 용기와 힘을 복돋아 주기 위함이다.

➁ 재림에 선행되어야 할 사건들이 아직 성치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어 주의 날이 임했다는 잘못된 생각을 정정시키기 위함이다.

➂ 절제없는 난잡한 생활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엄한 훈계로 교회를 충고하기 위한 것이 이 서간의 목적이다.

 

 

 

필립비(Phillippi)

 지금은 어지간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작은 도시로 데살로니카 북서쪽에 있는 카발라에서 20km 떨어져 있다.

 그러나 바울로 사도 당시에는 꽤나 번창한 도시였다고 한다. 필립비 교회에는 바울로가 제 2차 전도 여행 때 마케도니아의 주요 도시 필립비에 세운 유럽에서의 첫 번째 교회이다.

 이 도시는 원래 크레미데스(KREMIDES "작은 샘들"이라는 뜻)라고 불리었는데, 기원전 358~354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부친 필립비 2세가 은과  금광으로 부유해진 이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필립비라고 하였다.

 기원전 168년 로마인들이 이 도시를 점령하고 그로부터 20년 후에 로마의 속주 도시로 되었다. 기원전 31년 필립비 시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처럼 자치권, 면세권, 절대 사유권등 이탈리아의 권리를 누리는 로마의 자치시로 승격하였다.

 주민 구성은 로마 군인, 파병등으로 인해 인구의 절반이 로마인이었고, 유다인들도 소수의 그룹을 형성하여 살았다. 주민 분포상 종교도 여러 가지로 혼합되었으며 경제적으로 윤택하였다. 사도 바울로는 2차 전도 여행 시기인 50~52년경 실라와 디모테오, 루카등과 동행하여(사도 16:10 이하)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필립비인들은 바울로에게 있어 "유럽에서 얻은 맏아들"이었다. 바울로는 이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지니고 제 3차 선교 여행때도 두 번씩이나 방문하였고, 그곳의 신자들도 사도 바울로에게 감사와 애정의 표시로 물질적 도움을 주었다.

 복음 선포에 장애가 될 것을 꺼러 어느 곳에 가서든 손수 노동하여 생계를 유지하던 바울로도 필립비 신자들의 도움만을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극히 예외적이다. 따라서 바울로가 필립비 신자들을 얼마나 친근하게 대했고 서로간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수 있겠다.

 바울로는 다른 지역의 선교활동 중에도 필립비 교회와 계속 긴밀한 유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회보다도 이 교회를 특별히 사랑하였다(사도 16:12-14, 1데살 2:2, 2고린 7:5-7, 8:2, 11:8-9, 필립 4:15-16).

 또한 필립비 신자들 역시 바울로를 스승으로 믿고 따랐으며, 데살로니카와 고린도에 있는 바울로를 여러 차례 도왔다. 그런데 바울로가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필립비 신자들은 에바프로디도를 시켜 좋은 위안의 선물을 주었다. 바울로를 도우러 왔던 에바프로디도가 병이들어 죽을 고비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자 바울로는 그를 보내며 필립보를 썼다. 여기서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 신자들이 에바프로디도를 기쁘게 맞아 줄 것과 얼마 후에 이곳에 디모테오도 보낼 뿐 아니라 자신도 방문할 계획임을 전하고 있다. 이에 곁들여 필립비 신자들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신뢰를 표시하고 공동체 내에 잔존하는 몇가지 윤리적 폐단을 및 악을 일삼는 이들과 그리이스의 십자가와 원수들에 대한 처신도 덧붙였다.

 사랑하는 필립비교회에 보낸 이 정감어린 편지는 바울로가 순서없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쓴 것이다. 이글에서 바울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곳 신자들과 함께 신안의 기쁨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나누고자 한다.

 필립비에서 바울로는 먼저 유대인의 기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는 유대교 개종자요 옷감 장수인 리디아의 집에 머물렀다(사도 16 :14-15).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반대자들의 고소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풀려 난 뒤 치안관들 요청으로 이 도시를 떠난다(사도 16 :16-40).

 사도 바울로는 필립비를 떠나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카로 갔다(사도17: 1). 현재 필립비에는 바실리카 회당, 리디아의 기념 교회, 바울로가 갇혔던 감옥등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파트모스(Patmos)

 파트모스 섬은 무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요한"이라는 사람이  로마의 도미시아누스 박해 시대 박해를 받아 가서면 요한 묵시록을 기록한 장소로 알려진 섬이다(묵시 1:9). 이 시기를 대개 94~96년경으로 보고 있다.

 사모스 섬으로부터 남서쪽으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으로 면적은 34㎢ 남북의 길이는 16km, 동서의 폭은 가장 넓은 지점이 10km, 해안선의 길이는 63km이다. 현재 이 섬의 인구는 약 2500명이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 파트모스 섬은 종교, 정치범을 귀양 보냈던 유배지였다. 묵시록 저자라고 알려진 요한은 도미니아누스 황제 때 이섬으로 유배와서 약 18개월 동안 살다가 네르바황제 때에 풀려나서 에페소로 갔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는 파트모스 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이라는 곳에 성 요한 수도원이 있고, 요한이 묵시록을 썼다는 요한의 동굴, 1713년 경에 세워진 파트모스 희랍 정교회 신하교가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요한이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세례터가 있다.

 

 

 

아폴론의 신전이 있는 도시 델포이(Delphi)

 올림피아 함께 고대 그리스 최대의 성지였던 델포이는 태양신 아폴론의 신전 유적이 있는 작은 도시다. 그리스 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이 유적은 아테네에서 북서쪽으로 170km 떨어진 포키스의 산 속에 있다.

 

그리스 신화속의 델포이

 원래 이땅은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딸 테미스가 지배하고, 퓨톤이 지키는 성스러운 땅이었다. 그런데 퓨톤은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하고 델포이에 가까운 파르나소스 산의 동굴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아폴론이 나타나서 이 큰 뱀을 퇴치해 버렸는데 그 후로 델포이 땅과 그 예언의 지배권은 아폴론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아폴론 신전이 세워지고 그 안에 옴팔로스(Omphalos, 배꼽이라는 뜻) 라는 대리석이 놓여지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라해서 '대지의 배꼽'이라 불렀다.

 그런데 실은 이돌은 예전에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토해냈던 '성스러운 돌' 이라고 한다.

 크로노스는 자기보다 강한 아들이 태어나서 자신을 물리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아들이 태어나면 모두 잡아 먹어 버렸다. 그런데 제우스 만은 어머니 레아가 몰래 감춰두고 대신 커더란 돌맹이를 보자기에 싸서 아기라고 주었으며 크로노스는 아기인 줄 알고 그 돌맹이를 삼켜 버렸다.

 아버지 눈을 피해 외딴 곳에서 성장한 제우스는 끝내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뱃속에 있던 돌맹이를 비롯하여 그때까지 잡아먹은 형제들을 모두 토해 내게 했다. 이때 나온 돌이 제우스의 아들인 아폴론 신전의 중심에 놓인 바로 그돌이다.

 

 

 

에게해 섬의 대명사 미코노스(Mykonos)

 미코노스 섬은 특별한 고대 유적이 없는 대신 파란 하늘 아래 파란 바다와 하얀 집들이 어우러져 엮어내는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섬으로 하얀 집들과 풍차는 이 섬의 상징이 되고 있다. 5개의 풍차는 오늘도 카토밀리 언덕위에서 이 지방 제1의 스타로서 변함없이 그들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얀집들, 풍차 다음으로 이 섬의 스타는 바로 펠리컨일 것이다. 늘 새로운 무리들이 떼지어 날아들고 새 생명들을 이 섬에 번식시켜 나가고 있다. 이곳은 유럽에서도 아주 유명한 휴양지로 알려져 있어 일년 내내 관광객들로 가득 차며, 우리나라에서도 음료수 광고의 배경으로 나와 한층 그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 '지중해'의 배경이 된 섬이기도 하다. 이 섬을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9월 초순.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7, 8월 성수기보다 비교적 한산한 분위기에서 미코노스를 마음껏 즐길 수 있어 좋다. 태양으로 인해 반짝이는 하얀 회벽, 건물 앞 파라솔 밑에서 발 아래로 시원스레 펼쳐진 지중해를 바라보며 계피향 그윽한 카푸치노 한 잔으로 잠시 지친 몸을 달랠 때, 한 줌 바람이라도 불어주어 가슴을 시원하게 해 준다면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미코노스 섬은 항구를 중심으로 타운을 이루고 있는데 반경 1km 이내로 걸어서 여행하기에 적당하다. 그래서 이곳의 길들은 두 사람이 지나가면 딱 맞을 정도로 작고 좁은 편이다. 이 타운의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들은 바다를 볼 수 있도록 부두 앞에 자리하고 있는데, 쓰레기나 음식물로 지저분한 보통의 부둣가와는 달리 이곳의 바다는 속이 투명하게 비칠 정도로 아주 깨끗하다. 부두를 중심으로 민예 박물관과 풍차가 자리하고 있어 인상적이며, 부두 끝에서 미코노스 타운을 바라다보면 하얀색의 집들과 파란색의 하늘과 바다가 그렇게 상큼하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부둣가에서 벌써 2대째 사람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는 펠리컨과 재래시장에서 만나는 소박한 그리스 어민들은 이 미코노스의 또 다른 매력이다.

 미코노스에서 배를 타고 5시간 정도 가면 아틀란타스의 전설이 살아 있는 산토리니(Santorini) 섬이다. 키클라데스 제도 중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섬으로 그리스에서는 ‘시라(Thira)’라고 부른다. 기원전 15세기쯤 대규모의 화산 폭발로 섬의 중간부분이 가라앉으면서 섬 전체가 마치 초승달 모양을 하게 되었다.

 산토리니 섬의 자연경관은 미코노스 섬과는 아주 다른 인상을 준다. 배를 타고 서서히 다가서면 하얗게 눈이 내린 듯한 타운이 눈에 들어온다. 면도칼로 잘라 놓은 듯한 깎아지른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카페와 호텔들. 미코노스가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섬이라면 산토리니는 남성다운 웅장함이 느껴지는 섬이다.

 

◈ 아폴로 탄생의 신화가 어린 델로스 섬(Delos Island)

 델로스 섬은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태양의 신 아폴로가 태어난 장소로 키클라데스(Cyclades) 군도의 이 작은 섬이다. 델로스의 아폴로 신전에는 오늘날 그리스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델로스는 한때 번영했던 무역항이기도 하였다. 이곳에는 B.C 3000년부터 초기 그리스도 시대까지 지속되었던 에게문명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이 고고 유적은 상당히 광범위하고 풍부하여 당시 지중해의 거대도시항구로서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 그리스 신화속에서 만나는 델로스 섬과 아폴로 신

 제우스의 정실부인인 헤라는 제우스의 연인들과 자식들을 심하게 박해하였다. 그들 중 레토는 자신의 아들 아레스보다 위대한 신 아폴론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때문에 더욱 심하게 박해하였다. 제우스의 자식을 임신한 레토는 출산할 피난처를 찾아 다녔지만 레토의 해산을 허락하는 곳은 영원한 불모지로 만들겠다는 헤라의 협박때문에 해산할 장소를 찾을수 없었다. 만삭의 몸으로 육지는 물론이고, 크레타 섬을 한바퀴 돌아 바다를 건넜지만 헤라의 보복이 두려워 레토의 해산을 허락하는 곳은 없었다. 소아시아 지방의 해안을 따라 내려가다 마침내 에게해의 파도를 따라 떠도는 섬인 델로스(Delos) 섬에 도착하였다.

 그 섬은 너무도 척박하여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손해볼 것이 없었다. 아폴론을 낳으면 제일 먼저 이 섬에 그의 신전을 지어 줄 것을 약속한 후 레토는 겨우 델로스로부터 몸을 풀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모든 올림푸스의 여신들이 위대한 신의 탄생을 보기 위해 델로스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헤라가 해산을 주관하는 여신 에일레이튀이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흐레 밤낮 동안 진통이 왔으나 좀처럼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보다못한 신들이 무지개의 신 이리스를 보내 에일레리튀이아를 불러오게 했다. 헤라가 눈치 못 채게 에일레이튀이아에게 다가간 이리스는 황금 목걸이로 매수하여 델로스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 그제서야 레토는 종려나무를 붙잡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쌍둥이 남매를 낳았다.

 델로스 섬은 원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이었는데 포세이돈이 사슬로 묶어 고정시켜 놓았다. 제우스는 아폴론의 탄생을 알자 아폴론에게 금모자와 하프와 백조가 끄는 수레를 주었다.

 여신 테미스에게 양육된 아폴론은 태어난 지 수일 만에 청년으로 성장하여 히페르보레이로 여행을 떠났다. 1년간 머무른 후 그리스의 델포이로 옮겨 파이톤이라는 구렁이를 죽였다. 그것을 기념하여 피티아축제경기를 창시하였고 테미스의 신탁을 자기 것으로 하여 삼각대(三脚臺)를 신전에 바쳤다. 찬양하는 델포이주민의 <파이안>이라는 아폴론찬가를 들으면서 아폴론은 구렁이를 죽인 부정(不淨)을 씻어내기 위해 북쪽의 템페계곡으로 떠났다. 그 후 신의 승리와 부정을 없애기 위한 여행을 기념하여 셉테리아라는 축제가 8년마다 거행되었다고 한다.

 

 

◈ 사도 요한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밧모섬(Patmos)

 에베소의 남서쪽 90km, 에게해의 스포라데스에 속하는 작은 섬이다.

 남북 길이 16km, 동서길이 9km, 면적 40㎢, 해안은 60km에 이른다.

 인구는 약 3천명 정도이다.

 지표는 모두 화성암으로 이루어져 불모지이고 밀이나 포도나무의 재배가 약간 이루어진다. 산은 높지 않고 최고봉인 일리아스도 269m이지만 전망은 매우 아름답다.

 로마제국 시대에 종교· 정치범을 귀양 보냈던 유배지였다.

 <요한의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로마의 도미시아누스 박해 시대 유배가서 <요한의 묵시록>을 기록한 장소로 알려진 섬이다. 요한은 18개월 동안 있었는데, 이곳에서 <요한의 묵시록>을 썼다.

 이 시기를 대개 94~96년경으로 추측한다. 현재 이곳에는 밧모섬의 중심지인 호라 마을에 요한 수도원이 있고, <요한의 묵시록>을 썼다는 요한의 동굴, 1713년경에 세원진 밧모 희랍정교회 신학교, 이곳에 요한이 최초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세례터가 있다. 성지 순례의 코스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스파르타(Sparta)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해 있으며 라코니아의 도청 소재지인 스파르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스파르타 교육', '스파르타 식(式)' 이런 말들로 뇌리깊게 박혀있는 도시이다.

 이런 스파르타 도시는 사실 파괴와 재건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스파르타는 9세기 슬라브족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비잔틴 사람들에 의해 재건되었다가, 미스트라에 정착한 노르만족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그후 베네치아 사람들과 오스만 터키족의 지배하에서 근근히 살아갔다.

 이러한 고대 스타르타는 19세기에 이르러 큰 가로수 길이 나있고 타이게스토스 산의 꼭대기가 내려다보고 있는 현대적인 도시로 변모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한 건물에는 이 지방에서 발견된 유적을 전시하는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스의 관문도시 파트라(Patra)

 파트라 Patra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부 상단에 위치한 도시지만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심도시다. 이탈리아에서 오는 페리 호의 승객들을 파트라 항구를 통해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이의 해운의 요충지이고, 이오니아 해의 섬들과도 연결되어 있는 그리스의 관문도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니온 곶(CAPE SOUNION)

 아테네의 동남쪽 70km 에 위치. 일출, 일몰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하다.

 아티카 반도 돌출부에 있는 곶으로, 눈앞으로 푸른 에게 해가 펼쳐진다. 곳곳에 완만한 모래사장이 있어 해수욕하기에 안성맞춤이며, 수평선에서의 일몰은 장관을 이룬다.

 수니온 곶 언덕 위에는 B.C. 490년에 건축하기 시작, 중간에 파괴되었다가 B.C. 444년에 완성된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전(Naos Poseidonos)이 있다. 현재는 15개의 도리스식 기둥만이 남아 있는데, 바이런 등 유명인들의 낙서가 새겨져 있다.

 

o 수니온 곶으로 가는 길

 국립 고고학박물관 북쪽 마브로마테온(Mavromateon) 거리에 있는 버스 터미널에서 수니온 곶으로 버스가 출발한다. 아폴로 코스트 통과 노선과 내륙 통과 노선이 매시간마다 출발하며, 약 1시간 40분~2시간 소요.

 

 

에피다우로스 (EPIDAUROS)

 아테네의 서남쪽 180km에 위치. 의신 숭배의 장소였던 만큼 의료관계 건축이 많다. 여기에서 볼 것은 원형 극장으로 멋진 조형과 음향효과가 놀랍다.

 

 

델피(DELPHI)

 아테네의 서쪽 160km 에 위치. 그리스 운명을 좌우한 아폴론의 신탁이 행해졌던 성역. 거대한 아폴론 신전을 중심으로 보물전, 극장, 제전 경기장이 배치되어 있다.

 

 

호시오스 루카스 수도원

   (MONASTERY OF HOSIOS LOUKAS)

 델피 부근에 위치. 그리스에서 손꼽히는 비잔틴 양식의 건축(10세기)모자이크 바닥이 색다르다.

 

 

사로니카 만 (SARONIC GULF)

 해수욕에 적격인 에기나섬, 아테네 시민의 주말 휴식처, 포로스섬 화가들이 좋아하는 이드라섬 등이 떠있고, 피래우스에서 쉽게 건너갈 수 있다.

 

 

기타지역

사모스 (SAMOS)

 사모스는 다른지역에 비해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지중해에서 고대 유적이 가장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유적지인 터키 해안의 에페수스로 가는 가장 중요한 통행지점이다.

 

린도스 (LINDOS)

 십자군 요새와 고대 아크로폴리스, 가파른 회백색의 거리, 모래 사장등 관광객에게 매력적인 곳이다. 숙박시설은 비싼편이다. 해안가에 무료 샤워시설이 있는 곳에서 야영도 괜찮다.

 

카르파토스 (KARPATHOS)

 카르파토스는 고립되어 있으며, 실제 작동하는 2대의 풍차와 전통의상의 여인들이 있는 전통 마을 오림보스와 예쁘고 돌이 많은 바난다로 두드러진다. 둘 다 섬의 북쪽 조그만 항구 디아파니에서 갈 수 있다. 아름답지만 거의 버려진 해변 아하타와 아모피는 야영과 누드 해수욕에는 최상의 지역이다.

 

 

† 그리이스 내륙에서의 바울의 행적

➊ 네압볼리(현재 카발라)  : 사도행전 16:11

 바울이 터키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이스에 왔을 때 첫 항구 도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중인 기원후 49~50에 이곳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짐. 물론 3차 여행(53~58년) 기간중에 도 이곳으로 들어 왔고 이곳을 통하여 터키 지방으로 갔음.

 

➋ 빌립모(현재 빌립비) : 사도 행전 16:12

 이곳에서 바울은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웠고 루디아라는 여성도에게 세례를 베풀고 현재는 그 여성도의 이름을 기념하여 기념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빌립모에서 1km 지점에 있다. 여기에서 바울이 옥에 갇히고 심한 매를 맞았는데 그 감옥터를 오늘날도 볼 수 있다.

 

➌ 암비볼리(현재도 암비볼리) : 사도 행전 17:1

 이 곳은 카발라에서 약 67km 지점이고 데살로니카에서 102km 지점인데 바울이 지나 간 것을 기념하여 기년 교회를 세웠다.

 

➍ 아볼로니아(현재도 아볼로니아) : 사도 행전 17:1

 암비볼리에서 데살로니카 쪽으로 약 40km 정도 지점인데 이곳도 역시 기념 교회만 있다.

 

➎ 데살로니카(현재도 데살로니카) : 사도 행전 17:1

 아볼로니아에서 내륙쪽으로 62km 지점인데 당시에 가장 번창한 상업과 자유 무역의 중심지였고 바울이 이곳에서 3주일간 하느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큰 결실을 얻었고 오늘날 3세기의 교회당(당시의 유대인 회당자리)인 디미트리우스 교회는 그 크기와 내부 구조에 있어서 그리이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중의 하나이다.

 

➏ 베뢰아(현재 베리아) : 사도행전 17:1

 데살로니카에서 남쪽 대륙으로 78km 지점으로서 성경 말씀을 받는 태도에 있어서 데살로니카 교인보다 신사적이고 날마다 상고하므로(행 7:11) 칭찬을 많이 받은 교회이다.

 

➐ 아테네(아덴) : 사도 행전 17:15

 바울은 베뢰아에서 배를 타고 아테네에 들어왔는데(7:14) 베뢰아에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 두고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서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희랍의 철학자들과 변론을 했는데 많은 결실을 얻었지만 대단한 의미가 있었고 현재 언덕 밑에는 비잔틴 스타일의 바울 기념 교회가 있다.

 

➑ 고린도(현재도 고린도) : 사도 행전 18:1

 아덴에서 펠레포네소스 반도 쪽으로  84km 지점으로 당시 상업도시로서 성적 타락이 문란했었는데 바울은 이곳에서 18개월 즉 6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고 회당장 그리스보의 가장을 주께로 인도한 사건이다.

 

➒ 겐그레아(현재도 겐그레아) : 사도 행전 18:18

 구 고린도에서 약 7.8km 지점의 항구로서 바울은 이곳에서 머리를 깎고 선교의 재다짐을 한곳으로 에페소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 기타 그리이스의 성지

    1) 밧모섬 : 계시록 1:9(현 파모스트)

    2) 로도

    3) 크레레

    4) 사모드라게

    5) 키오스

    6) 사모스

    7) 미틀레네

    8) 에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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