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Italia, The Italian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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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쏘렌토.카프리 · 로마 · 밀라노 · 바티칸 · 베니스 · 아씨시 · 토리노 · 시에나(Siena)

피사. 비아레조 · 폼페이 · 피렌체 · 친퀘테레(Cinque Terre) · 라스페치아(La Spezia)

산마리노 공화국(San Marino) · 베로나 · 마테라(Matera) · 비첸차(Vicenza) · 티볼리

파도바(Padova) · 바리(Bari) · 오르비에토(Orvieto)

시칠리아 - 카타니아· 팔레르모· 몬레알레· 아그리젠트· 에트나 산· 메시나· 시라쿠사

포토 갤러리

 

루비콘강을 건너다. 시저(Caesar)

❋ 발레리아 메살리나(Valeria Messalina)

*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공식 이름은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Italiana/Italian Republic).

 영어로는 이태리(Italy)라고 표기한다.

 

 이탈리아는 유럽 문명의 요람지로서 옛부터 에트루스트, 그리스, 로마 등의 발자취가 어울어졌던 곳이다.  

 

 면적이 약 30만㎢이고, 인구는 약  6,000만 명으로 이탈리아의 각 부분마다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자랑하고 고유의 전통과 풍습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반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박물관이라 할 만큼 풍부한 관광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로마제국이 북부 유럽의 게르만족에게 멸망된후 여러곳에서 왕국이 세워졌는데, 그 예로 베니스 왕국, 나폴리 왕국, 시실리 왕국, 제노아 왕국, 밀라노 왕국 등이다.

 

 1798년 나폴레옹에게 반도의 전체를 점령당하고 모든 왕국은 멸망되고 말았다. 1815년에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하자 연합군 대표들이 비엔나의 쉔브른 궁에 모여 회담을 연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독립 전쟁을 일으킨 결과, 남부 이탈리아의 가리발디 장군에 의하여 이탈리아 반도는 통일을 이루었다. 이때가 1870년이다.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연합국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1920년대의 사회적 불안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을 낳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 되었다. 1943년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패배하였고, 1946년에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그 후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NATO)와 유럽 공동체(European Community/EU)의 창립 회원국이 되었다.

 

 1970년대 이탈리아는 제한적 자치권을 갖기는 하지만, 입법기능과 과세권을 갖는 지방자치제도를 완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련의 정치적 격변들을 겪었지만, 사회적 안정을 유지했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에 이은 세계 우위의 경제 대국이며, 중소기업의 지역별 특징을 따라 발달된것이 특징이며, 주요 발달 업종은 자동차, 조선, 화학 무기 산업이다.

 

 또한 가죽 제품을 포함한 패션, 의류 산업이 발달돼 있다. 수도는 로마이나, 경제적인 수도는 밀라노라 할 정도로 모든 금융, 정보, 교통이 집중돼 있다. 교육제도는 초등학교 5년, 중학교 3년까지 의무 교육이며, 고등학교 5년, 대학교  4~6년의 학제를 채택하여 상급학교 진학시 국가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진학이 가능하다.

 

 정치 형태는 상하양원의 내각 책임제를 채택하며, 임기는 5년으로 되어있다. 상원 의원은 315명, 약간의 평생의원, 그리고 하원의원 630명으로 구성돼며, 대통령은 7년 단임으로서 상징적인 국가의 수반이나, 수상임명권, 국회해산권의 권한을 갖으며 정치적인 위기상황에서 중재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Italia) 개요

o 공식명칭: 이탈리아 공화국 (The Italian Republic)

o 수도: 로마(한국과 -7시간차)

o 면적: 약 30만㎢(한반도의 1.364배. 세계 72위)

o 인구: 약 6,036만 명(2022년. 세계 24위)

o GDP: 약 2조 1,062억$(2022년. 세계 8위)

o 언어: 이탈리아어

o 주요민족: 이탈리아인

o 기후: 지중해성기후

o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양원제

o 종교: 로마가톨릭(90%)

o 화폐: 유로 (€)

o 국화: 데이지

o 국가번호: 39

o 전압: 230V / 50Hz

o 도메인: .it

 

 

위 치

 이탈리아는 긴 장화 모양으로 생긴 반도국가로 지중해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3면이 지중해에 둘러 싸여 동쪽 해안선 아드리아 해부터 남쪽 이오니아 해 서쪽으로는 티레니아 해 리구리아 해로 둘러싸여  총 연장 길이 약 8,700 ㎞의 넓은 바다를 즐길 수 있고 남북의 길이는 약 1,300km로 최 북단은 북위 47°5'30"이며 남단은 북위 35°29'24"의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은 알프스를 경계로 프랑스,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스위스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이런 지형적인 면에서 이탈리아는 가장 유럽적인 자연과 문화를 지닌  곳이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내에 바티칸 시국과 산 마리노 공화국이라는 두 나라가 위치하고 있다.

 

면 적 

 총 면적은 30만 1,262㎢이며 국토의 83%가 대륙과 반도, 17%가 섬으로 되어 있다. 산지는  약 35% 정도를 차지하고 국토의 42%는 구릉지대, 나머지 23%는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산지와 구릉이 많은 나라로 넓이가 55,000 ㎢ 에 이르는 포 평원과 그밖에 1,900 ㎢의  캄파니아  평야를 비롯한 소규모의 평야가 흩어져 있다.

 

인 종

 이탈리아 인은 고대의 지리적, 역사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여러 민족이 섞여있어 한마디로 이탈리아 인을 확실히 규정 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굳이 표현하면 라틴계에 가깝다. 게르만족과 비교해 보면 대체로 키가 작고 까만 머리색과 눈을 가지고 있다. 선조는 인도와 유럽의 인종이라 할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스위스에 가까운 북부 이탈리아 인은 키가 크고 냉정하며 근면한 반면 남부 이탈리아인 키가 작고 정열적인 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남부 시칠리아 섬 부근 출신자들은 노르만계의 영향을 받아 큰 키에 금발 머리를 한 주민도 많으므로 남과 북을 확실히 구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역사적인 사실을 두고 보더라도 라틴계 사람 중에는 유럽 인으로 진출해 혼혈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생김새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과 기후

 이탈리아의 기후는 고온 건조 저온 다습한 지중해성 기후가 지배적이다. 로마의 연평균 기후는 섭씨 15.3℃이며 연 교차가 섭씨 18.1℃, 연 강수량은 880 mm 이다. 북부는 대륙성 기후에 가까우며 연평균 기온 섭씨 13℃이고 연 강수량은 1,000mm가 넘고 곡창지대를 이루지만 중 남부와 섬은 해양성 기후를 보이고 있어 올리브와 감귤 재배에 적합하다. 또한 북부는 알프스 산맥이 방패 역할을 해 한파를 막아주고 있으며 중 남부 지역은 지중해에 접해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기후는 온난 한편이며 시칠리아 섬은 아프리카 바람의 영향을 받고 사르데냐 섬은 대서양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중 남부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으로는 겨울에는 비가 많고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안치만 겨울날씨가 온화해 겨울철에도 요양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이탈리아는 또한 손 꼽히는 화산국이다. 세계 3대 미 항인 나폴리에 있는 베수비우스 화산(1,277m)은 전후 80회의 폭발도 했고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3,279m), 계속 연기를 뿜어 내고 있는 스트롬볼리 화산(925m)등이 대표적이다.

 

행정상 구분

 이탈리아는 20개의 주로 나뉘어 지방 자치제를 1970년 부터 LEONE 대통령에 의해서 실시 하였다. LAZIO, ABRUZZO, BASILICATA, CALABLIA, CAMPANIA, EMILIA-ROMAGNA, LINGURIA, LOBARDIA, MARCHE, MOLISE, PIEMONTE, PUGLIA, TOSCANA, UMBRIA, VENETO, FRIULI VENEZIA GIULIA, SARDEGNA, SICILIA, TRENTINO-ALTO ADIGE, VALLE D'AOSTA

 

주요산업

 이탈리아에서 일반적으로 로마는 문화의 수도, 피렌체를 경제의 수도, 밀아노를 산업의 수도라 부른다. 북쪽에 밀라노, 토리노, 베로나등을 중심으로 자동차, 중-경기계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공업 국가로써 세계 제 5위이다. 이탈리아 내에서 3대 항구라 하면 베니스, 제노바, 나폴리 항을 들 수 있고 이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조선 중.화학 공업이 발달했다. 이탈리아가 섬유제품이나 가죽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는 것은 오랜 전통과 기술이 발달 그리고 장인 정신 때문이라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사람들이 실크와 옷을 입없다는 걸로도 쉽게 알 수 있다)

 

 

로마 기후(℃. mm)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로 마

(Roma)

최고평균

11

13

15

19

23

27

31

30

27

21

16

12

최저평균

3

4

7

9

12

16

19

18

16

12

8

4

평  균

8.1

8.6

11.1

13.9

18.1

21.7

24.5

24.5

22.2

17.2

12.5

9.2

강수량mm

80.7

74.9

65.0

54.7

31.8

16.3

14.7

33.3

68.2

93.4

110.5

89.6

강우일수

10

10

9

9

5

2

3

6

11

12

12

 

 

이탈리아 여행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점

o 이탈리아는 유럽 국가 중 가장 치안 상태가 불안한 나라이다. 특히 소매치기와 집시 아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집시들은 주요 관광지(특히 콜롯세움, 보로게세공원, 포로로마노근처, 트레비 분수, 베네치아 광장)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고 지하철이나 버스내에서도 떠들면서 접근해 주머니나 지갑을 뒤진다.

 

o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을 겉옷 주머니에 넣어두지 않고 절대 안에 돈을 넣어 맨살 허리에 둘러 꼭 묶어 속옷과 겉옷을 입는 것이 가장 좋다. 겉옷에는 교통비 정도만 넣어 갖고 다니며, 쇼핑을 할 때는 상점 화장실이나 한쪽 구석에서 돈을 꺼내는게 현명하다.

 

o 유럽 어느 지역이나 야간 열차는 도둑들의 표적이 되지만, 특히 이탈리아 구간은 심하다. 새벽 2시부터 5시 사이에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난다. 큰 가방들은 체인으로 선반에 묶는 것이 좋다, 만약 피해를 당했다면 당황하지 말고 열차 안을 찾아본다. 운이 좋으면 현금 이외에 다른 것은 찾을 수 있기 때문. 쿠셋에서는 열차 승무원이 있기 때문에 범죄가 그리 많지 않지만 콘파트먼트에서는 종종 발생한다. 운이 나쁘면 항상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주의해야 한다.

 

o 모르는 사람이 음료수를 권할 때에는 한번쯤 의심 해보는 것이 좋으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맡기는 경우 카메라를 도난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o 여성의 경우 호젓한 곳을 혼자 다니는 것은 위험하므로 큰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며, 여러명의 동행인과 함께 다니도록 한다.

 

o 옷차림은 자유롭지만 바티칸 박물관과 카타콤베 관광시 여성은 소매없는 옷, 짧은 치마, 남성은 반바지 차림을 삼가야 한다.

 

o 이탈리아의 팁은 Mancia(만차)라고 하며 레스토랑이나 택시등에서 약 10∼15%의 팁을 주어야한다.

 

o 여행자가 조금만 신경쓰면 금품이나 소지품을 도난당하는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에는 여권이나 기타 귀중품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이테리 역사

1. 로마에서 르네상스까지

 BC 7세기경 테베레강(江) 하류에 일어난 로마인은 중부 이탈리아의 에트루스키인(人)과 이탈리치계(系) 민족을 제압하여 남하하는 켈트인(人)을 격퇴한다. 또,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도 정복하여 BC 270년경까지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그 뒤 지중해 지역뿐만 아니라 북쪽과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대하여 BC 27년 시작되는 제정(帝政)의 최성기에는 북쪽은 영국, 남쪽은 사하라, 서쪽은 이베리아반도, 동쪽은 이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속주(屬州)의 경제력·군사력의 상승에 따라 이탈리아 본토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저하된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국교화, 331년 콘스탄티노플 천도(遷都), 395년 동로마·서로마의 분열 등 로마 제국은 분해(分解) 경향을 더하다가,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서로마 제국은 정치사에서 사라졌다. 게르만계(系) 민족의 침입은 그 뒤에도 계속된다. 6세기 말에는 엘베강(江) 하류 지역에 기원하는 랑고바르드족(族)이 롬바르디아에서 캄파니아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하였다. 랑고바르드 세력은 8세기 후반 교황의 요청을 받은 프랑크 세력과의 싸움으로 약화되고, 800년 교황에 의하여 샤를마뉴가 신성로마 황제에 임명되어 카를 대제(大帝)가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역사는 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독일·프랑스의 역사와 밀접하게 얽힌다.

 

 남이탈리아에서는 827년 튀니스의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에 상륙하여 비잔틴의 지배에서 시칠리아를 빼앗아 팔레르모를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를 열면서 많은 새로운 재배 작물을 이탈리아에 가져다 주었다. 이슬람 교도에 의한 시칠리아 지배는 11세기에 노르만인에 의하여 종지부를 찍었다. 노르만인은 11세기 초부터 순례·용병 또는 십자군 병사로서 남이탈리아에 와서 왕조를 세웠다. 서유럽풍(風)의 봉건제도, 비잔틴풍의 관료제도, 아랍식(式) 문화가 융화를 이루어 번영하였으며, 이것이 절정에 달한 것은 혈연관계로 시칠리아 왕(王)과 신성로마 황제를 겸하게 된 호엔슈타우펜가(家)의 프리드리히 2세 시대이다. 그 뒤 남이탈리아는 프랑스 앙주가(家)의 지배를 거친 후 에스파냐의 아라곤가(家)의 지배를 받았다.

 

 이탈리아반도와 비잔틴의 교역은 10세기 말부터 활발하였으나 십자군을 계기로 더욱 진전하여 베네치아·피사·제노바 등의 여러 도시가 번영했다. 아말피·바리 등의 남이탈리아의 상업도시의 번영은 집권적인 왕조체제의 강화 때문에 오래 가지는 못하였으나, 북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기사계급도 상인 및 토지소유자들로 이루어진 도시세력과 결탁하여 코무네라고 하는 제권(帝權)에서 독립한 자치체를 형성하였다. 12세기 중엽,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1세가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에 패한 것이 이탈리아에서 코무네 번영시대의 계기가 되었다. 이 시대에는 베네치아·제노바 등과 함께 피렌체·밀라노·루카 등의 내륙도시도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도시상호간의 대립, 도시 내부에서 상공업에 종사하는 일반시민과 대상인(大商人)이나 토지소유자로 이루어지는 토지귀족의 대립이 격화하고 이에 황제와 교황의 대립이 얽혀 13세기의 이탈리아 도시에서는 기벨린파(皇帝派)와 겔프파(敎皇派)의 대립이란 명목 아래 항쟁이 더욱 더 격화하였다. 항쟁상태에 있는 도시의 질서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특정 유력자에게 시정(市政)의 전권(全權)을 위임하는 이른바 시뇨리아제(制)가 밀라노를 비롯한 기타 소도시에서 보이기 시작하여 형식적으로는 공화제인 피렌체도 사실상 메디치가의 전제 지배에 들어갔다. 도시의 발전과 동방의 높은 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시야의 확대, 상인의 현세적·합리적인 의식 등을 기초로 하여 르네상스 문화가 탄생하였다. 그것이 특히 꽃핀 것은 메디치가를 비롯한 지배자의 궁정이나 교황의 보호 아래에서였다.

 

2. 이탈리아 통일

 이탈리아반도의 정치정세는 독일·프랑스·에스파냐 등 인접한 강대국의 개입을 초래할 계기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16세기에는 외국세력의 싸움터가 되고, 한편 신대륙 발견과 오스만투르크의 진출, 이에 따르는 상업로(商業路)의 변화에 의하여 17세기 이후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로도 정체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이탈리아의 사보이 왕국만은 17세기 후반 이후 합스부르크가(家)와 부르봉가(家)의 대립을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고, 18세기에는 사르데냐·리구리아·피에몬테로부터 롬바르디아의 일부까지도 영유하였다.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오스트리아·에스파냐 세력을 추방하여 봉건적 특권의 폐지, 교회재산의 몰수 등 프랑스혁명 정신을 이탈리아에 가져다 주는 역할을 다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구체제(舊體制)가 부활하였으나 각지에서 입헌혁명(立憲革命) 또는 공화제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 일어났으며, 1848년 유럽의 혁명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각지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들 운동은 오스트리아의 군사력과 교황 원조에 나선 나폴레옹 3세의 무력간섭에 의하여 좌절되었으며, 입헌헌법을 유지한 곳은 사르데냐 왕국(사보이왕국)뿐이었다.

 

 이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치하의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의 중심이 되었다. 사르데냐 왕국의 수상 카보우르는 국내에서 자유주의적 정책을 실시하여 열강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한 외교에 의하여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에서 해방시키고, 토스카나 왕국·교황령 등 중부 이탈리아의 병합을 추진하였다. 한편 가리발디는 의용군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원정하여 두 시칠리아 왕국을 제압했다. 이리하여 당시 아직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북동부와 교황이 지배하던 로마를 제외하고 이탈리아의 통일이 대체로 달성되어 1861년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국왕으로 하는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 수도는 처음에 토리노, 뒤에 피렌체로 옮겨졌다가 1870년 로마 점령에 이어 1871년 로마를 수도로 정했다.

 

3. 통일 이후

 통일 후 20년간 이탈리아는 카보우르 이래의 자유무역주의를 취하면서 철도망 건설, 통일적 행정 및 경제제도의 채용 등을 통해서 통일의 열매를 거두려고 하였다. 자유무역주의와 북부의 제도를 남부에 강요했기 때문에 부르봉왕조의 식산정책(殖産政策)에 의하여 싹을 본 남부의 근대공업은 쇠퇴하고 다시 전근대적인 토지제도와 결합된 낮은 생산력 수준의 남부농업이 화근이 되어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남부는 국내식민지와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1880년대 말 이후 남북 이탈리아의 격차와 국내의 대다수 주민의 빈곤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식민지경영에 나섰으나 그것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19세기 말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한편에서는 사회주의운동이,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주의적 경향의 운동이 대두하였다. 19세기~20세기 초의 호황기에 중공업의 보호육성과 몇 가지의 자유주의적 정책이 취해져 중화학공업이 발달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시기에 총동맹파업과 폭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는데, 이 혼란에서 회복하지 못한 채 이탈리아는 제l차 세계대전에 휘말려 들어갔다. 연합국측으로 전승국이 된 이탈리아는 아디제강(江) 상류지역과 이스트리아 지방을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의 불황으로 엄청난 수의 실업자가 속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마치아의 영토 요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점도 겹쳐 국내에서는 온갖 불만이 일어났다. 1920년 이후 밀라노·토리노 등에서 노동자에 의하여 공장이 점거되고 생산을 관리하게 되자 이에 반감을 가진 소시민과 농민을 배경으로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黨)이 세력을 신장했다.

 

 1929년 정국의 혼란을 틈타 각지의 파시스트에 의한 ‘로마 진군(進軍)’이라는 형식으로 무혈 쿠데타에 성공하여 무솔리니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에 대하여 좌익세력은 분열되어 있어 유효한 반격을 하지 못했으며, 또 현재의 기독교민주당의 전신인 인민당은 뒤에 무솔리니에 의해서 비합법화되는데, 최초의 무솔리니 정권 탄생시에는 파시스트당과의 연립내각에 참가했다.

 

 1929년 이탈리아에도 밀어닥친 세계공황에 대처하여 무솔리니는 파산에 임박한 중요산업과 은행에 정부자본을 투입하는 한편 국내의 독재체제를 강화하며 동(東)지중해와 북아프리카에 대한 시장확보전쟁에 나섰다. 1936년 에티오피아를 병합하고 1937년에는 일본·독일·이탈리아 방공협정을 체결하여 1940년 히틀러 독일의 뒤를 이어 영국·프랑스에 선전을 포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동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의 전국(戰局)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파시스트와 주둔 독일군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이 격화하여 1943년 7월 무솔리니 정권은 붕괴했다. 1943년 9월 바돌리오 정권이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에도 북이탈리아로 도피한 무솔리니와 독일군은 연합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일찍이 파시스트에 의해서 비합법화된 인민당(기독교민주당)·사회당·공산당 등을 주체로 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의하여 밀라노·토리노 등 주요도시는 해방되었다.

 

 1945년 봄, 북이탈리아의 독일군·파시스트군(軍)이 항복하였고 스위스로 도주하던 무솔리니는 유격대의 손에 처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의 정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담당한 기독교민주당·공산당·사회당을 주체로 하여 전개되었다. 1946년 6월의 국민투표와 헌법제정의회의 선거 결과 이탈리아는 왕제(王制)를 폐지하고 공화제 채택이 결정되어 기독교민주당의 데 가스페리를 수반으로 하는 연립내각이 탄생하였으며, 공화국 헌법은 194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탈리아 약사

1. 초기 7왕국 시대 (BC 753~BC 509)

 BC 8C경부터 라틴과 사비나 도시국가를 병합하여 에투르스키 왕조를 포함한 7 왕국시대를 이룸.

 

2. 로마 공화정 시대 (BC 509~BC 27)

가. 귀족을 중심으로 원로원을 구성하였으며 원로원이 매년 선출하는 2명의 집정관(consul)이 통치

 

나. BC 3C경의 이탈리아 반도 통일, BC 146년까지의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병합과정에서 집정관의 장기 독재화 현상이 대두하였으며 제1차 삼두정치(시이저, 폼페이우스, 크락수스)를 계기로 공화정 퇴조

 

3. 로마 제정 시대 (BC 27~AD 476)

가. 제2차 삼두정치(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하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 피우스가 BC 27년 원로원으로 부터 아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황제로 추대되면서 제정시대 개막

 

나. BC 27~AD180년간 5현제 (네르바, 트라야누스, 아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업적으로 로마제국 최고의 전성시대(Pax Romana) 구가.

 

다. AD180년 이후 사회기강의 이완, 변방 속령의 반란, 게르만 민족의 압박 등으로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됨. 디오클레시아누스 대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등이 로마제국의 부흥을 기도했으나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 당시 동.서로 분열되며, 서로마는 AD476년 게르만 출신 용병대장인 오토아케르에 의해 멸망

 

라.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기독교를 공인

 

4. 중세 도시국가 시대

가. 도시국가의 형성과 르테상스(11~16세기)

 서로마제국 멸망후 이탈리아는 동고트족, 동로마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롬바르드족, 프랑크왕국(샤를마뉴 대제)의 지배를 거쳐, 962년 오토 1세에 의해 성립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나 11세기 이후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황제와 교황간의 세력다툼이 격화되며 지방영주가 통치 하는 도시국가 출현.

 도시국가의 수공업 및 상업이 발달하면서 베니스, 제노바, 파비아, 밀라노, 플로렌스 등이 산업,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 대두하고 세력을 확장

 

나. 도시국가의 쇠퇴(16세기~19세기초)

 물질문명의 발달, 지리상의 발견등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하여 활발한 학문, 예술활동이 이루어지며, 특히 피렌체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다빈치, 라파엘로 등의 뛰어난 예술가 배출.

 1453년 동로마제국의 멸망에 따른 터키의 지중해 진출, 스페인, 프랑스등 절대군주제하의 강력한 신흥국가 등장으로 베니스, 제노바등 무역으로 번성했던 도시국가들이 쇠퇴하게 되며, 이탈리아가 이들 새 열강세력의 각축장이되어 16세기부터 19세기초에 걸쳐 많은 도시국가들이 이들 국가의 지배하에 들어가게됨.

 

5. 이탈리아 국가통일 (19세기 초)

가. 18세기말의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사상을 이탈리아에 전파하며 이에따라 민족의식에 눈뜨게된 이탈리아인들은 1820년대 결사조직(Massoneria), 카르보나당(Carboneria)등의 비밀조직 활동을 통해, 또한 1831년 마찌니가 결성한 이탈리아 청년당을 통해 외세로 부터의 독립과 국가 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

 

나. 1848년 이후 사보이 왕국의 임마누엘 국왕과 카부르 재상, 가리발디 장군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오스트리아와의 외교교섭 및 3차에 걸친 독립전쟁을 거쳐 1870년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

 

6. 파시스트 정권시대 (1924-1944)

가.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불 등의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으나, 전후 경제침체와 정치불안이 심화되면서 1923년 뭇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권 등장

 

나. 1937년 독일, 일본과 방공협정을 체결한 뭇솔리는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이 눈부신 군사적 성공 을 거두게 되자 독일과 추축(Axis)동맹을 맺게 되나 북아프리카 진출 이탈리아군이 연합군에 패퇴하고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상륙한 1943년 권좌에서 쫓겨나고 바도리오 임시정권(43.7~44.2)이 발족

 

다. 이후 뭇솔리니는 독일의 지원으로 북부에서 명목상의 정권을 유지하나 연합군의 이탈리아 공략이 절정에 달한 1944년 항독 게릴라에 의해 살해되며 이에따라 파시스트 세력도 완전히 붕괴

 

라. 1946.6. 제헌의회 구성, 국민투표 실시후 1948.1.1 공화국헌법을 정식 공포

 

7. 기민당 주도 연립 정부시대 (1948-1994)

가. 개관

ο 1948에 공포된 공화국 헌법은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공산당 집권 방지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비례대표제'를 도입, 제1당인 보수기민당이 단독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중소정당이 난립, 기민당이 연정을 구성하여 40여년간 집권

-정당 난립에 기민당내 파벌간의 알력 등도 작용하여 1996.5 까지 55회 내각 변동 (평균 집권기간 10개월)

 

ο 정계구도는 제1당인 기민당이 제3당인 사회당 및 기타 중소정당과 제휴하여 연립여당을 구성하고 공산당('91.2 좌파민주당으로 개명)이 제2당으로서 야당 세력을 주도

 

ο 기민당 장기집권 체제하에서 정경유착(부정부패)의 구조화현상 초래-연정 참여 정당들이 국영 및 공공기업을 장악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정치자금 조성

 

나. 직업 공무원제도의 확립으로 정부의 대내외정책은 안정적 기조유지

 

 

교황선거(conclave = 敎皇選擧 = electio papalis)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새 교황을 뽑기 위하여 행해지는 선거.

 교황은 11세기까지 성직자와 일반성도가 선출하였다.

  4세기경부터 로마황제· 로마귀족· 독일왕들이 교황선거에 개입했고 9∼11세기에는 독일왕이 교황을 해임하자, 1059년 이래 교황선거권은 추기경에게 한정된다.

 1179년 제 3차 라테란공의회에서 추기경들에 의한 2/3 다수결제가 확립되었다.

 1274년 리옹공의회에서 외부로부터의 개입과 2/3 다수결 선출방식에 의한 선거 절차의 지연을 막기 위하여 유권자를 밀폐된 곳(conclave = ‘자물쇠를 잠근다’는 뜻의 라틴어)에 가두어 투표하게 하는 제도를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정했는데, 그 후 콘클라베는 교황선거 추기경회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1904년까지 가톨릭을 믿는 열강(列强)의 군주들은 교황선거에서 후보자에 대한 거부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교황이 죽어서 그 지위가 비게 되면, 교황재무장관(카메르렝고)이 추기경단장과 함께 추기경단을 대표하여 교황대행이 되며 죽은 후 빠르면 15일째 되는 날, 늦어도 19일째 되는 날에 콘클라베에서 선거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선거는 비밀투표로 후보선출에 필요한 출석자수의 2/3 표를 얻을 때까지 계속된다. 선거와 함께 하얀 연기가 연통에서 솟아오르면 새로운 교황이 탄생했다는 뜻이며 피선출후보자의 동의, 본인에 의한 교황명 결정, 착의(着衣), 추기경단의 순명(順命) 서약, 결과 공표, 새 교황에 의한 강복(降福)으로 선거는 끝난다. 그후에 새 교황이 지정하는 날에 추기경단에 의한 교황관(敎皇冠) 수여식이 있다.

 차기 교황은 전세계에서 집결한 추기경단 115명 중 3분의 2가 동의해야 선출된다. 시스티나 성당은 콘클라베 기간 중 하루 2번씩 굴뚝으로 연기를 피어올린다. 연기는 미정일 경우 검은색, 확정되면 흰 색이다. 콘클라베 기간중 성당은 모든 유무선 통신수단에서 단절되므로, 굴뚝의 연기색깔은 교황 선출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교황청은 새로운 교황 선출을 위해 두대의 난로를 설치한다. 하나는 투표용지를 태우게 되며, 다른 하나는 결과 발표를 알리는 연기의 색깔을 만드는 역할을 맡는다.

 대부분의 연기는 완전히 연소하지 않는 공기상의 입자 때문에 만들어진다. 연기 색깔은 이 입자에 따라 달라진다.

 교황청의 검은 연기는 탄소 입자의 불완전 연소로 만들어진다. 흰 연기는 더 복잡한데, 연료의 증기와 수증기 혹은 광물의 재에서 나타난다.

 교황청은 연기를 피울 때 젖은 밀짚과 투표용지를 태운다. 이를 통해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게 된다. 젖은 밀짚이 불완전연소를 통해 탄소 입자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짚을 태우는 것만으로 완벽한 검은 연기를 만들 수 없다. 밀짚을 태울 때 나타나는 연기는 검은색보다 회색에 가깝기 때문에 외부사람들에게 자칫 흰 연기로 오인하게 만들 수 있다. 실제 이같은 사태가 빈번히 발생해 교황청은 매번 완벽한 연기 색깔을 만들어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 왔다. 교황청은 새 교황 선출을 알리는 수단으로 흰 연기와 함께 성 베드로 성당의 종을 울리고 있다.

 혼란을 없애기 위해 교황청은 특수 개발된 화학적 화합물 카트리지를 사용해 완벽한 검은 연기를 만든다. 베네딕토 16세를 선출했던 2005년 콘클라베에서 처음 도입된 방식이다. 이 화학물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태리 맛집 찾기 전에 명칭부터 알고 가자

카페(Caffe), 스푼티노(Spuntino)

 간단하게 마실 커피나 샌드위치나 파니니를 파는 곳을 카페(caffe) 혹은 스푼티노(spuntino)라 부른다.

 그런데 몇몇 카페에서는 점심,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파스타, 샐러드 등을 팔기도 한다.

 꼬뻬르또(Coperto, 테이블 사용료)가 없는 경우가 많다.

 

피제리어(Pizzerie)

 피자, 파스타 등을 중점으로 파는 대중적인 음식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간판에 피제리어(Pizzerie)라고 적혀있다.

 

트라토리(Trattorie, 간이 음식점)

 피자(pizzerie)보다는 메뉴가 다양하고 간단한 점심, 저녁식사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밥집"이나 일반 음식점 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리스토란티(Ristoranti)

 일명 고급음식점이다.

 다른 식당들에 비해 꼬뻬르또(coperto)가 높고 그만큼 서비스도 좋은 편이다.

 

 

* 꼬뻬르또(Coperto) : '테이블 사용료'의 개념이다. 이태리에서는 만차(Mancia, tip)문화가 따로 있진 않고 보통 테이블 사용료인 꼬뻬르또(coperto)로 내고 만차는 자유롭게 내는 것이다. 간혹 테이블 사용료에 물값이 포함되어 있기도한데 많은 경우는 아니다.

 

* 만차(Mancia) : '팁'이란 뜻의 이태리어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부분 테이블 사용료에 포함되지만 서비스에 감동하거나 손님 마음이 통했을 때 주기도 한다.

 

 

이태리의 전통음식

1. 깔조네(Calzone)

 깔조네(Calzone)는 반달모양으로 된 밀가루 반죽안에 토마토, 고기, 각종 채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음식의 종류는 피자이지만 한국의 만두과 비슷한 음식이다.

 밀가루 반죽이 속을 따뜻하게 보존해줘서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먹을 수 있다.

 

2. 라자냐(Lasagna)

 라자냐(Lasagna)는 이탈리아식 파스타인데, 각 지방마다 레시피는 다르지만 대부분 다진 고기, 토마토 소스, 각종 채소와 치즈들을 곁들인 음식이다.

 라자냐라는 면을 층층이 깔아준 뒤에 오븐에 구워내서 수저로 떠먹으면 된다. 크게 만들어 여럿이 나눠먹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라자냐는 편의점이나 레스토랑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한끼 식사로 많이 즐긴다.

 

3. 카르보나라(Carbonara)

 대식가로 알려진 이탈리아 사람들도 점심은 간단하게 파스타 한 접시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여러 종류의 파스타가 적혀 있지만 이탈리아 어느 곳을 가더라도 메뉴에서 빠뜨리지 않는 것이 바로 카르보나라(Carbonara)이다. 카르보나라는 토마토소스, 오일 파스타와 더불어 크림파스타의 기본이라고 할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지니고 있는 파스타이다. 크림소스로 만든 파스타 요리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카르보나라는 베이컨, 치즈, 달걀노른자를 이용해 만들기 때문에 부드러운 맛이 인상적이다.

 카르보나라는 크림을 넣지 않고 계란 노른자만을 이용해 점성있게 만든다. 카르보나라(carbonara)는 이탈리아어로 '석탄 광부'를 뜻하는 단어이다.

 

 

이태리의 전통 과자 스파이시 너트 비스코티(Spicy Nut Biscotti)

 'Bis'는 '두 번', 'Cotti'는 '조리하다'라는 뜻으로 비스코티는 바삭하고 감미로운 맛이 나는 이탈리아 쿠키다. 디저트 와인이나 커피에 찍어 먹는 게 일반적인데, 오늘날에는 허브와 향신료 등 여러 가지 풍미 있는 재료를 섞어 칵테일에 곁들이는 스낵 또는 파티 메뉴로 활용한다.

 반죽은 한꺼번에 만들어 동그랗게 빚은 후 비닐봉지에 두어 번 감싸 냉동시켰다가(1개월 정도 보관 가능) 만들 때 다시 실온에서 녹인 다음 구워도 된다.

 구운 비스코티는 밀폐 용기에 넣고 실온에 두면 일주일 정도 보관이 가능하다.

 

 

2000년 동안 몰랐다 - '로마 조각상' 놀라운 진실 - 조각상에는 알록달록하게 채색돼 있었다

 여기 두 조각상이 있다. 왼쪽은 바티칸박물관에 소장 중인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이다.

 

 서기 20년경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 BC 63~AD 14, 제정을 시작한 로마 최초의 황제, 재위: BC 27~AD 14)를 조각한 이 작품은 로마 미술의 손꼽히는 걸작이다. 근사한 개선장군의 옷을 차려입고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제국의 영광을 선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이 위엄 넘친다.

 

 그럼 이제 시선을 강탈하는 오른쪽 조각을 얘기해 볼까. 왼쪽 조각에 색을 입혔을 뿐인데 영 시원찮다.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물감을 칠한 것 같기도 하고, 망해가는 놀이공원에서 색이 벗겨져 가는 싸구려 조형물 같기도 하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파비오 배리가 남긴 코멘트가 걸작이다. "너무 촌스러운데요. 여장남자가 택시를 잡으려는 모습처럼 보여요(like a cross-dresser trying to hail a taxi)."

 

 사실 2000년 전 이 조각상이 만들어졌을 당시, 실제 조각상은 왼쪽보다 오른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순백의 대리석 조각이었던 줄 알았던 작품이 사실 '풀 컬러'였다는 거다. 다른 대부분의 그리스·로마 조각들도 마찬가지이다. 만들어졌을 당시엔 알록달록하게 채색돼 있었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리는 왜 그리스· 로마 조각이 무조건 희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

 

 이야기는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독일 뮌헨대학교 고고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빈첸츠 브링크만은 그리스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도구들을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했다. 그래서 물체에 자외선을 비춰 표면의 상태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특수 기구를 만들었다. 그런데 조명을 비추자 다양한 색을 칠한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되었다.

 

 깜짝 놀란 브링크만은 특수 조명으로 다른 조각상들을 비춰보기 시작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조각상에 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그에겐 이제 조명 없이 맨눈으로도 색칠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브링크만이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저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이 사라졌을 뿐인데, 모든 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브링크만은 조각들의 색 연구를 계속하다가 1990년대 들어 고고학자인 아내와 함께 그리스· 로마 조각들의 원래 색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저 백설공주 의상을 입은 것 같은 아우구스투스상은 그 결과물 중 하나이다. 누가 봐도 결과물이 보기 좋지는 않다. 실제 색칠돼있던 모습은 분명히 저것보다 훨씬 진짜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각상의 색을 복원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한다. 남아있는 물감 흔적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또 당시 화가들이 대리석에 색을 칠할 때 쓰던 재료나 기술에 대한 정보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각상의 일부를 떼어내서 검사해 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브링크만 부부는 X선을 비롯한 갖은 수단을 동원해 원래 색을 추적했다. 도구와 재료도 당시 사용했을 법한 것만 골라 썼다.

 

 부부는 2003년부터 복원을 마친 조각상들을 모아 'Gods in Color'라는 순회 전시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전 세계 28개 도시에서 300만 명의 관람객들이 전시를 봤다. 색이 유치하다는 등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이들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어 지금은 많은 미술사 교과서가 '컬러풀한 조각상'을 정설로 가르치고 있다.

 

 지금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채도: 색이 있는 고대 조각상(Chroma: Ancient Sculpture in Color)' 전시도 이런 전시의 일환이다.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리스· 로마 조각상이 흰색이라고 생각했을까. 이런 오해는 사실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그리스· 로마 조각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건 르네상스 시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었던 조각상들은 1000년 넘는 시간을 견디며 색을 잃었다. 그나마 색이 남아있던 조각상들도 발굴 과정에서 빛과 공기에 노출됐고, 흙을 털어내는 청소 과정까지 거치면서 금세 물감이 벗겨져 버렸다.

 

 결정적인 사건은 1489년 벌어졌다. 로마시대 대리석 조각인 '아폴로 벨베데레'가 로마에서 발굴돼 바티칸 '벨베데레의 정원'에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온 유럽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조각상을 보러 몰려들었다. 마찬가지로 색이 다 벗겨진 흰색 조각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조각상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멋지고 근본 있는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이 모두 흰색이니, 우리가 만드는 조각도 근본이 있어 보이려면 무조건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야겠구나."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대리석 산지인 이탈리아의 카라라까지 가서 흰 대리석을 직접 사오기도 했다. '피에타'를 비롯한 그의 걸작들은 이런 오해 덕분에 더욱 아름다웠을 지도 모른다. 하얀 대리석이 몸의 형태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건 사실이니까. 아무래도 색이 있으면 조각의 세부적인 형태에는 눈이 덜 가게 된다.

 

 문제는 이런 편견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는 것이다. 발굴 기술이 발전한 18~19세기, 그리스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 색이 있는 조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다. 20세기 말까지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졌다.

 

 조각에 색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나는 원래부터 그리스· 로마 조각상에 색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기 이 가슴으로 느낀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과 그 흰색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 사례'라는 편견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버렸던 것이다. 근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이 "흰 것일수록 아름답다"고 한 게 대표적이다. 괴테는 "야만인이나 무식한 사람, 어린이들은 선명한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조각상에 물감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빼도 박도 못할 정도가 되면 이들은 "그리스가 등장하기 전 다른 문명의 유물"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사라 본드 교수는 "당시 학자들은 그리스· 로마에서 비롯된 서구 미술이 이집트 등 다른 문화권의 미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흰색 조각상을 그 증거로 여겼다"며 "인종차별적인 인식이 눈을 가린..."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 다채로운 색은 건강과 지성, 성실성 등 긍정적인 요소를 상징했다. 현대인들과 달리 그리스· 로마인들은 마냥 흰 피부보다는 햇빛에 그을린 갈색 피부를 선호했다. 서사시 '오디세이아(Odysseia)'에서 아테나 여신이 오디세우스(Odysseus)의 모습을 노인에서 젊은이로 바꿀 때 나오는 대목이 이런 인식을 잘 보여준다. "그의 피부는 다시 검게 변했고, 턱수염은 푸른색으로 돌아왔다"고.

 

 반대로 당시 사람들에게 흰색은 죽은 자가 있는 지하세계를 상징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숀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요즘 그리스· 로마 조각상들을 본다면, 자신들이 '귀신의 집'에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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