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마 귀족 가문의 청년
카이사르라고 하면 대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가리키고 있기는 하지만 가이우스가 개인의 이름이고 카이사르는 가문명, 율리우스는 카이사르 가문이 속한 씨족명이다. 대개 로마의 귀족들은 이렇게 3개의 이름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드러냈다. 평민의 경우는 이름이 두 개였다. 귀족은 존칭을 얻어 4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도 종종 있다.
카이사르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의 자손을 자칭하는 유서깊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외가 쪽이 로마 귀족사회에 큰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되는 평민 출신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하였다. 당시 로마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황제 국가가 아니라 귀족과 일부 민중대표(호민관)가 정치를 이끌어가던 공화정이었다.
카이사르의 청년 시절에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는 벌족파가 서로 세력을 다투었다. 민중파의 대표자 격은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 킨나였으며 벌족파의 수장은 술라였다. 벌족파는 술라의 이름을 따 술라파라고도 하였다. 카이사르를 둘러싼 친인척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견 또한 민중파를 지지했던 카이사르는 한때 술라파가 득세했을 때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였으며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을 요구하는 술라를 피해 로마 밖으로 도망 나가 있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술라가 죽은 후 로마로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그의 정치 생활이 시작되었다.
2. 1차 삼두정치로 집정관에 오르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청년시절 받은 좋은 교육과 로마 밖을 떠돌며 얻은 경험, 그리고 타고난 언변과 매력적인 외모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첫 번째 아내 코르넬리아가 죽은 후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면서 술라파의 지지까지 얻은 카이사르는 승승장구 로마의 고위관직들을 섭렵해
나갔다.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 탓인지 카이사르는 민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출중하였으며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서 정책들을 내놓아 인기몰이를 하였다. 또한 로마 속주에 근무할 때는 주변국과의 전투에서 차근차근 그 전과를 쌓아 나가 안팎으로 대정치가로 가는 발판을 닦았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콘술)에 오를 것을 희망했지만, 카이사르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원로원은 그가 집정관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카이사르는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성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와 손을 잡고 원로원의 방해를 이기고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를 1차 삼두정치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실현을 위해 폼페이우스와 거래를 하였으며 그의 외동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국유지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에 오른 또 한명의 집정관 비불루스를 무력화시키고 퇴역군인과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갖가지 정책들을 실현해 나갔다. 카이사르의 독주는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불안을 초래하였으며, 귀족세력과 카이사르의 갈등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3. 갈리아 정복과 카이사르의 성장
집정관을 역임한 후 카이사르는 로마의 속주였던 일부 갈리아 지역(프랑스 남부지역)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지역 전체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갈리아 지역은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켈트족이 광범위하게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총 7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다. 갈리아 정복으로 켈트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리고 급속도로 로마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일부 켈트족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섰지만 대부분의 켈트족들은 선진적인 로마 문명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갔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시 자신이 참전했다는 표시로 늘 진한 붉은색 망토를 입고 전투에 나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비록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이후에는 보복적인 정치보다는 복속한 켈트족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켈트족에게 정치적 자율권을 주고 농경을 전파해 경제를 일으켰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켈트족은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화하기도 해 반발을 없애고 충성을 다짐받았다.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에게 여러 면에서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정복에서 얻은 약탈로 부유해졌으며 오랫동안 변방지역을 괴롭혀왔던 켈트족을 복속시켜 로마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더불어 그는 7년 동안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군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어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복속된 갈리아 켈트족들의 충성과 넓은 영토도 카이사르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문필에도 재주가 있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기를 <갈리아 전기>로 남기기도 하였다.
갈리아에서의 승승장구로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로부터 더욱 경계를 받았다. 협의롤 통해 로마 정치를 이끌어가던 귀족들은 카이사르의 독주가 장차 귀족권을 약화시키고 1인 독재의 시대를 불러 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카이사르를 견제하려고 나섰다.
4.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즈음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현재 이란 북동부지역)와의 전쟁 중에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로마 귀족들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자기편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혼인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가 끊어지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결별하고 귀족 세력과 손을 잡았다. 원로원의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카이사르에게 무장해제하고 죽으러 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몇 차례 귀족들과 협상을 하려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믿고 있던 귀족들은 이를 무시했다. 이 와중에 카이사르의 편을 들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있는 갈리아로 도망쳐온다. 카이사르는 협상의 테이블은 이미 깨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내전을 불사하기로 한다. 그는 갈리아에서 단련된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이 말은 내전만은 피해보려 했던 카이사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후 마지막 결단이 로마 진격이었던 것이고 그 결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카이사르 군대의 재빠른 움직임에 로마귀족들과 폼페이우스는 당황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서지 않고 로마를 비운 채 국외로 나가 전열을 가다듬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폼페이우스와 로마 귀족들의 오판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보다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가졌으면서도 제대로 한번 맞서지 못하고 카이사르의 군대에 밀렸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히스파니아(현재 스페인지역)와 그리스에서 카이사르 군대에 대패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지만 피난 중 암살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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