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Caesar, BC 100~BC 44, 재위 BC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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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저(Caesar, BC 100~BC 44, 재위 BC 44)

 로마 공화정 말기 뛰어난 정치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BC 44, 재위 BC 44) 

 

 영어단어 시저(Caesar)는 독일에서는 카이저(kaiser), 러시아에서는 '차르(czar)'라고 하지만 모두 황제를 뜻하는 말이다. 황제 중에서도 실권을 장악하고 마음껏 휘두르는 전제군주나 독재자에게 이러한 호칭을 붙인다. 이 절대적인 힘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시저라는 단어는 실은 로마의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부터 비롯되었다. 카이사르라는 이름이 각국에서 다르게 발음되며 모두 황제를 가리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황제가 아니었다.

 

1. 로마 귀족 가문의 청년

 카이사르라고 하면 대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가리키고 있기는 하지만 가이우스가 개인의 이름이고 카이사르는 가문명, 율리우스는 카이사르 가문이 속한 씨족명이다. 대개 로마의 귀족들은 이렇게 3개의 이름을 가짐으로써 자신의 신분과 정체성을 드러냈다. 평민의 경우는 이름이 두 개였다. 귀족은 존칭을 얻어 4개의 이름을 가진 사람도 종종 있다.

 

 카이사르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미의 여신 베누스(비너스)의 자손을 자칭하는 유서깊은 귀족 가문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의 외가 쪽이 로마 귀족사회에 큰 정치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되는 평민 출신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카이사르의 정치적 멘토 역할을 하였다. 당시 로마는 한 사람이 다스리는 황제 국가가 아니라 귀족과 일부 민중대표(호민관)가 정치를 이끌어가던 공화정이었다.

 

 카이사르의 청년 시절에는 민중들의 지지를 받는 민중파와 원로원을 중심으로 한 귀족세력의 지지를 받는 벌족파가 서로 세력을 다투었다. 민중파의 대표자 격은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 킨나였으며 벌족파의 수장은 술라였다. 벌족파는 술라의 이름을 따 술라파라고도 하였다. 카이사르를 둘러싼 친인척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견 또한 민중파를 지지했던 카이사르는 한때 술라파가 득세했을 때 살생부에 이름이 오르기도 하였으며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을 요구하는 술라를 피해 로마 밖으로 도망 나가 있기도 하였다. 카이사르는 술라가 죽은 후 로마로 돌아왔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그의 정치 생활이 시작되었다.

 

 

2. 1차 삼두정치로 집정관에 오르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청년시절 받은 좋은 교육과 로마 밖을 떠돌며 얻은 경험, 그리고 타고난 언변과 매력적인 외모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첫 번째 아내 코르넬리아가 죽은 후 술라의 손녀인 폼페이아와 결혼하면서 술라파의 지지까지 얻은 카이사르는 승승장구 로마의 고위관직들을 섭렵해 나갔다.

 

 고모부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영향 탓인지 카이사르는 민심을 파악하는 능력이 출중하였으며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서 정책들을 내놓아 인기몰이를 하였다. 또한 로마 속주에 근무할 때는 주변국과의 전투에서 차근차근 그 전과를 쌓아 나가 안팎으로 대정치가로 가는 발판을 닦았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콘술)에 오를 것을 희망했지만, 카이사르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원로원은 그가 집정관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다. 카이사르는 당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성과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와 손을 잡고 원로원의 방해를 이기고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이를 1차 삼두정치라고 한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실현을 위해 폼페이우스와 거래를 하였으며 그의 외동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도움으로 집정관이 된 카이사르는 국유지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민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 집정관에 오른 또 한명의 집정관 비불루스를 무력화시키고 퇴역군인과 민중들을 중심으로 한 갖가지 정책들을 실현해 나갔다. 카이사르의 독주는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불안을 초래하였으며, 귀족세력과 카이사르의 갈등은 평생을 두고 계속되었다.

 

 

3. 갈리아 정복과 카이사르의 성장

 집정관을 역임한 후 카이사르는 로마의 속주였던 일부 갈리아 지역(프랑스 남부지역)의 총독이 되어 갈리아 지역 전체를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갈리아 지역은 현재 북부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그리고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켈트족이 광범위하게 부족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총 7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졌다. 갈리아 정복으로 켈트족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잃어버리고 급속도로 로마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일부 켈트족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섰지만 대부분의 켈트족들은 선진적인 로마 문명에 적극적으로 동화되어갔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시 자신이 참전했다는 표시로 늘 진한 붉은색 망토를 입고 전투에 나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비록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이후에는 보복적인 정치보다는 복속한 켈트족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켈트족에게 정치적 자율권을 주고 농경을 전파해 경제를 일으켰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켈트족은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화하기도 해 반발을 없애고 충성을 다짐받았다.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에게 여러 면에서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정복에서 얻은 약탈로 부유해졌으며 오랫동안 변방지역을 괴롭혀왔던 켈트족을 복속시켜 로마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더불어 그는 7년 동안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군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어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복속된 갈리아 켈트족들의 충성과 넓은 영토도 카이사르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문필에도 재주가 있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기를 <갈리아 전기>로 남기기도 하였다.

 

 갈리아에서의 승승장구로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로부터 더욱 경계를 받았다. 협의롤 통해 로마 정치를 이끌어가던 귀족들은 카이사르의 독주가 장차 귀족권을 약화시키고 1인 독재의 시대를 불러 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카이사르를 견제하려고 나섰다.

 

 

4.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즈음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현재 이란 북동부지역)와의 전쟁 중에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로마 귀족들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자기편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혼인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가 끊어지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결별하고 귀족 세력과 손을 잡았다. 원로원의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카이사르에게 무장해제하고 죽으러 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몇 차례 귀족들과 협상을 하려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믿고 있던 귀족들은 이를 무시했다. 이 와중에 카이사르의 편을 들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있는 갈리아로 도망쳐온다. 카이사르는 협상의 테이블은 이미 깨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내전을 불사하기로 한다. 그는 갈리아에서 단련된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이 말은 내전만은 피해보려 했던 카이사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후 마지막 결단이 로마 진격이었던 것이고 그 결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카이사르 군대의 재빠른 움직임에 로마귀족들과 폼페이우스는 당황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서지 않고 로마를 비운 채 국외로 나가 전열을 가다듬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폼페이우스와 로마 귀족들의 오판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보다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가졌으면서도 제대로 한번 맞서지 못하고 카이사르의 군대에 밀렸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히스파니아(현재 스페인지역)와 그리스에서 카이사르 군대에 대패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지만 피난 중 암살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5.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 VII, BC 69 ~ BC 30.8.30. 재위: BC 51∼BC 30)와의 만남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려 했던 것은 그를 지지했던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미 전세가 카이사르 쪽으로 기운 것을 보고 폼페이우스를 배신했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이집트로 건너와 정적이긴 하지만 옛 친구이자 한때는 사위이기도 했던 폼페이우스의 시신을 본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을 다투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내쫓고 그녀가 권력을 독점하도록 도왔다. 그 와중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둘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폼페이우스라는 강력한 정적이 사라지고 귀족권이 약화된 로마로 돌아가면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아들을 빈객으로 대동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와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꿈은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적이 사라지고 귀족권이 약해진 로마는 카이사르 1인 천하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자리에 안토니우스를 앉히고 자신은 그 위의 종신 독재관 자리를 차지하였다. 집정관은 명목일 뿐 로마의 정치는 이제 카이사르 1인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은 카이사르였지만 그는 황제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전 시대 귀족들이 각자의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정체되곤 했던 개혁들을 하나 하나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달력을 개정하고 통화를 개혁했으며 시민권을 확대하고 사법개혁, 복지정책 실시, 식민지정책, 건설 사업 등 그 자신이 다방면에서 탁월한 인재였던 만큼 카이사르는 사회 각 방면에 새로운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정치는 귀족 중심의 공화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대제국 로마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6. 브루투스 너마저

 그러나 1인 독재에 대한 귀족세력의 불만은 완전히 잠재울 수 없었다.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불안이 귀족 전체에 번지면서 카이사르의 독주를 막으려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카이사르의 애인 세르빌리아의 아들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폼페이우스파였다가 카이사르파로 돌아선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주도가 되어 카이사르의 암살 계획이 세워졌다. 이 계획에는 카이사르가 총애하던 데시무스 브루투스도 끼어 있었다.

 

 운명의 날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회랑 앞에서 14명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옷섶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무차별적으로 카이사르를 찔렀다. 카이사르는 총 23곳에 상처를 입고 토가자락을 휘어감은 채 쓰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쓰러진 장소는 그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동상 앞이었다.

 

 쓰러지기 직전 카이사르는 암살 귀족들 사이에서 총애하였던 두 명의 브루투스를 보았다. 죽기 직전 그는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신음을 뱉었다. 카이사르가 말한 브루투스는 두 명의 브루투스 중 데시무스 브루투스였을 것이라는 것이 후세 학자들의 추측이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데시무스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이어 2번째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을 한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본 데시무스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고개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민중의 분노는 거셌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암살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성난 민중들에게 공격당했다. 암살파와 카이사르파는 종신독재관을 제외하고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기로 합의하였다. 카이사르는 화장되었는데, 그의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가 버렸다.

 

 그 때문에 카이사르는 무덤조차 없다.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하게 되고 암살파들과의 내전에 돌입하였다. 키케로, 브루투스 등 암살파가 모두 제거된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카이사르가 마련한 1인 독재 정치는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획득한 후 초대 황제가 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되었다.

 

 

 

◈ '루비콘강(Rubicon River)을 건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오늘날 '루비콘강(Rubicon River)을 건너다'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란 뜻이다.

 

 '루비콘강을 건넜다'라는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에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뜻한다. 이탈리아 북동부에 있는 작은 강 루비콘이 TV나 신문에서 번번이 언급되는 이유는 고대 로마의 대정치가 율리우스 카이사르(BC 100~BC 44)와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명문가 청년, 빚더미에 앉다

 카이사르가 태어났을 무렵 로마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귀족들이 원로원과 집정관(로마 공화정의 최고 관직) 등 공화정 내 권력을 독점하며 대농장을 운영한 탓에 평민과 귀족 간의 빈부 격차가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농지 개혁을 주장하는 민중파와 개혁에 반대하는 귀족파가 격렬한 대립을 보였고, 이는 민중파 마리우스와 귀족파 술라 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에서 승리한 술라는 무자비한 숙청으로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카이사르는 이 시기에 유년 시절을 보냈다.

 

 카이사르의 집안이 마리우스파로 지목된 탓에 카이사르의 출세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친화력으로 맡는 관직마다 탁월한 성과를 보이며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쌓았다.

 

 특히 그는 막대한 빚을 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했다. 책이나 옷을 사는 데에 돈을 전혀 아끼지 않았고, 아리따운 여인들에게 값비싼 선물을 주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빚 대부분은 사실 자비로 도로 보수 사업이나 검투사 대회를 열었기 때문이었다. 빚더미에 앉은 대신 로마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얻은 것이다.

 

 

삼두 정치와 갈리아 원정, 그리고 루비콘강

 승진을 거듭한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오늘날 스페인) 속주의 총독을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뒤 집정관이 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장군 폼페이우스를 찾아갔다. 당시 폼페이우스는 그의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눠주는 문제로 원로원과 갈등을 빚고 있었는데, 이를 간파한 카이사르는 "내가 집정관이 되면 당신의 부하들에게 농지를 나누어 줄 테니 집정관에 선출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제안했다. 폼페이우스가 이를 승낙하자 카이사르는 로마 최고의 부자였던 크라수스도 끌어들여 집정관이 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로마의 정치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세 사람의 동맹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는 데, 이를 '삼두 정치'라고 한다.

 

 집정관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오늘날 프랑스)의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후 8년간 카이사르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갈리아인과 게르만족을 제압해 로마 영토를 갈리아 전역으로 넓혔어요. 그 결과 카이사르는 막강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을 얻었고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도 한층 더 높아졌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곧 중대한 위기에 빠졌다. 갈리아 원정에 나선 사이 크라수스가 파르티아전쟁 중 사망했고, 농지 개혁에 적극적인 카이사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로원 보수파 귀족들이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이면서 삼두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를 등에 업은 원로원은 갈리아 원정을 마친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에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카이사르가 무장을 해제하고 로마에 들어오면 여러 가지 죄목을 씌워 제거할 심산이었다. 이를 간파한 카이사르가 귀국을 미루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카이사르를 격파하라고 요구했다.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던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로마 본국의 경계인 루비콘 강변에 도착했다. 당시 로마의 법은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어기면 반역죄로 간주하였다.

 

 잠시 고민한 카이사르는 부하들에게 "주사위는 던져졌다"며 루비콘강을 건널 것을 명령한다. 강을 건너는 순간 카이사르는 쿠데타에 성공해 권력을 잡거나 반역죄로 죽음을 당하는 두 가지 운명 중 하나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뜻의 '루비콘강을 건너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죽음과 로마제국의 탄생

 카이사르가 예상보다 빨리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진격하자 당황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귀족들은 이탈리아 밖으로 도망쳤다. 폼페이우스는 반격을 노렸지만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와 그리스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물리치고 종신 독재관이 되었다. 명실상부 로마의 1인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1인 통치는 '카이사르가 왕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키웠고, 이 의심은 화살이 되어 카이사르에게 날아왔다. 기원전 44년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서던 카이사르는 양아들 브루투스와 공화정을 옹호하는 귀족들이 휘두른 칼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전 양아들을 본 카이사르는 "브루투스 너마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등장과 죽음은 더 이상 로마가 공화정으로는 지탱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카이사르가 죽자 그의 후계자로 지목된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여러 경쟁자를 물리치고 로마 초대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450여 년간 이어진 로마 공화정은 무너졌고, 로마는 제국으로 재탄생했다. 그 발단은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넌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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