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섬 시칠리아(Sicilia)

 

지중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섬 시칠리아(Sicilia)

 이탈리아반도 남쪽, 지중해의 거의 중앙에 있는 섬.

 

 지중해 최대 섬으로, 주변에 있는 섬들을 포함해서 시칠리아자치주를 구성한다.

 

트라파니· 팔레르모· 메시나· 아그리젠토· 칼타니세타· 엔나· 카타니아· 라구사· 시라쿠사의 9개 현으로 되어 있으며 주도(州都)는 팔레르모이다.

 

 주의 면적은 2만 5709㎢이고 인구는 509만 명이다.

 

지 형 : 구릉이 61.4%, 산야가 24.4%이며 평원이 14.2%이다.

☞ 상세지도

 

기 후 : 지중해성 기후로, 해안지방은 고온건조하며 중심부와 고지대는 온난다습하다. 한여름 며칠간은 아프리카로부터 불어오는 열풍 시로코의 영향으로 최고기온이 55°C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이상건조 현상과 함께 포도나무에 중대한 결과를 준다. 강수는 겨울 몇 개월에 고지대에 집중되며 다른 지역의 강수량은 600mm/년 미만이다.

 

 이탈이아 장화 끝 앞에 떠있는 시칠리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으로 거대한 해안선과 꽃과 야생 식물의 천국인 내륙 평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3,340m의 에트나 산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만들어 낸 비옥한 땅 덕분에 올리브, 아몬드, 오렌지등이 풍성하게 수확된다. 지중해의 요충지로서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랍, 노르만,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다양한 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시칠리아는 이러한 문화의 영향으로 시칠리아 고유의 복합적인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시칠리아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마피아가 두렵고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많은 여행자들이 찾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본토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고고학, 인류학, 지리학, 건축, 미술, 음악등 여러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찾아가 봐야 할 곳이다. 시칠리아는 모든면에서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많이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시칠리아는 아직 인간의 정이 남아있다.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인간적인 느낌이 들다가도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마피아의 모습이 혼합된 곳이지만 낯선 사람을 향해 밝은 미소로 "챠오"를 연발하는 소박한 시골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고대 문명 세계가 살아 숨쉬는 곳

 지중해 문명의 십자로에 위치하고 있는 시칠리아는 기원전 8세기 페니키아인과 그리스에 의해 식민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의 주도인 팔레르모는 페니키아인에 의해 파노르모라는 이름으로 건설되었고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리스인들은 동부 지방에 카타니아, 시라쿠사, 셀리눈테, 아그리젠트등의 식민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곳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것들이다.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정치적으로 통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간의 끊없는 충돌이 일어났으나 경제적으로는 눈부신 번영을 이루었다. 이탈리아의 남부 도시와 카르타고등과 대규모 교역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시칠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시칠리아의 도시 국가들은 로마에 공물을 바칠 의무를 지게 되었지만 내부에서는 자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는 본토인들의 주식을 위해 시칠리아산 곡물을 수입하였고 로마인들의 정복으로 시칠리아 경제는 급속하게 쇠퇴하여 찬란했던 그리스 문화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기원 후 3세기에 들어서 그리스도교가 급속도로 섬 전체에 확산되기 시작하여 카타니아와 시라쿠사에는 대규모의 카타콤베가 등장하였다.

 

 4~5세기 타락한 로마 문명이 시칠리아에도 퍼져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반달족과 고트족이 차례로 시칠리아를 침략하였다.

 6세기에는 비잔틴 제국의 침입을 받아 이후 300여년간 시칠리아는 비잔틴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9세기부터는 아랍인의 지배를 받다가 11세기 노르만족이 그리스트교도의 재 정복이라는 명분으로 시칠리아를 점령하였다. 루젤로 2세와 그의 아들 월리엄 2세때 팔레르모 궁전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노르만, 비잔틴, 이슬람 양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윌리엄 2세가 후손을 남기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후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다가 13세기 독일 계통의 프리드리히 2세가 통치하게 되면서 시칠리아는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팔레르모는 제국내에서 가장 짜임새 있는 주도가 되었고, 가장 우아하고 지성적인 궁정이 되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시칠리아는 왕위를 둘러싼 암투로 다시 혼란스러워졌고, 프랑스 앙쥬가의 샤를 1세가 왕위를 오르게 되었다. 샤를 1세의 강압적인 전제 정치와 거만한 프랑스 병사들로 인해 스페르스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스페인의 아라곤 왕가가 중재에 나서게 되었고 결국 아라곤과 앙쥬왕가는 시칠리아를 사이에 두고 100여간 싸움을 벌인 끝에 1412년 총독령으로 아라곤 왕국에 귀속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격동의 14세기를 보낸 시칠리아는 그 후 다시 번영을 누렸고 1713년까지 스페인의 총독 통치를 받았다.

 

 기원전 3세기 시칠리아는 로마 제국 최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그 뒤 중세 초기에는 반달족, 고트족, 비잔틴인들에 의해 차례로 점령당했다. 8세기부터는 아랍인의 지배를 받다가 11세기 노르만족이 와서 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고 노르만, 비잔틴, 이슬람 양식이 공존하게 되었다. 이어서, 독일의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하에서 팔레르모는 수도로 정해지면서 황금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 프랑스 앙쥬가의 지배에 이어 13세기부터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아라곤가의 지배를 받게되는데 스페인 지배하에서 재정적으로 수탈당한 농민들의 반란과 봉기는 무력으로 억제되었고 이러한 강권적인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의 마피아 전통과 조직이 생겨났다고 한다. 18세기 왕위 계승 전쟁으로 잠시 동안 부르봉 왕가를 타도하고 시칠리아를 이탈리아로 편입시켰고 1861년 이탈리아는 통일 왕국을 이루었다.

 

 이런 다양한 지배 때문에 시칠리아는 섬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 신전, 노르만 교회, 비잔틴 돔, 화려한 바로크 교회, 궁전등의 혼합된 과거의 유산을 접할 수 있고 각 시대의 거주자들 사이에 있었던 문화 충돌의 흔적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현재 시칠리아인은 이탈리아인과는 다른 역경에 강하고 고집이 세지만 낭만적이고 쉽게 흥분하는 시칠리아인만의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시칠리아 약사

기원전 8세기: 그리스인 상륙

기원전 550년부터 기원전 450년: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서부를 점령

기원전 415년부터 기원전 413년: 시라쿠사전쟁

기원전 264년부터 기원전 241년: 제1차 포에니 전쟁,로마가 시칠리아 서부를 점령

기원전 227년: 시칠리아 서부가 로마의 첫 성(省)이 됨

기원전 218년부터 기원전 201년: 제2차 포에니 전쟁,로마가 시칠리아 섬의 전부를 점령

기원전 136년부터 기원전 132년: 제1차 시칠리아 노예 봉기

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101년: 제2차 시칠리아 노예 봉기

827년: 아랍인이 시칠리아 상륙

902년: 아랍인의 통치가 끝남

1091년: 노르만인의 통치가 시작됨

1139년: 시칠리아 왕국 성립

1194년: 신성로마제국이 통치

1282년: 아라곤이 통치

1412년: 스페인이 통치

1713년: 사포이 왕조

1720년: 오스트리아가 통치

1735년: 스페인이 통치

1861년: 3월14일: 이탈리아 왕국이 통치

1943년: 7월10일: 2차 대전 시칠리아 상륙

1946년: 5월15일: 시칠리아 섬이 자치권 획득

1946년: 6월18일: 이탈리아 공화국 건국

1982년: 팔레르모 총독 암살됨. 마피아문제가 주목받게 됨

1992년: 반마피아 수사를 지휘하던 팔코네 검사가 암살당함

 

 

시칠리아 팔레르모 기후(℃. mm)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시칠리아

팔레르모

최고평균

14.8

15.1

16.1

18.4

21.8

25.1

28.3

28.8

26.6

22.9

19.3

16.0

최저평균

8.2

9.1

10.9

12.9

16.0

19.7

22.9

23.6

21.5

17.8

14.3

10.5

평 균

11.5

12.1

13.2

15.7

18.9

22.4

25.6

26.2

24.1

20.4

16.8

13.3

강수량mm

71.6

65.4

59.5

44.1

25.5

12.2

5.1

13.3

41.5

98.0

84.3

80.0

강우일수

9.7

10.0

8.7

6.1

3.2

1.6

0.8

1.6

4.1

8.3

9.4

10.8

 

 

 관광명소

◈ 이탈리아 시칠리아 동부 카타니아 주의 주도 카타니아(Catania)

 카타니아(Catania)는 에트나 산 남쪽, 이오니아 해에 면한 넓은 카타니아 평야에 있다.

 BC 729년 북쪽으로 80㎞ 떨어져 있는 낙소스에서 온 칼키스인들(그리스 에우보이아 섬의 칼키스에서 온 정착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BC 5세기에 시라쿠사의 참주인 히에론 1세와 그의 아들 데이노메네스가 이 섬을 정복하고 이름을 화산에서 따온 아이트나로 바꾸었는데, 이들의 지배를 받으면서 섬은 중요한 지위를 얻었다. 주민들이 데이노메네스의 추종자들을 몰아낸 뒤 다시 옛 이름을 회복했다.

 

 시칠리아 도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로마에 함락되었으며(BC 263),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데시우스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도들을 박해하던 시기에 이곳에서도 이 시의 수호성인인 성 아가타를 비롯한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은 뒤 카타니아는 비잔틴·아랍인·노르만인에게 차례로 함락되었다.

 

 슈바벤의 황제들을 적대하여 하인리히 6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침략을 받았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아라곤 군주들이 이곳에서 종종 머물기도 했다. 16~17세기에 내란, 해적의 침략, 전염병, 기아 및 에트나 화산폭발(1669), 지진(1693)을 비롯한 자연재해 등을 겪었다. 그후 카타니아는 나폴리의 부르봉 왕가의 지배하에 있었고, 1837년 콜레라의 만연 속에서 일어난 시민 소요사태가 강제적으로 진압당했으며, 1848년 다른 도시들과 연합하여 시칠리아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다 또 한번 무력으로 진압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3년 폭격과 치열한 전투로 크게 파괴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지역이 여러 번 분출된 용암으로 이루어졌으며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면서 경사가 완만히 낮아진다. 건축에 주로 화산 응회암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옛 시가지는 전반적으로 짙은 회색을 띠고 있다. 1693년의 지진 이후 거의 새로이 건설되었으므로 도심부는 18세기 양식의 뚜렷한 특징을 보인다.

 

 고대 유적으로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극장 유적지들과 로마 시대의 원형투기장· 바실리카·목욕탕· 송수로 등이 있다. 프리드리히 2세를 기념하여 지은 4개의 뾰족한 탑이 있는 카스텔로 우르시노(1239~1250)는 오랫동안 대표적인 군사건축물로 알려졌으며, 지금은 일부가 상당량의 미술작품과 고대 유물들이 소장된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민들의 생활 중심지인 두오모 광장은 18세기의 궁전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넓은 거리들과 이어져 있다. 1091년에 노르만의 백작 루제로 1세가 세웠던 대성당 가운데 검은 용암으로 만든 3개의 앱스(後陣)와 트랜셉트(翼廊)의 일부가 남아 있다. 1693년의 지진 이후 건축가 프라 피올라모 팔라초토와 조반니 바티스타 바카리니(1702~1768)가 새로 세웠던 이 대성당에는 성 아가타의 유물과 이곳 태생의 작곡가 빈센초 벨리니의 무덤이 있다.

 

 시칠리아에서 가장 큰 교회인 산니콜로 교회(1693~1735)는 같은 이름의 옛 베네딕투스회 수도원(14~17세기)과 연결되어 있다. 1434년에 아라곤의 알폰소가 세운 대학교는 시칠리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대학교이며 도서관(1755)에는 중세의 귀중한 필사본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밖에 주요유적으로는 바로크 양식의 산타아가타 교회, 바카리니가 세운 시청사, 두오모 광장에 있는 코끼리 분수대(1736), 콜레자타(왕실 예배당), 천문대, 지금은 박물관으로 개조된 벨리니의 생가 등이 있다.

 

 시칠리아에서 2번째로 큰 이 시는 공업·교통 중심지이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교역이 활발한 항구를 보유하고 있다. 팔레르모·메시나·시라쿠사와 철도로 연결된다. 기계· 화학제품 제조업, 식품가공업, 어업 등 다양한 산업이 이루어지며, 특히 유황 정제업은 시칠리아 전체생산량의 1/2을 담당하고 있다.

 

 주변 농촌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유통 중심지로서 아몬드·귤 및 금속· 목재· 호박(琥珀) 등으로 만든 수공예품을 수출한다. 아름다운 해변이 있는 유명한 겨울 휴양지이기도 하다.

 

 

 카타니아현 동부의 코무네이다.

 카타니아의 도시는 시라쿠사에서 북북서로 51km, 엔나에서 동쪽으로 72km, 메시나에서 남으로 87km 주도인 팔레르모에서 동으로 166k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도시의 북쪽에는 활화산 에트나 산이 우뚝 솟아 있다. 에트나 산 정상은 카타니아에서 북북서 28km에 위치해 있다.

 

 

카타니아 역사

 기원전 8세기 경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 카타네(고대 그리스어: Κατάνη Katánē[*])로 건설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63년에 로마인에 의해 점령되었고, 또한 11세기 후반에는 노르만족의 약탈 피해를 입었다.

 1169년과 1693년에는 에트나 산의 분화로 나온 용암과 그에 따른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434년 시칠리아 섬에서 최초의 대학이 카타니아에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 카타니아 찾아가는 길

 메시나에서 올 때는 기차를, 카타니아에서 내륙으로 들어갈 때는 열차보다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낫다. 카타니아 중앙역에서 정면으로 약 500m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이곳에서 시라쿠사, 엔나, 아그리젠토, 팔레르모 등 모든 방향의 버스를 탈 수 있다.

- 버스정류장 : Via D’amico. 181

 

 

두오모 광장(Piazza Duomo)

 이곳에는 정복의 상징, 곧 오벨리스크를 운반하는 코끼리를 조형한 분수와 1693년 대지진 이후 소실된 성당을 1736년에 멋진 바로크로 다시금 태어난 두오모가 있다.

 

 

우르시모 성(Castello Ursimo)

 1239년~1250년 사이에 건축된 성으로서 이후 화산재에 파묻힌 모습을 다시금 찾아낸 것으로 건물 외벽과 주위에 짙은 회색의 화산재가 아직도 남아 있다.

 

 

카타니아 대성당(Cathedrale di Catania)

 

 

여행 포인트

➀ 관광적으로 볼 것은 많지는 않지만 이 도시가 많은 지진과 화산재 속에서 굳건히 버틴 역사를 안다면 카타니아의 골목골목에서 힘찬 생명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전체가 짙은 회색의, 뭔가 비어 있는 듯한 모습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➁ 매주 일요일마다 카미네 광장(Piazza del Carmine)에서 벼룩시장이 선다.

➂ 시칠리아는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북부 지역과는 달리 평일에도 성당에 많은 신자들이 있다.

 

 

여행자 안내소

➀ Via Cimarosa. 10

➁ 기차역 내 91번 홈 근처

➂ Corso Italia 302

 

 

 

◈ 이국적이고 흥미로운 도시 팔레르모(Palermo)

 뒤로는 팔레 그리노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티레니 해를 바라보고 있는 팔레르모는 시칠리아 최대의 도시로서 괴테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극찬했던 곳이다. 붉은돔 지붕과 아랍풍의 회랑, 남국의 식물로 정원을 꾸민 에레미티 교회, 노르만 왕국의 팔라티나 예배당의 비잔틴 모자이크를 보면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로마에서 밤 9시 기차를 타고 13시간을 달려 아침에 도착한 팔레르모는 마피아에 대한 두려움을 씻어 낼 수 있는 평온한 도시이다.

 

 팔레르모는 신, 구 시가지로 나뉘어지는데 기차가 도착하는 중앙역에서 뻗은 로마 거리와 마쿠에다 거리 주변은 구시가로 활기에 넘치는 서민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중앙역에서 2km 떨어진 폴리테아마 극장 주변은 신시가지인데 버스가 운행되므로 이용하면 편리하다. 팔레르모에서 가볼 만한 곳은 모두 구시가지에 모여 있으므로 걸어서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팔레르모 대성당(Cattedrale di Palermo) (카데드랄(Cattedrale)

 팔레르모 대주교의 명에 의해 118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600년에 걸쳐서 건축되었다.

 원래는 비잔티움 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였으나, 오랜 기간에 걸쳐 지어졌기 때문에 비잔틴, 아랍, 노르만, 로마 네스트, 네오클래식 등 다양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대리석으로 만든 화려한 대성당의 벽은 바로크 양식이고, 정면은 고딕 양식인데 이 정면의 모습을 갖추는 데만 2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내부에는 팔레르모를 다스렸던 시칠리아 왕들과 왕족들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신고전주의적으로 꾸며진 내장은 황제와 왕의 묘지와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팔레르모 대성당은 명화 '대부' 시리즈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팔레르모 중앙역에서 2km 정도 소요되며, 시칠리아의 노르망양식을 띠고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지하의 예배당과 보석창고는 입장료를 내야만 관람이 가능하다.

 

 

몬레알레성당(레알레궁전)(Monreale (Palazzo Reale))

 팔레르모 교외에는 레알레궁전이 있다. 그 안에는 황실의 여러가지 건축물들이 있는데 특히 12세기에 세워진 회랑으로 베니딕트수도원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몬레알레 성당은 대칭이 되어 있는 길고 가느다란 기둥을 고딕풍의 아치가 연결되어 있어서 현관부분을 둘러싸고 있다.

 레알레 궁전은 노르망왕조가 건설한 광대하고 웅장한 궁전으로, 시칠리아의 중요한 유적중에 하나이다. 아랍인이 만들고, 후에는 노르망왕조의 통치아래에의 왕궁으로 되어 후레딜릭 2세의 궁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성당인 건물에 2층으로 되어 있는 파라디나예배당은 노르망군주정체에 이르는 훌륭한 창조물로써 벽과 제단의 모든것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연대가 확실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무척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성당이다. 좌우 양측벽에는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이 성당도 화재로 일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천장등을 다시 재건하였다. 노르만문화가 들어왔다는 영향으로 천사의 날개가 그려져 있는 것등의 독특한 그림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 본당의 뒤에 있는 수도원의 중정의 회랑기둥에는 모자이크의 모양이 남아져 있다. 기둥마다 금색으로 디자인되어 있으나 조금씩의 차이를 가지고 있으며, 기둥의 윗부분의 조각도 각기 그 모양을 달리하고 있어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본당 앞의 광장에는 시칠리아의 독특한 붉은 장식을 한 우마차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으며, 또한 토산품과 선물을 파는 가게가 아래에 쭉 늘어서 있다.

 

- PIAZZA INDIPENDENZA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로 약 20분 정도 소요된다.

- 일요일 오후는 휴무이다.

 

 

비잔틴 양식의 대리석조각이 뛰어난 제수교회(Gesu)

 팔레르모 구시내의 퀘란타 마티리광장(Piazza quaranta martiri)근처에 있는 제수교회는 석조장식이 중후하게 장식되어 있는 건물이다. 시칠리아가 스페인영이 되었을 당시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다.

 교회에서는 결혼식이 자주 행해지며 뒷자석에서는 결혼식을 견학할 수 있다. 파이프오르간에 맞춰 행해지는 장엄하고 엄숙하게 이루어진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져 있으며 대리석 조각의 웅대함을 맘껏 느낄 수 있는 뛰어난 건축물중 하나이다.

 

 

 

포르타 누오바 문(Porta Nuova)

 1535년 카를 5세가 튀니지 정복과 시칠리아 수도 방문을 기해 세운 개선문이다. 팔레르모의 기념비적인 성문이다.

 처음 지었을 때는 독수리 문, 이후에는 황제의 문이라는 공식 명칭이 있었지만, 이후 이 개선문은 포르타 누오바 문이라고 불렸는데 '새로운 문'이라는 뜻이다.

 포르타 누오바 문에는 아랍인 부조들이 조가되어 있는데 바로 튀니지 해적들을 조각한 것이다.

 

 

 

◈ 팔레르모의 근교 몬레알레(Monreale)

 중앙역에서 버스를 타고 8km 떨어진 카프트산 중턱에 있는 작은 마을 몬레알레 광장에는 노천 카페와  아이스크림과 빵 가게들이 늘어서 있고 쭉 뻗은 야자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광장 중앙의 두오모(성당)는 1172년 노르만 왕인 윌리엄 2세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성당 내부는 구약성서 장면과 예수의 생애등을 황금 모자이크로 장식했다. 본당 천장의 그리스도상은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데 동전을 넣어 조명을 켜지게 하면 신비롭고 위대한 그리스도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또, 성당 옆에 키오스트로(회교사원)로 올라가는 좁은 미로를 따라가면 회교사원의 안뜰을 내려다 볼 수 있다. 아랍풍의 분수와 회랑, 몬레알레의 시가지와 푸른 바다까지 내려다 볼 수 있는 탁트인 전망을 보면 몬레알레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원한 신전의 도시 아그리젠트(Agrigento)

 팔레르모  중앙역에서 기차로 바다와 내륙 평원을 지나 2시간 정도 달려가면 아그리젠트에 도착하게 된다. 세계에서 중요한 그리스 고고학적 명소중의 하나인 아그리젠트는 기원전 582년 그리스인이 세운 신도시로서 아크라가스라고 불리우다가 후에 로마인에 의해 아그리젠토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아그리젠토는 그리스 본토 정치와 학문을 꾸준히 발전시켜 성장을 거듭했는데 위대한 예술가와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엠페도클레스가 대표적인 이곳 출신의 철학자였다.

 9세기에는 아랍인들이 들어와 도시를 세웠고 그 후 노르만인, 스페인들이 차례로 침략을 하였으며 마침내 부르봉 왕가가 아그리젠트를 점령하였다. 여러 민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아그리젠트는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여 독특한 모습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아크라가스 강과 히스파스 강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신전의 계곡(Valle dei Templi)은 기차역에서 버스로 신전 광장에 내리면 만날 수 있는데 광장 서쪽은 디오스쿠리, 쥬피터신전, 길건너에는 헤라크레스, 콘코르디아, 쥬노네 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리아식 유적들과 코발트색 하늘아래 어느 도시보다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여름에는 나무 그늘이 없이 땡볕 아래 걸어다녀야 하기 때문에 생수와 넓은 차양의 모자, 썬크림은 꼭 필수로 챙겨야 한다.

 

 디오스쿠리(카스토로와 폴룩스)신전은 기원전 5세기 때 유적으로 거의 폐허화 되어 기둥 4개가 남아있는데 이 신전이 아그라젠토의 상징이라고 한다.

 

 쥬피터(조베 올림피코) 신전은 지진으로 붕괴되었지만 그곳에 쓰러져 있는 7.75m의 거대한 석상(텔라모네)은 신전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으로 당시 신전의 크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기원전 6세기말 아그리젠트에서 가장 오래된 도리아식 신전 헤라클레스(에르콜레) 신전은 38개 기둥중 현재 8개 기둥만 남아있고, 쥬노네(헤라) 신전은  34개 기둥중 25개가 거의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어 후기 도리아의 세련된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시칠리아의 불가사의로 알려진 콘코르디아 신전은 기원전 5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다음으로  완벽하게 남아 있는 시칠리아  최대 신전으로 6세기 기독교인들이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보수 공사를 했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좋다고 한다. 매일 23시 30분까지 켜지는 조명 불빛 아래 신전 계곡은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역사속으로의 신비한 체험 그 자체다.

 

 

 

에트나 산(Etna)

 높이는 3,323m이다. 지중해 화산대의 대표적인 활화산으로 유럽의 화산 중에서 가장 높으며 완만한 원추형이다. 현무암 지질이며, 정상의 화구는 동서길이 약 800m, 남북길이 약 500m이다. 기생화산은 약 260개소로 세계에서 가장 많으며, 유사(有史) 이후에 형성된 것도 적지 않다. 분화는 BC 4세기경부터 약 90회 기록되었는데 종종 산기슭의 도시와 마을에 큰 피해를 주었다. 1669 ·1693· 1832년의 분화가 특히 컸으며, 최근에는 1983년 분화하였다. 특히 1970년대부터는 거의 10년에 1번씩 폭발하고 있다.

 

 분화 때에는 폭발과 용암 유출이 병발(倂發)하는 경우가 많다. 에트나는 유명한 관광지로서 산허리까지 도로가 있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다. 또 국제 화산연구소가 있으며, 유럽에 있어서의 화산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시칠리아섬 작전의 요충이 되었다.

 

 

 

메시나(Messina)

 메시나 해협 서안에 있으며, 지중해 해상교통의 요지이다. 기원은 BC 8세기에 그리스인(人)이 건설한 식민도시에서 비롯되며, BC 379년 카르타고인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831년에 로마 지배하에서는 사라센인의 침략을 받았고, 1061년에는 노르만인의 침략을 받았다. 1282∼1713년 에스파냐의 영토였고, 1861년 이탈리아의 영토가 되었다.

 

 배후에 구릉이 있고 수심이 깊은 좋은 조건의 양만(良灣)을 가진 이탈리아 굴지의 상업항으로, 과일· 올리브유· 포도주 등을 수출한다. 항구를 중심으로 식품· 양조· 시멘트· 화학 등의 공업도 이루어진다.

 

 대안(對岸)인 빌라산조반니 사이를 다니는 연락선은 철도와 화차· 객차를 그대로 적재하므로, 시칠리아의 철도 중심지이기도 하다. 1783, 1908년 2번에 걸쳐 대지진을 겪었기 때문에 오랜 역사에 비하여 시가지는 비교적 새롭다. 1548년에 창립된 대학, 해양생물연구소, 성당 등이 있다.

 

 

 

◈ 그리스 시대에 건설된 옛 도시 시라쿠사(Siracusa)

 그리스 시대에 건설된 옛 도시로, 구시가는 시칠리아섬과 좁은 해협으로 격리되어 있는 오리티지아섬에 있으나, 신시가는 시칠리아섬까지 펼쳐져 있다.

 

 비누· 시멘트· 올리브유· 포도주의 제조 및 어업의 중심지로 제염업이 성하다.

 

 아폴로 신전, 그리스식 극장 등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으며 관광지로서도 유명하다.

 

 BC 734년 무렵 코린토스인이 이곳에 시칠리아섬 최초의 그리스 식민시 시라쿠사이(Syrakusai)를 건설하여, 선주민을 농노(農奴)로 삼은 뒤 지주가 귀족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들은 오래지 않아 농업과 무역으로 번영을 이루었으며, BC 480년 참주(僭主) 겔론이 히메라의 싸움에서 카르타고군(軍)의 침입을 격퇴한 이후 서쪽의 그리스 세계에서 주도권을 굳히고, 그 세력을 신장하였다.

 

 BC 3세기 후반부터는 친(親)로마파와 친카르타고파의 분쟁이 일어나자 이에 편승하여 로마가 간섭하게 되어 BC 211년 아르키메데스 등의 방위전(防衛戰)도 보람없이 로마에게 굴복하였으나, 이후 로마의 시칠리아섬 통치관의 주재지로서 번창하였다.

 

 286년 무렵에 프랑크 해적의 침입으로 황폐해졌으나, 이른바 민족 대이동의 물결에는 휩쓸리지 않았고, 5세기에는 아프리카로부터 반달족의 침략을 받았다.

 

 

 

 6세기에는 그리스인도 이주했으며, 7세기에는 한때 비잔틴 제국(帝國)에 소속되었다. 이 무렵부터 사라센 세력이 아프리카로 뻗어 시라쿠사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위선의 일환을 이루었으나 878년 결국 사라센의 지배에 들어갔으며 다시 11세기에는 노르만인의 침입을 받아 비잔틴· 사라센· 노르만의 문화가 혼재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슈타우펜가(家)와 아라곤 등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19세기 후반 이탈리아 왕국에 통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폭격을 받았으며, 1943년에는 미국 ·영국군에게 점령되었다.

 

 

* 시라쿠사 찾아 가는 길

 메시나에서 158km

 하루 총 13회의 직행 열차가 있으며 소요 시간은 IC의 경우 2시간 50분.

 시칠리아에서는 열차편보다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메시나의 경우 역 앞 왼편, 카타니아의 경우 중앙역에서 앞으로 300m 정도에 버 스 터미널이 있다.

 그리고 팔레르모에서는 역의 오른쪽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열

 차의 경우는 연착도 많고, 로칼레(Locale)선일 경우 정차역이 너무 많아 힘들다.

 

 

고고학 공원(Parco Archeologico)

 현존하는 그리스식 최대 극장인 그리스 극장(Teatro Greco, BC 5C)이 있으며 디오니사우스의 귀(Orecchio di Dionigi)라는 동굴이 있다. 그 외에 카타콤베, 로마 극장 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는 예전 이집트인들이 발명한 파피루스 종이들을 보관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 시대의 유물이 많이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 '베네레 아나디오메네(Venere Anadiomene)'라는 1세기 때의 비너스 상이 목과 오른팔이 분실된 채 보관되어 있어,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떠오른다.

 

 

대성당(Duomo)

 오르티지아 섬.

 즉 그리스 극장이 있는 고고학 공원 반대 방향에 구시가지가 위치한 곳에 있다.

 이 성당은 고대 아테네의 신전(Tempio di Atheama, BC 5C)의 터에 건축되었는데. 1693년 대지진 이후 지금의 모습은 1728년에 갖추어졌다.

 비잔틴, 노르만, 바로크 양식이 존재하는 건축물이다.

 

 

여행 포인트

➀ 시라쿠사는 생각보다 도시가 크며, 만약 기차로 올 경우 고고학 공원를 먼저 보고 두오모를 보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오르티지아 섬, 트리에스테 거리(Via Trieste)에 외부로 가는 버스가 주로 서 있기 때문이다.

➁ 이곳에는 흑인 노동자들이 많기 때문에 너무 값이 싼 호텔을 이용하지 말자. 대개 그들의 숙소이기 때문이다. 유스 호스텔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

➂ 유스호스텔 - Viale Epipoli 45.

 

 

여행자 안내소

➀ Via Maestranza 22.

➁ Stazione Ferroviaria / 3. Via S.Sebastiano

 

 

 

시칠리아의 명승지 타오르미나(Taormina)

 이탈리아의 작은 섬 시칠리아의 명승지로 유명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겨울에도 푸겐비리아 등의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있다. 타오르미나에서 유명한 볼거리는 그리스 극장(Teatro Greco)이라고도 불리우며, 이오니아해(Mar Ionio), 그리고 에트나산(Monte Etna)이다. 특히 그리스극장은 바다를 통과해서 만든 고지대에 있으며, 삼면이 눈아래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이오니아의 바다가 보인다.

 타오르미나에는 5성급 호텔이 2개나 있다.

 

 영화 "그랑블루"의 촬영지였던 산 도메니코 팔래스(Ex-Convento di San Domenico)는 수도원을 개조해서 만든것으로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테라스 정원과 2개의 회랑이 아름답다.

 

 카타니아 국제공항 Aeroporto di Catania에서 하차하여 타오르미나의 터미널까지 공항버스로 약 60km 정도이고, 약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본토에서는 버스와 택시로 이동이 가능하며 섬내의 주요도시에서는 교외로 가는 버스가 있으면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타오르미나 대성당

 간소한 파사드가 특징인 이 건물은 대성당앞에는 작은 분수가 있다. 이 분수는 바로크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위에는 사람이고 아래는 인어의 모양을 한 조각이 세워져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에트나 산(Monte Etna)

 해발 3,343m의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으로 카타니아 중앙역에서 버스로 RIFUSIO SAPIENZA로 가면 된다. 로프웨이와 지프를 타고 정상까지 갈 수 있으며 타오르미나에서도 버스로 갈 수 있다.

 겨울에는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영화 그랑부르속에 나오는 작은섬 벨라섬(Isola Bella)

 언덕위에서 로프웨이를 타고 해안으로 내려가면 작고 아름다운 섬이 벨라섬이다. 이오니아의 아름다운 바닷빛에 둘러싸인 이 작은 섬은 작은 동굴이 있다. 그리고 영화 그랑블루에서 주인공이였던 잭과 라이벌이였던 안소니가 대결했던 그 바다가 여기이다.

 영화속에 나오는 호텔도 이 근처에 있는 호텔들이 여서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관광명소 중에 한곳이다.

 

 

타오르미아광장으로 불리우는 거리 움베르토 거리(Corso Umberto)

 테오르미나의 중심거리로써 움베르토거리로도 불린다. 바다쪽은 테라스가 되어있어서 이오니아해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며 거닐 수있다.

 중심가로 고지대에 있는 이곳은 저녁이 되면 리조트에서 즐기던 많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많은 도자기와 선물가게들이 즐비해 있으며, 옷가게와 갤러리등을 보면서 식사를 즐길 수가 있다.

 태엽을 감는 인형이나 장식품을 전시하는 가게들이 있다. 인형의 유모스러운 표정들이 인기있다. 또한 이 거리는 자동차가 통행금지가 되어 있어서 많은 시민들이 거리를 구경하며 즐거운 한때를 즐긴다.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대극장 그리스 극장(Teatro Greco)

 기원전 3세기에 지어진 야외극장으로 로마시대에 개조되었다고 한다. 로마시대의 극장으로 세계의 3번째로 큰 크기를 자랑한다. 후방에는 에트나산이 보이며, 여름에는 발레나 그리스고전극과 콘서트등 다양한 주제로 상연이 되고 있다. 그외에는 축제나 카니발등이 열리는 시민들의 휴양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스극장 거리에는 시칠리아의 토산품점들이 들어서 있어서 관광쇼핑과 눈요기를 할 수 있다.

 타오르미나 자르디니(Taormina Giardini)역에서 택시로 바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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