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 반도(Crimean Peninsula, Krymsky Poluostr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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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Ukraine)

 

크림 반도(Crimean Peninsula, Krymsky Poluostrov)

 흑해와 아조프 해 사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페레코프 지협을 통해 본토와 연결된다. 시바시 염호 및 염습지가 반도와 본토 사이에 놓여 있다.

 면적은 27,000㎢.

 

 긴 모래톱인 아라바트 반도에 의해 아조프 해와 분리되는 시바시의 바닷물은 페레코프 지협의 크라스노페레콥스크의 화학공업단지에 공급된다.

 

 반도의 북부와 중부(전체 면적의 약 75%)는 지표수가 거의 없는 건조한 스텝으로 이루어진 평평한 평야이다.

 

 

 남쪽에는 숲이 울창한 크림 산맥이 세 갈래로 나란히 뻗어 있다. 이 산맥은 봉우리가 평평한 석회암 산괴로서, 최고봉은 로만코쉬 산(1,545m)이다. 따뜻한 남부의 좁은 해안평야는 주요 휴양지이자 보양지이다.

 

 최적의 조건을 갖춘 항구도시인 세바스토폴은 오랫동안 러시아의 해군기지로 쓰였다.

 

 고대에는 케르소네소스 타우리카라고 불렸으며, BC 6세기경부터 그리스의 식민지 개척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스키타이(흑해, 카스피 해 북동부를 중심으로 활약했던 옛 왕국)에 의해 반도 내륙지역을 점령당하기도 했다. 그뒤 키메리오스 보스포루스 왕국의 수중에 들어갔으나 이 왕국도 결국에는 이방인들의 침입으로 붕괴되었다.

 

 오랫동안 바흐치사라이를 수도로 삼았던 타타르족의 본거지였으며, 1783년 러시아에 합병되었다. 타타르족의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은 나치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1944년 폐지되었으며, 타타르족은 1945년 중앙 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법적으로 1967년 복권되었으나 귀환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제국의 크림 반도 합병

 크림 반도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 크림 칸국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으며, 1783년 3월, 그리고리 포툠킨 왕자는 크림 반도를 방문한 직후에 러시아 제국의 황제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 크림 반도 합병에 대한 선언을 종용했으며, 그는 크림 반도의 주민들이 러시아를 기쁘게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예카테리나 2세는 1783년 4월 19일에 크림 독립국에 대한 합병을 선언한다.

 

 이 병합은 크림 반도에 대한 171년간의 러시아 통치라는 결과를 만들었으며, 이는 크림 반도가 1954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넘어가기 전까지 이어졌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여파로 인한 신(新)냉전의 기류가 크림 반도에까지 일면서, 자칫 제2의 남오세티야가 될 우려가 높아지고 있었으며, 특히 친(親)러시아 성향이 강한 크림 자치 공화국은 친(親)서방 정책을 취하는 키예프의 우크라이나 과도 정부에 반발하였다. 또한, 2014년 3월 11일에 크림 지방 정부는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을 결의했다.

 

 2014년 3월 16일에 크림 공화국 내에서 크림 반도의 러시아 귀속을 위한 주민투표가 진행된 결과, 압도적인 비율로 러시아와의 합병에 찬성하였다. 2014년 3월 18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세르게이 악쇼노프 크림 공화국 총리,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프 크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알렉세이 찰리 세바스토폴 시장이 러시아-크림 공화국 합병 조약에 서명하였으며, 3월 21일에는 러시아 상원이 크림 반도 합병 조약 비준과 관련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최종 서명함으로써 크림 반도가 러시아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되는 법적인 절차는 마무리되었다. 완전한 합병은 2015년 1월 1일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은 이 합병을 불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엔 총회는 2014년 3월 27일 캐나다, 코스타리카, 독일, 리투아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의 주도로 제출된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결의안(유엔 총회 결의 68/262)을 통과시켰다., 1866년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이탈리아와 독일은 각각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다.

 

 

크림 전쟁(Crimean War)

유럽의 강대국이 되고 싶었던 러시아의 남하 정책

 최후의 종교 전쟁이었던 30년 전쟁 이후 17세기 말부터 유럽의 열강들은 자국의 세력을 확장해 나가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특히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기 위한 영토 분쟁이 잦아지면서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찌감치 중상주의(16세기 말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경제 정책. 나라의 부를 늘리려고 상업을 중히 여김) 정책을 앞세워 절대 군주제(군주가 국가 통치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 체제)를 완성한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아직도 중세 봉건적 농노제가 기반인 러시아는 후진성(일정한 수준을 기준으로 할 때 그보다 뒤떨어진 상태)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7세기 말에서 유럽의 선진 문물을 도입하여 러시아의 근대화에 힘쓴 표트르 대제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국가의 힘을 키워 가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세력 확장을 위해 부동항(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을 확보해야 했다. 그래서 동쪽 시베리아 방면과 서쪽 발트 해 방면, 남쪽 흑해 방면으로 진출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동쪽으로는 청나라, 서쪽으로는 영국의 견제에 막혀 뜻을 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표트르 대제 때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긴 러시아는 서아시아의 최강국인 오스만 튀르크가 버티고 있는 흑해로 진출하기 위해 준비했다.

 

 1762년 러시아의 황제로 즉위한 예카테리나 2세(예카테리나 여제)는 당시 유럽의 열강들이 세력 다툼(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등)을 하고 있는 틈을 타, 남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황제에 오른 예카테리나 2세는 심각한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성직자들의 재산을 국고로 귀속시키고 강력한 개혁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 개혁이 제대로 성공하지 못하자,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남하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녀는 두 차례에 걸친 투르크와의 전쟁(1768~1774년, 1787~1792년)을 통해 흑해 연안과 크림 반도를 점령하였다. 특히 1744년에는 쿠추크카이나르지 조약을 통해 투르크 내의 그리스 정교도 보호권과 보스포루스 해협(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연결하여 터키의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을 가르는 해협)의 자유 항해권까지 얻어 냈다.

 

 그 무렵 러시아 안에서는 카자크 족 장교 출신 푸가초프가 엄청난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한참 흑해 진출에 열을 올리던 러시아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하 정책을 잠시 접어야 했다.

 

 그 뒤 나폴레옹이 러시아 정복에 실패하고 몰락하자, 한층 목소리가 커진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1세는 유럽의 열강들과 신성 동맹을 맺고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때 투르크와는 상호 불가침 조약(나라들 사이에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말자고 맺는 약속)을 맺었다. 하지만 이것이 러시아가 남쪽 진출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1821년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가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자 러시아는 이교도(이슬람)들로부터 기독교인(그리스정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다시 흑해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바로 전쟁에 개입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그리스 독립을 지원하고 나섰는데, 이는 투르크에 대한 반감보다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컸다.

 

 투르크가 연합군 측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고 이집트까지 끌어들여 전쟁을 계속하자, 영국·프랑스·러시아 함대는 이집트 함대를 격파하고 투르크 측에 큰 타격을 입혔다. 마침내 1832년에 콘스탄티노플 조약에 의해 투르크의 술탄이슬람의 최고 통치자 마무드 2세는 그리스 독립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 당시 러시아의 황제는 니콜라이 1세였다. 그는 데카브리스트 난이 일어났을 때, 왕위에 올라 난을 진압하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군사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폴란드 독립 운동이나 헝가리 독립 운동에도 개입하여 위력을 떨쳤다. 1832년에 이집트의 이브리힘 피샤가 반란을 일으키고 투르크를 공격하자, 투르크의 마무드 2세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니콜라이 1세는 투르크와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기에 바로 지원군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는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의 독점 항해권을 획득하였다. 이로 인해 투르크에 대한 자신감을 얻은 러시아는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러시아는 전쟁 초기에 바다를 장악한 뒤 흑해 연안에 요새를 만들었다.

 

 

그리스 정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시작된 전쟁

 1853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교도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투르크와의 교섭을 통해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 관리권을 인정받았다. 그러자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1744년 투르크와 맺은 케추크카이나르지 조약을 근거로, 투르크 영토 안에 사는 그리스 정교도들의 보호권이 러시아에 있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영국의 방해로 러시아의 요구는 거절당했다. 1853년 7월, 니콜라이 1세는 투르크의 지배를 받던 도나우 강 하구의 공국(왕보다 낮은 작위를 가진 군주가 다스리는 군주국)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공격해 점령해 버렸다.

러시아는 이 문제가 터지기 전에 이미 영국과 투르크 문제에 대해 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침공에 대해 영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본격적으로 남하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전쟁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생각과는 달리, 영국은 바로 투르크를 지원하겠다고 나서면서 함대를 보스포루스 해협(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을 가르고 있는 해협)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투르크는 같은 해 10월,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고, 도나우 강을 건너 러시아 군을 공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럽은 1856년까지 또다시 크림 전쟁(대부분의 전투가 흑해에 있는 크림 반도 주변에서 일어나 붙여진 이름)이라 부르는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러시아와 연합군의 본격적인 대결

 1853년 11월 흑해에 주둔해 있던 러시아의 함대가 소아시아 북쪽에 있는 시노페 앞바다로 진격해 투르크 함대를 전멸시켰다. 그러자 1854년 1월 영국과 프랑스는 함대를 흑해로 진입시키면서, 러시아에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결국 그해 3월 28일,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를 향해 정식으로 선전 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승리의 여신이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는 듯했다. 그렇지만 투르크와 영·프 연합군이 발칸 반도와 흑해 북부, 카프카스 지방(유럽권 러시아 남서부에 있는 지역으로 카프카스 산맥에 위치) 등 삼면에서 러시아를 공격해 오자, 러시아는 불리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여기에 우방(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이라고 믿었던 오스트리아마저 러시아를 압박해 왔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에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자기네 나라로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지역에서 철수한 뒤,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로 군대를 분산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1854년 8월에 군대를 보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해 버렸다.

 

 러시아로서는 오스트리아가 자신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다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1849년에 오스트리아 제국 안에서 헝가리 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가 군대를 보내 위기로부터 구해 준 적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러시아는 당연히 오스트리아가 자기네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러시아는 오스트리아까지 합세한 연합군 측을 상대로 혼자서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되었다.

 

 

난공불락의 세바스토폴(Sevastopol) 요새 전투

 전투는 주로 흑해 인근 바다에서 벌어졌다. 연합군이 군대를 몰고 들어온 카프카스 지방은 지형이 워낙 험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발칸 반도에서는 러시아와 투르크 군이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목제 범선이 주를 이루는 러시아 함대는 증기선으로 구성된 영국과 프랑스 연합 함대에 맞서 싸울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 바다를 장악한 뒤 흑해 연안에 세웠던 러시아의 요새들은 연합군 함대의 강력한 공격으로 큰 타격(어떤 일에서 크게 기가 꺾이거나 손실을 봄)을 입었다.

 

 이 기세를 몰아 연합군은 크림 반도 남서 해안의 흑해 함대 사령부가 있는 세바스토폴을 집중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1854년 9월에 연합군은 크림 반도로 상륙해 알마 강 유역과 발라클라바 등을 장악하고, 세바스토폴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랫동안 군항으로서 발전해 온 세바스토폴은 도시 자체가 요새였기 때문에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러시아는 연합국의 함대에 비해 자신들의 해군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자국의 함정을 모두 침몰시켜 항구를 봉쇄(굳게 막아버리거나 잠금)하여 연합군의 진입로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도시의 주민들과 함께 외곽 방어선의 중심지인 말라코프 고지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에 진지를 구축하고, 장기전을 대비한 방어 작전에 들어갔다.

 

 연합군의 선봉에 서서 큰 공을 세우고 있던 프랑스 외인부대는 세바스토폴 요새 공격에서도 앞장서서 싸웠다. 하지만 러시아 군의 철통같은 수비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만 늘어날 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여기에 콜레라까지 퍼져 희생자는 더욱 늘어났다. 1855년 1월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도 군대를 보내 연합군에 합류했지만, 양진영의 전투는 교착 상태(어떤 상태가 굳어 조금도 진전이 없음)에 빠지게 되었다.

 

 그 사이 1855년 3월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죽고, 뒤이어 그 아들 알렉산드로 2세가 즉위하여 전쟁을 이어갔다.

 

 1855년 5월 연합군 측이 먼저 공격에 나섰지만, 수백 명의 사상자만 내고 실패하고 말았다. 6월에 다시 공격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6천명이 넘는 희생자만 낸 채, 또 물러서야 했다. 러시아는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싸우면서도 수시로 진지와 성곽을 복구하여 더욱 철통같은 수비를 하였다. 이에 연합군의 공격은 매번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다.

 

 연합군은 세바스토폴의 주요 거점인 말라코프 고지를 함락시켜야만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1855년 9월 8일 군사 보충을 마친 외인부대를 선봉으로 다시 요새를 공격하였다. 외인부대가 요새로 들어가는 발판을 마련하는 사이 9월 11일, 연합군의 주력 부대가 화포를 쏘며 총공격을 펼쳤다. 이로써 러시아의 요새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끝까지 완강하게 버티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러시아는 자신들이 구축한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모두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결국 349일간 벌어졌던 세바스토폴 전투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후 11월에는 스웨덴이 연합군 측에 가담하였고, 12월에는 오스트리아까지 러시아가 공격을 중단하지 않으면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2세는 연합군의 제안을 받아들여,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 조약을 맺었다.

 

* 세바스토폴(Sevastopol)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남쪽에 있는 항구 도시. 옛 이름은 크테누스포르투스(Ktenus Portus)였다. 1783년 크림칸 국을 합친 예카테리나 2세가 이곳을 군항으로 정하고 세바스토폴이라고 명명하였다. '황제의 도시'라는 뜻이다. 1804년 러시아 흑해 함대의 기지가 설치되었는데 크림 전쟁 때에는 이 요새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어 349일 간에 걸친 농성이 유명하다. 1905년 혁명 때 전함 포템킨 호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250일 간 포위를 당하여 도시가 많이 파괴되었다. 어류 가공업, 기계 공업 등이 성하다. 군사 박물관, 역사·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대서양과 인도양 방면의 원양 어업 기지이며, 흑해 연안의 휴양 도시로 유명하다.

 

 

소득 없이 막대한 손실만 남긴 크림 전쟁

 3년에 걸친 크림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자신들이 원했던 대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다시 한 번 유럽의 강호로서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도 식민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전쟁에 패한 러시아는 더 이상 흑해에 함대를 보유할 수 없게 되었고, 베사라비아(몰다비아 땅으로, 드네스트 강과 푸르트 강 사이에 위치한 농업 지대)를 투르크에게 넘겨주었다. 또 투르크 제국 내 그리스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권 주장도 거두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나 프랑스가 패배하기 전까지 약 14년 동안 국제 무대에 나서지 못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로 2세는 유럽의 열강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후 진성을 탈피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1861년 농노 해방령을 실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다. 그 뒤 러시아는 1877년에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남하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다시 러시아·투르크 전쟁을 일으켰다.

 

 오스트리아는 뒤늦게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깨고 전쟁에 참여하여, 후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 러시아의 지지를 얻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도 받지 못해 오스트리아는 결국 전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이로써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외교의 기본 질서를 유지하던 빈체제는 무너졌고,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튀르크 제국이 유럽의 국제법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크림 전쟁은 제대로 준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와 연합군 모두에게 큰 손실만 남겼다. 그렇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새로운 무기와 전략을 앞세운 현대전이 등장하게 되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1910)

 치열한 전투와 전염병이 겹친 크림 전쟁으로 인해 양측은 모두 약 25만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손실을 낳게 되었다. 이때 영국《타임즈》의 윌리엄 하워드 러셀 기자(세계 최초의 종군 기자)는 전쟁 소식을 본국으로 보내, 고통스러운 참상을 그대로 세상에 알렸다.

 

'내 성공은 이 일에 기인한다. 나는 결코 변명을하지 않았다.'→

 이 소식을 접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열악한 의료 환경으로 고통받는 군인들을 위해 간호사들을 인솔하고 전쟁터로 향했다. 당시 나이팅게일은 런던 숙녀 병원 간호 부장이었다. 그녀는 전쟁터에 도착하자마자 야전 병원(전선 후방에 세워진 임시 병원. 크림 전쟁 당시 세계 최초로 세워짐)을 세워, 국적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치료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녀를 ‘백의의 천사’라고 불렀고, 일부에서는 크림 전쟁을 '천사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뒤 앙리 뒤낭이 전쟁 부상자 구호를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을 주장하였고, 유럽의 각국이 적극 협조하여 1863년 국제 적십자가 창설되었다. 1864년에는 국적이나 정치, 종교, 사상에 구애받지 않는 구호 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적십자 조약)이 체결되었다.

 

 

세바스토폴 기후(℃)

지 역

구분/월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세바스

토폴

최고평균

5.1

5.9

8.8

15.5

20.5

24.7

27.3

26.9

22.6

17.1

11.9

7.7

최저평균

-1.6

-1.0

0.9

6.1

10.9

14.8

17.1

16.4

12.5

8.1

4.5

1.1

평 균

1.7

2.4

4.8

10.8

15.7

19.7

22.1

21.6

17.5

12.6

8.2

4.4

강수량mm

57

46

42

36

39

54

44

47

46

41

57

74

강수일수

12

11

10

10

9

9

7

8

7

9

11

13

 

 

 관광 명소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Sevastopol)

  세바스토폴은 크림 반도의 남서쪽 끝 부분에 있는, 크림 반도 최대의 도시다. 흑해에 접해 있는 해안 도시로, 항구 및 해군 기지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크라이나에 속했다가 2014년에 크림 공화국과 함께 러시아로 편입된 도시로, 러시아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면적: 1079.6㎢

 인구: 약 50만 명(2022년)

 

 흑해 북부 연안에서 오데사 다음 가는 두번째로 큰 항구도시이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와 함께 행정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가졌었다. 군항으로서의 입지가 탁월해서 우크라이나 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이 곳에 해군 기지를 세워 놓았다.

 러시아 입장에선 남의 나라 땅이다 보니 2042년까지 임차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2014년 3월에 세바스토폴 의회가 크림 자치공화국과 함께 폭탄 선언을 했다. 우크라이나로부터 벗어나 러시아로 편입하겠다는 것. 우크라이나 정부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라 우크라이나-크림 자치 공화국-러시아간 긴장이 고조되었다. 3월 16일에 이 선언을 승인하는 주민 투표가 있었고 압도적 찬성률로 승인. 3월 17일 크림 의회는 러시아로의 합병을 요청했고, 18일에는 러시아가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의 합병을 승인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세바스토폴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의 3번째 연방시가 되었다.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역사

 오늘날의 가가린 구에는 케르소네소스(Χερσόνησος)라는 고대 그리스 유적이 있지만 케르소네소스와 세바스토폴의 역사는 이어지지 않는다. 케르소네소스는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본토에서 온 고대 그리스인들이 건설하였으며, 동로마 제국 시대에는 헤르손(Χερσών)이라 불리며 1천 년 이상 크림 반도의 주요 그리스계 도시들 중 하나였지만 동로마 제국이 붕괴되어 가던 14세기 말에 주민들이 모두 떠나고 버려졌다.

 

 현재의 세바스토폴은 1783년 러시아 제국이 해군 기지로 쓰기 위해 건설한 도시이다. 이듬해인 1784년 2월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포템킨 공작에게 그 곳에 요새를 짓고 그리스어로 '세바스토폴'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세바스토폴은 그리스어로 '덕망있는(세바스토스: σεβαστός) 도시(폴리스: πόλις)'라는 뜻이며 인명 세바스티안(Sebastian)과 어원이 같다. 세바스토폴이 건설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리스 문자 β는 v발음으로 바뀐 뒤였는데 로마자 표기는 그리스어식 표기를 전사하는 바람에 Sebastopol로 전사했다. 현재는 키릴 문자의 발음을 반영해 Sevastopol이라고 적는다. 세바스토폴이라는 지명은 유럽 도시 이름 갖다붙인 지명이 많은 아메리카 대륙이나 호주 대륙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동네들은 모두 Sebastopol을 사용한다. 그리고 키릴문자가 아닌 라틴문자 쓰는 유럽에서도 Sebastopol을 쓴다.

 

 그리스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데도 그리스어식 이름이 붙은 도시인데, 세바스토폴 외에도 심페로폴, 마리우폴, 스타브로폴, 헤르손, 오데사, 티라스폴, 멜리토폴 등 흑해 연안의 옛 러시아 제국 영토에는 유독 그리스식 지명이 많다.

 

 이 지명들의 공통점은 예카테리나 2세가 건설한 도시들이란 것인데 제3의 로마를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그리스 계획의 일환으로 크림 칸국 일대를 정복한 후 그 지역에 여러 도시들을 건설할 때 마다 그리스식 이름을 붙인 것이다.

 

 계속된 확장을 거쳐 1788년부터는 중요 해군 기지가 되었고, 상업 항구로서도 기능하게 되었다. 좀 쌩뚱맞긴 하지만 온화한 기후 덕에 러시아 사람들의 바다 휴양지로도 알려져 있다.

 

 이곳이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2번의 전투의 격전지로서일 것이다. 첫번째 전투는 크림 전쟁 중에 벌어진 세바스토폴 공방전이다. 이 전투는 1854~1855년에 걸쳐 세바스토폴에서 벌어졌는데, 제정 러시아 군이 영국,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오스만 제국군에 맞서 피터지게 싸웠지만 결국 패해서 세바스토폴을 버리고 퇴각했다. 퇴각 과정에서 자신의 함대 전체를 자침시켜야 했던 건 덤.

 

 이런 전란 속에서도 세바스토폴은 점점 발전하여 1897년에는 인구 5만 3천 명을 기록했고, 소련이 들어서서도 계속 발전하여 2차 대전 직전인 1940년에는 인구 10만을 돌파했다.

 

 두번째 세바스토폴 공방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에 일어났다. 전략적 요충지다 보니 2차 대전 때에도 역시 대규모 공방전이 일어난 것.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나치 독일에 맞서 처절히 저항했으나 결국 패했다. 세바스토폴은 이 전투를 기려 영웅 도시로 지정되었다.

 

 나치의 점령으로부터 1944년 소련이 세바스토폴을 수복했을 때 인구는 11,000명으로 줄어버렸다. 그러나 승전 후 세바스토폴은 재건되었고 1959년에는 인구 14만 8천 명을 기록했다. 이후 1967년에는 인구 20만, 1979년에는 30만을 기록하였다.

 

 1954년에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관할에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관할로 이전되었다. 1955년 10월 29일 세바스토폴에 정박 중이던 소련 해군 함정 '노보로시스크(Новороссийск)'가 폭발 침몰, 608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1957년에는 인근의 발라클라바라는 도시와 합병되었다. 이 도시에는 소련의 중요한 잠수함 기지가 있었다. 적 공격을 막기 위해 지하에 기지를 만들어 놨는데, 핵폭탄에 직격으로 맞아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매우 중요하다 보니 도시 주민 거의 전부가 잠수함 관련 일을 했던 적도 있었다고. 엄청난 보안이 요구되었기에 외부에 살던 가족들조차 웬만한 사유로는 방문을 허락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잠수함 기지는 폐쇄에 들어갔고, 1996년 마지막 러시아 잠수함이 기지를 떠나면서 폐쇄가 완료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폐쇄 도시였다. 외부인이 방문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세바스토폴이 아니라 소련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뭐 그런 거 없다. 참고로 우크라이나에는 세바스토폴을 비롯하여 총 18개의 폐쇄 도시가 있었다. 많기도 했다.

 

 세바스토폴은 우크라이나의 특별행정구역이었는데, 러시아계가 많이 사는데다가 러시아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기에 우크라이나 vs 러시아+세바스토폴이라는 갈등 관계가 생겨났다.

 

 1991년까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소련이라는 한 나라의 일부였으므로 갈등의 요소가 없었다. 문제는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근본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세바스토폴 지배를 인정하지 않아 왔다. 아니, 세바스토폴 뿐만 아니라 크림 반도, 옛 크림 오블라스트 전체에 대해 우크라이나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었고, 그것이 계속 불씨로 남아 왔다.

 

 1992년 12월에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 국회의원들을 제국주의자라 비난했던 일도 있었다. 러시아 연방의회가 세바스토폴의 지위를 명확히 정의하도록 의원들이 밀어붙였기 때문. 남의 나라 도시에 대해 지위를 논하니 우크라이나로서는 당연히 빡칠 수 밖에. 얼마 안 있어 크림 공화국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대리인 사무실지점이 생겼고, 이에 대해 러시아 연방의회 지부에 소속된 사람들이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93년 7월에는 러시아의 의회가 세바스토폴이 러시아 연방의 도시임을 선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같은 달인 7월, 크림 자치국 의회의 공산당 간부회가 자체적인 대통령직의 신설을 주장했다. 쉽게 말해 "우리끼리 알아서 살테니 우크라이나 대통령 꺼지셈"이라는 소리다. 곧 이어 러시아 대표는 러시아가 크림 독립에 대한 국민투표를 감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심지어 크림 반도 내의 러시아인 단체의 한 지도자는 무장봉기(!)를 통해 러시아계 정부를 옹립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1997년 5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평화 우호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통해 세바스토폴 및 크림 반도의 기지와 설비를 20년마다 갱신되는 전세임대 형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대신 우크라이나는 크림 반도와 세바스토폴이 우크라이나 땅임을 조약에 명시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은 셈. 이로서 세바스토폴의 소속에 대한 모든 갈등은 드디어 끝나게 되었...기는 개뿔, 러시아는 여전히 세바스토폴은 러시아의 일부이며 단지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상태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2008년에는 모스크바 시장이 세바스토폴은 다시 러시아의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게 말뿐만이 아니었던 것이, 합병에 대비해 3천 4백만불이라는 예산을 할당해 놓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모스크바는 세바스토폴로부터 한 2,000km 정도 떨어져 있다.

 

 2010년, 양국은 2042년까지 러시아가 해군 기지를 임차하는 조약을 비준했다.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의회는 찬성파와 반대파로 갈라져 격렬히 싸웠다. 결론은 총 투표의 52% 찬성표로 아슬아슬하게 조약 비준. 반면 러시아 의회는 98%라는 높은 찬성률로 별 이견 없이 조약을 비준했다.

 

한 편 인구 면에서는 1990년대 중반 이후 30만명대 초중반에서 정체 상태였으나, 2010년 34만 명을 기록한 이후 2014년에는 약 40만 명을 기록했다.

 

 2014년 3월 6일 세바스트폴 의회는 세바스토폴이 러시아의 연방 일원임을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3월 11일에는 세바스트폴과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하여 크림 공화국으로 통일한 후 러시아 연방에 가입하는 절차를 밟는다고 공동 선언했다. 선언에 따르면 주민투표가 가결되는 대로 통일되어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한 뒤 러시아에 가입한다. 이 선언을 확정하는 주민 투표는 2014년 3월 16일에 열렸고, 결국 압도적인 찬성표가 나왔다. 하루 뒤인 3월 17일 크림 의회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러시아로 편입 허락을 요청했고, 3월 18일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을 러시아 연방으로 편입시키는 조약에 서명했다. 편입조약은 세바스토폴을 다시 크림 공화국에서 분리하여 연방시의 지위를 준다고 규정한다. 러시아측의 지원, 혹은 적어도 공감대가 있었기에 이 모든 합병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3월 19일 현재 UN 가입국 중에서 러시아의 크림 반도병합을 승인한 나라는 러시아, 아프가니스탄, 니카라과, 시리아, 베네수엘라다.

 

 2017년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을 배경으로 한 200루블 신권이 발행되었다.관련 뉴스(러시아어) 크림반도 영유권 주장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2010년 이후의 인구 성장세가 계속되어 2016년에는 인구 40만을 돌파했고 2021년에는 50만을 돌파했다.

 

 러시아의 최서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바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겨울에 춥지 않다. 바다 덕에 여름 또한 덥지 않아 전체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보인다. 습윤 아열대 기후에 해당하며,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Cfa에 속한다. 1월의 최고기온 평균은 5.9°C, 최저기온 평균은 영하 0.2°C이며, 7월의 최고기온 평균은 26.5°C, 최저기온 평균은 18.2°C. 연평균 강수량은 400mm로서 많지 않은 편. 이는 한국 강수량의 1/3도 안되는 양이다.

 

 주민구성은 우크라이나가 인구조사한 2001년 기준으로 러시아인이 주민의 71.6%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우크라이나인으로 22.4%를 차지한다. 원주민 격인 크림 타타르인은 매우 적어서 0.5% 밖에 안된다. 타타르인도 0.7%로 매우 소수. 그리고 2014년 러시아에서 실시한 간이 인구조사에 따르면 민족별로는 러시아인 81.1%, 우크라이나인 14.2%, 벨라루스인 1%, 크림타타르인 0.75%, 타타르인 0.73% 등이고, 모국어별로는 러시아어 사용자가 96.2%에 달하고 그 외에는 우크라이나어 2.13%, 타타르어 0.59%, 크림타타르어 0.41% 등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해군 선박에 대한 수리와 정비 관련한 산업이 번창해 있다. 그 외에 제조업 공장이 몇몇 있다. 큰 돈은 아니지만, 해군 기지를 유치한 댓가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정부로부터 매년 몇백만 달러 정도 용돈보상금을 받고 있었다.

 

 대중교통으로 버스와 무궤도전차, 기차가 다니며, 해안도시 특성상 페리선과 보트도 운행되고 있다.

 

 이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클럽으로 FC 세바스토폴이 있다. 2002년에 창단되었다가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뒤 2014년 재창단되어 현재 크림반도의 자체 리그에서 뛰고 있다. 크림반도 내에서는 나름대로의 강호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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