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Mos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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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Moscow)

 모스크바(Moscow)는 러시아의 수도로 모스크바강을 끼고 있으며 인구는 1,200만 명, 면적은 880㎢이다.

 

 모스크바는 1147년 유리 돌고루키 왕자에 의해 세워졌으며 15세기부터 1712년까지 그리고 1918년부터 현재까지 러시아 수도의 자리를 지켜왔다.

 

 혁명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모스크바. 레닌, 스탈린, 차이코프스키, 푸쉬킨, 톨스토이등 세계사와 문학. 예술사를 뒤흔든 인물들의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7개의 스탈린식 건물과 크레믈린 궁전의 장엄함이 도시를 압도하고 있다.

 어디를 가도 극장, 콘서트홀, 박물관, 미술관이 있는 예술의 도시 모스크바 크레믈린과 붉은광장은 모스크바 여행의 시작, 정치 중심지이기도 한 이곳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도로는 방사선처럼 뻗어 있다. 크레믈린 궁전의 크고 둥근 지붕 위에 꽂혀 있는 붉은 깃발은 러시아의 상징이며, 과거 세계 정치의 반은 이곳에 모여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최고의 모스크바는 이 나라 정치, 문화, 경제, 과학, 산업의 중심지이며 러시아 건축과 도시계획,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연평균기온 4.4℃, 1월평균기온 -9.9℃, 7월평균기온 19℃이다. 여름에는 일조시간이 길고 온도는 비교적 낮은 편이다. 겨울에는 흐린 날이 계속되고 12월 한달의 일조시간은 평균 20시간, 1월은 30시간 정도이다.

 기온의 연간 변동이 크고 한난의 차이가 심하여 거주조건은 좋지 않다. 연강수량은 575㎜, 여름과 가을에 많은 비가 내린다. 적설량은 400㎜ 정도이다.

 

 

 모스크바는 중앙 경제지역의 핵심부로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다. 모스크바 주는 1929년에 설정되었고, 모스크바 시는 주도이지만 시 자체는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대륙성 기후로 겨울이 길고 추우며 1월평균기온이 약 -10℃이다. 7월평균기온은 18℃로 무덥지 않다.

 

 17세기말부터 면직물·모직물 등을 생산하던 주요직물생산지였고, 지금도 인조섬유·견·리넨·의류·니트웨어 등을 생산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술공업도 산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다양한 종류의 중기계류·공작기계·기관차·버스 등을 생산한다. 화학공업은 꾸준히 발전하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기반이 잡힌 유리·도기업은 지금도 북부 지역 에서 번창하고 있다. 교통망이 주 전체에 걸쳐 잘 발달해 있고, 도로 포장률이 러시아에서 가장 높다.

 

 수도인 모스크바 시 주변지역을 차지하는 모스크바 주는 1929년에 설정되었다. 이곳 지형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모스크바 시 북쪽에서 거의 동서방향으로 주를 가로지르며 뻗어 있는 클린-드미트로프 능선이다. 종단(終端) 모레인의 선(線)인 이 능선은 높이가 300m에 달하며 볼가 강 상류의 빙력점토(氷礫粘土) 평지로 이어지는 가파른 북쪽 경사지를 갖고 있다. 능선 남쪽에는 오카 강과 오카 강의 주요지류인 모스크바 강이 흐르는 넓고 평평한 평야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에 모스크바 시가 자리잡고 있다. 이 평야는 남동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져 광활한 습지대인 메시체라 저지대가 되고, 오카 강의 남쪽에서는 중앙 러시아 고지대 북쪽 가장자리를 향하여 높아진다.

 

 기후는 대륙성이기 때문에 겨울이 길고 추우며 1월평균기온이 약 -10℃이다. 7월평균기온이 18℃로 무덥지 않다. 연평균강수량은 남동쪽 지역의 450㎜로부터 클린-드미트로프 능선의 650㎜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보이며 여름 강수량이 가장 많다. 주로 가문비나무·소나무·참나무·자작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자연적 혼합림 식생이 지금은 지역의 40% 정도에 남아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는 목초습지와 토탄지는 특히 메시체라 저지대에 널리 분포하며 강들을 따라 넓은 범람원 초원이 있다.

 

 중앙 경제지역의 핵심부인 이 주는 고도로 산업화되어 있다. 17세기말부터 면직물·모직물 등을 생산하던 국내의 주요직물생산지였고, 지금도 인조섬유·견·리넨·의류·니트웨어 등을 생산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2번째로 중요한 산업은 기술공업으로 다양한 종류의 중기계류·공작기계·기관차·버스 등을 생산한다. 꾸준히 발전하고 있는 화학공업은 인조섬유·플라스틱·비료 등을 생산하며 오래 전부터 기반이 잡힌 유리·도기업은 지금도 북부 지역 에서 번창하고 있다.

 

 그밖에 시멘트, 가구 및 목제품, 신발류, 식품 등이 제조된다. 남부에서는 갈탄과 인회토(燐灰土)를 채광하며, 토탄이 광범위하게 채탄되어 샤투라 근처 동부에 있는 화력발전소에 연료로 공급된다. 지역 안에서 공급되던 연료자원은 북부 카프카스 산맥, 서부 우크라이나 산맥, 사라토프 등 남쪽에서 파이프라인으로 공급되는 천연 가스로 대체되었다. 그밖에 거대한 볼가 강 수력발전소들로부터 전기가 고압 송전망을 통해 공급된다.

 

 공업발달은 고도의 도시화를 의미한다. 1985년 총인구의 91%가 140개 이상의 도시 지역에 거주했다. 모스크바 시와 주변 삼림공원 녹지대 내의 위성도시들이 대표적인 도시지역으로 볼 수 있으며 많은 근로자들이 인접지역에서 모스크바 시로 통근한다. 모스크바 시는 주도이지만 시 자체는 행정적으로 독립되어 있다.

 

 농업은 경제에서 비교적 미약한 역할을 한다. 고용 인구의 1/5만이 이 부문에 종사하며 경작지는 면적의 25%밖에 안 된다. 주 전역과 특히 모스크바 시 주변에서 모스크바 시에 공급하기 위해 낙농업과 시장 출하용 채소·과일 재배업이 발달되어 있다. 동부에서는 젖소·육우 사육이 중심이 되며 돼지·가금류 사육이 널리 퍼져 있다. 호밀과 귀리가 주종을 이루는 곡물 재배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사료작물 재배가 경작지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서부와 북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마 재배가 이루어진다. 습지대에서는 개간사업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교통망이 주 전체에 걸쳐 잘 발달해 있다. 러시아 전역에서 오는 간선철도가 모스크바로 집결되며 교외 전철망이 있다. 도로 포장률은 러시아에서 가장 높다. 수도에서 북쪽 볼가 강까지 뻗은 모스크바 운하, 소형 선박이 다닐 수 있도록 운하화된 모스크바 강, 오카 강 등을 포함하는 수로들이 있는데 모두 볼가 수계(水系)에 연결된다.

 

 

 광활한 유럽권 러시아 평원의 가운데에서, 오카 강(Oka River, 1,480km)의 지류인 모스크바 강 유역에 있는 이 도시는 모스크바 강과 그 지류들이 이루는 드넓으면서 극히 지대가 낮은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심장부에는 모스크바 시와 그 주변지역으로 이루어진 모스크바 주가 있다. 모스크바 강 유역의 아래쪽에서는 상당히 오래된 결정암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대지의 향사곡 구조가 두껍게 나타나는데 이 향사곡은 지표면으로부터 깊이가 1.6km 이상의 화강암층이다. 한때 모스크바 시내로 흘러들었던 작은 하천들은 거의 모두 복개되거나 매립되었다.

 오늘날 지상을 흐르는 지류로는 좌안(북안)의 야우자 강(Yauza River)과 우안의 고로드냐 강 및 코틀로프카 강뿐이다.

 

 

 

모스크바(Moscow) 역사

 11세기 말에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군락이 이루어졌으며, 시의 이름이 연대기의 기록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1147년이다. 당시에는 이곳이 수즈달공(公) Y. 돌고루키의 영지였으므로, 오늘날에는 그를 시(市)의 창시자로 보고 있다.

 모스크바가 본격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공의 아들인 다닐 알렉산드로비치가 1276년 무렵에 이곳을 모스크바대공국의 수도로 정하면서부터이다. 모스크바대공국은 지리적인 이점과 역대 여러 공작의 교묘한 내외정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는데, 이와 더불어 모스크바도 점점 영토가 확장되고 세력이 강해졌다.

 

 14세기 전반 이반 1세 때에 북동러시아의 정치·종교의 중심이 되었다. 14세기 후반부터 계속된 킵차크한국(타타르)의 지배에 대하여 러시아인의 반타타르 투쟁이 일어났으며, 모스크바는 그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1380년에는 모스크바 대공 D. 돈스코이가 클리코보전투에서 처음으로 타타르의 대군을 격파하였다.

 

 15세기 후반 이반 3세 때에 러시아가 킵차크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시는 급속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크렘린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춘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16세기에 들어와서 모스크바는 외적(특히 크림타타르)의 침입에 대비하여 견고한 방벽을 구축하였다. 키타이고로드가 1535∼38년에, 그 바깥쪽의 벨리고로드가 86∼93년에 석조성벽(19세기초 철거, 지금은 순환도로가 됨)으로 둘러싸였다. 또한 제 3 제믈랴노이 발(土城)이 91∼92년에 구축되었다. 주변에는 요새화된 수도원이 배치되었다. 시는 류리크왕조 단절 후 동란시대(1610∼12)에 폴란드군에 점령되어 큰 피해를 입었으나, 로마노프왕조 성립 후 곧 부흥하여 시역(市域)도 제믈랴노이 발을 넘어 확대되었고, 17세기 중엽에는 인구도 20만에 달했다.

 표트르대제 때인 1712년, 수도는 새로 건설된 페테르스부르크(현재의 레닌그라드)로 옮겨졌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제 2 의 도시로서 여전히 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했다.

 

 18세기 초에 이미 일반시민을 위한 학교교육의 기초가 잡혔으며, 55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대학인 모스크바대학이 창설되었다. 또한 최초의 공공극장이 개설되었으며, 신문이 발행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군대의 모스크바침공 때 모스크바를 뒤덮은 대화재는 1주일 동안 계속되어 시 전체의 3/4이 소실되었다. 나폴레옹군대는 39일 후에 물러갔으나, 그에 앞서 크렘린의 일부를 폭파했다. 전쟁 후 곧 모스크바시 건설위원회가 발족되어 모스크바는 급속하게 재건되었다. 크렘린의 서쪽을 흐르는 네글린나야강이 복개되었고 그 위에 알렉산드로프스키공원을 만들었다. 벨리고로드의 성벽과 제믈랴노이 발이 철거되었고, 볼쇼이극장과 마리극장 등이 건조되었다. 시의 주거조건도 개선되었으며, 공공 교통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또 40년대에는 최초의 공공 교통기관인 대형 4륜마차가, 70년대에는 마차철도가, 99년에는 전차가 달리기 시작하였다. 인구도 27년에는 나폴레옹전쟁 전의 수준을 넘었고(27만 5000), 62년에는 31만 7000명이 되었다. 농노해방(1861) 이후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97년에는 100만 명을 넘었다.

 

 20세기 초에 90% 이상의 가옥은 단층이나 2층건물이었고 도시정비의 혜택을 받은 것은 시 중심부에 사는 사람들뿐이었으며, 70% 이상의 주민은 기본적인 설비도 갖추어지지 않은 좁은 주거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생활하였다. 모스크바는 러시아혁명의 주요 무대가 되었고, 10월혁명 후 1918년 3월 11일 소비에트정권은 페트로그라드(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 옮겨, 모스크바는 다시 수도가 되었다. 그 후 내전을 극복한 소련은 모스크바를 거점으로 사회주의건설에 착수했다.

 

 40년 모스크바의 전체 공업생산은 제 1 차세계대전 전(1913)의 2배에 이르렀다. 35년에는 지하철의 건설이 시작되었고, 인구도 증가하여 39년에는 454만 명에 이르렀다. 제 2 차세계대전은 소련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대전 후에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재건되고 발전하여 50년 모스크바의 공업생산고는 전쟁 전(1940)의 2배에 달했고, 64년에는 4.9배가 되어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도시로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교 통

 모스크바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4개의 공항, 10개선의 철도 및 1호에서 11호에 이르는 연방도로와 3개의 하항(河港) 등에 의해 러시아연방의 주요 도시 및 외국과 연결된다. 시 북쪽 교외에 있는 셰레메티에보공항은 광대한 러시아 각지를 연결하는 항공망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철도도 원거리수송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근래에는 장거리보다는 모스크바 근교의 도시나 마을을 연결하는 기능이 높아지고, 통근·레크리에이션 등에 이용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시내에서는 승객수송에서 차지하는 시영전차(市營電車)의 중요도는 점차적으로는 낮아지고, 대신 지하철이 발달하였으며, 그 노선의 길이가 208㎞(1985)에 달하고 있다. 승객수송에 있어서는 버스를 앞질러서 42%(24억 9200만, 1985)를 지하철이 맡고 있다. 버스 또한 시내 승객의 수송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근교버스를 비롯하여 원거리버스의 교통도 발달하였다. 시내에 있는 3개의 하항은 물자의 반입·반출과 여객수송의 발착점으로서도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서 볼가강 하구의 아스트라한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항로와 모스크바 근교의 각지를 연결하는 단거리항로도 있고, 수중익선이 시내 관광뿐만 아니라 근교항로에도 취항하고 있다.

 

도시권과 도시계획

 모스크바 시내는 보통 3지대로 나뉜다. 사드보이 순환도로 안이 도심이며, 여기에 행정· 상업 ·문화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그 바깥쪽 1960년대까지의 시역(市域)이 중간지대로 크렘린까지 평균 7.4㎞이고 공업· 주택지구· 철도터미널 등이 있으며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제 3지대는 신시역(新市域)으로 크렘린까지 평균 14㎞이며 시 전체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대가 모스크바의 새 주택단지 조성지이고 녹지도 많다. 여기까지가 주요 시역으로 전체 길이 109㎞의 순환 도로가 시역을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바깥쪽이 삼림공원지대(너비 10∼15㎞, 넓이 1800㎢)이며, 도시와 마을이 흩어져 있고 1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바깥쪽에 근교지대가 있으며, 모스크바시의 경계로부터 50∼70㎞의 범위 안에 있다. 이 지역에는 80여 개의 도시와 마을이 있고, 25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며, 모스크바 시내로의 통근지대에 들어가며 이 지대까지를 모스크바 메갈로폴리스(모스크바대도시권)라고 한다. 모스크바의 도시계획에서는 토지이용의 집약화, 명확한 기능구분, 교통망의 정비, 환경보전 등 각종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또한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모스크바도시권의 정비도 고려하여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 것은 모스크바의 팽창을 막기 위하여 일찍부터 인구제한을 시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와 그 주변도시에 대한 인구집중이 계획을 웃도는 속도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기후(℃)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모스크바

(Moscow)

최고평균

-6.3

-4.2

1.5

10.4

18.4

21.7

23.1

21.5

15.4

8.2

1.1

-3.5

최저평균

-12.3

-11.1

-5.6

1.7

7.6

11.5

13.5

12.0

7.1

2.1

-3.3

-8.6

평  균

-9.3

-7.7

-2.1

6.1

13.0

16.6

18.3

16.8

11.3

5.2

-1.1

-6.1

강우량mm

42

36

34

44

51

75

94

77

65

59

58

56

강우일수

11

9

8

9

9

10

12

12

9

11

10

9

 

 

여행길잡이

 키예프역 근처 강에 있는 유람선 승선장에서 유람선을 타고 내려가면 노보데비치 수도원, 레닌 중앙 스타디움, 모스크바 대학, 고리키 공원, 크렘린, 아르항겔리스키 사원, 이반 대제의 종루, 러시아 호텔, 예술가 아파트를 지나서 노보스빠스끼 다리에 있는 선착장에 내리게 된다. 모스크바 강을 유람하고 나면 모스크바 시의 모습을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단, 모스크바 강 유람선 관광은 여름철에만 할 수 있다.

 

 

 

 관광 명소

모스크바의 중심 크레믈린(Kremlin)

 러시아 역사 및 문화의 산 증거이다. 둘레는 2,235m이고 벽 위에는 20개의 망루가 있고 대회궁전, 레닌묘, 레닌상, 스파스카야탑, 12사도 사원, 이반대제의 종루, 궁전병기고, 크레믈린극장 등이 있다.

 

 1485-95년에 러시아인과 이탈리아인의 합작으로 현재의 성벽이 건축되었다. 16세기 이반뇌제의 통치기간 중 크레믈린은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18세기 표트르 1세가 수도를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면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1812년 나폴레옹의 침략시 러시아는 수도를 불태우는 초토화 작전으로 격퇴했는데 이 때 크레믈린도 소실되었다. 

 

 

 18세기 러시아의 수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지만 모스크바는 여전히 러시아의 수공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을 계속하면서 러시아의 2대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러시아혁명 후 다시 수도가 된 모스크바는 소비에트시대에 정치 · 문화 · 경제 · 교통의 중심지로서 급속하게 발전했고 1991년 이후에도 러시아연방의 수도로서 세계적인 거대 도시이다.

 모스크바의 중심에는 크렘린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소비에트정권의 불가해하고 무시무시한 힘을 상징한 크렘린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소비에트정권의 중추임에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비밀에 쌓여 있었다. 그래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을 크렘린이라 부르기도 한다. 크렘린이 공개된 것은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이다.

 

 2.4km 길이의 성벽에 둘러싸인 크렘린은 면적이 28만 3000㎡이고 성벽 중간 중간에는 18미터자리 뾰족탑들이 세워져 있다. 크렘린 내부에는 러시아정교회 대주교와 황제의 궁전, 성당 그리고 20세기에 세워진 행정기관들이 들어서 있고 그 주위에는 붉은 광장, 성바실리성당이 있다. 크렘린은 권력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세기 세계를 좌지우지할 만한 막강한 정책들이 은밀하게 계획되고 실행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크렘린은 1156년 처음 축성되었는데 당시에는 목재건물들이 오크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었고 면적은 지금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크렘린은 화재로 무너지고 다시 확장되는 과정을 자주 반복했다. 1367~1368년 드미트리 톤스코이 대공이 흰색 벽의 거대한 요새와 높은 탑들을 세웠는데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흰색 담의 도시’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렘린이 현재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차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한 독재자 이반 3세(Ivan Ⅲ, 1440~1505) 치하 때부터이다. 이반 3세는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기 위해 크렘린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1460년대 들어 크렘린의 석회암 성벽은 파손 상태가 심각해 붕괴할 위험에 처했다. 이반 3세는 자국 건축가들에게 보수시켰지만 결국 이탈리아 건축가들을 불러들여야 했다. 이탈리아 건축가들은 성벽을 길이 223m, 두께 3.5~6.5m, 높이 8~19m로 확장했고 '제비꼬리' 모양의 독특한 이탈리아식 총안(銃眼)을 도입해 방어기능이 주였던 요새를 왕조의 중요한 근거지이자 동방정교회의 요람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반 3세는 러시아 통일을 거의 완성했고 중앙집권화와 군주권 강화를 통해 독재자로 군림했다.

 

 그 후 1571년 크렘린은 타타르족에게 파괴되고 약탈당했지만 1624~1723년에 주요 건물들이 또다시 증축되었다. 그런데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후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략했다. 이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크렘린은 큰 위기를 맞았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탈출하면서 크렘린을 완전히 파괴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폴레옹의 명령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때 파괴된 크렘린은 1838~1849년 보수되는 동시에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크렘린은 붉은 성벽이 감싸고 있는데 성벽은 다시 북서쪽의 네그린나야강, 북동쪽의 해자, 남쪽의 모스크바강에 둘러싸여 있다. 현재 네그린나야강은 알렉산드로프스키 공원 밑으로 흐르고 있고 볼리사야 카멘니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이 강이 모스크바강으로 흘러드는 것을 볼 수 있다.

 

 트로이츠카야 탑을 지나면 궁전병기고· 무기고· 하얀색의 크렘린대궁전이 나오며 대통령관저·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대궁전을 지나면 12사도교회· '차르의 대포'· 이반대제의 종루· 차르의 종· 아르항겔리스키성당· 우스펜스키대성당 등이 나타난다.

 

 12사도교회는 17세기에 총대주교관저의 일부로 건설한 것이다. 이 대형 벽돌 교회는 원래 사도 빌립보에게 봉헌된 것인데 그는 이반 4세의 공포정치에 반대하다가 순교했다. 교회의 설계와 세부 장식은 석회석으로 건설한 블라디미르교회에서 차용했다.

 

 아르항겔리스키성당은 대천사 미카엘에게 바친 최초의 석조 교회로 이탈리아적인 특징이 강하지만 그와 동시에 십자가가 새겨진 러시아 전통 교회양식도 보여준다. 이곳은 역대 황제와 귀족들의 유체 안치소인데 총 48개의 관이 성당 곳곳에 놓여 있다. '뇌제' 이반 4세의 관도 이곳에 있다.

 

 러시아정교회 중앙 성당인 ‘우스펜스키대성당’은 1498년부터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된 곳인데 수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된 다음에도 계속되었고 중요한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곳에 모스크바 총대주교와 대주교의 시신이 안치되었다.

 

 이어서 그라노비타야궁전 · 블라고베시첸스키성당 · 테렘궁전을 볼 수 있다. 블라고베시첸스키성당은 다른 교회에 비해 러시아 색채가 강하며 이콘화와 요한묵시록을 소재로 한 프레스코화가 유명하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 · 플라톤 등과 모스크바 제후들의 초상화가 주랑 기둥 벽에 장식되어 있다.

 

 블라고베시첸스키성당 뒤로 크렘린대궁전이 있는데 황제는 4층에 거주했다. 옥좌가 있는 방의 가운데 창을 ‘탄원의 창’이라고 하는데 이 창밖으로 늘어뜨린 긴 천 끝에는 상자가 매달려 있었다. 탄원할 것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그 내용을 적어 이 상자에 넣음으로써 황제에게 직접 탄원할 수 있었다. 이 궁전은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때 소실된 후 1838~1849년 재건되었다. 700여 객실은 2만여 개의 촛대로 장식돼 있으며 가구 · 샹들리에 · 융단 · 회화 · 조각 등의 걸작이 전시되어 있어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호화로움에 떨어지지 않는다. 1934년 개축 때에는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소련최고회의장(현 러시아국회의사당)과 중요한 방 몇 개가 만들어졌다. 그 방 중 가장 화려한 곳은 게오르기 훈장의 방이다.

 

 크렘린을 두고 러시아의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크렘린, 벽돌을 맞물려 쌓은 성벽, 그 어두운 통로, 그리고 그 화려한 궁전들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가슴과 상상력에 건네는 말을 우리는 단지 보고 또 보고 느낄 뿐이다."

 

 크렘린에서 권력의 최고 상징은 2단으로 된 높이 60미터의 ‘이반대제의 종루(鐘樓)’이다. 1505년 건축이 시작되어 1508년 완공되었다. 당시 모스크바에는 이 종루보다 높은 건물이 없었는데 그것은 종루보다 더 높은 건물을 세울 수 없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종루는 수차례 화재와 재난을 견뎠는데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당시 프랑스군의 포격으로 인접한 건물 두 채가 무너졌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높이 6m에 무게 220톤이나 되는 '차르의 종'은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촬영 장소 중 하나다. 이 종을 주조할 당시 화재가 발생했는데 누군가가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리는 바람에 종에 금이 가서 일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 당시의 참사를 되새기기 위해 종을 받침대 위에 얹어놓았다. ‘차르의 대포’ 역시 불운의 상징이다. 16세기 말 제작된 이 대포는 구경 890밀리미터, 무게 44톤으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대포지만 단 한 번도 쏘아보지 못한 채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크렘린 북동쪽의 붉은 성벽, 붉은 벽돌로 만든 국립연사박물관, 굼 백화점, 둥근 양파처럼 생긴 성바실리성당으로 둘러싸인 붉은 광장도 빼놓을 수 없다. 붉은 광장의 넓이는 7만 3000제곱미터에 이른다.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은 소비에트정권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크라스나야(krasnij)'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본래 '아름답다'는 뜻이었는데 근래 ‘붉은’으로 뜻이 바뀐 것이다. ‘화재의 광장’, ‘교역의 광장’으로 알려져 있는 붉은 광장의 중심에는 화강암 건축물인 레닌영묘가 자리하고 있다. 레닌의 묘에는 사망한 모습 그대로 방부 처리된 레닌이 잠자고 있다.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모습의 성바실리성당은 붉은 광장에서 눈길을 끄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돌로 만들었지만 그 형태와 색채의 어울림이 기이하면서도 환상적이고 혼돈스럽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는 정확하게 설계된 건축물이다. 이 성당은 이반 4세가 타타르족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건설한 것으로 당시 평민들로 붐비던 크렘린 외곽의 중앙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바실리라는 성당 이름은 이반 4세에게 큰 영향을 준 수도사 바실리에서 따온 것이다. 성바실리성당 앞에 설치된 기념비는 17세기 초 폴란드 · 라트비아의 점령에 대항한 미닌과 포샤르스키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다. 이 역시 외세 침략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는 것이다. 19세기 말 건설된 역사박물관은 크렘린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준다.

 

 역시 19세기 말에 건설된 굼 백화점은 모스크바의 또 다른 상징이다. 유리 지붕과 정면부로 이루어진 이 거대한 구조물은 6500평방미터에 달하는 지대에 다리와 보도로 연결된 다섯 개의 평행 통로가 있다. 아라비아의 시장 ‘바자르’를 닮았으며 150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는 굼 백화점은 백화점이라기보다는 상가에 더 가깝다. 공산주의가 절정기였을 때 굼에서 돈을 쓰는 것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볼프강 쾨펜(Wolfgang Koppen, 1906~)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복도 · 휴게실 · 계단 등지에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긴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여기는 분명 사회주의사회이다. 구매자들 대부분 줄을 서 있는 동안 책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을 사려고 줄을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독일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가 모스크바를 떠나면서 쓴 글은 크렘린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도시 가운데 가장 무계획적으로 편의에 따라 그때그때 지어졌으므로 서로 맞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바로 이 부조화가 이 도시를 전대미문의 멋진 도시로 만들어놓았다."

 

 러시아인들의 크렘린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대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1799~1837)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침내 우리의 목표가 보인다. 위대하고 장엄하며, 흰 벽의 광채로, 황금빛 돔과 십자가의 영롱한 빛으로 그토록 가까이에서 빛나는 모스크바가 우리 앞에 있다. 모스크바. 세차게 러시아의 심장을 사로잡는 이름이여. 그 소리에서 무엇을 말하지 못할 것이며 무엇을 울리지 못할 것인가?"

 

o 개방시간 : 10:00~17:00

o 휴무일 : 매주 목요일

o http://www.kreml.ru/

 

 

트로이츠카야 탑(Troitskaya)

 모스크바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라해도 '크렘린'이다. 러시아 역사와 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스크바의 상징같은 존재, 크렘린을 들어가려면 '삼위일체탑'을 지나야 한다. 크렘린에는 20여개의 탑이 있는데 80m로 가장 높은 붉은 탑이 삼위일체 탑이다. 1685년 건설됐으며 꼭대기에 루비별이 달려있다. 건물하단에는 거대한 타원형 문이 달려있는데 이곳으로 관광객들이 검문을 거쳐 출입한다.

o 개방시간 : 10:00~17:00

o 휴무일 : 매주 목요일

o 입장료 : 350루블

 

 

보는것만으로 겁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대포(The Tsar Cannon)

 1586년 '안드레이 체홉'이르난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주조물로 그렘린의 수호 의미를 담고있는 사격이 불가능한 전시용 대포다. 만들어질 당시 세계 최대규모의 대포로 인정받았다. 대포의 포신은 그 길이가 5m가 넘고 무게만 40톤이 넘는 초대형 대포다. 대포를 얹은 바퀴가 달린 마차와 대포알은 1835년 페레트부르크에서 주조되어 후에 포신에 더해졌으며 대포알의 무게만 1톤에 달한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권력을 상징하는 이반 데제의 종루(The Bell Tower of Ivan)

 이반 대제의 종루는 모스코바에서 가장 높은 탑으로 모스코바에서는 이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권리를 지닌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 러시아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높은 종루를 건설하는 일종의 경쟁이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이 종루는 이탈리아의 건축가인 플리아친이 8면체의 종루를 증설하여 1543년에 완성시켰다. 나폴레옹이 모스코바에서 퇴각할 때 종루를 폭파하도록 명령했으나 다행히 폭파는 면했으며 아직까지도도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종루에는 적의 습격을 알리는 두 개가 종이 있다. 매달려 있는 종중에 무거운 것은 70톤이나 되며 종루의 높이는 81m에 이른다.

 

o 개방시간 : 10:00~17:00

o 휴무일 : 매주 목요일

o 입장료 : 성인-100루블. 학생 50루블

o http://www.kreml.ru/

 

 

황제의 (Tsar Bell)

 크렘린 궁에 있는 황제의 종은 이반 모토린(Ivan Motorin) 과 그의 아들 마이클에 위해 주조된 것으로 지난 1733년~1735년에 주조된 세계최대 크기의 종이다,

 금과 은, 황동, 청동, 주석이 포함된 중량이 202t으로 높이 6.6m 지름이 6.1m에 이른다,

 종의 표면에는 짜르 '알렉세이'와 여제 '이바노프'의 초상과 종의 유례를 기록하고 있으며, 5개의 종류의 문양이 장식된 세계적인 걸작이다.

 일명 황제의 종은 1737년 모스크바 대화제 때 강한 연기가 달아오른 종루에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찬물이 종의 일부분에 집중적으로 접축되어 열이 급랭하면서 깨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깨진 조각만도 11.5t이다.

 

 

12사도 사원(The Patriarch's Palace and The Twelve Apostles' Church)

 니콘 충주교에 의해 1655~1656년에 건축된 교회. 그는 이탈리아 등 외국의 영향을 미치는 것을 싫어해 러시아풍으로 교회를 지은 후 총주교의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이 사원은 5개의 돔으로 은으로 덮혀있고 1963년부터 응용미술, 보석, 가구, 손으로 쓴 출판물 등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모승천 사원(Dormition Cathedral, The Assumption Cathedral, 우스펜스키 사원)- (건축기간 1475~1479)

 성모승천사원은 수세기에 걸쳐 러시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의 증인이 되어 왔다. 여기서 국왕들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정교회 총주교들이 선출되었으며, 전쟁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회를 가졌고, 승리한 뒤에는 감사하는 기도회를 가졌으며, 국가 문서 및 명령서를 발표하였고, 대주교 및 총주교들이 장례를 치렀다.

 

 러시아 최고의 사원으로 모스크바 대주교 및 총주교들의 시신을 모신 사원이다.

 

 남문은 사원의 정문으로 황족들이 이용하던 문이었다, 금장식이 박힌 청동문을 통해 사원으로 들어갔는데, 문 위쪽에는 '블라디미르의 성모'가, 그 위에는 여섯 명의 성자들이 그려져 있으며, 문주변에 아치형의 기둥들이 몇 겹으로 세워져 있다.

 

 성모승천사원의 프레스코화는 미하일 표도로비치 황제의 지명에 따라 제작되었는 데, 성상화가 150명이 총 250여 가지의 에피소드를 그리고, 2000여 명의 인물화를 그렸다. 천장에는 12개 종교명절과 관련된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벽의 가장 윗단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일생이 묘사되어 있고, 둘째와 셋째 단에는 성모의 일생과 성모를 찬양하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하단에는 7대 공의회가 묘사되어 있고, 서쪽 벽에는 정교회 전통에 따라 최후의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성모승천사원의 건축양식은 러시아의 일반 건축양식과 구분된다. 전통적인 러시아건축양식 요소들과 이태리 문예부흥기 건축양식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원의 외형은 단순 간결한 것이 특징이다. 5개의 거대한 돔 지붕들이 있고 전면의 벽은 동일한 크기로 구분되어 있으며, 위쪽 다락 벽은 아치형으로 마감되었다. 벽 중앙에는 실린더 형태의 문양들이 벨트처럼 연결되어 있고, 다섯 개의 돌출된 반원형 건물들은 거대한 기둥들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이 건물들의 위쪽 반달형 벽 세 개에는 '성모찬양',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지혜 성소피아' 성화들이 그려져 있다.

 

 성모승천사원에서 국가 차원의 경축행사와 예식을 거행하였다.

 바실리3세, 이반 뇌제 등 황가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진행되었고,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는 자녀들의 세례식을 거행하였다. 왕자들이 10살이 되면 성모승천사원에서 황세자로 책봉하였으며, 1744년에는 예카테리나 2세가 정교회 세례를 받았고, 미래의 황제인 표트르 3세와 약혼하였다. 1812년에는 알렉산드르 1세가 성자들의 유골에 손을 얹고 나폴레옹군을 격퇴할 것을 맹세하였다.

 

 대관식은 러시아의 국가적 대사로 15세기 말부터 19세기말까지 거행되었다. 초기 대관식을 주관한 사람은 대주교였으나, 후에 총주교가 주관하기 시작하였다. 성모승천사원에서 거행한 최초의 대관식은 1498년이고, 이반 3세가 손자인 드미트리에게 왕위를 넘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러시아제국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은 1896년에 있었다.

 

 

성모수태고지 사원(Cathedral of the Annunciation) - (건축기간 1484~1489)

 성모수태고지 사원(Cathedral of the Annunciation)은 황금색 지붕과 9개의 돔들이 가장 반짝이는 화려한 모습을 가졌다. 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 잉태를 알려 주었다는 수태 고지의 뜻을 담고 있는 성당이다.

 

 성모수태고지 사원은 1484-1489년에 메트로폴리탄 법정에 성모 교회를 세우신 프스코프 돌층에 세워졌다. 대성당은 대성당의 남서쪽 코너에 위치해 있다. 대성당은 위대한 왕자의 재산의 주요 매력이다.

 그것은 높은 포클렛(podklet)에 제기하고 덮는 방법으로 궁전과 연결되어 있다. 1416년 대성당이 확장되어 삼중 체형이되었다. 포클렛의 벽은 새로운 흰색 석조물에 의해 두 배 더 두껍게 만들어졌다.

 

 이반 3세 시대에 크렘린을 재건하는 동안, 프스코프 대가들은 대성당을 깍지의 수준으로 분해하고 새로운 벽돌을 세웠다. 작은 큐브 대성당은 3개의 돔으로 관을 씌웠다. 그 중 2개는 동쪽 모서리에 배치되었다. 대성당의 성벽은 용골 모양의 자코 마라를 얹은 아치형 칼럼으로 장식된 3개의 큰 진달래로 나누어졌다. 드럼은 프스코프(Pskov) 건축 양식의 아치와 삼각형 구멍이있는 벽돌로 장식되었다. 1484-1489의 성당이 건물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성모수태고지 사원은 모스크바 모스크바 크렘린 박물관에서 가장 자주 방문한다. 여기에서는 16세기의 독특한 벽화와 귀중한 다층 이콘의 벽(이코노스타시스, iconostasis), 유명한 아이콘 화가인 Theofan the Greek, Gorodets의 Prokhor 및 Andrei Rublev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deesis 및 축제 행렬을 볼 수 있다.

 

 1562~1564 년에 네 개의 돔 모양의 채플이 갤러리의 모서리에 부착되었고 두 개의 틀린 돔이 추가되어 대성당이 지금처럼 9개의 돔 모양이되었다. 돔과 지붕은 금박으로 덮여 있었고 대성당은 '금상'이라고 별명을 붙였다.

 

 1993년부터 정기적인 신성한 봉사가 성당에서 재개되었다.

 

 

대천사 사원(Cathedral of the Archangel, 대천사미가엘교회) - (건축기간 1505~1508)

 대천사 사원은 러시아군의 수호천사인 미가엘 천사장을 위해 만든 것이고, 모스크바공국의 대공 및 봉건제후들, 그리고 초기 러시아제국 황제들의 모덤으로 이용되었다

 

 대천사 사원의 건축양식을 보면, 고대 러시아와 이태리 건축양식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원은 다석 개의 돔지붕으로 되어 있고, 전면양식은 전형적인 이태리 문예부흥기의 모습을 하고 있다. 코니스(돌림띠)가 벽을 2단으로 나누고 있는데, 하단은 아케이드 모양으로 장식되고 있고, 상단은 패널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치형 지붕은 조개 껍데기 모양을 한 백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벽 기둥은 아름다운 조각무늬가 있는 기둥머리로 장식되었다. 서문 중앙의 아치형 다락은 메달처럼 작고 둥근 창문들로 장식하였고, 서문과 북문은 식물문양이 조각된 백석으로 장식하였다.

 

 사원 내부는 이태리 건축가 알레비즈 노비에 의해 거대한 기둥들로 장식되었는데, 이 기둥들은 높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4개의 기둥들이 본당을 세 구역으로 구분하고 있고, 제사를 지내는 지성소와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성소는 성화벽으로 구분되어 있다.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개이며, 그 중 둘은 백석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대천사 사원의 황족들의 묘(종묘)는 러시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황족 묘지이다. 대천사 사원이 종묘로 이용된 것은 1340년부터 1730년까지이고, 시신이 든 관을 땅(사원 바닥 아래)에 묻고, 그 위에 백석으로 만든 묘비를 세웠다. 대천사 사원에 장사된 황족은 총 46명이고, 그 중 가장 오래된 관들은 남쪽 벽에 있는데, 예를 들어 이반 칼라타 공과 드리트리 돈스코이 공, 이반 3세 등이 매장되어 있다. 가장 오랜된 관은 이반 1세 관이다. 서쪽 벽에는 봉건제후들이, 북쪽에는 권력에서 말려난 왕족들의 유골이 안치되어 있다. 이반 뇌제와 그의 두왕자들은 특별히 성물보관실에 마련된 묘에 안장되었고, 로마노프 왕조 형제들의 묘는 기둥들 근처에 있다.

 

 대천사 사원이 류릭 왕조와 로마노프 왕조의 무덤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반1세가 처음 석조사원을 건축하고 사원에 장사된 1340년부터이다.

 

 

 

붉은 광장(Red Square, Krasnaya Ploshchad)

 국립 역사 박물관과 백화점과 바실리 사원등 볼 것이 많은 곳이다. 고대 러시아어로 아름다운 이쁜이라는 뜻으로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불리워졌으나, 혁명기념일에는 온통 광장이 붉은색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지금은 붉은 광장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살아 있었을 때 그대로의 모습인 레닌의 묘와 바실리 사원 모스크바 최대의 백화점등을 볼 수 있다. 넓이는 73,000㎡이며 붉은 광장은 처형·시위·폭동·열병·연설 등의 무대가 되어왔다.

 크렘린의 정동쪽, 모스크바 강의 북쪽에 있다. 1812년 크렘린과 광장 사이에 해자를 둘렀다.

 광장의 북쪽 끝에는 1875~81년에 건립된 '국립역사박물관'이 있다. 남쪽 끝에는 1555~60년에 건립된 8개 탑이 있는  상트바실 대성당(처음엔 '중재의 성당'이라고 했음)이 있다. 동쪽에는 국영백화점인 굼(GUM)이 있으며, 서쪽에는 1930년 완공된 레닌 영묘가 있다. 레닌 영묘 주위의 다른 묘들은 크렘린 성벽 측면에 맞닿아 있다.

 러시아어로 "붉다"는 "아름답다"는 뜻도 갖고 있다. 17세기 때부터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며, 지금과 같은 모습(길이 695m, 평균 폭 130m)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다.

 1930년 광장을 포장한 자갈을 석판으로 바꾸었으며, 1818년 중앙에 세운 미닌·포자르스키 기념비는 열병 및 시위를 위한 공간확보를 위해 상트 바실 대성당 앞으로 옮겼다. 노동절(5. 1)과 10월 혁명기념일(11. 7)의 연례 행렬은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가장 유명한 행사이다.

 

 

러시아 국립 역사박물관(State Historical Museum)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과 마네지광장(Manege Square) 사이에 있는 국립역사박물관(State Historical Museum)

 4개의 탑이 있는 붉은 벽돌의 건물이다.

 원래는 미하일 로모노소프(Mikhail Lomonosov)가 세운 모스크바 국립대학교(Moscow university)의 학교건물이 있었으나, 1875년~1881년에 영국인 블라디미르 셔우드(Vladimir Osipovich Shervud)와 세묘노프가 설계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하였다.

 1872년 이반 자벨린(Ivan Zabelin), 알렉세이 우바로프(Aleksey Uvarov) 등에 의해 건립되어 개인의 기부금으로 유지해 오다가 러시아혁명 뒤에 국립으로 개편되었다. 석기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의 러시아 역사에 관한 전시품이 있다.

 

 

부활의 문(The Resurrection Gate, Воскресенские ворота, 바스크레센스키 문)

 붉은광장으로 들어서는 부활의 문 17세기에 세워졌는데, 스탈린 시절 전승기념일(5월 9일) 대열병식 때 방해가 된다고 파괴되었다가 1995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붉은 광장 입구인 부활의 문앞 광장 바닥에 만들어놓은 둥근 원은 모든 도로의 시작점을 나타내는 '모스크바 도로 원점' 표지판으로 소원을 빌면서 뒤로 동전을 던져 동전이 원안에 들어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얘기가 있다. 

 

 부활의 문 앞에는 작은 예배당 '이베트스카야(YvetteSkaya)'가 있으데, 이 예배당에는 러시아 정교회의 예수와 성모 등을 그린 '이콘화'로 유명하다.

 

 이 문을 나오면 바로 왼쪽에 카잔성모성당이 있다. 

 

 

 

모스크바 카잔 성당(Kazan Cathedral)

 붉은 광장의 니꼴스까야 거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1612년 폴란드의 침입을 막은 것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세워졌다.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 북동쪽에 있는 '카잔 성당(Kazan Cathedral) '은 소련 붕괴 직후인 1993년 러시아 정부가 최초로 복원한 정교회 성당이다.

 1625년 처음 지어진 이래 수 차례 소실과 복원, 증축을 거쳐오다 1936년 군중집회 기간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파괴되었다. 

 

 모스크바 카잔 대성당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은 좀 달랐다. 모스크바 카잔 성당은 성 바실리 성당 일부만 있는 것 같은 양파 모양이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은 미국의 국회 의사당 같은 모습의 코린트식 건물이었다.

 

 

레닌 묘(Lenin's Tomb)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다. 1930년에 완성된 벽돌빛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계단을 내려가면 레닌의 유해가 커다란 유리상자 속에 정장 차림으로 누워 있다. 레닌의 시체를 방부처리하여 오랜기간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의 살아있는 듯한 모습을 남겨주기 위하여 공개한것이다. 실제로 마치 평온한 낮잠을 자고 있는듯 당장이라도 깨어 날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레닌의 묘를 가운데에 두고 그의 육신을 비춰주는 스탠드가 양쪽에 서있고, 그 뒤쪽으로는 10월혁명 때 숨진 노동자와 병사의 무덤이 있다.

 레닌 묘의 바로 뒤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큰 획을 그인 인물들이 누워있는데, 역대 소련공산당 서기장들인 스탈린·브레주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초대 KGB 의장인 제르진스키의 묘가 있다.

o 휴뮤일 : 매주 월요일

o 입장료 : 무료

o http://www.leninology.com/

 

 

러시아 최대의 (Gum) 백화점

 붉은 광장 내 레닌 묘 맞은 편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베이지 색의 건물이 러시아 최대의 국영백화점인 굼(Gum)이다. 1890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지만 1950년대에 대폭적인 수리가 이루어져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최고급 백화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3층 높이의 이 건물의 1, 2층에는 200여점에 이르는 최고급 외제산 상점들이 위치하여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o 개방시간 : 10:00~22:00

o http://www.gum.ru/

 

 

 

성 바실리 성당(St. Vassily's Cathedral)

 붉은 광장 진입로로 들어서는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아 버리는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는 성바실리 성당. 200여년간 러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몽골의 카잔 한(汗)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반 4세-러시아의 황제(재위:1533∼1584)-의 명령으로 지어진 건축물로, 사원의 이름은 이반 대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수도사 바실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555년에 착공해 1561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자 이반 대제는 그 아름다움에 탄복, 더 이상 이와 같은 성당을 짓지 못하라는 뜻으로 설계자인 포스토닉과 바르마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각양 각색의 색채와 무늬를 자랑하는 9개의 양파형 돔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그리스 정교 사원은 가장 러시아적이면서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특색있는 건축물로 정평이 나 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 바실리 사원 앞에는 1612년, 폴란드의 침입으로부터 모스크바를 지켜낸 니즈니 노브고르드 출신의 정육점 주인 "미닌"과 수즈달의 대공이었던 "포자르스키" 두 사람을 기념하는 동상이 서 있다. 원래 광장의 한가운데 서 있던 이 동상은 1936년, 붉은 광장에 레닌의 묘가 들어서면서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 

 

 

꺼지지 않는 불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성벽에는 붉은광장 안에 있는 레닌등 사회주의 혁명 공로자들의 묘비외에도 2차대전 독소전쟁 때 희생된 많은 무명용사를 기리는 묘역이다.

 붉은광장을 나와 전면의 마네쥐광장을 보고 좌측 크레믈린 성벽을 따라 크레믈린궁 입구까지 조성된 공원이 알렉산드로프 공원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순국선열들을 위한 묘역을 별도로 두고 있지만 몇몇 나라들은 그 묘역에 꺼지지 않는 불을 조성해 호국영령들에 대한 충정을 되새기고 있다.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의 '영원한 불꽃(Eternal Flame)', 프랑스 개선문의 '기억의 불꽃(Flame of Remeberrance), 카나다 국회의사당 광장, 인도 델리의 인디아 게이트 한가운데 꺼지지 않은 불, 그리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로프 공원의 불꽃 등이다.

 24시간 365일 내내 타오르는 '꺼지지 않는 불꼿'도 몇몇 나라에서는 애국심과 군인들을 기리기 위해 설치되어 있다. 희생된 러시아 군인들을 위한 이 불꽃이 유명한 이유는 불꽃보다는 이 앞에서 행해지는 러시아 근위병의 교대식 때문이다.

 

 

 

◈ 러시아 최대의 문헌보관소 러시아 국립 도서관(Russian State Library)

 러시아 국립 도서관(Russian State Library)은 1862년 개장한 이래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모스크바에 있다.

 모스크바에 있는 러시아 국가도서관(Russian State Library)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에 위치하고 있는 러시아 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 of Russia)과 함께 러시아를 대표하는 도서관이다.

 

 러시아 국립 도서관은 1862년 7월 1일, 당시 모스크바 시내에 있던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루먄체프 백작이 세운 루먄체프 박물관의 일부로 창설되었다. 창설될 당시 이름은 '루먄체프 박물관'과 함께 '모스크바 공공도서관 및 루먄체프 박물관', 혹은 '루먄체프 도서관'으로 불리었다. 따라서 당시 도서관에서는 책과 함께 박물관에 전시된 예술품도 같이 볼 수 있었다. 도서관이자 박물관 건물이었던 파쉬코프 돔에는 약 200여 점의 그림과 2만여부의 책이 있었으며, 몇몇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박물관 개장식 때 러시아의 유명화가였던 알렉산드르 이바노프가 그린 '민중에게 나타난 그리스도'를 기증했다.

 

 

 시민들의 재정적 지원과 기증을 받아 박물관은 급속도로 성장했으며, 따라서 서유럽의 그림들이나 오래된 예술품들을 수집할 수 있다. 얼마 후 파쉬코프 돔의 수용용량이 부족해지자, 박물관 측에서는 두 번째 건물을 박물관 옆에 지었다.

 

 10월 혁명 직후 박물관에 기증된 품목은 방대하게 늘어났으며, 이 때문에 자료를 보관할 장소의 해결이 시급해졌다. 여기에 박물관의 재정 문제가 겹첬고, 푸쉬킨 박물관에서 겨우 재정지원을 받아 유지할 수 있었다. 예술품의 수용문제와 건물 재건축 등의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1925년 루먄체프 박물관은 해체되었으며, 루먄체프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유물이나 예술품들은 푸쉬킨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예술품을 수용하고 있던 파쉬코프 돔은 러시아 국립도서관 구관으로 바뀌었다. 모호바야 거리와 보즈드비젠카 거리에 있던 옛 국립기록보관소 건물은 철거되었으며, 새로운 건물로 다시 지어지기로 결정되었다.

 

 새로 지을 도서관 건물은 설계사인 블라디미르 슈코와 블라디미르 겔프레이흐에 의해 설계되었다. 건축허가는 1929년 허가되었으며, 1930년 건축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작업은 1941년 초에 완성되었다. 건축 과정에서 건물은 신고전주의적 외형을 띄게 되었으며, 1927년 본래 계획했던 것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슈코의 마지막 부분이었던 250개의 좌석을 가진 열람실은 1945년 개관하였으며, 그밖에 새부적인 것들은 1960년 완성되었다. 1968년 건물은 수용 용량에서 한계에 달했으며, 따라서 모스크바시의 힘키 지역에 신문이나 과학 논문, 불필요한 책을 보관하기 위한 새로운 서고를 짓게 되었다. 힘키 도서관은 1975년 완공되었다.

 

  러시아 국립도서관 정문 앞에는 특별한 기념물이 하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 동상이 그것이다. 1997년에 세운 이 동상은 러시아의 대표적인 조각가 알렉산드르 루카비쉬니코프의 작품이다. 도서관 안에는 레닌 동상이 있다.

 이 두 위대한 인물은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 변화에 대한 대립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깊은 곳은 지하 60m까지 내려가야 플랫폼에 닿을 수 있다. 도서관 근처에 지하철역이 있는데 그 역 이름은 아직도 '레닌 도서관'이다. 이 지하철역은 환승역인데다가 모스크바 크렘린과도 가까워서 이용객이 많다.

 러시아 국립도서관은 1988년 후반 국내에 개봉된 영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Moscow does not believe in tears)>를 본 독자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다.

 이 영화는 1979년에 제작된 블라디미르 멘쇼프(Vladimir Menshov) 감독의 작품인데, 영화의 중요한 장면이 이 도서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국립 도서관은 공공 건물로서 러시아 정부가 관리하고 있다. 

 

 

모스크바 구세주 성당(Cathedral of Christ the Saviour (Moscow))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재건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일어난 낭만주의 시기 건물의 복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 중 대성당의 재건은 가장 크고 가장 빨리 완성된 것 중의 하나이다.

 

 크렘린(Kremlin) 서쪽 모스크바강(Moskva R.) 기슭 위에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가 1812년 12월 나폴레옹군의 침략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1839~1883년 러시아의 건축가 콘스탄틴 톤(Konstantin Andreyevich Thon, 1794~1881)이 신()비잔틴 양식으로 건설하였다. 높이 103m로 당시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총 면적 6,805㎡, 본관 돔형 지붕 지름 25.5m이며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성당의 외관은 좌우대칭형이며 다양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건물의 현관 높이에 외벽을 따라 둘러놓은 띠 모양의 돌출부에는 신화적 장면과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묘사한 부조를 새겼고 건물 내부는 수많은 성화들로 장식하였다. 볼세비키 혁명 후 스탈린의 종교 탄압 정책으로 1931년 12월에 폭파되었으며, 성당 터에는 야외 온천풀이 조성되었다. 이후 구 소련이 붕괴하고 종교 복권이 시작되자, 1995~1996년에 국민 성금과 러시아 정부의 지원으로 제단이 있었던 장소에 성당을 재건하였으며, 2000년 5월에 헌당식을 가졌다.

 

 현재의 모습은 시장 유리 루즈코프의 업적과 공산주의 몰락 후 러시아 정교의 득세에 힘입은 것이다. 이 재건 프로젝트는 범용한 건축가들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위험한 선례를 촉발했다. 예를 들어 꼭대기 부분은 가짜 금으로 덮였으며 본래의 석재 장식 디테일은 청동과 플라스틱으로 대체되었고 외부는 대리석 판으로 덮였다.

 

 

 그러나 이 건물의 윤곽 자체만으로도 러시아 역사의 낭만주의적 시기를 상징화하기엔 충분하다.

 

 

루비얀카 광장(Lubyanka Square)

 7~8갈래의 길이 모여 있다. 광장 한 가운데에 동상이 서 있고, 차들은 이 동상을 중심으로 시계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그 동상은 베르진스키로 혁명에 참가하였다가 초대 내무 대신을 지낸 사람이다. 여기에는 KGB본부가 있는데, 광장 북쪽의 8층짜리 크림색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동상은 소련의 붕괴로 철거되었다.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대극장 볼쇼이 극장(Bolshoi Theatre)

 모스크바에서는 세계 일류의 발레, 오페라,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이들은 17,18세기에 서구에서 들어온 것을 바탕으로 로맨티시즘, 리얼리티, 소셜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아 태어난 불멸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술의 한 가운데에 볼쇼이 극장이 있다.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대극장, 약칭 볼쇼이 극장(러시아어: Большой театр, '큰 극장', '대극장(大劇場)'의 의미, 문화어: 볼리쇼이 극장)은 러시아 모스크바에 있는 극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이다.

 구 제실극장으로서 예로부터 알려져 있으며 옛날에는 페트로프스키 극장, 또는 단순히 '오페라의 집'이라 불렀다. 그 기원은 1776년으로 되어 있는데, 세 차례의 화재를 입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1853년 화재를 만나 그 터전에 재건된 것으로, 지금의 8개의 대원주가 정면 현관에 있는 장려한 백악의 건물은 1856년에 완성된 것이다. 수도의 중심인 스벨드로프 광장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지붕 위에 말 4필이 끄는 로마식의 사두전차는 이곳에서부터 세계로 훌륭한 예술을 제공한다는 기개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제정시대 때 이 곳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과 함께 유명하였으나 10월 혁명 후 구소련을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전당으로 군림하였다. 수많은 구소련의 오페라를 초연한 역사가 있으며, 글린카, 알렉산드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차이콥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작품이 샤리야핀, 소비노프 등의 명가수에 의해 이 무대에서 각광을 받은 것처럼, 볼쇼이 극장은 러시아의 오페라· 발레의 요람이며, 음악문화의 중심이었다. 이곳의 250명 정도로 구성된 발레단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완전히 국가의 운영관리로 되어 있는 대극장의 관계자는 약 3,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좌석이 2,171개인 이 극장은 해마다 늘어나는 관객을 수용할 수 없어, 최근에는 크레믈린의 대회궁전(좌석은 5,803석)을 부속극장의 형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승리의 광장 / 전승기념관(World War Victory Museum)

 1985년부터 10년간 건설하여 1995년 5월 전승 50주년을 기해 완공했다. 이곳은 과거 러시아 군대의 출정식과 승리 후 귀환시 기념행사를 하던 곳으로, 나폴레옹 전쟁 후 쿠투조프 장군(Kutuzov, 1745~1813, 나폴레옹을 물리친 러시아의 성장)이 여기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기념관 앞의 탑에는 게오르기라는 러시아정교 승리의 신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격전지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141.7m. 승리의 광장에 우뚝 솟아 있는 승리의 여신 탑.

 아래의 동상은 용을 난도질 하고 있는 모습이다.

 용은 몽고군을 상징한다고 하니 과거 몽고의 침입에 얼마나 사무친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전승기념관은 지하와 1,2층으로 되어 있으며, 2층 에는 전승 5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제작한 칼과 방패가 있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부터 일본의 항복문서에 이르기 까지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2층 중앙 홀은 지름이 50m, 높이가 25m이며, 11만 7천 명의 훈장 수여자들의 명단이 각인되어 있다.

 

 

모스크바 승리의 개선문(Triumphal Arch of Moscow)

 개선문은 전쟁터에서 승리해 돌아오는 황제 또는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으로 이러한 기념문은 고대 로마에 많이 세워졌는데 기본적인 형식은 큰 아치 형태였다. 이러한 전례를 모방하여 후세에 와서 개선문이 만들어졌는데 특히 근대에 국가주의가 대두하자 유럽 여러 곳에서 개선문을 세웠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과 카르셀 개선문 그리고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개선문(도리아식) 등은 대표적인 개선문인데 우리나라도 예전에 서대문 무학제 고개를 넘어오면 한가운데 개선문이 서 있었다.

 

 모스크바 개선문은 러시아가 1812년 1차 조국 전쟁인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문이 바로 모스크바 개선문이다. 나폴레옹이 세계를 제패하려고 제국 러시아를 공격했지만 추위와 프랑스 내부 분열로 인해 승리는 러시아로 돌아갔다. 우리가 잘 아는 개선문은 프랑스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이지만 모스크바 개선문도 이것 못지않게 그 의미가 대단하다. 

 

 모스크바 개선문은 나폴레옹 전쟁에 승리한 기념으로 1834년에 벨리루스키 바그잘에 만든 것을 1968년에 새로 다시 복원한 작품으로 지하철 승리의 공원(Victoria Park) 빠르크바뻬드역에 내려서 길가로 올라오면 끄드조프 대로변 한복판에 개선문이 우뚝 서 있다. 

 

 개선문은 바로 옆에 있는 히틀러와의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공원과 전쟁기념관과 달리 쿠투조프스키대로(Kutuzovsky Ave) 한복판에 서 있다.

 

 

레닌 언덕(참새언덕 : Sparrow Hill)

 모스크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오스탄키노 텔레비젼 중계 탑을 제외하고는 이 레닌 언덕이 제일 높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높아 해발 115m로 우리의 기준으로는 언덕도 아니지만 산(山)을 보지 못하는 모스크바인에게는 산(山)인 것이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날씨가 좋으면 모스크바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주말이면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를 한 신혼 부부들이 이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이 또한 러시아의 결혼풍속도를 알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최근 레닌 언덕이라는 이름에서 1924년 이전에 불려졌었던 참새의 언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스크바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게르첸과 오가료크가 이곳에서 러시아의 혁명가가 되기를 결심한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강 건너 정면에 보이는 루즈니키 경기장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주 경기장을 쓰였으며, 여러 종목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었던 곳이다. 총 수용인원수는 10만 명 정도이다.

 

 

 

모스크바 대학(Moscow State University)

 모스크바 대학의 창설자는 학자 로마노소프이다. 원래 대학 건물은 크렘린 북쪽에 있었으나, 1953년 스탈린 양식의 새 캠퍼스가 완성되면서 지금 장소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높이가 240m이고 정면의 길이가 450m나 되어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다. 중앙의 30층 짜리 건물 부분은 대학의 관리부가 있는 관리탑이고 이 양 옆의 17층짜리 날개 부분은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정식명칭은 'M.V.로모노소프 기념 국립모스크바대학'으로 1755년에 설립되었다. 이 대학에서 배출한 유명한 사람으로는 혁명적 사상가 라디시쳬프, 게르첸, 역사가 그라노프스키, 평론가 벨린스키, 교육사상가 우신스키 등이 있다. 20세기 초두의 사회적인 변혁기에는 학생운동의 고조로 창설당시의 학부는 철학, 법학, 의학 등의 3개 학부에서 혁명 후 대폭 증설하였다. 1987년에 공학, 수학, 컴퓨터 수학 및 사이버네틱스, 아시아, 아프리카 국제연구소를 비롯하여 각종 부속 연구소와 도서관을 갖게 되었다. 교수의 총 수는 8,000여 명 이상이고, 그 중 1,000여 명이 박사학위 이상을 가지고 있다. 대학 건물은 구 교사가 마르크스 거리와 게르첸 거리에 면한 도심에 있고, 신교사는 1949년부터 1970년까지 건설되었다. 관광객들이 찾는 본관 건물은 높이 240m의 32층 건물로서 정면의 길이는 450m이고, 4500개의 강의실이 있으며, 이 건물을 다 둘러보려면 145km를 걸어야 한다. 건물은 스탈린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아주 웅대한 느낌을 받는다.

o http://www.msu.ru/

 

 

푸쉬킨 박물관(The Pushkin Fine Arts Museum)

 푸시킨 박물관은 1898년 짓기 시작하여 1912년에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페테르부르크에 이어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유럽의 예술품들을 모아 놓은 박물관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많은 수집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의 그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단연 반고흐(Van Gogh)의 빨간 포도 동산(Red Vineyard at Arles)이다. 그 그림은 그가 그의 생애에서 팔았던 단 한 점의 그림이다. 그 외에도 피카소와 다른 유럽 거장들의 작품들이 많이 있다.

 

 이 소장품들은 학생들의 시각 교재로서 큰 효용이 있다.

o 정기휴일: 월요일

o 개관시간: 화-일요일10:00-19:00

 

※ A.S. 푸쉬킨(Aleksandr Sergeevich Pushkin : 1799.6.6∼1837.2.10)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국민문학의 창시자이다. 유서깊은 명문 귀족집안에서 태어나 1811년 차르스코에셀로(지금의 푸슈킨시)에 개설된 귀족학교 리체이에 입학, 자유주의적 교풍 속에서 1814년 <나의 친구, 시인에게>를 발표하여 문학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처음엔 선배이자 낭만주의 시인인 K.N.바튜슈코프, V.A.주코프스키 등 17.18세기 프랑스 시인들의 시풍을 따랐다. 1817년 리체이를 졸업하고 외무성에 근무하며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적 사상가 P.Y.차다예프와 사귀고, 러시아 전제정치를 타도하려 한 무장봉기단체 데카브리스트의 그룹에 참여하는 등, 농노제 타도 정치사상이 확고해졌다.

 데카브리스트의 사상에 공명하여 자유를 사랑하는 내용의 송시 <자유>(1817), 농노제 붕괴를 예언한 <농촌>(1819) 등 일련의 과격한 정치적 시를 써서 남러시아로 추방되었다.

 G.G.바이런의 영향을 받은 그는 그곳에서 <카프카스의 포로>(1822), <도둑 형제>(1821∼22), <바흐치사라이의 샘>(1821∼23) 등의 작품 소재를 얻었다. 1820년 러시아 민간전승에서 취재한 동화풍 담시 <루슬란과 류드밀라>를 발표하여 젊은 세대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 작품인 <예프게니 오네긴>을 쓰기 시작한 1823년 무렵에는 낭만주의 한계를 의식하게 되었으며, <집시>(1824)에서 바이런적 주인공에 대한 비판의 눈길로 개인과 사회, 자유와 운명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24년 무신론을 긍정한 편지가 압수되면서 미하일로프스코에 마을에 연금된 동안, 비극시 <보리스 고두노프>(1825), 풍자적 서사시 <누손백작>(1825) 등을 완성하였다. 그는 고독하고 불우한 유폐생활을 통해서 사상적.예술적 성장을 하게 되고 러시아 국민시인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26년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특사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그뒤 만년까지 관헌의 엄중한 감시와 검열을 받았다. 아버지가 물려준 땅 니제고르드주에 갔을 때 콜레라로 발이 묶인 3개월이 창작의 정점을 이루는 시기가 되었는데, 단편소설집 <벨킨 이야기>, 4편의 작은 비극 <돌의 손님>, <인색한 기사>,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질병 때의 주연(酒宴)> 등 50편의 작품을 썼으며, <예프게니 오네긴>의 기본적 부분도 이때 완성되었다.

 나탈리야와의 결혼은 비극의 시작이 되었다. 궁정행사에 그녀가 참석하기를 바라는 황제에 의하여 푸슈킨은 시종보로 임명되었다. 이는 창작하는 시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세속권력과의 충돌 속에서 역사적 시야를 확대해 간 그는 표트르대제의 공적을 기리면서 그 희생이 된 페테르부르크 소시민의 비극을 묘사한 서사시 <청동의 기사>(1833), 소설 <스페이드 여왕>(1834), 역사소설 <대위의 딸> 등을 발표했다. 1937년에 자신의 아내와 염문을 일으킨 프랑스인과의 결투 도중에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 놀이공원 베베쩨(All-Russian Exhibition Center)

 소련시절 대외적으로 소련의 경제와 과학기술의 위상을 홍보하기 위해 지은 전시장이다.

 현재는 문화행사장으로 사용되고있고,  놀이공원도 조성되어 모스크바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인기 있는 곳이다.

 

 모스크바 북동쪽에 위치한 '베.데.엔.하(소련 국민경제달성 박람회)'역에 위치한 '베.베.쩨(ВВЦ)'는 과거 소비에트 공화국시절에 시작된 러시아 최대 박람회장이자 무역전시장이다. 소비에트 공화국은 경제적인 업적에 대한 대외 선전수단과 농업, 상업적인 교류를 위해 이 박람회를 영구적으로 진행했었다.

 현재는 경제관련 박람회장이라기 보다는 관광지의 개념이 조금 더 강하겠다. 이 박람회장은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지하철(오렌지 라인, 6호선, 깔루쥐스꼬-리쥐스까야 라인)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전체 2,375㎢의 대지에 조성되어 있다.

 

 

o 운영시간 : 08:00~23:00

o 요금 : 무료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미술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Tretyakovskaya Gallery)

 고르끼 공원 근처에 위치한 트레치야꼬프 미술관은 1892년, 트레치야꼬프라는 상인이 수집한 약 4000점의 작품들을 진열용 건물과 함께 정부에 기증한 것을 시작하여 현재는 약 5만점이나 되는 명작들이 50개가 넘는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다.

 혁신적인 사실예술의 깊은 이해자였던 트레티야코프는 1870년대에 일어난 러시아민주주의 미술운동의 후원자로서, 페로브, 쿠라무스코이, 레핀, 수리코프, 레비탄, 세로프 등의 많은 주요 작품을 수집하였다.

 러시아혁명 후 1918년에 국유화되었다.

 14세기 말에 활약한 천재화가 안드레이 루블료프의 걸작 "삼위일체"를 포함, 주로 11세기 이후 제정 러시아 시대의 화려한 미술품들이 많다.

- 정기휴일: 월요일

- 개관시간: 화-일요일10:00-18:30

- 지하철역: 뜨레치야꼽스까야, 빨리안까

 

 

올림픽 스타디움(The Olympic Stadium)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여러 종목의 운동 경기가 행해졌던 곳이다.

 레닌 중앙 스타디움은 그 메인 스타디움으로 10만 3천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경기장이다.

 

 

젊은 음악가들이 모인 곳, 콘세르바토리(Conservatory)

 콘세르바토리는 피아노의 거장 리흐테르가 사사를 받았던 차이코프스키 기념 모스크바 음악원이다. 약 1세기 전에 루빈슈타인이 창설했고, 차이코프스키가 12년간이나 젊은 음악가들을 지도한 곳인 이곳에는 길이 8m, 무게 20톤이나 되는 유럽 최대의 오르간이 있다. 실력있는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유명한 클래식 음악들을 감상하고 싶다면 꼭 권하고 싶은 곳이다.

o 전철 : 아르바츠까야역에서 하차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Arbat Street)

 우리 나라로 보면 명동 거리와 같은 곳으로 입구에서 외무성 건물까지 약 2km정도이다. 거리가 생긴 것은 15세기이며 더 유명한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이 거리 No.53의 2층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아르바트 거리는 귀족들의 저택이 한적하게 들어서 있던 곳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주변으로 각종 전문 직업인들이 모여들어 골목마다 목공골목, 대장간 골목, 과자와 빵 골목, 음식점 골목, 식탁보 골목 등의 이름이 붙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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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바트는 번화한 거리로 변모하여 한쪽에서 소규모의 악단이 연주를 하는가 하며,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에는 지금 거의 외국 브랜드 상점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 등이 있어 러시아의 현주소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이 가장 먼저 인 곳이자,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을 주도했던 곳이기도 하다. 모스크바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거리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혼이 숨쉬는 곳이다. 무명화가들의 고향이자 이름없는 화가, 연극배우, 가수들의 안식처이자 전시장이고 무대이며 히피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1988년 "아르바뜨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이 국내에 소개됐고,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었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재즈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그림처럼 지나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무명화가들, 배우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소년들,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친구들, 연인들, 모두 풋풋한 젊음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유 영혼이 숨쉬는 아르바트 거리 한쪽에는 우리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바로 '빅토르 초이! 아르바트 거리 한쪽, 길이 100m가 채 안되는 골목에는 빅토르 초이의 성전(?)이 있다. 이 골목은 초이가 무명가수일 때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후 이곳은 초이를 위한 성전이 되었다. 골목 담벼락에는 초이를 기리는 낙서들과 사진으로 가득했다. '초이를 사랑 한다.' '초이는 영원하다'... 같은 내용들이라고 한다. 한 구석에는 누가 갖다두었지 싱싱한 장미꽃이 한다발 놓여져 있고, 담배불이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3세로 아버지 쪽이 고려인이다. 락밴드 '키노'를 이끌었고 글도 쓰고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를 사랑했던 초이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출연까지 했었다. 그의 노래 모두는 4장의 앨범으로 나왔다. 그 앨범 모두가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에 강하게 자리잡았고, 199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면서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러시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 지하철역: 아르바츠까야

 

 

러시아의 대표적 극단 및 그 극장 모스크바 예술극장(Moscow Academic Art Theatre)

 정식 명칭은 '고리키기념 국립 모스크바 예술 아카데미'로서 그 대문자를 따서 므하트(MXAT)로 약칭한다. 1890년 모스크바를 순방한 마이닝겐극단의 영향을 받아 1898년 아마추어 배우이자 연출가인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Konstantin Stanislavsky)와 극작가인 블라디미르 네미로비치단첸코(Vladimirovich-Danchenko)에 의해 설립되었다. 초창기 극단의 주체는 창립자 두 사람에게 지도받은 예술문학협회와 필하모닉 음악연극학교를 졸업한 아마추어들이었다.

 

 두 창립자는, 새로운 극장은 누구든지 입장할 수 있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민중의 극장이 되어야 하며, 또 무대약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여 연극의 이상에 반대되는 것을 철저하게 배제한다는 의도 아래 극장을 열었으며,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무대에 올린 첫 작품은 알렉세이 톨스토이(Aleksey Tolstoy)의 《표도르 요안노비치 황제》였다.

 

 새로운 극장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연작품이 필요했는데, 이 극장의 큰 수확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와 막심 고리키(Maxim Kor'kii) 두 극작가를 얻은 일이다. 체호프의 《갈매기:The Seagull》 공연이 성공함으로써 극장은 획기적인 발전을 했으며, 뒤를 이어 《바냐 아저씨》《세 자매》《벚꽃동산》 등이 공연되었다. 1905년 혁명으로 이어진 당시 사회의 격동은 고리키의 《밑바닥》에 잘 반영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V.I.레닌(Lenin)과 A.V.루나차르스키(Lunacharsky)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서 1920년대에 유럽과 미국을 순회공연했고, 1941년까지 러시아 고전극과 소비에트 창작극을 공연했다. 이 극장은 1932년 고리키의 문학생활 40년을 기념하여 '고리키 기념극장'이라고 명명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1950년대 이후는 잠시 정체상태에 빠지기도 했으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런던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1970년에 I.A.예프레모프를 주임연출가로 맞아들였고, 1987년에는 구관 및 부속극장, 1975년에 개관한 신관, 소무대까지 갖춘 총인원 400여 명의 대무대로 확장하고, 신관을 제(諸)민족우호극장으로 개칭하였다.

 

 

노보데비치 수도원(Novodevichyi Convent)

 원래는 크레믈린의 출성 이었느데 지금은 여자 수도원이다. 16세기말 모스크바강을 넘어 쳐들어온 타타르군을 12개의 망루에서 발견하여 포격을 가하기도 했고, 17세기 폴란드와 동맹관계에 있던 리투아니아가 진격해 오는 것을 포자르스키가 이곳에서 출격하여 섬멸하기도 했다. 수도원에 있는 건물모두가 16세기 러시아 건축을 대표하는 건물들이다. 망루에서 포격을 하던 곳이다. 사원을 둘러보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마야콥스키 같은 유명인들이 안치되어 있는 묘지다. 수도원은 녹음이 무성해서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o 정기휴일: 화요일

o 지하철역: 스뽀르찌브나야에서 약 15분 소요

o 입장시간: 11:00-16:30

 

 

모스크바 강(Moscow River)

 볼가강 유역에 있는 오카강의 왼쪽 지류에 자리잡은 모스크바강은 길이 502km, 유역면적 1만 7,500㎢에 이른다.

 스몰렌스크-모스크바고원에서 발원하여 남동쪽으로 흐르며, 평균유량은 모스크바에서 53.5㎥/sec이다.

 11월 후반에서 4월 전반까지 얼어붙는다.

 모스크바 운하에 의해 볼가강과 연결되며, 이 운하의 하류쪽은 항행이 가능하다. 상류의 모자이스크 부근에 모자이스크 저수지가 있다. 강 연변에는 모스크바·모자이스크·콜롬나·즈베니고로드 등의 도시가 자리하며 별장지가 많다.

 길이 128km의 모스크바 운하는 모스크바강과 볼가강을 잇고 있다. 1932년 말 착공하여 37년 7월 완공된 이 운하에는 9개의 갑문과 6개의 저수지, 8개의 발전소가 있다. 이 운하가 건설됨으로써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간의 수로가 1,100km 단축되고, 모스크바강의 홍수를 방지할 수 있게 되었으며, 모스크바에 상수도 물을 공급하고 발전량이 늘게 되었다.

 

 

 

고르키 파크(Gorky Central Park)

 고르키 파크(Gorky Central Park)의 방대하고 푸르른 레저 공원에서 스케이트, 자전거를 빌려 타 보거나 산책을 즐겨 보자. 많은 사랑을 받은 이 공원은 일체의 시설이 완비된 여가 공간이다.

 

 고르키 문화 레저 파크(Gorky Central Park of Culture and Leisure)에서 멋진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겨울에는 꽁꽁 언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여름에는 잔디밭에 앉아 피크닉을 만끽할 수 있다. 뉴욕의 중앙 공원이나 런던 하이드 파크와 마찬가지로 고르키 파크 역시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녹지 공간이다.

 

 1928년 모스크바 강기슭에 처음 조성된 고르키 파크는 구소련 테마 공원의 전형을 나타내는 모델이 되었다. 범죄 소설 작가인 마틴 크루즈 스미스(Martin Cruz Smith)의 고르키 파크(Gorky Park)에도 등장한 이 공원은 뒤이어 제작된 영화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20세기 후반에 접어 들면서 공원이 노후되어 인기가 다소 식었지만, 이후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덕분에 지금은 아름답게 새 단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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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들이 꿈꾸던 환상의 세계인 이 공원에는 난파선, 달, 등대 등 흥미로운 테마의 다양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각 공간에는 인공 등반장, 미끄럼틀, 밧줄 같은 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번지 점프대도 있고, 보트나 말을 타 볼 수 있다.

 

 모든 활동을 즐긴 뒤에는 공원의 전통 정원을 거닐어 보자. 한때 골리친스키 네스쿠츠니 정원(Golitsynskiy and Neskuchniy Garden)이라고 부르던 이 구역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오래된 녹지 공간 중 하나이다. 독특한 느낌의 다리와 건물에서 옛 시절의 매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곳에는 러시아의 유명 건축가, 미하일 카자코프가 설계한 주택도 남아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 피크닉을 즐긴 수도 있다.

 

 여름에는 고르키 파크의 해변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거나, 공원 노천 극장에서 영화도 관람할 수 있다.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빌려 타고 거대한 아이스링크를 질주할 수 있다.

 

 고르키 파크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지만, 일부 시설을 이용하려면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매일 개관.

 이 공원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오크티브리스카야(Oktybryskaya)로 이동하면 된다.

 

 

모스크바 식물원(Russian Academy of Sciences' Main Botanical Gardens, главный ботанический сад)

 모스크바 식물원은 북적대는 모스크바 도심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명한 정원이며 희귀한 꽃과 이국적인 식물들이 있다.

 

 모스크바 식물원(Russian Academy of Sciences' Main Botanical Gardens)은 러시아의 전통이 살아 숨 쉬는 자랑스러운 식물원 중 하나이다. 식물원은 모스크바에만 다섯 군데가 있고, 식물원이나 그와 비슷한 시설은 러시아 전역에 80군데가 넘게 있다. 하지만 이곳에 가면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식물원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식물원은 1945년에 처음 설립되었지만, 모스크바 지역은 식물원과 관련된 긴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근처의 약제 정원(Apothecaries’ Gardens)이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17세기에 설립되었다. 약 360헥타르에 이르는 이 식물원은 오랫동안 신예 식물학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최근에 러시아의 수도로 들여온 새롭고 흥미로운 식물들을 볼 수 있다.

 

 이 향기로운 낙원에서 한두 시간 머물렀다가 많은 방문객이 찾는 장미 정원에도 한 번 들러 보자. 각기 다른 약 2,500종의 장미를 보유한 이 정원은 보고 있기만 해도 눈이 즐거워진다. 초록빛 꽃잎으로 독특한 매력을 자아내는 벵골 장미(Rosa Indica Cruenta, 로사 인디카 크루엔타)도 있다.

 

 이곳에 있는 일본식 정원도 산책해 보자. 조경사 켄 나카지마와 건축가 아다치 타케오가 꾸민 이 정원에서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볼 수 있다. 매력적인 정자와 탑, 죽문처럼 공들여 설치한 구조물을 걷다 보면 마치 일본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곳에서 선보이는 100여 종의 식물 중에는 일본 홋카이도에서 공수해 온 진달레, 벚나무, 단풍나무도 있다.

 

 오렌지 나무 온실로 발걸음을 옮겨 이국적인 다른 식물들도 구경해 보자. 이곳 온실에는 살아 있는 동물을 잡아먹는 난과 식물이 많다. 정원 온실에서 러시아의 혹독한 날씨를 견디기엔 너무 연약한 식물종도 만나 볼 수도 있다.

 

 모스크바 식물원으로 가려면 블라디키노(Vladykino) 지하철역을 이용해야 한다.

 식물원은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운영한다.

 식물원 자체는 입장료가 없지만 수목원, 오렌지 나무 온실, 일본식 정원을 구경하려면 소정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 일본식 정원은 겨울에 휴관할 수 있다.

 

 

 

모스크바의 교통

✜ 공항에서 시내까지

o 공항버스

 대표적인 국제공항인 세레메티예보 2 공항에서 조금만 나오면 지하철 역까지 운행하는 일반버스와 개인소유의 미니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레츠노이바끄잘 지하철 역과 공항을 순환하는 버스의 요금은 일반 시내버스 요금의 2배인 4루블로, 공항까지는 약 40분이 소요된다. 역시 같은 곳을 운행하는 미니버스의 요금은 10루블 정도이며 짐이 있는 경우에는 추가로 1루블정도를 더 내야 하지만 일반버스보다는 배차간격이 작고 공항까지의 소요시간도 30분 정도이다. 이밖에도 아에로바끄잘(시티에어 터미널)에서 2시간 간격으로 있는 공항버스를 이용하면 시내의 레닌그라드 대로(레닌스키 프로스펙트)의 시티에어 터미널까지 35분 걸린다.

 

o 택시

 입국 심사대를 지나 일단 공항청사로 들어오게 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사람들이 바로 택시기사들이다. 그러나 택시를 이용하면 공항에서 시내까지 40달러~60달러로 아주 비싼 편이며 (시내에서 공항까지도 30달러 ~ 50달러 정도) 바가지를 쓰지 않기 위해서는 탑승 전에 요금을 흥정해야 되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특히 주의를 해야 한다.

 

모스크바 공항 안내도 이용방법

 모스크바의 국제공항 중 하나로 대한항공과 아에로플로트이 취항하는 세레메티예보 2공항 터미널은 2층 건물로 1층에는 입국심사 카운터, 세관, 턴테이블이 있으며 2층에는 출발심사대, 세관심사대, 은행, 베료스카, 면세점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공항에서 입국심사대를 지나 공항 밖까지 나오는데는 다른 선진국의 공항보다는 시간이 꽤 걸리는 편이므로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좋다.

 

모스크바 택시 이용방법

 1995년 10월부터 러시아에서는 택시와 승용차의 구분 없이 운행되고 있다. 구 소련 시절에 택시는 볼가라는 세단형으로 차량의 앞, 뒤, 옆에 조그만 체크무늬가 있었으나 러시아의 개방과 함께 택시 외에 일반 승용차도 택시영업을 하고 있으며 요금은 주로 운전자와의 흥정에 의해 결정된다. 택시요금은 보통 1~2km에 1~2달러, 10km에는 흥정을 잘 할 경우 5~6달러 정도이며, 교외로 나갈 경우 보통 거리 요금의 2~3배 정도 받고 있다. 차량의 상태는 대부분 낡았으며 내부 역시 깨끗한 편은 아니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타거나 행선지를 호텔이라고 할 경우 요금은 다른 장소보다 30~40% 비싸게 요구한다. 빈 택시의 경우 운전사 오른쪽 앞에 파란등이 켜져 있으므로 택시를 이용할 경우 확인하도록 한다.

 

모스크바 버스 이용방법

o 뜨랄레이부스와 아프토부스(일반 버스)

 아프토부스, 뜨랄레이부스는 시내 중심 보다 도시 전체를 연결하는 노선이 많다. 티켓을 차내에 있는 펀치에 넣었다가 빼면 구멍이 뚫리는데, 유럽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표 검사는 불시에 하므로 무임승차는 하지 않도록 한다. 요금은 2루블인데, 거리에 있는 키오스크(가판대)에서 10개로 묶여 있는 회수권을 사서 이용하거나 운전사에게 직접 구입할 수도 있다.(버스 안에서 구입할 경우 요금은 2.5루블이다.) 노선표를 얻을 수는 없고, 버스 안에 붙어 있다. 오전 5시부터 자정까지 운행된다.

 

o 뜨람바이(일반 버스)

 시내 중심으로는 운행이 되지 않으며, 속도가 느려서 이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하다. 요금은 2루블(2000년 3월)로 회수권을 구입하여 사용하도록 하며, 이용방법은 일반버스와 같다.(2000년 7월부터 뜨랄레이부스와 뜨람바이의 승차권의 가격이 2루블에서 3루블로 인상된다고 한다.)

 

모스크바 트램 이용방법

 뜨람바이라고 불리는 모스크바의 트램은 시내 중심으로는 운행이 되지 않은데다 속도가 느려서 자주 이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하다. 요금은 2루블(2000년 3월)로, 끼오스크 등에서 회수권을 구입하여 사용하도록 하며, 이용방법은 일반버스와 같다.(2000년 7월부터 뜨랄레이부스와 뜨람바이의 승차권의 가격이 2루블에서 3루블로 인상된다고 한다.)

 

모스크바 지하철(Moscow Metro) 이용방법

 모스크바 지하철은 모스크바 지하철 공사에서 운영하는 러시아 모스크바의 지하철이다. 1935년 5월 15일에 개통되었으며, 소비에트 연방의 첫 번째 지하철이다. 모스크바 지하철의 길이는 총 301.2km에 달하며, 12개 노선에 182개 역을 가지고 있다. 지하철은 오전 5시 30분에 개장, 다음날 오전 1시까지 영업한다. 열차 간 간격은 보통 약 2분 간격이나 출퇴근 시간에는 90초마다 한 대꼴로 오기도 한다. 일일 이용자는 평균 655만에 달하며 모스크바의 대중교통 중 가장 높은 이용률을 자랑한다. 주중에는 700만을 초과할 때도 있으며, 주말에는 그보다 낮아진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전 세계에서 도쿄 지하철 다음으로 가장 이용객이 많은 지하철이다.

 10개의 직선코스와 1개의 순환선으로 이루어져 트랙의 총 길이가 2,000km에 다다르는 모스크바의 지하철은 1930년대 스탈린의 지시로 건설된 만큼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굉장히 빠를 뿐만 아니라 안전하고 깨끗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각 역사는 각종 모자이크나 대리석 조각들로 매우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있다. 빨간색 M으로 표시되는 메트로는 녹색의 플라스틱 동전을 구입하여 개찰구에 넣은 후 통과하는데, 요금은 4루블(2000년 3월)이지만 5번을 이용할 수 있는 티켓부터는 3루블에 구입할 수 있다.

 

 모스크바시에 의하면 2000년 7월부터 지하철 1회 사용가격이 4루블에서 5루블로 인상된다고 한다. 또한 동전과 함께 10회 탑승이 가능한 마그네틱 카드와 1달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좀 더 할 일된 가격에 병용되고 있다. 운행시간은 오전05:30 부터 오전 01:00까지(일반 배차간격은 2~4분, 러시아워는 1~2분)이며 주요 관광명소는 이 메트로로 거의 다 갈 수가 있어 여행자에게 매우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러시아 즐길거리

러시아 서커스 - 볼쇼이 서커스(Bolshoi Circus)

 볼쇼이 서커스는 세계적으로 서커스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친숙한 서커스단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1958년 첫 일본공연 이후, 40년 이상에 걸친 전국 규모의 공연이 펼쳐져 시대, 세대를 넘어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볼쇼이 서커스의 '볼쇼이'는 영어에서는 'Great(위대한)', 'Big(거대한)'의 의미를 갖는다.

 볼쇼이 서커스란 위대한 서커스라는 의미가 된다.

 

 볼쇼이 서커스단의 러시아에서의 명칭은 러시아연방 서커스공단. 러시아연방 문화성에 소속된 조직으로 구 소비에트 연방 서커스공단을 개칭하여 발족시킨 국립기관이다.

 이 러시아 국립서커스는, 현재 세계 각국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으며, 해외에서는 '볼쇼이 서커스'라 불리면서 상당히 친숙하다. 러시아연방 전국에서 모인 뛰어난 인재를 단련시킨 아티스트 집단인 볼쇼이 서커스는 러시아의 자랑이며 또한 언제 어디서든 최신, 최고 레벨의 연기를 보여주는 전세계적으로도 정점에 서 있는 서커스이다.

 

 

* 서커스의 대명사 , 세계 최고의 서커스 "러시아 국립 볼쇼이 서커스"

 러시아 볼쇼이 서커스는 ‘서커스올림픽’ 이라 불리는 ‘몬테카를로 서커스 페스티발’ 에서 수많은 대상을 차지하며 뛰어난 기술과 기교로 러시아는 물론 전세계를 순회하며 공연하는 독보적 단체이다. 또한 배우 및 스텝 8000여명을 비롯하여 6600마리의 동물, 830개의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는 세계최고의 서커스단이며 러시아의 자랑이다.

 

* 다양하고 업그레이드 된 프로그램  - 화려한 연출에 의한 감동의 공연예술

 1919년 창단 이후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전세계적으로 '가장 보고 싶은 서커스1위'라는 부동의 자리를 지켜온 "러시아 볼쇼이 서커스" 러시아 볼쇼이 서커스의 공연은 스케이트를 타고 유모차를 끄는 개와 고양이, 춤을 추며 노래하는 곰, 다양한 스토리를 연출하는 사자등의 동물서커스와 익살스런 피에로의 기발한 쇼, 화려한 서커스 발레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있으며 특히 스릴만점의 공중곡예와 공중그네는 끓임 없는 훈련을 통하여 위험을 감수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묘기의 진수를 보여주며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또한 이에 맞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음향, 조명이 어우러진 화려한 연출력은 한 장면 한 장면을 놓칠 수 없게 만들며 신나고 흥미진진한 환상의 무대를 보여 준다.

 

* 서커스의 하이라이트 - '스타게이져'

 2막으로 이루어진 이 환상적인 쇼에는 말을 이용한 모든 장르의 서커스 묘기가 들어있으며 현대적인 쇼의 특성들을 흡수하여 좀더 스펙터클하며 고난이도의 테크닉을 선보인다. 이 환상적인 쇼는 고대 아틀란티스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마술사들의 미지의 세계에 관한 것일 수도 있으며 우리 모두 각자 품고 있을 어떠한 의문에 대하여서도 해답을 찾아 줄 신비한 문명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볼쇼이 서커스 최대의 하이라이트 '스타게이져'에서 기존의 다른 서커스와 차별화된 무대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공연프로그램순서>

제 1부 (60분)

1. 아티스트 단체 인사

2. 곡예묘기 - 평균대위에서 공중묘기와 우아하고 다양한 율동연출

3. 광대 - 관객들에게 깜짝 웃음 선사, 관객의 상황을 보고 즉석연출

4. 고양이 묘기 - 다양한 종류의 고양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공 위에서 재주를 부리며 유모차를 끄는 등의 묘기

5. 광대

6. 곰 6마리 묘기 - 곰들의 아크로바틱, 공 타기, 춤추기, 와이어 위에서 재주부리기, 장애물을 넘고 관객들에게 인사하기, 자전거 타기 등의 곰들의 묘기

7. 서커스발레 - 발레단의 화려한 의상과 춤, 노래가 마치 뮤지컬을 보여주는 듯한 쇼

8. 마상묘기 '스타게이져' - 화려한 조명아래 고대 전사와 같은 복장으로 등장하는 16명의 배우들이 말 위에서 펼치는 환상적이고 화려한 묘기

 

- 휴식시간(Intermission) 15분

제 2부(50분)

1. 사자와 아가씨 - 무섭게만 느낀 사자가 아가씨들과 함께 보여주는 스토리 있는 공연은 마치 사람이 공연하는 듯한 잊지 못할 그림을 연출

2. 서커스발레 - 새로운 의상과 새로운 스토리의 코믹한 쇼를 연출

3. 광대

4. 강아지 묘기 - 귀여운 강아지들이 사람의 등을 짚고 넘어 고리 안으로 뛰는 등 깜직한 쇼를 연출

5. 광대+ 곰(2마리) 묘기 - 유명한 가수의 노래를 부르고 관객에게 프로포즈하는 코믹한 곰

6. 광대

7. 공중곡예 - 공중 줄 곡예사가 펼쳐지는 아찔하면서도 우아한 발레를 연상케 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예술적 묘기

8. 엔딩 단체 인사 + 발레 - 전 출연진등장, 관객에게 볼거리 제공 및 퍼레이드 연출

 

 

러시아 먹거리

러시아 음식의 특징

 워낙에 넓은 나라인 탓에 러시아의 대표적인 음식을 바로 손꼽기란 쉽지 않다. 각 지방마다 특색있는 음식들이 발달하여 있을 뿐 아니라 오랜 시간동안 러시아의 음식은 귀족음식과 평민음식으로 확연히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러시아 요리가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특징들이 있는데 이는 가공식품을 이용하기 보다는 쳔연재료를 이용,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들이 많다는 것과 대부분의 요리에 신맛과 단맛이 강한, 우유로 만든 전통적인 소스인 스메타나가 첨가된다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의 주식은 빵과 고기이며, 추운 자연 환경 덕에 지방질이 많은 육류의 소비가 훨씬 많기 때문에 돼지고기가 쇠고기보다 월등히 비싸기도 하다. 또한 물이 별로 안 좋기 때문에 그 대용으로 차를 마시는 문화가 널리 형성되어 있다. 잼, 과일, 초코렛 등과 함께 먹는 얇게 구워낸 팬케이크인 블리니, 고기나 야채 등을 넣고 튀긴 빵인 피로슈키와 만두와 거의 유사한 뺄메니, 스메따나를 띄워 먹는 빨간무를 끓여 만든 스프인 보르쉬, 비프 스트로게노프,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이끄라라고 불리는 철갑상어알 등의 러시아 요리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명물인 키예프 식 커틀릿이나 꼬치에 끼워 장작 위에 걸고 구워내는 바비큐의 일종인 코카서스의 샤실리크 그리고, 중앙 아시아의 피로프 등을 맛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모스크바 쇼핑센터 정보

(Gum)

 거대한 크기와 100년 이상의 역사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백화점 중의 하나로 붉은 광장 옆에 있다. 쇼핑의 메카라기보다는 그 건축양식이 더 돋보인다. 각각의 매장들이 들어서 있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쇼핑몰의 모습과 비슷하다.

 

돔 끄니기(Dom Knigi)

 젊은이들의 거리인 신아르바트 거리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돔 끄니기는 외국어 서적도 다량 구비하고 있는 모스크바 최대의 서적센터이다. 지도, CD, 오래된 서적과 미술서적, 과학서적 등 폭넓게 갖추고 있다. 서점 밖 도로 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서적상에게서도 의외로 싼 가격에 원하는 책을 구입할 수 있다.

o 주소 : 26 Ulitsa Novy Arbat, Moscow

☎ : 7-495-290-3580

 

체르노무쉬킨 시장(Cheryomushkinsky Market)

 오늘날에는 선진국의 다양한 물건들을 들여와 최고급으로 꾸민 외국식 슈퍼마켓들도 많이 생겨났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상설시장을 찾아 식품을 포함, 그 외의 살림도구들을 구입하고 있다. 이는 수입품들을 비싼 정찰가격에 파는 슈퍼마켓보다 한결 신선한 러시아산 야채나 과일, 육류 등을 흥정을 통해서 더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시장이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에게 절실하게 와 닿기 때문이다. 만약 좀 더 러시아적인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다면 사람들로 늘 북적대는 체르노무쉬킨 시장을 들러 보길 권하며 각종 먹거리를 포함, 수입 꽃, 식물, 생활필수품 등을 싸게 구입할 수 있다. 단, 봉투는 추가로 구입하여야 한다.

o 주소 : 1 Lomonosovsky Prospekt, Moscow

 

이즈마일로보(Izmailovo)

 주말에 모스크바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즈마일롭스키 빠르크에 가면 갖가지 러시아적인 물건들을 만날 수 있다. 마뜨로쉬까 전통적인 농촌 아낙네의 복장을 한 인형을 열어보면 또 다시 그보다 작은 인형이 들어있다. 보통은 5~7개 정도이지만 20개까지 들어가 있는 것도 있다. 러시아 목각 인형부터 시작하여 직접 손으로 만든 러시아 숄, 청백의 도자기로 만든 식기와 장식품, 나무로 만든 다양한 도구들뿐 아니라 서적, 그림, 카메라 및 축음기, 군복 등 구 소련 시대부터 내려져 오던 골동품들도 구경할 수 있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한국인들에게 이 곳이 특히 잘 알려져 있는 이유는 바로 싸고 질 좋은 호박 덕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호박에 대한 한국인의 수요는 "호박", "쌉니다"라는 등의 팻말이 물건들 앞에 높여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다.

- 지하철역 : 이즈마일롭스끼 빠르크

 

얀따르(Yantar)

 벨라루시(Belorussky)역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발트해 연안에서 온 호박등 특이한 보석들을 살 수 있다.

o 주소 : 14 Gruzinsky Val, Moscow

☎ : 09-254-0577

 

빼뜨롭스키 빠사쥐(Petrovsky Passage)

 수입품과 기념품을 살 수 있다. 멋지게 다시 꾸며진 혁명 이전의 아케이드로 상점뿐만 아니라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좋은 카페도 있다.

o 주소 : Ulitsa Petrovka 10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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