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게르만 여성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1729~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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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1729~1796)

 예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 문화권에 편입시켰다. 또한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았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독일 출신에 남편 표트르 3세의 황위를 찬탈하고 제위에 올랐지만 러시아인들, 심지어 소련인들에게도 찬미의 대상이며 민족 자긍심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영토를 서쪽과 남쪽으로 20만 평방 마일(258,000㎢) 이상 확장시켰고, 행정개혁 계획에 따라 29개주를 재조직했다. 100개가 넘는 새 도시들을 건설했으며, 옛 도시들은 새롭게 단장시켰다.

 이를 통해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문학을 적극 후원해 문학평론을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했고 러시아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또 과학을 장려하고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출생: 1729년 05월 02일

사망: 1796년 11월 11일(67세)

재위: 1762~1796(34년)

가문: 아스카니아가(혼전)

부친: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체르프슈트 후작

모친: 요한나 엘리자베트 폰 홀슈타인고토르프 공녀

배우자: 표트르 3세(1728~1762, 재위 1762~1762, 로마노프 왕조의 7번째 군주)

자녀: 파벨 1세(1754~1801, 재위 1796~1801, 로마노프 왕조의 9번째 군주) 등

종교: 러시아 정교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 반도와 폴란드의 상당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러시아인들, 심지어 소련인들까지도 독일 출신으로 왕위를 찬탈하고 또한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던 예카테리나를 찬미했으며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밖의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러시아가 여제의 통치하에서 여타 강국들을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크게 신장되었기 때문에, 또 그녀가 사실상 가혹하고 파렴치한 지배자였기 때문에 서유럽의 시각에서는 그녀가 거대하고 후진적이면서도 상종할 수 없는 나라, 러시아의 화신으로 비쳐졌다.

 

 예카테리나에게 주어진 주된 영광 가운데 하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이 역사의 한 시대구분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발전에 결정적인 한 시기와 그녀의 이름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재위말 러시아는 서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20만 평방 마일 이상의 영토를 넓혔으며, 러시아의 통치자들이 오래도록 꿈꾸어온 보스포루스 해협(흑해와 에게 해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의 진출기반을 확보하는 것이 실현가능한 목표가 되었다. 말년에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행정개혁 계획에 따라 29개주를 재조직했다고 주장했다.

 

 고삐 풀린 듯이 마구 재정 지출을 하면서 수많은 사업에 돈을 투입했다. 100개가 넘는 새 도시가 건설되었으며 옛 도시들은 확장되고 새로이 단장되었다. 풍부한 상품과 함께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졌으며 교통의 발달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업적은 군사적 승리의 영광과 당대 유럽의 최고 명사들을 모여들게 했던 호화로운 궁정의 명성과 함께 그녀를 역사상 두드러진 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여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녀의 활력과 행정능력을 인정하면서도 통치기에 이루어진 업적이 그녀 자신의 공적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측근 인사들의 도움과 러시아 사회의 자연적인 역사발전에 기인하는 요소도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비판자들은 예카테리나를 한 사람의 여성으로 판단할 때는 매우 준엄하게 다루고 있다.

 

 그녀의 사생활은 분명 모범적이지 못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툠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은 최소한 12번은 바뀌었다. 그녀는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랐는데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실토한 것처럼 이 남자들은 "첩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녀는 현실적으로 다른 무엇보다도 권력에 집착했지만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가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었다. 표트르 3세의 합법적 상속자였던 아들 파벨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대신 손자들, 특히 그 가운데 큰손자인 알렉산드르를 매우 사랑했으며 제위를 승계해주고자 원했다. 여제는 우정에 있어서는 충실하고 너그러웠으며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자비를 베풀었다.

 

 그녀가 활동적인 여성들 가운데서도 그 어느 누구보다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고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인데다가 자기자신이나 혹은 국가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을 때는 무자비하기까지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녀는 점차 나이가 들어가면서 허영심이 매우 강해졌다. 여기에는 물론 변명의 여지가 약간 있다. 당대 유럽의 두드러진 인물들이 그녀에게 다투어 아첨을 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인데 결국에는 예카테리나도 이러한 아첨이 과장된 내용임을 깨달았다.

 

 볼테르 및 디드로와 친구지간이기도 했던 여제는 당대 유명인사 대부분과 폭넓게 서신교환을 했다. 문학을 적극 후원했으며 러시아의 문화적 발전을 크게 촉진했다. 직접 글도 썼으며 문학평론을 하나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했다. 또 과학을 장려하고 많은 학교를 건립했다. 그녀의 흥미와 열정은 건설계획에서부터 법률제정과 예술품 수집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모든 분야를 두루 섭렵했으며 늘상 만족스럽지만은 않았으나 언제나 열정적이었다. 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창조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타고난 활력과 지적 호기심이 강렬한 여성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와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유럽의 모든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1787~1799)이 가져다준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왕과 귀족의 권위가 의문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카테리나는 스스로가 '계몽주의 운동의 친구'였지만 자신의 특권을 포기할 의향은 전혀 없었으며 "나는 귀족이며 그것이 곧 직업이다"라고 말했다.

 

 농노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책을 출간하려 했던 작가 A. N. 라디시체프가 1790년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후 사면을 받아 추방당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라디시체프가 표현했던 생각은 1767년의 예카테리나의 훈령과 매우 유사한 내용이었다.

 

 그 다음으로 프랑스 혁명에 고무된 폴란드가 자유주의적인 내용의 헌법을 제정하고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1792년 혁명의 위험성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구실로 예카테리나는 군대를 파견, 이듬해 우크라이나 서부지역 대부분을 합병했으며 프로이센은 그 와중에서 폴란드 서부영토를 차지했다.

 

 1794년 타데우슈 코시치우슈코가 주도한 민족주의 성격의 봉기가 일어난 후 예카테리나는 이듬해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3국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폴란드를 지도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여제의 치세 말기 몇 년 간은 프랑스 루이 16세의 처형과 혁명군의 진출, 그리고 급진사상의 확산 등으로 암운이 드리워져 있는데다가 자신에게 적당한 후임자가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아들 파벨은 무능하고 침착하지 못한 인물이었으며 손자 알렉산드르는 나이가 너무 어렸다.

 

 

예카테리나 2세의 어린 시절

 예카테리나 2세의 아버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독일 제후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폰 안할트 체르브스트였으나 어머니는 홀슈타인 공작 가문과 친척이다.

 

 14세 되던 해 표트르 대제의 손자이자 표트르 대공으로 러시아 왕위계승권자인 홀슈타인 고토르프 공작 카를 울리히의 아내로 간택되었다.

 

 1744년 러시아에 도착한 그녀는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대공비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이듬해에는 나이 어린 사촌인 카를 울리히와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완전히 실패였으며, 그후 18년간은 그녀에게 기만과 수치로 점철된 시기였다.

 당시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의 딸인 옐리자베타 여제(Yelizaveta Petrovna Romanov, 1709~1762, 재위 1741~1762)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옐리자베타 여제의 20년간 통치기로 왕권이 크게 안정되었다. 옐리자베타 여제는 쾌락과 사치에 탐닉하면서 러시아 궁정을 유럽처럼 화려하게 만들기를 열망하며 예카테리나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는 남편이 온전한 인물이었다면 결코 여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편은 극히 신경질적이며 반항적인데다 완고했으며 성불구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알코올 중독자나 다름없었으며 가장 걱정스럽게도 옐리자베타 여제와 적대관계에 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의 광신적인 숭배자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카테리나는 총명하고 야심만만했으며 지적 능력과 함께 유연한 성격, 러시아에 대한 애정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궁정에 있는 동안 예카테리나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겪어야 했으며 의혹의 눈길 속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폭넓은 독서를 하고 장차 군주로서 맡게 될 역할을 준비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매력과 함께 생명력있는 예지와 비범한 활력을 지니고 있었다.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만 해도 그녀에게는 최소한 3명의 정부(情夫)가 있었다. 그녀 자신이 넌지시 비춘 바에 의하면 그녀의 상속자인 파벨을 포함해 3명의 자녀 모두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열정은 야심이었다. 남편 표트르에게 러시아를 통치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그녀는 일찍이 남편을 제거하고 자신이 직접 러시아를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견했다.

 

 1762년 1월 5일(구력 1761. 12. 25)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었다. 당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및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을 상대로 7년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옐리자베타의 사망 직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전쟁을 중단하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표트르는 러시아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자신이 태어난 독일에 대한 애정을 숨김 없이 드러냈으며 또한 어리석은 행동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명예를 떨어뜨리면서 예카테리나를 내치려고 했다. 예카테리나에게는 결단을 내릴 일만 남았다. 그녀에게는 군대의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그녀의 정부인 그리고리 오를로프와 함께 여러 연대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이와 함께 궁정내 인사들과 모스크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중여론이 그녀의 편이었다. 또 예카테리나는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품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데다 러시아에서 가장 교양있는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 중에서도 '개화된'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762년 7월 9일(구력 6. 28)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대의명분 아래 규합된 여러 연대 병력을 이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입성했으며 카잔 성당에서 러시아의 여제이자 전제군주로 선포되었다.

 

 표트르 3세는 왕위에서 물러나고 8일 후 암살당했다. 예카테리나가 표트르 3세의 살해를 명령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 사건은 그녀의 지지자들에 의해 저질러졌으며 일반 대중들은 예카테리나에게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1762년 9월 차르의 고도(古都) 모스크바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예카테리나 2세라고 불리는 러시아 여제의 34년 통치시대가 개막되었다.

 

 

로마노프 후계자와의 결혼

 그녀의 결혼은 정략적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옐리자베타(Yelizaveta Petrovna Romanov, 1709~1762)는 자신이 정식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을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즉위식 다음해에 일찌감치 후계자를 결정했다. 그 후계자는 요절한 한 살 위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테르 울리히(Karl Peter Ulrich)였다. 그는 표트르 대제의 공식 혈통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후손이었다.

 

 그는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열 살 때 아버지까지 잃어 공작의 지위를 계승하고 있었는데, 옐리자베타가 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면서 러시아 황태자의 공식 명칭으로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Grand Duk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옐리자베타(Yelizaveta)

 후계자가 결정되자 옐리자베타는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당시 열네 살이었던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반프로이센 정책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러시아 총리대신 베추체프의 영향력이 약화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관여했다.

 

 옐리자베타 역시 소피아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소피아 아우구스테의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Johanna Elisabeth)는 옐리자베타가 젊은 시절에 약혼했다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홀슈타인-고토로프 가의 카를 아우구스테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피아는 당시 결혼 적령기를 앞둔 유럽 왕가의 여인들 중에서 상당히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1729년생으로 표트르보다 한 살 아래인 소피아는 약혼이 결정되자, 1744년 1월에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와 함께 러시아로 들어와 옐리자베타의 왕궁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열성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문화에 대해서 배웠으며, 옐리자베타와 표트르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때문에 차리나와 귀족들,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그녀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소피아가 남긴 당시의 일기에 의하면, 그녀는 러시아로 오면서 러시아의 황후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필요한 모든 행동을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745년에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 예카테리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일기장과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모아 폐기하여 연대기 작가들의 애를 태웠던 차리나 옐리자베타와는 반대로 예카테리나는 자신의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잘 보존했을 뿐 아니라,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비교적 솔직하게 정리한 《회상록》까지 남겨 후대의 작가들을 위해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회상록》에 의하면, 표트르와 예카테리나는 애당초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일단 러시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완전히 상반되었다.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곳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표트르는 자신이 그 이름을 따른 위대한 할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유일한 후손이었는데도 좀처럼 어릴 적에 받았던 프로이센식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통치해야 하는 러시아를 후진국이라며 경멸했다. 특히 그는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러시아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정의한 프로이센의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를 가장 존경해서 손가락에 프리드리히가 조각된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녔다.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은 표트르는 정신적인 성장이 무척 더딘 편이었다. 유아적인 성향이 강해서 하루 종일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았으며, 십 대인데도 음주벽이 있었다. 특히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를 앓고 나서 얼굴에 심한 마마 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표트르에게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되었다. 그의 성기에 결함이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를 할 때 심각한 장애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혼부부는 결혼 첫날부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녀는 《회상록》에서 이때의 심경을 간단하게 적고 있다.

 

 '만약 그에게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거나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 첫날 남편에게 잔인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만약 네가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거야. 조심해, 예카테리나. 이 남자와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해'라고.'

 

 결혼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 대신 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당대의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들의 저술을 거의 모두 독파했다. 그녀는 이 시기에 볼테르의 저술에 감동해서 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이들의 교류는 볼테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표트르와 성 관계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스물두 살 무렵에 처음으로 남자 경험을 했다. 명문가 출신의 미남 청년인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Vasilievich Saltykov)였다. 살티코프는 대략 열두 명 정도로 집계되는 예카테리나의 진지한 애인 중에서 첫 번째 남자였다.

 

 예카테리나는 스물다섯 살인 1754년에 첫 아이 파벨 페트로비치(Pavel Petrovich)를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후일 파벨이 표트르의 아들이 아니라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이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예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평생 우정을 나누며 살았으나,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는 파벨이 태어나기 2년 전쯤에 잠시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는 표트르가 성기 수술을 통해서 성 기능을 회복했으며, 예카테리나의 《회상록》에 의하면, 그녀는 결혼 초기의 결심을 철회하고 약간의 양보를 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두 인간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고,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다. 우리의 의견은 항상 너무나 달라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너무 그를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몸을 맡겼다.'

 

 파벨이 태어나 로마노프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표트르가 애인들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있는 예카테리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Yelizaveta Vorontsova)였다. 보론초프 가는 러시아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11세기에 성립된 노브고로드 대공을 계승한 집안이다. 당시 보론초프 가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던 두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인 옐리자베타와 동생인 예카테리나였다.

 

 옐리자베타 보론초바가 표트르와 공공연하게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서 동생인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황태자비인 예카테리나와 긴밀한 친구 관계였다.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다른 명문가 출신인 미하일 다쉬코프 대공(Prince Mikhail Dashkov)과 결혼해 예카테리나 다쉬코바 대공녀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일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내고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이름을 남기게 될 사람이다.

 

 예카테리나가 파벨을 낳자마자 차리나 옐리자베타는 파벨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키웠다. 예카테리나는 파벨을 한 달 후에 세례식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여섯 달 후에야 재회할 수 있었다. 옐리자베타가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행동한 이유는 예카테리나에게 차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실망스러운 표트르 3세를 거울삼아 파벨을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손답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생애에서 대단히 소중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리 오를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는 노브고로드 시의 행정관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아들로 나이는 예카테리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애국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그는 7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입문했으며,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가 부상이 회복된 후에는 동생 알렉세이(Alexey Grigoryevich Orlov)와 함께 근위대에 배속되어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관계가 더욱 심각하게 꼬여 가면서 표트르는 점차 주변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반면 예카테리나는 동정을 받게 되었다. 표트르는 그리 영리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예카테리나를 모욕하거나 무시했다. 예카테리나 역시 표트르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가급적이면 공개석상은 피했다. 또한 표트르는 공식적으로는 부적절한 관계임이 분명한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도 보란 듯이 동행하곤 했다.

 

 

황후 시절

 1761년 12월 25일 옐리자베타 여제(1709~1762, 재위 1741~1762)가 서거하자 표트르가 새 황제로 등극하여 표트르 3세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장례기간 동안 옐리자베타의 시신 앞에서 열흘을 지내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이러한 예카테리나의 모습에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에 반해 표트르 3세의 평판은 날이 갈수록 나빠졌다. 야심가였던 예카테리나는 남편 표트르 3세가 러시아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점을 일찍이 간파했고, 황후가 된 직후부터 여러 귀족들과 백성들과 접견하면서 귀족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한편 군부의 지지를 획득해 나갔다.

 

 또한 그녀는 궁정의 인물들과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지식인들과도 자주 만나 자리를 하면서 이들을 자신의 측근이자 지지자로 끌어들였다.

표트르 3세

 결국 1762년 표트르 3세의 통치 반년 만에 예카테리나는 황실 근위대의 힘을 빌려 남편을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오르게 된다. 예카테리나는 군의 지지를 얻을 확보할 계획을 세우고 우선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의 병영으로 갔다. 그곳의 사령관 키릴 라주모프스키는 예전부터 예카테리나와 각별한 사이였다. 군의 지지를 얻은 예카테리나는 스스로 러시아의 여제로 선포함과 동시에 병사들로부터 충성을 맹세받았다. 이어 예카테리나는 이스마일로프스키 연대를 거느리고 대성당으로 갔다. 곳곳의 연대와 근위기병 연대가 속속 대열에 합류함에 따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주둔하던 모든 군대는 예카테리나가 장악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예카테리나는 군복으로 남장을 하고서 그들의 선두에 서서 어전회의에 난입하였다고 한다.

 

 

초기 재위시절

 개인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예카테리나 2세는 지배자였다.

 러시아에 대해 진정 헌신적이었던 그녀는 러시아를 부강한 국가로 만들기로 작정했다. 러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녀는 질서와 정의에 바탕을 둔 통치체제의 확립과 교육의 확대를 꿈꾸어왔었다. 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 필적하는 궁정을 꾸미고 프랑스를 모방하는 것 이상으로 민족문화를 창달하려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어왔었다. 그녀의 계획은 모두 실행에 옮기기에는 너무나 수가 많아서 모든 관심을 오로지 이 계획에만 쏟는다 해도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 가장 시급한 문제는 옐리자베타 여제 사망 당시 이미 텅 비어버린 국고를 다시 채우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762년 성직자의 재산을 정부재산으로 이관함으로써 해결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성직자들은 나라 전체 토지와 봉토의 1/3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성직자들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으로 미미한 정도로 남아 있던 권력을 모두 잃고서 국록을 받는 공직집단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한편 자신의 쿠데타와 표트르 3세의 의문스런 죽음은 그녀가 여타 유럽 국가들과 상대하는 데 있어서 신중함과 안정을 찾는 것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러시아의 전통적 동맹국인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오랜 적대국가인 프로이센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1764년 자신의 오랜 정부 가운데 한 사람인 스타니수아프 포니아토프스키폴란드 왕으로 앉힘으로써 분명한 국경선이 없이 이웃한 3개 열강들의 야심의 대상이 되어온 폴란드 문제를 해결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심약한 성격이었으나 예카테리나에게는 절대적으로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반면 그녀의 개혁 노력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신봉자였던 그녀는 몽테스키외와 장 자크 루소가 옹호하던 개혁이 무정부적·후진적인 성격의 러시아 현실에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달았다. 이들의 개혁사상은 유럽에서도 실행에 옮겨지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1767년 자신의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바를 직접 확인하고 헌법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전국 각 지방과 각 계층(농노를 제외하고)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이 위원회에서 수개월간 논의가 진행되었으나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자 위원회에 내려진 예카테리나의 교서가 헌법의 초안이 되고 곧 법전이 되었다. 그러나 이 헌법은 프랑스에서 공포되기에도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것으로 여겨져 러시아에서는 사문화되었다.

 

 개혁의 시도가 좌절되자 예카테리나는 1768년 정책을 변경하기 위해 투르크와의 전쟁을 구실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무엇보다도 국가의 영광을 앞세우는 데 정책의 역점을 두었다. 표트르 대제 이후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숙적이었다. 따라서 투르크와의 전쟁은 예카테리나의 신하들의 애국심과 열정에 불을 당겼다. 그리하여 1770년 체슈메 전투의 승리가 예카테리나에게 군사적 영예를 안겨다주기는 했으나 투르크족들은 아직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으며 전투가 계속되었다.

 

 바로 이 시점에 러시아는 예기치 않았던 곤경에 직면했다. 먼저 전쟁에 따른 어려움과 함께 무서운 전염병이 모스크바에 창궐했다. 전염병은 대중들 사이에 민심이탈과 함께 대중동요의 기운을 조성했다. 1773년 돈 카자크족의 장교출신인 예멜리얀 푸가초프가 죽은 표트르 3세로 자처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다. 우랄 산맥지역에서 시작된 반란은 남동부 각 지방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1774년 6월 푸가초프의 카자크 군대는 모스크바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투르크와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예카테리나는 반란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파견했다. 전투에서 패하고 체포된 푸가초프는 1775년 참수되었으나 그가 야기한 공포와 혼돈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예카테리나는 백성들이 연민의 대상이기보다는 두려움의 존재이며 이들을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속박을 더욱 단단히 해야만 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권좌에 오르기 전 예카테리나는 농노해방을 계획했었다. 산업의 95%가 농업인 러시아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농노는 소유주들의 재산이었으며 귀족들의 재력은 토지가 아니라 농노의 숫자에 따라 평가되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권력의 현실에 맞부딪히게 되자 농노해방이 농노 소유주들로부터 너그러이 수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소유주들은 곧 예카테리나 자신의 지지기반이었으므로, 생산수단인 농노를 빼앗기게 될 경우 나라 전체를 무질서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스스로 불가피한 악습과 타협한 예카테리나는 과거 한때 자신이 비인간적인 제도라고 비난했던 농노제를 이제 새로이 조직하고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신분이었던 우크라이나 농민들을 농노로 만들었으며 이른바 왕실소유영토를 자신의 총신과 각료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일정한 자치권을 누려왔던 해당 농민들의 운명을 열악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집권 말기에 러시아에서는 자유농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으며 보다 조직적인 통제 때문에 농노들의 형편은 그녀가 즉위하기 전보다 더욱 비참해졌다. 어쨌든 러시아 국민의 95%는 예카테리나의 치세기에 이룩된 업적들로부터 직접적인 혜택을 입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 농노의 강제노동은 경제와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창달하려는 원대한 계획에 소요되는 증가일로의 막대한 지출에 자금을 조달해주었을 따름이다.

 

 그결과 예카테리나는 적어도 자신이 훌륭한 행정가였음을 입증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예카테리나 2세와 포툠킨(Potëmkin)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1774년의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그리고리 포툠킨(Grigory Aleksandrovich Potëmkin, 1739~1791)은 예카테리나의 정부가 되었으며 하급귀족 신분에서 이제 눈부신 출세가도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대단한 야심만큼이나 뛰어난 예지와 유능함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예카테리나의 총신들 가운데 막중한 정치적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평소 예카테리나는 국정에 관한 사무와 개인적 쾌락을 혼동하지 않았다. 대신들은 거의 언제나 능력에 따라 등용되었다.

 

 예카테리나는 포툠킨에게서 그녀는 애정과 존경을 보내고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을 만큼의 비범한 면모를 발견했다.

포툠킨(Grigory Potëmkin)

 대신의 신분으로 포툠킨은 무한한 권력을 향유했으며 단 2년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관계가 끝이 난 이후에도 막강한 권력을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그는 예카테리나 치세기의 다소 사치스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독일 출신에다, 다소 단조로운 취향의 예카테리나에게는 없는 화려함에 대한 취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알고 있었다.

 

 대단한 공상가였던 그는 영토를 정복해 백성들을 살게 하려는 열망이 강했다. 예카테리나가 아직 지니지 못했던 러시아에 대한 지식을 갖춘 노련한 외교관이었으며 예카테리나가 절차를 중시하는 것 못지 않게 호방한 사람이었다. 포툠킨은 1791년 죽을 때까지 예카테리나에 의해 여왕과 거의 동등한 지위의 대우를 받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고 이해했으며 야심만만한 포툠킨은 예카테리나의 관심사에 대해 철저히 헌신함으로써 자신의 군주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1783년 투르크가 차지하고 있던 크림 반도를 빼앗아 병합한 것은 포툠킨의 업적이었다. 이 반도의 병합과 함께 카프카스 산맥에서부터 러시아 남서쪽 부그 강에 이르는 크림 칸국을 차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영토는 흑해의 북쪽 해안에까지 다다르게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존립에 위협을 주는 위치로 부상하면서 지중해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투르크와 인접하면서 적대관계에 있는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를 새롭게 하고자 했으며, 반면 프로이센 및 영국과의 동맹은 포기했다.

 

 당시 영국과 프로이센은 러시아의 야심에 경계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예카테리나의 치세기에 러시아는 한번도 유럽의 전쟁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 이는 그녀가 몇몇 서유럽 국가들과 체결했던 영토와 관련된 협정들을 주도면밀하게 잘 지켜나갔기 때문이었다.

 

 예카테리나의 영광은 1787년 포툠킨이 주선한 크림 반도로의 항해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 여제는 새로이 자신의 영토가 된 땅을 횡단했으며 오스트리아 황제와 폴란드 왕, 그리고 수많은 외교사절들이 그곳에 와 그녀를 축하하고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라고 불린 호화로운 행사를 즐겼다. 이렇게 불린 이유는 예카테리나와 황실이 부분적으로 바다를 이용해 여행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름을 본떠 새로운 도시들의 이름을 지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진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음을 천명했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남성 편력

 그는 남편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기 이전부터 정부들을 두었다. 67세 되던 해 뇌졸중으로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을 때에도 나이가 젊은 정부들을 두고 있었다. 사실상의 남편으로 여겨지던 포템킨과의 관계가 끝나고 난 후 그녀의 공식적인 애인 또는 첩은 20명 이상 바뀌었다. 그녀는 평민 출신 사병과 시종을 비롯한 잘생기고 신분이 낮은 젊은 남자들을 정부로 골라서 동거했다. 이들 중 몇명은 적당한 때에 두둑한 상금이나 관직을 주어 내보내는 한편 일부는 평생토록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 후일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들은 여제의 남자 후궁이나 남자 첩이라고 증언했다. 그의 증언대로 예카데리나의 남자들은 황제의 후궁과 같은 예우를 받았다.

 

 그녀의 남성 편력에 대한 비판은 당대에도 나왔지만 그는 남자 첩, 후궁을 두는 것이라며 군주가 후궁과 정부를 두는 것을 근거로 들어 이를 반박했다. 또한 옐리자베타 여제가 많은 남자와의 관계로 염문을 뿌렸던 것을 예를 들며 자신은 정식으로 남자 후궁을 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녀는 권력과 국정, 정복 사업 등에 집중하였지만 한편으로 서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희구하기도 했다 한다. 지능이 낮았던 남편과의 원만하지 못했던 성생활은 일찍부터 그녀의 그런 욕구를 더욱 부추겼다.

 

 

예카테리나 여제를 치료한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산 예카테리나 2세에게서도 술에 관한 흥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온다. 바로 예카테리나 2세가 리가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였다. 리가는 소련에서 독립한 발틱 3국 가운데 하나인 라트비아의 수도다. 리가는 현재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한때는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으나 표트르 대제 시절 러시아가 점령한 뒤 계속 러시아의 영토였다. 표트르 대제는 리가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 자체를 사랑해 재위 기간 중 규칙적으로 리가를 방문했다.

 

 예카테리나 2세도 이러한 전례에 따라 리가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런데 체류 기간 중 건강이 나빠진다. 심한 감기 증세에 소화불량까지 겹친 중한 상태로 궁중 의사들의 처방도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그때 주위의 권유에 따라 리가에서 나는 약주를 마셨는 데 마신 지 얼마 후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일로 여제를 살린 술이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그 후 역대 러시아 황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와서도 프랑스의 드골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까지 자주 마셨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렇다면 이 술은 과연 어떤 술일까?

 

 이 술의 정식 명칭은 리가 블랙 발삼(Riga Black Balsam)인데 '블랙 리가'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18세기 중반에 리가의 한 약사가 개발했다고 전해지는데 보드카에 25종류의 약초, 향신료, 오일 등을 혼합해 만든 것이다. 알코올 45도의 독한 술인데 자세한 성분은 아직까지 비밀이다. 이 술은 여제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통적으로 감기 치료 효과와 건위(健胃, 위를 튼튼하게 함)작용이 있는데 이름처럼 짙은 검은빛이다.

 

 명실공히 라트비아의 국민주인 리가 블랙 발삼은 국제적인 주류 품평회에서도 여러 번 수상하는 등 명성이 높기 때문에 리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구입하는 필수 관광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몸이 으스스할 때 여제의 감기를 말끔히 치료한 리가 블랙 발삼 한 잔 마셔보는 게 어떨까?

 

 

예카테리나 여제의 업적

 그렇다고 예카테리나가 대제의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의 통치자는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헌도에서는 오히려 표트르 대제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 대제의 시절부터 러시아의 외채 문제는 국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커졌고, 언제 지불불능의 상태가 닥칠지 모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과세에 따르는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지 15년 만에 외채의 75%를 청산해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본주의적인 산업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공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교역량이 급증했다. 더욱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교역로를 방어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러시아군'을 육성해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현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는 그녀의 시대에 확장한 영토보다 오히려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동방으로의 확장은 순조로워서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육로로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1784년에는 알래스카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 Company)를 설립해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에 반해서 튀르크와 폴란드가 막고 있는 서방의 진출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튀르크와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1768년에 발발한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폴란드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 Common wealth)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예카테리나 2세와 관계를 가졌던 열두 명의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 신분으로 러시아 왕궁에 머물렀던 30대 초반에 세 살 위인 예카테리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는 1764년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폴란드 왕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애인인 스타니슬라브를 국왕으로 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쿠데타는 1768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모의해서 두 나라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와 튀르크의 첫 번째 전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는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이 저항 세력을 러시아군이 튀르크의 국경 지역까지 추격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스타파 3세(Mustafa III)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첫 번째 전쟁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Vasilyevich Suvorov) 장군이 그 이름을 알린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러시아에게 고무적인 것은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서 튀르크의 해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로 통하는 두 개의 항구와 크림 반도에서의 우선적인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상당히 위험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실익을 챙겼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1780년에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을 상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연합해서 무장중립연합(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결성해 교역로를 방어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토 확장은 1780년대에 클라이맥스에 오르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이 크게 공헌했다. 포템킨은 1762년의 쿠데타에서 초기부터 오를로프 형제를 도왔던 근위대 소속의 청년 장교였다. 예카테리나에게 영원한 연인일 것 같았던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자 포템킨이 1770년대 중반부터 오를로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리 포템킨은 성향이 예카테리나와 똑같았다. 내면적으로는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러시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은 러시아를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함께 키워갔다. 그들은 파벨이 첫 손자를 낳자 알렉산드르(Aleksandr Pavlov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콘스탄틴(Konstantin Pavlovich)이다. 이것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의식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와 그리고리 포템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트의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오리엔트는 현재의 오스만 튀르크였으며, 마지막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이었다. 포템킨은 흑해 연안을 확보하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포템킨에게는 타우리스 대공(Prince of Tauris)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타우리스는 고대에 크림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튀르크 모두 알게 되었다. 1788년에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튀르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는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외교적인 준비도 철저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양쪽 방향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오차코프를 점령하자 무스타파 술탄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난공불락의 이즈마일 요새를 함락시켰고, 흑해 함대는 다시 한 번 튀르크 해군을 궤멸시켰다. 1792년 러시아와 튀르크의 국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약 20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세 번에 걸쳐 영토를 분할해 합병한 것이다. 역사가 오랜 이 왕국의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으며,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다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카테리나는 문화 측면에서도 러시아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과학원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녀의 공헌이었다. 남편을 잃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15년을 보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를 1782년에 과학원장에 임명하고 외국의 석학들을 초빙해서 과학원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예카테리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인이었고 계몽주의자였다. 그녀는 외국의 계몽주의자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분명히 계몽주의 계열에 속하는 희곡과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입법을 위해 소집한 1776년의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1785년에 그녀가 기초한 <귀족 헌장(Charter to the Nobles)>과 같은 수십 개의 법률이나 선언문은 분명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절대군주였으며, 그러한 군주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카테리나는 말년에 점차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이상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탐욕과 집착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계몽주의자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권모술수에 통달한 늙은 여우만 남았다.

 

 그녀는 대제국 러시아의 여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남녀의 사랑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영광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녀는 숱한 애인들을 만들고, 그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물했다. 다음은 잠시 예카테리나의 총애를 받았다 버림받은 한 사나이가 차리나에게 받은 작별의 선물 목록이다.

 

백작의 작위

5만 루블의 현금

매년 5천 루블의 연금

우크라이나의 농노 4천 명

 

 그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혹은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만에 다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혈통으로는 도저히 차르가 될 수 없었던 외국 여인이 무려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비법이 여기에 숨어 있다. 권력과 사랑,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젊은 남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795년에 '대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다. 그녀는 이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치세는 분명히 러시아 역사에서는 영광스러운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가 폭력을 통해 잠재운 러시아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 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렬하면서도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평가와 비판

 러시아인들과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러시아인들까지도 그를 높이 평가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도 그는 높이 평가된다. 그는 영토 확장과 민생 안정, 내분 수습, 경제 발전 등을 통해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대폭 신장시켰다 하여 예카테리나를 오래도록 찬미하였고 이반 뇌제 등과 함께 러시아의 영웅이자 민족적 자긍심의 근원으로도 평가된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과 유럽계의 시각에서는 그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제정 러시아의 모순은 그녀의 치세에서 심화되었다. 귀족들의 강력한 지지를 기반으로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왕이 된 그녀는 자연스럽게 귀족들의 특권을 더욱 강화시켜 줄 필요가 있었고 귀족들은 납세와 군사적 의무로부터 거의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고삐풀린 특권을 누렸다. 대신에 이러한 부담은 러시아의 농민들이 지게 되었고, 더욱이 귀족들이 러시아의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하자 농민들은 본래의 땅을 잃었으며, 먹고살기 위하여 어쩔 수없이 스스로 귀족들의 농노로 들어가게 되었다. 농노들의 삶은 피말릴 정도로 처절하였으며, 특히 성격파탄의 귀족들의 휘하에서 살아가는 농노들은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학대도 감수해야 했으며, 귀족들의 교활함은 농노들에게 일부러 싼 봉급을 시간제로 줌으로써 그들이 일주일 내내 노역에 시달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들은 도박장에서 돈 대신에 거래되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서 농노들은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하층민들의 처절한 삶은 그들로 하여금 분노가 누적되게 만들었고, 예카테리나 2세의 치세에는 빈번하게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당시에 러시아 외부에서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만큼 재정 러시아를 뒤흔든 내부적인 사건은 푸카초프의 반란이었다. 예카테리나 2세가 표트르 3세를 석연치 않은 방법으로 축출한 것에 의문을 품은 하층민들은 이윽고 계속되는 비참한 삶 속에서 "좋은 차르"가 나타나길 기대했다. 푸카초프는 자신이 축출된 표트르 3세라고 말하며 러시아 각지의 농민들과 농노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군사를 조직했으며, 이 중에는 타타르인을 포함하여 러시아 전체에 퍼져있던 다양한 소수민족들도 푸카초프를 지지하였다. 이 푸카초프이 반란은 무려 3년을 지속하였고, 결국은 푸카초프의 패배로 끝났다. 그는 사지가 오체분시되는 형벌을 받았으며 그와 함께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도 마찬가지로 처참한 방법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예카테리나 2세와 귀족들이 더욱더 민중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도록 만들었다.

 

 성격에 대해서는 이기주의적이며 겉치레가 심하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오만한 성격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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