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예카테리나가 대제의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의 통치자는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헌도에서는 오히려 표트르 대제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 대제의 시절부터 러시아의 외채 문제는 국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커졌고, 언제 지불불능의 상태가 닥칠지 모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과세에 따르는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지 15년 만에 외채의 75%를 청산해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본주의적인 산업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공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교역량이 급증했다. 더욱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교역로를 방어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러시아군'을 육성해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현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는 그녀의 시대에 확장한 영토보다 오히려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동방으로의 확장은 순조로워서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육로로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1784년에는 알래스카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 Company)를 설립해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에 반해서 튀르크와 폴란드가 막고 있는 서방의 진출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튀르크와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1768년에 발발한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폴란드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 Common wealth)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예카테리나 2세와 관계를 가졌던 열두 명의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 신분으로 러시아 왕궁에 머물렀던 30대 초반에 세 살 위인 예카테리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는 1764년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폴란드 왕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애인인 스타니슬라브를 국왕으로 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쿠데타는 1768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모의해서 두 나라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와 튀르크의 첫 번째 전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는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이 저항 세력을 러시아군이 튀르크의 국경 지역까지 추격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스타파 3세(Mustafa III)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첫 번째 전쟁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Vasilyevich Suvorov) 장군이 그 이름을 알린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러시아에게 고무적인 것은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서 튀르크의 해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로 통하는 두 개의 항구와 크림 반도에서의 우선적인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상당히 위험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실익을 챙겼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1780년에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을 상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연합해서 무장중립연합(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결성해 교역로를 방어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토 확장은 1780년대에 클라이맥스에 오르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이 크게 공헌했다. 포템킨은 1762년의 쿠데타에서 초기부터 오를로프 형제를 도왔던 근위대 소속의 청년 장교였다. 예카테리나에게 영원한 연인일 것 같았던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자 포템킨이 1770년대 중반부터 오를로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리 포템킨은 성향이 예카테리나와 똑같았다. 내면적으로는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러시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은 러시아를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함께 키워갔다. 그들은 파벨이 첫 손자를 낳자 알렉산드르(Aleksandr Pavlov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콘스탄틴(Konstantin Pavlovich)이다. 이것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의식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와 그리고리 포템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트의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오리엔트는 현재의 오스만 튀르크였으며, 마지막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이었다. 포템킨은 흑해 연안을 확보하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포템킨에게는 타우리스 대공(Prince of Tauris)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타우리스는 고대에 크림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튀르크 모두 알게 되었다. 1788년에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튀르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는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외교적인 준비도 철저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양쪽 방향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오차코프를 점령하자 무스타파 술탄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난공불락의 이즈마일 요새를 함락시켰고, 흑해 함대는 다시 한 번 튀르크 해군을 궤멸시켰다. 1792년 러시아와 튀르크의 국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약 20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세 번에 걸쳐 영토를 분할해 합병한 것이다. 역사가 오랜 이 왕국의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으며,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다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
예카테리나는 문화 측면에서도 러시아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과학원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녀의 공헌이었다. 남편을 잃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15년을 보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를 1782년에 과학원장에 임명하고 외국의 석학들을 초빙해서 과학원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예카테리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인이었고 계몽주의자였다. 그녀는 외국의 계몽주의자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분명히 계몽주의 계열에 속하는 희곡과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입법을 위해 소집한 1776년의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1785년에 그녀가 기초한 <귀족 헌장(Charter to the Nobles)>과 같은 수십 개의 법률이나 선언문은 분명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절대군주였으며, 그러한 군주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카테리나는 말년에 점차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이상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탐욕과 집착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계몽주의자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권모술수에 통달한 늙은 여우만 남았다.
그녀는 대제국 러시아의 여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남녀의 사랑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영광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녀는 숱한 애인들을 만들고, 그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물했다. 다음은 잠시 예카테리나의 총애를 받았다 버림받은 한 사나이가 차리나에게 받은 작별의 선물 목록이다.
백작의 작위
5만 루블의 현금
매년 5천 루블의 연금
우크라이나의 농노 4천 명
그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혹은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만에 다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혈통으로는 도저히 차르가 될 수 없었던 외국 여인이 무려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비법이 여기에 숨어 있다. 권력과 사랑,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젊은 남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795년에 '대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다. 그녀는 이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치세는 분명히 러시아 역사에서는 영광스러운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가 폭력을 통해 잠재운 러시아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 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렬하면서도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