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Istanbul)

 

이스탄불(Istanbul)

 물의 화환에 둘러 싸여있는 도시 이스탄불! 지중해와 흑해를 잇는 마르마라(MARMARA)에서 바라보는 이스탄불은 수 많은 모스크의 돔과 첨탑 그리고 현대적 감각의 마천루가 은은히 잿빛 하늘과 어루러져 환상적인 실루엣을 자아내고 있다.

 고대에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 불리웠던 이 축복받은 도시는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을 접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도시이다.

 세계의 역사를 좌우했던 두 제국,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수도로써 약 1500년간 번영을 누려왔고 두 제국의 국교였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문명이 서로 맞닿는, 가히 세계적인 관광지라 아니할 수 없다.

 

 이스탄불은 유동인구를 포함하여 약 1,500만 명이 살고 있으며 인구 밀도가 제일 높은 제 1의 도시이다. 일찌기 골든혼의 끝자락에 자리 잡기 시작한 거주자들은 아크로 폴리스를 만들며 정착하였다. BC 7세기 '비잔티움'의 도시가 형성되면서 무역과 상업의 중심 센터가 되었으나 페르시아인의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되고 곧 로마 황제에 의해 점령 파괴되었다.

 

 AD 330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비잔티움은 로마제국의 수도가 되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워지기 시작했다. 이 '콘스탄티노플'은 AD 1453년 오스만 튀르키예에 의해 점령당하고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어지면서 약 48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역사적인 도시가 되었다. AD 1922년 오스만 제국의 왕조는 몰락하게 되고 1923년 민주공화국의 수도는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 옯겨졌다.

 

 

 흑해 어귀에 있는 구릉성 3각형 반도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의 양쪽에 걸쳐 있어서 유럽·아시아 양 대륙에 속한다.

 

 비잔티움은 BC 8세기말경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로 건설한 곳으로서 BC 512년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갔고, 그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기도 했다. 로마 공화정 치하에서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간(69~79) 동안에는 로마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수도로 채택되면서 '신로마'(New Rome)로 개칭되었다. 330년에는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뒤에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콘스탄티노플은 그리스도교 도시로 포고되었으며, 그리스도교 세계의 종교 중심지가 되었다. 6~13세기에는 페르시아인·아랍인·불가리아인·러시아인들에게 자주 포위당했다.

 

 1203년 제4차 십자군에게 점령당해 이들에게 약탈당하고, 로마 가톨릭 지배하로 들어갔다. 1261년 다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에게 또다시 넘어갔다. 메메드 2세 치하에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1453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그뒤 1922년까지 평화로운 번영의 시기가 지속되었다.

 1923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고, 콘스탄티노플은 1930년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개칭되었다.

 

 유럽 지구에 전체주민의 3/4 이상이 거주하며, 주요 상사· 호텔· 사무실 등이 집결되어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옛 도시(Stamboul) 안에는 비탈이 가파르고 꼭대기가 평평한 7개의 구릉이 있는데, 이곳은 가장 중세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좁은 해협인 골든혼(Golden Horn) 건너편에 자리잡은 베욜루는 이스탄불 시의 현대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구역으로, 극장과 수많은 터키 정부청사들이 들어서 있다.

 

 이스탄불의 기후는 아열대 및 지중해성 기후로서 연평균기온은 14℃, 연강수량은 760~900㎜이다.

 

 튀르키예의 제조업 공장들 가운데 약 1/3을 수용하며, 주요공업으로 섬유· 시멘트· 유리· 가죽제품 제조업과 담배 가공업, 자동차 및 트럭 조립업, 인쇄업, 조선 및 선박수리업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많은 대규모의 튀르키예은행과 외국 보험회사들이 시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관광업이 중요한 수입원이다.

 

 커다란 역사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시로서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수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보존이 잘 된 기념물들로는 예레브스탄 궁전(지하 궁전)과 콘스탄티누스 궁전('텍푸르 사라이'라고도 함.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후 1,000년 뒤에 건립)이 꼽힌다. 고대에 세워진 많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상당수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며 더러는 모스크로 이용되기도 한다. 이들 중 가장 큰 것은 하기아 소피아로서 1453년 모스크로 바뀌었다가 1935년에 박물관이 되었다(하기아 소피아). 성벽으로 둘러싸인 톱카피 궁전에는 문서·도기·갑옷·직물 등 튀르키예의 중요한 수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곳은 수세기 동안 튀르키예의 문화 중심지였다. 새로 생긴 문화시설에는 1969년 예술 센터로 개관된 아타튀르크 문화궁전이 있으며, 여러 학술단체와 연구소·박물관·도서관 등도 있다. 튀르키예 최대·최고(最古)의 고등교육기관인 이스탄불대학교가 있으며, 그밖에 이스탄불공과대학교· 마르마라대학교· 보스포루스대학교· 미마르시난대학교· 일디즈대학교 등이 있다.

 

 철도를 통해 동서 유럽 및 중동의 시리아·이라크와 연결된다. 이스탄불 시의 유럽 지구와 아시아 지구를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길이 1,073m)는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 현수교들 중의 하나이다. 서쪽으로 27㎞ 지점에는 예실쾨이 국제공항이 있다.

 

 이스탄불의 항구는 튀르키예의 수출입품목의 대부분을 취급한다. 

 

 

교 통

 시내 관광에는 택시, 합승버스(Dolmu) 및 지하철(앙카라, 이스탄불)등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각 도시간 시외버스가 발달되어 있어 이용이 편리하나 기차는 낡고 협궤로 장시간이 걸려 여행수단으로 부적절한 편이다. 튀르키예의 교통관습은 차량 우선인 바, 보행시(특히 횡단보도 건널시) 각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는 배버스가 존재한다. 출퇴근 시간이면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중교통 수단으로 그 역할을 유감없이 해내고 있다

 

 

이스탄불 음식정보

 프랑스 음식, 중국 음식과 더불어 세계 3대 주요 요리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튀르키예 요리. 영토 확장 시기에 자연스레 흡수된 유럽과 아시아, 북부 아프리카 등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또 하나의 독창적인 음식으로 발전되어 왔다.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의 소박한 요리에서부터 중동지방의 섬세하고 다양한 요리의 특성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는 튀르키예 음식의 맛을 보장해주는 최대 요인은 무엇보다도 신선한 재료들만을 엄선하여 각 지방의 특색에 맞는 독창적인 요리법으로 다양한 요리들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주요 메뉴

케밥(kebap)

 튀르키예 음식에 있어 가장 많이 사용되어 지는 재료는 양고기이다. 이 중에서도 한국인들의 입맛에 가장 맞는 것은 양고기 또는 쇠고기를 큰 덩어리째로 봉에 끼워 굽는 쉬쉬케밥(shish kebap)과 얇게 썬 고기를 몇겹으로 금봉에 감아 회전 시켜가며 구워 먹는 되네르케밥(doener kebap)이 있다. 이 외에도 되네르케밥에 요구르트와 토마토 소스를 첨가한 이쉬켄데르 케밥(ishkender kebap)도 유명하다.

 

 

돌마(dolma)

 포도나무 잎, 양배추 잎, 피망 등의 야채 안에 각종 양념을 한 쌀이나 파스타를 넣어 만든 음식으로 그 종류가 수십가지에 이른다.

 

 

보렉(borek)

 치즈나 계란, 각종 야채, 간 고기 등이 든 얇은 페스트리를 튀기거나 구운 것이다.

 

 

필라프(pilav)

 처음 요리를 하는 사람에게는 무척 까다로울 수 있는 쌀을 이용한 음식으로 특히 기름을 섞은 흰밥인 베야즈 필라프(beyaz pilav)를 즐겨 먹는다.

 

 

 

마실거리

튀르키예식 커피

 오스만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커피는 튀르키예인들의 생활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애용되어 왔다. 1955년 두 명의 시리아 무역업자들로 인해 처음으로 이스탄불에 소개된 커피는 17세기 중순, 술탄에게 제공되는 의식의 한 부분으로 여겨질 만큼 중요한 기호식품으로 취급되었다.

 튀르키예식 커피는 아라비아산 원두를 아주 고운 가루처럼 갈아 사용한다. 카더몬(cardamom)이라는 향신료를 커피를 갈 때 첨가하기도 하는데, 간혹 그 향신료 씨앗을 통째로 커피에 띄워 내기도 한다.

 커피의 종류는 당도에 따라 설탕이 많이 첨가된 아주 단 커피부터 블랙커피까지 6단계로 나뉜다. 그러나 일단 커피가 나오고 난 다음에는 설탕을 첨가하지 않기 때문에 스푼은 같이 나오지 않는다. 커피와 함께 나오는 물로 입을 한번 행군 다음 커피는 한모금씩 천천히 마시도록 한다. 아침식사 후를 제외하고는 아무 때나 마셔도 상관없다.

 

(cay)

 일반인들이 커피보다 더 널리, 대중적으로 애용하는 음료이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튀르키예에서는 차를 낼 때 정교하고 작은 투명한 유리잔을 사용하는데, 이는 차가 지니고 있는 검붉은 색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차의 온도를 오랫동안 유지하는데도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와인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생산되어 현재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고 있는 터키산 포도주는 지역에 따라 약 34종의 다양한 종류로 시판되고 있다. 특히 유명한 포도주 상표로는 돌루자(Doluca)와 카박클르데레(Kavaklidere)를 꼽을 수 있다.

 

그외 음료류

- 살렙(salep) : 난초향을 첨가하여 끓인 우유로 맛이 좋을 뿐 아니라 감기치료에도 효과적이다.

- 보자(boza) : 옥수수나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걸죽한 음료로 겨울 밤, 길거리의 가판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이 음료는 시나몬을 첨가해서 구운 병아리콩과 함께 먹으면 더욱 그 맛이 좋다.

- 아이란(ayran) : 요구르트, 물, 소금을 같이 저어서 만든 쓴 맛이 나는 음료

- 라키(laki) : '사자의 젖'이라고 불리는 라키는 아니스 열매향이 나는 터키의 토속주로 라키에다 물을 타면 우유빛으로 변하게 된다. 전채인 메제(meze)를 곁들여 먹는 라키는 일반적으로 얼음을 넣어 차게 해서 마시는데, 보통 한 사람에게 적당한 양은 2잔~4잔 정도라고 한다.

 

 

이스탄불에서 쇼핑하기

 튀르키예의 특산품은 독창적이며, 정교한 세공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각종 수공예품, 세계적으로 유명한 튀르키예산 양탄자, 수공 도자기 제품들, 구리세공품, 메르샤움이라고 불리는 담배용 파이프, 각종 골동품 등은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최고의 기념품으로, 또한 선물로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외에도 최상의 품질을 자랑하는 가죽이나 스웨이드 제품 역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구 시가지에 위치한 카팔르 차르쉬(Covered bazaar 혹은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튀르키예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도 손꼽히고 있는 곳이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반면 무스르차르쉬쉬(Misir Carsisi) 시장은 각종 향료의 유혹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동양 특유의 신비한 세계로 빠져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시장들이 각종 물건들과 사람들로 항상 북적대는 대중을 위한 장소라면 타크심-니샨타쉬-쉬슬리를 연결하는 지역들은 정교한 보석류와 높은 수준의 핸드백, 신발 등의 가죽제품, 미술품 등을 파는 세련된 상점들이 밀집한 고급 쇼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점들은 보통 08:30~19:00까지 개장하며 일요일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양탄자나 보석류, 가죽제품을 구입할 때는 현지 사정을 잘 아는 가이드의 도움을 받거나 거리의 가판대가 아닌 믿을 만한 상점을 이용하도록 한다.

 

튀르키예산 양탄자

 튀르키예산 양탄자는 두말한 나위도 없을 만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튀르키예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환경, 사회, 경제, 종교적인 요인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라 하겠다. 터미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아주 뚜렷한 온난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에 항상 변화하는 온도에 민감하게 대처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필요했고 이런 이유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양탄자인 것이다.

 튀르키예에 살던 유목민들에게 있어 텐트 바닥에 유일하게 깔려 있던 카페트는 벌레차단의 수단이자 땅을 편평하게 해 주는 도구이면서 따뜻하게 몸을 보호해주는 생활필수품이었다.

 

 튀르키예에서 카페트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으나 가장 명확히 드러나는 때는 셀주크 시대로, 이는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이 곳을 다녀가면서 남겨놓은 양탄자들의 아름다움과 예술성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5~16세기, 튀르키예산 양탄자는 유럽 화가들의 그림 속에 등장하게 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진다. 그리고 17세기, 대표적인 중상주의 국가로 발전한 네덜란드의 화가인 벌미르(Vermeer)는 자신의 그림에서 튀르키예산 양탄자는 바닥에 깔기에는 너무나 귀중한 것이어서 성모와 왕족의 발 아래가 아니면 깔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수세기동안 아나톨리안의 여성들은 그들이 손수 만드는 양탄자 속에 그들만의 희망과 공포, 관심, 정절과 사랑을 표출해내고자 하였고 이는 각각의 양탄자가 지니고 있는 화려한 색상과 독특한 문양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다.

 

세공품

 장인들의 높은 기술에 비하여 훨씬 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오니키스, 금, 은, 황동, 동의 수많은 세공품들과 다양한 종류의 가죽세공품도 유명하다. 특히 가죽세공은 오스만 제국 시대부터 꾸준히 발전된 분야로, 현재 직물에 이어 튀르키예의 제2의 수출품목이다.

 

수공예품

 해포석 파이프와 터키 특유의 다양한 소재의 수공예품들은 터키 특산품의 매력이 가득하다.

 

 

이스탄블 기후(℃)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이스탄불

(ISTANBUL)

최고평균

7

8

11

15

19

24

25

25

22

18

15

10

최저평균

3

3

4

8

11

15

17

18

15

12

9

5

평 균

5.6

5.7

7.0

11.4

16.0

20.7

23.3

23.4

20.0

15.6

11.6

8.2

강수량mm

89

60

60

37

32

28

27

22

49

60

87

96

 

 

 

관광 명소

돌마바체 궁전 (Dolmabahce Palce)

 최초에는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시대의 왕들의 여름 별장이던 것을 1843~1856년 사이에 증축해서 공식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은 유럽 양식의 근대풍의 건물로서 현대의 화폐가치로 5억불의 건축비용이 소요되는등, 그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가득찬 정원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은 해변을 흙으로 메꾸고 세운 곳이다. 50만 금화, 즉 현재 돈 5억불에 맞먹는 기금으로 건립된 이 궁은 1856년 완공되었는데, 궁의 내부 장식과 방들을 꾸미기 위해 총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3층의 대칭구조로 지어진 궁의 내부에는 285개의 방과 43개의 홀, 280개의 화병, 156개의 다양한 시계, 4톤과 2톤 중량의 샹들리에를 포함한 36개의 샹들리에, 58개의 크리스탈 촛대, 560점 이상의 그림, 손으로 직접 짠 대형 카페트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급격히 악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이를 만회하고자 서구화를 추진하고 국력 쇄신을 도모하던 압두메짓 1세가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을 모방해 초호화판으로 이 왕궁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결국 막대한 건축비 지출은 어려웠던 왕실 재정을 더욱 악화시켜 오스만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루멜리 성 (Rumeli Castle)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1년전인 1452년에 후방의 방비를 굳건히 하기위해 보스포러스 해협의 가장 좁은 위치에 세운 성으로 현재에도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그랜드 바자르 (Grand Bazaar)

 비잔틴 시대부터 현재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장소는 무역의 중심지였다. 이후 터키가 이스탄불을 장악하게 되면서 1455~1461에 걸쳐 그곳에는 도시의 경제생활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두 개의 주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 이후 사람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위한 더 많은 장소를 필요로 하였고 그 결과 주 아케이드의 바깥부분까지 그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오토만 시대를 거치면서 지진, 화재 등으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던 이 곳은 몇 번에 걸친 복구 끝에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8개의 출입구와 4천개 이상의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 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는 세계의 가장 큰 바자르 중의 하나로 터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관광명소로 손 꼽히고 있다. 토요일은 일찍 문을 닫으며 일요일과 종교적 휴일에는 폐점한다.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시대인 1461년에 세워진 종합시장으로서 약 20만㎢에 약 5,000개의 상점이 미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종 터어키 토산품 및 특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시장전체가 돔(DOME) 양식의 지붕으로 덮혀있어서 커버드(COVERED) BAZAAR 라고도 한다.

 

 

히포드럼(Hippodrome)(고대 로마 경기장)

 본래 이곳은 196년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에 의해 지어진 검투 경기장이었는데, 4세기 무렵 비잔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검투 경기는 금지되고 대신 말이 끄는 마차 경기장으로 바뀌었다. 10만 명 정도 수용이 가능했다고 하는 이곳은 경마장으로 이용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왕위 계승을 놓고 벌어진 수많은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13세기 초 십자군의 침입으로 이 광장에서 비잔틴군과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의 광장 내 유적이 이때 파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곳에는 아주 귀중한 세 개의 기념비가 잘 보존되어 있다.

 "디킬리타스(Dikilitas)"라고 불리는 이집트 오벨리스크는 원래 BC 15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헌사한 사원에 세워졌었던 두 개의 오벨리스크 중 하나로 당시 왕족들의 일상을 양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외에도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고 알려진 "오르메 수툰(Orme Sutun)", 아폴로 신전에서 가져온, 세 마리의 뱀이 서로 뒤엉켜 직경 3m의 황금 그릇을 받치고 있는 형상의 셀팬타인 기둥(Serpentine)이 있다.

 

➀ 이집트 첨탑(EGYPTIAN OVELISK)

  BC 약 1500년경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현재의 룩소에 위치)에 세워졌던 것을 비잔틴 제국의 데오도시우스 1세가 390년에 이곳으로 가져와 세운 24m 높이의 통대리석 첨탑.

 

➁ 뱀기둥(SERPENTINE COLUMN)

  고대 그리이스의 31개 도시국가가 연합하여 페르시아 제국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BC 479년경 그리이스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세워진 것을 콘스탄틴 대제가 이곳에 옮겨 세운 청동탑.

 

➂ 비잔틴 첨탑(BYZANTINE COLOSSUS)

  비잔틴 제국시대인 940년, 콘스탄틴 7세에 의해 세워진 첨탑.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술레이마니에 모스크(Suleymaniye Mosque)

 거대한 돔과 4개의 날카로운 첨탑을 지닌 술레이마니에 모스크는 골든 홀 서쪽 해안에 우뚝 솟아 있으며 이스탄불 모스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알려져 있다. 1550~1557년 오스만 제국 황금시대의 건축가 시난에 의하여 세워진 이 모스크는 구릉의 정상에 세워졌다. 이 모스크의 중앙 정원 네 구석에 세워진 4개의 첨탑 규모는 이곳을 찾는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내부의 미후라브(기도를 위하여 벽에 판 구덩이)와 설교단은 아름다운 조각이 새겨진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스테인드 글래스의 창 너머로의 빛은 스테인드 글래스를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물들여 준다.

 이 모스크 부지 내에는 술레이만과 그의 처 흇레무 술탄(러시아명 로쿠세레나)의 사당이 있으며 부근에는 시난의 사당도 있다. 또한 사원 내에는 4개의 메드레세(이슬람 신자교), 1개의 외곽교, 캐러밴 사라이(대상들의 숙박지), 튀르키예욕탕, 저소득층을 위한 주방과 호스피스 시설들이 있다.

 

 

지하 저수저(Yerebatan Distern, 예레브스탄 궁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안 대제때인 약 6세기경에 만들어진 지하 저수지는 폭 70m, 길이 140m,  크기로 높이 8m, 336개의 기둥이 지상의 흙을 바치고 있다. 이것은 이스탄불에서 약 19km 떨어진 벨그라드 초원지대에서 물을 이곳에 까지 수로를 통해 끌어들여 궁전의 식수로 사용해 왔다.

 기둥과 천장 장식이 화려하게 건축되었기 때문에 이를 '지하 궁전(Yerebatan Saray(palace), 예레바탄 사라이)'이라 부른다.

 1985년에서 1988년 사이, 이스탄불 시는 이 저수지를 개축하여 새로 단장하였다. 기둥들 사이에는 나무를 재료로 도보길을 만들고 조명과 음향효과를 써서 관광객을 위한 장소로 만들었다. 석고위의 수심 측정기의 눈금이 기둥머리에 까지 다다른 것을 보면 당시 이 저수지에 물이 얼마나 가득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건물의 양 구석의 기둥의 받침은 메두사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이를 제조한 사람들이 이단을 믿지않는 기독교인임을 알 수 있다. 물 속의 잉어 조각은 장식적 효과를 주는 것인데 이는 오염으로부터 물을 보존한다는 의미를 띄고 있다. 어떤 이들은 비잔틴 인들이 실제 이 저수지에서 물고기를 길렀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메두사(Medusa)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녀 혹은 괴물로, 고르고네스 3자매 중 하나이다. 메두사의 얼굴은 너무나 무시무시해 사람들이 그 얼굴을 보기만 해도 돌로 변해버린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불사신이 아닌 메두사는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려 죽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자 마녀로, 스테노·에우뤼알레·메두사로 이루어진 고르고 세 자매들 중 하나이다. 고르고 메두사라고도 한다. 고르고 자매는 원래 아름다운 여인들이였으나, 유독 미모가 출중한 메두사가 해신(海神) 포세이돈과 함께 여신 아테나의 신전(神殿)에서 정을 통하던 중 아테나 여신에게 들키게 되면서 여신의 저주로 흉측한 괴물로 변하게 되었다. 저주 받은 메두사의 모습은 무섭게 부풀어 오른 얼굴과 튀어나온 눈, 크게 벌어진 입, 길게 늘어뜨린 혓바닥, 멧돼지 어금니처럼 뾰족한 이빨, 손은 청동이며 목은 용의 비늘로 덮여 있고 머리카락 한올 한올은 꿈틀거리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그리고 메두사를 직접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하게 되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아테나 여신은 영웅 페르세우스를 시켜 메두사를 처단했다. 메두사의 얼굴을 직접 보면 돌로 변하기 때문에 페르세우스가 청동 방패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고 그녀의 목을 치도록 일러주었으며, 이로서 메두사는 단칼에 목이 잘려 죽게 되었다. 페르세우스의 손에 목이 잘릴 때, 그 피에서 포세이돈의 자식인 날개 달린 천마(天馬) 페가소스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다고 한다. 메두사의 잘린 목은 여신 아테나의 방패에 장식으로 붙여졌으며 이후 여신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과 경외심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편 로마의 론다니니궁()에서 뮌헨으로 옮겨진 메두사의 대리석 마스크는 조각예술의 걸작으로 꼽힌다. 또한 정신분석학에서 메두사는 아들을 사랑할 위험이 큰 어머니, 혹은 여성생식기, '자식에게 성적 요구를 가하는 여성의 상징'이라고 P.E.슬레이터는 해석하고 있다.

 

 

블루모스크(술탄 아흐멧 모스크(Sultan Ahmet Mosque)

 정식 명칭이 '술탄 아흐멧 모스크'인 블루 모스크는 톱카프 궁 근처에 술탄 아흐멧 1세에 의해 1609년부터 건립되기 시작 했다.

 블루 모스크는 직경이 27.5m, 높이가 43m이고, 정확한 비례에 의한 6개의 탑이 인상적인 돔과 잘 조화되어 이슬람 건축 예술의 우수성을 반영해 주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술탄 아흐멧 1세는 기독교의 소피아 사원을 능가하도록 지으라고 명령했고 성 소피아 사원 바로 건너편에 건립하였다.

 이 모스크는 당시 유명한 건축가 이던 시난(sinan)의 제자이던 메흐멧 아가(Mehmet Aga)에 의해 1609~1617년에 지어졌다.

 모스크 내부의 위쪽 벽을 뒤덮고 있는 푸른 색상의 타일 장식과 중앙 돔으로 부터 나 있는 260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어우러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장관을 연출해 내고 있으며, 기둥과 돔 벽에 명암이 있는 99가지의 푸른 타일을 사용함으로써 이 사원은 "푸른 모스크"(Blue Mosque)라는 애칭을 갖게 되었다.

 그후 왕들은 이곳을 중요한 종교적 정책을 결정하거나, 종교적 축제를 거행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코라성당 (Chora Church)

 이 자리에 우스티니안 수도원이 있었으나 558년의 대지진에 완전히 파괴된 직후 같은 자리에 이 성당이 세워졌는데, 당시에는 궁성밖에 위치해 있어서 "코라 (CHORA )" 즉 "교외의 성당" 이라고 불리웠다. 이 성당은 내부의 천정과 벽이 성서를 내용으로 하는 모자이크 및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군사 박물관 (Military Museum)

 1959년에 전 사관학교 자리에 세워진 이 박물관에는 튀르키예의 군 역사와 관계되는 각종 자료와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6.25  전쟁관이 있어서 한국인들에게는 관심이 높은 곳이다.  또한,  매일 오후 3시에는 오스만 튀르키예 제국의 고유 군악대의 연주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성 소피아 성당 (St. Sophia Church)

 세계 건축 예술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성 소피아 성당은 신의 영지를 뜻하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537년 건립되어 예수 그리스도에게 봉헌된 교회다. 가장 저명한 수학자 안데미우스와 위대한 기하학자 아시도로스에 의해 완공된 성 소피아 성당은 전형적인 로마풍의 건축 양식을 갖고 있다. 소피아 성당의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건물안으로 들어온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같은 훌륭한 위업을 완성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두 손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 솔로몬의 왕이여!내가 당신을 능가했소"라고 흥분되어 외칠 정도로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이다.

 

 762년까지 전 기독교의 본부로 사용되었으나 서로마의 카톨릭과 분리된 이후에는 그리스 정교의 총본산으로 사용되었다.

 

 453년 오스만 튀르키예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이후에는 이 성당이 회교 사원으로 개조되어 500여년 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성당밖에 세워진 4개의 회교 첨탑은 시대에 따라 각기 형태를 달리하면서 세워졌다. 1935년 터키의 국부인 아타투루스가 유서있는 훌륭한  건물을 박물관으로 보존해 나갈 것을 결정한 후 종교적인 의식을 금했다.

 

 

 15층 높이에 해당하는 56m 높이에 거대한 중앙 돔과 많은 보조 돔을 갖고 있는 이 성당은 건축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비잔틴 건축물의 표본이며, 회교 건축 양식은 물론 유럽의 각종 건축 양식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건물내에는 초기 기독교 성화와 회교의 종교적인 장식물이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살아 있는 역사적 현장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성당벽에는 모자이크 그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성화들이 있는데 이것이 후일 기독교 성화 확립에 표본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를 이겼노라.

  (Solomon, I have surpassed you)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에서 성소피아 대성당의 헌당식이 거행된 537년 12월 27일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한다며 외친 말이다.

 

*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이곳만은 누구도 손을 대서는 안 된다.

  (How can it be so beautiful? No one should touch this place.)

 1453년 5월 29일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성소피아에 들어선 후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톱카피 궁전(Topkapi Palace)

 톱카피 궁(술탄 궁)은 터어키어로 "톱"은 대포, "카프"는 문을 뜻한다. 이곳은 1478~1853년 약 400여년간 세계의 으뜸가는 대제국의 중심지였다.

 이 제국의 영토는 발칸을 포함하여 빈에 이르고, 북으로는 크레미야, 코카서스 지방, 동으로는 페르샤만에서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고, 남으로는 챠르호에 이르는 북 아프리카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다. 18가지 종교와 20여개 언어가 제국내에서 사용되었느데 이 제국의 절대 권력자는 톱카프 궁에 사는 알라의 그림자인 술탄이었다. 심지어 전의가 실수하여 술탄의 옆 이를 뽑았을  경우는 전의 자신의 이도 하나 뽑지 않으면 안되었다. 왜냐하면 이런 과오는 술탄 재산을 손상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스포로스 해협과 말마라 해, 골든 해협의 삼면의  바다가 만나는 고대 비잔틴 성터 위에 위치한 이 궁은 70만㎡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1839년 새로운 궁전 돌 마바흐체로 옮길 때까지 22여명의 술탄이 거주하였다. 이곳에는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궁중 생활의 독특한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은 세계 최대의 도자기 박물관의 하나로 중국의 송 청자, 명 백자 및 청화 백자청의 적, 녹자기, 일본의 이미라 자기, 유럽의 각종 자기, 은제품등 약 15,000여점이 전시되었다.

 보물관에는 세계에서 세 번째가는 86케렛의 다이아몬드를 비롯, 세계  제일의 에머럴드(1320그람), 6666개의 다이어가 박힌 48kg의 순금 촛대, 마호멧의 보석 단검등을 포함하여 진기한 보석들이 보려진 유리조각 만큼 많이 전시되어 있다.

 회교 성물관에는 이슬람 교조인 마호멧이 생전에 사용하던 칼, 활, 의류, 도장, 턱수염, 머리털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외에 왕자들의 교실에 책과 연필 도구, 의복관에는 역대 궁중 의상들이 전시되어 원시적인 직물 기술의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또 궁중  경비대들이 사용했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고 술탄과 후궁, 내시들이 거쳐하던 금지된 별궁이 있으며 전성기에는 400여개의 방과 1500여명의 후궁들이 이곳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갈라타 타워(Galata Kulesi)

 원래 이 타워는 6세기경 '그리스도의 탑'이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에 의해 건축되었던 것이나 14세기 제노아에서 이주해 온 민족들이 자신의 자치령에 따라 재건한 것으로 지역의 이름을 따라 갈라타 타워로 개명되었다.

 오스만 제국시대이던 1446년에 타워의 상층부가 추가되면서 그 모습은 급격히 변화하게 되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이곳은 감옥, 화재감시탑, 해상감시탑 등 그 용도면에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졌다.

 현재 갈라타 타워의 높이는 63m로, 가장 높은 곳의 두 층은 전통쇼를 가미한 레스토랑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

 보스포러스 해협 (Bosphorus Strait)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해협으로 흑해와 마르마라해를 연결하고 있다. 길이가 약 30km, 넓은 곳의 폭이 3500m, 좁은 곳이 700m로, 물 흐름이 세차서 여기저기에 소용돌이가 치고 있다. 양측 해안에는 고대 유적지, 그림같이 아름다운 전통적인 튀르키예 마을, 울창한 숲 등이 곳곳에 있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으며 음식점, 찻집, 별장 등이 있는 매우 조용한 곳이다.

 고대, 중세만 해도 지중해와 흑해간의 거의 모든 상거래는 이 해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무역에 있어 보스포러스 해협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져 매년 38,000여척의 배들이 이곳을 통과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소아시아에서 발굴된 고대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시대의 출토품을 주로 전시하고 있으며 높이가 2.6m나 되는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The Alexander the Great Sarcophagus)을 볼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 BC 356~BC 323, 재위: BC 336∼BC 323)의 석관의 경우 이 석관을 알렉산더 대왕의 것이라고 단정할 순 없는 것이나 석관의 측면의 부조가 알렉산더 대왕의 행적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석관이 아니라-알렉산더대왕의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알렉산더 대왕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고 해서 알렉산더 석관으로 불려지는 것이다.

 오스만제국이 아직은 힘을 쓰고 있을 당시에 1887년 레바논의 시돈부근의 네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되어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석관의 실제 주인은  알렉산더 대왕이 BC 323년 시돈을 정복하고 왕으로 임명한 아브달로니모스(Abdalonymos)의 관으로 추정된다고 한다.(최근에는 석관의 주인이 페르시아 귀족이자 바빌론총독이었던 마제우스(Mazaeus)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지역의 전통적인 영웅숭배 방식에 따라 석관의 각 면에는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장면과 사냥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이는 아브달로니모스에게 권력을 쥐어준 알렉산더대왕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시에, 그와의 친밀성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각 장면은 역사적 실제사건과 연계되어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일부에서는 이수스 전투와 가자(Gazze)전투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정교하게 조각된 장면들은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정복이나 왕실사냥터에서 벌어진 사냥과 관계가 있으나 굳이 특정한 시점의 전투나 사냥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단지 피장자인 아브달로니모스를 알렉산더 대왕의 사냥파트너로 묘사하여 권위를 세우고, 그의 인생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 전쟁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적 역사 사건을 묘사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석관뚜껑의 오른쪽 페디먼트의 부조이다. 이 페디먼트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비무장상태의 인물을 암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장면이 기원전 321년 이집트에서 일어났던 섭정 페르디카스(Perdíccas)의 암살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반대편 페디먼트에는 아브달로니모스의 전투장면이 그려져 있고, 석관의 양측면에는 아브달로니모스의 표범을 사냥하는 장면과, 가자(Gazze)전투가 묘사되어 있다. 뒷면에는 알렉산더대왕과 아브달로미모스가 함께 사자를 사냥하고, 페르시아인들과 싸우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석관의 정면에는 석관부조의 하이라이트인 대규모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수스전투라는 설도 있음). 좌측 말을 탄 알렉산더 대왕을 위시해서, 마케도니아 기병들이 아시아 양식의 복장과 머리두건을 한 페르시아인들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

 

 이 부조에서 알렉산더 대왕과 마케도니아군은 전투대형을 느슨하게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군은 알렉산더대왕에게 전혀 위협적이 못하다. 페르시아군인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수세에 몰려있으며, 일부는 이미 후퇴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알렉산더대왕의 높은 위상과 위대함을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한다.

 

 장면의 오른쪽에서 우리는 쓰러져있는 마케도니아 병사를 볼 수 있다. 이는 페르시아인들이 적으로서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장치들은 알렉산더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가 숫적 열세를 극복하고 이룩한 승리가 더욱 가치를 더하게 된다.

 

 

 

 

 

 

 수세에 몰려있고, 부상당하고, 포위당하고, 쓰러져있는 페르시아 병사들 뿐만아니라, 페르시아인들의 행동과 표정에서도 그들이 처한 곤경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들의 다급함을 움직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의 얼굴은 두려움과 공포가 뭍어 나온다. 반면에 마케도니아군의 표정은 냉정하고 침착해 보인다. 따라서 군사적 승리와 패배가 사람들의 심리상태를 얼마나 극명하게 갈라 놓는지 알 수 있다.

 

 대규모 전투장면은 승리와 패배에 대한 특별한 관념을 생생하게 심어준다. 이 석관이 가치를 더하는 것은  매우 드라마틱하고 사실적인 모습에서 관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작품은 전쟁의 정밀한 묘사와 절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오리엔트 박물관(Orient Museum)

 제1차 대전까지 투르크(터키)의 영토였었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출토품이 수집되어 있으며 또한 힛타이트 제국의 출토품도 볼 수 있다.

 

 

모자이크 박물관(Great Palace Mosaic Museum)

 술탄아메트 아라스타 바자르라는 시장에 위치해 있으며, 비잔티움 제국 시기의 모자이크가 소장되어 있다. 이곳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때 건축된 콘스탄티노플 대궁전 지역으로 1935~1938년과 1951~1954년 두 차례에 걸쳐 스코틀랜드의 성앤드류 대학(University of St Andrews)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고, 6세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유물로 평가되는 모자이크를 보존하기 위해 현재의 박물관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1983~1997년에 걸쳐 오스트리아 과학아카데미와 터키 유물 및 박물관 보호국과의 공조를 통해 추가적인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모자이크 복원사업이 이루어졌다. 다른 곳에 비해 대궁전의 야외 안 뜰 인도에 만들어진 모자이크로 훼손도가 높고 화려하지는 않다. 바닥은 5mm의 다채로운 석회, 테라코타 및 유리 조각들로 모자이크 되어 있고, 총8천 만개의 조각들이 사용되었다. 이곳에는 항아리를 나르는 아낙네 및 당나귀에게 먹이를 주는 아이 등 150여명의 사람과 동물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총 90여 가지의 테마로 구성되었다.

 

 

◈ 세계 유일의 철의 교회(Iron church) - 성 스테판 교회(Church of Saint Stephen)

 19세기 불가리아정교회 성 스테판 교회, 현존 유일 사전 조립방식 철제 교회

 동·서양의 경계 보스포루스해협의 남단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할리츠(골든혼)만 해안에는 '철의 교회(Iron church)'라 불리는 바실리카가 서 있다.

 원래 명칭은 불가리아정교회 성 스테판 교회인데 별명인 '철의 교회'로 더 유명하다.

 철의 교회라 불리는 이유는 건물 전체가 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新)고딕양식 건축물인 철의 교회는 19세기 불가리아에서 조립된 후 화물선으로 싣고 와 이스탄불 할리츠만에 세워졌다.

 불가리아 당국이 공모를 거쳐 선정한 아르메니아 건축가 호브세프의 설계로, 철재 500t을 들여 오스트리아 건설업자 루돌프 폰 바그너가 건축했다.

 위에서 바라보면 십자가의 형태에, 첨탑이 있는 바실리카(직사각형 예배당) 건축물이다.

 불가리아정교회재단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사전 조립 방식으로 제작된 철제 교회는 터키,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에 세워졌으나 이 가운데 현재까지 파괴되지 않고 남은 것은 이스탄불에 있는 철의 교회뿐이다.

 성 스테판 교회는 아름답고 유서깊은 할리츠만 해안에서 랜드마크 역할을 했으나 해변에 지어진 탓에 시간이 흐르면서 해수에 철제 구조물이 부식됐다.

 이스탄불시는 14년만에 복원했다. 2017년 개방.

 복원 비용의 일부는 불가리아정부가 부담했다.

 

 

아름다운 골든 혼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피에르 로티(Pierre Loti)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는 1800년대 후반에 주로 활동했던 프랑스의 해군 장교이자 작가로, 이스탄불이나 중국, 일본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이국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언덕은 피에르 로티가 자주 찾았다는 이유로 피에르 로티라고 불리게 되었다.

 피에르 로티 언덕에는 2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찻집이 있다. 이곳은 피에르 로티가 애플티와 함께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글의 영감을 얻은 곳으로 유명한 찻집이다.

 이곳에서 골든 혼을 바라보면 그 전망이 정말 아름답다. 특히 석양이 질 때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에 오후에 방문하는 것이 좋다.

 가파른 언덕은 왕복 운행하는 케이블카를 통해 이동할 수 있다.  물론 비탈길을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다.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밤과 낮의 시내를 바라보며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며 카페의 종업원들은 아직 19세기에 머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복장을 하고 있다.

 

 

 

◈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궁전 호텔,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Ciragan Palace Kempinski)

 두 개의 다른 대륙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는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튀르키예의 수도 이스탄불에 위치한 궁전 호텔,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Ciragan Palace Kempinski).

 

 보스포루스 해협의 유일한 오스만 궁전인 시라간 팰리스는 16세기에 나무로 지어졌다가, 19세기에 대리석으로 재건축한 곳이다. 술탄 압둘아지의 거처로 사용된 궁전을 세심한 복원 공사를 통해 전 객실을 화려하고 이국적인 인테리어로 단장한 호텔로 개조했다.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 호텔에서 가장 자랑하는 객실은 바로 술탄 스위트이다. 술탄 스위트는 유럽에서 가장 큰 스위트룸 중 하나이다. 왕실에 버금가는 품격 있는 인테리어와 최고급 시설을 갖춘 술탄 스위트룸에서는 객실 중앙의 화려한 샹들리에부터 고급스러운 커튼, 이불커버 그리고 카펫, 비치되어 있는 가구들까지 이스탄불의 이국적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 호텔은 영국의 찰스 왕세자,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헐리, 우마 서먼,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등 유명 인사들이 머물다 간 호텔이기도 하다. 호텔에는 환상적인 인피니티 풀과 보트, 헬리콥터 서비스까지 갖추고 있다. 호텔의 투그라(TUĞRA) 레스토랑에서는 오스만제국 시대의 고풍스러운 접시에 담겨 나오는 호화로운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시라간 팰리스 켐핀스키 호텔에서의 하룻밤 가격은 424유로(약 58만 원)부터 시작되며 객실과 일정, 환율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호화로운 객실이자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술탄 스위트는 1박에 30,000유로(약 4,100만 원)부터 시작한다. .

 

 

 

이스탄불 (Istanbul)

카바도기아 (Kapadokia) (괴뢰메 = Goreme)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Ankara)

하얀 솜으로 이루어진 듯한 파묵깔레(Pamukkale)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 콘야(Konya)

천상의 도시 안탈리아(Antalya)

호머의 고향! 이즈미르(Izmir)

고대 해상 도시 에페소(Efes)

일리아드의 배경 트로이(Troy)

아름다운 항구도시 쿠사다시(Kusadasi)

아리스토텔레스와 바울의 발자취가 남은 고대도시 앗소(Assos)

하나님의 사랑과 경고를 받은 베르가마(Bergama)

안타키아(Antakya)

눈부신 해변의 도시 보드룸(Bodrum)

에게해의 휴양도시 아이발릭(Ayvalk)

차나칼레(Canakkale)

푸른 부르사(Bursa)

튀르키예의 거대한 무덤 넴루트 다이(Nemrut Dag)

오브룩 한(Obruk Han)과 오브룩 담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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