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어키 (TURKEY)

포토 갤러리

 터키인들의 역사는 4,000년 전, 중앙 아시아의 광활한스텝 지역에서 기원된 투르크족이 평원이 건조해짐에 따라 계속된 정복으로 그 영역을 넓혀감으로 시작되었다.

 BC 1766년과 AD 990년 사이 투르크족은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지역들에까지 뻗어나가는 9개의 대제국을 건국했다.

 셀주크 제국(AD 990~1157)은 페르시아와 아바시드 수도, 바그다드를 정복했고, 1071년 말라즈기르트에서 비잔틴 군을 패배시켰다.

 아나톨리아 셀주크는 페르시아의 셀주크까지 계속되어 풍부한 심미적 건축 걸작들을 유물로 남기면서 1308년까지 번성했다.

 하지만 터키인들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업적은 오스만 제국의 건설과 확장이다. 오스만 제국은 13세기 말 아나톨리아 셀주크 제국의 북서쪽 국경지역에 위치한 부르사 근처의 작은 공국에서 시작되었다.

 후에 제국의 이름으로 쓰게 된 오스만은 1281년 공국의 왕이 되었고, 6세기 동안 통치한, 역사상 가장 오래 지배한 제국의 왕조를 세웠다.

 오스만국은 아나톨리아 셀주크와 비잔틴 제국을 정복한 후 급속히 팽창하였다. 1362년 오스만 군대는 발칸반도를 정복하였고, 1421년 타머레인과 충돌한 이후, 아나톨리아는 별도로 하더라도, 헝가리와 대부분의 동남부 유럽을 정복하였다.

 1453년 정복자 메흐멧(1451-1481)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그의 떠오르는 제국의 수도로 지명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게 되었다. 술탄 셀림 1세(1512-1520)의 통치기간은 오스만 제국의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강력한 군 지도자이자 영민한 정치가였던 셀림은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이집트로 영토를 확장했고, 카이로의 이전 칼리프로부터 "이슬람의 칼리프"라는 칭호를 부여받았다. 셀림의 아들인 위대한 슐레이만(1520-1566)은 영토를 더욱 확장하였다. 그의 부하들에 의해 "법제자"라고 알려진 슐레이만은 제국의 법전을 편찬했으며, 오스만의 예술가들을 후원했으며, 성지 예루살렘과 모스크, 육교, 수로, 학교 등, 공공근로사업을 재건했다. 이 대부분의 건축은 뛰어난 거장인 시난에 의해 이루어졌다. 슐레이만의 군대는 로드와 비오그라드, 부다페스트를 점령했고, 그의 해군은 바바로스 하이데린과 알제리아, 튀니지를 영역에 영입했다. 술탄은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에서, 합스부르그 왕가의 찰스 5세가 유럽을 지배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영국의 헨리 8세와 동맹을 맺는 등, 외교적, 군사적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슐레이만 이후, 오스만 제국은 르네상스 시기의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제국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전성기인 17세기에 오스만 제국은 소아시아와 크리미아, 코카서스와 중동, 북아프리카와 발칸반도를 지배하였다. 흑해와 홍해, 지중해의 절반은 오스만 제국의 호수였다.

 그러나 술탄제 구조의 변화는 왕조의 약화를 초래했고, 제국의 통치는 술탄의 "수상"인 그랜드 피지에에 의해 위임되기도 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오스만 제국은 팽창하는 러시아에 군사적 공격을 받았고, 발칸의 그리스도교 신하들에 의해 혁명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제국의 관세는 유럽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몇몇 술탄들은 제국의 힘과 문화적 영향력이 쇠퇴해 간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19세기 정부와 군대, 학교, 사회에서 대대적인 혁신이 일어났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독일의 동맹국으로 세계 제 1차 대전에 참가하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 터키의 영토는 그리스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군대에 점령되었다. 제국을 해체시킨 1920년 세브래 조약에서 술탄 정부가 성명하였으나, 무스타파 케말은 이에 반대하였다. 그는 저항의 깃발을 들고 고전한 끝에, 1922년 터키인들은 다시 그들 영토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1923년 로잔느 조약은 이를 승인했으며, 같은 해에 터키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아타튀르크로 추대되었고, 1938년 그의 서거일까지 대통령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그 다-문화적 관용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15세기 종교재판으로 도망친 유대인들을 받아들였었다. 터키 공화국은 이 전통을 이어, 나치 압제 하에서 도망친 유럽의 유대인들을 수용하였다.

 

개 요

o 공식국명 : 터어키 공화국 (Republic of Turkey)

o 위 치 : 북위 35°- 42°, 동경 25°- 45°(아시아대륙의 서부에 위치, 유럽대륙의 동남부와 연결됨. 흑해, 에게해, 지중해와 연안)

o 기 후 : 내륙지방: 대륙성 기후, 해안지방: 해양성 기후

- 봄, 가을이 짧으며,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은 우기임

- 평균 고도: 902m

- 평균기온: 11.8℃ (최저: -24.9℃, 최고: 40.0℃)

- 평균습도: 60%

- 연평균 강우량: 367㎜

- 특기사항: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함

 

o 면 적 : 779,452㎢ (한반도의 약 3.5배. 세계 37위)

o 인 구 : 약 8,200만 명(2016년)

o 수 도 : 앙카라시(530만 명)

o GDP: 7,525억$(2015년. 세계 17위)

o 화 폐: 유로(EUR)

o 주요도시 : 이스탄불, 이즈미르, 안탈야

o 정 체 : 민주공화제(대통령제를 가미한 의원내각제)

o 의 회 : 단원제(임기 5년, 의원수 550명)

o 주요정당 : 민주좌익당(DSP), 국가행동당(MHP), 조국당(ANAP), 미덕당(FP), 정도당(DYP), 공화인민당(CHP)

o 민족구성 : 터어키족 90%, 쿠르드족(시리아, 이라크 접경지역에 약 1,200만명으로 추정),

                 아랍인 36만, 아르메니아인 5만등

o 언 어 : 터어키어

o 종 교 : 전국민의 99%가 이슬람교도(수니파)이며, 그밖에 기독교, 유태교, 그리스정교 등

o 국 경 일 : 10.29 (공화국 선포일)

o 전  압 : 110-220 V

 

 

지   리

 총면적은 780,5800㎢로,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터키는 에게해, 지중해, 마르마라해, 흑해를 접하고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경계로 아시아지역인 아나톨리아와 유럽지역인 트라케로 나뉘어진다.

 터키는 위치에 따라 흑해, 말마라, 에게해, 지중해, 중앙 아나톨리아, 동쪽 아나톨리아, 남동 아나톨리아의 7개 지역으로 나뉜다.

 

 

사회 문화

 기록에 의하면 터키는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터키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으로, 중국 사람들은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키의 테오만 야부그 왕국을 흉노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터키 국민들은 그들의 조상이 중앙아시아 동북부에서 기원하여 서쪽으로 이동해왔다고 말한다. 그 과정에서 16개 군주국이 흥망을 거듭하여 터키인들이 아나토리아 반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서기 10세기경이라고 한다. 중세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터키인들의 대부분이 회교로 개종하였으며,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터키 국민들은 조상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자연 숭배사상과 풍습을 오늘날까지도 유지하고 있는데 상당부분에서 우리나라의 풍습과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령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터키어는 문장 구성순서, 모음조화, 어미 활용 등에 있어서 우리나라 말과 같은 원칙을 따르고 있는 점이다.

 

 

풍   속

 터어키는 종교 공휴일로서 쉐케르 바이람(Seker Bayram : Sweet Festival)과 쿠르반 바이람(Kurban Bayram : Sacrifice Festival)이 있으며, 매년 날짜가 다르다.바이람 전 한달동안은 라마단(Ramadan)으로 일출부터 일몰 시간까지 금식하는데, 가장 큰 종교 축제인 바이람 기간중에는 새옷을 입고 친척 방문 등을 하며,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카드를 보낸다. 터어키인들은 친족과 가족의 유대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으며, 가족 구성원은 가장의 권위를 존중한다.

 

 

국민성

 터어키 국민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히 크며, 한국동란시 참전으로 맺은 인연으로 인하여, 한국인을 '코렐리'(Koreli)라고 부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문제발생시 적극 도와주려 한다. 전통적으로 체면과 무예를 존중하며, 매우 정열적이고 다혈질이나 서두르지 않으며, 신앙의 전사(戰士)라고 불리는 가지(Gazi)의 정신을 윤리의 주요 덕목으로 생각하고 있다.

 터어키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며,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동서양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양식을 갖고 있다.

 

 

기   후

 지중해 연안지방의 전형적인 온난성 기후대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터키의 독특한 지형으로 인해 변화무쌍한 기후대가 나타나곤 한다.

 흑해 연안부의 따뜻한 기후를 즐길 수 있는가 하면 고산들로 가득한 산악지대에서는 연중 내내 새하얀 설경을 경험할 수 있다.

 

 

이스탄블 기후(℃)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이스탄불

최고평균

7

8

11

15

19

24

25

25

22

18

15

10

최저평균

3

3

4

8

11

15

17

18

15

12

9

5

평   균

5.6

5.7

7.0

11.4

16.0

20.7

23.3

23.4

20.0

15.6

11.6

8.2

강수량mm

89

60

60

37

32

28

27

22

49

60

87

96

 

 

민족 문화

민족 음악

 아시아 장단의 흐름을 가지는 터키의 민족음악은, 오스만왕조의 클래식으로 다듬어진 궁정음악과는 대조적이다. 최근까지도 민족음악은 악보가 없었고 "아쉬크"(음유시인)에 의해 전해져 내려왔다.

 민족음악과 다르게 오스만왕조의 음악은 군대음악으로 현재는 이스탄불의 "메흐테르타큼"(군악대)에 의해서 연주되고 있다.

 이 음악은 중앙아시아에 그 기원을 두며 틴파레, 클라리넷, 심벌, 벨을 사용하여 연주한다. 선무기도(메우레비)의 신비적인 음악은 갈대피리 "네이"의 환상적인 소리가 인상적이다. 이 음악은 12월에 콘야에서 개최되는 메블리나 패스티벌에서 들을 수 있다.

 

민족 무용

 터키에는 각 지역마다 독자적인 민족무용과 민속의상이 있다. 유명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호론

 가장자리를 은으로 장식한 검은 의상을 입은 남성들만 춤을 추는 흑해지방 춤. 댄서는 서로 손잡고 “케멘체”(원시적인 바이올린의 일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카쉬크 오유뉴

 콘야에서 시리프케지방에 전해내려오는 스푼 댄스. 전통의상을 입은 남녀가 목제스푼을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며 춤을 춘다.

 

클르츠 카르칸

 오스만에 의한 도시 지배를 주제로 한것으로, 칼과 방패를 사용한 부르사의 댄스. 초기 오스만의 군복을 입은 남성만 등장하여 음악없이 창과 방패의 부딛치는 소리에 맞추어서 춤을 춘다.

 

제이벡

 에게해지방 댄스. 형형색색의 전통의상을 차려 입은 남성(에페)이 용기와 영웅주의를 테마로 춤을 춘다.

 

 

민족적 영웅

나스레틴 호자

 13세기 아크쉐히즈의 해학가이며 현인. 그의 말은 터키 전역에 알려져서 어떤 주장이나 역설을 할때에 종종 사용된다.

 

카라괴즈

 14세기에 프루사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해학가. 지금은 꼭둑각시놀음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로서 잘 알려져 있다. 카라괴즈는 잘난척하는 친구 하지바트를 이기기 위해 저속한 농담을 하는 별 볼품없는 남자였다. 인형놀이에서는 꼭둑각시에게 화려한 색깔을 칠한 반투명한 피혁으로 싸고 흰 화면에 투영한다.

 

유누스 에므레

 터키가 자랑하는 13세기 철학시인의 한사람. 그의 기본적인 테마는 만물에 대한 사랑,우정, 형제애, 신 앞에서의 정의였다. 700년 전에 쓰여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간결하고 순수한 저작을 읽으면 그의 깊은 뜻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지금도 퇴색되지 않은 충분히 자극적인 것 이다.

 

쾨로울루

 15세기 민족시인.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당대의 영웅이었다. 그의 모험은 몇세기에 걸쳐 칭송과 열의를 가지고 이야기되며, 현재까지도 주목받고 있다. 쾨로울루는 역사적으로 볼때 처음으로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원조를 한 인물중의 한사람이다. 그리고 정부의 억압이나 괴롭힘으로부터 이긴 승자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스포츠

얄르 규레쉬

 그리이스 레스링은 터키로 건너와 국기가 되었고 매년 7월에 에디르네근교 크륵프나르에서 레스링챔피언십이 개최된다. 경기를 난이하게 하기위해서 레슬러가 몸에 오리브 오일을 바른다.

 

지리트 오유누

 목숨을 아끼지 않고 마술을 경쟁하는 「창던지기(자블린)」는 상대팀 기수를 향하여 목제 창을 던져서 득점을 경쟁한다. 주로 터키동부에서 행해지고 있다. 에게해 연안지역 셀주쿠에서는 1월에 낙타끼리 싸움을 붙이는 경기가 있다. 기후가 나빠서 볼수 없었더라도 봄이면 많은 작은 마을에서 개최된다. 아르트빈 카프카소르에서는 투우도 행해진다.(1월)

 

 

일반적인 습관

대 접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터키 생활습관의 기본이다. 코란의 교의와 순수한 마음에 따라서 터키인은 후하게 사람들을 대접한다. 가난한 농민일지라도 가능한한 손님(미사피르)에 대해 예의를 다한다. 이 때문에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음식이나 음료가 나오기 때문에 거절을 할 수 없어 곤란할때도 있다. 또, 손님이 만족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터키인들은 언어의 장벽이 있어도 어떻게 하든 대화를 할려고 노력한다. 도심에 사는 중산층 사람들은 유럽 언어를 적어도 한가지 할 수 있다. 비록 교육을 받지 않았어도 의욕적으로 학습하여 훌륭하게 습득한 경우가 많다.

 

터키의 커피하우스

 터키에서는 아무리 작은 마을에서라도 “카흐베하네”라 불리는 커피하우스가 있다. 이곳에서 남자들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거나 터키특유의 백게먼(타우)를 즐기기도 한다. 특히, 이스탄불에서는 커피하우스에서 물담배(나르길레)를 피우는 남자들을 종종 볼수 있다.

 

터키의 목욕탕

 터키사회에서는 신체를 청결히하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중세부터 공공목욕탕(「핫맘」)이 있다. 남성용과 여성용이 있는데 마을에 하나밖에 하마무가 없는 경우에는 날이나 시간에 따라 나누었다.「하마무」에 들어가서는 탈의장에서 옷을 벗고 타올(페슈테마르)을 몸에 두르고 뜨거운 커다란 돌(대리석)(괴벡 타쉬)위에 누워서 땀을 흘리면서 때를 벗기는 것이다. 만약에 너무 뜨거워서 참을수 없으면 시원한 방에서 쉴수도 있다. 「하마무」는 굉장히 상쾌하며 오래된 목욕탕은 건물자체만으로도 흥미를 가지게 한다.

 

 

 

터키요리와 레스토랑

 단지 터키요리를 맛보기 위해 터키를 방문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터키요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간단한 요리에도 정성을 들여서 신선한 재료의 맛을 잘 맛볼 수 있다. 요리 종류도 많아 다양한 스프에서 메제(전체), 육류요리, 생선요리로 이어진다. 조금 시간을 두고 유명한 터키과자 페스트리가 나오고 마지막으로 터키커피가 나온다. 터키요리는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각종 과일, 야채외에도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바다에서 어획되는 생선요리까지 종류는 헤아릴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알콜류는 도수가 낮은 터키맥주에서 지방와인, 터키특유의 술(도수가 높다)「라크」(아니세트)가 있다. 이것은 물을 타면 뿌옇게 변하는 것에서 「라이온의 밀크」라 불리고 있다. 커피나 홍차는 어디에서나 마실 수 있다. 그리고, 병, 캔음료수나 미네랄워터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수도물은 마실 수는 있지만, 염소 소독이 되어 있어 별로 맛이 없다.

 이스탄불, 앙카라, 이즈미르와 같이 대도시의 경우에는 중국요리, 러시아요리, 일본요리, 한국요리, 프랑스요리, 스위스요리, 독일요리, 이탈리아요리 레스토랑도 있다.

 

 

나이트 라이프

 터키에서는 다양한 나이트라이프를 즐길 수 있다. 앙라카, 이스탄불, 이즈미르에서는 주립포니 오케스트라, 주립오페라, 발레단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터키인 혹은 외국인 지휘자의 지휘하에 터키나 그외 나라 작곡가의 작품을 공연하고 있다. 앙카라, 이스탄불, 이즈미르에는 터키 극단뿐 아니라 외국 극단의 공연도 개최된다. 또, 나이트클럽이나 화려한 쇼도 있다. 어디를 가더라도 나이트클럽에서 터키요리를 먹으면서 아침까지 즐길 수 있다. 리조트지나 대도시의 디스코텍은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다.

 

 

쇼   핑

 터키를 여행하는 즐거움 중의 하나로 쇼핑을 빼놓을수 없다. 다양하고 풍부한 터키 민예품을 보면 사지 않을 수 없을만큼 매력적인 것이 많다. 현대적인것 뿐만 아니라 마을이나 지방 전통공예품도 있다. 가정내에서나 부엌에서 사용하는 실용품외에도 터키 전통 장식품도 많다. 인기있는 상품으로는 양탄자로 가죽이나 스웨드제품, 구리 및 청동제품, 은, 도자기, 수공예품, 자수품, 그리고 터키 명산물인 해포석 파이프, 얼룩마노 등이 토산품점에 진열되어 있다.

 터키에는 스웨드와 가죽으로 만들어진 각종의류를 비롯해서 핸드백, 벨트, 신발같은 제품들이 저렴한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어 인기를 끌고 있다. 주요도시에 있는 대리점에서 양질의 가죽이나 스웨드로 만든 드레스, 바지, 의류등을 판매하고 있다. 조금 특이한 것을 원한다면, 물담배(나르길레)를 권한다. 바쿠가몬을 사서 터키 특유의 게임방법을 배워보는 것도 좋다. 터키에서 쇼핑하는데 있어 유일하게 어려운점은 매력적인 상품중에서 어느것을 고르면 좋을지 결정하기 힘드는 것 일 것이다.

 

* 주의 : 쇼핑할때 반드시 영수증을 보관해 두어야한다. 상품을 구입하거나 서비스를 받을때, 부당한 액수를 청구당하거나 사기행위를 당한 경우, 지역경찰 (Zabita,tel153) 에 연락하거나, 통산청 소비자보호국으로 팩스를 보내기 바란다.

 

 

카지노와 도박

 리비에라, 몬테카를로, 애틀란틱시티, 라스베가스와 나란히 터키에서도 합법적으로 도박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카지노는 보통 고급호텔등에 있으며 입장시 패스포드가 필요하다. 

 

 

 

터어키의 종교

종교와 국민생활

 터어키 정부는 1924년 종교 업무국과 종교재정국을 신설하여 이곳을 통해 국민들의 신앙생활을 관리하고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또한 종교업무국은 580개의 행정구역에 종교관리인 뮈푸튀(MUFTU)를 임명하여 이슬람과 관련된 모든 행정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각 행정구역에는 이맘(Imam)을 두어 무푸튀의 지도, 감독을 받도록 하고 있다. 이들 Imam은 행정관리체제의 하부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종교 업무국으로 부터 급여를 받고 있다. 또한 종교업무국은 이슬람 교회의 모든 성직자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코란(Koran)을 강의하고 방송설교 및 종교서적의 출판을 지도하기도 한다.

 한편 1933년 폐교를 맞았던 Imam 양성학교는 1951년에 재설립되었으며, 1949년에는 앙카라 대학교에 신과대학이 설립되어 고위 종교지도자를 배출시켜 왔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신학대학의 정원이 급증하는 등 외형적으로도 그 규모가 확대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 또한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터키인에게 있어서 종교적 도덕교육은 이미 유년기부터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초등학교 교과목 가운데 하나인 윤리의 강의 내용이 주로 코란과 이슬람의 관행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터어키에서는 주민등록증에 종교를 기재하고 있으며 각종 행정 신상서류에 종교란을 두는 등 생활 전체가 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정치인들은 국민생활의 근간이 되고 있는 종교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으며, 그들의 정치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행사에 어느 정도 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터키에서 종교의 의미는 주요 정치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으며, 정치와 종교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실정이다. 

세속주의 이슬람교

 터어키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세속국가로서 1923년의 헌법에서 이를 선언한 바 있다. 터어키는 헌법상 국교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체 국민의 약 99%가 이슬람교 수니파이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터어키의 법률이나 사회기구가 이슬람 원리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슬람의 전통과 관행이 매우 중요시되고 있기 때문에 법의 해석 및 적용에 있어서 종교적 영향을 무시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터어키는 비수니파 교도에게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는데, 다만 이들은 정부의 재정원조를 받을 수는 없다.

 1924년에 제정된 최초의 공화국 헌법은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였으나, 1928년 삽입된 헌법 수정안에 의해서 이슬람은 국교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1961년 개정된 헌법 제19조는 "모든 개인은 양심과 종교적 신앙과 의견의 자유를 가지며 모든 종류의 예배나 종교행사 및 의식은 도덕 및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한 자유이다." 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로써 터어키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한편, 1924년에 이슬람의 정신적 지주인 칼리프 제도가 폐지되었는데, 터어키공화국을 선언하기 전까지 이슬람교 세계의 칼리프좌는 터어키에 있었다.

 

비 이슬람 종교

 한편, 터어키내 非이슬람 소수민족들은 기독교인과 유태인으로 구분되는데, 기독교인은 주로 그리스 정교도와 아르메니아인, 카톨릭교인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종교를 신봉하며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행사에 자유로이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고 있다. 이러한 소수민족들은 그 대부분이 이스탄불 및 이즈미르 등의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 유럽으로의 이민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인구는 갈수록 감소하고 있는 추세이다.

 

 

터어키의 약사

가. 터어키의 기원

 기원전 2000년 중앙아시아 남부에서 기원한 터어키 민족의 조상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훈"족(혹은 돌궐족)이며, 기원전 220년에 수립된 터어키의 Teoman Yabgu 왕국을 중국인들은 "흉노"라고 불렀음. 터어키 민족은 중세기에 아랍지역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아랍문자를 도입하여 사용하였음.

 

나. 고대국가 시대

 터어키 국토의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아나톨리아 반도는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연계하는 교통과 문화의 중심 역할을 하여 왔음.

- BC 5000-1500년 : 청동기 시대로 도시국가 생성, 발전

- BC 1500-1200년 : 히타이트(Hittite) 시대

- BC 1200-220년 : 동부 Urartus 왕조와 서부 Phrygia 왕조가 융합, 중부에는 히타이트 도시국가 잔존

- 4세기부터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 융성.

튀르크(돌궐)족은 기원전 220년 이후 수많은 국가를 이룩하였는데 이중에는 그 영토가 1,800만㎢ 이상에 걸친 경우도 있었음.

10-11세기경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 셀주크제국 건설

 

다. 오스만제국 시대 (1281-1922)

 오스만제국은 1281년 성립된 이후 1354년 유럽에 진출, 여러나라를 정복하였으며, Sultan Mehmet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정복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팽창정책은 절정기에 들어섬.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로, 이디오피아, 중앙아프리카, 예멘, 크리미아가 국경으로 되었고,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었음. 오스만제국은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1912-1913년 발칸전쟁으로 영토가 그리스의 Maritsa강 지역까지 축소됨.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패전국인 독일측에 가담, 1920.8 연합국측과 체결한 Sevre 강화조약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背後地와 아나톨리아 고원만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Mustafa Kemal의 영도로 실지회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923.7 연합국측과 Lausanne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현재의 영토를 보유하게 됨.

 

라. 공화국 시대 (1923 - 현재)

◇ 터어키공확국 수립과 케말파샤의 개혁정치 실시(1923.10-1938.11)

o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발된 오스만제국의 분열로 인해 터어키의 정치권력은 국민당 당수 케말파샤가 이끄는 민족독립운동에 귀속하게 되었음.

 케말파샤는 1920.4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1920-22년 그리스와 해방전쟁으로 그리스군을 이즈밀과 트레이스반도에서 축출한 후 1922.11 군주제를 폐지하고 1923.10.29 터어키공화국을 선포하였음.

 

o 케말파샤는 공화국 선포 후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어(총리에는 이스멧 이뇌뉴가 임명됨) 해방전쟁에 참가한 2개의 항쟁조직을 결합하여 공화인민당을 창설하고 공화제, 민주주의, 다원주의 등 종래의 회교전통을 크게 탈피한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수행함.

- 국가의 세속화, 즉 종교에서 탈피한 공화제실시, 이슬람식 재판 및 종교교육 폐지, 정교 분리, 여성해방, 일부다처제 금지와 서양력 채택, 라틴 철자법 도입, 산업개발 등 서구제도 도입.

 

1923.10.29 케말파샤, 군주제를 폐지하고 터어키공화국 선포

1965.10. Demirel의 정의당, 총선에서 승리, 보수정부 수립, 1971년까지 집권

1971.3. 근로자 파업, 학생 및 노동자 소요의 파동으로 군부가 개입, Demirel 사퇴

Demirel 총리 사퇴 이후 1973.10까지 군부 감시하에 "교도민주주의(Guided Democracy)" 실시

- 계엄령 실시와 모든 좌익 활동의 가혹한 탄압 등 강력한 반공정책 실시

1980.9 Kenan Evren 터어키군 총참모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세력이 무혈 군사혁명을 주도, 국가안보회의를 구성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여 헌법의 일부 조항을 잠정 폐지시키는 동시에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 금지

1982.11 Evren 국가안보회의 의장, 국민투표로 정권 장악

1983.12 Ozal의 조국당 집권(군사정부 수립후 3년만에 민정 이양)

이후 정도당(DYP), 조국당(ANAP), 공화인민당(CHP) 등이 정파 이익에 따른 상호 연립내각의 구성·해체를 반복함으로써 빈번한 정권 교체

1996.6 이슬람계 복지당(Welfare Party : RP)이 주도하는 Erbakan 내각 성립

군부의 개입으로 97.6 Erbakan 내각이 붕괴한 후 1997.7. 조국당(ANAP)이 주도하는 Yilmaz 내각 출범

98.11 Yilmaz 정권이 부패 연루 혐의로 국회의 불신임에 의해 퇴진한 후 99.1. 민주좌익당(DSP)의 Ecevit 주도하 제56차 내각 출범

99.4.18 총선 실시후 민주좌익당(DSP) Ecevit 당수를 총리로 한 민주좌익당(DSP), 국가행동당(MHP), 조국당(ANAP)간 3당 연정하 제57차 정부 출범

2000.5월 임기가 만료되는 Demirel 대통령의 연임을 위한 헌법개정을 추진하였으나, 국회에서 부결되어 현행 헌법 규정에 의거 Ahmet Necdet Sezer 전 헌법재판소장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

 

 

 

관광 명소

 

이스탄불 (ISTANBUL)

갑바도기아 (Kapadokia) (괴뢰메 = Goreme)

터키의 수도 앙카라(Ankara)

하얀 솜으로 이루어진 듯한 파묵깔레(Pamukkale)

11세기 셀주크 터키의 수도 콘야(Konya)

천상의 도시 안탈리아(Antalya)

호머의 고향! 이즈미르(IZMIR)

고대 해상 도시 에페소(Efes)

일리아드의 배경 트로이(Troy)

아름다운 항구도시 쿠사다시(Kusadasi)

아리스토텔레스와 바울의 발자취가 남은 고대도시 앗소(Assos)

하나님의 사랑과 경고를 받은 베르가마(Bergama)

안타키아(Antakya)

눈부신 해변의 도시 보드룸(Bodrum)

에게해의 휴양도시 아이발릭(Ayvalk)

차나칼레(Canakkale)

푸른 부루사(Bursa)

터키의 거대한 무덤 넴루트 다이(Nemrut Dag)

 

 

 

 

초대 기독교 5대 도시

1) 안디옥

 이스탄불에서 항공편으로 1시간 거리인  아다니시에서 버스편으로 2시간정도 여행하면 안타키아에 도착하게 된다. 바로 이 도시가 선교의 요람지인 수리아 안디옥이다. 사도바울의 1,2,3차 전도여행의 출발지 이고, 재정 지원처였던 안디옥 교회는 초대 감독이 베드로였으며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불려지게 된곳이다.(사행 11-26) 현재 이곳엔 기독교 사상 최초의 암굴교회였던 사도 베드로의 교회가 있으며 아다나시 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에 바울의 탄생지인 다소( 현지명 TARSUS )가 위치하고 있다.

 

2) 에베소

 이즈밀에서 버스편으로 약 1:30분 정도 떨어져 있다. 현재의 지명은 셀죽(SELCUK)이라 부른다. 3차 종교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3) 서머나

 이스탄불에서 비행기로 약 45분간 거리에 있으며 현 지명은 이즈밀(IZMIR)이라고 부른다.

 

4) 니케아

 이스탄불에서 약 1:30분 정도 배편으로 가면 YALOVA라는 곳에 도착하게 된다. 현 지명은 INZIK로서 아직까지도 교회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콘스탄틴 대제가 소집한 니케아 종교 회의가 열렸던 곳이다.

 

(A.D 325년)1차와 7차 두차례에 걸쳐 종교 회의가 열렸는데 그리스도가  동본질(인성과 신성을 같이 지닌자 - 아다나시우스)이냐? 유사 본질(신성은 있으나 인성을 부인 - 아리우스)인가? 하는 교리 논쟁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비잔틴 제국때 콘스탄티노플이 4차 십자군에 의해서 점령당하자(1204년에 십자군이 침략) 약 60년간 비잔틴 제국 수도로 사용되었다.

 

5) 콘스탄티노플

 B.C 677년에 메가리안족에 의해 전설적인 비잔티움이 세워졌다.

 그 후 3세기에 걸쳐 번영을 누렸으나 A.D 324년에 이곳을 정복한 콘스탄틴 대제가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티움으로 옮기고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 명했다. 지상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했던 이곳은 4차 십자군 원정시 대파되었고 1453 년에 터어키족에게 멸망될때까지 1000년의 긴세월을 기독교 국가로서 여러가지 유적을 남겼다. 천년동안 대성당으로 사용되어 온 소피아 사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외에 하나를 더 덧붙인다면 바로 이 성당이라고 말할 정도로 손색이 없다. 이곳에서 6, 8차의 종교회의가 열렸고, 바로 이웃에 있는 이이렌 성당에서 2, 4차가 열렸다. 현 지명은 이스탄불이다.

 

 

 

 

초대 7대 교회

➀ EPHESUS (에베소)

 에페소(Ephesus)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의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알수 없다. 역사에서 에페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HITTITE(힛타이트)성경의 햇족속 비문에서인데 그 비문에는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 들에게는 중요한 도시중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PAUL(바울)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리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64년 사도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머나 등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해, 이곳에서 요한은 계시록을 썼다. 로마 황제 DOMITIAN이 피살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 복음"을 썼다.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제국 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베소는 지진으로 황폐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해의 문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대부분을 에베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이데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기던 3~4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은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의도는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

 

사도요한의 교회(Church of St.John)

 전해져 오는 바에 의하면 이곳은 기원 후 37년-42년,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에서 나온 사도요한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살았던 곳이며 사도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하고 또 생을 마감한 무덤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 위에 서기 4세기경 처음으로 나무로 된 교회가 지어졌으나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AD 577~565) 시대에 재건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남겨지게 되었다.

 에페소가 아랍민들의 지배하에 있었던 7, 8세기에 사도요한 교회는 20개의 타워와 3개의 문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현재 여행객들이 출입하는 곳이 주 성문인데, 나머지 두개의 문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나 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초기 기독교 시절 당시 경기장 내의 사자들의 먹이가 된 기독교인들의 넋을 달래기 위함인 듯 성벽 축조에 사용된 돌은 에페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도요한의 무덤은 중앙 돔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성스러운 기독교 성지의 하나로 여겨 많은 기독교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이곳에는 오늘날까지도 발굴과 복원이 계속되고 있다.

 

성모 마리아 교회

 이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431년 이곳에서 제 3차 종교 회의가 열려 기독교 교리를 토론한 것이다. 니스토리우스(NESTORIUS)는 안디옥 교회에 있을때부터 "동정녀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어머니가 아니라, 인간인 예수의 어머니"라는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약 200명의 권위자들이 3개월간의 토론 끝에 니스토리우스의 견해는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이 회의록에는 성모마리아가 예배소에 왔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묻혔다는 문구가 남아 있어서 사실을 확인시키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성모 마리아의 집(Maria’s House)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죽기전 요한을 가르키며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나이다"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르켜 요한에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다.(요한복음 19장 26-27절) 그리하여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오게되며 3차 종교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위에 집한채를 지어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길이 없었다.

 1878년 케더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속에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번도 떠난일이 없었으므로 1891년 나자렛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터 모양은 케더린이 계시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였다. 1961년 교황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으로 선포했다.

 

 

SMYRNA(서머나)

 현재 이름은 이즈밀 (IZMIR)이다. 주전 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 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주둔 하였고, 산 위에 성채를 건설하였다. 서머나는 주전 3~2세기 희랍시대에 크게 번성 하였고 항구 상업 도시로서 유대인 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인 들은 초대 교회를 핍박 하였고,(계 2:9-10) "유대인들의 훼방"에 관한 언급을 이해할 수 있다.

 

폴리갑 교회

 사도요한의 직계 제자 였으며, 그로부터 직접교육을 받았던 폴리갑은 115~116년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시켰다. 이때 폴리갑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적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친구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말했으나 "3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밥이 되게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라고 외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하여 그가 세웠던 교회위에 현대식으로 폴리갑 기념 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LAODICEA(라오디게아)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가 죽은 후 셀레우코스(SELEUCID) 왕가의 안티오쿠스(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라오디케(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 불렀다.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계 3:14) 이하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안음을 책망하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로마식 야외 운동장과 원형 극장터가 발견되었다. 1710년과 1899년의 대지진때 이곳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PHILADELPHIA(빌라델비아)

 159-138 B.C 버가모의 왕 ATTALUS 2세, PHILADELPHUS에 의해서 이 도시가 세워졌다. 그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사데, 버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타볼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 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그래서 빌라데비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 내의 300여개 교회에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공급하였기 때문에 형제 사랑을 실천한 교회 이기도 하였다. 서머나와 이곳은 책망받지 않은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오늘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터가 남아  있는데 3개의 큰 기둥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가고있다.

 

 

SARDIS(사데)

 주전 3세기경 SARDIS 왕가에 의해서 이 도시가 세워지게 되었다. 로마시대에 이곳은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 1914년 프린스톤 대학팀의 발굴로 시작하여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사용되었던 신전은 B.C 335년 ALEXANDER 대왕에 의하여 재건 되었는데 이 신전은 희랍시대에 가장 큰 신전중의 하나로 크기가 약 100mx50m였다. 지금 신전 후면에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THYATIRA(두아디라)

 버가모와 사데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B.C 300년에 SELEUCUS 1세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이며 주후 1세기에는 산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도행전 16:11-15에 의하면 사도바울은 제 2차 전도 여행때 빌립보 에게 "두아디라 에서 온 루디아"를 만났다고 되어있다. 루디아는 자주 제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지금은 교회가 기둥들이 부서진 상태로 그냥 방치되어 있다.

 

 

PERGAMUM(버가모)

 이 지역은 가장 오랜 선사시대 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주전 3세기에  버가모는 된 왕국의 중심이 되어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이곳의 부의 근거는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직조, 그리고 글씨쓰는 양피지였다. B.C 133년 이후 로마통치를 받게 되면서 속주 아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세력이 커진 에베소로 수도가 옮겨지게 된다

 

 

 

사도행전의 전도지

1.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코스 : 실루기아 안디옥 -- 구브로 살라미 -- 바보 -- 앗달리아 --비시디아안디옥 -- 이고니온 -- 더베 -- 루스드라 -- 앗달리아 -- 실루기아 안디옥

 

2. 바울의 2차 전도 여행코스 : 실루기아 안디옥 -- 다소 -- 더베(그리스) -- 드로아(그리스) -- 네압볼리 -- 빌립보 --  데살로니카(그리스) -- 아덴 (그리스)-- 고린도(그리스) -- 겐 그레아(그리스) -- 에베소 -- 로도 -- 가리샤라(이스라엘) -- 엘루살렘(이스라엘) -- 실루기아 안디옥

 

3.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코스 : 실루기아 안디옥 -- 이고니온 -- 에베소 -- 앗소(그리스) -- 드로아 -- 빌립보 -- 데살로니카(그리스) -- 베뢰아(그리스) --- 고린도(그리스) -- 베뢰아(그리스) -- 빌립보 -- 드로아 -- 기오 -- 사모 -- 로도 -- 바다라(이스라엘) -- 두로(이스라엘) -- 가이샤라(이스라엘) -- 엘루살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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