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역사

 연도별 인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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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역사

1. 인더스 문명 (BC 3000~BC 2000)

o 인도에는 두개의 큰 강이 대륙을 관통하고 있음. 히말라야에 발원하는 갠지스강은 동부 인도로 흘러서 벵갈만으로 빠져나가고 인더스강은 서부를 거쳐 아라비아해로 빠져나감.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에서 BC 3,000~BC 2,500년경부터 약 500년간 번성한 고대 문명을 일컬음. 인더스 문명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등에 유적을 남기고 있는데, 유적을 통해 본 문명의 수준은 메소포타미아, 수메리아 등에 버금가는 세련된 문화였던 것으로 여겨짐.

 

o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질서정연하게 도시계획이 된 고대 도시로서, 벽돌로 이루어진 가옥과 도로, 하수시설 등이 발달된 도시였음. 인더스 문명은 고도로 발달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단계로, 종교는 다신교였으며 정치 체제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체제였음.

 

o 인더스강 유역의 최초의 주민은 프로토오스트랄로이드(버마, 말레이계 인종)로서 검은 피부와 납작한 코를 가진 중간 키의 인종임.

 

o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을 일으킨 인종은 드라비다임. 그들은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이주해 왔음.

 

 

2. 아리안 문화 (BC 2000~BC 1000)

o 인도 문화의 원형은 상당부분 아리안족이 인도 대륙을 침입하여 정착하면서 이루어졌음. 아리안족은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유목민이었으나, BC 5,000년전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수세기간 정착한 후, 다시 각 지역으로 이동하였음.

 인도에 이주한 아리안인은 페르시아에 정착해있던 부족으로서 인도-이란인이라고 함. 이들은 BC 2000~BC 1500년경 인더스강 유역에 침입, 드라비다인을 정복하였음.

 

o 인도에 침입한 아리안인들은 처음에는 펀잡지역에 정착하다가 서서히 갠지스강 유역을 따라서 동부로 옮겨가서 BC 800년에는 벵갈지역까지 이동. 아리안인들은 정복민족으로서 카스트의 상층부를 형성함.

 

o 인도의 계급은 크게

➀ 승려 및 사제계급인 브라만,

➁ 전사.지배계급인 크샤트리아,

➂ 상인계급인 바이샤,

➃ 노예계급인 수드라,

➄ 불가촉천민으로 나누어짐.

 이러한 것은 마누(Manu) 법전에 명기된 이래 전통적 관습으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제약하는 악습이 되고 있음.

 

o 아리안 문화의 특징은 제정일치의 사회에서 신을 찬양하고 경건히 예배드리는 법식이 발달하였다는 것임. 특히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한 사제 계급인 브라만을 중심으로 제사 의식과 신에 대한 찬양 등이 집대성된 베다문화가 이 시기에 형성되었음.

 

o 베다에는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 등이 있으나,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리그베다임. 나머지 베다들이 주로 제사의식의 형식에 관한 내용들인데 비해 리그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일뿐 아니라 인간성의 작용, 세계의 근원과 천지창조 등에 관한 철학적 사고를 망라한 인류 최초의 문학적 성전이라 할 수 있음.

 

o 베다 시대(BC 1500~BC 600)에 이어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푸라나등 경전에 입각한 힌두교 발생

 

 

3. 도시국가의 형성

o 펀잡 지역에서 갠지스강 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안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기원전 7세기경에 이르면 이미 상당한 세력을 지닌 도시국가들이 생겨남.

 

o 이 당시의 국가형태는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형태를 취하고 있음. 거의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부족연맹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원시적인 공화 정치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고 왕은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음. 당시에 유명한 국가들은 거의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특히 유명한 나라들로는 코살라, 비데하, 카시, 마가다, 앙가, 아반티 등임.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인도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중심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서로 각축하게 됨.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정복전쟁을 야기했고 약육강식의 전쟁은 기원전 4세기경까지 이어짐.

 

o 이 정복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보인 이는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BC 582~BC 554) 대왕이었는데, 그는 주변의 소국들을 차츰 합병하고 내치를 공고히 함으로써 대제국의 기반을 닦았음. 그의 아들 아자타 사트루는 부왕의 뒤를 이어 카시, 코살라, 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 대륙의 강자로 부상하였음. 마가다 왕국은 알렉산더의 침입 때까지 난다 왕조와 더불어 인도에서 가장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였음.

 

o BC 500년경 불교 및 자이나교 발생

 

 

4. 마우리아 제국

o 마가다국의 크샤트리아 계급출신인 찬드라 굽타는 BC 321년 난다 왕조를 멸망시키고 마우리아 왕조를 건립,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벵갈만에 이르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왕국을 건설함. 3대왕인 아소카왕(BC 272~BC 232)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남서부의 타밀지역을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함.

 

o 아소카왕의 업적중 특기할 만한 것은 불교진흥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는 점인데, 특히 석가모니 사후 사라져 가는 불전을 수집, 정리하였으며 백성들에게 불교문화를 전파함은 물론, 포교사절을 서쪽으로는 시리아, 이집트, 그리스, 마케도니아까지, 동남쪽으로는 미얀마까지  파견하였음. 또한 스리랑카에 왕자를 보내 포교함으로써 남방불교의 중심지가 되게 함은 물론,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음.

 

o BC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군사령관이었던 푸샤미트라는 마우리아 왕조를 멸망시키고 숭가왕조를 세웠으나 BC 70년에 망함.

 

 

5. 쿠샨왕조 (AD 78~226)

o AD 78년 박트리아 지방의 쿠샨족의 카니슈카왕이 서쪽으로 이란, 동쪽으로 중국의 한 왕조, 남쪽으로는 인도대륙의 중심부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하였으나 226년 이란지방에 기원을 둔 사산 왕조에 의해 멸망됨. 이후 인도는 많은 소국으로 분열되었으나 후에 동방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에 의해 다시 통일되게 됨.

 

o AD 100년 대승불교 발생

 

 

6. 굽타왕조 (380~606)

o 찬드라 굽타 1세가 굽타왕조를 세움.

 

o 찬드라 굽타 2세(380~413) 시대에 황금시대로서 문화적 르네상스 구가

 

o 굽타왕조 초기 및 전성시대에 불교 융성, 말기에는 힌두교 및 자이나교가 부흥하기 시작

 

o 찬드라 굽타 2세 시대부터 중앙아시아의 유목민 훈족등의 침입이 개시됨.

 

o 굽타왕조는 606년 훈족에 의하여 멸망함.

 

o 훈족등 중앙 아시아인은 라즈푸트인으로 가칭하면서 굽타왕조의 영토에 힌두 및 자이나교 왕국들을 세움.

 

 

7. 무굴제국 (Mughal Empire, 1526~1858)

o 12세기 이후 이슬람의 인도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1526년 티무르의 5세손 바부르(1483~1530, 재위:1526~1530). 에 의해 이슬람 왕국인 무굴제국이 건설됨. 그의 손자 악바르대에 이르러 데칸을 제외한 인도의 대부분과 아프가니스탄을 아우르는 대제국이 건설됨. 악바르 이후 150년간 전성시대 지속. 특히 샤 자한(1627-1658)과 그의 아들인 아우랑제브(1658-1707)시대에 이슬람교가 번성하여 오늘날 타지마할 등 이슬람 관련 유적을 많이 남김.

 

o 16세기초에는 구루 나낙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절충, 일신교인 시크교를 창시함.

 

o 무굴제국은 이란 지역의 이슬람교도 침입, 1757년 영국과의 플라시 전투, 1857년의 세포이 반란을 거쳐 동인도 회사의 해체와 함께 1858년 영국의 직할지로 편입됨.

 

 

무굴제국(Mughal Empire)- 16세기 전반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인도 지역을 통치한 이슬람 왕조(1526∼1858).

 기원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Timur, 1336~1405, 중국 이름은 첩목아이다. 주로 인도에서 러시아를 거쳐 지중해까지 정복하는 과정에서 행한 야만적 행위와 그가 세운 왕조의 문화적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이다.

 1526년 바부르가 로디조의 술탄인 이브라힘을 파니파트 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차지하면서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바부르는 서쪽의 야무나강· 바다흐샨· 카불, 동쪽의 벵골, 남쪽의 나르마다강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하게 되면서 무굴 제국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악바르는 1605년까지 북인도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되면서 무굴 제국을 대제국으로 건설했다. 악바르의 사망 후 무굴 제국은 분열하기 시작했으며, 마라타족은 무굴로부터 독립하고 1738년 델리를 공격하면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마라타족은 1761년 파니파트에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했다.

 이후 북인도는 혼란과 분열이 거듭되었고, 이 때 유럽열강들이 인도대륙을 넘보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무굴 제국은 쇠퇴했다.

 

 

 시조 바부르(Babur, 1483~1530)는 중앙아시아를 전전한 후 카불을 점령하고, 이곳을 근거지로 하여 1526년 인도에 침입, 델리 왕조인 로디조(1451~1526)의 이브라힘왕을 델리 북방의 파니파트전투에서 격파하고, 델리를 탈취하여 여기에 무굴제국을 창시하였다.

 바부르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인 제2대 후마윤은 벵골· 비하르 지방에서 일어난 아프간계(系) 수르 왕조의 셰르 샤에게 패하여, 1540년 페르시아로 도망하였다가 1555년 재차 델리를 점령하고 일시 중단되었던 무굴왕조를 부활시켰다.

 

 그 뒤를 이은 왕이 13세에 즉위한 M.악바르 황제이다. 그는 북인도에 지배력을 확보하게 되자 그 세력을 인도의 다른 지방까지 확대하여, 라자스탄 지방에 독립국으로 있던 라지푸트족의 왕(라자)들을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1573년 서방의 구자라트 지방에 진격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이슬람 왕조를 타도하였다. 동방으로는 1576년 벵골 지방까지 그의 지배하에 넣었다.

 

 1580년대에는 인도 북서부지방의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까지도 군대를 파견하여 인더스강 하류 신드 지방까지 정복하였다. 1590년대에는 남하정책으로 데칸 지방의 이슬람 여러 왕조에도 세력을 뻗어나갔다. 행정면에서도 악바르 황제는, 이슬람교도나 힌두교도 등 종파를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중용하여 각 지방의 토지측량이나 지세(地稅) 결정 등의 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따라서 무굴제국의 행정 ·사법 ·지방행정 등의 지배체제는 악바르 황제 시대에 거의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악바르 황제의 사후 자항기르, 샤 자한, 아우랑제브로 이어져 이 시기는 무굴제국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판도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인 1674년 힌두교도들이 데칸지방에 마라타왕국을 세워, 무굴제국의 강력한 적대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데칸고원의 원정 도중 죽자 제위(帝位) 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무굴의 중앙 권력은 급속히 쇠퇴해졌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약화된 무굴의 중앙권력은 데칸지방에서 델리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한 마라타동맹에 의하여 좌우되어, 무굴 황제의 지배력은 약화되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지배세력은 마라타 ·마이소르 등 강력한 봉건세력을 멸망시키고, 인도에서의 식민지 지배영역을 확대하여 갔으나, 명목상으로만 존속한 무굴 황제의 지위는 그대로 남겨 두고 식민지 지배의 도구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1857년, 북인도를 중심으로 ‘세포이의 반란’이 일어나자, 각 주둔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도의 병사들이 델리에 집결하여, 무굴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추대하여 새로 정권을 수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반란이 영국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자, 그들은 탄압정책을 한층 강화하여, 그때까지 명목상으로만 남겨 두었던 무굴 황제의 지위를 폐함으로써 무굴제국은 멸망하였다.

 

8. 반영 독립투쟁과 건국

o 많은 정치단체가 18세기 후반에 생겨났으나 인도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중심 조직은 1885년 소집된 인도 국민회의가 맡게 되었음. 그러나 독립운동에 대한 영국의 냉담한 반응은 국민회의파를 점차 과격하게 만들었으며, 특히 벵갈의 분리(1905)는 전인도인들의 분노를 사 보이콧 및 스와데시 운동이 전인도로 파급되었음.

 이에 대해 영국은 분할통치 정책을 취하여 모슬렘과 힌두교도간 대립을 조장하였으며, 1906년에는 국민회의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모슬렘 연맹이 결성되었음.

 

o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인도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영국을 지지하면서 인도인이 영국에 적극 협조할 것을 호소하였음. 특히 바수(Basu), 진나(M.A. Jinnaj) 등 국민회의 대표들은 영국측에 대한 협조를 다짐하였음. 그리하여 막대한 수의 의용병과 군수물자 제공되었으며, 인도 병사 120만명중 80만명이 전투요원이었음.

 이러한 영국에 대한 협조는 전후 인도의 자치를 보장받기 위한 것이었음.

 

o 자치운동은 1917년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영국의 인도상 몬타규(Montagu)의 성명은 인도 지도자들의 환영을 받았음. 그러나 19181월 소위 몬타규, 쳄스퍼드 보고서가 발행되고, 이것이 1919년 인도 통치법이라는 명칭으로 공포됨으로써 인도인들을 크게 실망시켰음. 납세기준에 따라 남성의 10%만이 선거권을 갖고 여성의 참정권이 무시된 인도 통치법은 진정한 지방자치를 허락 하지 않아서 인도인의 전쟁 협조에 대한 보상으로서는 너무나 미약한 것이었음.

 

o 이를 계기로 국민회의내의 온건파와 과격파가 9년만에 다시 대결하게 됨. 그 결과 창립이래 계속 온건파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국민회의는 1917년 이후 간디(M. Gandhi, 1869-1948)등이 이끄는 과격파에 의하여 완전 장악됨. 과격파인 마하트마 간디는 만약 인도가 영국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전쟁이 장기화할 것을 우려하여 영국을 지지하였던 것인데 전후 요구대로 자치가 보장되지 않고, 오히려 19192월에 발표된 로왈라트법(Rowalatt Act)은 영국정부가 인도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자, 1920년 국민회의에서 평화롭고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할 것을 주장함.

 

o 그러나 이 불복종운동은 영국 정부가 제정한 법률과 규정을 준수하지 말자는 적극적인 운동이었음.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영국 상품의 배격, 파업, 납세 거부 등 불복종운동이 벌어짐. 이에 당황한 영국정부는 향후 분리통치를 실시하겠다고 하면서 이슬람교 연맹을 회유하였으나, 이슬람 교도들은 도리어 간디와 협력하여 반영운동에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함. 이러한 힌두-이슬람교 제휴의 반영운동을 힐라파트운동(Khilafat Movement)이라 함. 이슬람 교도들은 무굴제국이 멸망한 후 칼리프의 지위를 유지해 온 터키왕을 정신적 지주로 생각해 왔었는데, 1차대전 결과 터키제국이 분열됨에 따라 영국에 대한 감정이 악화된 것이 힌두-이슬람 제휴의 배경이 됨.

 

o 간디와 이슬람 교도들이 연합한 반영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영국 정부는 반영 인도 요인들 에 대한 체포, 살인을 자행하였음. 그러나 간디는 영국 정부의 강경책에 대응해서 민중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것을 저지시키면서 비폭력의 불복종운동을 더욱 강력히 전개하였음. 1927년 마드라스에서 열린 국민회의에서 인도의 지도자들은 2년 이내에 자치령으로 승격할 것을 영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 이러한 영국의 정책은 국민회의내에 과격파의 부상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와 1929년에는 과격파 네루 (Jawaharale Nehru, 1889~1964)가 국민회의의 의장으로 선출 되었음. 네루는 국민회의의 유일한 목적이 독립이라고 선언하고 이를 위해 간디에게 국민회의의 전권을 위임하였으며, 이에 간디는 다시 불복종운동을 전개함.

 

o 한편 힌두측을 대표한 간디와 함께 반영 힐라파트 운동을 전개한 이슬람교 대표는 알리 형제였으나, 후일 파키스탄 분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진나(M.A. Jinna)는 처음부터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운동에 찬성하지 않았음. 원래 진나는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의 화합을 주선하는 등 국민회의에 성실하게 참여하였으나, 합법적이고 점진적인 영국의 정치적 개혁에 깊은 신뢰감을 갖고 있었던 진나는 국민회의의 성격이 변질되자 국민회의와 결별하고 활동 무대를 이슬람교 연맹으로 옮겨 1924년 동 연맹의 의장이 되었음.

 

o 1939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민회의는 인도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으며 이에 영국은 자치령(Dominion)의 지위를 허용코자 하였으나 국민회의는 이를 거부하면서 Quit India를 요구하였음. 한편 모슬렘 연맹은 영국에 고무되어 파키스탄의 분리를 요구하였으나, 도리어 많은 모슬렘으로부터 반발을 받았음. 종전후 영국은 인도에 독립을 부여키로 결정하고, 인도, 파키스탄 분리안을 내놓음. 1946년 제헌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총선 결과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정부가 수립됨.

 

o 애틀리(Attlee)의 영국 노동당 정부는 인도가 영연방의 일원으로 남기를 희망하면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간의 화해를 도모하고자 각료사절단을 인도에 파견하였음.

 

o 각료사절단은 파키스탄 분리는 반대하면서도 힌두 다수의 A지역, 이슬람교 다수의 B지역, 이슬람교가 약간 우세한 C지역으로 나누는 안을 제시함. 이에 진나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음. 그러나 임시정부 구성을 놓고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 사이의 의견은 좁혀지지 않았는데, 이슬람교 연맹은 국민회의 대표와 이슬람교 대표의 동수를 요구하였으나 각료사절단은 이를 부하였음. 간디는 각료사절단에 대해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C지역의 형성으로 벵갈주와 아쌈주가 병합될 경우 이슬람교에 의해 전지역이 지배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태도를 바꾸었음. 네루가 다시 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1946년 각료사절단의 계획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자 진나가 이를 비난함으로써 통일 인도의 마지막 가능성은 사라지게 됨. 인도 총독은 국민회의와 이슬람교 연맹을 화해시키기 위해 간디와 네루에게 접근하여 각료사절단이 제시한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나 거부당하였음.

 

o 한편 애틀리는 19486월 이전에 인도의 정권 이양을 발표하고 이를 위해 마운트배튼 (Mountbatten)을 총독으로 임명하였음. 19473월에 취임한 마운트배튼은 가능하면 더 빠른 기간안에 정권 이양을 추진하기 위해 국민회의 지도자들과 접촉하였는데, 국민회의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네루나 파텔은 모두 인도-파키스탄의 분리에 긍정적인 입장이었으나 간디는 분리에 반대 입장을 취했음. 그후 간디의 영향력이 현저히 쇠퇴하면서 국민회의의 주도권은 네루와 파텔에게 넘어갔음. 인도의 분리와 두 자치령 탄생에 대한 마운트배튼의 분리 계획안은 모든 정당으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며 영국 정부도 이에 동의하였음.

 

o 1947815일 약 200년 동안의 영국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인도인들의 희망은 달성되었으나 인도 대륙에서 수천년의 전통을 이어온 인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됨. 네루는 델리에서 인도의 초대수상에 취임하였고, 진나는 카라치에서 파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음.

 

 

9. 독립 이후

o 1947.8.15 자와할랄 네루(Jawaharlal Nehru)가 인도 초대 수상에 취임함

 

o 1947.10.22 파키스탄이 카시미르 침공를 침공하자 카시미르의 마하라자 Hari Singh이 카시미르를 인도에 합병하는 문서에 10.26 서명하였으며, 네루 수상이 10.27 인도군을 카시미르에 파병함으로써 제1차 인.파 전쟁이 발생함.

 

o 1949.1.5 카시미르문제와 관련, 유엔안보리 결의 채택(철군 및 주민 투표). 1949.7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라치협정을 체결, 휴전함

 

o 1949.11.26 제헌의회에서 헌법 채택. 연방제와 민주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동헌법이 1950.1.26 발효됨으로써 인도는 영연방 자치령의 지위에서 벗어났음.

 

o 1951.10-1951.2 인도는 새 헌법에 의거 최초의 하원 총선을 실시. 동 총선에서 국민회의당은 총의석 489석중 364석을 획득하였으며, Jawaharlal Nehru는 새 헌법상 수상으로 취임. 1952.5 Rajendra Prasad가 인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됨

 

o 1954년 네루 수상과 모택동 주석은 평화공존 5원칙(Panch-sheel)에 서명하였는 바, .중관계의 기본 문서가 됨

 

o 1955년 국민회의당은 사회주의적 형태의 국가 건설에 관한 선언문을 채택함

 

o 1961년 인도는 포르투갈령 Goa를 점령함

 

o 1962년 중국군의 공격으로 인.중 국경분쟁이 발생함.

 

o1964.5.27 네루 수상의 사망으로 국민회의당의 Shastri, 수상에 취임함

 

o 1965.6 구자라트주의 Rann of Kutch 영유권을 둘러싸고 제2차 인.파 전쟁이 발발함

 

o 1969년 인디라 간디 수상은 사회주의적 형태의 국가 건설 이념에 따라 주요 은행들에 대한 국유화 조치를 단행하고, 1970년 마하라자들의 특권 및 면제를 취소하고 호칭 사용을 금지함

 

o 1971.2 하원 총선에서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당은 총의석 518342석을 획득하는 승리를 거둠. 1971.12. 인도의 방글라데시 독립 지원 문제를 둘러싸고 제3차 인.파 전쟁이 발발함

 

o 1972년 인도와 파키스탄은 카시미르 접경에 통제선(Line of Control)을 설치하고 동통제선의 변경은 양자간 대화를 통하여 해결키로 하는 Shimla협정에 서명함

 

o 1972년 라자스탄주의 포크란(Pokhran)에서 제1차 핵실험을 실시함

 

o 1975년 인도는 시킴(Sikkim)을 인도의 주로 편입시킴.

 

o 1975년 여당의 선거부정 혐의를 둘러싼 정치적 분규와 경제난국으로 정계가 혼란에 빠지자 인디라 간디 수상은 긴급조치를 선포하고, 우익 힌두단체 RSS 및 카시미르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 회교단체 Jamat-i-Islami 등의 활동을 금지함

 

o 1977.3 하원 총선에서 공산당을 제외한 주요 4개 정당들(BLD, INCO, BJS, Socialist Party)은 새로운 정당 Janata Party를 결성하여 국민회의당에 도전하여 과반수를 넘는 298석을 획득함으로써 집권. BLD의 당수 Moraji Desai는 수상에 취임하고, BJS(BJP前身)의 당수 Vajpayee는 외무장관에 임명됨.

 

o Janata Party(국민당)는 당내 4개 정파간의 갈등으로 정치적 안정을 기하지 못하고 1979.7에 붕괴됨.

Charan Singh 과도정부를 거쳐 1980.1 하원 총선이 실시된 바, 국민회의당이 353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고 인디라 간디가 수상에 다시 취임함

 

o 1980.4 Janata PartyBJS 파벌이 탈당하여 BJP(인도국민당)라는 당명으로 분당함

 

o 인디라 간디 수상은 1980년 영연방정상회담, 1982년 제9회 아시아경기대회 및 1983년 제7차 비동맹정상회담 등을 개최하여 인도의 대외적 지위를 높이는데 성공하였으나, 1984.6. 펀잡주의 시크교도의 성지 황금사원(Golden Temple)에 군대를 투입, 325여명의 시크교도를 사살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인디라 간디는 1984.10.31. 수상 관저에서 시크 경호원 2명에 의하여 암살됨

 

o 1984.10.31 수상에 취임한 라지브 간디는 국민들의 동정심을 의식, 조기 총선을 선포하였으며, 1984.12월에 실시된 제8차 하원 총선에서 총의석 542석중 415석을 획득하는 압승을 거두고, 1984.12.31.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

 

o 라지브 간디 수상은 집권후 펀잡 문제, 카시미르 문제 해결을 위하여 노력하고 경제개혁을 추진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음. 또한 1987년 정부 발주 무기구입을 둘러싼 고액의 뇌물 수수 사건(Bofors case) 등 정치스캔들이 연속적으로 폭로되어 라지브 간디 수상의 지도력이 약화되던 중 1989.11 실시된 총선에서 543석중 194석을 획득하여 제1당의 지위는 차지하였으나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신정부 구성을 포기. 이에 따라 제2의의 정당연합으로 등장한 국민전선(NF : JD 5개 정당연합)BJP(86), 공산당계의 CPI(12) CPIM(33)의 외곽 지원을 받아, V.P. Singh(JD)1989.11. 수상에 취임함

 

o 싱 내각은 1년여간의 집권기간(89.11-90.11)동안 신연방고용정책, 힌두.회교도간 대립 문제 등을 둘러싸고 BJP와 마찰한 바, BJP의 지원 철회로 1990.11 사퇴함

 

o 1990.11 JD(Janata Dal) 당내 싱의 라이벌인 Chandrashekhar가 자파세력(50) 및 국민회의당의 외곽 지원을 받아 수상에 취임함

 

o 1991.3 국민회의당의 지지 철회로 찬드라세카르 수상이 사임하고 하원이 해산됨

 

o 1991.5.20-26간 제10차 총선 실시 도중 5.22. 라지브 간디 전수상은 Tamil Nadu 주 수도 Chennai 근교 40지점에서 LTTE(스리랑카의 타밀 분리주의 단체) 요원에 의하여 암살됨

 

o 라지브 간디 사망으로 인해 1991.6.12로 연기된 총선에서 국민회의당은 총의석 543석중 232석을 획득함으로써 과반수에는 미달하였으나 제1당으로 집권. Narasimha Rao가 수상에 취임함

 

o 1992.2 실시된 하원의원 보궐선거 결과, 국민회의당이 20석을 추가함으로써 Rao 수상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함

 

o 1992.7. BJP, 공산당 등 야당은 Rao 내각에 대한 견제 차원에서 1992.4 대형 금융부정사건을 이유로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였으나 부결됨

 

o 1992.12.6 과격 힌두교인들에 의한 아요디야 회교사원(Babri Masjid) 파괴사건을 둘러싸고 국민회의당과 BJP의 대립 결과, 1992.12.21 BJPRao 내각불신임안을 다시 제출하였으나, 부결됨

 

o 1994.11-12 1995.5 실시된 10개 주의회 선거에서 국민회의당은 참패를 한 바, 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둘러싸고 당내분규가 발생. 1995.5. 국민회의당내 라오 수상을 반대하는 Tiwari Arjun Singh 등이 이탈하여 Congress(T)로 분당. Congress(T)1998.2 국민회의당에 복귀함

 

o 96.4.275.7 총선에서 BJP의 연합 정당들이 186석을 획득, 1정당연합으로 부상하고, 국민회의당은 136석에 그쳐 제2당으로 전락. United Front111석 획득함

 

o 96.5.16 1BJP의 총재 바지파이가 내각을 구성하였으나, 96.5.28 하원 신임 투표에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여 사임함

 

o 이에 따라 샤르마 대통령은 5.28. Janata Dal 주도 United Front(14개 정당 연합)Gowda 당수에게 조각을 권고, 고우다 당수는 국민회의당 및 공산계열 정당들의 외곽지원을 받아 6.1 총리에 취임함.

 

o 1997.4 국민회의당의 Kesri 총재는 국민회의당이 주도하는 연정을 모색하기 위하여 United Front 연정에 대한 외곽지원 철회를 선언. 그러나 United Front 연정은 국민회의당 주도의 연정보다는 새로운 총선을 선호함에 따라 국민회의당은 총선보다는 United Front 주도 연정을 계속 지지키로 입장 전환. 국민회의당과 United Front 연정간의 타협에 따라 Janata DalI.K. Gujral 내각이 출범함

 

o 1997.12. Jain Commission(라지브 간디 암살 조사위원회)의 임시보고서에서 DMK(Tamil Nadu주 지방 정당)의 연루 가능성 발표와 관련, 국민회의당은 DMK를 연정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 Gujral 연정이 이를 거부하자 국민회의당이 지지를 철회함에 따라 대통령은 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결정함

 

o 1998.2-3 하원 총선 결과, BJP 및 연합정당이 252석을 획득하여 제1정당이 되었으며, 국민회의당 및 연합정당은 167석을 획득하여 제2정당이 됨

 

o 1998.3.19. BJP 주도의 연정(AIADMK, SP 18개 정당 참여) 구성. 3.28. Vajpayee 내각(BJP)이 출범함

 

o 1998.5.11 5.13 라자스탄주의 Pokhran에서 핵실험을 실시함

 

o 1999.4.17 바즈파이 내각에 대한 신임동의안이 부결(찬성 269, 반대 270)되어 1999.4.26 하원이 해산되고 바지파이 과도 내각체제가 수립됨

 

o 1999.9.5-10.35단계에 나누어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BJP 주도의 NDA(National Democratic Alliance) 연합이 305(이중 BJP 182), 국민회의당 및 연합이 114(국민회의당 112), 좌파연합 41, 기타정당 64석 등의 분포로 BJP주도의 NDA가 집권하게 되어 1999.10.13 바지파이 전총리가 다시 총리에 취임함

 

o 바지파이 총리의 BJP를 중심으로 한 NDA 연은 바즈파이 총리의 리더쉽으로 연정 참여 20여개 정당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며 안정기조를 유지함. 그러나 NDA 연정은 연정구성 군소정당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등 연립정부로서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지니고 있어 정국불안요소가 상존하고 있음

 

o 20015월 실시된 4개주와 1개 연방관할지역(타밀나두, 웨스트벵갈, 케랄라, 아쌈주 및 폰디체리 연방관할지역) 주의회 선거에서 콩그레스(Congress)당이 2개주에서 집권하고 2개주에서 콩그레스(Congress)당 연합세력이 승리하는등 상승세를 보임

 

o 2001.3 인터넷 뉴스매체(Tehelka)에 의한 Bangaru Laxman BJP 총재 및 NDA 제휴정당 Samata PartyJaya Jaitly 총재 등의 방산구매관련 금품수수장면 폭로로 Laxman BJP 총재, Jaitly Samata Party 총재, Fernandes 국방장관, Panja 외무담당국무장관(이상 Samata Party 지도급 인사) 등이 사임하고, Trinamool Congress(당수 Mamata Banerjee)NDA를 탈퇴하는등 정치적 파문이 확산되고 여.야간 대립이 격화된바 있음. 동 폭로사건의 여파가 진정된후 Fernandes 전국방장관은 다시 국방장관에 임명되고 Trinamool Congress당도 NDA에 복귀함

 

o 2002.2월 인도 최대주인 UP주를 비롯한 펀잡주, 우타란찰주 등에서의 지방선거결과 전반적으로 접권당 BJP가 참패하, 콩그레스(Congress)당이 부상하였는 추세를 보임. 또한 아요디야에서 힌두-회교도간 사원건립을 둘러싼 분쟁 및 구자라트 주에서의 유혈 종교분쟁사태와 관련하여 TDP등 일부 연정참여 정당이 BJP의 세속주의 강령으로 부터의 일탈현상을 지적하며 불만을 표출하는등 NDA 연립정부의 결속에 다소의 균열현상도 발생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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