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Lebanon)

 

 

 

 

 공식 이름은 레바논 공화국(Republic of Lebanon)이고 수도는 베이루트(Beirut)이다.

 

 지형이 좁은 띠 모양이고, 세계의 작은 독립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남북 길이 215km, 동서 최대 길이 약 90km이다. 북쪽과 동쪽은 시리아, 남쪽은 이스라엘, 서쪽은 지중해와 경계를 이룬다.

 

 인구의 94%는 아랍인이며, 아르메니아인이 4%이다.

 공용어는 아랍어이며, 영어와 프랑스어도 통용된다.

 종교는 이슬람교 70%, 기독교 30%로 구분되나, 이는 다시 매우 배타적인 17개의 종파로 나누어진다.

 

 해안 지역에는 인류가 정착생활을 했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가 몇 군데 있다. 페니키아의 항구도시였던 티레(지금의 수르), 시돈(지금의 사이다), 비블로스(지금의 주바일)는 BC 3000년경 무역과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레바논은 1920년이 되어서야 현대 국가의 모습이 갖춰 1926년에 공화국이 되었고 1943년 독립을 이룩했다.

 레바논은 아랍 세계와 많은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면서도 구별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리 풍요롭지 못한 자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은 오랫동안 중동의 활발한 상업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레바논(Lebanon)은 지형이 좁은 띠 모양이고, 세계의 작은 독립국가들 중의 하나이다. 남북 길이 215km, 동서 최대 길이 약 90km이다. 북쪽과 동쪽은 시리아, 남쪽은 이스라엘, 서쪽은 지중해와 경계를 이룬다. 수도는 베이루트이다.

레바논, 특히 해안 지역에는 인류가 정착생활을 했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거주지가 몇 군데 있다. 페니키아의 항구도시였던 티레(지금의 수르), 시돈(지금의 사이다), 비블로스(지금의 주바일)는 BC 3000년경 무역과 문화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1920년이 되어서야 현대 국가의 모습이 갖춰졌다. 그 해에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위임을 받아 레바논을 통치했던 프랑스는 그레이터 레바논이라는 국가를 설립했다. 레바논은 그 후 1926년에 공화국이 되었고 1943년 독립을 이룩했다.

 

 레바논은 아랍 세계와 많은 문화적 특징들을 공유한다. 하지만 많은 아랍 인접국들과 구별되는 특징도 갖고 있다. 레바논의 울퉁불퉁한 산악지형은 레바논 역사 내내 다양한 종교와 인종 집단들, 그리고 정치적 반체제 인물들을 위한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레바논은 지중해 지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 중의 하나이고 문자해독률이 높다. 그리 풍요롭지 못한 자연자원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은 오랫동안 중동의 활발한 상업적·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활기와 성장이라는 외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잠재되어 있었다. 레바논은 사회적·경제적 조직들 간의 내부 문제와 싸워야 했고, 또한 이스라엘과 이웃 아랍 국가들, 레바논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들과의 관계에서 국가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싸워야 했다.

 

 레바논의 종파별 안배주의에 의한 종교 공동체들 간의 정교한 균형은 내외적 투쟁 압력을 받으면서 차츰 힘을 잃어갔다. 정치적 힘을 둘러싼 공동체들 간의 경쟁은 팔레스타인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대두시켰고, 팔레스타인이 '국가 내의 국가'로 성장하는 데서 발생된 복잡한 문제들로 인해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은 1975년에 내전으로 비화되어 극심한 피해를 가져왔고, 정부 제도의 파괴로 이어졌다.

 

 1990년에 내전이 종료된 뒤 레바논은 사회경제적·정치적으로 안정을 회복했다. 하지만 외부의 개입과 안배주의에 따른 관계에서 발생하는 잡음들이 계속 생겨났기 때문에 레바논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은 21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서에서 동으로 4개 지형구로 뚜렷이 나누어진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좁은 해안평지, 남북으로 뻗어 있는 해발 2,000∼3,000m의 레바논 산맥(Lebanon Mountains, 자발 루브난), 이 산맥과 나란히 뻗어 있는 길이 175km의 기름진 알비카(베카) 계곡, 약 2,000m 높이로 동쪽 국경을 이루며 남쪽으로 뻗어 더 높은 헤르몬 산까지 이어지는 안티레바논 산맥(알자발앗샤르키)이 그것이다.

 

 레바논에서 유일하게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강인 리타니 강은 알비카 계곡 대부분을 관류하여 역사적으로 유명한 티레(지금의 수르) 부근에서 지중해로 흘러들어간다.

 

 지역적으로 기복량(起伏量)에 차이가 있고 탁월풍인 서풍의 진로를 가로막는 큰 산줄기들이 뻗어 있기 때문에 레바논에는 다양한 기후 인자가 존재한다. 강우량은 중동지방의 기준으로서는 높은 편으로, 해안에서 연간 약 750∼1,000㎜(대부분 겨울에)를 기록한다. 레바논 산맥의 고지대는 강우량이 최고 1,500㎜에 달하고 알비카에는 380∼630㎜의 비가 내린다.

 

 원래 빽빽한 삼림지대가 많았으나 지금은 국토의 약 8%만이 숲으로 덮여 있다. 수세기에 걸친 개발로 얼마 남지 않은 유명한 히말라야 삼목은 법으로 보호하는 산비탈 숲에서만 볼 수 있다. 광물자원은 거의 없다.

 

 

레바논(Lebanon) 개요

o 공식명칭: 레바논 공화국 (Republic of Lebanon)

o 수도: 베이루트

o 면적: 약 1만㎢ (한반도의 0.047배)

o 인구: 약 686만 명(2022년)

o GDP: 약 585억$(2022년. 세계 84위)

o 언어: 아랍어, 영어, 프랑스어

o 주요민족: 아랍인(95%), 아르메니아인(4%)

o 기후: 지중해성기후

o 정부/의회형태: 중앙집권공화제 / 다당제&단원제

o 종교: 이슬람교(50%), 그리스도교(47%)

o 화폐: 레바논 파운드 (LBP)

o 국화:

o 국가번호: 961

o 전압: 100V / 50Hz, 120V / 60Hz, 230V / 50Hz, 220V / 50Hz

o 도메인: .lb

 

 

 기후는 여름에 고온건조하고 겨울에 온난다습한 지중해성 기후이다. 주요 산업은 농업·상업·금융업 등이며, 2차산업 중에는 정유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레바논은 아랍권의 나라들 중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한 의회민주주의를 정치체제의 근간으로 하는 유일한 나라이다. 1932년에 실시되었던 인구조사를 토대로 기독교와 이슬람교도 간의 권력안배를 6:5의 비율로 결정, 의회도 이에 따라 배분되며, 대통령(기독교)·수상(이슬람교)·국회의장(이슬람교)을 해당 종파 중에서만 선출한다. 그러나 독립 이후 회교도의 인구가 증가되어 이와 같은 권력배분은 레바논내전의 배경이 되고 있다.

 

 이 나라의 정체는 임기 6년의 대통령 중심제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4년의 단원제(128석)이다. 주요 정당으로는 미래당, 레바논의 힘, 민주개혁당, 민주좌익당, 팔랑게당, 아말운동, 헤즈볼라, 시리아사회민족당, 자유애국운동 등이 있다.

 

 

레바논 약사

 이 지역은 BC 3000년경부터 페니키아인이 해안지대에 거주하며 도시국가를 세운 곳이다.

 

 11세기 말에 시작된 십자군전쟁 때에는 셀주크 투르크와 쟁탈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에는 오랫동안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다가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는 프랑스의 통치하에 놓였다가 1943년 11월 2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어 양측간의 충돌사태가 빈발하였다.

 

 또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45만 명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대량 유입하여 베이루트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본부를 설치하게 됨에 따라, 레바논 영토 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의 전투가 계속되게 되었다.

 

 이에 맞물려 국내의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게 되었고, 1975년 4월 이와 같은 갈등이 내전으로 발전하게 되자 시리아군이 개입하여 이를 수습하였다. 그 뒤 시리아군은 레바논 동북부에 계속 주둔하고 있다. 한편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 간에 무력분쟁이 계속되자 1978년에는 국제연합 잠정평화유지군(UNIFIL)이, 1982년부터는 다국적 평화유지군이 주둔했다.

 

 1982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레바논으로부터 철수하였지만, 다시 이스라엘군 및 시리아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1983년 9월 이후 레바논정부군·기독교민병대·회교민병대 간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다. 결국 1984년 2월 회교도 민병대가 서베이루트를 장악하고 친서방 레바논 정부가 시리아의 압력에 굴복함에 따라 같은 해 5월 친시리아 거국내각이 수립되었다.

 

 그 뒤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권력안배를 위한 정치적 절충이 이루어졌으나, 1985년 10월에 이르기까지 내전 수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에 1985년 12월 시리아의 중재하에 기독교와 이슬람교 시아파, 이슬람교 드루즈파의 세 거두 사이에 평화협정이 조인되어 다시 새 정부가 구성되었으나 내전은 지속되었다.

 

 이스라엘의 노동당 연립거국내각은 1984년 이스라엘군의 일방철수를 단행하였고, 1985년 6월 10일 잔여 이스라엘군이 남부 레바논으로부터 완전 철군하였다. 1987년 2월 15일 AMAL 민병대와 PSP 등 좌파연합 민병대 간에 격렬한 무력충돌이 발생하자 법과 질서 회복 명목으로 7000여 명의 시리아 군대가 서베이루트에 주둔하게 되었다.

 

 1987년 6월 1일 카라미(Rashid Karami) 수상이 피살되자 호스(Salim Hoss) 수상이 취임하였다. 그러나 1988년 9월 22일 제마엘 대통령이 기독교 지도자 Aoun 군총사령관을 수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오운(Aoun) 내각과 기존 이슬람교도 호스 내각의 2개 정부가 병존하였다. 1989년 3월 14일 레바논 기독교 지도자 오운 장군은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 퇴진을 목표로 해방전쟁을 선언한 후, 시리아군 및 회교 민병대와 기독교 간 전투가 발생하였다.

 

 같은 해 9월 레바논 내전이 휴전되고, 아랍연맹 레바논 주재 3국위원회의 주선으로 레바논국회(기독교계 의원 32명, 이슬람교계 의원 30명)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소집되어 대통령의 권한 축소, 국회의석 재분배 및 시리아군의 재배치 등을 골자로 하는 ‘국민화합헌장’을 잠정 합의하였다. 1990년 9월 21일 엘리아스 흐라위(Elias Hrawi) 대통령의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고, 12월 24일에는 카라미(Omar Karami) 수상의 30인 내각이 출범(기독교 15명, 이슬람교 15명)하였다.

 

 1991년 4월 정부는 민병대의 무장해제 및 해체를 실시하였고, 같은 해 5월 20일 레바논·시리아 간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였다. 1992년 8월, 20년 만에 총선거가 실시되어, 친이란의 시아파 조직인 히즈라가 처음으로 후보자를 옹립, 14석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라피크 엘 하리리(Rafic El Hariri) 수상의 신내각이 발족되었다.

 

 레바논은 대외적으로 아랍 제국과의 선린관계 유지에 두고 있다. 따라서 중동평화문제에는 아랍권과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또한 1955년 4월 아시아·아프리카회의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우호적 정책을 천명한 뒤 이를 현재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대외정책의 기조는 중도중립의 비동맹으로 1945년 유엔에, 1961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현 미쉘 술레이만(Michel Suleiman) 대통령은 2008년 5월에 취임하였으며, 실권자 후아드 시니오라(Fouad Seniora) 총리는 2008년 7월 취임하여 정부를 이끌고 있다.

 

 

레바논 여행 정보

1. 비자

 레바논 정부는 2004년 8월 30일부터 관광 목적으로 입국하는 모든 우리 국민에 대해서 베이루트 국제공항 및 여타 국경에서의 입국비자 발급을 허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반' 여권을 소지하고 관광 목적으로 레바논을 방문하는 경우, 1개월 체류까지 비자 수수료가 면제되며, 레바논의 베이루트 공항이나 그 밖의 국경에서 '입국비자'를 받을 수 있도록 입국절차가 개선되었다.

 관광 목적이 아닌 상용, 유학, 취재, 취업, 공연 등으로 레바논 입국시는 주한 레바논 대사관 또는 해외 주재 레바논 대사관에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 경우, 비자 발급에 소요되는 시일이 최소 2주 이상 소요된다.

 참고로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적성국가로 분류되어 여권에 이스라엘 출입국 스탬프가 있을 경우 입국이 거부되므로 주의을 요한다.

 

2. 안전정보

 레바논의 여행경보단계는 지역에 따라 나누어 지정하고 있다. 리타니강 이남, 트리폴리(Tripoli)시, 12개 팔레스타인 난민촌 지역은 제3단계 '여행제한' 지역이다. 긴급한 용무가 아닌 한 귀국하거나 가급적 여행을 취소 또는 연기 할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 지역은 제2단계 '여행자제' 지역으로 신변안전에 특별히 유의를 하고 여행 필요성에 대해 신중히 검토를 요한다.

 

 관광시 유의사항으로는 이스라엘과 접경지역 및 남부레바논 지역, 헤즈볼라 동조자들의 주거지역인 베이루트 남부교외 지역, 헤즈볼라 근거지인 동부 베카의 일부지역, 팔레스타인 난민촌 인근지역 등은 여행을 삼가는게 좋다. 특히 군사기지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3. 여행하기 좋은 때

 베이루트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이기 때문에 겨울철에도 여행하기에 좋다. 단 12월부터 4월까지는 우기로 비가 많이 내린다. 무덥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는 봄과 가을이 최고의 여행시즌이다.

 

4. 여행 Tip

 중동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48시간 체류 비자로 레바논에 들어와 이틀 만에 레바논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레바논은 북부와 남부에 걸쳐 다양한 문화유산과 빼어난 자연환경을 품고 있다. 최소 일주일 정도의 시간을 내서 찬찬히 둘러보기를 권한다. 참고로, 레바논 요리는 그 맛과 다양성에서 미식가들의 격찬을 받아왔다. 한 번쯤은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중동 음식의 진수를 경험해 보자.

 

 

◐ 베이루트(Beirut) 기후(℃)

지 역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베이루트

(Beirut)

최고평균

17.4

17.5

19.6

22.6

25.4

27.8

30.0

30.7

29.8

27.5

23.2

19.4

최저평균

11.2

11.

12.6

15.2

18.2

21.6

24.0

24.8

23.7

21.0

16.3

12.9

평 균

14.0

14.0

16.0

18.7

21.6

24.9

27.1

27.8

26.8

24.1

19.5

15.8

강수량mm

190.9

133.4

110.8

46.3

15.0

1.5

0.3

0.4

2.3

60.3

100.6

163.8

강우일수

15

12

9

5

2

0

0

0

1

4

8

12

 

 

관광 명소

베이루트(Beirut)

 레바논의 수도. 지중해 동안에 면해 있는 서아시아 굴지의 항구로 상업· 금융· 교통·문화 ·관광의 중심지이다. 도시의 기원은 BC 15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페니키아인()의 항구로서 번영하였다.

 

 오랫동안 중동 지역의 허브 역할을 해왔던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라 불리며 그 아름다움을 뽐내왔다.

 오천 년에 걸친 도시의 역사가 말해 주듯 베이루트는 페니키아·로마·맘루크·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지는 각 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간직한 보고다. 부르카와 토플리스, 푸른 지중해와 만년설이 쌓인 산, 복원된 새 건물과 폭격의 잔해가 그대로 남은 낡은 건물이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19세기 말에 방파제 등 근대적인 항만시설이 정비되면서 급속히 발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이스라엘 독립(1948년)에 의하여 하이파항()이 아랍권에서 분리된 이후 서남아시아의 아랍권 유일의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주민의 대부분은 아랍인이고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페르시아인· 터키인· 유럽인이 거주한다. 주민은 크리스트교도(마론파,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가톨릭교, 가톨릭교, 개신교), 이슬람교도(수니파, 시아파, 또 드루즈파) 등 소수종교로 나뉘어 있고 중동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다양한 도시의 하나이다. 베이루트 유태인의 대부분은 1975년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미국으로 이주했고, 현재는 뉴욕 시의 브루클린지구에 사는 사람이 눈에 띄고 있다. 베이루트는 레바논 내전 때에 분열해, 이슬람교도의 서부와 크리스트교도의 동부로 분할되었다.

 

 도시 중심에는 회교사원과 시장이 있어 번잡하고, 해안에는 상점· 무역상사· 공공기관 등이 집중되어 있는 거리가 있다. 남서부의 라스베이루트 지구는 중산층 이상의 거주지로 고층건물이 많은 국제적 색채가 짙은 시가이다. 해안을 낀 주변의 구릉지에는 관광시설과 고급주택· 별장이 많다.

 베이루트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등 광대한 서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중계무역으로 유명하다.

 

 보석류를 비롯하여 기계· 가축· 곡물· 가공식품· 화학공업제품· 전기제품 등 모든 상품을 수입하여 재수출하고, 서아시아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채소의 수출항이기도 하다. 도시 중심에는 회교사원과 시장이 있어 번잡하고, 해안에는 상점· 무역상사· 공공기관 등이 집중되어 있는 거리가 있다. 남서부의 라스베이루트 지구는 중산층 이상의 거주지로 고층건물이 많은 국제적 색채가 짙은 시가이다. 해안을 낀 주변의 구릉지에는 관광시설과 고급주택· 별장이 많다.

 

 베이루트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등 광대한 서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중계무역으로 유명하다. 보석류를 비롯하여 기계· 가축· 곡물· 가공식품· 화학공업제품· 전기제품 등 모든 상품을 수입하여 재수출하고, 서아시아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채소의 수출항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환(: 어음 또는 수표)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전세계의 유력한 금융기관이 집중되어 있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요르단의 암만 등지를 잇는 철도와 도로의 기점이다. 남부 교외에는 국제 공항이 있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항공로의 통과점이기 때문에 관광객과 여행자들의 왕래가 많다.

 

 옛날부터 학술· 문화의 중심지로서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 비즈니스 컴퓨터 대학교, 하가지안 대학교, 레바논 대학교, 아메리칸 레바논 대학교, 아메리칸 과학기술 대학교, 베이루트 아랍 대학교 등 21개의 대학이 있다.

 

다운타운

계탑을 중심으로 별 모양의 거리가 만들어진 '나지메 스퀘어(Star Square, 불어로는 Place d'etoile)' 일대를 지칭하며 이 지역에는 유럽풍의 석조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노천카페와 식당이 즐비하여 밤시간 이면 자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인기가 있다. '나지메 스퀘어 인근에는 총리부(Grand Serail) 및 국회 건물이 있으며 로마시대 유적(Roman Bath)도 볼 수 있어 고대와 현대의 조화를 만끽할 수 있다.

 또한 근처에 위치한 모스크(Al Omari Mosque)와 성당(St. Georges's Cathedral)은 레바논의 특징인 종파간의 공존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총리부(Grand Serail) :

 1853년 오토만 통치시 군대 막사로 건축되었으며 프랑스 신탁통치 시절 총독 집무실이었다.

 

로만바스(Roman Bath) :

 로마시대의 대중목욕탕으로서 1968년에 최초 발굴되어 1995~1997년간 대대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인류 최고 도시 - 비블로스(Byblos, 바이블)

 인류 최고의 도시 비블로스(아랍명 주베일)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북쪽으로 40㎞ 떨어진 해안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비블로스는 자신의 도시를 온통 성벽으로 둘러쌌던 엘(El)이란 신에 의하여 건설되었다. 초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2800년경)의 육중한 이곳 도시 성벽들은 그 시대 초기의 종교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비블로스에는 약 7000여년 전 소규모의 어부 집단이 정착해 살았던 흔적(석회암을 깨부숴 바닥에 붙인 단칸 오두막들)을 볼 수가 있다. 고대의 항구도시 비블로스는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로서, 특히 이집트산 파피루스의 집산지였다. 파피루스는 종이의 원료였다. 당시 페니키아 상인들은 파피루스 위에 자신들의 문자를 기록하여 그리스 세계에 전달하였는데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이곳의 지명을 '비블로스'(그리스어로 '책'을 가리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어의 바이블(Bible)은 그리스어의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한 것으로서(Biblia는 Biblos의 복수형), 바이블(Bible)은 책중의 책을 의미한다. 또한 비블로스는 영어 알파벳의 모태가 되는 페니키아 문자가 발견된 것으로 유명하다.

 

 비블로스에서 둘러 볼 만한 장소로는

 ① 12세기와 13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지어진 성

 ② 이집트의 사원들

 ③ 페니키아 왕족의 공동묘지

 ④ 로마식 원형 경기장 등이다.

 

 유적지 주변에는 아랍식 토산품을 파는 재래시장(Souk)이 있으며, 해변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일몰 광경은 운치를 자아낸다.

 

 

시돈(Sidon, 아랍명: 싸이다)

 두로(Tyre)와 같이 동 지중해 연안에서 제일 큰 항구이다. 현재는 그곳을 싸이다라고 한다. 베이루트에서 남쪽으로 41km에 있는 지중해 연안도시이다. 고대 베니게(페니키아)의 옛 도시로 상업이 번창했다.

 

 시돈 일대에는 오렌지, 바나나 농원들이 있다. 시돈은 낚시란 의미로 페니키아 시대의 비블로스, 두로(티레)와 3대도시의 하나로 중요한 해상진출의 요충지였다. 다리우스에서 B.C 6세말엽 까지는 페르시아 5총독의 수도였다.

 

 1228년 십자군이 건설한 바다의 요새(Sea Castle), 막두쉬 동굴교회, 에쉬문 신전 등 유적이 남아있다. 이중 막두쉬 동굴 교회는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가 다녀간 지점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이다.

 

 

 

두로(Tyre, 아랍명: 쑤르)

 두로(Tyre, 아랍명: 쑤르)는 '바위'란 뜻이다.

 시돈항구에서 약 40km 지점 레바논과 이스라엘에서 약 24km 북쪽에 위치해 있다.

 고대 두로(티레)는 레바논 남쪽 연안에 있었으며 BC 3000년경 페니키아에 의해 세워졌다. 원래는 육지 지역과 섬 도시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BC 4세기에 섬을 반도로 바꾼 둑길에 의해 연결되었다.

 

 두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미 견고한 도시 국가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수 19:29), BC 10세기경에 두로 왕 히람은 항구에서 지중해 쪽으로 738m 떨어진 곳에 4㎢ 암반을 요새화하여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이스라엘과 우호 조약을 맺고 성전 건축에 필요한 백향목을 비롯한 건축 자재와 목공, 석공 등 기술자를 지원하였다(왕상 5:1-2). 그후 앗수르의 살만에셀 3세, 디글랏 빌레셀 3세, 살만에셀 5세, 에살핫돈 왕의 공격을 수없이 받고 항복하여 조공을 바치다 BC 572년경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13년에 걸친 공격으로 국운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후 헬라의 알렉산더에게 멸망당했다(BC 333년경). 이때 알렉산더는 길이 800m, 폭 60m의 방파제를 쌓아 7개월 동안 공격한 끝에 난공불락의 요새지 두로를 함락시켰고, 2천여 명 지도자의 목을 자르고, 주민 3만 명을 노예로 삼았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께서 이곳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셨으며(막 7:24, 31), 바울의 선교여행 중간 기착지가 되기도 하였다(행 21:3-7).

 

 페니키아 시대에 두로(티레)는 자줏빛 염색과 유리 산업으로 유명했으며 로마 시대의 유적을 통해 현지에 알려졌다.

 

 

 두로(티레)의 구시가는 반도에 있으며 신도시는 조금 내륙에 위치해 있다. 더 남쪽으로 가면 로마 시대의 두로(티레) 유적으로 다다르게 된다.

 

 로마의 유적에는 기념비적인 아치 길을 따라 이어진 잘 보존된 도로가 나온다. 한편은 수로 옆에 이어져 있으며 양쪽에는 정교하고 복잡하게 조각된 돌과 대리석 석관들이 수없이 많이 늘어서 있다. 유적의 경마장은 AD 2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로마시대에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20,000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날 '수르'로 불리는 인구 10,000여 명의 소도시다.

 매년 여름이면 이곳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성자의 계곡(Qadisha Valley)

 백향목숲이 있고 칼릴 지브란의 고향이기도 한 레바논 북부에 위치한 '브샤레(Bechare)'라는 마을을 가다 보면 험준산령에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일명 '성자의 계곡'을 대하게 된다. 이곳은 역사적으로 중세시대부터 마로나이트(성자 마론을 추종하는 무리들, 단의론 주장) 신자들이 로마 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은신하며 수도생활에 정진하였던 곳이다. 해발 2천m에 달하는 가파른 계곡에 동굴을 파들어가 그안에서 수도에 힘썼던 그 장소를 방문하다 보면 무신론자라도 어떤 신령한 영감에 빠져들게 된다.

 마론파(마로나이트)는 1608년 로마 교황청과 화해를 하였고, 현재 레바논의 대표적인 크리스챤 종파로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성자의 계곡에는 동굴과 수도원이 많이 남아 있는데 '엘리사 수도원(Deir Mar Eilshaa)'같은 곳은 또 하나의 관광 명소이다.

 

 

바알베크(Balabek)

 레바논 알비카 주의 농업 중심지이자 주요도시로 로마 시대의 도시유적지.

 

 바알베크은 레바논 바알베크헤르멜 주 베카 계곡에 있는 도시로, 높이는 해발 1,170m이며, 리타니 강 동쪽에 있다. 로마 제국 시기에 지어진 사원 유적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바알베크는 로마 제국 시대에 '태양신의 도시'라는 의미의 헬리오폴리스(Heliopolis)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로 로마 제국의 최대 성지 가운데 하나였다.

 

 바알베크(Baal-Bek)라는 명칭 또한 바알(Baal, 페니키아의 신)이라는 신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198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에서는 바알베크 국제 페스티벌이 매년 열린다. 

 

 그리스가 시리아를 정복했던 BC 332년 이전의 바알베크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BC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고 난 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때부터 쓰기 시작한 헬리오폴리스라는 이름은 이집트에 있는 같은 지명을 본뜬 것으로 추측된다.

 

 

 BC 200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대왕에게 점령되었고 BC 64년 셀레우코스 왕조가 망하면서 로마 제국에게 넘어갔다. AD 637년 아랍인들의 지배 아래 들어간 뒤 20세기까지 시리아의 이슬람 군주들의 통치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프랑스가 레바논을 위임통치할 때 바알베크도 포함되었다.

 

 유럽인들이 바알베크의 유적을 발견하고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으나 거대한 로마식 사원의 발굴은 1898~1903년 독일인 조사단의 작업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졌다. 프랑스의 위임통치 아래에서 폭넓은 정리·보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레바논 정부도 상당부분을 복구했으나 1970년대 중반 레바논에 주둔한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군대에게 빼앗겨 요새로 쓰였다.

 

 주요유적의 하나로 주피터 신전(Temple of Jupiter, 유피테르 신전)을 들 수 있다. 이 신전은 입구를 지나면 6각형 앞마당이 나오고 이어서 정교하게 장식된 반원형 벤치들로 둘러싸인 가로 104.5m, 세로 103m 크기의 직4각형 터를 거쳐, 상이집트의 아스완에서 가져온 84개의 화강암 기둥으로 받쳐진 지붕이 있는 현관으로 연결된다. 직4각형 터 서쪽 끝 높은 계단 위에는 지름 2.4m, 높이 18.9m의 기둥이 앞뒷면에는 각각 10개씩, 양 옆면에는 각각 19개씩 떠받치고 있는 코린트 양식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다.

 

 이 신전은 주피터(Jupiter)와 대등한 위치에 있는 시리아의 천둥의 신 하다드(Hadad), 베누스(Venus)에 견줄 수 있는 자연의 여신 아타르가티스(Atargatis), 그리스의 헤르메스(Hermes)나 로마의 메르쿠리우스(Mercurius)와는 동격으로 식물의 영혼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소년신 등 3신을 모시고 있다. 원래는 순수하게 농업에 관한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인격신을 숭배하는 미신적 측면이 발전했고 소년신을 모시는 제사도 주신제(酒神祭)의 모습을 띠게 된 것 같다. 역시 코린트 양식으로 지어진 바코스 사원은 앞뒤로 8개씩, 양옆으로 15개씩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데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원을 장식하고 있는 상징물들은 이곳이 주피터 사원과 마찬가지로 농업에 관련된 앞의 3신에게 바쳐졌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베누스 신을 상징하는 상당수의 내부장식물을 통해 내세구원을 믿던 미신적 의식이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알베크의 신전들은 신전 터가 고르지 않아 높낮이를 맞추기 위해서 높은 단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무게 750톤에 달하는 돌들이 기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바알베크에 거대한 로마 신전 건축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였으며, 바알베크의 신전들은 토착 신앙과 로마 종교가 조화롭게 결합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유피테르 신전(Temple of Jupiter, 주피터 신전)은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직접 설계했다고 하며, 네로 황제 때인 60년에 완성되었다. 건물 기둥은 높이가 20m가 넘고 지름이 2.4m에 이르는데 원래는 54개의 기둥이 있었으며, 높이도 40m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전 안뜰 중앙에는 2개의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는 연못이 있었다. 현재 건물은 대부분 무너져서 넓은 터와 6개의 거대한 기둥만이 남아 있지만, 유피테르 신전은 로마 제정 시대 최대의 건축물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장대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 신전에는 유피테르 신 이외에도 페니키아 토착 농업 신들이 함께 안치되었는데, 각각 아버지, 어머니, 아들을 상징하는 하다드(Hadad: 하늘과 폭풍의 신), 아타르가티스(Atargatis: 물과 풍요의 신), 알리얀(식물의 정령 신) 세 신이 모셔졌다. 

 

 유피테르 신전 남서쪽에 있는 바쿠스 신전(Temple of Bacchus)은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사원이다. 유피테르 신전보다 조금 늦은 2세기경에 건립되었으나, 지붕 이외에는 원형이 보존되고 있다. 신전 안에는 신상이 안치된 지성소가 있는데 이는 페니키아적인 건축 요소이다. 이외에도 3세기 초에 건립된 베누스 신전(Venus Temple), 메르쿠리우스 신전 (Mercurius Temple)유적 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중반까지 로마 황제들의 신전 건축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에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하고 국교로 삼으면서 신전 건설이 중단되었으며, 7세기 이후에 이슬람교도의 지배를 받으면서 도시의 원래 이름인 바알베크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759년 대지진 등 여러 차례 이 지역을 덮친 지진으로 신전 유적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16세기 유럽인들은 바알베크 유적에 관심을 가졌으나, 실질적인 발굴은 20세기 초에 와서 이루어졌다. 반 세기 이상 계속된 레바논 내전의 여파로, 1970년 대에는 신전 유적지가 게릴라들의 훈련 장소로 이용되었으며, 전쟁의 혼란 속에 귀중한 문화유산이 국외로 반출되기도 했다.

 

 원형의 베누스 사원, 도시벽의 유적, 헤르메스 신을 모신 사원의 유적, 주민들의 집에서 출토된 중요한 로마식 모자이크, 옛날 재료를 써서 복원한 모스크의 폐허 등이 있으며 아랍 제국의 요새 유적 등도 곳곳에 남아 있다.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

 레바논이 낳은 세계적인 천재 명상가 칼릴 지브란(Khalil Gibran, 1883~1931)은 아름다운 성자의 계곡과 백향목 숲이 자리잡은 레바논의 '브샤레(Bechar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마론파 교회의 목사의 딸인 어머니와 부유한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190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림을 그리며 저술작업을 시작했다. 1908년에는 파리로 가서 미술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후 뉴욕으로 가서 창작에 몰두하였는데 이때(1923년)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예언자(The Prophet)'를 완성하였다.

 '예언자(The Prophet)'라는 작품은 우리말을 비롯한 수십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지금 국내에 '지브란 동우회'가 있을 정도로 수많은 팬들을 얻게 하였다. 지브란의 죽음 이후 그의 유언대로 시신이 뉴욕에서 고향인 '브샤레'로 옮겨지게 된다. 후에 레바논 정부는 그의 시신이 안치된 장소를 기려 수도원을 세웠고, 나중에 다시 기념박물관이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박물관에는 그의 유품과 작품(시집, 그림)등이 가지런히 잘 전시되어 있다.

 

 

레바논의 상징, 백향목(cedar tree)

 위엄(majesty), 힘(power), 영화(glory), 그리고 영원함(eternity)를 상징하는 백향목은 레바논을 대표하는 나무이다. 이를 반영하듯 백향목 문장은 레바논 국기 한가운데 그려져 있으며 레바논 특공대의 베레모에도 레바논 항공기(Middle East Airlines)에도 백향목 나무가 그려져 있다. 과거에는 백향목 나무가 레바논 산에 제법 많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수세기에 걸친 남벌로 이제는 몇몇 제한된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은 칼릴 지브란의 고향인 브샤레(Bechare)와 슈프(Shouf) 산맥에 있는 바룩(Barouk)이다.

 

 백향목은 기원전 3천년부터 서식하였다고 한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3가지를 들고 나왔는데, 그중에 하나가 백향목 묘목이라고 한다.(다른 두가지는 포도와 올리브). 백향목은 '히말리야 삼목' 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백향목이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고산지대의 북풍설한에도 꿋꿋이 자라는 백향목은 눈속에 피어나는 설중매처럼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인내와 늠름함을 자랑한다.

 

 백향목은 구약성서에 70회나 언급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인 솔로몬 시대에 성전을 짓는데 특별히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수입한 기록이 있다. 솔로몬왕은 당시의 두로(오늘날 레바논의 Tyre)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협정을 맺을 정도였다.(구약성서 열왕기상 5장 6절)

 

 백향목은 아주 천천히 자란다. 어느 정도 묘목으로 자라는데만 해도 40년이 걸린다. 백향목이 장엄한 나무로 자라는 데에는 수백년이 걸린다. 2차대전시 이 귀한 나무가 겨우내 땔감으로 사용되거나 영국군에 의해 철로의 목재로 사용되었다. 이후 백향목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백향목 숲은 특별 보호지역으로 선포되었고, 백향목 주위에는 울타리를 둘러서 일반 관광객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오늘날, 대표적인 백향목 숲인 ' '브샤레(Bechare)'에는 수백년에서 수천년에 이르는 백향목이 장관을 이룬다. 백향목 나무는 곧게 자라며 가지 또한 수평으로 곧게 자라고 짙은 초록색 잎이 바늘모양으로 펼쳐져 있어서 화려함과 웅장함의 극치를 이룬다. 또한 백향목은 늙을수록 청청하며 결실을 맺어 수목중의 백미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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