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역사

 

1. 파라오 이전의 상,하 이집트

 세계에서 제일 긴 강 나일(The Nile)은 적도 지방의 빅토리아 호수에서 발원하여 6,671km를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강은 바다에 닿기 1,000km 쯤 전 아스완에 있는 '나일의 제1폭포'를 통과하는데, 이집트 역사는 대략 나일의 이 마지막 1,000km 구간, 즉 나일의 제1폭포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유역에서 지난 6,000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12,000∼10,000년 전 쯤인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기상변화가 계속되어 원래 드넓은 숲이었던 북부 아프리카 지역이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나일강 유역에 모여 살게 되었으나 해마다 강물이 범람하는 이곳도 처음부터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풍요한 땅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범람으로 비옥해진 땅에 농사를 지으면서 범람에 대처하는 토목과 관개기술을 개발해내고 도시를 건설하고 또 신화를 창조해 내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고대 이집트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는 위대한 문명의 기초를 다져놓은 것이다.

 

 

 지금부터 6,000년 전 쯤이 되자 이집트는 주민의 생업과 정치, 종교, 문화적 정서가 서로 다른 두 지역처럼 되었으니 나일 삼각주의 하(下) 이집트와 상류지방인 상(上) 이집트가 그것이다. 상 이집트는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용할 만한 토지가 점차 줄어들고 생산성도 떨어져 가는 나일 강변의 좁고 긴 지역이고, 하 이집트는 오늘날 카이로 북부에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있는 인구가 밀집된 풍요로운 땅으로, 다른 이민족들과의 교역과 교류가 육지와 바다를 통해 활발히 이루어지던 지역이었다.

 

 

2. 이집트 고대 역사 : 파라오들의 시대

➀ 초기왕조시대(BC 3000~BC 2780년경)

 1,000여 년에 걸쳐 끊임없이 적대하고 경쟁하던 상· 하 이집트는 BC 3000년 무렵 상 이집트의 르메르라는 왕에 의해 최초로 통일되고 수도는 상· 하 이집트의 중간 지점인 멤피스에 건설되었다. 이집트 민족의 통합과 이집트 문명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이집트 고대사의 시발점이 된 나르메르의 통일은 히에라 콘폴리스에서 출토된 '나르메르 팔레트'라는 점토판에, 호루스 밑에 꿇어 앉아 있는 하 이집트 왕이 나르메르왕에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일이 있고 2,700년 쯤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 332~BC 30)의 신관(神官) 마네토는 고대 이집트의 역사를 파라오(군주,왕) 들의 계보에 따라 모두 31개의 왕조로 나누어 서술하였는데, 마네토의 서술은 그가 메네스라는 이름으로 부른 나르메르의 상· 하 이집트 통일에서 시작하여 이집트 출신의 마지막 파라오 넥타네보 2세의 죽음(BC 343)으로 끝을 맺는다.

 

 고대 이집트 역사 서술에 사용되는 '제 몇 왕조'라는 명칭은 마네토의 이 서술체계를 활용한 것이며, 초기 왕조시대는 마네토의 제1, 제2왕조에 해당된다. 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들이 통일로 가능해졌다. 통일 이집트의 초대 군주 나르메르의 재위 중 멤피스에서 나일강의 흐름을 바꾸는 공사가 있었는가 하면, 그의 후계자인 아하, 3대 군주 제르시대에 이집트인들은 누비아로, 시나이로 원정을 한다. 제1왕조가 발전의 절정을 이룬 때는 5대 군주 덴의 시대였다. 덴 왕은 제국의 행정 제도를 완비하고 상 이집트의 군주임을 상징하는 흰색 왕관과 하 이집트의 군주임을 상징하는 붉은 왕관을 결합시킨 이중 왕관을 최초로 착용하였고, 영토 확장과 국가 기반의 확립, 국민적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제2왕조의 초대 군주의 칭호 헤텝세켐위 ('두 세력이 평화스러운' 이라는 뜻)는 상· 하 이집트 사이에 분쟁이 끝난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제1, 제2

 

 왕조시대에 이집트는 정부 조직과 행정 체계, 건축과 토목기술, 예술 등 모든 면에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집트인들이 문자 체계인 히에로글리프(상형문자)도 정비되었고, 1년을 365일로 하는 역법이 완성되었다.

 

 

➁ 고왕국시대(BC 2780~BC 2270년 경)와 제 1중간기(BC 2263~BC 2040)

 고왕국시대는 마네토의 제3~6왕조에 해당된다.

 제3왕조의 2대 군주 조세르(Djoser, 재위: BC 2668~BC 2649)는 이집트 왕들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역사상 최초로 피라미드를 건설한 군주로도 유명하다. 조세르 치하의 재상이며, 제사장이고, 의사이며, 사상가이자 건축가인 임호텝(Imhotep, 역사상 최초의 의사)이 조세르의 무덤으로 고안해 사카라에 건설한 '계단식 피라미드'는 세계 최초의 대규모 석조 건축물로서 파라오의 절대권력과 조직화된 국력을 짐작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임호텝은 훗날 '치료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의자에 앉아 있는 서기관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피라미드 역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제4왕조(BC 2723~BC 2563)에서 나타난다.

 

 제4왕조의 초대 왕은 스네프루였는데, 그의 후계자 쿠푸가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대 피라미드를 기자 지방에 세운 것이다. 평균 2,300kg 짜리 돌 2백 30만개가 들어간 이 공사는 고대 이집트 인들의 건축 기술, 측량과 설계의 정확함, 국가 동원 체제, 기획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쿠푸의 아들 카프라가 세운 피라미드도 아버지의 것 못지 않으나 그는 '계곡신전'에 있는 스핑크스로 더 유명하다. 왕릉 단지의 수호신으로 여겨지는 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라의 것이라고 한다. 멘카우라의 피라미드도 똑같이 유명하다. 이 두 피라미드는 대 피라미드보다 약간 작은 크기로 그 옆에 서 있다.

 

 제4왕조는 고대 이집트왕국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였으며, 사람인 동시에 신(神)이기도 했던 왕과 그의 왕권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이었던 시기였다.

 

 헬리오폴리스의 제사장의 아들 우세르카프가 세운 제5왕조(BC 2563~BC 2423)에 서는 태양신 숭배가 절정에 이른다. 오시리스 신을 대신하여 태양신 라가 최고신이 되었고, 군주들은 태양신의 아들임을 자처했으며, 태양신을 위한 신전이 건축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집트 신화에서 태양신 '라'는 때로는 오시리스 신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때로는 호루스 신과 합성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태양신 라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은 호루스 신과 같이 매의 얼굴을 한 사람이 머리에 태양을 얹고 있는 형상이며, 태양은 뱀이 둥글게 한번 몸을 튼 모습으로 표현된다. 제5왕조 군주들의 피라미드 벽화에는 이집트 인들이 시리아, 누비아 등지에서 벌인 원정 사업이 그려져 있으며, 이러한 업적은 '팔레르모스톤(Palermo Stone)' 같은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제5왕조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군주의 절대 권력은 제6왕조 (BC 2432~BC 2263) 때 완전히 약화되고, 이후 이집트 인들은 폭력과 내전으로 점철되고 비관과 혼란이 가득한 제7∼10왕조의 제1중간기를 겪게 된다.

 

 

➂ 중왕국 시대(BC 2133~BC 1785)와 제 2중간기(BC 1785~BC 1575)

 마네토의 제11왕조(BC 2133~BC 1991)와 제12왕조(BC 1991~BC 1785)에 해당되는 중왕국 시대는 테베의 왕자 멘투호텝 2세가 오랜 고난과 투쟁 끝에 이룩한 상,하 이집트의 재통일로 시작된다. 그는 호루스의 새로운 이름인 스마토위('두 땅을 통일하는 자'라는 뜻)를 자신의 칭호로 택했다. 통일은 모든 계층의 이집트인들에게 향상된 삶을 가져다 주었으며, 절대 다수의 이집트인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멘투호텝 2세는 통일 후 바로 누비아, 리비아, 시리아, 시나이 원정에 나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뒤를 이은 멘투호텝 3세는 누비아 지역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해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를 거쳐 홍해로 이르는 길을 재개척했다.

 

 상 이집트 총독으로서 이러한 원정 사업의 책임자였던 재상 아메넴헤트(Amenemhat I, ?~BC 1962, 재위: BC 1991~BC 1962, 29년간)가 제12왕조를 연다. 이 왕조시대는 이집트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기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아메넴헤트는 아문을 수호신으로 하는 테베 출신이었으나 이집트 전역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멤피스 남쪽에 새로운 도시 이트즈-토위('두 땅을 쥔'이라는 뜻)를 건설하고 천도했다. 그리고 근처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누비아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나일의 제2폭포' 지역에 요새를 건설했으며, 아시아인들의 델타 지역 침입을 막기 위해 와디 툼밀라트에 '통치자의 성'이라는 요새를 세웠다. 그의 후계자들도 신석기시대 농경문화의 발상지인 파이윰 지방을 재확보하는 등 이집트 번영에 박차를 가했다.

 

 이집트 역사의 황금기라고 하는 세소스트리스 3세(Sesostris III, ?~?, 재위: BC 1836~BC1818, 18년간)와 아메넴헤트 3세(Amenemhet III, ?~?, 재위: BC 1818~BC 1770, 48년간)의 재위기간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으며, 신인 동시에 인간이었던 군주들이 인간쪽에 더 가까워진 시기였다.

 

 제12왕조 초기부터 번영하는 이집트는 외국인들, 주로 아시아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으며, 통상과 외교의 확대로 이집트에 외래문화와 사상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세소스트리스 3세와 아메넴헤트 3세의 황금기에 이어 아메네메트 4세와 세벤크네프루 여왕 통치기에도 아시아 인들이 기회의 나라 이집트로 몰려와 자신들의 재능을 발휘하여 이집트 문화와 사회발전에 기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와 세력을 강화했다.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12왕조 말부터 점차 국가의 통제권이 약화되고, 나라가 분열되면서 여러 대 전부터 이집트 땅에 들어와 정착한 아시아계 외국인들이 제16왕조와 제17왕조 시기에는 이집트를 지배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들을 '힉소스(이민족 통치자들)'라고 부른다. 아시아인들의 지배는 이집트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는 전기가 되었다.

 

 새로운 악기와 음악 양식, 청동 세공술에서 도자기 제조, 베짜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품종의 동물과 곡식이 도입된다. 전쟁에는 새로운 유형의 무기와 아울러 전차와 말이 등장하였다. 제13왕조 때부터 힉소스 지배가 끝날 때까지의 혼돈기가 제2중간기 (BC 1785~BC 1575) 이다.

 

 

➃ 신왕국시대(BC 1575~BC 1085)와 제 3중간기(BC 1085~BC 664)

 제18왕조(BC 1575~BC1308)는 이민족 힉소스의 지배를 벗어 던지기 위해 여러 대에 걸쳐 투쟁하던 테베의 왕가 출신 아흐모세(Ahmose)가 열었다. 아흐모세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아문 신의 아내'라는 칭호를 가진 친누이 노프레타리와 결혼하였는데 이러한 친오누이 간의 결혼은 신과 여신의 결혼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왕국시대부터 상실되기 시작한 왕의 신성성을 회복하려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아흐모세는 힉소스의 세력을 델타 지역에 소탕하고 상,하 이집트를 재통일하였으며,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멘호텝 1세(Amenhotep I, ?~?, BC 1514~BC 1493, 21년간)는 이집트 국경을 남쪽의 제3폭포까지 확대했다.

 

 제18왕조의 4대 군주 투트모세 2세의 정처 핫쳅수트는 그녀의 남편이 후궁에게서 낳은 투트모세 3세가 겨우 열 살의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섭정을 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녀는 회화나 조각에서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수염을 단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헌에서는 그녀를 가리키는데 여성형 인칭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그녀의 집권 기간 중 이집트는 대체로 평화로웠으나 통치영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그녀가 죽은 뒤 투트모세 3세는 스스로 이끈 여러 차례의 원정전에서 승리하면서 이집트의 옛땅을 수복하고 아시아 지역을 편입하여 '나일의 제4폭포'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치 세력은 아멘호텝 3세(Amenhotep III, ?~?, BC 1390~BC 1353, 37년간)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는 황금의 호루스, 진리의 통치자, 상,하 이집트의 왕, 라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불렸다.

 

 아멘호텝 4세(Amenhotep Ⅳ, 아크나톤(Akhnaton), ?~?, 재위: BC 1353~BC 1336, 17년간))는 이집트의 모든 왕들 중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테베의 수호신 아문을 버리고 역사상 최초로 유일신교의 신 개념을 확립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왕위에 오른지 5년되는 해에 자신의 이름을 태양신의 숭배를 뜻하는 아케나텐('아텐에게 봉사하는'이란 뜻)으로 바꾸고, 태양신의 구체적인 형상인 아텐(태양판)을 유일한 존재로 숭배하고, 아텐에게 바치는 수많은 신전을 지었다. 그는 수도를 중부 이집트의 알아마르나로 옮기고 신도시 아케타텐(아텐의 지평선)을 건설하였다.

 

 신왕국시대에 누렸던 영화는 1922년 발굴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왕들의 골짜기'에서 출토된 화려한 부장품들, 그중에서도 파라오 시신의 얼굴 덮개인 '투탄카문 왕의 황금 가면' 등으로 잘 확인된다. 9살에 왕위를 계승한 소년왕 투탄카문은 즉위 3년째되는 해에 도읍을 옮기고, 아텐 숭배를 버렸으며, 이름도 투탄카문으로 바꾸었다. 그 뒤 왕권은 아이, 호렘헵을 거쳐 재상이자 장군이었던 람세스의 가문으로 넘어간다.

 

 19왕조(BC 1308~BC 1186)는 람세스 1세(Ramses I, ?~?, 재위: BC 1292~BC1290, 2년간)부터 시작한다. 그의 뒤를 이은 세티 1세(Seti I, ?~BC 1279, 재위: BC 1290~BC1279, 11년간 )는 훌륭한 군사 지도자로 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히타이트 왕국을 무력으로 압도하였고, 나일 삼각주로 들어오려는 리비아 인들에게 효과적으로 대처하였다. 3대 군주 람세스 2세(Ramses II, ?~?, BC 1279~1213, 약 66년간)는 66년 간이나 이집트를 다스린 위대한 왕이다. 평화 조약과 혼인 동맹을 맺는등 히타이트 족과의 오랜 적대 관계를 청산하는데 성공했다. 성경의 출애급기에 나오는 압제자 파라오가 람세스 2세이다. 뒤를 이은 그의 13째 아들 메르네프타는 유대 민족이 이집트에서 대탈출(출애급) 할 당시의 군주로 추정되고 있다. 메르네프타의 전승 기념비에 있는 '이스라엘은 황량하며, 씨 뿌릴 땅이 없다'는 대목은 이스라엘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자료다.

 

 제20왕조(BC 1186~BC 1085)의 오랜 평화 시대가 가고, 왕권이 몰락하고 사제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외세의 침입을 받는 제21∼25왕조(BC 1009∼BC 664)가 이어진다. 제 3중간기라고 불리는 이 혼돈과 좌절의 시기에는 리비아계 군주들이 통치하고, 누비아인들이 상 이집트 전역과 중 이집트의 멤피스까지 약탈하며, 이디오피아 군주들과 앗시리아 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집트 혁명

 이집트 혁명은 다음을 가리킨다.

- 1919년 이집트 혁명 : 사드 잘글룰이 이끄는 와프드 당이 일으킨 혁명.

 

- 1952년 이집트 혁명 : 무하마드 나기브, 가말 압델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이 일으킨 쿠데타. 1952년 이집트 혁명, 7월 혁명, 7·23 혁명이라고도 한다.

 

- 2011년 이집트 혁명 :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 촉발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발단으로 하는 정권 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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