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The State of Isr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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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동

유  럽

성지순례

예루살렘(JERUSALEM)텔 아비브(TEL AVIV)

지중해 연안 여리고. 사해 지역- 마사다 ∥ 티베리아스(Tiberias : 갈릴리)  ∥ 가자지구

 

 지중해 동쪽 끝에 위치해 있는 중동의 국가.

 수도는 예루살렘(Jerusalem)

 화폐는 이스라엘 쉐캐림이다.

 국민의 대부분이 유대인이며 종교는 77%의 국민이 유대교이다.

 

 서비스업과 제조업에 바탕을 둔 혼합경제체제이며, 국민총생산(GNP)은 인구보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1인당 GNP는 개발도상국과 비교해 낮은 편이다.

 

 이스라엘은 서부 아시아의 남쪽, 이집트의 동쪽에 있는 중동 국가이다. 비교적으로 작은 지역이지만 지리적으로 다채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기본법에서 스스로 민주 국가임을 정의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남북길이가 약 400km, 동서길이가 가장 넓은 곳이 121km에 이른다. 북쪽은 레바논, 북동쪽은 시리아, 동쪽과 남동쪽은 요르단, 남서쪽은 이집트, 서쪽은 지중해와 이웃한다.

 

 1967년 전쟁으로 빼앗은 여러 점령지에서는 지금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고, 수도인 예루살렘도 한때 요르단 지역과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 다른 지도     ☞ 지형 지도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가 영국의 위임 통치를 받던 팔레스타인의 강제적인 분할 계획을 채택하여 실행을 추진했다. 1948년 5월 14일, 세계 시오니즘 단체 경영이사, 그리고 팔레스타인 유대인 기구의 대통령 다비드 벤 구리온은 "에레츠 이스라엘에서 유대 국가를 수립하고 이스라엘 국가로 한다"고 선언했다.

 

 1948년 5월 15일, 영국의 위임통치 종료와 함께 독립이 되었다. 다음 날, 근처의 아랍 군대는 팔레스타인을 침공하고, 이스라엘 군대와 싸웠다. 이스라엘은 여러 번의 중동 전쟁을 하는 동안 요르단 강 서안 지구, 시나이 반도(1967~1982 사이), 남레바논(1982~2000 사이), 가자 지구와 골란 고원을 점령했다.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지역을 부분 합병했지만,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의 국경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요르단과 평화 조약을 체결했지만, 팔레스타인과의 분쟁은 여전히 이 지역의 갈등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금융, 경제 중심지는 텔아비브이며, 예루살렘(동예루살렘을 포함)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로 수도로 지정되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약820만 명(2017년). 그 중 약 600만 명은 유태인이며, 아랍인(드루즈파와 동예루살렘 포함)은 170만 명으로 두번째로 큰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다민족국가로서 대부분의 이스라엘의 아랍인들은 이슬람교도이며, 네게브 사막의 베두인족과 같이 비교적으로 적지만 중요한 집단이다. 나머지는 기독교인들과 드루즈인이다. 그 외의 다른 소수자들은 마론파, 사마리아, 아프리카계 히브리인, 아르메니아인, 체르케스인 등이 있다. 이스라엘은 또한 비시민권자 외국인 노동자들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망명 신청자들로부터 이민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지형학적으로 4개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서쪽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길이 185km, 남쪽 가장 넓은 곳의 너비가 32km 밖에 안 되는 지중해 연안의 좁고 기다란 평원지대이며, 둘째, 북쪽 국경에서 점령지인 웨스트뱅크를 지나 이스라엘 중부에 이르는 구릉지대, 셋째, 동쪽 국경을 따라 지구표면에서 가장 낮은 지역인 사해(死海, Dead Sea, 해수면보다 400m 낮음)를 거쳐 아카바 만까지 크게 갈라진 틈의 일부를 이루는 그레이트리프트밸리, 넷째, 이스라엘 남부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넓은 지역인 네게브 사막지대이다.

 

 주요 하천들은 요르단 강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형성된 내륙분지로 유입된다.

 요르단 강은 내륙분지에서 훌라 분지(해수면과 거의 같음), 담수호인 갈릴리 호(해수면보다 210m 낮음), 세계에서 가장 염도가 높은 호수 가운데 하나인 사해로 차례차례 흘러들어간다. 갈릴리 호는 급수장과 저수지를 통해 서쪽의 대수층과 연결되며, 전국 농토의 절반에 해당되는 지역에 물을 공급한다.

 

 

 기후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겨울 기온(1∼2월)은 예루살렘의 약 8℃에서 네게브 사막 남쪽 아카바 만 엘라트의 16℃ 사이를 오르내리며, 여름 기온(7∼8월)은 같은 지역의 경우 23∼32℃를 기록한다. 북부 산악지대와 북부 연안지역은 연강우량이 400㎜ 이상이며, 북부 산악지대 끝부분은 1,016㎜에 이른다.

 

 북부의 경우 10∼4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온다. 네게브 사막은 102㎜ 이하, 사해 남쪽 아라바 계곡 주변은 25㎜ 이하를 기록한다.

 

 강우량이 203㎜ 이하인 지역이 전국토의 1/2 이상을 차지한다. 농업은 연강우량이 305㎜가 넘는 북위 31°30′ 북부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옛날의 상록수림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조림사업이 계속 펼쳐지고 있다. 구릉지대는 상록관목(야생 관목식물)으로 뒤덮여 있으며, 네게브 사막에는 야생사막관목이 자란다.

 

 동물은 멧돼지·살쾡이·영양 같은 포유류에서 아가마도마뱀 같은 파충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서식한다.

 

 천연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편이며, 한정된 양의 구리와 석유 및 천연 가스가 조금 매장되어 있다.

 

 

개 요

국 명 : 이스라엘 (the State of Israel)

면 적 : 20,770㎢ (한반도의 약 1/10. 세계 154위)

- 1967년 전쟁이후 점령지 (가자지구, West Bank, 골란고원)포함시 면적은 27,800㎢

인 구 : 약 7,900만 명(2016년)

- 유태인 (80.1%) ·  구소련 이민자 (112만 명) : 이중 90년대 이후 이민자 약 85만 명

- 아랍계 이스라엘인(19.9%)

* 해외거주 유태인(Diaspora) : 약 800만명(미국에 약 600만명 거주)

o GDP : 3,069억$(2015년. 세계 37위)

o 화 폐 : 셰켈 (ILS)

기 후 : 지중해성 기후

수 도 : 예루살렘 (해발 750m, 인구 60만명)

- 국제적으로는 수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돌을 제외한 각국 대사관은 모두 텔아비브에 소재

언 어 : 히브리어(공용어), 아랍어(공용어), 영어

종 교 : 유태교(80.1%), 이슬람교(14.6%), 기독교(2.1%), 기타(3.2%)

- 이슬람교도 98만 명, 기독교도14만 명, 드루즈족 10만 명

국가원수 : 모셰 카차브(Moshe Katsav) 대통령 (2000.8 취임)

o 정부형태 : 의회민주주의

국 경 일 : 유태력 5.5이 독립기념일(유태력에 따라 매년 변동하며 금년은 5.26)

군 사 력 : 현역 186,500명, 예비군 445,000명

 

 

위 치

 좁고 긴형태로 이스라엘 국토의 길이는 290마일(470km), 폭은 제일 넓은 지점이 85마일(135km)에 이른다.

비록 크기는 작지만 이스라엘은 숲을 이룬 고지와 비옥한 푸른 계곡에서 산을 이룬 사막들 또 해얀 평야에서 열대기후와 비슷한 요르단강 계곡과 지표상 최저 지점인 사해까지 이르기까지 대륙전체의 다양한 지형적 특징을 나타낸다. 대략 국토의 절반이 거의 불모지이다.

 

 

식물상과 동물상

 이스라엘의 매우 다양한 식물과 동물군들은 그것의 다양한 지형과 기후 뿐 아니라 지리학적 위치를 반영한다 500 여종의 조류와 200여종의 포유류와 파충류 그리고 2천6백여종의 식물(150종은 이스라엘 토종)들이 서식한다. 거의 4백 평방 마일에 이르는 150개의 자연 보존지역과 65개의 국립공원이 나라 전역에 걸쳐 지정되어 있다.

 

 

 지역내 물부족 상황은 공급 가능한 수자원 이용을 최대화하기 위한 그리고 새로운 자원을 찾기 위한 노력을 더욱 치열하게 한다. 1960년대에 민물자원은 통합된 격자 수로로 모아져 그것의 주요 수로인 국립 물 수로가 북부와 중앙에서 거의 사막화된 남부 지방으로 물을 끌어왔다. 새로운 수자원을 이용하기 위한 계속되는 프로젝트는 인공강우, 하수의 재활용 그리고 해수의 탈염 등을 포함한다.

 

 

기 후

 이스라엘의 기후는 11월부터 4월까지가 우기이며 많은 일조량이 그 특징이다. 총 연강수량은 북부지방은 20-30인치(50-70cm), 최남단지역은 일인치(2.5cm)에도 못미치는 등 다양한다. 지역별 기후 상태도 상당히 다양한다. 해안평야지방은 덥고 습한 여름과 온화하고 습한 겨울을 나타내는 반면 구릉지역은 비와 때때로 내리는 약간의 눈으로 약간 추운 겨울을 갖는다. 요르단 계곡은 여름에는 덥고 건조하지만 겨울에는 쾌적한 날씨이다. 남쪽 지방은 반 사막화된 상태로 낮에는 따뜻하다가 더워지고 겨울에는 춥다.

 

예루살렘 기후(℃)

지  역

구분/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예루살렘 (Jerusalem)

최고평균

10

11

14

20

23

26

27

27

26

23

18

12

최저평균

4

4

6

10

13

15

17

17

17

14

10

6

평   균

7

8

10

15

18

21

22

23

22

18

14

9

강우량mm

139

111

116

17

5

0

0

0

0

10

68

129

 

 

인 구

 이스라엘은 이민자의 나라이다. 1948년 건국 이래로 이스라엘의 인구는 다섯배 증가해왔다. 이스라엘의 650만 국민은 다양한 인종적 배경과 생활방식, 종교, 문화 그리고 전통을 가진 사람들의 모자이크로 구성된다. 오늘날 유대인은 전체인구의 77.2%을 차지하며 비유대인은 대개 아랍인으로 숫적으로는 22.8%에 이른다.

 

 

생활방식

 이스라엘 국민의 약 91%는 200여개의 도시 중심에 거주한다. 그 도시들 중 일부는 고대 역사적 장소에 위치한다. 인구의 약 5%가 독특한 지방의 협동 거주지인 키부츠와 모샤브에 일원으로 생활한다.

 

 

주요 도시들

 예루살렘은 인구 67만의 이스라엘 수도로 다윗왕이 3천년 전 그의 왕국의 도시로 정한 이후로 유대인의 민족적 그리고 영적 생활의 중심에 위치해왔다. 오늘날 예루살렘은 번성하는 활기찬 도시이자 이스라엘 정부의 요람으로 이스라엘의 가장 큰 도시이다.

 텔아비브(인구 359,400)는 현대에 유대인의 도시로는 처음으로 1909년에 설립되었다. 오늘날 국가의 산업, 상업, 금융 그리고 문화 생활의 중심지이다. 

하이파(인구 272,000)는 고대 이래로 유명한 해안도시였다. 주요 지중해 항구가 자리잡고 있으며 북부 이스라엘의 산업과 상업 중심지이다.

 브엘세바(인구 178,000)는 성서에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진지로 명명된 곳으로 오늘날 남부의 가장 큰 중심도시이다. 남부지역 전체을 위한 행정적, 경제적, 보건상, 교육적 그리고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부의 구조

 이스라엘은 입법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를 갖는 내각제 민주주의 국가이다. 국가의 수장은 대통령으로 대통령의 업무는 대개 의전과 의례적인 것이다. 대통령직은 국가의 통합과 주권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의 입법기관인 크네셋(의회)는 12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일원제이다. 크네셋은 회기 중 15개의 상임 위원회를 통해서 운영된다. 크네셋 의원들은 매 4년 마다 전국적인 총선을 통해 선출된다. 행정부(내각)은 국내외 사안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정부는 총리를 수장으로 하며 또한 국회에도 책임이 있다.

 

 

교육과 과학

 학교교육은 5세부터 18세까지 의무이며 무료이다. 3-4세 어린이의 대부분이 유치원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이스라엘의 고등 교육기관은 과학과 인문학의 다양한 학과들을 제공하고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연구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들과 학문적 과정과 직업 수업을 제공하는 전문대학들로 나뉘어진다. 높은 수준의 과학적 연구개발과 연구개발의 활용은 국가의 자원부족을 상쇄한다.

 

 

보 건

 국가건강보험법은 1995년 1월부터 발효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모든 거주자를 위해 병원을 포함한 의료시설의 표준화된 집합체를 제공한다. 모든 의료 서비스는 국가의 4대 의료 기관에 의해 계속 제공된다.

평균 수명은 여성 80.9세 남성 76.7세이며 영아 사망률은 100명당 5.4명이다 인구당 의사 비율과 전문의 수는 선진국 수준과 비교했을 때 양호하다.

 

 

사회복지

 사회복지제도는 법률에 의거해 근로자 보호와 넓은 범위의 국가적 그리고 공동체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러한 서비스는 고령자 보호, 편부나 편모 가정지원,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 입양 대행기관 그리고 알코올 중독과 마약 오남용의 예방 및 관리까지 포함한다.

국가보험기관은 모든 영주자들(비 이스라엘 국적자 포함)에게 넓은 범위의 혜택을 제공하는데 실업보험, 고령연금, 장애인을 위한 혜택, 출산 지급금과 수당, 어린이 수당, 수입지원지급 등을 포함한다.

 

 

경 제

 GDP                             3,069억$(2015년. 세계 37위)

 

 

산 업

 이스라엘의 산업은 주로 기술혁명을 기반으로 한 고부가가치 상품을 제조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이런 상품들은 의료 전기기구, 농업기술, 통신,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태양 에너지, 식품처리 그리고 미세 화학물질 등이다.

 이스라엘의 농업의 성공은 거철고 험난한 농업환경에 맞선 오랜 투쟁과 부족한 수자원와 경작지의 최대한의 이용한 결과이다. 오늘날 농업은 GNP의 2.5% 전체 수출의 3%을 차지한다. 이스라엘은 자국 식량 요구량의 93%을 생산하며 곡류, 깨류, 고기, 커피, 코코아, 설탕 등을 수입으로 보충한다. 수입량은 다양한 농업생산품의 수출량을 약간 웃돈다.

 

 

대외무역

 무역은 세계 여섯 대륙의 여러 국가들과 이루어진다. 수입의 42% 수출의 32%는 유럽과의 교역이 차지하는데 이는 유럽연합과 1975년에 체결한 자유무역협정에 힘입은 바 크다. 유사한 무역협정이 1985년 미국과도 체결되었다. 미국과의 교역량은 이스라엘 수입량의 23%와 수출량의 32%를 차지한다.

 

 

문 화

 수천년의 역사, 70여개국에서 모인 유대인들,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다인종 공동체들의 사회, 그리고 위성과 케이블을 통해 유입되는 끝없는 외부의 문화는 이스라엘 자체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면서 세계적인 요소들을 반영하는 이스라엘 문화를 발달시켜 왔다. 예술을 통한 문화적 표현은 이스라엘 민족 만큼이나 다양해서 문학, 연극, 콘서트,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오락, 박물관, 그리고 미술관 등 거의 모든 관심과 기호를 반영한다.

이스라엘의 공식언어는 히브리어와 아랍어이다. 그러나 국내 어디서나 다양한 언어를 접할 수 있다. 성서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오랫동안 예배와 문학에만 허용되어 왔으나 한 세기 전에 다시 부활하여 성지에서 유대인들의 삶을 다시 부흥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권력구조

o 입법부(Knesset), 행정부(정부), 사법부(법원)간의 3권 분립에 기초한 의회민주제 유지

- 권력분리원칙에 입각, 상호 견제와 균형 유지. 대통령은 국가의 원수이며, 국가통합의 상징적 존재

- 정부구성 및 국회 해산 요청, 외교사절의 신임장 접수 및 법률 조약 서명 권한

- 7년 임기 

- 현대통령은 Moshe Katsav

 

o 행정부는 수상을 포함한 26명의 각료로 구성 (2003.3 현재)

- 복수정당이 법적으로 보장되고 있으며 리쿠드, 노동당 양대 정당 이외에 다수의 소수 정당들이 정치활동을 전개

- 소수정당의 난립으로 연립내각 구성이 불가피함에 따라 국정이 소수당의 의사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으며 항상 정국이 불안한 상황. 입법부는 12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는 단원제 의회 (Knesset)

- 12개 상임위원회

- 4년 임기, 임기종료 전이라도 의회해산 가능

- 현국회의장은 Avraham Burg (부르그, 노동당)

 

o 사법부는 3심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일반법원과 종교법원, 노동법원 등 특별법원으로 구분

- 법관 임명은 9인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대법관 3명, 법조인 2명, 공직자 4명)의 추천으로 대통령이 임명

- 정년 70

- 현대법원장은 Aharon Barak

 

 

역 사

족장시대

 기원전 17세기인 유태인의 역사는 약 4000년 전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사이로 추정되는 기록으로 그들의 유목생활의 양상이 창세기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여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민족의 시조로, 또한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신앙의 종으로 부름 받았는지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기근이 나라를 덮치자 야곱과 열 두 명의 아들과 그 가족들은 이집트의 나일 삼각주 동쪽 지방인 고셴에 정착했다. 그들의 후손은 노예로 전락하여 강제 노역을 했다.

 

출애굽과 정착

 400년 동안의 노예 생활 후에 이스라엘은 모세에 의해 자유를 찾았다.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모세는 하느님께 선택 받아 그의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한 땅(에레츠 이스라엘)으로 인도(BC 12~13세기)했다. 이스라엘인은 시나이 사막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십계명을 포함한 모세 5경을 받고 국가를 세웠다. 출애굽(BC 1300년)은 유태인들의 국가에 대한 기억 속에 유일신에 대한 신념을 담은 위대한 흔적을 남겼으며 자유와 독립의 상징이 되었다. 유태인들은 해마다 유월절과 율법을 받은 날, 그리고 광야의 방황을 기념하는 날을 당시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경축하고 있다.

 다음 두세기 동안 이스라엘인들은 그 땅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유목 생활을 청산, 농민과 장인으로 변신하면서 경제적, 사회적으로 다소 기반을 잡았다.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가 마감된 것은 사람들이 '사사'로 알려진 지도자들 주위에 몰려든 전쟁의 시대가 시작 되면서 였다. 사사들은 신앙심을 고취시키는 능력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으로 역량을 발휘하여 이러한 지위로 추대되었으며, 적을 정복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기간 동안만 헌신하였다. 이어서 필리스틴(해안에 터를 잡은 소아시아 민족)의 위협에 직면하자 부족 조직의 타고난 나약함은 부족들의 통합과 영구적이고 세습적인 왕권의 지위를 가진 지도자를 갈망하게 되었다.

 

군주 시대(BC 1020년)

 초대 왕 사울은 흐트러진 부족 시대과, 그의 후계자 다윗에 의해 정비된 완전한 군주 시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다윗 왕(BC 1004~965년경) 은 필리스틴 정복을 끝으로 군사 원정에 성공하고 주위 나라들과 우호 동맹을 조직하여 이스라엘을 강대국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그의 왕권은 이집트 변경과 홍해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행정 제도를 확립했으며,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12부족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하여 예루살렘과 국왕이 국민 생활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성서에 의하면 다윗왕은 많은 재능을 가진 인물로, 그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편에서 그의 시와 음악에 대한 재능을 알 수 있다. 솔로몬 왕(BC 965~930년경)은 부왕 다윗이 세운 제국을 계승하여 그의 능력을 왕국의 부흥에 쏟았다. 정략 결혼을 하여 힘을 증강한 이웃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하여 왕국 내부의 평정을 유지하고 당시의 열강들과 평등한 관계를 유지했다. 솔로몬은 외국과의 통상을 강화하고 동을 채광, 철을 제련 하는 등 주요 사업을 발달시켜 경제를 부흥시켰다. 솔로몬 왕은 전략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요새화 하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솔로몬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왕궁과 예루살렘 신전의 건축인데, 신전은 국민의 국가적  종교의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성서의 잠언과 아가서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바빌론 유수(BC 586~538년)

 바빌로니아의 정복으로 제 1 유태왕국은 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정복이 유태인들의 땅에 대한 애착은 끊지 못했다. 그들은 바빌론 강가에 앉아 밤낮으로 고향을 기억하자고 언약했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 네 생각 내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내 만일 너보다 좋아하는 다른 것이 있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다." (<시편> 137장 5~6절) 1차 성전 파괴(BC 586년)후에  바빌론의 유수가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독특한 이상의 체계와 이스라엘 땅 밖에서 유대교의 체계가 발전하기 시작하여 궁극적으로 민족의 생존과 정신적인 동질성이 확고해 지고 충분한 활력으로 민족을 고취시킴으로써 한 국가로서 민족의 장래에 보장하였다.

 

예언자들 : 신성의 계시 능력을 부여 받은 인물로 인정 받은 종교 사상가이자 이적을 행한 사람을 말한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BC 586년) 이후 1세기 동안의 군주 시대에 가르침을 주었다. 종교적, 윤리적,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왕에게 조언을 하거나 비판을 하면서 그들은 백성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서 첨봉에 서서 정의의 필요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에 따라 유태 민족 생활의 도덕성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들의 예언 경험들은 영감이 풍부한 산문과 시와 책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이 성서에 편입되었다. 보편적이고 끊임없는 예언자의 호소는 사람의 가치에 대한 기초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야기시켰다. "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이사야> 1장 17절)라는 구절은 사회 정의에 대한 인류의 추구를 계속 채찍질 한다.

 

대대로 내려오는 메노라(Menoroh)

 황금의 메노라(일곱 가지 촛대)는 고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의 예배의식 때 사용된 중요한 도구였다. 그 후부터 이것은 수많은 장소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유태 유물의 상징이 되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BC 538~142년)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왕 키루스의 칙령에 따라 일부 유태인들은 그들의 땅으로 돌아왔다. 제1차 귀환 때(BC 538년) 배를 탄 약 5000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은 다윗의 직계후손인 스룹바벨에게 인도되었으며, 1세기가 채 못되어 행해진 제2차 귀환은 율사 에즈라에 의해 인도 외었다. 그 후 4세기가 넘도록 유태인들은 페르시아 제국(BC 538~333년)과 후의 그리스 시대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시대)의 대군주(BC 332~142년) 밑에 여러 가지 계급으로 나뉘어 자치하는 법을 배웠다. 유태인들의 귀환, 에즈라의 지도력, 두 번째 성전의 건축, 예루살렘 성벽의 중건과 유태인의 종교적, 사법적 최고 기구인 크네세트 하게돌라 (의회) 의 설립은 두 번째 공동체의 시작을 의미한다. 페르시아 제국 안에서는 유다는 예루살렘이 중심인 국가가 되고 대제사장과 장로 회의에 지도력을 위임하였다. 그리스 시대를 거치는 동안 시리아에 본거지를 둔 셀레우코스 왕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리스 문화와 관습을 강요하기 위해 유태교 행사를 금지하고 성전을 모독하였다. 그 반발로 거대한 항거 운동이 일어나고(BC 166년)  강한 전투역이 생겼다. 이 항거 운동은 처음에 하스모니아 왕조의 성직자인 마타티아스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유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데, 그는 셀레우스코군에 대항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성전을 정화하였다(BC 164년). 이 성전 탈환을  매년 하누카 축제(수전절) 동안 경축하고 있다.

 

하스모니아 왕조(BC 142~63년)

 하스모니아의 승리가 잇따르자 셀레우코스는 유다 왕국(이때 이스라엘 땅으로 불리었다) 에게 정치적, 종교적인 자치권을 부여하였고(BC 147년), 셀레우코스 왕국의 붕괴로(BC 129년)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졌다. 하스모니아 왕들은 세습하여 왕이 되었는데, 솔로몬 시대의 영토에 버금가는 영토를 차지하였다. 약 80년간 지속된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동안 유태인의 생활은 풍요로웠다.

 

로마의 지배(BC 63~AD 313년)

 로마인들은 그 지역의 강한 지도자로서 셀레우코스로 대체하고 하스모니아 왕 히르카누스 2세에게 다마스쿠스의 로마 총통의 지배 아래 제한적인 왕권을 부여하였다. 유태인들은 새로운 정부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이전의 하스모니아 왕조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이 마타티아스 안티고누스에 의해 시도되었으나 로마에게 패하고 사망(BC 40년)함으로써 이 땅은 로마 제국에 예속된 한 주가 되었다.

 

 기원전 37년에 로마는 히르카누스 2세 고문의 아들이자 히르카누스 2세의 딸과 혼인한 헤롯을 유다왕에 임명하였다. 헤롯은 외교에서는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지만 국내 일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 받았으며, 로마제국의 동부에서 가장 강력한 왕 중의 하나였다. 그레코로만 문화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헤롯은 거대한 건축 계획을 세워 카에사레아와 세바스테스의 도시들, 헤로디움과 마사다의 요새를 세웠고, 당시의 가장 웅장한 건축물인 성전을 재건했다. 이러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헤롯은 유태 백성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지 못했다. 헤롯이 사망한 후(BC 4년), 주로 헤롯 왕조에 대한 대중들의 반대로 인해 그의 후계자들의 권위는 점차 소멸되었고 유다는 로마가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6년). 점점 가혹해지고 이성을 잃은 로마의 지배를 견디다 못한 유태인들은 로마 황제 네로의 후기에는 항거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항거 운동은 예루살렘의 완전한 함락(70년)과 유다의 마지막 요새였던 마사다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로마군의 대장 티투스에 의해 함락된(70년) 예루살렘과 성전은 유태 민족에게 중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유태 역사가인 조세푸스 플라비우스에 의하면 예루살렘의 함락만으로도 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몰락하고 그 밖의 곳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고 수만 명이 노예로 팔렸다. 마지막의 짧은 유태인 군주 시대는 시몬 바르 코크바의 반란(132년) 후에 이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이 수복되었다. 그러나 로마군의 막강한 힘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3년 후 로마 관습에 따라서 예루살렘은 '황소의 멍에로 갈라 젖혀졌으며' 이 땅에 대한 모든 유태인의 끈은 점차 소멸되고 유다는 시리아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다시 불리게 되었다.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모두 불타버렸지만, 유태인들과 유태정신은 로마와 만남으로써 살아 남았다. 작은 유태인 공동테는 점차 힘을 회복하고 망명에서 돌아오면서 때때로 힘을 길렀다.

 

 제도적인 공동생활이 재건되어 국가와 신전의 통합체 없이 새로운 환경과 만나게 되었다. 최고 의결 기구이자 사법의 주체인 산헤드린(크네세트 하게돌라의 후신) 이 야브네(70년), 그 후에는 티베리아스에서 재소집 되었다. 제사장은 랍비들이 대신하였고 중앙성소가 없는 상태에서 카페르나움, 코라진, 바람, 감라, 그밖의 장소에 웅자한 건축물로 저형화된 유태교 회당은 분산된 각 집단 사회의 중추가 되었다. 할라카(종교법)는 유태인들을 맺어주는 공통의 끈으로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마사다(Massada)

 예루살렘 함락에서 살아남은 1000명에 이르는 유태인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은 사해 근처 마사다에 있는 헤롯 왕의 산꼭대기 궁전을 점령하고 요새화 하였다. 그들을 격퇴하기 위해 로마군이 계속하여 공격 하였으나 3년 동안 버티었다. 마침내 로마군이 그들을 격파했을 때 이들 유태인들과 그 가족들은 노예가 되는 것보다 자살을 택했다. 마사다는 자신의 땅에서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유태민족의 결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할라카 : 할라카는 성서시대 이후부터 유태인 생활의 길잡이가 된 법의 기조 이론이다. 이는 유태인의 종교적 의무, 대인관계, 예배의식, 출생과 결혼, 기쁨과 슬픔, 농업과 상업, 윤리와 논니 등, 실질적인 인간 행동 양식이 규정되어 있다. 할라카는 성서를 토대로 하고, 그 권위는 탈무드에 기초하고 있다. 탈무드는 유태 법률과 교훈(400년경에 완성)의 본체이다. 구전법의 첫번째 성문법전(210년에 성문화)인 미슈나를 통합한 것이며, 이를 위해 400년에 걸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300년의 노력 끝에 미슈나를 정미한 게마라를 통합시켰다. 할라카에 대한 실용적인 안내를 위해 간결하고 체계적인 정리 요약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1세기와 2세기에 종교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문법전 중에 가장 권위 있는 것은 16세기 동안 츠파트에서 조지프 카로에 의해 작성된 슐란 아루크이다.

 

비잔틴의 지배(313년 ~ 636년)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건설에 이어 이스라엘 땅은 범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 기독교의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태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단지 일 년 중 하루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가  침입해 오자 유태인들은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곧이어 비잔틴군은 예루살렘에 재입성하여(629년) 다시 유태인들을 축출하였다.

 

아랍의 지배(636년 ~ 1099년)

 무하마드가 죽은지(632년) 4년 후 부터 아랍의 지배가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음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로부터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태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태인 공동체는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승인되었는데, 이것은 특별 선거와 지세의 납부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 받는 보호막으로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비회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의 도입(717년)으로 유태인의 공적인 행동,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등은 제한을 받았다. 그 와중에 내려진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로 그들 대부분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태인들은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가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태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유기적이고 종교적인 응집력이 점차 상실 되어 갔다.

 

십자군 시대(1099년 ~ 1291년)

 다음 200년 동안 교황 우르만 2세의 호소에 따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유럽 각국의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5주간의 포위 후 1099년 7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라틴 왕국을 세웠다. 도시의 비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회당 안에 장벽을 쌓고 유태인들은 그들의 거점을 방어했으나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십자군은 조약과 협정으로, 그러나 대부분 유혈 군사 정복으로  이 나라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십자군 왕국은 대부분 요새화 된 도시나 성에 한정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성지까지의 교통로를 열어 순례의 길이 대중화 되고 인기를 얻자, 동시에 늘어나는 유태인들은 그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리를 지어온 300명의 랍비들 중 몇몇은 악고에, 나머지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십자군이 쿠르드 살라딘에게 격파 당하자(1187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요새화 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군의 엘리트 계급인 맘루크에게 패하자 이 땅의 십자군 지배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맘루크의 지배(1291년 ~ 1516년)

 맘루크의 지배아래 이땅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악고, 욥바, 그 밖의 항구들은 새로운 십자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무역은 단절되었다. 중세 말에는 이 나라 도시의 중심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태인들은 궁핍해졌다. 맘루크의 쇠퇴기는 정치적, 경제적인 격동과 질병, 탐욕스러운 자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암울한 시기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1517 ~ 1917년)

 다음의 4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스라엘 땅은 네 부분으로 분할되고 행정적으로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방으로 예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초시에는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나블루스, 헤브론, 가자, 츠파트, 갈릴리 마을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태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 오스만 술탄 술래이만 1세가 죽을 때까지(1556년) 자리 잡힌 정부에 의해 유태인의 생활은 개선되고 유태인의 이주를 자극하였다. 새로운 이주민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츠파트로 갔다. 그리하여 츠파트는 16세기 중반에 유태인 수가 1만명에 달하는 직물의 중심지로 번창했을 뿐 아니라 유태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태의 신비주의)가 번성했으며 동시에 슐란 아루크에 성문화된 것과 같이 유태 법률은 츠파트 학파에서 디아스포라(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전역에 퍼져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의 소유가 되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일괄성 없는 세제로 임차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 되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하였다.

 19세기에 서양 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 열강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의 학자들은 성서의 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하고 영국, 프랑스, 구 소련, 오스트리아,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기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왕래하고 우편과 전신이 개설되었다. 예루살렘과 욥바를 연결하는 도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두보로서 이 땅의 재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유태인들의 생활 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세기의 중반에는 예루살렘 성안의 인구가 과밀하기 때문에 유태인 거주 지역을 세웠으며(1860년), 다음 25년 동안 그 새 도시를 핵으로 하는 교외 지역을 추가로 7개 더 건설하였다.

 1880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시온주의의 토대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시온주의에 고무된 두 개의 이주 집단이 19세기 말기와 20세기 초에 동유럽으로부터 이땅에 도착했다. 땅을 일구어 그들의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희망으로 이들 개척자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새로운 이주민들은 극히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행정부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압제적이었다. 통신과 교통 수단은 여전히 원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다. 토지 매입은 제한되었고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특별 승인 없이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그 밖의 어려움들은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였지만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전 1500년대에 5000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 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때 85,0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12월에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말았다. 영국군에는 수천명의 유태인 의용군이 포함된 3개의 대대의 유태인 여단이 있었다.

 

시온주의(Zionism)

 시온주의는 시온(Zion)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 시온주의의 이상 - 조상의 땅에 유태 국가를 재건한다 - 은 수세기에 걸친 디아스포라(유태인의 유랑)에서 그들을 존속 가능케 한 이스라엘 땅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끊임없는 갈망과 깊은 애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치적인 시온주의는 동유럽 사회에서 유태인에 대한 압박과 박해와 차별 대우가 계속되고 서유럽 사회에서 역시 차별 대우없이 그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형식적인 해방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테오도어 헤르츨에 의해 소집된 시온주의자 회의에서 시온주의자 협회를 설립함으로써(1897년)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시온주의 프로그램은 유태인을 약속된 땅에 복귀시키는 것을 촉진 및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적이고 실제적인 두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유태인이 사회적.문화적.경제적.정치적으로 새로운 생활을 해나가고, 박해로부터 자유롭고 그들의 생활과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역사적인 땅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법적으로 안정이 보장된 생활과 동질성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영국의 지배(1918 ~ 1949년)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태 민족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결' 을 인정하고 유태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9월 국제 연맹 이사회와 영국은 유태 국가 건설 촉진 계획에 위임통치 지역의 4분의 3인 지금의 하세미테 요르단 왕국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 이주 : 시온주의와 벨푸어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태인들이 이주하여 유태인 공동체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온 3만 5천 명의 이주민들은 몇 년 동안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토대를 세웠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으며,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1924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키고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1930년대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히틀러가 등장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온 약 16만 5천명이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주서부 유럽으로부터 온 가장 큰 규모의 이주였다. 그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의 수준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였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 행정 : 영국의 위임 통치 당국은 유태인과 아랍 집단 사회에 그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유태 사회는 정당 기구를 선출했다(1920년). 그것은 "선출된 의회'라 불렸는데, 매년 활동을 점검하고 정책과 계획을 수행하는 집행부인 '국가 평의회'를 선출했다. 지방의 자원과 세계각지의 유태인이 보낸 기금을 재원으로 이 기구들은 전국의 유태인을 위한 교육, 종교 , 보건, 사회 복지 시설을 위한 조직망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나갔다. 1922년에 영국의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태인 대리 기관'이 구성되어 영국 당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국정부와 국제 기구에 대해 유태 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 경제발전 : 30년의 영국 위임 통치기간 동안이 나라의 발전은 박차를 가했다. 농업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였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하고, 세 도로가 전역에 건설되고 사해의 광물자원이 개발되었다. 유태인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가 설립되어(1920년) 산업 부문에서 공동 농업의 주민들을 위해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했다.  

 

☞ 문화 : 유태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미술·음악·무용 활동이 전문 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점점 발전되었다. 화랑과 음악당이 세워져 각종 전시회와 연주회가 열렸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판, 지방 화가의 회고전 등이 언론에 소개되고, 커피숍이나 사교적인 모임에서 즉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히브리어는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 나라의 세 가지 공용어로 인정되었으며, 서류, 동전·우표·라디오 등에서 사용되었다. 출판이 증가하고 이 땅은 당시의 히브리 문학 활동의 유력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여러 가지 형태와 장르의 극장이 열광적인 청중에게 개방되었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희곡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유태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태인 공동체의 노력은 극단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들의 강한 적개심은 1920년, 1921년, 1929년과 1936~1939년에 걸쳐 격렬한 폭동으로 분출되어 유태인의 교통수단이 공격 당하고 들과 숲이 불타 버렸으며 유태인 거주지 또는 개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립인들과 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온주의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아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두 국민 운동의 반대되는 목표를 인지한 영국은 일찍이 위임 통치하의 지역을 분할했듯이(1922년)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유태 국가로, 다른 하나는 아랍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유했다(1937년). 유태인 지도층은 분할 권유를 받아들여 유태인 대리 기관에 영국 정부와 협상하여 그 제안을 재공식화하는 국면으로 유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아랍인들은 어떠한 분할 계획에도 강경하게 반대 했다. 계속되는 아랍의 대규모 반유태 폭동으로 유럽의 유태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한다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이주에 단호한 제한을 가하는 백서를 제출했다(1939년 5월). 이러한 정책 때문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이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없더라도 전쟁을 하고, 전쟁이 없더라도 백서와 싸울 것이다."

 전쟁동안 약 2만 6천명의 유태인 공동체 남녀가 나치 정권에 대항, 연합군에 지원하여 유태인 여단 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으로 영국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 3개의 유대인 지하 조직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 동안 세 개의 지하 조직이 활동하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하가나(1920년에 결성됨)'는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자위 단체로서 유태인 공동체의 공식 기구에 의해 설립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아랍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단행하고 유태인의 이민에 대한 영국의 통제 조치에 대규모 시위와 사보타주로써 항거했다. '에첼(1931년에 결성됨)'은 하가나에 대해 유태 지도층이 내린 자치제를 거절하고 아랍과 영국의 두 목표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레히'는 가장 소규모의 호전적인 단체로 주로 반영국적인 동기를 가지고 조직되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유태인 공동체의 모든 무장 지하 활동 금지를 에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에첼로부터 분리됐다(1940년). 이 세 개의 조직은 1948년 5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설립되자 해산됐다.

 

☞ 2차 대전 동안의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 26,000명이 넘는 남.녀 유대인들이 영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등에 자원입대 하여 나치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국에 맞서 싸웠다.

 1994년 9월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단체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했던 노력을 인정 받아 영국군에 유대인여단을 두게 되었고, 유대인여단은 차제 깃발과 휘장을 가졌다.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이집트, 북 이탈리아, 북서 유럽등지에서 활약하였다. 945년 연합군의 승리 후에 많은 부대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키는 일에 참가하였다.

 

홀로코스트(대학살)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정부는 유럽의 유태인 사회를 말살하려는 세부적인 계획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그 계획 아래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600만 명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나치 독일 군대가 유럽을 휩쓸 때 유태인들은 잔인한 박해 아래 온갖 고통과 굴욕을 받았으며 유태인 거리로 내몰려 그곳에서 산발적인 무장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거센 탄압을 받았다. 유태인 거리로부터 수용소로 옮겨져서 무차별 사격을 받았으며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소수의 사람만이 대학살에서 벗어나 몇몇은 다른 나라로 가고 몇몇은 게릴라로서  살아 남았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유태인들의 도움으로 숨었다. 결국,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유태인 사회를 구성한 약 9백만 명의 인구 중 전쟁전에 유럽으로 떠난 사람들을 포함하여 3분의 1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 후 영국은 이 땅에 와서 정착하는 유태인의 수를 더욱 제한 하였다. 유태인 사회는 이에 대해 폭 넓은 '불법 이민' 활동 단체를 조직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약 5천 명의 난민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택해 이 땅에 들어왔다. 영국은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만들어 난민들이 이 땅에 도착하는 것은 차단하여 사이프러스 섬에 있는 수용소에 포로로 가두었다.

 

독립으로 가는 길  

 유태와 아랍 사회의 상충된 요구를 조정하지 못한 영국 정부는 유엔 총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나라의 장래에 관한 제안을 준비하였다. 총회는 투표로서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47년 11월 29일) 요르단 강 서쪽 지역에 세우도록 제안했다. 유태인 사회는 그 분할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절했다. 유엔의 투표에 이어 주로 아랍 국가들로부터 비정규적인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 지역의 아랍 전투병들은 유태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분할 결정을 좌절 시키고 유태 국가의 수립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여러 번의 후퇴 끝에 유태 방위 단체는 공격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유태 국가에 할당된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후(1948년 5월 14일)에 약 65만 명의 유태인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기반을 이룬 조직적인 사회로 명목상의 국가 명칭을 제외하곤 사실상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 이스라엘 역사(1948년 독립이후 - 현재) -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 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 인구 1%에 해당하는 6천여명 이상이었다. 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정부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 1회 크네세트가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에는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모든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오랜 투쟁으로 주어진 것이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들 5만 여명이 이스라엘로 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여명 이상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천여명으로 유태 인구가 급증하였다. 아랍 인구는 60만명 이상이 독립 전쟁 동안 떠나고 16만 7천여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랍 각국에서 온 30만명 이상의 이민자들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들 간에 실질적인 인구교환을 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 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이제 아랍계도 포괄하는 교육 제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우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16세까지는 의무교육, 18세까지는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명 이상이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심각한 안보 문제들이 건국 후 수년 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 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 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집트의 에일라트 만 자유 항행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 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확립기

 이스라엘의 제 2기 10년간(1958년~1968년)에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수출은 급증하였으며 GNP는 매년 10%씩 증가하였다. 수입해오던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같은 품목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갓 태동한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분야에서도 대단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국내 시장이 급속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문 뿐만 아니라 가공 산업을 위하여 매우 다양한 곡물 재배에 착수하였다. 급증하는 교역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도 지중해 해안 아슈도드에 수심이 깊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음에 따라 외교 관계가 꾸준히 확대 되었다. 이 10년간은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 엔지니어 교사 농학자 관개전문가 청소년 조직원 등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로 기술을 이전하여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나치 정권 아래에서 행해진(1933~1945년) 유태인들에게 자해졌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 온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사 교환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앞서 격렬한 반대와 대중의 논란이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국회 의사당이 지어졌으며, 하다사 의료 센터와 헤브루 대학교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정쟁 후 스코푸스 언덕 위에 버려져 있던 옛 건물 터에 세워졌다. 유태민족의 문화 유산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보존 연구하고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아이히만(Eichmann) 재판 사건

 1960년 5월 23일,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의 유태인 말살 계획의 주창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50년에 제정된 나치와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따라 재판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4월에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인류와 유태국민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1962년5월 30일에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사건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 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 고원에서 저지시켰다.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사마리아·가자·시나이 반도·골란 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 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전쟁에서 전쟁으로

 1967년 여름 이스라엘 외교의 지향점은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통합, 정치적 독립, 군사적 위협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국경과 안전 속에서 각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상호 인정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항구적인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은 1967년 8월 하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이스라엘과의 비평화, 비협상, 비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9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둑을 따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 행동으로 소모전을 개시하였으며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한 1979년 여름에야 적대 행위는 막을 내렸다.

 

1973년 욤키푸르 전쟁

 3년간 지속된 평화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합동 기습 공격을 가했던 욤키푸르(유태력 속죄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넜으며, 시리아 군대는 골란고원을 돌파하였다. 이후 3주 동안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제를 역전시켜 침략자들을 격퇴시켰으며,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에 진격하였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20마일 이내까지 육박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부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동안 점령했던 일부 영토에서 철수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1982년 평화 작전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설정된 레바논과의 휴전선은 결코 어느 쪽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강력한 PLO거점으로부터  반복되는 총격, 로켓 공격, 그리고 테러 행위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방위군은 1982년 6월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은 1970년 PLO에 대한 요르단의 추방 이래 남부 레바논에 자리잡은 PLO조직과 하부 군사 조직을 그 지역으로부터 제거시켰다. 작전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던 10년간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5년 초까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들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제한된 수의 군대만을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테러리즘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은 이스라엘의 독립 이전부터 그리고 독립이후에도 수십년간 계속되어왔다. 1967년 6일 전쟁일 일어나기전 20여년 동안 수천건의 테러리스트 공격으로 이스라엘 시민들을 살해되거나 부상을 당해왔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설립되면서 이 테러리즘은 전면으로 대두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산하 여러 테러 조직들이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수많은 테러행위를 감행했다. 가장 악명높은 테러행위중 하나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사건이었다. 1993년 테러리즘을 근절하겠다는 팔레스타인들의 약속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상의 근간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2000년 9월 이후 더욱더 강화되어 수백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천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전쟁에서 평화로

 1973년 10월 전쟁의 비용은 이스라엘의 1년간 GNP(국민 총생산)에 해당되었으나 1974년 하반기까지 경제는 1968~1973년의 경제 회복기에 기록했던 성장과 산업 팽창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으며, 1975년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자의 준회원이 됨에 따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해 새로운 잠재 시장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30주년 즈음에는 방문객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걸친 노동당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정당들이 제휴한 리쿠드 연합이 집권하에 되었다. 신임 수상 메나헴 베긴은 그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전임 수상들의 헌신을 되풀이 강조하고, 아랍 지도자들이 협상에 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와 이에 대한 아랍의 끊임없는 거부라는 순환고리는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깨어졌다. 이집트는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내민 이스라엘의 손을 평화롭게 잡은 첫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네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타결책이 제시되었다. 평화를 위한 기본 틀이 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른 인접 아랍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위한 토대의 역할도 하였다. 게다가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로 통치하고 있는 유다, 사마리아, 가자 지구와 그 지역 거주민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위한 상세한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수상은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10년간에 대한 희망과, 다른 인접 아랍국가 들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1980년 대를 맞이 하였다.

 1981년, 세계는 양국간에 강화된 협력을 토대로 마련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 조인하였고, 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수주일 전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하여 이라크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그에 따른 핵박멸 위협이 제거 되었다. 이 시기의 10년 동안에 1973년 석유 위기 당시 아랍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했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재수립 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경제적 관계와 과학적, 기술적인 원조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이집트 평화 조약의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의 휴전선 및 두 나라가 인정한 국경선에 대한 휴전 조약을 교환하면서 1982년 4월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이스라엘 국내 시련

 1980년과 90년대 이스라엘은 백만명여명의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했다. 그들은 주로 구소련, 동유럽 그리고 이디오피아에서 이주했다. 너무나 많은 소비자들과 수많은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의 유입은 경제 팽창을 가속화했다.

 1984년 의회 선거에서 리쿠드 당(우파/)중립과 노동당(좌파/중립)이라는 양대 정치권으로 구성된 연립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리쿠드 당이 주도하는 연립정권이 들어섰고 1992년에는 노동당과 군소 좌파 정당들의 연립 정부가 탄생했다. 1995년 이짝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살해된 후 1996년 새로운 정부를 위한 선거가 이루어졌다. 총리 직선제로 벤야민 네탄야후가 총리직에 당선되었고 리쿠드 당이 이끄는 연립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3년도 채 안돼 그의 정권은 퇴진하였다. 1999년 단일 이스라엘 정당 대표(좌파/중립)인 에후드 바라크가 총리로 선출되었고 연립 내각을 구성했으나 2000년 12월 사임했다. 2001년 2월 리쿠드당 총수 아리엘 사론이 총리로 선출되었고 주요 정당들을 포함하는 연합내각을 구성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당시 내각을 구성했던 각 정당의 신념에 따라 평화를 달성하고, 경제를 개발하고 이민자를 흡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주해왔다.

 

*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암살

 1995년 11월 5일 어느 한 극우파 청년에 의해 라 빈 총리가 암살되어 이스라엘 온 전체가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고 이츠크 라빈 총리는 사병에서 총리까지 올라 이스라엘을 전쟁터에서 평화의 길목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중동의 평화를 향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조약 체결(1979) 이후로, 중동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 그 결실로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1년에 마드리드 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 회담 후에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협상이 마련되었다.

 

양자간 협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과 PLO 간의 수개월간 오슬로 막후접촉 이후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의 자치정부수립에 대한 내용을 개설한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PLO 는 테러행위를 중단하고 PLO 헌장에 이스라엘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조항을 삭제할 것 등을 약속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뿌리 박은 두 민족간의 오랜 갈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갈 것 등을 명시한 문서인데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한차례 서신 교환후 1993년 9월 서명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로 인정을 하였다.

 원칙선언은 5년간의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협상의 여러 단계를 위한 기본틀에 관해 상호가 동의한 일반 원칙들을 포함한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4단계로 이행되었다. 첫 단계는 1994년 5월 가자지구와 여리고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이 주어졌다. 같은 해 8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관광, 조세, 사회복지, 문화, 보건분야에 팔레스타인에게 관할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명한 원칙선언과 다른 합의문들은 드디어 1995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자치합의안으로 체결되었다.

 이 합의안은 선거로 선출된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인 팔레스타인 평의회(1996년 1월 선출됨)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설립한다는 내용과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이스라엘 방위군을 재배치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합의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를 관장하는 매커니즘으로 팔레스타인의 최종 지위 합의를 이끌게 될 것이다. 잠정합의안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은 세 종류의 지역으로 나뉜다.

 지역 A – 서안의 주요 도시들을 포함. 이 지역내 군사 및 공공질서 관할권과 시민 행정관련 모든 권한 및 책임을 팔레스타인 평의회로 이양.(헤브론의 도시는 잠정합의안에 명시된 특별 조항의 대상임. 헤브론내 이스라엘 방위군 재배치에 관한 조약은 1997년 1월 체결됨)

 지역 B – 요르단강 서안의 작은 시와 마을들 포함. 팔레스타인 평의회는 지역 A와 같이 시민행정과 공공질서의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시민들의 안전과 테러 퇴치에 결정적인 안보를 책임진다.

 지역 C – 모든 이스라엘 정착촌과 이스라엘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그리고 인구가 거의 거주하지 않는 지역. 지역(계획, 지역분할, 고고학 등)과 관계된 시민행정책임 뿐 아니라 안보와 공공질서까지 이스라엘이 책임진다. 팔레스타인 평의회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위의 관할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민행정 부문에 책임이 있다.

 향후 이스라엘군 재배치 단계의 실행을 위한 일정표는 잠정 자치안에서 세부적으로 기술한 바와 같이 양측의 몇번의 회담에서 개정되었다. 특히 주목할만한 회담은 1998년 10월 열린 와이 리버 협정이었다. 이 합의된 개정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200년 3월까지 재배치 절차의 1, 2단계를 마무리했다. 재배치 절차의 3, 4단계는 여전히 협상중에 있다. 재배치의 결과로 요르단강 서안의 18%에 이르는 지역이 지역 A로 21%가 지역 B로 지정되어 요르단강 서안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98%가 팔레스타인 자치아래 활동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간 팔레스타인 영구 지위의 성격을 결정하기 위한 최종 지위 협상은 일정대로 1996년 5월 시작되었다. 1996년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의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자행된 자살 폭탄테러는 평화협상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후 회담은 3년간 중지되었고 1999년 9월 샤를 엘 쉐이크(Sharam el-Sheikh Memorandum) 평화협정 직후에 재개되었다. 이 협정에서 다루어진 사안들은 피난민, 정착촌, 안보, 국경, 여루살렘 등의 문제이다. 클린터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는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갖었다. 이 회담은 별다른 합의에 이르지 못한채 막을 내렸다. 이 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삼자 성명은 향후 협상을 위해 합의된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차별 폭력과 테러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에 수많은 사상자를 가져왔다. 폭력적인 대립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쇄신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지원을 받아 계속 증가하는 팔레스타인들의 테러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스라엘은 2002년 6월 24일 팔레스타인의 테러 중단을 위한 부시 미 대통령의 연설에서 제시된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제안은 모든 사안과 평화를 위한 최종 해결안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 마드리드 협정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평화회담은 미국 고위급 관료가 참가한 가운데 양국의 대사급 회담으로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다.

 1995년 12월 ,1996년 1월 두 차례의 회담이 안보와 다른 주요 주제들로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포괄적인 범위로 앞으로 검토와 양국 협상에 고려될 중요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삼년간 중단된 후 이스라엘과 시리아간 협상은 2000년 1월 미국의 쉐퍼드 타운에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을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2000년 3월 제네바에서 열린 클린턴 미대통령과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의 회담도 협상을 재개시키지 못한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현재 양측간 진행되고 있는 협상은 없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 200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425조에 따라 남부 레바논 지역의 군사지역에 모든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레바논은 아직도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425조를 완전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

 

다자간 협상

 다자간 협상은 중동의 지역적인 문제해결 모색을 목표로 하는 중동평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중동 국가들간 관계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신뢰구축방안으로 기여하고 있다.

 1992년 1월의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의는 36 국제단체와 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환경, 무기 감축, 지역 안보, 수자원, 경제개발등의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실무그룹들은 중동내 여러 장소에서 대때로 회담을 개최한다.

 운영위원회는 미국과 러시아의 주재하에 주요 대표단들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고 다자간 회담을 조정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회담은 2000년 1월 31일에서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폭력사태 이후 다자간 회담의 대부분의 활동은 동결되었다.

 

고고학

 이스라엘의 고고학은 수 천년 동안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귀중한 연결고리로 약 3,500여 군데의 유적지가 있다. 메기도(이즈르엘 계곡)의 솔로몬 시대의 마구간,  다윗의 도시(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시대 가옥들, 마사다의 세례장, 무수한 유태교 회당, 아직도 읽을 수 있는 헤브루어  원고로서 이사야서의 최초의 사본을 포함한 사해 문서 등, 수많은 발굴물들이 이스라엘 땅과 유태 민족의 오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발굴은 그 땅에 자취를 남겨 놓은 다른 문명의 흔적들을 밝혀냈다. 학자와 방문객을 위하여 모든 발견물들이 기록되고, 역사적 유적들은 조심스럽게 표시되어 보존된다.

 

 

 

약   사

기원전

17 세기 -6 세기

 성서시대

17 세기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 시대

13 세기

 출애굽

13 - 12 세기

 이스라엘민족의 팔레스타인 정착

1020

 군주제 성립 : 초대 왕 사울

1000

 다윗 왕국의 수도로 예루살렘이 건설됨

960

 유대민족의 국가적, 정신적 중심인 첫 번째 성전이 솔로몬왕에 의해 예루살렘에 세워짐

930

 유다 왕국과 이스라엘왕국으로 분열됨

722-720

 앗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 왕국 멸망, 10 개 지파가 흩어짐

586

 유다왕국, 바빌로니아에게 정복됨. 예루살렘과 첫 번째 성전이 파괴됨

 유대인,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감(바빌론 유수)

536-142

 페르시아와 그리스 시대

538-515

 바빌론으로부터 제 1차 귀환 : 성전 재건

332

 알렉산더 대왕에게 정복당함, 그리스의 지배

166-160

 하스모니안의 마카비가의 반란

129-63

 하스모니안 왕국 안에서 유대인 독립

B.C 63-C.E 313

 로마제국의 지배, 헤롯왕 통치

 

 

기원후

20-33

 나사렛 예수의 목회

70

 예루살렘과 두 번째 성전 파괴됨

73

 마사다에서 유대인 최후 항전

210

 미쉬나(구전법 모음집) 완성

313 - 636

 비잔틴 지배

390

 예루살렘 탈무드(미쉬나의 주해서) 완성

614

 페르시아의 침입

636 - 1099

 아랍 지배

691

 이스라엘의 제 1, 2차 성전이 세워졌던 장소에 이슬람 바위사원 건설

1099 - 1291

 십자군의 통치 : 라틴계 예루살렘 왕국

1291 - 1516

 마믈룩 지배

1517 - 1917

 오스만 제국 지배

1860

 예루살렘 성곽밖에 최초의 유대인 마을(미슈케노트 샤나님) 건설

1882 - 1903

 러시아에서 제 1차 알리야(대규모 이민)

1897

 테오도르 헤르쩰, 스위스 바젤에서 제 1회 시온주의 총회 개최

1904 - 1914

 제 2차 알리야(주로 러시아와 폴란드에서)

1909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와 최초의 근대적인 유대인도시 텔아비브 건설

1917

 영국, 오스만 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종식

 영국, 벨푸어 선언통해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조국 건설을 보장' 한다고 약속

1918 - 1948

 영국의 통치

1919 - 1923

 제 3차 알리야(주로 러시아에서)

1920

 히스타드루트(노동조합)와 하가나(유대방어조직체) 창설. 유대인 공동체에 의해 국가 평의회 구성

1921

 첫 번째 모샤브인 나할랄 창설

1924 - 1932

 제 4차 알리야(주로 폴란드에서)

1925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 스코푸스산에 설립

1929

 헤브론 유대인들이 아랍군들에 의해 학살당함

1931

 유대인 지하기구인 에쩰 창설

1933 - 1939

 제 5차 알리야(주로 독일에서)

1936 - 1939

 아랍군의 반 유대 폭동 개시

1939

 영국 백서, 유대인 이민을 제한

1939 - 1945

 제 2차 세계대전 : 유럽의 유대인에 대한 대학살

1941

 레히 지하운동 조직, 에쩰에서 분리

1944

 영국군 소속하에 유대인 여단 조직

1947

 국제연합, 팔레스타인에 아랍. 유대인의 개별국가를 건설하여 예루살렘을 국제연합에서 분리

1948

 이스라엘 건국 선포(5월 14일), 영국의 통치 종료(5월 14일)

 아랍 5개국, 이스라엘 침공(5월 15일), 독립전쟁(1948년 5월~1949년 7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조직

1949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라크는 제외) 휴전협정 조인, 초대 크네세트(의회) 선출, 이스라엘, 국제연합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

1948 - 1952

 유럽 및 아랍각국에서 대규모 이민

1956

 시나이 분쟁

1962

 아돌프 아히만 처형

1964

 국립수로 완공, 북부 키네렛호에서 남부 불모지로 물수송

1967

 6일 전쟁 : 예루살렘 재통합

1968 - 1970

 소모전

1973

 욤 키푸르 전쟁

1975

 이스라엘, 유럽 공동시장(E.C.M)의 회원국에 가입

1977

 리쿠르당 승리, 노동당 집권 종료,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 예루살렘 방문

1978

 캠프 데이비드 협정 조인

1979

 이스라엘과 이집트, 평화조약 조인

1981

 미국과 합의 각서에 서명, 이스라엘 공군기, 이라크의 원자로 폭파

1982

 이스라엘, 시나이로부터 3단계 철수 완료

 

 이스라엘, 레바논을 근거로 하는 PLO 테러리스트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수행

1984

 총선 후 국가연립내각 형성(리쿠드 - 노동당), 모세작전 수행, 에디오피아에서 유대인이민

1985

 미국과 자유 무역 협정(FTA) 조인

1987

 팔레스타인의 폭동(인티파다) 시작

1989

 이스라엘, 4개조 평화안 제안, 구소련 유대인의 대이민 시작

1991

 이라크의 사담후세인, 걸프전 동안 지대지 미사일로 이스라엘을 공격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마드리드에서 공동평화회의 개최됨.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 팔레스타인 대표단 참가

1992

 중국 및 인도와 외교관계수립, 노동당의 라빈이 이끄는 새 정부 출범

1993

 미국과 러시아 입회 하에 이스라엘과 PLO, 잠정 자치안 협정에 서명

 이스라엘과 교황청, 기본동의안에 서명

1994

 가자지구와 여리고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인정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 노벨 평화상 공동 수상

1995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지역의 팔레스타인 자치확대

 평회집회에서 이츠하크 라빈 총리 암살, 시몬 페레스 총리직 계승

1996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 회교 원리주의자 테러 자행, 헤즈볼라의 이스라엘 북부지역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분노의 포도(Grafes of Wrath)" 작전 / 총선, 리쿠드당 집권, 텔아비브에 무역대표 사무소 개설

1997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헤브론 협정서명

1998

 와이리버 협정 서명

1999

 총선, 노동당의 에후드 바락 총리 선출, 샤를-엘 쉐이크 평화협정 조인

2000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이스라엘 방문, 남부 레바논내 군사지역 이스라엘군 철수 제 2차 인티파다, 바락 총리 사임

2001

 아리엘 샤론(리쿠드) 총리 당선, 연립내각 구성 샤를-엘 쉐이크 진상조사위원회 보고서 발행(미첼보고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안보실행작업안(테넷 휴전안) 제시 레카밤 즈비 이스라엘 관광부 장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

2002

 팔레스타인 대량 무차별 테러에 이스라엘 방호벽 작전 개시 샤론 총리 2003년 1월 28일 선거를 요구하며 크네셋을 해산시킴

2003

 샤론 총리에 의해 중도 우파 연합 정부 구성, 이스라엘 로드맵을 받아들임

2005

 정부와 크네셋이 승인한 절연정책(disengagement plan)을 실행

2006

 에후드 올메르트 총리 취임, 새내각 구성 이스라엘,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테러와 레바논 남부의 헤즈볼라 테러에 대항해 군사 작전 실시

 

 

안식일. 공휴일. 영업시간

 이스라엘에는 종교에 따라 3개의 달력과 3개의 공휴일과 3개의 시간 개념이 존재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공히 구약을 기준으로 하므로 6일간의 천지창조 후 하루의 안식일을 갖는 건 동일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일요일에 안식하며 영업시간은 09:00-17:00(월-금)까지, 이슬람교는 마호메트가 처음 설법하러 간 날을 시작으로 하는 히즈라 달력을 기준하여 금요일이 안식일이며 09:00-13:00(토-목)까지 영업한 뒤 쉬었다가 저녁에 다시 문을 연다.

 유대인은 출애굽한달을 기준한(출12:1-2) 달력을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로쉬 샤나(민29:1)를 새해 첫날로 삼는다. 유대인의 달력은 한국인이 음력을 사용하듯 고유의 달력을 계산하므로 종교 및 법정 공휴일은 해마다 변경된다. 유대인의 하루 계산법은 천지창조(창 1장)을 기준으로 한다.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므로 안식일은 이틀에 걸쳐지며 이브(eve)의 개념이 존재한다. 또 안식일은 말 그대로 안식하는 날이어서 회당에 가는 것 외에는 일체의 노동을 금한다. 이 날은 버스, 기차, 비행기 모두 운행되지 않으며 엘리베이터 타기, 초인종 누르기, 기계 및 기구 만지기, 가스레인지 켜기, 카메라 셔터 누르는 것 등도 금지되며, 음식도 미리 만들어 둔다. 유대인의 영업 시간은 업무에 따라 다변화되어 있어 한국 사람에겐 낯선 점이 많다. 이스라엘에 선생활은 곧 종교이며 관광객은 요일에 따라, 시간에 따라 방문지 선택에 유의해야 한다.

 

 

유대인의 식사

 유대인은 코셔르(KOSHER)라는 독특한 식사를 하는데 이는 레위기(11장)에 근원한 식사법으로 돼지고기,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생선(미꾸라지. 메기등), 조개류, 갑골류(오징어, 게등)를 먹지 않고 새 중에는 타조, 까마귀, 갈매기등을 먹지 않고 소고기와 우유 또는 치즈를 함께 먹지 않는등 전형적인 종교 율법 식사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공공식당에서는  KOSHER를 지키는 식당인지를 게시하여야 한다. KOSHER 식당에서는 외부음식을 반입하지 말고 유대인 종교율법에 어긋나는 음식을 요구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여행TIP

 이스라엘은 입·출국 절차가 까다롭기로 악명 높다. 텔아비브의 벤 구리욘 공항에서는 들고 나는 모든 사람들을 보안요원들이 따로 인터뷰해 테러 관련 여부를 꼬치꼬치 캐묻는다. 짐 검사도 세 번, 네 번 하는데 조금이라도 미심쩍다 싶으면 별도의 데스크에서 가방을 열고 샅샅이 뒤진다. 그러나 불평은 금물.여차하면 더 큰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

 공항, 쇼핑센터를 비롯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 없이 군인들이 지키고 있으므로 치안 상태는 좋은 편. 여행객을 노리는 소매치기 등의 좀도둑은 조심해야 한다. 이스라엘 화폐는 셰켈이지만 미국 달러가 통용되므로 굳이 환전하지 않아도 된다.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에는 공공기관, 상점, 식당을 이용할 수 없으니 유의해야 한다. 또 유대교 율법에 따라 음식에 대한 제한이 까다로우므로 식당에 한국 음식을 가져갈 수 없다는 것도 명심하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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