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라카 : 할라카는 성서시대 이후부터
유태인 생활의 길잡이가 된 법의 기조 이론이다. 이는 유태인의 종교적 의무, 대인관계, 예배의식, 출생과 결혼, 기쁨과 슬픔, 농업과 상업,
윤리와 논니 등, 실질적인 인간 행동 양식이 규정되어 있다. 할라카는 성서를 토대로 하고, 그 권위는 탈무드에 기초하고 있다. 탈무드는 유태
법률과 교훈(400년경에 완성)의 본체이다. 구전법의 첫번째 성문법전(210년에 성문화)인 미슈나를 통합한 것이며, 이를 위해 400년에 걸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300년의 노력 끝에 미슈나를 정미한 게마라를 통합시켰다. 할라카에 대한 실용적인 안내를 위해 간결하고 체계적인
정리 요약서가 작성되었는데, 이는 1세기와 2세기에 종교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러한 성문법전 중에 가장 권위 있는 것은 16세기 동안
츠파트에서 조지프 카로에 의해 작성된 슐란 아루크이다.
◐
비잔틴의 지배(313~636)
4세기 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313년)과 비잔틴 제국 건설에 이어 이스라엘
땅은 범기독교의 나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베들레헴, 갈릴리 등 기독교의 성지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도처에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유태인들은
이전에 가졌던 자치권을 빼앗기고 공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했으며, 단지 일 년 중 하루만 성전 파괴를 애도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었다. 614년 페르시아가 침입해 오자 유태인들은 석방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이를 지지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정부를 승인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3년밖에 지탱되지 않았다. 곧이어 비잔틴군은 예루살렘에 재입성하여(629년) 다시 유태인들을
축출하였다.
◐
아랍의 지배(636~1099)
무하마드가 죽은지(632년) 4년 후 부터 아랍의 지배가 4세기 이상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음에는 바그다드와 이집트로부터 칼리프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슬람 지배 초기에는 유태인의 예루살렘 거주권이 회복되고 유태인
공동체는 '보호' 아래 사는 것이 승인되었는데, 이것은 특별 선거와 지세의 납부에 대한 보상으로 생명과 재산, 예배의 자유를 보장 받는
보호막으로서 이슬람의 지배를 받는 비회교도들에 대한 관례적인 지위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비회교도에 대한 제한법의 도입(717년)으로 유태인의
공적인 행동, 종교 의식, 법적 지위 등은 제한을 받았다. 그 와중에 내려진 경작지에 대한 세금의 중과로 그들 대부분은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으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사회적, 경제적인 차별 대우가 심해지자 많은 유태인들은 이 땅을 떠남으로써 11세가 말경 이스라엘
땅의 유태인 집단은 상당수가 사라지고, 유기적이고 종교적인 응집력이 점차 상실 되어 갔다.
◐
십자군 시대(1099~1291)
다음 200년 동안 교황 우르만 2세의 호소에 따라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유럽 각국의 십자군의 지배를 받았다. 5주간의 포위 후 1099년 7월 제 1차 십자군 원정의 기사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라틴
왕국을 세웠다. 도시의 비기독교인들은 대부분 학살당했다. 회당 안에 장벽을 쌓고 유태인들은 그들의 거점을 방어했으나 모두 죽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수 십년 동안 십자군은 조약과 협정으로, 그러나 대부분 유혈 군사 정복으로 이 나라의 다른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해 갔다.
십자군 왕국은 대부분 요새화 된 도시나 성에 한정된 소수 정복자들의 왕국이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땅은 기독교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기독교
국가가 되지는 않았다. 십자군이 유럽에서 성지까지의 교통로를 열어 순례의 길이 대중화 되고 인기를 얻자, 동시에 늘어나는 유태인들은 그들의 옛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갈구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무리를 지어온 300명의 랍비들 중 몇몇은 악고에, 나머지는
예루살렘에 정착하였다. 십자군이 쿠르드 살라딘에게 격파 당하자(1187년), 유태인들은 예루살렘에 정착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하여 어느 정도
자유를 되찾았지만, 그들의 거주는 요새화 된 몇몇 성에 한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은 이슬람 군의 엘리트 계급인 맘루크에게
패하자 이 땅의 십자군 지배는 종말을 맞게 되었다.
◐
맘루크의 지배(1291~1516)
맘루크의 지배아래 이땅은 다마스쿠스의 지배를 받는 벽지가 되었다. 악고, 욥바, 그
밖의 항구들은 새로운 십자군의 침입으로 파괴되고 무역은 단절되었다. 중세 말에는 이 나라 도시의 중심은 파괴되고 예루살렘의 대부분은
황폐해졌으며, 유태인들은 궁핍해졌다. 맘루크의 쇠퇴기는 정치적, 경제적인 격동과 질병, 탐욕스러운 자들의 침입과 지진 등으로 암울한 시기었다.
◐
오스만 제국의 지배(1517~1917)
다음의 4세기 동안 이스라엘 땅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지배를 받았다.
이스라엘 땅은 네 부분으로 분할되고 행정적으로는 다마스쿠스의 한 지방으로 예속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초시에는 약 1000호 정도의 유태인들이
이 땅에 살았는데, 주로 예루살렘, 나블루스, 헤브론, 가자, 츠파트, 갈릴리 마을에 거주했다. 이 유대인 공동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 이 땅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유태인의 후손으로 이루어졌다. 오스만 술탄 술래이만 1세가 죽을 때까지(1556년) 자리
잡힌 정부에 의해 유태인의 생활은 개선되고 유태인의 이주를 자극하였다. 새로운 이주민들 중 몇몇은 예루살렘에 정착했지만 대부분은 츠파트로
갔다. 그리하여 츠파트는 16세기 중반에 유태인 수가 1만명에 달하는 직물의 중심지로 번창했을 뿐 아니라 유태학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카발라(유태의 신비주의)가 번성했으며 동시에 슐란 아루크에 성문화된 것과 같이 유태 법률은 츠파트 학파에서 디아스포라(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전역에 퍼져 나갔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소홀해지면서 18세기 말에는 많은 토지가 부재 지주의 소유가 되어 가난한 소작
농민들에게 일괄성 없는 세제로 임차되었다. 갈릴리의 대삼림과 카르멜 산맥은 벌목 되고, 늪지와 사막이 경작지를 침식하였다.
19세기에 서양
세계의 진출이 시작되자 유럽 열강들은 선교활동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획득했다. 영국, 미국, 프랑스의 학자들은 성서의 지리와 고고학 연구에
착수하고 영국, 프랑스, 구 소련, 오스트리아, 미국이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개설했다. 정기 기선이 이 땅과 유럽 사이를 왕래하고 우편과
전신이 개설되었다. 예루살렘과 욥바를 연결하는 도로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대륙을 연결하는 전통적인 교두보로서 이 땅의 재탄생은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가속화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유태인들의 생활 조건은 서서히 개선되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세기의 중반에는 예루살렘
성안의 인구가 과밀하기 때문에 유태인 거주 지역을 세웠으며(1860년), 다음 25년 동안 그 새 도시를 핵으로 하는 교외 지역을 추가로 7개
더 건설하였다.
1880년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거주하게 되었다. 농지가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매입되고 시골 정착민들이 새로 생겼다.
오랫동안 예배의식과 문학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해오던 히브리어가 다시 부활되었다. 아울러 시온주의의 토대를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시온주의에
고무된 두 개의 이주 집단이 19세기 말기와 20세기 초에 동유럽으로부터 이땅에 도착했다. 땅을 일구어 그들의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희망으로
이들 개척자들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새로운 정착지를 세우고, 나중에 꽃피우게 된 농업경제의 기반을 다졌다. 새로운
이주민들은 극히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행정부의 태도는 적대적이고 압제적이었다. 통신과 교통 수단은 여전히 원시적이고
불안정했다. 늪지에서는 치명적인 말라리아균이 번식했고 토양은 수세기 동안 버려진 상태였다. 토지 매입은 제한되었고 건축은 콘스탄티노플의 특별
승인 없이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어려움과 그 밖의 어려움들은 나라의 발전을 방해하였지만 중단시키지는 못했다. 이전 1500년대에 5000명에
불과했던 유태인의 수는 제 1차 세계대전 발발(1914년) 때 85,000명에 이르렀다.
1917년 12월에 알렌비 장군의 지휘아래 영국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써 4세기에 걸친 오스만 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말았다. 영국군에는 수천명의 유태인 의용군이 포함된 3개의 대대의 유태인
여단이 있었다.
☞
시온주의(Zionism)
시온주의는 시온(Zion)이란 말에서 유래된 말로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 시온주의의 이상
- 조상의
땅에 유태 국가를 재건한다 - 은 수세기에 걸친 디아스포라(유태인의 유랑)에서 그들을 존속 가능케 한 이스라엘 땅에 대한 이스라엘 민족의 끊임없는
갈망과 깊은 애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치적인 시온주의는 동유럽 사회에서 유태인에 대한 압박과 박해와 차별 대우가
계속되고 서유럽 사회에서 역시 차별 대우없이 그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형식적인 해방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났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테오도어
헤르츨에 의해 소집된 시온주의자 회의에서 시온주의자 협회를 설립함으로써(1897년)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시온주의 프로그램은 유태인을
약속된 땅에 복귀시키는 것을 촉진 및 증진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적이고 실제적인 두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유태인이
사회적.문화적.경제적.정치적으로 새로운 생활을 해나가고, 박해로부터 자유롭고 그들의 생활과 신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역사적인 땅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법적으로 안정이 보장된 생활과 동질성을 갖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
영국의 지배(1918~1949)
1922년 7월에 국제 연맹은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에 대한 위임통치를 수락하고 '유태 민족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연결' 을 인정하고 유태국가 건설을 촉진했다. 9월 국제 연맹 이사회와 영국은 유태 국가 건설 촉진 계획에 위임통치 지역의
4분의 3인 지금의 하세미테 요르단 왕국을 포함시키지는 않는다는 제안에 동의하였다.
☞
이주 : 시온주의와 벨푸어
선언(1917년)에 고무되어 1919년과 1939년 사이에 많은 유태인들이 이주하여 유태인 공동체를 다른 양상으로 발전시켰다.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주로 러시아에서 온 3만 5천 명의 이주민들은 몇 년 동안 공동체의 성격과 조직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개척자들은
포괄적인 사회적, 경제적 구조의 토대를 세웠으며 농업을 발전시키고 키부츠와 모샤브를 설립했으며, 집을 짓고 도로를 건설하였다. 1924년에서
1932년 사이에 주로 폴란드에서 온 약 6만 명의 이주민들은 도시 생활을 발달시키고 풍요롭게 하였다. 이들은 주로
텔아비브, 하이파, 예루살렘에 정착했는데, 그곳에서 소규모의 사업체와 건축회사 경공업체를 설립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의 1930년대에 마지막으로 중요한 이주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히틀러가 등장했기 때문에 독일에서 온 약 16만 5천명이다. 이들 중에는
전문가들과 학자들이 많이 있었다. 또한 주서부 유럽으로부터 온 가장 큰 규모의 이주였다. 그들의 학력과 기술,
경험은 비즈니스의 수준을 높이고
도시와 농촌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였으며, 유대인 공동체의 문화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했다.
☞
행정 : 영국의 위임 통치
당국은 유태인과 아랍 집단 사회에 그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러한 권한을 이용하여 유태 사회는 정당 기구를
선출했다(1920년). 그것은 "선출된 의회'라 불렸는데, 매년 활동을 점검하고 정책과 계획을 수행하는 집행부인 '국가 평의회'를 선출했다.
지방의 자원과 세계각지의 유태인이 보낸 기금을 재원으로 이 기구들은 전국의 유태인을 위한 교육, 종교 , 보건, 사회 복지 시설을 위한 조직망을
발전시키고 유지해 나갔다. 1922년에 영국의 위임 통치령에 명기된 대로, '유태인 대리 기관'이 구성되어 영국 당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외국정부와 국제 기구에 대해 유태 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
경제발전 : 30년의 영국 위임 통치기간 동안이 나라의
발전은 박차를 가했다. 농업은 괄목할 만하게 성장하였고 공장들이 세워졌으며, 요르단 강의 물을 이용해 전력을 공급하고, 세 도로가 전역에
건설되고 사해의 광물자원이 개발되었다. 유태인 노동 총연맹인 히스타드루트가 설립되어(1920년) 산업 부문에서 공동 농업의 주민들을 위해 복지를
증진시키고 일자리를 제공했다.
☞
문화 : 유태 공동체의 독특한 문화 생활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미술·음악·무용 활동이 전문 학교와 스튜디오의 설립과 함께 점점 발전되었다. 화랑과 음악당이 세워져 각종 전시회와 연주회가 열렸다.
새로운 연극의 개막, 새로운 책의 출판, 지방 화가의 회고전 등이 언론에 소개되고, 커피숍이나 사교적인 모임에서 즉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히브리어는 영어와 아랍어와 함께 이 나라의 세 가지 공용어로 인정되었으며, 서류, 동전·우표·라디오 등에서
사용되었다. 출판이 증가하고 이 땅은 당시의 히브리 문학 활동의 유력한 중심지로 떠올랐다. 여러 가지 형태와 장르의 극장이
열광적인 청중에게 개방되었고, 히브리어로 쓰여진 희곡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
아랍의 반대와 영국의 통제
유태 국가를 재건하려는 유태인 공동체의 노력은 극단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그들의 강한
적개심은 1920년, 1921년, 1929년과 1936~1939년에 걸쳐 격렬한 폭동으로 분출되어 유태인의 교통수단이 공격 당하고 들과 숲이
불타 버렸으며 유태인 거주지 또는 개인에 대한 이유 없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아립인들과 대화를 이끌어내려는 시온주의자의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하여 시온주의와 아랍 민족주의는 양극으로 치달아 폭발 직전의 상태에 있었다. 두 국민 운동의 반대되는 목표를 인지한 영국은 일찍이 위임
통치하의 지역을 분할했듯이(1922) 요르단 강 서쪽 땅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유태 국가로, 다른 하나는 아랍국가로 분할할 것을
권유했다(1937). 유태인 지도층은 분할 권유를 받아들여 유태인 대리 기관에 영국 정부와 협상하여 그 제안을 재공식화하는 국면으로 유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아랍인들은 어떠한 분할 계획에도 강경하게 반대 했다. 계속되는 아랍의 대규모 반유태 폭동으로 유럽의 유태인들에게 나치의
박해에 대한 피난처 제공을 부정한다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의 이주에 단호한 제한을 가하는 백서를 제출했다(1939년 5월). 이러한 정책
때문에 후에 이스라엘의 초대 수상이 된 다비드 벤 구리온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백서가
없더라도 전쟁을 하고, 전쟁이 없더라도 백서와 싸울 것이다."
전쟁동안 약 2만
6천명의 유태인 공동체 남녀가 나치 정권에 대항,
연합군에 지원하여 유태인 여단 뿐만 아니라 육군 해군 공군으로 영국 부대에서 복무하였다.
☞
3개의 유대인 지하
조직
영국의 위임 통치 기간 동안 세 개의 지하 조직이 활동하였다. 가장 규모가 컸던 '하가나(1920에 결성됨)'는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자위 단체로서 유태인 공동체의 공식 기구에 의해 설립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아랍의 공격에 대한 보복을 단행하고
유태인의 이민에 대한 영국의 통제 조치에 대규모 시위와 사보타주로써 항거했다. '에첼(1931년에 결성됨)'은 하가나에 대해 유태 지도층이 내린
자치제를 거절하고 아랍과 영국의 두 목표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시작했다. '레히'는 가장 소규모의 호전적인 단체로 주로 반영국적인 동기를
가지고 조직되었는데,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유태인 공동체의 모든 무장 지하 활동 금지를 에첼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에첼로부터 분리됐다(1940년). 이 세 개의 조직은 1948년 5월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설립되자 해산됐다.
☞
2차 대전 동안의
유대인 지원병들
이스라엘 내 유대인 공동체 26,000명이 넘는 남.녀 유대인들이 영국군의 육군, 해군, 공군등에
자원입대 하여 나치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동맹국에 맞서 싸웠다.
1994년 9월 유대인 기구와 해외의 시온주의
단체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전쟁에 참가했던 노력을 인정 받아 영국군에 유대인여단을 두게 되었고, 유대인여단은 차제 깃발과 휘장을 가졌다. 약
5,000명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이집트, 북 이탈리아, 북서 유럽등지에서 활약하였다. 945년 연합군의 승리 후에 많은 부대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귀환시키는 일에 참가하였다.
◐
홀로코스트(대학살)
제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 정부는 유럽의 유태인 사회를 말살하려는 세부적인 계획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수행했다.
그 계획 아래 그들은 150만 명의 어린이를 포함한 600만 명의 유태인을 살해했다. 나치 독일 군대가 유럽을 휩쓸 때 유태인들은 잔인한 박해
아래 온갖 고통과 굴욕을 받았으며 유태인 거리로 내몰려 그곳에서 산발적인 무장저항을 시도하였으나 더욱 거센 탄압을 받았다. 유태인 거리로부터
수용소로 옮겨져서 무차별 사격을 받았으며 가스실에서 대량 학살되었다. 소수의 사람만이 대학살에서 벗어나 몇몇은 다른 나라로 가고 몇몇은
게릴라로서 살아 남았으며, 그 밖의 사람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비유태인들의 도움으로 숨었다. 결국, 한때 세계에서 가장 활기찬 유태인
사회를 구성한 약 9백만 명의 인구 중 전쟁전에 유럽으로 떠난 사람들을 포함하여 3분의 1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 후 영국은 이 땅에 와서
정착하는 유태인의 수를 더욱 제한 하였다. 유태인 사회는 이에 대해 폭 넓은 '불법 이민'
활동 단체를 조직했다.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약 5천
명의 난민들이 비밀리에, 대부분 위험한 경로를 택해 이 땅에 들어왔다. 영국은 해안을 봉쇄하고 국경 순찰대를 만들어 난민들이 이 땅에 도착하는
것은 차단하여 사이프러스 섬에 있는 수용소에 포로로 가두었다.
◐
독립으로 가는 길
유태와 아랍 사회의 상충된 요구를 조정하지 못한 영국 정부는 유엔 총회에 '팔레스타인 문제'를 의제로 상정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특별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나라의 장래에 관한 제안을 준비하였다. 총회는 투표로서 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1947년 11월
29일) 요르단 강 서쪽 지역에 세우도록 제안했다. 유태인 사회는 그 분할 계획을 받아들였지만 아랍인들은 거절했다. 유엔의 투표에 이어 주로
아랍 국가들로부터 비정규적인 지원군의 지원을 받는 지역의 아랍 전투병들은 유태인 사회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여 그 분할 결정을 좌절 시키고
유태 국가의 수립을 방해하려고 애썼다. 여러 번의 후퇴 끝에 유태 방위 단체는 공격쪽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유태 국가에 할당된 지역을 모두
되찾았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에 대한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난 후(1948년 5월 14일)에 약 65만 명의 유태인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이미 충분히 기반을 이룬 조직적인 사회로 명목상의 국가 명칭을 제외하곤 사실상 하나의 국가였던 것이다.
-
이스라엘 역사(1948년 독립 이후 - 현재) - ◐
독립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되자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곧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이스라엘은 선조들의 옛 땅에서 되찾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스라엘 방위군은 독립 전쟁 기간 동안에
조직되어 매우 빈약 하였으나 15개월 동안 지속된 맹렬한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때 이스라엘의 사상자 수는 당시 이스라엘
인구 1%에 해당하는
6천여명 이상이었다. 1949년 초 수개월간 유엔의 후원으로 이라크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 여러 차례의 협상을 거쳐서 종전 상황을 반영한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해안 평야 지대인 갈릴리와 네게브 지역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되었다.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은 요르단이 통치하게 되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행정권 아래 편입되었다. 예루살렘은 양분되어 요르단이 구시가지가 포함된 동부를 관할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서부를 관할하게
되었다.
◐
정부수립
전쟁이 끝나고, 오랫동안 힘겨운 투쟁으로 되찾은 국가의 건설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유권자의 85%가 참가한 총선(1949년
1월 25일)으로 초대 의회인 제 1회 크네세트가 개원하였다.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이 되어온 두 명이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유태인 사무국의
사무총장 다비드 벤구리온이 초대 총리로, 세계 시온주의자 협회 의장 하임 와이즈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국회에서 선출되었다. 1949년 5월 11일에는 유엔의 5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모든 유태인이 이스라엘로 돌아와 아무런 제한 없이 살 수 있는 권리가 오랜 투쟁으로 주어진 것이다.
독립 후 4개월 동안 나치 대학살의 생존자들 5만 여명이 이스라엘로 왔다. 1951년 말까지 아랍 각지에서 피난 온 30만여명 이상을 포함하여
모두 68만 7천여명으로 유태 인구가 급증하였다. 아랍 인구는 60만명 이상이 독립 전쟁 동안 떠나고 16만 7천여명이 남거나 가족
재결합 계획에 따라 돌아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아랍 각국에서 온 30만명 이상의 이민자들은 이스라엘을 떠난 아랍인들 간에 실질적인 인구교환을
하게 되었다.
독립 전쟁에 의해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야기되었을 뿐만 아니라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만큼 이스라엘 국내에서의
내핍은 물론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재정적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미국의 원조와 미국 은행들의 차관, 재외거주 유태인들의 기부금, 전후 독일의 배상금
등이 모두 주택 건설, 농업의 기계화, 상선대 제작, 국영항공사 설립, 자원 개발, 산업 발전, 도로, 전기, 통신망의 구축 등에 사용되었다.
건국 10년 후에는 산업 생산과 고용은 2배로 늘고 산업 수출은 4배로 증가 하였다. 농업의 큰 발전으로 곡물과 육류를 제외한
기초 농산물을 자급하게 되었으며, 경작지가 놀랄 정도로 늘어나 대부분 황무지였던 약 5만 에이커(2만 헥타르)가 조림되었으며, 거의 5백
마일(800km)에 이르는 고속 도로 변에 나무가 심어졌다.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 공동체에 의해서 개발되었고, 이제 아랍계도 포괄하는 교육
제도가 크게 확산되었다. 5~14세의 모든 아동들에게 우상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으며, 1978년부터는 16세까지는 의무교육, 18세까지는 무상
교육이 실시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이주해온 유태인들이 자손 대대로 거주해오던 국가의 각 분야의 문화와 함께 그들 공동체의 독특한 전통을
가지고 옴에 따라 문화·예술 활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의 여러 요소들과 혼합되어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0주년
무렵에는 인구는 2백만명 이상이 되었다.
◐
1956년 시나이 분쟁
심각한 안보 문제들이 건국 후 수년 동안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1949년의 휴전 협정은 처음에 의도한 대로
영구적인 평화에 이르는 길을 닦지 못했으며, 협정 위반 사례가 빈발 하였다. 1951년 9월 1일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반하여 이스라엘
선적 및 이스라엘행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과가 금지되었으며, 티란 해협의 봉쇄가 강화되었다. 살인과 방해 공작이 목적인 인접 아랍 국가들의 테러
공격대의 이스라엘 침투가 날로 증가 했다. 게다가 시나이 반도는 점차 거대한 이집트의 군사 기지로 변모해 갔다. 1956년 10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이 3국 군사 동맹을 체결함에 따라 이스라엘의 생존에 긴박한 위협이 대두되었다. 이에 8일간의 전투로 이스라엘 방위군은 시나이
반도 전역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으며, 수에즈 운하의 동쪽 10마일(16km) 선상에서 정지하였다. 이집트의 에일라트 만 자유 항행에 대한
보장과 유엔의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선에 대한 유엔 긴급 파견군(UNEF) 배치 결의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몇 주 전 점령했던 지역에서 1956년
11월~1957년 3월의 위치로 철수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페르시아 만으로부터 석유를 수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동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교역을 증가 시킬 수 있도록 티란 해협이 개방되었다.
◐
확립기
이스라엘의 제
2기 10년간(1958년~1968년)에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가 강조되었다. 수출은 급증하였으며 GNP는 매년
10%씩 증가하였다. 수입해오던 종이, 타이어, 라디오, 냉장고 같은 품목들을 생산할 뿐만 아니라 갓 태동한 금속, 기계, 화학, 전자
분야에서도 대단히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농산물에 대한 국내 시장이 급속히 포화 상태에 이르자 농업 부문은 수출용 청과문 뿐만 아니라 가공
산업을 위하여 매우 다양한 곡물 재배에 착수하였다. 급증하는 교역량을 소화하기 위하여 기존의 하이파 항 외에도 지중해 해안 아슈도드에 수심이
깊은 항구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은 미국, 영국,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 그리고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과 밀접한 유대
관계를 맺음에 따라 외교 관계가 꾸준히 확대 되었다. 이 10년간은 수백 명의 이스라엘 의사 엔지니어 교사 농학자 관개전문가 청소년 조직원 등이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개발도상국들로 기술을 이전하여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1956년 나치 정권
아래에서 행해진(1933~1945년) 유태인들에게 자해졌던 범죄에 대한 쓰라린 기억 때문에 그때까지 지연되어 온 독일연방공화국의 대사 교환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앞서 격렬한 반대와 대중의 논란이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국회 의사당이 지어졌으며, 하다사 의료 센터와
헤브루 대학교의 부속 시설들이 독립 정쟁 후 스코푸스 언덕 위에 버려져 있던 옛 건물 터에 세워졌다. 유태민족의 문화 유산과 보물들을 수집하여
보존 연구하고 전시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박물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
아이히만(Eichmann)
재판 사건
1960년 5월 23일,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의 유태인 말살 계획의 주창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50년에
제정된 나치와 나치 협력자 처벌법에 따라 재판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로 압송되었다. 1961년 4월에 열린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인류와 유태국민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1962년5월 30일에 아이히만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법에
의해 사형이 집행된 사건은 이것이 유일한 것이었다.
◐
1967년 6일 전쟁
이집트와 요르단 국경, 너머 아랍 테러 단체들의 기습이 격화되고, 북부 갈릴리 지방의 농경 정착촌에 대한 시리아
포대의 지속적인 포격과 인접 아랍 국가들의 막대한 군비 등으로 이스라엘의 평온이 깨지게 되었다. 1967년 5월, 이집트가 시나이 사막으로
군대를 이동시키고, 1957년 이래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유엔 평화 유지군에게 철수를 요구하고, 티란 해협에 대한 봉쇄를 재개하였으며,
요르단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전선에서 적대 받는 아랍 군대들과 대치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1956년 시나이 분쟁 뒤에
합의된 협정을 회복하는 데 실패함에 따라 이스라엘은 고유란 자위권을 발동하여 1967년 6월 5일 남부의 이집트에 대하여 선제 공격을 가했으며,
뒤이어 동부의 요르단에 대하여 반격을 가했다. 그리고 시리아 군대의 진로를 북부 골란 고원에서 저지시켰다. 6일간의 전투 뒤 기왕의 휴전선은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새로운 휴전선, 즉, 유다·사마리아·가자·시나이 반도·골란 고원 등으로 대체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부의 촌락들은
19년간 계속되어온 시리아의 포격에서 드디어 해방되었으며, 이스라엘 선적과 이스라엘행 선박의 티란 해협 통과가 확보되었고, 1949년 이래
이스라엘과 요르단 간에 계속 양분되었던 예루살렘이 재통합되었다.
◐
전쟁에서 전쟁으로
1967년 여름 이스라엘 외교의 지향점은 그 지역 내 모든 국가들의 주권, 영토의 통합, 정치적 독립, 군사적 위협과
행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국경과 안전 속에서 각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권리에 대한 상호 인정을 촉구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42호를
기초로 자국의 군사적 성과를 항구적인 평화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랍의 입장은 1967년 8월 하르툼 정상회담에서 공식화된,
'이스라엘과의 비평화, 비협상, 비인정'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1968년 9월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의 둑을 따라 산발적이고 정적인 군사 행동으로
소모전을 개시하였으며 양측에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그 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를 따라 새로 그어진 휴전선을 수락한 1979년
여름에야 적대 행위는 막을 내렸다.
◐
1973년 욤키푸르 전쟁
3년간 지속된 평화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합동 기습 공격을 가했던 욤키푸르(유태력 속죄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건넜으며,
시리아 군대는 골란고원을 돌파하였다. 이후 3주 동안에 이스라엘 방위군은 전제를 역전시켜 침략자들을 격퇴시켰으며, 수에즈 운하를 넘어 이집트에
진격하였고,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20마일 이내까지 육박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이스라엘과 이집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부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전쟁동안 점령했던 일부 영토에서 철수하였다.
◐
갈릴리를 위한 1982년 평화 작전
1948년 독립 전쟁 이후 설정된 레바논과의 휴전선은 결코 어느 쪽에 의해서도 도전 받지 않았었다. 그러나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강력한 PLO거점으로부터 반복되는 총격, 로켓 공격, 그리고 테러 행위에 직면하여 이스라엘 방위군은 1982년 6월 국경을 넘어 레바논으로
진입하였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작전'은 1970년 PLO에 대한 요르단의 추방 이래 남부 레바논에 자리잡은 PLO조직과 하부 군사 조직을 그
지역으로부터 제거시켰다. 작전은 수천 명의 이스라엘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하고 끊임없이 위험에 처했던 10년간을 종결시켰다. 그러나 레바논
정부의 무기력으로 이스라엘은 그 지역에 강력하게 자리를 잡아야 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85년 초까지 대부분의 이스라엘
방위군 부대들이 안전지대로 설정된 이스라엘 국경의 인접지역에 제한된 수의 군대만을 남겨 놓은 채 레바논에서 철수하였다.
◐
테러리즘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은 이스라엘의 독립 이전부터 그리고 독립이후에도 수십년간 계속되어왔다. 1967년
6일 전쟁일 일어나기전 20여년 동안 수천건의 테러리스트 공격으로 이스라엘 시민들을 살해되거나 부상을 당해왔다. 1964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설립되면서 이 테러리즘은 전면으로 대두되었다.
1970년대와 80년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산하 여러 테러
조직들이 이스라엘 국내외에서 수많은 테러행위를 감행했다. 가장 악명높은 테러행위중 하나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 살해
사건이었다. 1993년 테러리즘을 근절하겠다는 팔레스타인들의 약속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의 평화협상의 근간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2000년 9월 이후 더욱더 강화되어 수백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천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
전쟁에서 평화로
1973년
10월 전쟁의 비용은 이스라엘의 1년간 GNP(국민 총생산)에 해당되었으나 1974년 하반기까지 경제는
1968~1973년의 경제 회복기에 기록했던 성장과 산업 팽창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외국의 투자가 크게 늘었으며, 1975년 이스라엘이 유럽
공동 시자의 준회원이 됨에 따라 이스라엘 상품에 대해 새로운 잠재 시장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이 급증하여 이스라엘의 건국 30주년 즈음에는
방문객 수가 1백만 명을 넘어섰다.
1977년 의회 선거 결과 거의 30년에 걸친 노동당의 집권에 종지부를 찍고 자유주의적이고 중도적인 정당들이
제휴한 리쿠드 연합이 집권하에 되었다. 신임 수상 메나헴 베긴은 그 지역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하여 일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전임 수상들의
헌신을 되풀이 강조하고, 아랍 지도자들이 협상에 임해 줄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평화 호소와 이에 대한 아랍의 끊임없는 거부라는
순환고리는 1977년 11월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으로 깨어졌다. 이집트는 1948년 이후 처음으로 내민 이스라엘의 손을
평화롭게 잡은 첫번째 아랍 국가가 되었다.
1978년 9월 캠프 데이비드네서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초청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정상
회담이 열렸는데, 복잡한 협상과정에서 타결책이 제시되었다. 평화를 위한 기본 틀이 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은 이집트와 이스라엘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과 다른 인접 아랍 국가들 간의 평화를 위한 토대의 역할도 하였다. 게다가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래로 통치하고 있는 유다,
사마리아, 가자 지구와 그 지역 거주민의 지위에 대한 협상을 위한 상세한 제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1979년 3월 26일
워싱턴의 백악관 잔디밭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사다트 대통령과 베긴 수상은 양국간의 30년에 걸친 전쟁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공적으로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이스라엘은 평화로운 10년간에 대한 희망과, 다른 인접 아랍국가 들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 1980년 대를 맞이 하였다.
1981년, 세계는 양국간에 강화된 협력을 토대로 마련한 미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 각서에 조인하였고, 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수주일 전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하여 이라크 원자로가 파괴되었으며, 그에 따른 핵박멸 위협이 제거 되었다. 이 시기의 10년 동안에 1973년
석유 위기 당시 아랍의 강력한 압력에 따라 이스라엘과의 유대 관계를 단절했던 일부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재수립 했을
뿐만 아니라 상호 경제적 관계와 과학적, 기술적인 원조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스라엘- 이집트 평화 조약의 조항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전의 휴전선 및 두 나라가 인정한 국경선에 대한 휴전 조약을 교환하면서 1982년 4월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을 완료했다.
◐
이스라엘 국내 시련
1980년과 90년대 이스라엘은 백만명여명의 새로운 이민자들을 흡수했다. 그들은 주로 구소련, 동유럽 그리고
이디오피아에서 이주했다. 너무나 많은 소비자들과 수많은 숙련 및 비숙련 노동자들의 유입은 경제
팽창을 가속화했다.
1984년 의회 선거에서 리쿠드 당(우파/)중립과 노동당(좌파/중립)이라는 양대 정치권으로 구성된 연립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에는 리쿠드 당이 주도하는 연립정권이 들어섰고 1992년에는 노동당과 군소 좌파 정당들의 연립 정부가 탄생했다.
1995년 이짝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살해된 후 1996년 새로운 정부를 위한 선거가 이루어졌다. 총리 직선제로 벤야민 네탄야후가 총리직에
당선되었고 리쿠드 당이 이끄는 연립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3년도 채 안돼 그의 정권은 퇴진하였다. 1999년 단일 이스라엘 정당
대표(좌파/중립)인 에후드 바라크가 총리로 선출되었고 연립 내각을 구성했으나 2000년 12월 사임했다. 2001년 2월 리쿠드당 총수 아리엘
사론이 총리로 선출되었고 주요 정당들을 포함하는 연합내각을 구성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당시 내각을 구성했던 각 정당의 신념에 따라
평화를 달성하고, 경제를 개발하고 이민자를 흡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경주해왔다.
*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
암살
1995년 11월 5일 어느 한 극우파 청년에 의해 라 빈 총리가 암살되어 이스라엘 온 전체가 깊은 슬픔에 빠지게 되었다. 고
이츠크 라빈 총리는 사병에서 총리까지 올라 이스라엘을 전쟁터에서 평화의 길목으로 이끌었던 인물이다.
◐
중동의 평화를 향하여
이스라엘과 이집트간 평화조약 체결(1979)
이후로, 중동평화를 진전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이 기울여져 그 결실로
미국과 소련의 후원으로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타인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1991년에 마드리드 평화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 회담
후에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협상이 마련되었다.
◐
양자간 협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 이스라엘과 PLO
간의 수개월간 오슬로 막후접촉 이후에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서의 자치정부수립에 대한 내용을 개설한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이 마련되었다. 이것은 PLO 는 테러행위를 중단하고 PLO 헌장에 이스라엘의 주권과
존재를 부정하는 적대조항을 삭제할 것 등을 약속하고 이스라엘 땅에서 뿌리 박은 두 민족간의 오랜 갈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풀어나갈 것 등을
명시한 문서인데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한차례 서신 교환후 1993년 9월 서명하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를 팔레스타인 민족의 대표로 인정을
하였다.
원칙선언은 5년간의 팔레스타인 잠정 자치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협상의 여러 단계를 위한 기본틀에 관해 상호가 동의한
일반 원칙들을 포함한다. 팔레스타인의 자치는 4단계로 이행되었다. 첫 단계는 1994년 5월 가자지구와 여리고에 팔레스타인 자치권이
주어졌다. 같은 해 8월,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관광, 조세, 사회복지, 문화, 보건분야에 팔레스타인에게 관할권을 이양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명한 원칙선언과 다른 합의문들은 드디어 1995년 9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자치합의안으로 체결되었다.
이
합의안은 선거로 선출된 팔레스타인 자치 기구인 팔레스타인 평의회(1996년 1월 선출됨)에 의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설립한다는 내용과 요르단강
서안 지역에 이스라엘 방위군을 재배치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이 합의안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를 관장하는 매커니즘으로 팔레스타인의
최종 지위 합의를 이끌게 될 것이다. 잠정합의안에 따라 요르단강 서안은 세 종류의 지역으로 나뉜다.
지역 A – 서안의 주요
도시들을 포함. 이 지역내 군사 및 공공질서 관할권과 시민 행정관련 모든 권한 및 책임을 팔레스타인 평의회로 이양.(헤브론의 도시는 잠정합의안에
명시된 특별 조항의 대상임. 헤브론내 이스라엘 방위군 재배치에 관한 조약은 1997년 1월 체결됨)
지역 B – 요르단강 서안의
작은 시와 마을들 포함. 팔레스타인 평의회는 지역 A와 같이 시민행정과 공공질서의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시민들의 안전과 테러
퇴치에 결정적인 안보를 책임진다.
지역 C – 모든 이스라엘 정착촌과 이스라엘에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 그리고 인구가 거의
거주하지 않는 지역. 지역(계획, 지역분할, 고고학 등)과 관계된 시민행정책임 뿐 아니라 안보와 공공질서까지 이스라엘이 책임진다. 팔레스타인
평의회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위의 관할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민행정 부문에 책임이 있다.
향후 이스라엘군 재배치 단계의 실행을
위한 일정표는 잠정 자치안에서 세부적으로 기술한 바와 같이 양측의 몇번의 회담에서 개정되었다. 특히 주목할만한 회담은 1998년 10월 열린
와이 리버 협정이었다. 이 합의된 개정안에 따라 이스라엘은 200년 3월까지 재배치 절차의 1, 2단계를 마무리했다. 재배치 절차의 3,
4단계는
여전히 협상중에 있다. 재배치의 결과로 요르단강 서안의 18%에 이르는 지역이 지역 A로 21%가 지역 B로 지정되어 요르단강 서안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의 98%가 팔레스타인 자치아래 활동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간 팔레스타인 영구 지위의 성격을
결정하기 위한 최종 지위 협상은 일정대로 1996년 5월 시작되었다. 1996년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의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자행된
자살 폭탄테러는 평화협상에 대한 이스라엘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이후 회담은 3년간 중지되었고 1999년 9월 샤를 엘 쉐이크(Sharam
el-Sheikh Memorandum) 평화협정 직후에 재개되었다. 이 협정에서 다루어진 사안들은 피난민, 정착촌, 안보, 국경, 여루살렘 등의
문제이다. 클린터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이스라엘 바라크 총리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는 2000년 7월 캠프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갖었다. 이 회담은 별다른 합의에 이르지 못한채 막을 내렸다. 이 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삼자 성명은 향후 협상을 위해 합의된 원칙들을 포함하고
있다.
2000년 9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차별 폭력과 테러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양쪽 모두에 수많은 사상자를 가져왔다.
폭력적인 대립을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쇄신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지원을 받아 계속 증가하는 팔레스타인들의 테러에 의해
좌절되었다. 이스라엘은 2002년 6월 24일 팔레스타인의 테러 중단을 위한 부시 미 대통령의 연설에서 제시된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제안은
모든 사안과 평화를 위한 최종 해결안을 포함한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 마드리드 협정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평화회담은 미국 고위급 관료가 참가한 가운데 양국의 대사급 회담으로 워싱턴에서 개최되었다.
1995년 12월 ,1996년 1월 두
차례의 회담이 안보와 다른 주요 주제들로 진행되었다. 매우 상세하고 포괄적인 범위로 앞으로 검토와 양국 협상에 고려될 중요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삼년간 중단된 후 이스라엘과 시리아간 협상은 2000년 1월 미국의 쉐퍼드 타운에서 재개되었다. 그러나 이 협상을 돌파구를 찾지 못했고
2000년 3월 제네바에서 열린 클린턴 미대통령과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과의 회담도 협상을 재개시키지 못한채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현재 양측간
진행되고 있는 협상은 없다.
이스라엘과 레바논 : 2000년 5월 23일 이스라엘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425조에 따라
남부 레바논 지역의 군사지역에 모든 이스라엘 군대의 철수를 완료했다. 그러나 레바논은 아직도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 425조를 완전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
◐
다자간 협상
다자간 협상은 중동의 지역적인 문제해결 모색을 목표로 하는
중동평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중동 국가들간 관계정상화를 이룰 수 있는 신뢰구축방안으로 기여하고 있다.
1992년 1월의
모스크바 다자간 중동 회의는 36 국제단체와 국가들이 대표단을 파견하여 5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환경, 무기 감축, 지역 안보, 수자원,
경제개발등의 공동관심사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실무그룹들은 중동내 여러 장소에서 대때로 회담을 개최한다.
운영위원회는 미국과
러시아의 주재하에 주요 대표단들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있고 다자간 회담을 조정한다. 가장 최근에 열린 회담은 2000년 1월 31일에서 2월
1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팔레스타인의 폭력사태 이후 다자간 회담의 대부분의 활동은
동결되었다.
◐
고고학
이스라엘의 고고학은 수 천년 동안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귀중한 연결고리로
약 3,500여 군데의 유적지가 있다. 메기도(이즈르엘 계곡)의 솔로몬 시대의 마구간, 다윗의 도시(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시대 가옥들,
마사다의 세례장, 무수한 유태교 회당, 아직도 읽을 수 있는 헤브루어 원고로서 이사야서의 최초의 사본을 포함한 사해 문서 등, 수많은
발굴물들이 이스라엘 땅과 유태 민족의 오랜 관계를 입증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발굴은 그 땅에 자취를 남겨 놓은 다른 문명의 흔적들을
밝혀냈다. 학자와 방문객을 위하여 모든 발견물들이 기록되고, 역사적 유적들은 조심스럽게 표시되어 보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