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장미의 고대도시 페트라(Petra)

 

붉은 장미의 고대도시 페트라(Petra)

 고대 나바트 왕국의 수도 페트라(Petra)

 요르단 남부에 있는 AD 1세기경에 세워진 고대 나바트 왕국(Nabatean Kingdom, BC300년~AD105년)의 수도 '페트라'는 사막에 있는 좁은 협곡 사이의 바위를 깎아 만든 건축물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은 당연 헬레니즘 양식으로 산을 깎아 만든 고대 나바트 왕국의 신전인 '카즈네(Khazneh)'이다.

 

 성경 지명 "셀라" 에돔족의 도시.

 이사악의 아들 에사오가 호리족을 몰아내고 정착한 도시.

 모세 출애굽 당시 이곳에 도착. 

 

 이 도시를 통과하고자하나 거절당해 사막대으로 우회함.

 모세가 바위를 쳐서 솟아나게 한 므리바 우물이 있음.

 페트라 하룬산(Jabal Haroun, 1,350m) 정상의 모세의 형사제 "아론(Aaron)"의 무덤이 있음.

 BC 4C부터는 아라비아에서 온 나바태족이 이 도시를 장악하여 사막대상들의 무역을 관할.

 모래로 만들어진 붉은색의 바위 도시로 현재 수많은 건축물들이 남아있음.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서남쪽 150km 지점에 페트라의 유적이 있다.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영국의 시인 존 버곤 신부는 페트라를 묘사하였듯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갑자기 웅대한 건물의 정면이 나타난다.

 

 궁전 아니면 신전으로 생각되는 헬레니즘 양식의 건물 정면은 커다란 암벽을 파서 만든 것으로 정면에 있는 문으로 들어 서면 복도가 나타나고, 이 복도를 따라가면 암벽을 파서 만든 방들이 나타난다.

 페트라 시는 대부분의 건물들을 이와 같이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결코 좁지 않은 지역에 펼쳐진 이곳에는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 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천연의 요새로 사방이 절벽으로 방어된 이 도시는 마치 지하에 구축된 지하 왕국이 연상될 만큼 신비롭다.

 '나바티안'이라고 불리우는 민족에 의해 건설된 이 도시는 실크로드의 길목으로 수많은 대상들이 들러가는 상업의 요충지로 한때 크고 번창했었으나, 대상 무역의 쇠퇴와 함께 폐허가 되어 여러 세기 동안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옛 기록에 나오고 있지만 소멸한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이 이 도시의 위치도 잊혀졌다.

 그러던 중 1812년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라는 스위스의 한 젊은 탐험가가 현지인 안내자의 안내를 받아 이 웅장한 유적을 발견한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유대 민족을 이끌고, 당시로는 최강의 파라오의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의 긴 여행 중, 당시 에돔 왕국의 수도이던 이곳의 통행 허가를 못 받아, 멀리 우회하여 느보산으로 갔다는 전설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모세가 지나 갔다고 하여, '무사와디(모세의 계곡)'라고 불리우는 곳과 '모세의 샘'이라고 불리우는 우물이 여러 곳에 있어 현대의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현대의 수수께끼 유적의 하나로 남아있는 이곳은, 이집트의 피라밋과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이며, 최근에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 졌다.

 

 이곳의 고대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것들이며, 유럽 문명의 골간을 이룬 성서의 무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잊혀진 지구상의 변방에 불과한 곳이 되어 버린 곳이며, 황량한 광야에는 남루한 베두윈들이 염소떼를 한가히 몰고있는, 마치 고대세계에서 시계가 멈춰 버린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곳이다.

 

페트라(Petra) : 셀라(Sela)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다. 이곳은 BC 1400~BC 1200의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역에 자리한 곳으로 구약에서 에돔의 셀라(Sela)로 언급되고 있다.

 '셀라(Sela)'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 지역은 또한 '바위에 거하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리 족속'의 거주지였으며, 사사기 1:36에서는 '아그랍빔 비탈의 바위'로 언급된다. '바위'라 불리우는 이 도시의 이름은 시실리의 디오도루스에 의해 최초로 언급되는데, 그는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312년 안티고누스 1세의 공격을 받고 그들의 생명과 음식과 가재들을 이 도시에 숨겨놓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구약의 셀라와 이곳을 같은 장소로 본 사람은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였으며,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다섯 왕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때 처형당한 미디안의 왕 레켐을 페트라의 왕과 동일인으로 보았다.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이루어진 발굴 작업으로 이 지역에 적어도 BC 7000년 경에 문명이 존재했었음이 드러났다. 당시에 농경 문화를 간직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시기부터 에돔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BC 1200년 사이의 역사적인 정보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이후 형성된 에돔 왕국은 셀라를 수도로 하고 있었으며, 이 에돔 왕국의 실체는 성경을 통하여 추정해 볼 뿐이다.

 

 무엇보다도 페트라는 나바테안들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로 인해 그 명성을 얻었다. 유목 생활을 하던 서부 아라비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BC 6세기의 일이다.

 

 이들은 BC 580년경 에돔족과 혼합되었으며 기원전 6세기에서 주후 106년 경까지 페트라를 중심으로 거주하면서 이곳을 나바테 문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나바테안들은 왕의 대로를 장악하고 이 지역의 무역과 상권을 주도하였으며, 페트라를 교역의 중심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주후 106년 로마에 점령당하기까지 문명의 절정을 이룩하였다.

 

 기원 후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점령당하였고, 131년에는 하드리안 황제가 페트라를 방문하고 이곳 이름을 '하드리안의 페트라'라 불렀다. 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사막에 새로운 상업로가 개척되면서 페트라의 중심적 역할은 점차 쇠퇴하였으며, 후기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의 상업적 역할보다는 트랜스 요르단과 남부 시리아의 종교적 중심 도시로 자리하게 된다. 주후 4세기에는 콘스탄틴에 의하여 기독교화되었고, 언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주후 6세기에 있었던 큰 지진으로 인하여 함몰되어 폐허화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아랍 이슬람이 요르단을 점령한 7세기에서 1812년까지 이곳은 잊혀진 도시가 되었다. 이곳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이다. 1812년 젊은 유럽 탐험가인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 하르트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로 가는 그의 행로 중 이곳에 엄청난 유적들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해 8월 아랍인으로 위장한 부르크하르트가 우여곡절 끝에 페트라를 찾아내었고, 그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 유럽인들은 비로소 페트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예루살렘 성서 고고학 연구소의 도미니칸 수도사가 발굴을 시작하면서 1896년에 최초의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그후 1897~1898년에 걸쳐 독일의 부른노우와 도마츠브스키에 의해 무덤과 건물들이 발굴되었으며, 다른 이들에 의해 로마시대의 나바테안 도시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페트라의 본격적인 발굴은 1929년 콘웨이와 호스필드에 의해 이루어 졌고, 그후 1982년에 이르기까지 성 입구의 문을 비롯해 로마 극장과 여러 유적들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나바테안들은 불후의 문명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역사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아람(Aramaic)문자를 사용하였으며, 지금까지 약 4천점에 달하는 나바테안들의 문자 기록이 수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지극히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역사와 관계된 내용은 거의 없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나바테안들이 문자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역사와 문학, 사상과 종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고대 문명이 앉고 있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나바테안들은 돌을 깎아 웅장한 건물들을 만들었다. 이곳 페트라에는 암벽을 깎아서 만들어 놓은 거대한 암벽 도시의 유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은 아주 대단하다. 이곳에 나타나는 건축 양식은 초기의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나바테안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시작해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건축양식을 거쳐 후기의 세련되고 건축미가 넘치는 그리스, 로마식 건축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건축양식의 변천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손은 거칠고 투박한 석공의 손만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의 문양은 놀라울 정도로 세련되었고, 토기의 두께는 2㎜가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해 '계란껍질 토기(egg-shell pottery)'라는 이름이 붙었을 정도다.

 

✜ 시크(Siq)

 하늘을 가릴 듯한 높은 암석들 사이로, 미로와 같은 균열 부분을 따라 2km 정도를 걸어 들어간다. 이 암벽 사이의 좁은 통로를 아랍어로 협곡이라는 의미를 가진 '시크(Siq)'라고 부른다. 이 시크를 따라가면서도 고대 수로가 벽면을 따라서 이어진다.

 

알 카즈네(Al-Khazneh, The Treasury, 보고)

 알 카즈네(Al-Khazneh)는 페트라 유적 중 최고로 인상적이고 웅대한 2층의 건물이다. 25m 높이의 고린도식 기둥 6개가 정면을 받치고 서 있는데 그리스식 건축양식의 건물로 기원전 1세기 경 나바네안 왕의 무덤으로 만들어졌다 한다. '카즈네(Khazneh)'란 베두인의 말로 '보물'이란 뜻인데 건물 꼭대기에 항아리 모양의 단지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곳에 셀 수 없는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전설에서 지금의 보물고라 불리게 되었다.

 건물외관의 넓이는 30m, 높이는 43m에 달하는데 1, 2층 정면에 걸쳐 나바테안의 신들이 조각되어 있다. 암벽을 파고 다듬어 만든 건물로 매우 견고하게 지어졌다.

 중앙 출입구 좌우의 벽면에는 그리스의 이시스신을 상징하는 식물이 조각되어 있고, 2층에 장식된 6개의 고린도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여인 모양의 양각이 새겨져 있다.

 

알 데이르(Al Deir, 수도원)

 '수도원'이라고 부르는 건물은 페트라의 유적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전면의 폭이 50m, 높이가 45m에 이른다. 수도원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 몇 개가 새겨져 있는데서 유래했다. 나바테안들이 이 건물을 세웠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서기 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 건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페트라 건물들의 내부는 의외로 단조롭다. 돌을 파내 규모가 큰 직사각형 방들을 만들어놓았다. 건물의 내부 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벽화가 없다.

 그러나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색깔과 기하학적 또는 물결 무늬들이 방 전체를 휘감고 있어 어떤 궁중 벽화나 장식보다도 현란하고 황홀하다.

 

✜ 바로의 궁전

 이집트의 나바테 문명에 대한 영향은 이집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인 거대한 탑문에서 볼 수 있다. 페트라의 한복판에 있는 바로의 궁전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이곳에 시집온 그의 딸을 위하여 지은것으로 생각된다. 1927년에 이곳에서 있었던 지진으로 일부가 파괴되었다.

 

✜ 로마 원형 극(Petra Amphitheater)

 바위산 자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나바테안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우직한 추진력이 마음껏 발휘된 작품이다. 약 3,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너비가 40m에 이르는 로마 원형 극장은 2세기 경의 유적으로, 33층의 계단식 의자가 모두 바위를 그대로 깎아 만들었다. 이 극장은 각종 예술 행사나 오락적 행사를 위한 기능보다는 하나의 제의적 기능을 갖춘 장소로 여겨지며, 왕의 장례식은 물론 각종 회의 및 종교 의식을 치룬 것으로 여겨진다.

 

✜ 희생 제물의 언덕

 원형 극장 뒷편 언덕으로 나바테안들이 희생 제사를 드렸던 신당이다.

 

✜ 왕족 무덤 지역  

 

✜ 열주로

 기둥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거리로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 두 사자 신전

 험한 산허리에 위치한 이 신전은 출입구가 병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쪽 벽면에 사자 형상이 새겨져 있어 두 사자의 신전으로 불리운다.

 

 

❋ 페트라 코스

 요르단의 보물로 불리는 페트라는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있다. 이집트 대피라미드와 함께 황량한 사막에서 피어난 찬란한 문명으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현재도 발굴이 진행 중이며, 전체 유적의 1/4만이 발굴된 정도이다.

 유적지 입구에서 서쪽 끝 알데이르까지의 거리는 5km에 불과하지만 페트라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하루로는 좀 짧다. 최소한 이틀 티켓을 구입해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기를 권한다.

 

❋ 페트라 찾아가는 길

 한국에서 요르단까지는 직항편이 없으므로 카타르 도하나 두바이, 인도 델리를 경유해야 한다.

 요드단 수도 암만에서 페트라 관문 도시 와디무사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 페트라 여행하기 좋을 때

 가장 좋은 시기는 10월 중순에서 11월 말이다.

 5월부터 9월까지는 가장 더운 시기이므로 피하는 것이 좋다.

 

❋ 페트라 여행 Tip

 걷기 편한 신발을 신고 물과 간식을 준비해 가자.

 단체관광 버스들은 보통 오전 9시 전후로 나타나므로 페트라를 조용히 즐기고 싶다면 일찍 서두르자.

 시크를 비롯해 페트라의 주요 관광지들은 침묵 속에서 그 진정한 아름다움 발한다. 알 카즈네(Al-Khazneh)는 이른 아침이 가장 아름답고, 알 데이르(Al Deir, 수도원)는 늦은 오후가 가장 좋다.

 

 

 

아론(Aaron)의 무덤(The Shrine of Aaron)

  예언자 아론(Aaron, Harun bin Imran(하룬 빈 임란))은 예언자 모세와 미리암의 형이며, 그의 손자 야곱을 통해 예언자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모세는 사자이자 선지자였으나 아론은 선지자일 뿐이었다. 그는 파라오에게 임무를 수행하고 이스라엘 지파를 이집트에서 인도하는 일에 그의 형제와 함께 참여했다. 전설에 따르면 아론은 연설을 더듬는 특징이 있는 모세의 목소리 역할을 자주 했다고 한다.

 아론은 모세에 의해 페트라 폐허 근처에 있는 자발 하룬산(Jabal Haroun, 1,350m) 꼭대기에 묻혔다. 자발은 아랍어로 "산", 하룬은 "아론"이다. 성경에는 호르산으로 등장한다.

 엘 바라(El-Barra)라고도 불리는 이 산은 1,350m로 페트라 지역에서 가장 높다. 그것은 더 높은 봉우리의 원뿔에 자리 잡은 아론(Aaron)의 무덤과 함께 쌍둥이 봉우리를 가지고 있다.

 종교적인 건물은 기독교인들이 이 산을 아론의 매장지와 연관짓기 시작한 비잔틴 시대 이후로 정점에 서 있었다.

 

 7세기에 그리스 기독교인들이 이 장소를 관리했으며, 지역 전설에 따르면 10세의 예언자 모하메드가 삼촌과 함께 이 신전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슬람 순례자들은 선지자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종종 녹색과 흰색 천으로 신전을 덮는다.

 1459년의 현재 형태를 감안할 때 이 신전는 거의 열리지 않는 작은 돔형 모스크이다. 이 신전은 최근까지 베두인족이 질투하는 마음으로 지키고 있었으며 비무슬림 여행자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 금지되었다.

 

* 페트라 지도에는 메인 트레일(입구~시크~알카즈네~Qasr al-Bint) 8km(3.5~4h) easy + 자발하룬 트레일(Qasr al-Bint~아론의 무덤) 7.5km(5~6h) hard, 총 8.5~10h 라고 안내가 되어있고, 입구에 있는 표지판에는 Qasr al Bint~아론의 무덤까지 8h으로 안내가 되어있다.

 

 

* 아론(Aaron, BC 1574~BC 1451)

 BC1574년에 출생. 부모는 아므람과 요게벳 누이는 미리암 동생은 모세, 아내는 엘리세바, 아들은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등 4형제이다.(출 6:20-23). 83세에 여호와의 명령으로 그 동생 모세의 대변인이 되어 모세와 같이 애굽왕 바로에게 10여 차례를 왕래하여 10재앙을 내리게 함으로 동족 이스라엘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출 7:10,20, 8:8,25, 9:10, 27, 10:3, 6, 12:31).

 

 아론은 고상하다는 뜻이다. 모세의 형제요 아므람과 요게벳의 장자요 모세의 형이었다. 아론에게는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 이라말 등 네 아들이 있었다. 아론은 도량이 넓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자기 개인보다 공적인 사역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일꾼이었다. 또한 합리적이고 설득력있게 말을 잘하므로 모세의 대언자이기도 했다. 아론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구출 사역에 모세만큼이나 공헌한 사람이다.

 

 더욱이 연하의 자기 동생을 지도자로 섬기는데 불평하지 않았으며 협력 관계가 충성스러웠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싸울 때에도 아론과 훌이 모세의 팔을 들어 기도를 돕는데 조력하였고, 모세의 사역을 보좌하는데 성실하였다. 그러나 출애굽기 32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올 때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일은 아주 부끄러운 실수였다.

 

 아론은 최초의 제사장으로 제사직과 하나님의 일을 대언하는 데 충성하였다. 또한 아론의 두번째 실수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할 때 모세와 함께 반석을 두번치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민20:1-3) 아론은 123세에 세상을 떠나고, 엘르아살이 그 뒤를 이어 제사장이 되었다.

 

❋ 교훈과 적용

 첫째, 형으로서 자기 동생을 그 측근에서 백성의 지도자로 섬긴것은 의지적인 관용이요 영적인 질서에 대한 순종이었다.

 둘째,아론은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었다. 금송아지와 미리암과의 실수가 귀가 여린데 있었다.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아론은 레위의 후손인 아므람과 요게벳의 아들로서 동생 모세보다 3년 먼저 세상에 태어났다(BC 1574). 그는 유다 족속 암미나답의 딸이자 나손의 누이인 엘리세바를 아내로 맞아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등 네 아들을 낳았다.(출 6:23 민 3:2).

 

 아론은 동생 모세와는 달리 말 잘하는 능변가였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하고 '출애굽의 사명'을 사양했을 때 하나님께서 "레위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뇨 그의 말 잘함을 내가 아노라."( 출 4:14)고 말씀하신 것을 보아 대언의 은사를 받은 자였음이 분명한 듯하다.

 

 이처럼 아론은 출애굽을 통한 구원사의 진행 과정에 있어서 예언자와 제사장의 직책을 담당한 자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언자를 히브리어로 '나브' 혹은 '나비'라 한다. 그 단어의 뜻은 '입' 혹은 '대언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대언, 대필하는 사람이며 제사장은 하나 님의 주권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의 죄를 속량해 주고 그들을 죄에서 이끌어내는 자이다.

 

 이렇게 볼 때 출애굽의 역사는 모세의 주역과 함께 아론의 대언과 지팡이의 협력이 있었기에 완수되었다고 단정을 내릴 수 있다. 특히 바로왕 앞에서의 아론의 대언과 그리고 그의 지팡이를 통한 열가지 재앙, 홍해의 기적, 반석에서 샘물을 나게한 기적은 출애굽의 성패를 가름하는 사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론도 역시 인간이었기에 하나님의 구원사 진행과정에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➀ 동생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간 후 체류기간이 너무 길자 조급한 백성들은 아론에게 자기들을 인도할 신상을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아론은 금신 상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경배케 했다.

➁ 가데스에서 바위에 명하여 샘물이 나게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혈기를 앞세워 두 번 바위를 친 사건, 이것 때문에 그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광야에서 끝맺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 따라잡기

인디아나 존스 - 최후의 성전(Indiana Jones And The Last Crusade)

모험, 액션, 판타지

개봉: 1989년 7월 22일

상영시간: 127분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주연: 해리슨 포드 (Harrison Ford) - 인디아나 존스 역

        숀 코너리 (Thomas Sean Connery) - 헨리 존스 역

        덴홀름 엘리엇 (Denholm Elliott) - 마커스 브로디 박사 역

        앨리슨 두디 (Alison Doody) - 엘사 슈나이더 박사 역

        존 라이스 데이비스 (John Rhys Davies) - 살라 역

 

 1912년 유타주. 어려서부터 정의감과 모험심이 가득 찬 '인디'(Young Indy: 리버 피닉스 분)는 13세 보이스카웃 시절(1912년), 도굴꾼이 16세기경에 제작된 '코로나도(Coronado) 십자가'를 훔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막으려 하나 아버지 헨리 박사(Professor Henry Jones: 숀 코넬리 분)의 무관심으로 결국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훗날 사용하게 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중절모와 채찍을 얻게 된다.

 

 세월이 흘러 고고학자로 성장한 인디(Indiana Jones: 해리슨 포드 분)는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 <레이더스>의 성궤 모험으로부터 2년 후인 1938년 포르투칼 해안(Portuguese Coast)의 풍랑이 요란한 어느 배 위에서 다시 그 십자가를 찾아내는 집념을 보인다.

 

 십자가를 되찾은 박사는 자신이 재직 중인 바네트 대학으로 돌아오는데 몇 달만을 비워뒀던 대학 연구실엔 오래 전에 도착한 소포가 있었다. 소포 중에는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을 피해 겨우 창문으로 빠져나온 존슨 박사는 윌터 도노반(Walter Donovan: 줄리안 글로버 분)이라는 사람을 만난다. 도노반은 자신이 앙카라 북쪽에서 발견한 반쪽짜리 신의 석판의 탁본을 보여주며 헨리 박사의 일기장을 참고로 나머지 반쪽 석판과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다는 술잔 '성배(Holy Grail)'를 찾아 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 헨리 존스 박사도 역시 저명한 고고학자이다. 그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성배의 위치에 대한 단서를 잡아서 이것을 찾던 중에 행방불명이 되었었다. 인디아나 존스는 아버지 헨리 존스 박사가 나치에게 납치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니스로 달려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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