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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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Havana)  ∥  바라데로(Varadero) ∥ 산티아고(Santiago)

 

 

 쿠바 북쪽에 있는 미국이 별 짓을 다해도 아직도 쿠바에는 햇빛이 비친다. 쿠바는 카리브해에서 가장 크고 덜 상업화 된 섬이며 세계에서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의 보루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혁명의 정원에서 모든 것이 장미 빛인 것은 아니지만(많은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탈출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쿠바의 정치적인 고립은 관광객이 지나치게 들끓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쿠바인들은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심지어는 이러한 봉쇄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인마저 따뜻하게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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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식민지 풍의 건축물이 길거리에 늘어서 있는 것은 보기 힘들지만 쿠바는 커다란 도시들까지도 상당히 편안한 분위기이다. 가장 요란법석을 떠는 것은 열정적인 차차차의 절정에 다다를 때이며 가장 시끄러워지는 것은 커다란 장식을 달아놓은 미국산 자동차가 빵빵거리며 질주한 다음이다. 이보다도 조용한 것을 원한다면 하이킹이나 수영, 동굴 탐험, 또는 야자수 그늘 아래서 좋은 담배를 피우며 느긋함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쿠바의 시골 오지나 해변이 가장 완벽하게 썰렁한 지역이 될 것이다.

 

 

 쿠바는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이며, 정식 국명은 쿠바 공화국(Republic of Cuba)이다. 미국과 남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위치하여 '아메리카 대륙의 열쇠'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대서양과 카리브 해를 접하고 있어, '카리브 해의 진주'라고도 불린다.

 

 지형은 크게 산악 지대인 동부 지역, 땅이 완만하여 농사가 발달한 중부 지역, 수도 아바나와 특별 행정 구역인 후벤투드 섬이 있는 서부 지역으로 나뉜다.

 

 총인구는 약 1,200만 명(2017)으로 그중 65.1%가 스페인계 백인이고, 24.8%가 메스티소(인디언 후손과 유럽인의 혼혈)나 물라토(중남미 백인과 흑인의 혼혈) 같은 혼혈인, 10.1%가 흑인(2002년 기준)이다.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다른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처럼 스페인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한다.

 

 열대성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25.5℃이며, 기온의 변화는 적지만 5월~10월은 우기, 11월~4월은 건기로 강수량의 구분이 뚜렷하여 열대 식물과 야생 동물이 살기 좋은 환경이다. 카리브 해와 마주한 남쪽 지역은 무덥고 햇볕이 강하며, 대서양을 바라보는 북쪽 지역은 비교적 서늘하고 날씨 변화도 심한 편이다.

 

 

개 요

o 수 도 : 아바나(Havana, 인구 약 300만)

o 면 적 : 110,922㎢(세계 106위. 한반도의 1/2)

o 인 구 : 약 1,120만 명(2016년)

o 화 폐 : 쿠바 페소 (CUP)

o 인 종 : 혼혈인(메스티죠, 물라토) 51%, 백인 37%, 흑인 11%

o 언 어 : 에스파냐어

o 종 교 : 카톨릭 85%

o 기 후 : 아열대 기후(연평균 기온 25℃, 연평균 강우량 1,375㎜)

 

 

자연환경

 쿠바섬은 동서길이가 약 1,300km, 남북길이 약 70∼200km의 기다란 섬으로, 국토의 4분의 1은 산지이고 나머지 지역에는 대체로 평야와 구릉지가 형성되었으며 해안선은 굴곡이 심하다.

 주요 산지로는 남쪽 해안의 마에스트라 산맥(Sierra Maestra), 북서부의 오르하노스산맥, 중앙부의 트리니다드산지 등이다.

 쿠바 최고봉은 마에스트라 산맥(Sierra Maestra)에 있는 해발 1,972m의 '레알델투르키노 봉'이다.

 규모가 작은 중부산계는 여러 낮은 산맥과 알투라스라고 하는 구릉지를 이루며, 서부산계인 과니과니코 산맥은 기복이 심한 산악지대와 카르스트 지형을 나타내는 구릉지로 이루어졌다. 나머지 섬의 3/4은 넓은 평야와 저지를 이루고 남동부의 카우토 강은 전장 370km로 쿠바에서 가장 긴 강이며 주요한 내륙수로이다.

 

 기후는 전형적인 열대성 사바나기후로 여름에 동풍·남동무역풍, 겨울에 북동무역풍이 분다. 연평균기온 25.6℃이며, 1월평균기온 22℃로 가장 춥고 8월평균기온 28℃로 가장 덥다. 기온의 교차가 적기 때문에 계절적 기후변화는 주로 강수량에 의해 좌우된다. 11∼4월까지 건기(乾期), 5∼10월까지 우기(雨期)가 나타난다. 연평균강수량은 1400㎜이나 산지는 2000㎜에 이르며, 시에라 마에스트라산맥 뒤쪽 관타나모가 가장 적다. 우기와 같은 시기인 6∼10월 허리케인이 상륙하여 북서부에 풍수해를 입힌다.

 

 

바나(Havana) 기후(℃)

도시명

구분/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아바나

(Havana)

최고평균

25.8

26.1

27.6

28.6

29.8

30.5

31.3

31.6

31.0

29.2

27.7

28.0

최저평균

18.6

18.6

19.7

20.9

22.4

23.4

23.8

24.1

23.8

23.0

21.3

19.0

평   균

22.2

22.4

23.7

24.8

26.1

27.0

27.6

27.9

27.4

26.1

24.5

23.5

 

 

사회문화

 쿠바는 전체 주민의 약 51%가 물라토(흑인과 에스파냐계 백인의 혼혈)이며, 약 37%가 에스파냐계 백인, 약 11%가 흑인, 1%가 중국인이며 그밖에 소수의 메스티조(백인과 인디언의 혼혈)가 있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서반어어)어를 사용하나 도시에서는 영어와 러시아어도 통용된다. 종교는 85%가 가톨릭교도이고 그밖에 그리스도교, 여호와의 증인 등도 믿고 있다.

 

통화

 쿠바의 통화는 페소(Peso/Ps, 1 Peso=100 Centavos)이다. 동전은 1, 2, 5, 20, 40 센타페소와 1 페소 6종류이며 지폐는 1, 3, 5, 10, 20, 50페소 등 6종류이다.

 

전압

 110V-230V/50Hz

 

환전

 한국에서 페소롤 환전하지는 못하며, 달러를 직접 사용할 수 있으나 여행자 수표는 사용이 안된다. 카드는 많은 곳에서 사용이 불가능하다.

 

공휴일

1월 1일 - 해방의 날

3월 28일 - 여성의 날

5월 1일 - 노동절

5월 17일 - 토지개혁일

7월 25-27일 - 국가 혁명 기념일

7월 30일 - 혁명순교자의 날

10월 10일 - 쿠바문화의 날

 

 

쿠바의 역사

 최초로 스페인인이 도착했을 때 쿠바에 살고 있던 원주민은 시보니족, 과나아타베이족, 이들보다 뒤에 정착했던 아라와크(또는 타이노)족 등의 인디언이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의 첫 아메리카 대륙 항해 때인 1492년 쿠바를 스페인영토로 선포했다. 1511년에는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바라코아에 최초의 유럽인 영구정착지를 세웠다. 스페인인들은 곧 쿠바를 7개의 자치체로 나누었고, 이곳은 에르난 코르테스의 멕시코 진출(1519∼21)을 비롯해 스페인의 중앙 아메리카 탐험의 근거지가 되었다.

 

 인디언 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16세기말에는 인디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엥코미엔다 농장 제도는 더 이상 효율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17세기에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 강대국들이 침략해옴에 따라 식민지 상황이 어려워지기도 했다.

 

 18, 19세기에 걸쳐 사탕수수 재배술의 발전, 노예노동력의 수입, 설탕산업의 성장 등에 힘입어 쿠바는 번영을 누렸다.

 

 19세기에 설탕산업을 세계최고수준으로 기계화했고, 1860년경에는 전세계 설탕의 거의 1/3이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1865년 노예매매는 중단되었지만, 멕시코 인디언과 중국인 노동력이 증가했다. 1886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19세기말에는 미국이 주요 교역상대국이자 투자국이었다.

 

 스페인이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지 않고, 세금부담이 증대하면서 제1차 쿠바 독립전쟁인 10년전쟁(1868∼78)이 발발해 군사적 교착상태에 빠졌다. 제2차 독립전쟁은 1895년에 발발했는데, 스페인은 이 전쟁에 2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배치했다. 1898년 아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함대 메인호(號) 선상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미국도 스페인에 대항하여 이 전쟁에 참가했다(미국-스페인 전쟁). 1899년 쿠바가 독립을 쟁취한 후 한동안 미국이 이곳을 점령해 질서가 회복되고 많은 학교와 도로·교량 등이 건설되었다.

 

 1901년 미국은 관타나모 만의 해군 기지 설립권과 쿠바의 국내외 행정을 감독할 권리를 얻어냈다. 1902년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폭동기였던 1905∼06년을 거쳐 1906∼1909년에는 제2차 미국 점령이 실시되었다. 1909년 자유당 대통령 호세 미겔 고메스가 이끄는 새로운 행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의 재임기간중 뇌물수수, 부정부패, 아프리카계 쿠바인에 대한 사회적 불평등 등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었다. 뒤이은 대통령들과 독재자들의 시대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계속적인 미국의 투자와 설탕산업·관광산업·도박산업의 성장에 힘입어 경제발전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되던 끝에 1958년 오랫동안 망명생활과 대정부 게릴라전을 지속했던 혁명적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바티스타 이 살디바르의 장기 독재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카스트로는 곧 소련과 수교하고 자본주의의 폐지, 외국인소유기업의 국유화, 소련식 농공업 개혁 등을 실행했으며, 마침내 자신의 혁명당을 PCC로 전환했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反)카스트로 전쟁인 1961년의 피그스 만 침공과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최악에 달했다. 1960, 1970년대에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고, 제3세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혁명에서도 소련을 대신해 활약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운동을 지원해왔으며, 앙골라와 에티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모든 계층에 대한 교육·의료 혜택을 실시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었고 계속 소련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카스트로는 소련의 부속국이라는 쿠바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비동맹국가들의 움직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쿠바는 동유럽과 소련 공산주의 붕괴로 정치· 경제적인 타격이 컸다.

 

 

쿠바의 약사

1492년 콜롬부스에 의해 발견/ 쿠바를 스페인 영토로 선포

1519년 하바나 건설

1868-1878년 제 1차 쿠바독립전쟁

1895년 제 2차 쿠바독립전쟁

1898년 파리조약으로 스페인으로부터 해방

1898-1902년 미국의 군정

1902년 독립, 팔마가 대통령으로 선출

1906-1909년 미국의 제 2차 군정

1909년 고메스 대통령 집권

1933년 바티스타(Batista)대통령 집권

1959년 카스트로(Castro)의 혁명

1961년 미국과의 외교단절(사회주의 노선 공식 선언)

1965년 쿠바 공산당 창당

1975년 쿠바 공산당 제 1차 전당대회, 신헌법 인준(認准)

1976년 전국인민권력회의 실시, 신헌법 제정

1980년 제 2차 공산당 전당대회

1982년 미국의 경제재제조치 강화

1986년 제 3차 공산당 전당대회, 독자적 사회주의 노선 추구

1988년 EC와 외교관계 수립

1991년 제 4차공산당 전당대회 / 소련 특혜무역협정 종료 / 배급제 실시 / 고르바초프 쿠바 주둔 소련군 철수

1992년 미국의 봉쇄조치 강화

1993년 구 소련군 전면 철수

1994년 쿠바 난민 미국 유입(미-쿠바간 관계 악화)

1996년 미국 헬름 스버튼법 제정으로 쿠바에 대한 제제조치 더욱 강화

 

1) 스페인 점령기

 1492년 콜롬부스가 최초로 도착했을 때 쿠바에 있던 원주민은 시보네이족, 과나아타베이족, 이들보다 뒤에 정착했던 아라와크(타이노)족 등의 인디언이었다. 콜롬부스는 쿠바를 스페인 영토로 선포했고 1511년 디에고벨라스케스가 바라코아에 최초의 유럽인 영구정착지를 세웠다. 스페인인들은 쿠바를 7개의 자치제로 나누고 멕시코 진출을 비롯한 스페인의 중앙 아메리카 탐험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신대륙과 스페인 본국을 연결하는 교역의 중개자로 번영하여 금은보화를 운반하는 스페인의 배가 통행하였다. 그로 인하여 마이그스, 모오간(H. Morgan) 등의 유명한 대해적이 횡행하여 여러 도시가 파괴되었다.

 17세기에 들어서 경쟁관계에 있는 유럽 강대국들이 침략해옴에 따라 식민지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18세기에는 영서(英西)전쟁에서 영국이 점령하므로 하바나는 자유무역항으로 번영하여 노예매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18∼19세기에 걸쳐 사탕수수 재배의 발전, 노예노동력의 수입, 설탕산업의 성장 등에 힘입어 쿠바는 번영을 누렸다. 19세기에 설탕산업을 세계최고수준으로 기계화했고 1860년경에는 전세계 설탕의 약 1/3을 쿠바에서 생산했다. 1865년 노예매매가 중단되고 1886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지만 멕시코 인디언과 중국인 노동력이 증가했다. 19세기 말에는 미국이 주요 교역상대국이자 투자국이었다.

 

2) 독립운동

 스페인은 쿠바의 정치적 자치를 허용하지 않고 세금부담을 증대하자 제1차 쿠바독립전쟁인 10년전쟁(1868~1878년)이 발발해 군사적 교착상태에 빠졌다. 제2차 독립전쟁은 1895년에 발발했는데 스페인은 이 전쟁에 20만명 이상의 병력을 배치했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미국이 진출하여 스페인 지배에 불만을 가진 쿠바인들의 반란을 원조하였다. 1898년 하바나 항에 정박중이던 미국함대 메인호 선상에서 원인불명의 폭발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미국도 스페인에 대항하여 제 2차 독립전쟁에 참가했다.

 

3) 미국의 지배

 1898년 미국과 스페인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쿠바는 미국의 점령하에 들어 갔다. 같은해 파리조약에 의해 쿠바의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플라트(Platt) 수정조항에 의해 군사기지가 설치되는 등 미국의 내정간섭이 계속되었다. 1901년 미국은 관타나모만의 해군기지 설립권과 쿠바의 국내외 행정을 감독 할 권리를 얻어냈다. 1902년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가 쿠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폭동기였던 1905-1906년을 거쳐 1906-1909년에는 미국의 제2차 점령이 실시되었다.

 

4) 쿠바독립

 1909년 자유당 출신의 호세 미겔 고메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새로운 행정부가 출발하게 되었다. 고메스 대통령은 재임기간중 뇌물수수, 부정부패, 아리카계 쿠바인에 대한 사회적 부정 등이 구조적으로 고착되었다. 1933-1959년 바티스타(Batista)에 의해 독재정권이 계속되었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더해만 갔다.

 

5) 카스트로 혁명 정권

 계속적인 미국의 투자와, 설탕산업, 관광산업, 도박산업에 힘입어 경제발전이 계속되었으나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되던 끝에 1958년 오랫동안 망명생활과 농민과 도시중간층의 지지를 받은 대정부 게릴라전을 지속했오던 혁명적 공산주의자 피델 카스트로가 바티스타 대통령의 장기 독재를 타도하고 혁명에 성공하였다.

 

 카스트로 정권은 1959년 6월 농지개혁법을 시행, 쿠바에 있는 미국인 소유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의 경제보복이 일어났다. 1960년 소련과 수교하고 1961년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되었다. 혁명후 카스트로는 자본주의를 폐지, 외국인소유 기업의 국유화, 농업의 다각화와 근대화 등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1961년 4월 사회주의 혁명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1961년 5월 소련과 대사관 교환 설치했으며 1961년 12월 사회인민주의 혁명통일당(PPC)을 창설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어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反)카스트로 망명군의 1961년 피그스 만 침입과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때 최악에 달했다.

 

 1965년 10월 쿠바공산당이 결성되고 1972년 공산당 기구개혁과 제도가 정비되었다. 1975년 공산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고 1976년 2월 신헌법에 공포되어 사회주의 헌법이 구체화 되었으며 같은해 12월 새로운 국가기구가 발족하였다.

 

 1960-1970년대에 소련의 위성국가로서 확고한 자리를 굳혔고, 제3세계로 확산되는 공산주의 혁명에서도 소련을 대신해 활약했다. 라틴아메리카의 혁명운동을 지원해왔으며 앙골라, 에디오피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카스트로 정부는 모든 계층에 대한 교육, 의료 혜택을 실시하여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경제는 여전히 침체되었고, 계속 소련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에 크게 의존하였다.

 

 1980년 12월 각급 대표부와 공산당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공산당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카스트로 체체확립을 기반으로 실용주의적 경제정책을 수용하면서 공산주의체제를 더욱 강화했다.

 

 1986년 12월에 개최된 제3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는 소련의 영향력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사회주의노선을 채택하여 소련과 동구권의 국제적 변화속에서 사회주의를 더욱 강화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변혁이후 쿠바는 개방과 개혁의 압력을 받고 있으나 이를 계속 부인하면서 독자적 사회주의 추구라는 구호 아래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1991년 제4차 공산당 전당대회를 개최하면서 구 소련과 동구의 붕괴후 야기되는 정치적, 경제적 고립을 탈피하고자 사회주의 체제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부분적인 개혁안을 도입하였다. 이런 원칙하에 중국식 개혁모델을 점진적으로 도입하여 극심한 경제난을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수출증대와 관광산업의 활성화를 위한 외국자본 유치나 개인의 부업을 인정하는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이 도입단계에 있다. 1992년 7월 구 소련과의 동맹관계를 명시한 헌법전문의 일부를 삭제하고 동시에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직접, 간접선거의 도입 등 헌법개정을 승인하였다. 천안문사건으로 고립된 중국에 접근하여 1990년 5월 중국공산당이 쿠바를 방문하였다. 개헌후 국가인민회의 의원 선거를 1993년 실시되었으나 98.7%의 투표율로 카스트로 의장이 선출되었다.

 

 

쿠바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Cuba)

 쿠바 공산당(Partido Comunista de Cuba)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으로 삼고 있는 쿠바의 공산주의 정당으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와 그의 추종자들이 1965년에 조직한 정당이며, 과거 20세기 중후반 라틴아메리카 주요 국가들이 친미 독재 정권이 세워졌을 때 좌파 저항 단체들이나 진보 정당들, 민주화 운동가들을 크게 지원했었다.

 

 이 정당은 1965년에 창설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볼 때 쿠바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시작된 것은 1923년이었다. 1976년의 헌법에 따라 이 정당은 쿠바에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정당이 되었다. 쿠바 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훈련받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요원들이 1925년에 처음 창설했다.

 

 그후 30년 동안 이 조직은 스탈린 노선을 고수했지만, 1940년대와 1950년대초에는 풀겐시오 바티스타 정권과 기회주의적으로 협조했고, 그 대가로 정부와 노동조합에 자리를 얻기도 했는데, 1944년에 그러한 사람 중 하나인 카를로스 라파엘 로드리게스(카스트로 치하에서 PCC의 정치국원이 됨)는 바티스타 정권의 무임소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1954~59년 공산주의자들은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1944년 쿠바 공산당은 인민사회당(Partido Socialista Popular/PSP)으로 이름을 바꾸고 1961년까지 그 이름을 사용했다. 1961년 혁명에 성공하여 바티스타 정권을 전복시킨 뒤, 이 정당은 카스트로의 7·26운동 및 혁명간부회의와 합쳐져서 통합혁명조직(Organizaciones Revolucionarias Integradas/ORI)이 되었다. 이듬해 조직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진 뒤, ORI는 통일사회혁명당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이 정당도 1965년 10월 5일 해체되었고, 좀더 정통적인 소비에트 노선에 따라 조직된 쿠바 공산당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정당의 제1차 대회는 1975년 아바나에서 열렸다. 이 새로운 정당은 초창기부터 줄곧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 의해 주도되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

 1960년 5월 소련 무기로 쿠바를 방위한다는 약속을 했던 소련의 니키타 S. 흐루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ov, 1894~1971) 서기장은 소련이 쿠바에 중거리 탄도 미사일을 설치한다 해도 미국이 아무런 방해 조치도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2년 7월 미국은 소련이 쿠바로 미사일을 수송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월 29일경에는 쿠바 상공을 비행하는 미국의 U-2 정찰기를 통해 쿠바에 새로운 군기지가 건설되고 있으며 소련 기술자들이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0월 14일에는 발사 기지에 탄도 미사일이 배치된 사실이 보고되었다.

 

 미국 정부는 즉각적으로 쿠바에 쳐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한층 더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것인지를 두고 고심하던 끝에 쿠바에 대한 해상 '격리'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봉쇄라는 용어는 조심스럽게 피했음). 10월 22일 미국의 존 F. 케네디(John F. Kennedy, 1917~1963) 대통령이 격리 조치를 발표했으며, 다음날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OAS)가 이를 승인했다.

 

 케네디는 미군이 소련 함정이 쿠바로 이송하려고 하는 공격용 무기와 관련 자재를 압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위기 동안 무기류를 실은 어떤 소련 선박도 격리 지역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에 메시지가 교환되었다. 미국이 전쟁 준비를 하는 가운데 긴장된 1주일이 지나자, 10월 28일 흐루시초프는 '무기 건설기지' 작업의 중단과 이미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은 소련으로 회수하겠다는 사실을 케네디에게 통보했다.

 

 흐루시초프는 그 미사일이 지대지 중거리 공격용 미사일임을 시인했다. 그는 국제연합(UN) 사찰단이 쿠바 현지 시찰을 통해 그의 통보를 확인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사찰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미국 정부는 계속해서 U-2 정찰기를 통해 사찰을 실시하는 데 만족하는 듯했다. 그리고 11월 20일에는 격리 조치를 해제했다. 카스트로가 미국 정찰기를 격추시키겠다고 위협하자, 흐루시초프는 그같은 행위를 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카스트로는 소련의 위축된 태도에 분개했으나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힘이 없었다.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소련의 냉전관계는 절정에 이르렀다. 쿠바에서 당한 소련의 굴욕은 1964년 10월 흐루시초프의 실각과, 적어도 미국과 대등한 핵능력을 보유하겠다는 소련의 비장한 결의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피그스 만 침공(Bay of Pigs Invasion, 1961. 04. 17)

 미국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 공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미 심각한 상태에 놓여 있던 미국과 쿠바 사이의 적대관계가 더욱 악화된 것은 물론, 세계적인 냉전의 긴장상태를 더욱 고조시켰다.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가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체제를 붕괴시킨(1959. 1) 지 6개월 만에 카스트로 정부와 미국과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쿠바 정부는 개인 재산을 몰수하고(그 대부분은 북아메리카 재산가의 소유였음), 일부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혁명을 고양시키기 위해 지도원을 파견했으며, 대표적인 사회주의 열강, 특히 소련 및 중국과의 외교적·경제적 유대를 확립했다. 1960년 5월 소련은 쿠바를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카스트로는 종종 미국이 자신의 정부를 전복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벨기에에서 쿠바로 무기를 실어 나르던 프랑스 배 '라 쿠브르호'가 1960년 3월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해 70여 명의 선원이 죽자, 카스트로는 미국의 파괴 행위를 비난하고 미국의 여타 외교문서 수령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부인 성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1960년초부터 미국의회의 일부 의원과 상원의원이 쿠바를 비난하고 나섰다. 6월경 미국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보복조치를 단행할 수 있도록 했다. 즉 미국은 쿠바로부터 설탕 수입을 중단하고 식량과 의약품을 제외한 쿠바로의 모든 수출을 금지했다.

 

 카스트로는 북아메리카인들의 재산 국유화를 가속화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카스트로가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 직원을 과감하게 축소시킬 것을 명령하자, 1961년 1월 아이젠하워는 최후의 조처로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1960년 5월부터 미국중앙정보부(CIA)는 쿠바 침공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이 최종적으로 승인받아 실행에 옮겨지기 직전 새로 취임한 존 F. 케네디 행정부 내에서 침공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1961년 4월 15일 쿠바인이 조종하는 3대의 미국제 비행기가 쿠바의 공군기지를 폭파했다. 이틀 후 미국에서 훈련받고 미국 장비로 무장한 쿠바인들이 몇몇 지역에 착륙했다. 주요착륙지는 중남부 해안에 위치한 피그스 만이었다. 침공 부대는 카스트로 군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4월 19일 마지막 주력부대가 체포되면서 거의 1,100여 명 이상이 잡혔다. 침공의 여파로 비판가들은 CIA가 새 대통령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책임을 물었고, 케네디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바티스타 지지자들이 침공 부대에 포함되어 있었던 반면에 반공산주의자로 가장 영향력 있는 반카스트로 집단으로 알려진 '인민혁명운동'의 구성원이 제외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더욱이 쿠바 정부와 일부 미국 소식통조차 사전에 침공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추궁을 받았다. 침공 부대의 포로들은 투옥되었다. 1961년 5월 케네디 행정부는 죄수들의 몸값을 치르고 그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비공식적인 접촉을 시도했다. 그러나 엘리노어 루스벨트가 이끄는 '사면추진위원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가 배상금으로 요구한 중공업 장비 구입비 2,800만 달러는 마련되지 못했다.

 

 몸값을 둘러싸고 협상조건이 그뒤 몇 달 동안 여러 차례 변했다. 제임스 B. 도노번과의 힘겨운 협상 끝에 마침내 카스트로는 식량· 의약품 5,300만 달러어치를 받고 죄수를 풀어주는 데 동의했다. 1962년 12월부터 1965년 7월에 걸쳐 생존자들이 미국으로 돌아갔다. 일부 비판가들은 미국이 피그스 만 침공을 지지하는 데 아주 적극적이지도 않았으며 우유부단한 인상만 남겼다고 생각했다.

 

 결국 이 사건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쿠바의 비자정보

 한국과 쿠바는 아직 미수교국이기 때문에 쿠바 외교기관이 없다.

 따라서 쿠바비자 담당여행사에서 하여야 한다.

 비자를 발급할때는 6개월 이상 남은 여권사본, 주소, 기본 인적사항등을 기재하면 되고, 소요시간은 1박 2일, 비자유효기간은 6개월이며, 체류기간은 30일이다. 비자를 취득하고 나서는 쿠바 입국후의 활동을 밝혀야 하며, 명기된 입국목적 이외의 활동은 모두 금지시 된다.

 

'시가의 나라' 쿠바

 쿠바 길거리에서 시가를 태우는 사람들과 시가를 파는 상인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중남미 여러곳에서 생산되고 있는 시가는 멕시코,푸에르토리코 등의 나라에서도 생산되지만 쿠바산이 가장 품질이 좋다. 그 이유는 쿠바의 기후가 강수량과 일조양이 풍부한 아열대성이고, 담배가 잘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고루 갖추고 있어서 세계적인 시가를 생산해 낸다.

 

쿠바여행이 좋은 시기

 쿠바를 방문하는데 있어 나쁜시기는 없다. 5월과 10월사이에 덥고, 우기철이고(평균기온 27℃), 겨울철에는 (4월부터 12월)여행객들이 방문하기에 좋은 시기이다. 쿠바인들의 휴가철은 7월과 8월로 그 때에는 자국시민들이 해변가로 많이 몰리게 되어 복잡하므로 피하는것이 좋다.

 

 

쿠바에서 꼭 해봐야 할 것

 

 

➀ 모로성에서 엽서쓰기

 한국에서 쿠바로 편지를 보내거나 반대로 쿠바에서 한국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은 자유로운 일이다. 쿠바에서 편지쓰기 좋은 장소는 역시 '아바나 모로성(Morro Castle)'이다. 로맨틱한 성곽에 앉아 엽서 쓰는 영화속 주인공이 되길 원하신다면 쿠바여행일정에 아바나의 모로성을 넣어 보자. 모로성은 노을지는 모습이 아릅답기로 유명하다. 모로성 성곽에 앉아 엽서를 쓰면 여행의 낭만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에게 엽서를 보내는것도 좋지만 나 자신에게 엽서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➁ 노인과 바다

 먼저 쿠바여행일정을 짜기 전에 유명한 소설 '노인과 바다'를 준비하는 것을 추천한다. 아바나에서 가까운 꼬히마르(Cojimar)가 바로 헤밍웨이의 소설인 노인과 바다의 배경지이기 때문이다. 노인과 바다를 읽을 만한 곳으로는 꼬히마르 어디든 좋다. 바다가 보이는 곳이라면 소설을 읽기에 어디든 좋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소설을 읽어 내려간다면 더 현실감이 있겠지요? 쿠바여행을 하시는 분들의 아마 멋진 미션이 되겠다.

 

 

➂ 클래식 카(Classic Car) 타고 아바나 투어

 쿠바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클래식 카(Classic Car)'이다. 아주 특별하면서도 쉽게 할 수 없는 '클래식 카 투어'는 쿠바에서는 일상처럼 즐길 수 있다.  

 쿠바여행일정을 계획하기 앞서서  탑승한 클래식카가 몇년식이고 어떤 브랜드의 차량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다면 더 의미있는 쿠바여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놀라운 이벤트는 쿠바의 도시 어디서든 클래식 카 투어를 자유롭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50년도 더 된 클래식 카를 타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달리는 주인공이 되어 보자.

 

➃ 쿠바 대표 상품 경험하기

 아바나는 럼, 커피, 시가, 이 세가지는 유명하다. 쿠바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 세가지 상징물은 지난 시간 동안 쿠바 경제 성장의 근간이 되었고, 덕분에 쿠바라는 작은 섬은 넓고 큰 세계무대의 주요한 원천이자 생산국이 되었다.

 쿠바의 뜨겁고 끈적거리는 기후는 사탕수수와 담배 같은 제품 생산하는 데 최적이고, 여기에 카스트로 정권동안 세계와 고립되었던 쿠바는 세계 유일 최상의 생산 기술을 유지하게 되었다.

 쿠바의 유명한 스패니시 럼은 나무통에 최소 2년 이상 보관하여 가볍고 산뜻한 맛에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한다. 쿠바 정부와 프랑스 사기업이 공동 소유하는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은 가장 유명한 쿠바식 럼 브랜드이다.

 쿠바 시가는 세계적으로 고품질이기로 유명하다. 실은 백프로 손으로 만든 세계 유일의 시가이기도 하다. 매년 시가 애호가들은 화려한 폐막시으로 유명한 쿠바 시가 축제(El Festival del Habano)를 위해 쿠바로 모여든다.

 또 다른 유명한 쿠바 농업 상품은 바로 커피콩이다. 이 작은 섬중에서도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간 지역은 18세기에 커피 재배 사업이 급증한 곳이다.

'카페 쿠바노'는 쿠바만의 독특한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섞은 커피이다. 카페 쿠바노가 주로 점심이나 저녁식사 이후에 마시는 커피라면, 우유를 섞어 마시는 카페라테(cafe con leche)는 모닝커피로 인기이다. 쿠바에서 커피는 지인들과 몇 시간씩 모여 앉아 오래도록 마시는 생활의 일부이다.

 

 

➄ 체게바라 기념관

 쿠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체게바라(Che Guevara, 1928~1967)이다. 체게바라 기념관은 어떤 곳보다 그의 일생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39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된 그의 일생은 한편의 영화가 같이 느껴질 것이다. 기념관을 둘러보기 전에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감상한 후에 둘러본다면 더 의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➅ 카사 데 라 무시카에서 살사 추기

 쿠바의 카사 데라 무시카에서는 매일 밤 파티가 열린다. 뜨리니다드의 춤꾼은 모두 파티에 참석한다. 여행자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신나게 춤판을 벌이는 볼 만한 장소이다.

 음악에 몸을 맡겨 댄스를 즐길 때는 밤하늘의 별만이 당신을 바라볼 뿐 실력을 평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뜨리니다드 여행의 묘미는 뭐니뭐니해도 카사 데 라 무시카에서 살사댄스를 즐기는 것이다.

 

 

➆ 말레콘(El Malecon)에서 노을 감상하기

 해안을 따라 걷는 산책로는 아바나의 명소이다. 저녁에 친구들과 놀러 가기 전에 모이기 딱 좋은 장소이다. 다만 이는 해안가를 따라 8km에 딸하는 산책로이므로, 말레콘의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염두에 두면 된다. 낮에는 낚싯대를 던지는 낚시꾼들이, 그리도 밤에는 아름다운 노을 배경으로 버스킹 뮤지션들이 상주하는 거리이다.

 

 

➇ 아바나 비에하 걷기(Havana Vieja)

 아바나 비에하(Havana Vieja), 혹은 올드 아바나(Old Havana)는 알록달록하고 아름다운 오랜된 건물이 가득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이 지역은 의사당 건물과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등이 있는 구도시의 핵심 지역이다. 올드 아바나가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무어(Moor), 스페인, 프랑스, 로마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➈ 거리 문화 즐기기

 카드 게임이나 거리 공연까지, 아바나의 길거리는 시간대를 불문하고 항상 활기차다. 아바나 시민들은 거리 공연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디ㅏ. 첼로,  드럼, 색소폰, 기카, 심지어 스탠딩 키보드까지 구비한 뮤지션 그룹들이 길가에 자리를 잡고 있다. 남녀노소의 댄서들은 알록달록한 전통 의상을 입고 도심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무지갯빛 상의에 풍성한 바지를 차려 입은 스틸트 워커들이 거리를 행진한다.

 쿠바 시민들이 길가에 테이블을 차려 놓고 도미노 게임을 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놀리지 말자. 이 고전 게임은 쿠바에서 가장 사랑받는 국민 여가 문화이며, 밤 늦도록 이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아바나의 거리는 파티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➉ 나이드 라이프 경험하기

 카바레부터 발레까지, 아바나는 언제나 예술 활동의 중심지이다. 춤은 아바나의 나이트 라이프에서 바찔 수 없는 요소로, 호화로운 카바레 클럽은 1950년대부터 명소이다. 카바레 트로피카나(Cabaret Tropicana)는 강렬한 원색의 프릴 의상과 머리 장식을 착용한 댄서들이 선보이는 화려하고 과장된 카바레 퍼포먼스로 유명한 클럽이다.

 너무 유명한 관광지가 싫다면, 아바나의 살사 클럽이나 바에 방문해 보자. 고정과념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거의 모든 쿠바인들은 살사 댄스를 잘 춘다. 그리고 설사를 추기 위해서 반드시 클럽에 가야 한다는 법도 없다. 살사 축제는 골목 구석부터 레스토랑 테라스까지 언제 어디서든 열릴 수 있는 즉흥적인 축제이다.

 

 

쿠바 아바나, 남미 최대의 쇼, 트로피카나 쇼(Tropicana Show)

 태국의 알카자쇼, 프랑스의 리도쇼가 있다면 쿠바에는 트로피카나(Tropicana) 공연이 있다.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 1939년에 아바나에서 처음 소개된 트로피카나는 귀족풍의 고급스런 디너쇼 정도된다.

 머리에 화려한 화관과 몸에는 꽃단장을 한 무희들이 정열적인 춤을 선보인다.

 

 입장할 때는 남자는 반바지와 샌들 입장은 불가하며, 입구에서 들어갈 때 남자는 시가, 여자는 꽃한송이씩을 나누어 준다.

 카메라 촬영을 하기 위해서는 허가증을 구입해야 한다. $5

 공연 시간은 약 3시간 정도이며, 마지막에는 무용수들이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과 함께 춤을 추며 즐기는 시간도 있다.

     

 

 

주의사항

 쿠바에서는 달러나 페소이외에 여행자수표나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 신용카드를 사용할 경우 미국과 제휴관계가 없는 것만 쓸 수 있다.

 가능한 신용카드 회사는 비자, 마스터 카드이고, 불가능한 신용카드 회사는 아메리칸 엑스프레스, 시티뱅크, 다이너스클럽이다. 

 

 

 

 관광 명소

 

 

아바나(Havana)  ∥  바라데로(Varadero) ∥ 산티아고(Santiago)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 1899~1961) 가 사랑한 아바나(Havana)

 하드보일드 문학의 대표주자인 헤밍웨이는 멋진 이름을 가졌다. 이름에 잘 어울리는 풍모도 갖췄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앞에 붙는 모든 수식과 잘 어울리는 나라, 쿠바에서 불세출의 문학 작품들을 집필했다. 그에게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안겨준 대작 《노인과 바다》도 쿠바에서 썼다.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헤밍웨이를 만나기 위해 그 노인과 그 바다가 있던 곳을 찾아 지구 반 바퀴를 돌았다.

"모든 사람의 삶은 같은 방법으로 끝난다. 그가 살았던 방법과 그가 죽은 방법에 대한 세부 사항은 오직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다."

 

 

헤밍웨이가 사랑한 도시, 아바나

 소설 《노인과 바다》 표지를 보자. 가지런히 자란 수염, 오른쪽으로 빗어 넘긴 머리, 호기심 가득한 눈빛의 잘생긴 얼굴은 지성적 매력을 겸비한 마초의 전형이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얼굴을 굵은 패턴의 니트가 따뜻하게 감싼다.

 

 마초마저 따뜻한 인상을 풍기게 하는 스타일의 니트는 ‘헤밍웨이 니트’라는 이름을 얻었고 반세기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도 인기다.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작가의 삶은 다사다난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자신의 낚싯배를 개조해 쿠바 인근 해안에서 독일군 잠수함을 정찰하는 ‘크룩 팩토리’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전쟁 중 당한 심각한 부상과 이후 아프리카 탐험 중 경비행기 추락 사고가 두 번 있었지만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그는 네 번이나 결혼할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으며 음주와 낚시, 글쓰기를 사랑했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살아낸 모든 찰나를 주시하고 통찰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글로 풀어 독자들에게 실제로 경험한 듯한 착각을 선사했다. 가장 미국적인 작가로 평가되지만 정작 그가 반평생을 지낸 곳은 아바나와 아바나 인근의 코히마르다. 파란만장한 삶, 글쓰기를 향한 깊은 고뇌, 고뇌를 뚫고 세상으로 나온 모든 작품을 통해 세기의 우상이 된 헤밍웨이가 아바나에 관해 말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쿠바에 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글을 썼던 세상 다른 어떤 곳만큼이나 그곳의 서늘한 이른 아침이 글쓰기에 좋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헤밍웨이의 단골 바

 아바나는 아름답다. 과거로 회귀한 듯하고 이국적인 정취로 가득하다. 감각을 둘러싼 시공간 모두가 비현실적이다. 돈을 받고 사진 찍히기 위해 형형색색의 옷과 장신구로 몸을 치장하고 시가를 물고 앉아 있는 할머니들의 모습도, 어디에서건 멜로디 없이 울리는 리듬에 몸을 흔들고 눈을 맞추며 웃는 사람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푸른 하늘 아래로 콜로니얼, 바로크, 아르누보 양식의 오래된 건물들이 도열해 있다. 건물 사이의 작은 골목들은 언제나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옛 시가지 옆으로는 신시가지가 이어진다. 이 지점에 호텔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가 있다. 두 개의 세계를 뜻하는 이 호텔에서 헤밍웨이는 세 번째 세계를 창조했다. 그는 이곳에서 두 번째 부인인 폴라, 두 아들, 처제와 머물면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했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로비를 지나 빈티지한 철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5층 11호, 헤밍웨이의 방이다.

 

 볕이 화사하게 드는 방 중앙에는 헤밍웨이가 쓰던 타자기가 놓여 있다. 타자기를 중심으로 벽면을 따라 지인들과 주고받은 서신, 사진자료, 소품 등이 전시돼 있다.

 

 유명한 애주가였던 헤밍웨이의 단골 바에도 꼭 들러봐야 한다. 몬테라세와 엘 플로리디타는 헤밍웨이의 자취를 쫓는 여행객으로 인산인해다. 바 몬테라세에 들어서자 7인의 악단이 연주하는 큐반 뮤직에 몸이 절로 움직였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클라베스, 마라카스, 과요 등의 악기가 만들어내는 리듬이 흥겹다.

 

아바나에서 만난 할머니. 1달러를 주지 않으면 사진을 찍지 못하게 부채로 얼굴을 가린다.

 럼에 콜라를 섞은 칵테일 쿠바리브레를 한 잔 들이켜자, 축제의 정점을 즐기듯 신명 난다. 아르누보 스타일의 엘 플로리디타는 고급스럽고 클래식한 느낌의 바인 동시에 음식 맛 좋기로 소문난 레스토랑이다. 특히 럼 베이스의 쿠바 칵테일인 다이키리 맛이 일품인데, 이곳에 설치된 헤밍웨이의 동상과 동석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헤밍웨이는 앉은 자리에서 무려 13잔의 다이키리를 연거푸 마셨다고 한다. 엘 플로리디타를 찾아온 관광객은 대부분 헤밍웨이 동상과 나란히 앉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선다. 물론 한 손엔 언제나 다이키리를 들고 있다. 상큼한 다이키리를 들고 개구진 표정의 헤밍웨이를 위해 건배! 살루드(Salud)!

 

거장이 사랑한 아름다운 마을과 집

 아바나에서 헤밍웨이를 추억하는 마지막 여정은 헤밍웨이 마리나다. 과거에는 관광객으로 북적이던 곳이었지만, 정부에서 공공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이곳엔 의학 시설들이 들어섰다. 이후 관광객의 발길은 끊겼다. 인근 부촌에서 피크닉이나 낚시를 즐기러 방문하는 사람들이 전부. 해질녘 도착한 헤밍웨이 마리나에는 그를 꼭 빼닮은 남자가 낚싯바늘에 미끼를 끼고 있었다. 붉게 물드는 사위를 가르고 낚싯줄을 능숙하고 호방하게 던져 고기를 건져 올리는 모습이 마치 헤밍웨이의 현현인 듯했다. 소란하고 활기 넘치는 아바나 도심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조용하고 호젓한 풍경이다.

 

 코히마르(Cojimar)는 아바나 인근의 어촌마을이다. 소설 《노인과 바다》의 모티브가 된 곳으로 조용하고 아담한 정취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를 닮은 어부들이 그늘에 앉아 열기를 식히는 풍경이나, 방파제에서 바다로 점프해 수영을 즐기는 아이들의 망중한은 아늑하고 평온한 어촌마을의 정취를 배가시킨다.

 

 마을 입구에는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헤밍웨이의 흉상이 우뚝 서 있다. 흉상을 중심으로 흰 기둥이 빙 둘러서 있는데, 마치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한다. 어딘지 어설픈 노랫소리가 바닷바람에 실려 귓전을 울린다. 동네 할아버지가 방파제 어귀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셨는데, 그 풍경이 마치 헤밍웨이를 위한 세레나데를 부르는 듯했다.

 

20년을 산 저택 핑카 비히아(Finca Vigia)

 여행객들이 헤밍웨이의 동상과 사진을 찍고 들르는 곳은 골목 어귀의 라 테라사(La terraza). 헤밍웨이의 단골 바와 레스토랑이었던 곳으로, 헤밍웨의의 사진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웠다. 헤밍웨이는 코히마르 언덕에 저택을 짓고 20년을 살았다. 저택의 이름은 망루 농장이라는 뜻의 핑카 비히아다. 핑카 비히아의 가장 높은 곳에 서면 푸른 바다 곁으로 펼쳐진 아바나 도심의 풍경이 한눈에 드니,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내부에는 헤밍웨이의 모든 것을 박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현재는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헤밍웨이는 핑카 비히아에서 후대에 길이 남을 작품들을 집필했다. 이 집에 사는 동안 노벨상도 받았다.

 

 대작들의 찬란한 고향이지만 집은 낡고 허물어져 간다. 외벽도 지붕도 세월의 흔적을 거스르지 못하고 늙어가지만 집이 간직한 우아함은 여전하다. 집안 곳곳에선 그가 남긴 흔적이 정갈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별채와 본채로 나뉘는데, 본채는 출입이 불가능하지만 창문을 통해 침실, 옷장, 식당 등을 둘러볼 수 있다. 사냥을 취미로 즐긴 헤밍웨이는 물소, 사슴, 표범의 헌팅 트로피들로 벽을 장식했다. 장식이라기보다 샤머니즘을 신봉해 모셔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메모· 미신· 분위기까지

 헤밍웨이는 남성적이고 거친 성향과는 반대로 은근히 소심한 구석도 있었다. 미신을 철석같이 믿어 행운을 기원하는 장신구와 주술품을 집안 곳곳에 두었다. 바지 주머니에는 늙은 토끼의 발과 조개껍데기, 행운의 돌 등을 넣고 다녔고 타자기에 끼워 둔 종이를 빼면 재수가 없다고 믿기도 했다.

 

 

 핑카 비히아를 덮칠 듯 자란 케이폭 나무의 뿌리가 현관 타일을 뚫고 지상으로 드러나도 자르지 않았단다. 쿠바 토착신앙인 산테리아 종교에서 케이폭 나무를 신들의 집이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당시 헤밍웨이의 부인인 메리가 그의 동의 없이 뿌리를 잘라내자, 노발대발하며 일꾼들을 내쫓고 뿌리 일부분은 그의 서재에 봉헌했다고 한다. 덩치 큰 마초의 귀여운 행실을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핑카 비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자 가치 있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었으니, 그곳을 수호하기 위한 나름의 조치였으리라. 도서관 내부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오래된 판본, 희귀본 등으로 빼곡하다.

 

 헤밍웨이는 읽고 있던 책 귀퉁이에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 관한 내용도 있고 하고 싶은 일, 지출 계획, 건강 상태 등 순간순간 생각나는 일상의 상념을 모두 적었단다. 탐방객은 그가 남긴 메모들의 면면을 자세히 볼 수 없지만, 9000여 장서의 여백에 적힌 메모를 한 사람이 연구하는 데만 12년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실로 엄청난 사료다.

 

 핑카 비히아의 외길을 따라 걸으면 아담하고 푸른 수영장에 닿는다. 풀 사이드의 벤치에 앉아 그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렸다. 헤밍웨이와 동시대를 살아간 유명인사들이 모여 즐기는 파티의 활기, 마을의 늙은 어부들을 불러 모아 그들을 소재로 쓴 소설을 낭독하던 밤의 고즈넉함. 이곳에서 피어난 모든 정취는 공기 중 고스란히 스며있다가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여행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쿠바 혁명 이후 헤밍웨이는 미국으로 추방됐다. 그가 쿠바에서 좋아하는 낚시를 마음껏 즐기며 살았더라면 엽총으로 자살해 생을 마감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 정보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이후 쿠바는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가 될 추세다. 한국에서 쿠바로 가는 직항은 없다. 캐나다, 멕시코, 일본을 경유하는 방법이 있다.

 공용어는 스페인어다. 관광지 이외에서 영어 소통은 불편한 편이므로 간단하게라도 스페인어를 알아두는 게 좋다.

 화폐는 페소를 사용한다. 쿠바에는 두 개의 화폐가 있다. 외국인 전용 화폐 쿡(CUC)과 내국인용 쿱 혹은 모네다(CUP). 하지만 외국인도 쿡을 모네다로 환전할 수 있으니 두 화폐를 다 쓸 수 있는 셈이다. 모네다를 쓰는 이유는 비싼 관광객용 물가를 벗어나 저렴한 현지 물가를 즐기기 위해서다.

 생활물가와 여행물가가 다르다.

 여행객은 외국인 전용화폐 CUC(세우세)를 사용해야 한다. 0.9CUC가 약 1USD.

 시간은 한국보다 13시간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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