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추픽추(Machu Picchu)

purple33_back.gif

 

마추픽추(Machu Picchu)

 마추픽추(Machu Picchu)는 1911년 7월 24일, 미국의 대학 교수인 하이램 빙엄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서양 학자에 의해 발견 되기 전까지 수풀에 묻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기에 마추피추를 "잃어버린 도시" 또는 "공중도시"라고 불리는데 공중도시라 불리는 이유는 산과 절벽, 밀림에 가려 밑에선 전혀 볼 수 없고 오직 공중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어서이다.

 

 마추픽추는 총면적이 5㎢으로 도시 절반가량이 경사면에 세워져 있고 유적 주위는 성벽으로 견고하게 둘러싸여 완전한 요새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또한 마추픽추는 산꼭대기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아래에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아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접근조차 어렵다.

 마추픽추에는 약 1만여 명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산정과 가파르고 좁은 경사면에 들어서 있어 스페인 정복자들의 파괴의 손길이 닿지 않은 유일한 잉카 유적이다. 정확한 건설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대략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태양의 신전, 산비탈의 계단식의 밭, 지붕없는 집, 농사를 짓는데 이용된 태양시계, 콘돌 모양의 바위, 피라미드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이 마추픽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수준 높은 건축 기술이다. 커다란 돌을 다듬는 솜씨가 상당히 정교하다. 각 변의 길이나 몇 m나 되고 모양도 제각각인 돌들을 정확하게 잘라 붙여서 성벽과 건물을 세웠다. 종이하나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히 붙어 있다. 젖은 모래에 비벼서 돌의 표면을 매끄럽게 갈았다고 한다. 가파른 산비탈에 계단식 밭을 만들고 여기에 배수시설까지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곳이 세계 7대 불가사의중에 하나가 된 이유이다.

 

 

 마추픽추(Machu Picchu)12세기 초 만코 카팍(Manco Capac)의 아들 신치 로카(Sinchi Roca)가 그의 누이동생 마마 쿠라(Mama Cura)를 왕비로 맞으면서 잉카는 신화가 아닌 역사시대로 들어선다.

 

 잉카는 로카왕의 손자 마이타 카팍(Mayta Capac) 시대에 지배 면적이 확대되었고 제9대 파차쿠티 유판키(Pachacuti Yupanqui, 1438~1471) 시대에는 인구가 1100만 명이나 되었다.

 

 16세기 초에는 안데스산맥에서 태평양 해안에 이르기까지 면적이 100만㎢에 달할 정도로 대제국이었고 황제를 정점으로 정치와 사회제도도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었다. 잉카인들은 읽고 쓰지를 못했다. 그들은 '키푸(quipu)'라는 결승문자(結繩文字)를 사용했는데 노끈의 빛깔이나 매듭으로 여러 가지 뜻을 표시했다. 그들은 동물의 힘을 빌리거나 바퀴를 사용하지 않고 도로· 계곡을 잇는 적교(吊橋)· 농업용수로· 거대한 성채를 비롯하여 궁전과 신전을 건설했다.

 

 잉카의 의학· 식물학 지식 수준은 대단했다. 잉카에는 의사계급이 있었고 국가가 고용한 약초 채집자들도 있었다. 잉카 의사들은 절단수술을 했으며 응급상황에서는 심지어 두개골에 구멍을 뚫는 수술도 감행했다. 두개골 수술은 아마 뇌가 부풀어 오르는 치명적인 증상의 처방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대 이집트인들과 마찬가지로 잉카인들은 미라 제작술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한편 잉카인들은 제국 안에서 나는 금으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그들은 구리나 놋쇠를 쓰듯이 황금을 사용했다. 태양을 숭배했던 그들은 태양신을 표현하는 데 황금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런데 잉카인들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에스파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1475~1541)가 이끄는 200여 명의 군사가 잉카제국에 들이닥쳐 잉카의 황제를 죽이고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잉카가 멸망하자마자 황금도시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황제 아마루(에스파냐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만코 2세의 아들)가 엄청난 보물을 잉카의 마지막 수도 빌카밤바(Vilcabamba)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것이다.

 

 에스파냐 군사들은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혈안이었지만 빌카밤바가 어디인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에스파냐 군사에게 사로잡힌 잉카인들도 빌카밤바가 어디인지 밝히지 않았다. 결국 빌카밤바는 소문이 꼬리를 물면서 신비만 더해갔다. 많은 사람들이 소문에 혹해 빌카밤바를 찾으러 아마존 밀림으로 들어갔고 대부분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황금의 도시를 찾기 시작한 지 200여 년이 지난 1768년 초케키라오가 빌카밤바란 소문이 퍼졌다. 초케키라오는 푸리마 항구에서 가까운 험준한 산속에 있는 유적이다. 1909년 미국 예일대학교의 하이럼 빙엄(Hiram Bingham, 1875~1956)은 빌카밤바를 찾기 위해 아푸리막강 유역의 험한 밀림 속을 탐험하다 초케키라오의 유적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낭떠러지 위에 우뚝 솟은 궁전과 방형의 제의(祭儀) 광장, 약탈자들에게 짓밟힌 신전들이 있었다.

 

 행정 책임자는 빙엄에게 "이 성채야 말로 잉카제국 최후의 비밀 수도였으며 방대한 재보가 어디엔가 잠들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빙엄도 처음에는 초케키라오가 만코 2세(에스파냐군에게 살해된 아타왈파(Atahualpa)황제의 동생)의 빌카밤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초케키라오의 지형이 빌카밤바를 묘사한 자료들과 일치하지 않았다. 초케키라오는 빌카밤바가 아니었다.

 

 빌카밤바의 발견에 실패한 빙엄은 1911년 다시 페루를 찾아 탐험을 계속했다. 토착 인디언의 안내를 받은 빙엄은 피사로를 피해 만코 2세가 탈출한 길을 더듬어 나갔고 산봉우리에 있는 폐허의 도시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인적이 전혀 없는 숲 쪽으로 길을 잡았다. 갑자기 폐허가 된 집들의 벽이 눈에 들어왔다. 잉카 최고의 석조 기술로 지은 집들이었다. 정교하게 다듬은 마름돌들이 정확하게 맞물린 벽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빙엄이 발견한 이 유적이 바로 '마추픽추(늙은 봉우리란 뜻)'이다. 마추픽추는 잉카의 수도 쿠스코에서 우르밤바강(아마존강의 원류)을 따라 북서쪽으로 114km 올라간 지점에 건설되었으며 해발 2,280m 위치에 있다.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인 상과 하, 우측과 좌측, 남성과 여성, 시간과 공간의 두 기준에 따라 절묘한 위치에 의도적으로 건설되었다. 마추픽추는 와이나픽추(Huayna Picchu)라는 원뿔 모양의 봉우리와 마주보고 있는데 와이나픽추는 잉카인들의 토템으로 신봉하는 두 동물의 형태를 갖고 있다. 와이나픽추 봉우리를 앞에서 보면 퓨마의 형상으로 보이며 좌측에 있는 세 개의 작은 봉우리는 새(콘도르)가 날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잉카인들에게 와이나픽추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신성한 산으로, 그곳에서 바라보이는 대지에 신성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잉카인들은 신성한 도시의 모든 시설들을 어떤 형상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치했다. 그것은 날개를 활짝 펴고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이다. 와이나픽추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인간들은 무질서와 방탕에 빠지기 쉬우므로 태양이 다양한 색깔의 깃털을 가진 새를 보내 영혼들을 위무해준다고 한다.

 

 마추픽추는 에스파냐에 정복된 이후 5세기 동안이나 정글 안에 파묻혀 있었음에도 건물들의 지붕을 제외하고는 거의 훼손되지 않았다. 울창한 수림과 뾰족한 봉우리들, 신성한 계곡으로 불리며 우기에는 통과할 수 없을 만큼 지형이 험한 퐁고 보에니케 골짜기가 마추픽추를 외부세계와 격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마추픽추는 태양신의 처녀들, 즉 ‘아크야’를 위해 건설한 것이라고 한다. 마추픽추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돌들은 600m 아래의 깊은 골짜기에서 채취한 것인데 운반도구도 제대로 없었던 잉카인들은 악전고투했을 게 분명하다.

 

 빙엄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래 마추픽추는 차츰 비밀이 벗겨지고 있다. 마추픽추는 제례의식의 중심지였고 약 1200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추픽추는 테라스 형태의 농업구역과 도시구역으로 나눠져 있는데 계단식 밭에서는 옥수수와 감자, '안데스의 초록빛 황금'인 코카 잎을 재배했다. 가축도 따로 길렀다.

 

 200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유적지의 대부분은 가옥이나 저장고인데 지형의 장점을 최대한 이용했고 화강암으로 건설했다. 출입문은 사다리꼴이고 지붕은 3,500m 이상의 고산지에서만 자라는 이추(Ichu)라는 짚으로 만들어 덮었다.(현재 복원된 건축물의 지붕도 이추로 덮었음) 정방형의 공동 마당을 가운데 두고 열 채씩 무리로 지어진 2층집들은 좁은 도로나 다소 돋운 골목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지의 마추픽추에서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식수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가 나오는 곳에서부터 돌을 이용하여 고랑을 만들었다. 잉카인들의 돌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공동 마당에는 커다란 맷돌, 부피가 큰 농기구, 연료로 사용하는 라마의 배설물 저장소가 있었고 '추뇨(잉카인들의 주식으로 감자 말린 것)'를 만들기 위해 태양과 서리에 번갈아 노출되도록 감자를 널었다. 말린 고기 등은 줄에 매어 집 바깥에 매달았다.

 

 종교 건축물은 주 광장 둘레에 축조했다. 정교한 부조가 새겨져 있고 반원형의 탑이 있는 태양신전,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제1신전 그리고 '왕의 묘'가 그것이다. 왕의 묘는 잉카 최고의 신에게 헌정된 숭배의 장소로 추정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잉카인들의 믿음을 표현하는 세 계단이 있는데 이는 지하(죽음)· 지상(현생)· 하늘(신)을 의미한다. 신전 근처의 왕의 궁전에는 식당과 거실 등이 있으며 마추픽추에서 유일한 화장실이 있다.

 

 마추픽추에서 눈에 띄는 것은 천문관측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건축물이다. 하나의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인티와타나(Intihuatana, 케추아어로 태양을 끌어들이는 자리)는 해시계와 유사한데 동짓날(남반구에서는 여름) 하루 동안 사제들은 여기에서 제물을 바치며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잉카인들은 태양이 두 개의 '의자'를 갖고 있다고 믿었다. 북쪽의 주의자와 남쪽의 보조의자가 그것이다. 태양이 남쪽 의자에 자리 잡을 때인 하지가 한 해의 시작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인들은 인티와타나에 이마를 대면 영혼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달의 신전은 유적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와이나픽추 중턱에 위치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해 다섯 군데의 벽감을 만들고 부조를 장식했다. 신전 안에는 거대한 바위의 가운데를 파서 만든 옥좌가 있지만 전설 속의 황금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빙엄은 제단 구역에서 많은 인골을 발견했는데 대다수가 태양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 선택된 여자들이었다. 발견된 175구의 미라 중 80%가 여자였고 나머지 20%는 사제와 아이들이었다. 빙엄은 현장에서 잉카제국을 상징하는 도자기· 금속· 섬유 등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마추픽추가 어떤 정책적인 결단(군사 전략적 측면, 실용성 미비)에 의해 포기되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 하부에서 수많은 도자기 파편을 발견했는 데 이는 희생 또는 제사의 의식 중에 도자기를 떨어뜨린 것으로 추정한다.

 

 학자들은 태양신의 후예로 숭배 받은 잉카제국의 아홉 번째 통치자인 '세상의 개혁자' 파차쿠텍(Pachacuteq)이 마추픽추를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하지만 '세 개의 창문이 있는 신전'을 근거로 만코 카팍(Manco Capac)이 세운 잉카 최초의 수도라고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만코 카팍이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마추픽추의 실체와 관련한 설은 다양하다. 마추픽추가 황금의 도시 '빌카밤바'이지만 도굴되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종교의식과 천문관측을 위한 종교의 중심지, 아마존과 잉카를 연결한 물류와 교역의 중심지, 잉카왕의 여름 별장이었다는 주장까지 있다. 아마존 상류에 살고 있던 부족과의 대치에서 전략적인 요새의 역할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마추픽추가 빌카밤바가 아니라면 만코 2세의 보물은 어딘가에 아직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페루에서는 빌카밤바를 찾으려는 탐험이 계속되고 있다.

 

 1530년대 초 잉카제국에 하얀 얼굴에 수염이 텁수룩한 에스파냐인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하얀 얼굴의 사람들이 나타나 자신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전설을 믿고 있던 잉카인들은 바로 그들이 태고 적 전설의 신들이라고 믿었고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에스파냐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200명 가량의 군사는 잉카인들을 무차별 공격했고 잉카제국을 멸망시켰다.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황금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었다. 1524년 그는 황금을 찾아 탐험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1526~1527년 두 번째 탐험에서 그는 잉카에 황금이 무진장 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파나마로 그냥 돌아갔다. 잉카의 황금이 탐났지만 아직 전투에 임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피사로가 1527년 잉카제국을 공격했다면 여지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당시 잉카제국은 제11대 왕 와이나 카팍의 통치 아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528년 파나마에서 에스파냐로 돌아온 피사로는 잉카의 황금에 대해 에스파냐 왕에게 설명한 후 잉카 정복에 필요한 후원을 요청했다. 그 요청은 받아들여져 피사로는 1532년 페루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때 잉카의 사정은 몇 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강력한 황제 와이나 카팍이 에콰도르 원정 중에 열병으로 죽은 뒤 그의 장남 와스카르가 제12대 왕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와이나 카팍과 후궁 사이에서 태어난 아타왈파가 반기를 들었고 제13대 왕이 되었다. 피사로가 잉카를 침입할 당시 아타왈파는 수도 쿠스코 입성을 앞두고 전쟁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안데스 산속의 카하마르카 온천에 머물고 있었다.

 

 피사로는 잉카제국의 군대와 전투를 벌일 경우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부하들이 훈련이 잘된 용감한 병사들이고 무기와 장비가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200여 명의 병력으로 수만의 잉카 정예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피사로에겐 한 가지 계략이 있었다. 어떻게든 아타왈파만 사로잡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잉카로 올 때 피사로는 멕시코 아스텍 왕국을 정복한 코르테스를 만났는데 코르테스가 '일단 왕을 사로잡으시오'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나라의 존재가 왕의 신권에 달려 있는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왕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피사로는 꾀를 내어 카하마르카에서 치료하고 있던 아타왈파에게 접근한 다음 아타왈파를 체포해버렸다. 왕이 포로로 잡히자 잉카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내전을 끝내고 국가를 막 재건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잉카인들은 왕을 살려준다면 7×5×3m 크기의 방 안에 피사로가 들어 올린 손 높이만큼 보물을 채워주겠다고 피사로에게 약속했고 약속을 이행했다.

 

 보물을 받은 뒤 피사로는 아타왈파를 살려주자고 했지만 부하들은 왕을 살려두면 무사히 귀환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그들은 왕을 석방하다면 잉카인들이 곧바로 공격해 올 것은 불 보듯 빤한 일이라며 절묘한 대안을 제시했다.

 

 아타왈파를 살해한 뒤 아타왈파의 동생인 만코 2세를 새 왕으로 옹립해 아타왈파와의 왕권 경쟁에서 패배한 와스카르 일족과 손잡게 하자는 것이었다. 피사로를 이용해 권력을 잡겠다는 야심으로 와스카르 일족은 피사로의 계획에 적극적이었다. 왕으로 추대될 것이라고 통보받은 만코 2세는 피사로를 황금 욕심에 눈먼 약탈자로 여겼고 에스파냐인과의 동맹은 언제든지 파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사로는 잉카인들보다 한 수 위였다. 피사로는 만코 2세가 황제가 되자마자 그를 감금한 뒤 궁전을 약탈했다. 황제들의 황금 미라를 접수했고 성소에 있던 황금 접시· 황금 용기· 황금 신상을 모두 녹여 금덩이로 만들었다.

 

 만코 2세는 자유를 찾기 위해 협상을 제의했다. 그는 피사로에게 개 당 200kg이 넘는, 황제들과 황후들의 황금 조상이 성스러운 계곡에 있는데 그 위치는 자신만이 안다고 하면서 자신과 부하 3000명을 풀어주면 그 조상들을 갖고 오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피사로가 만코 2세의 꾀에 넘어갔다. 만코 2세는 부하들을 데리고 안데스의 협곡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만코 2세는 군대를 정비해 쿠스코 탈환을 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에스파냐군의 저항은 완강했다. 이 싸움에서 패한 만코 2세는 다시 산속으로 도망갔다. 만코 2세를 추격한 에스파냐군은 만코 2세의 요새를 완전히 파괴했다. 하지만 만코 2세는 다시 도망한 후 새로운 요새이자 새로운 수도인 빌카밤바를 건설했다.

 

 만코 2세와 잉카인들은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며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1541년에는 만코 2세에게 희소식이 날아왔다. 피사로가 살해된 것이다. 피사로에 불만을 품은 반란군이 피사로를 습격해 난도질했다. 반란군 대부분은 붙잡혀 처형되었지만 일부는 만코 2세에게 피신했다. 만코 2세는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반란자들은 잉카 군사에게 에스파냐식 전술을 가르쳤고 만코 2세는 승마와 화승총 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반란군은 점차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에스파냐 왕이 아메리카대륙에 총독을 보냈는데 그가 살아남은 피사로 형제 일당과 충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잉카인의 틈에 숨어 있던 반란자들은 드디어 돌아갈 기회가 온 것 같았다. 그들은 만코 2세의 목을 갖고 간다면 피사로를 죽인 죄를 용서받고 문명의 땅 쿠스코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들은 만코 2세를 살해하고는 그의 목을 가지고 탈출했지만 쿠스코에 도착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잉카 병사들에게 쫓기다 모두 살해되었던 것이다.

 

 1544년 만코 2세가 암살된 후 그의 아들 사이리 투파크가 에스파냐와의 항쟁에 나섰다. 때마침 피사로의 동생 곤잘로 피사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에스파냐왕군에게 패배하는 일이 벌어졌다. 에스파냐는 잉카를 자신들 편으로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에스파냐 총독은 황제 사이리 투파크에게 화해를 제의했다. 투파크는 제의를 받아들였고 빌카밤바를 떠나 리마로 갔다. 에스파냐인들이 세운 페루에 잉카의 황제가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투파크는 2년 후에 갑자기 사망했고 아들 티투 쿠시가 황제를 이었으나 11년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만코 2세의 다른 아들 투파크 아마루가 잉카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1572년 페루의 총독 프란시스코 데톨레도는 아마루가 은거하고 있던 빌카밤바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불에 탄 폐허뿐이었고 잉카인들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루와 그의 마지막 추종자들은 아마존의 깊은 밀림 속으로 도망간 뒤였던 것이다. 그러나 밀고자에 의해 아마루는 사로잡혔고 쇠사슬에 목이 묶인 채 쿠스코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처형되었다. 잉카제국이 영원히 멸망한 것이다.

 

 

 마추픽추를 방문하려면 쿠스코에서 우르밤바를 거쳐 오얀타이탐보(Ollantaytambo)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오얀타이는 파차쿠텍왕 시대의 장군으로 왕의 딸과 사랑에 빠져 오얀타이탐보로 피신했다. 화가 난 파차쿠텍은 수차례에 걸쳐 오얀타이 장군을 공격했으나 번번이 격퇴되었고 결국 사랑을 인정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곳은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길목인 신성한 계곡의 입구인 동시에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였다.

 오얀타이탐보에는 군인들이 묵었던 숙소· 종교시설· 창고와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고 마추픽추와 유사한 형태이다. 기찻길 옆으로는 아마존강의 원류인 우르밤바강이 흐른다.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마추픽추로 들어가다 보면 유적지 입구에 황금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탐험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빙엄의 표지석이 있다.

 

 

 

여행 길잡이

❋ 잉카 트레일(Inka Trail)

 잉카 트레일은 잉카인들이 마추피추로 통하도록 만들어 놓은 돌길을 말한다. 여행객들에게 잉카 트레일의 한부분이 개방되어 있다. 철도 km88에서 마추피추에 이르는 33km 부분이며 마추피추 여행을 포함하여 총 3박 4일 정도가 소요된다. 일방통행으로만 갈 수 있고 입장료는 마추피추를 포함하여 US$14 정도이다. 지리산 종주하는 정도의 힘이 든다.

 잉카 트레일을 가는 방법은 투어와 스스로 가는 방법 두 가지로 나뉜다. 투어는 일인당 US$55~60으로 쿠스코의 각 여행사에서 사람을 모집한다. 보통 US$60 정도 하는데서는 침낭까지 제공한다. 왕복교통료(마추피추에서 내려오는 버스비 제외), 텐트, 메트리스, 식사, 입장료, 가이드 요금이 모두 포함되어 있어 혼자 여행하는 경우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싸게 든다. 더군다나 참가자는 침낭과 매트리스, 개인 소지품만 짊어지면 되고 텐트와 식량은 짐꾼이 다 책임지므로 육체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돌아올 때 아구아스깔리엔떼스에서 머물기를 원하면 돌아오는 기차삯을 돌려준다. 투어는 km88까지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고 봉고로 가는 경우도 있다.

 투어에 참가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모든 장비와 지도를 쿠스코에서 대야할 수 있다. 2명이라면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렇게 무리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길이 아주 명확하고 사람도 많으며(건기인 6~9월에는 차고 넘치고 우기에도 투어가 출발하는 날이면 평균 20명 이상이 잉카트레일을 걷는다) 조금만 조심하면 안전에도 문제가 없다.

 준비물은 텐트, 플라이, 비닐(텐트 바닥에 깔 것), 코펠, 버너, 식량, 간식, 물통, 침낭, 메트리스, 우비, 두꺼운 옷(밤에 추움), 손전등, 초, 바르는 모기약, 선탠로션, 구급품 등 한국에서 가을 산행을 가는 정도의 준비를 하면 된다. 남들보다 조금 빨리 걷거나 일찍 출발하여 좋은 장소에 텐트를 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 맞추피추의 굿바이 보이

 페루의 최대 구경거리라고 하는 마추피추까지는 쿠스코에서 열차로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열차에서 내리면 미니 버스가 대기하고 있고 버스에 승차해 20분 정도 올라가면 마추피추 유적지 다다른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타면 인디오 남자 아이가 나타나서 손을 흔들며 '굿바이'하고 인사한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역을 향해서 내려간다. 커브 하나를 돌았을 때 소년이 다시 나타나 버스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가 '굿바이'하고 소리지른다. 소년은 버스가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갈 때마다 커브에 나타나 '굿바이'라고 소리치면서, 마침내는 버스보다 먼저 역에 도착한다. 소년의 이야기로는 하루에 2회가 한계라고 한다. 굿바이 소년 옆에는 견습 소년이 있고, 소년처럼 '굿바이' 인사를 연습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약간의 팁을 소년에게 쥐어준다.

 

❋ 마추피추로 가는 다양한 방법들

o 일반적인 아우토바곤의 당일코스

 쿠스코는 마추피추로 가는 기점이 된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아우토바곤의 당일치기 코스 투어이다. 쿠스코에서 아우토바곤으로 오전 6시에 출발하여 마추피추 밑의 푸엔테 루이나스 역에 9시 20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마추피추에 10시 도착이다. 돌아오는 것은 푸엔테 루이나스 역에서 3시발 쿠스코행 열차를 타면 19시 30분에 쿠스코에 도착한다. 성수기에는 버스와 아우토바곤을 번갈아 타는 투어가 있다.

 올란타이탐보까지 버스를 타고 간 뒤 그곳에서 아우토바고을 타면 쿠스코까지 직행한다. 열차의 시각은 계절에 따라 변동하므로 현지에 가서 확인해야 한다. 일요일에는 여행사가 쉬므로 일요일에 도착하여 월요일에 마추피추로 가는 계획은 무리이다.

 

o 로컬 트레인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쿠스코에서 푸엔테 루이나스를 경유하여 기랴밤바까지 가는 로컬 트레인이 있다. 매일 아침 5시 20분과 오후 1시 반의 1일 2편의 차량이다. 푸엔테 루이나스 역까지는 6시간 소요되며 요금은 US$6 정도이다. 표는 전날까지 역에서 구입한다. 열차 표는 여행자에게 팔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마추피추에 장기 체재하려는 사람이나 도중의 역에서 하차하려는 사람 이외에는 여행사에서 표를 구입하는 편이 좋다.

 

o 마추피추까지 싸게 가는 방법

 그다지 권할 만하지는 않지만 돈은 없는데 시간이 있어서 어떻게 해서라도 마추피추에 가고 싶다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가장 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쿠스코에서 올란타이탐보까지 트럭으로 간 뒤 그곳에서 로컬 트레인으로 마추피추까지 가는 방법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쿠스코에서 장거리 버스로 우루밤바까지 가서(약 2시간), 그 곳에서 열차로 갈아타고 마추피추로 가는 방법이다. 버스와 열차를 갈아타는 것이 문제이지만 싸고 버스도 쾌적하다.

 

o 역에 도착하면 즉시 마추피추행 미니버스에 올라탄다

 역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미니 버스는 이전보다 한결 대수가 늘어났다. 그렇다고는 해도 첫 버스부터 마지막 버스까지 마추피추에 도착하는 시간 차이가 크다. 쿠스코에서의 당일치기 투어에서는 한가하게 버스 따위를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된다. 열차에서 내리면 재빨리 버스에 올라타는 것이 좋다.

 

 

 관광 명소

태양신전(Templo del Sol)

 능묘위에는 태양의 신전이 있는데 이곳은 완벽하게 연마해 놓은 자연석의 큰 바위 위에 세워진 반원형의 구조물이다.

 이 구조물은 안쪽과 바깥쪽으로 가볍게 굽어진 탑이다. 이 탑의 아래에는 왕의 무덤이 있으며, 신전의 벽은 잘 다듬어져 있다.

 그 안에는 2개의 창문이 있는데 각 구석에 하나씩 총 4개의 구멍이 있는데. 하나는 동쪽을 또 하나는 남동쪽을 향해 있다. 

 

 

콘도르의 신전과 감옥(Grupo del Condor)

 콘도르(Condor-신대륙의 거대한 맹금류(猛禽類))는 잉카 문명에서 부활을 상징하는 새이다. 마치 불사조처럼 세월의 흐름 속에서 부활하여 자신을 믿는 자들을 불멸의 세계로 데려간다는 콘도르 신앙이 있었다.

 마추피추에는 콘도르의 모양을 본따 만든 콘도르의 신전이 있고, 그 밑에 지하에는 감옥으로 사용하였다. 신전 앞에는 콘도르의 부리 모양을 따서 새긴 부조가 있다.

 신전 지하에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콘도르의 날개모양을 형상화하여 조각이 되어 있다.

 어둡고 눅눅한 이 지하에서 죄수들은 죄에 따라 독거미에 의해 죽기도 하고, 돌 의자를 이용해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인티와타나(Intihuatana)

 1.8m의 높이로 잘 다듬어져 있는 이 돌기둥은 마추피추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있으며, 그 생김새를 통해 후대에 추측하기로는 해시계로 알려져 있다.

 인티와타나라는 이름은 해시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큰 돌을 깍아서 만들었다. 인티와타나 신전으로 더 가까이 가면 이 능선의 돌출된 부분이 나오는데 이것이 해시계이다. 해시계라는 근거는 네모진 돌기둥의 모를 잇는 대각선을 태양이 동지에 통과한다는 것으로 정확한 근거는 없다. 네 방향으로 돌에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보고 4방을 표시하던 기구라는 추측도 있다.

 아직까지 어떠한 문서로 정확하게 용도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태양을 숭배하던 잉카 문명에서 사용하던 해시계가 가장 유력한 설로 꼽히고 있다. 이곳은 마추피추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아래로 보이는 전망이 굉장히 아름답다. 

 

 

계단식 밭(Andenes)

 계단처럼 끝없이 펼쳐졌다고 해서 붙여진 계단식 밭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엄청난 규모의 계단이 층층이 있는데 이곳은 마추피추나 잉카의 길을 연결하는 곳에 약 5천 명에서 1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층층이 농작물을 경작하고 200종 이상의 작물을 생산했다.

 

 

오두막 전망대(Viviendas de los Guardianes)

 

 

왕녀의 궁전(Aposento de la Nusta)

 

능묘(La Tumba Real)

 

 

 

스타투어(Star Tour)

☎:(02)723-6360

http://www.startour.pe.kr

블로그 : 스타투어

E-mail: startour2@naver.com